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패트 패터슨은 캐나다에서 태어나 프로레슬링 경력을 위해 미국으로 이민했으며, 어린 시절부터 레슬링 훈련을 시작하며 자신의 길을 개척했다.
1.1. 출생 및 성장
패터슨은 1941년 1월 19일 캐나다 퀘벡주 몬트리올의 빌마리 자치구에서 가난한 프랑스어프랑스어를 사용하는 가정에서 피에르 클레르몽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그는 로마 가톨릭 신자로 자랐으며, 복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한때 사제가 되려는 의지를 표현했으나, 사제로부터 "너무 모험심이 강하다"는 이유로 적합하지 않을 것이라는 조언을 들었다. 14세부터 로이지르 생 장 바티스트(Loisirs Saint Jean Baptiste)에서 레슬링 훈련을 시작했다.
1.2. 이민 및 초기 경력 준비
1958년 17세의 나이로 몬트리올에서 프로레슬링에 데뷔했으며, 실비오 샘슨(Sylvio Samson) 프로모터의 팔레 데 스포츠(Palais des Sports)에서 경기를 치렀다. 경력 초반에는 "킬러" 패트 패터슨(Killer Pat Patterson)이라는 링네임으로 활동했다. 1961년, 패터슨은 영어를 전혀 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프로레슬링 경력을 추구하기 위해 미국으로 이민했다. 그는 결국 미국 시민이 되었다. 미국에 정착한 후, 그는 보스턴에 기반을 둔 토니 산토스(Tony Santos)의 빅 타임 레슬링 프로모션에서 처음 활동했다. 보스턴에서 생활하고 일하면서, 패터슨은 그의 오랜 파트너인 루이 돈데로(Louie Dondero)를 만났다.
2. 프로레슬링 경력
패트 패터슨은 캐나다 데뷔 이후 북미와 일본 등 다양한 지역에서 선수로 활동하며 수많은 챔피언십을 획득했고, 이후 WWE에서는 백스테이지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프로레슬링 산업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2.1. 데뷔 및 초기 활동 (1958-1960년대 초)
패트 패터슨은 1958년 몬트리올에서 프로레슬링에 데뷔하여 초기에는 "킬러" 패트 패터슨이라는 링네임을 사용했다. 이후 "프리티 보이" 패트 패터슨("Pretty Boy" Pat Patterson프리티 보이 패트 패터슨영어)이라는 링네임으로 활동하며 립스틱을 바르고 핑크색 트렁크를 입고 애완 푸들을 데리고 링에 등장하는 등 독특하고 여성스러운 기믹을 선보였다. 이러한 캐릭터는 그가 동성애자임을 알고 있던 퍼시픽 노스웨스트 레슬링(PNW)의 프로모터 해리 엘리엇(Harry Elliot)의 격려로 개발되었다.
2.2. 북미 주요 단체 활동
패트 패터슨은 미국 내 여러 주요 프로레슬링 단체에서 활동하며 다양한 챔피언십을 획득하고 자신만의 독특한 캐릭터를 구축했다.
2.2.1. 태평양 북서부 레슬링 (PNW)
1962년, 패터슨은 매드 독 바숑의 추천으로 돈 오웬의 포틀랜드 기반 퍼시픽 노스웨스트 레슬링에 합류했다. 1963년에는 오웬이 주최한 선수 교류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텍사스주, 애리조나주, 오클라호마주의 프로모션에서도 활동했다. 1964년에 퍼시픽 노스웨스트 레슬링으로 돌아온 그는 그해에 NWA 퍼시픽 노스웨스트 태그팀 챔피언십을 두 차례 획득했다. 1964년 10월 2일, 패터슨은 페퍼 마틴(Pepper Martin)을 꺾고 NWA 퍼시픽 노스웨스트 헤비급 챔피언십을 차지했으며, 6주간 타이틀을 유지하다가 마틴에게 다시 내주었다. 그는 1965년과 1966년에도 이 챔피언십을 다시 획득하여 총 세 차례 챔피언에 올랐다.
