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페드로 펠리시아노는 푸에르토리코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야구 선수로서의 재능을 보이며 프로 경력을 시작했다.
1.1. 유년 시절 및 교육
펠리시아노는 1976년 8월 25일 푸에르토리코 리오피에드라스에서 태어났다. 그는 푸에르토리코 도라도에 위치한 호세 S. 알헤리아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2. 초기 경력 개발
그는 1995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드래프트에서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에 31라운드로 지명되었다. 펠리시아노는 1995년부터 2002년까지 7시즌 동안 마이너 리그에서 뛰며 프로 경력을 시작했다. 그는 파이오니어 리그의 그레이트 폴스 다저스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루키 리그와 싱글 A 리그에서 4년을 보낸 후, 1999년에 어깨 부상을 당해 시즌 전체를 결장했다. 2000년에 복귀하여 더블 A에서 투구했으며, 트리플 A 앨버커키 듀크스에서 1이닝을 소화했다. 2001년에는 더블 A에서 좋은 모습을 보였음에도 트리플 A에서는 고전했다. 메이저 리그로 승격되지 못한 채 마이너 리그에서 6년간의 서비스 기간을 마친 후 그는 자유 계약 선수가 되었다.
2. 프로 경력
페드로 펠리시아노는 메이저 리그와 일본 프로 야구를 오가며 다양한 팀에서 활약했으며, 특히 뉴욕 메츠에서 좌완 스페셜리스트로서 전성기를 보냈다.
2.1. 메이저 리그 데뷔 및 초기 경력
펠리시아노는 2002년 시즌을 위해 신시내티 레즈와 계약했지만, 그해 8월 숀 에스테스의 대가로 브래디 클라크와 함께 뉴욕 메츠로 트레이드되었다. 그는 2002년 9월 4일 메이저 리그에 데뷔하여 플로리다 말린스를 상대로 11대3으로 승리한 경기에서 2이닝 무실점 2탈삼진을 기록하며 인상적인 구원 등판을 펼쳤다. 2002년 시즌 종료 후 메츠는 40인 로스터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펠리시아노를 지명 할당했고, 그는 10월 11일 디트로이트 타이거즈에 의해 웨이버 공시를 통해 영입되었다. 하지만 두 달 뒤인 12월 16일 타이거즈는 펠리시아노를 방출했다. 메츠는 2003년 4월 3일 펠리시아노와 마이너 리그 계약을 다시 체결했다. 이후 2년간 그는 메츠에서 성공과 실패를 오가며 2003년과 2004년에 트리플 A 노퍽 타이즈와 메이저 리그를 오가는 옵션 조항이 여러 차례 발동되었다.
2.2. 일본 리그 활동
2005년 1월 24일, 메츠는 펠리시아노의 계약을 일본 퍼시픽 리그의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에 매각했다. 그는 2005년 시즌 전체를 호크스에서 보냈으며, 3승 2패, 3.89의 평균자책점, 37이닝 동안 36개의 탈삼진을 기록했다.
2.3. 뉴욕 메츠에서의 주요 활약 (2006-2010년)

펠리시아노는 2006년 2월 28일 메츠와 재계약하며 세 번째 메츠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스프링 트레이닝에 참여하지 못한 시간을 만회하기 위해 시즌 초 노퍽 타이즈에서 시작했지만, 4월 17일 메이저 리그로 다시 콜업되어 메츠 불펜의 고정적인 좌완 스페셜리스트가 되었다. 2007년 6월 30일 필라델피아 필리스를 상대로 첫 메이저 리그 세이브를 기록했다. 2008년과 2009년에는 메츠의 주요 상황별 좌완 투수로 불펜에서 활약했다.
펠리시아노는 2008년부터 2010년까지 3년 연속 메이저 리그에서 가장 많은 경기에 등판한 투수였다. 2008년에는 58경기에서 3아웃 미만을 기록했는데, 이는 메이저 리그에서 가장 많은 기록이었다. 또한 그는 그해 휴식일 없이 등판한 경기 수(36경기)에서도 메이저 리그 전체 1위를 차지했다. 2010년에는 92경기에 등판하여 메이저 리그 역사상 네 번째로 많은 등판 기록을 세웠다. 같은 해, 그는 메츠 소속으로 459경기에 등판하며 톰 시버의 기록을 넘어섰다. 그는 2007년부터 2010년까지 4시즌 연속으로 344번의 구원 등판을 기록했는데, 이는 메이저 리그 역사상 4시즌 연속 최다 구원 등판 기록이다. 사망 당시 펠리시아노의 메츠 프랜차이즈 통산 484경기 등판 기록은 존 프랑코의 695경기에 이어 역대 2위였다.
