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Playing career
토미 도허티는 1928년 4월 24일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동쪽 셰틀스턴 로드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 셰틀스턴 주니어 축구 클럽에 가입하며 축구 경력을 시작했다. 그의 선수 경력에서 전환점은 1946년에 찾아왔는데, 당시 그는 하일랜드 경보병대에서 국민병역을 수행하기 위해 소집되었다. 도허티는 국민병역 기간 동안 영국 육군 축구 협회 대표로 축구 경기를 뛰기도 했다. 전역 후인 1947년, 그는 셀틱과 계약을 체결했다. 도허티는 훗날 셀틱의 코치였던 지미 호건이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미드필더로서 다양한 클럽과 스코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활약하며 인상적인 선수 경력을 쌓았다. 그의 키는 172 cm였다.
1.1. Club career
도허티는 1947년 셀틱에서 프로 경력을 시작하여 1949년까지 활동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9경기에 출전하여 3골을 기록했으며, 1949년 글래스고 컵 우승을 경험했다. 1949년 11월, 셀틱에서 2년여를 보낸 후 그는 잉글랜드로 건너가 프레스턴 노스 엔드에 합류했다.
프레스턴 노스 엔드에서 도허티는 1949년부터 1958년까지 9년간 활약하며 클럽의 핵심 선수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총 323경기에 출전하여 5골을 기록했으며, 클럽에서 거의 300회 가까이 출전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1950-51 시즌 2부 리그 우승을 차지하여 팀을 1부 리그로 승격시켰고, 1954년 FA컵 결승에 진출하기도 했다.
1958년 8월, 도허티는 약 2.80 만 GBP (2024년 4월 기준 약 54.90 만 GBP 상당)의 이적료로 아스널에 합류하며 딥데일을 떠났다. 아스널에서 그는 1961년까지 83경기에 출전하여 1골을 기록했다. 이후 그는 첼시로 이적하여 1961년부터 1962년까지 4경기에 출전했고, 1962년에 선수 경력을 마감했다. 특이하게도 그는 1965년에 시드니 FC 프라하에서 1경기에 출전하기도 했다.
1.2. International career
프레스턴 노스 엔드에서 뛰던 시절, 도허티는 스코틀랜드 국가대표팀에 처음 발탁되어 총 25번의 국가대표팀 출전 기록을 세웠다. 그의 유일한 국가대표팀 골은 1955년 잉글랜드와의 경기에서 2-7로 패배할 때 기록되었다. 그는 1954년과 1958년 FIFA 월드컵 본선에 참가한 스코틀랜드 대표팀의 일원이었다. 또한, 1957년부터 1958년까지 스코틀랜드 B 국가대표팀에서도 2경기에 출전하여 활약했다.
2. Managerial career
선수 생활 은퇴 후, 토미 도허티는 1961년부터 1988년까지 다양한 클럽과 국가대표팀을 이끌며 긴 감독 경력을 이어갔다. 그의 감독 철학은 선수단의 개혁과 역동적인 공격 축구로 특징지어졌다.
2.1. Chelsea (1961-1967)
1961년 2월, 도허티는 첼시의 선수 겸 코치직을 제안받았다. 12개월도 채 되지 않아 테드 드레이크 감독이 떠나고 클럽이 강등 위기에 처하자, 도허티는 감독직을 인계받았다. 그는 팀을 1부 리그에 잔류시키지 못하고 1961-62 시즌 말에 강등되었다.
감독 첫 해에 그는 많은 고참 선수들을 매각하고 테리 베너블스, 바비 탬블링, 피터 보네티, 배리 브리지스와 같은 신예 선수들을 대거 영입했다. 또한 홈 경기 유니폼의 색상을 흰색 반바지에서 파란색 반바지로 변경했는데, 이는 2022년 현재까지도 유지되는 조합이다. "도허티의 다이아몬드"라는 별명을 얻은 이 젊은 팀은 첫 시도만에 1부 리그로 승격하는 데 성공했으며, 다음 해에는 리그 5위로 시즌을 마쳤다. 1964-65 시즌, 첼시는 레스터 시티를 합계 점수로 꺾고 리그 컵에서 우승을 차지했지만, FA컵 준결승에서는 최종 우승팀 리버풀에게 0-2로 패했다. 이 시즌에 클럽은 리그 3위를 기록하며 1954-55 시즌 첫 리그 우승 이후 최고 성적을 거두었다.