2.2.2. 빅 타임 레슬링 (샌프란시스코) 및 블론드 봄버즈
1965년 1월, 패터슨은 로이 샤이어의 샌프란시스코, 캘리포니아주 기반 빅 타임 레슬링에 영입되었다. 샤이어의 요청에 따라 패터슨은 레이 스티븐스와 태그팀을 결성하기 위해 머리를 금발로 염색했고, 이들은 블론드 봄버즈(The Blond Bombers더 블론드 봄버즈영어)로 불리며 큰 인기를 얻었다. 이 듀오는 1965년과 1967년에 NWA 월드 태그팀 챔피언십을 획득했다. 브렛 하트는 블론드 봄버즈를 "1970년대 최고의 태그팀으로 평가받는다"고 언급했다. 패터슨은 1969년부터 1977년까지 샌프란시스코 지역의 주요 타이틀인 US 헤비급 챔피언십을 총 6회 획득하며 페드로 모랄레스, 록키 존슨, 그레이트 메피스토, 문독 로니 메인, 더 브루트, 안젤로 모스카, 알렉스 스미르노프 등을 꺾고 이 지역의 최고 스타로 자리매김했다.

1968년, 패터슨은 아마릴로, 텍사스주의 NWA 웨스턴 스테이츠 레슬링에서 로드 패트릭 패터슨(Lord Patrick Patterson)으로 활동하며 NWA 북미 헤비급 챔피언십과 NWA 브래스 너클스 챔피언십을 획득했다. 스티븐스가 선역으로 전환한 1960년대 후반에는 악역인 패터슨과 대립했으며, 이 대립은 텍사스 데스 매치로 절정에 달했고 스티븐스가 패터슨으로부터 타이틀을 획득했다. 1970년과 1971년에는 경기 중 마스크를 착용하고 마스크 아래에 이물질을 넣어 박치기의 위력을 높이는 방식으로 반칙을 사용했다. 1972년에는 닥터 켄 레이미(Dr. Ken Ramey)가 매니지먼트하는 라르스 앤더슨과 대립하며 다시 선역으로 전환했다. 그해 후반에는 록키 존슨과 팀을 이뤄 태그팀 챔피언십을 획득했다. 1975년과 1981년에는 샌프란시스코의 카우 팰리스에서 열린 배틀 로열에서 우승했다.
2.2.3. 챔피언십 레슬링 플로리다 (CWF)
1977년, 패터슨은 에디 그레이엄의 탬파, 플로리다주 기반 챔피언십 레슬링 플로리다 프로모션에서 활동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NWA 플로리다 텔레비전 챔피언십과 NWA 플로리다 태그팀 챔피언십을 이반 콜로프와 함께 획득했으며, 잠시 동안 부커로도 활동했다.

2.2.4. 아메리칸 레슬링 협회 (AWA)
1978년, 패터슨은 번 가니에의 미니애폴리스, 미네소타주 기반 아메리칸 레슬링 협회에 합류했다. 그는 레이 스티븐스와 함께 블론드 봄버즈를 재결성했고, 그해 후반에 AWA 월드 태그팀 챔피언십을 획득했다. 이들은 마이티 이고르 & 루퍼스 존스, 폴 엘러링 & 스티브 올소노스키, 번 가니에 & 빌 로빈슨, 그리고 전 챔피언 팀인 하이 플라이어즈(그렉 가니에 & 짐 브랜젤) 등을 상대로 타이틀을 방어했다. 1979년 6월 6일, 이들은 번 가니에 & 매드 독 바숑에게 패배하여 타이틀을 잃었다. 패터슨은 1983년까지 AWA에서 간헐적으로 활동했다.
2.3. 국제 경력
패트 패터슨은 북미 외 지역에서도 활발히 활동하며 특히 일본 프로레슬링 단체들과 깊은 교류를 가졌다.
2.3.1. 신일본 프로레슬링 (NJPW)
패터슨은 1968년 4월 일본 프로레슬링의 제10회 월드 리그전에 처음으로 참가하며 일본에 방문했다. 이 대회에서 그는 자이언트 바바, 안토니오 이노키, 오키 긴타로, 요시무라 미치아키에게 패했지만, 야마모토 고테쓰, 호시노 간타로, 히라이 미쓰, 듀크 케오무카에게는 승리를 거두었다. 5월 7일 구마모토 대회에서는 제스 오르테가의 파트너로 아시아 태그팀 챔피언십에 도전했으나 오키 & 요시무라에게 패했다. 1973년 12월에는 조니 파워스와 함께 NWA 북미 태그팀 챔피언으로서 신일본 프로레슬링에 방문하여 12월 7일 오사카 부립 체육관에서 이노키 & 사카구치 세이지를 상대로 타이틀 방어전을 치렀다.