2.4. 뉴욕 양키스 시절 (부상 및 재활)
2011년 1월 3일, 펠리시아노는 뉴욕 양키스와 약 800.00 만 USD 규모의 2년 계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2011년 시즌 초 펠리시아노는 왼쪽 어깨 통증을 겪기 시작했고 부상자 명단에 올랐다. 4월에는 제임스 앤드류스 박사가 펠리시아노에게 6주간의 강화 훈련 프로그램을 권고했다. 양키스 구단은 펠리시아노의 부상 원인이 메츠가 지난 몇 년간 그를 너무 많이 기용한 데 있다고 주장했다. 결국 펠리시아노는 왼쪽 어깨의 관절와순 파열과 회전근개 파열 진단을 받았고, 수술이 필요하여 2011년 시즌을 마감했다.
펠리시아노는 전년도 어깨 수술에서 회복을 계속하기 위해 2012년 시즌을 60일 부상자 명단에서 시작했다. 2012년 시즌 후반인 8월과 9월 사이에 펠리시아노는 더블 A 트렌턴 썬더에서 재활 등판을 가졌다. 펠리시아노는 결국 2012년 한 해 동안 양키스에서 한 번도 등판하지 못했다. 시즌이 끝난 후 그의 계약은 만료되었고, 그는 양키스에서 단 한 구도 던지지 못한 채 팀을 떠났다.
2.5. 뉴욕 메츠 복귀 및 말년 경력
2013년 1월 21일, 펠리시아노는 뉴욕 메츠와 마이너 리그 계약을 맺고 팀에 복귀했다. 그는 2013년 8월 2일 캔자스시티 로열스와의 경기에서 시즌 첫 등판을 가졌고, 9회 초 알렉스 고든을 상대로 땅볼 아웃을 유도했다.
2014년 5월 25일, 펠리시아노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 마이너 리그 계약을 체결했다. 이듬해인 2015년 2월 4일에는 시카고 컵스와 마이너 리그 계약을 맺었다.
3. 선수로서의 특징 및 통계
페드로 펠리시아노는 주로 좌완 스페셜리스트로서 활약하며 특정 상황에서 좌타자를 상대하는 데 특화된 투수였다. 그는 2008년부터 2010년까지 3년 연속 메이저 리그에서 가장 많은 경기에 등판한 투수였으며, 특히 2007년부터 2010년까지 4시즌 연속 344번의 구원 등판을 기록하여 메이저 리그 역사상 이 부문 최고 기록을 세웠다. 뉴욕 메츠 소속으로는 통산 484경기에 등판하여 존 프랑코에 이어 프랜차이즈 역대 2위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4. 개인 생활
펠리시아노는 완다와 결혼하여 두 자녀를 두었다. 그는 2013년에 희귀 유전성 심장 질환인 좌심실 비대성 심근병증 진단을 받았으며, 그해에는 심장 모니터를 착용하고 경기에 임하기도 했다.
5. 사망
페드로 펠리시아노는 2021년 11월 8일 푸에르토리코 자택에서 4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사망은 이전에 진단받았던 심장 질환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6. 평가 및 논란
페드로 펠리시아노는 메이저 리그에서 좌완 스페셜리스트로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으며, 특히 뉴욕 메츠에서 보여준 꾸준한 등판 기록은 그의 내구성과 팀 기여도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의 선수 경력에는 메츠 시절의 과도한 등판으로 인한 논란이 존재한다. 2011년 뉴욕 양키스와 계약한 후 어깨 부상으로 시즌 아웃되자, 양키스 구단은 메츠가 지난 몇 년간 펠리시아노를 "남용"했다고 비판하며 그의 부상 원인을 메츠의 무리한 기용 탓으로 돌렸다. 이는 선수 보호와 혹사 논란에 대한 중요한 사례로 평가된다.
7. 영향
페드로 펠리시아노는 좌완 스페셜리스트라는 특정 역할을 수행하며 메이저 리그에서 성공적인 경력을 쌓았다. 그의 기록적인 등판 횟수는 불펜 투수, 특히 전문 구원 투수에게 요구되는 엄청난 신체적 부담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그의 사례는 야구계에서 투수 혹사 문제와 선수 건강 관리의 중요성에 대한 논의를 촉발하는 데 영향을 미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