도허티는 1966년 FA컵과 인터시티스 페어스컵 준결승으로 첼시를 이끌었고, 1967년에는 FA컵 결승에 진출했으나 토트넘 홋스퍼에게 패했다. 그는 1967년 10월 감독직에서 사임했다. 도허티가 구축한 팀의 핵심 선수들인 피터 오스굿, 찰리 쿡, 론 해리스, 보네티, 존 홀린스는 도허티의 후임인 데이브 섹스턴 감독 아래에서 FA컵과 UEFA 컵 위너스컵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10년 후 섹스턴은 도허티의 뒤를 이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감독이 되었다.
2.2. Interim and early club management (1967-1972)
첼시를 떠난 지 한 달 뒤, 도허티는 로더럼 유나이티드의 감독이 되었다. 그는 로더럼 유나이티드에서 보낸 1년여의 시간에 대해 "나는 로더럼을 2부 리그에서 꺼내주겠다고 약속했고, 실제로 3부 리그로 강등시켰다. 구단주가 '독, 당신은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군요!'라고 말했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이후 그는 퀸스 파크 레인저스의 감독으로 부임했으나, 이적 정책을 두고 구단주와 논쟁을 벌인 끝에 불과 29일 만에 팀을 떠났다. 1968년 12월, 도허티는 애스턴 빌라의 더그 엘리스 회장이 선임한 첫 감독이 되었고, 13개월간 재임했다. 1970년 1월 19일, 애스턴 빌라가 2부 리그 최하위에 머물자 도허티는 경질되었다.
그 후 그는 포르투로 옮겨 16개월 동안 감독직을 수행했으며, 벤피카와 스포르팅 CP를 제치지 못한 채 1971년 5월 사임했다. 1971년 7월 2일, 그는 헐 시티의 테리 닐 감독의 수석 코치로 임명되었으나, 9월 12일 스코틀랜드 국가대표팀의 임시 감독직을 맡기 위해 헐 시티를 떠났고, 그해 11월 정식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2.3. Scotland national team (1971-1972)
1971년 11월 스코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의 정식 감독이 된 도허티는 팀을 이끌고 1974년 월드컵 본선 진출을 위한 도전에 나섰다. 그는 예선 8조에서 덴마크와의 두 경기를 모두 승리하며 순조롭게 FIFA 월드컵 진출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도허티는 총 12번의 스코틀랜드 국가대표팀 경기를 지휘했으며, 마지막 경기는 1972년 11월 덴마크를 상대로 2-0으로 승리한 홈 경기였다. 그는 한 달 뒤인 1972년 12월 감독직을 떠났고, 그의 후임인 윌리 오몬드 감독은 1973년 9월 체코슬로바키아와의 홈 경기에서 승리하며 스코틀랜드의 FIFA 월드컵 본선 진출을 확정지었다.
2.4. Manchester United (1972-1977)
1972년 12월, 도허티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크리스탈 팰리스에게 0-5로 패배하는 경기를 관전한 뒤, 경기 후 셀허스트 파크 이사회실에서 맷 버스비로부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감독직을 제안받았다. 올드 트래퍼드에서 치러진 그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감독 데뷔전은 리즈 유나이티드와의 경기로 1-1 무승부로 끝났다. 비록 그가 팀을 맡았을 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노쇠화된 선수단으로 인해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었지만, 그는 1972-73 시즌에 팀을 1부 리그에 잔류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1973-74 시즌에도 유나이티드는 부진을 면치 못했고, 결국 2부 리그로 강등되었다.