이후에도 신일본 프로레슬링에 여러 차례 참전했다. 1976년 재방문 시에는 12월 8일 요코하마 문화 체육관에서 래리 헤닝과 팀을 이뤄 사카구치 & 스트롱 고바야시의 북미 태그팀 챔피언십에 도전했다. 1977년 세 번째 참전 시에는 12월 1일 오사카 부립 체육관에서 이노키의 NWF 헤비급 챔피언십에 도전했으며, 12월 8일에는 구라마에 국기관에서 스티브 라이트를 파트너로 사카구치 & 고바야시의 북미 태그팀 챔피언십에 재도전했다.
WWF에 정착한 후에도 1979년 11월 북미 헤비급 챔피언으로서 일본에 방문하여 11월 8일 오타루시 종합 체육관에서 사카구치의 도전을 받아 타이틀을 내주었다. 이 타이틀은 이후 신일본 프로레슬링의 관리하에 놓였고, 1981년 IWGP 창설과 함께 봉인되었다. 1981년 11월에는 제2회 MSG 태그 리그전에 배드 뉴스 앨런과 팀을 이뤄 참가하여 우승 후보 팀인 스탠 핸슨 & 딕 머독과 무승부를 기록하는 등 좋은 성적을 보였으나, 리그전을 다 소화하지 못하고 중도 귀국했다. 이것이 선수로서의 마지막 일본 방문이었다. 2002년 3월 1일, WWF의 첫 단독 일본 흥행인 '스맥다운 투어 재팬'에 로드 에이전트로서 동행하며 20년 만에 다시 일본을 찾았다.
2.4. 월드 레슬링 연맹 / WWE
패트 패터슨은 WWE(구 WWF)에서 선수로서의 경력을 넘어 백스테이지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WWE의 성장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2.4.1. WWE 입문 및 초기 챔피언십
패터슨은 1979년 월드 레슬링 연맹 (WWF)에 악역으로 데뷔했으며, 매니저 그랜드 위자드의 지도를 받았다. 악역으로서 패터슨의 주요 대립 상대는 당시 WWF 북미 헤비급 챔피언 테드 디비아시와 WWF 헤비급 챔피언 밥 백런드였다.
2.4.2. 백스테이지 기여 및 창의적 활동
패터슨은 선수 은퇴 후 WWE 내부에서 로드 에이전트, 부커, 프로듀서, 크리에이티브 컨설턴트 등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WWE의 창의적인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2.4.3. 후기 활동 및 특별 출연
2019년 7월 22일 Raw 리유니언 에피소드에서 패터슨은 백스테이지에서 드레이크 매버릭을 핀하여 WWE 24/7 챔피언십을 획득했다. 그는 그날 밤 나중에 오프스크린에서 제럴드 브리스코에게 타이틀을 잃었다. 78세의 나이로 그는 더 패뷸러스 물라가 76세에 원조 WWF 위민스 챔피언십을 네 번째로 획득한 기록을 깨고 WWE 역사상 최연장자 챔피언이 되었다. 이는 또한 2000년 6월 19일 WWF 하드코어 챔피언십 획득 이후 패터슨의 첫 타이틀 획득이었으며, 이 역시 "24/7 룰"을 사용했다. 그는 알 트루스에 이어 24/7 챔피언십과 하드코어 챔피언십을 모두 획득한 두 번째 인물이 되었다. 그는 2005년부터 2020년 사망할 때까지 WWE의 백스테이지 관계자로 일했다.
2.5. 주요 기술
- 아토믹 드롭
- 피겨 포 레그락
- 슬리퍼 홀드
- 다이빙 니 드롭
3. 개인사
패트 패터슨은 프로레슬링계에서 공개적으로 동성애자임을 밝힌 선구자적인 인물로서, 그의 삶은 사회적 의미를 지니며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3.1. 동성애자로서의 삶과 사회적 의미
패터슨은 공개적으로 동성애자였으며, 1970년대 초에 커밍아웃했다. 이는 2014년 6월 12일 방영된 WWE 레전드 하우스의 마지막 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되기 전까지는 대중적으로나 WWE 스토리라인에서 언급되지 않았다. 그러나 1999년 5월 10일 Raw 에피소드에서 해설자 짐 로스는 상의를 탈의한 패터슨이 승리를 축하하는 모습에 대해 "그리고 그는 미혼입니다, 여러분"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NBC 뉴스는 패터슨을 "최초의 공개적인 게이 프로레슬링 스타"라고 묘사했으며, 피플지는 그를 "최초의 게이 레슬링 스타"라고 불렀다.
