1. 생애
페카 시토인은 핀란드 바르카우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유년기부터 학업, 군 복무, 그리고 초기 직업 활동에 이르기까지의 삶은 그의 극단적인 이념 형성의 배경이 되었다.
1.1. 유년기 및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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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토인은 1944년 5월 20일 핀란드 바르카우스에서 태어났다. 그 자신은 독일군 장교와 핀란드-러시아 여성 사이에서 태어나 입양되었다고 주장했지만, 핀란드 보안경찰 보고서에 따르면 그는 재정적으로 유복한 부부인 훌데 시피아 리사넨과 올라비 발데마르 시토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발데마르 시토인은 나치 계열의 핀란드 인민 조직의 일원이었다. 페카 시토인은 어린 시절부터 나치였다고 주장했다.
그는 니이니살로에 있는 포병 여단에서 징집 복무를 마쳤고, 하사로 전역했다. 이후 투르쿠의 한 상업 학교에서 공부했다. 청년기에는 핀란드 연극 아카데미에서 수학했으며, 핀란드에서 가장 잘 알려진 투시 능력자인 아이노 카시넨Aino Kassinen핀란드어의 제자였다. 시토인은 카시넨이 자신을 사탄주의에 입문시켰다고 주장했다.
1.2. 초기 활동
시토인은 자신의 사진 및 영화 제작 회사인 시토인-필미Siitoin-Filmi핀란드어를 설립했다. 이 회사는 주로 광고 및 여행 영화를 제작했다. 이후 이 회사는 오컬트, UFO학, 정치 관련 서적을 출판하기 시작했으며, 이 중 대부분은 시토인 자신이 피터 시토인Peter Siitoin영어, 조나단 셰드Jonathan Shedd영어, 헤시오도스 포이닉스Hesiodos Foinix영어, 피터 폰 벨트하임Peter von Weltheim영어, 에드거 보크Edgar Bock영어, 카시우스 막시마누스Cassius Maximanus영어와 같은 필명으로 직접 저술했다.
2. 주요 활동 및 이념
페카 시토인의 삶은 극단적인 정치적, 사회적 활동과 오컬트 및 사탄주의 사상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그는 핀란드 내에서 신나치주의 운동의 핵심 인물로 자리매김하며, 여러 조직을 결성하고 국제적인 극우 단체들과 연계했다.
2.1. 정치 및 사회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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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토인은 청년기에 국민연합당의 청년 조직인 코코무스누오레트Kokoomusnuoret핀란드어에 가입했다가, 1970년대 초에는 핀란드 농촌당에 가입하여 시 지부의 부회장을 역임했다. 농촌당이 해체되고 핀란드 인민연합당이 결성된 후, 시토인은 애국 인민 전선(Isänmaallinen Kansanrintama, IKR핀란드어)을 창설하고 스스로를 핀란드 국가사회주의 운동의 총통으로 여겼다. 1971년에는 투르쿠 영적 과학 학회를 설립하기도 했다.
시토인은 백계 러시아인 사탄주의자 보리스 포퍼와 교류했는데, 포퍼는 시토인의 조직에 핀란드 국방군에서 도난당한 총기와 폭발물을 제공한 것으로 알려졌다. IKR은 레옹 드그렐이 회원으로 있던 CEDADE와도 서신을 주고받았다. 1977년, 시토인은 공산주의 신문인 티에도안탄타자를 인쇄하던 쿠르시비Kursiivi핀란드어 인쇄소의 방화를 선동하고, 1947년 파리 평화 조약에 의해 금지된 조직을 설립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는 5년 7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나, 실제로는 3년 6개월만 복역했다. 시토인은 이전에 동물 학대와 투르쿠 시나고그에 대한 기물 파손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아 벌금형을 선고받은 바 있다. 1977년 11월, 핀란드 내무부는 그가 설립한 4개의 조직을 신파시즘 조직이자 1947년 파리 평화 조약에 의해 금지된 조직으로 규정하여 해체시켰다. 이후 시토인은 사설 민병대를 운영하고 불법 자동 화기를 소지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1978년 여름, 시토인은 금지된 애국 인민 전선을 대체하기 위해 국민민주당(Kansallisdemokraattinen Puolue, KDP핀란드어)을 창설했다. KDP는 정당 등록부에 등록되지 않았고, 등록된 협회조차 아니었지만, 공식적인 협회처럼 기능했으며 지역 부서로 조직되어 각 지역의 지휘관들이 이끌었다.
시토인은 사탄주의와 나치즘을 혼합한 미국의 국민 부흥당의 제임스 하르퉁 마도레와도 접촉을 유지했다. 또한 노르딕 제국당의 지도자였던 닐스 만델과 협력하여 시토인을 세계 국가사회주의 연합에 소개했고, 국민민주당(KDP)은 이 연합에 가입되었다. 시토인은 미국의 KKK 그랜드 위자드 데이비드 듀크와 J. B. 스토너, 그리고 프랑스의 국민 행동 연맹과도 접촉을 유지했다. 그는 또한 살리흐 마흐디 암마시 바트당 장군에 의해 이라크 대사관 행사에 초대되기도 했는데, 암마시는 강력한 반유대주의자로 알려져 있어 이것이 초대 이유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시토인은 자신의 당 잡지를 통해 로디지아 부시 전쟁에 참전할 핀란드인들을 모집하기도 했다. KDP는 또한 베트남 난민들을 살해한 독일 내 여러 방화 공격의 책임이 있는 만프레드 뢰더의 독일 행동 그룹, 그리고 모스크와 공산주의 행사를 폭파한 노르웨이 전선의 얀 외레가르드와 같은 일부 테러 단체와도 협력했다. 시토인의 그룹은 반핀란드계 베르트 에릭손이 이끌고 소수 민족에 대한 여러 방화 공격을 자행한 플랑드르 민병대와도 협력했다.