다음 시즌, 유나이티드는 2부 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1부 리그로 복귀했다. 1975-76 시즌에는 1부 리그 3위를 기록했으며, 1976 FA컵 결승에 진출했으나 당시 2부 리그에 있던 사우샘프턴에게 0-1로 패하며 준우승에 머물렀다. 도허티는 1977년 FA컵 결승에서 다시 한번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이끌었고, 이번에는 언더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리그 챔피언 리버풀을 2-1로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도허티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물리치료사의 아내인 메리 브라운과 혼외정사를 벌이고 있다는 소식이 공개되었다. 그는 1977년 7월 엄청난 세간의 이목을 끌며 해고되었고, 올드 트래퍼드의 후임으로는 첼시에서 그의 뒤를 이었던 데이브 섹스턴이 다시 부임했다. 이 스캔들은 1949년 12월부터 그의 아내였던 아그네스와의 결혼 생활을 끝내게 만들었다. 도허티는 1988년에 메리 브라운과 결혼했고, 이 부부는 도허티가 2020년에 사망할 때까지 함께했다. 해고 이후 도허티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구단과의 관계는 소원해졌다.
2.5. Later managerial career (1977-1988)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해고된 후 도허티는 1977년 9월 더비 카운티 감독으로 부임하여 두 시즌을 보낸 뒤 1979년 5월 사임했다. 그의 다음 부임지는 1979년 5월 퀸스 파크 레인저스였다. 그가 로프터스 로드에 부임했을 당시 레인저스는 (리그 우승에 거의 근접했던 3년 전과 달리) 2부 리그로 강등된 상태였고, 그는 새로운 시즌을 시작하기 위해 팀의 사기를 끌어올려야 했다. QPR은 1부 리그 승격에 4점 뒤진 채 시즌을 마쳤다. 1980년 5월, 도허티는 구단주 짐 그레고리에 의해 해고되었으나 불과 9일 만에 복직되었다. 그러나 1980년 10월, 그는 5개월 만에 두 번째로 해고되었다.
이후 1981년 호주의 시드니 올림픽에서 짧은 감독 생활을 했다. 같은 해 7월, 그는 선수 시절 9년을 보냈던 프레스턴 노스 엔드의 감독으로 잉글랜드에 복귀했다. 하지만 그는 몇 달 후에 팀을 떠나 이듬해까지 호주의 사우스 멜버른 감독을 맡았다. 또한 1983년에는 다시 시드니 올림픽을 지휘하기도 했다.
2.5.1. Wolverhampton Wanderers (1984-1985)
도허티는 1984년 1부 리그에서 강등된 직후 울버햄프턴 원더러스 감독으로 잉글랜드에 다시 돌아왔다. 하지만 그는 울버햄프턴이 2년 연속 강등을 겪은 지 1년여 만에 해고되었고, 울버햄프턴은 도허티가 떠난 다음 시즌에 세 번째 연속 강등을 겪게 되었다.
도허티의 울버햄프턴 재임 기간은 매우 힘든 시기였다. 이 클럽은 한때 1950년대에 잉글랜드 챔피언십에서 세 차례 우승했고, 1954년 몰리뉴 스타디움에서 혼베드를 상대로 야간 경기를 개최하여 유럽 클럽 축구의 길을 개척하기도 했다. 또한 1972년 UEFA컵 결승 진출과 1980년 리그컵 우승팀이기도 했다.
도허티가 맡은 울버햄프턴은 한때 역사적인 클럽이었던 과거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1978년 구단주가 몰리뉴 스트리트 스탠드 재건축으로 인해 클럽을 파산시켰고, 1982년에는 클럽이 문을 닫기 직전의 상황에서 클럽의 전설 데릭 두건의 도움으로 사우디아라비아 사업가 바티 형제에게 인수되면서 구제 금융이 도입되었다. 바티 형제는 부동산 개발업자였으며 경기장 주변 부지 개발을 원했지만 시의회가 허가를 내주지 않자 몰리뉴 스타디움 옆에 슈퍼마켓을 건설하려 했다. 구단과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클럽은 형제들로부터 아무런 투자나 관여를 받지 못했다.
전 시즌 1부 리그에서 강등된 후, 멜 이브스와 웨인 클라크 같은 핵심 공격수들과 토니 타우너, 그리고 구단 최다 출전 2위 기록 보유자였던 케니 히빗 등 여러 핵심 선수들이 팀을 떠났다. 히빗은 울버햄프턴을 떠날 당시의 심경에 대해 "토미 도허티 감독이 왔지만, 저는 클럽이 이런 비참한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클럽은 제대로 운영되지 않았고, 거의 무릎을 꿇고 있었습니다"라고 언급했다.