3.2. 파트너십 및 개인적 관계
패터슨의 오랜 파트너는 루이 돈데로(Louie Dondero)였다. 패터슨은 WWE 레전드 하우스에서 자신과 돈데로가 40년 동안 함께했다고 말했다. 돈데로는 1998년 6월 28일 킹 오브 더 링이 열리던 같은 날 밤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3.3. 법적 조사 및 추방 위협
1960년대, 라벤더 스케어의 주요 부분이 끝난 후, 법무부의 이민귀화국 (INS)은 1964년 말부터 수년간 패터슨을 캐나다로 추방하기 위해 "동성애 활동"에 대한 증거를 찾았다. 정보공개법 요청으로 공개된 문서에 따르면, 포틀랜드 경찰국의 풍속반은 포틀랜드 게이 커뮤니티에 대한 조사 과정에서 패터슨이 도시 내 '게이' 파티와 게이 바에 참석했으며, 포틀랜드에서 남성 성매매 종사자를 데려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보고했다. 이 문서들은 또한 루이 돈데로가 패터슨의 연인이자 에이전트였으며, 그들이 개방 관계였다는 인터뷰 대상자들의 의심을 묘사하고 있다. 같은 문서에는 미국 공군 특별수사국이 또 다른 레슬러가 동성애자라는 의심으로 제대를 목적으로 조사하고 있었으며, 이 레슬러가 나중에 패터슨을 INS에 고발했다가 철회했다는 내용도 담겨 있다.
1966년 11월, INS는 패터슨에 대한 추방 절차를 시작했고, 이로 인해 그는 심문을 받았다. 심문에서 그는 자신의 여성스러운 행동, 염색한 머리, 동성애자인지 여부, 그리고 "어린 소년들을 성추행했는지"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1966년 12월, 패터슨은 추방 통보를 받았으며, 1월 10일 이전에 미국을 떠나야 했다. 이는 패터슨을 쉽게 영주권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속여 출국하게 한 후 심리 검사를 통해 입국을 거부하려는 시도였을 수 있다. 그러나 패터슨은 4일 후 애리조나에서 다시 경기를 치렀다. 1971년 패터슨의 영주권 신청 이후, 정보공개 요청에 대한 기자의 자료에는 2002년 그가 성공적으로 귀화하기 전까지 더 이상의 정보는 없었다.
3.4. 건강 및 말년
2006년 8월, 패터슨은 관상동맥의 낭종을 제거하기 위한 응급 심장 수술을 받았다. 10월에는 수술에서 회복하여 병원에서 퇴원했다. 그는 2008년에 자신의 이름을 법적으로 패트 패터슨으로 변경했다. 사망 전에는 암을 앓고 있었다.
4. 사망
패트 패터슨은 2020년 12월 2일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의 한 병원에서 혈전으로 인한 간부전으로 사망했다. 향년 79세였다. 그가 사망하자 레슬링계의 많은 인사들이 선수로서, 그리고 비하인드 스토리의 인물로서 패터슨에게 애도를 표했다.
5. 유산 및 영향력
패트 패터슨은 프로레슬링 산업에 혁신적인 기여를 했으며, 특히 로열 럼블 경기 창안과 동성애자로서의 선구자적인 역할로 역사적으로 매우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5.1. 프로레슬링계의 혁신가
패터슨은 로열 럼블 경기 창안자로 프로레슬링 산업에 혁신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는 WWE가 글로벌 현상으로 성장하는 데 필수적인 역할을 한 "주요 설계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애티튜드 시대에는 주요 프로듀서 중 한 명으로서 스토리텔링에 기여하며 WWE의 성공에 크게 일조했다.