1994년에 창설되어 배이뇌 쿠이스마가 의장을 맡았던 국민 연합 회의라는 우산 조직에 KDP가 잠시 소속되기도 했다. 다른 회원 조직으로는 아리안 게르만 형제단, 아리안 혈통 연합, 핀란드 국민 전선 등이 있었다.
1996년, 시토인은 "나치 시토인을 의회로 선출하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나안탈리 시의회 선거에 출마하여 다섯 번째로 많은 표를 얻었으나, 동트 방식에 따라 자신의 명단으로 출마했기 때문에 당선되지 못했다.
2.2. 출판 활동
페카 시토인은 자신의 사상과 이념을 담은 여러 서적을 출판했다. 그의 저작들은 주로 오컬트, 사탄주의, 그리고 극단적인 정치적 견해를 다루었다.
- 무스타 마기아 IMusta Magia I핀란드어 (검은 마법 I, 1974)
- 무스타 마기아 IIMusta Magia II핀란드어 (검은 마법 II, 1975)
- 튀외배엔루오칸 툴레바이수스Työväenluokan tulevaisuus핀란드어 (노동 계급의 미래, 1975)
- 파홀라이센 카테키스무스Paholaisen Katekismus핀란드어 (악마의 교리문답, 1977)
- 라일리넨 라이토무우스 수오메사Laillinen laittomuus Suomessa핀란드어 (핀란드의 합법적인 불법, 1979)
- 로투-오피Rotu-oppi핀란드어 (인종 교리, 1983)
- 데모크라티아 바이고 파시스미?Demokratia vaiko Fasismi?핀란드어 (민주주의인가 파시즘인가?, 1984)
3. 법적 문제 및 정부의 제재
페카 시토인은 그의 극단적인 사상과 활동으로 인해 여러 차례 법적 문제에 직면했으며, 핀란드 정부로부터 강력한 제재를 받았다.
그는 1977년 공산주의 신문을 인쇄하던 쿠르시비Kursiivi핀란드어 인쇄소에 대한 방화를 선동한 혐의와 1947년 파리 평화 조약에 의해 금지된 조직을 설립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 사건으로 그는 5년 7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나, 실제로는 3년 6개월만 복역했다. 이전에 그는 동물 학대와 투르쿠 시나고그에 대한 기물 파손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아 벌금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1977년 11월 4일, 핀란드 내무부는 시토인이 설립한 4개의 조직을 신파시즘 조직이자 1947년 파리 평화 조약에 의해 금지된 조직으로 규정하여 해체시켰다. 이후 시토인은 사설 민병대를 운영하고 불법 자동 화기를 소지한 혐의로도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러한 법적 처벌과 정부의 조직 해산 조치는 시토인의 활동이 핀란드 사회에 미친 부정적인 영향을 명확히 보여준다.
4. 사망
페카 시토인은 2003년 12월 8일 핀란드 베흐마에서 식도암으로 사망했다. 그는 나안탈리의 하카펠토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5. 평가 및 영향
페카 시토인은 핀란드 극우 운동의 상징적인 인물로, 그의 사상과 활동은 사회에 깊은 논란과 부정적인 영향을 남겼다.
5.1. 비판 및 논란
시토인은 신나치주의, 사탄주의, 그리고 오컬트 사상을 혼합한 극단적인 이념을 추구했으며, 스스로를 "핀란드 국가사회주의 운동의 총통"으로 칭했다. 그의 행동과 결정은 끊임없이 비판과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방화, 동물 학대, 시나고그 파괴 등 여러 범죄 행위로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이는 그의 폭력적이고 반사회적인 성향을 드러냈다. 또한, 그가 이끈 조직들이 1947년 파리 평화 조약에 의해 금지된 신파시즘 단체로 규정되어 해체된 것은 그의 활동이 핀란드 사회의 민주적 가치와 평화에 심각한 위협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는 국제적인 극우 및 테러 단체들과 연계하여 활동했으며, 이는 그의 사상이 단순한 개인적인 신념을 넘어 실제적인 사회적 위험을 초래했음을 시사한다.
5.2. 사회적 영향
페카 시토인은 그의 극단적인 사상과 행동으로 인해 핀란드 내에서 신파시즘의 얼굴로 각인되었다. 그의 활동은 핀란드 사회에 깊은 우려를 불러일으켰고, 극단주의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신나치주의 활동과 배이뇌 쿠이스마가 이끈 유사 단체들의 활동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지그 하일 수오미(Sieg Heil Suomi핀란드어)가 제작되기도 했다. 시토인은 그의 생애 동안 끊임없이 논란의 중심에 있었으며, 그의 죽음 이후에도 핀란드 극우 운동의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6. 관련 항목
- 신나치주의
- 사탄주의
- 핀란드의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