5.2. 역사적 평가 및 영향
패터슨은 프로레슬링계 최초의 공개적인 동성애자 스타로서 "진정한 선구자"로 불리며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빈스 맥마흔의 오른팔이자 WWE의 핵심 인사로서 높은 신뢰를 얻었는데, 이는 그의 뛰어난 인품 덕분이었다. 안토니오 이노키가 미국에서 수련하던 시절, 언어 문제로 어려움을 겪던 이노키에게 패터슨은 친절하게 도움을 주었고, 이는 패터슨 자신도 업계 초기에 영어를 잘하지 못했기에 이노키의 상황을 잘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이노키는 패터슨에게 깊은 은혜를 느껴 여러 차례 신일본 프로레슬링에 초청했으며, NWF 헤비급 챔피언십 도전자로도 기용했다. 2010년 3월, 이노키가 WWE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기 위해 미국을 방문했을 때 두 사람은 오랜만에 재회하여 우정을 다졌다. 패터슨은 또한 뛰어난 가창력을 지닌 인물로, 2009년에는 CD를 발매하기도 했으며, WWE 프로그램에서 루이 암스트롱의 '이 멋진 세상'을 부르기도 했다.
6. 수상 경력 및 업적

단체 | 챔피언십 / 수상 | 횟수 | 비고 |
---|---|---|---|
아메리칸 레슬링 협회 | AWA 월드 태그팀 챔피언십 | 1회 | 레이 스티븐스와 함께 |
빅 타임 레슬링 (샌프란시스코) | NWA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헤비급 챔피언십 (샌프란시스코 버전) | 5회 | |
NWA 월드 태그팀 챔피언십 (샌프란시스코 버전) | 11회 | 레이 스티븐스(2), 수퍼스타 빌리 그레이엄(1), 페드로 모랄레스(1), 페퍼 고메즈(1), 피터 마이비아(1), 문독 메인(1), 록키 존슨(3), 토니 가레아(1)와 함께 | |
콜리플라워 앨리 클럽 | 아트 에이브럼스 평생 공로상 | 2008년 | |
기타 헌액자 | 1995년 | ||
챔피언십 레슬링 플로리다 | NWA 플로리다 태그팀 챔피언십 | 1회 | 이반 콜로프와 함께 |
NWA 플로리다 텔레비전 챔피언십 | 1회 | ||
루트 인터내셔널 | 캐나디안 인터내셔널 태그팀 챔피언십 | 5회 | 레이몬드 루조(2), 피에르 르페브르(3)와 함께 |
신일본 프로레슬링 | NWA 북미 태그팀 챔피언십 (로스앤젤레스/일본 버전) | 1회 | 조니 파워스와 함께 |
NWA 할리우드 레슬링 | NWA 아메리카스 헤비급 챔피언십 | 1회 | |
NWA 웨스턴 스테이츠 스포츠 | NWA 브래스 너클스 챔피언십 (아마릴로 버전) | 1회 | |
NWA 북미 헤비급 챔피언십 (아마릴로 버전) | 1회 | ||
퍼시픽 노스웨스트 레슬링 | NWA 퍼시픽 노스웨스트 헤비급 챔피언십 | 3회 | |
NWA 퍼시픽 노스웨스트 태그팀 챔피언십 | 2회 | 토니 본(1), 더 행맨(1)과 함께 | |
프로레슬링 일러스트레이티드 | PWI 스탠리 웨스턴 상 | 2004년 | |
PWI 500위 중 110위 | 2003년 | PWI 연도별 500대 싱글 레슬러 | |
프로레슬링 명예의 전당 | 2006년 헌액 | 블론드 봄버즈의 멤버로 | |
월드 챔피언십 레슬링 (오스트레일리아) | IWA 월드 태그팀 챔피언십 | 1회 | 아트 넬슨과 함께 |
월드 레슬링 연맹 / WWE | WWE 24/7 챔피언십 | 1회 | |
WWF 하드코어 챔피언십 | 1회 | ||
WWF 북미 헤비급 챔피언십 | 1회 | ||
WWF 인터컨티넨탈 헤비급 챔피언십 | 1회 | 초대 챔피언 | |
WWF 명예의 전당 | 1996년 헌액 | ||
레슬링 옵저버 뉴스레터 | 올해의 경기 | 1981년 | 1981년 4월 21일 서전트 슬로터와의 골목 싸움(Alley Fight) |
올해의 최악의 경기 | 2000년 | 2000년 6월 25일 킹 오브 더 링 2000에서 제럴드 브리스코와의 경기 | |
레슬링 옵저버 뉴스레터 명예의 전당 | 1996년 헌액 |
7. 저서
- Accepted: How the First Gay Superstar Changed WWE (2016년 8월 9일)
8. 관련 항목
- 블론드 봄버즈
- 더 코퍼레이션
- 레이 스티븐스
- 빈스 맥마흔 시니어
- 블랙잭 랜자
- 제럴드 브리스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