도허티는 시즌을 앞두고 주전 골키퍼 존 버리지와의 문제도 겪었다. 버리지는 구단에 여러 요구를 했지만, 도허티는 이를 수용하는 대신 17세 유소년 아카데미 선수인 팀 플라워스를 주전 골키퍼로 승격시켰다. 플라워스는 그 시즌 내내 주전으로 뛰었고, 버리지는 팀을 떠났다.
1984-85 시즌은 셰필드 유나이티드와의 홈 개막전에서 14,908명의 팬 앞에서 시작되었다. 시즌 초반의 좋은 출발에도 불구하고, 이후 팀의 성적은 서서히 무너졌고 11월이 되자 팀은 리그 테이블 13위에서 15위를 오가는 상황에 처했다. 울버햄프턴은 계속해서 부진했지만, 도허티는 클럽에서 394경기를 뛰었던 베테랑 수비수 제프 팔머가 번리로 이적하는 것을 허용했다. 팔머는 매우 경험 많은 수비수였고, 그의 이탈로 인해 팀은 지난 시즌보다 훨씬 경험이 부족한 팀이 되었다. 팔머는 자신이 도허티 감독의 신임을 잃었기 때문에 팀을 떠났다고 믿었으며, "당시 클럽은 좋은 곳이 아니었고, 제대로 운영되지 않았으며, 거의 바닥을 치고 있었다"고 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울버햄프턴은 모든 대회를 통틀어 21경기 연속 무승을 기록했다 (그 중 19경기는 2부 리그 경기). 1985년 1월에는 압박이 가중되었고, 한때 팬들의 사랑을 받았던 현 구단주 데릭 두건은 결국 이사직에서 사임했다.
이 시즌에는 팀이 5-1로 세 차례나 대패하는 경기가 나왔다. 두 경기는 ITV에서 생중계되었고, 나머지 한 경기는 브라이턴 앤 호브 앨비언 원정 경기에서 팀이 공식적으로 강등된 날에 발생했다. 도허티의 몰리뉴에서의 마지막 홈 경기는 허더즈필드 타운과의 경기로, 울버햄프턴은 4,422명의 팬 앞에서 시즌 8번째 승리를 거두었다. 울버햄프턴은 시즌을 최하위로 마쳤고, 도허티는 1985년 7월 클럽을 떠났다.
울버햄프턴 시절에 대해 도허티는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유명한 클럽이 저에게 찾아왔을 때 '아니요'라고 말하기는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사실상 희망 없는 임무였습니다. 돈도 없었고, 데릭 두건과 함께 일할 수 있을지도 확신할 수 없었지만 어쨌든 도전을 받아들였습니다. 바티 형제에 관해서는, 그들을 두 번밖에 만나지 못했습니다. 한 번은 저를 고용했을 때, 다른 한 번은 저를 해고했을 때였습니다."
2.6. Final managerial role (1987-1988)
도허티는 알트링엄에서 마지막 감독직을 수행했다. 그는 1987-88 시즌을 끝으로 감독직에서 은퇴했다.
3. Personal life
도허티는 프레스턴 노스 엔드와 계약하기 위해 고향 스코틀랜드를 떠난 후인 1949년 12월에 첫 번째 아내인 아그네스와 결혼했다. 그들은 도허티가 1977년 메리 브라운과의 외도를 발표하기 전까지 27년간 결혼 생활을 유지했다. 도허티와 아그네스 사이에는 믹 (그 또한 전직 축구 선수이자 축구 감독이었다), 토머스 주니어, 캐서린, 피터 등 네 명의 자녀가 있었다.
메리 브라운과 결혼한 후, 그는 1980년대에 태어난 두 딸 그레이스와 루시를 두었다. 아그네스는 2002년 9월 7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008년, 토머스 도허티 주니어는 어머니의 집을 정리하다가 발견한 회고록과 신문 스크랩을 바탕으로 한 두 부분으로 나뉜 남자와 결혼하다(Married to a Man of Two Halves두 부분으로 나뉜 남자와 결혼하다영어)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했다.
4. Statistics
토미 도허티의 선수 및 감독 경력에 대한 통계 자료는 다음과 같다.
4.1. Player statistics
클럽 | 시즌 | 리그 | FA컵 | 기타 | 총계 | ||||
---|---|---|---|---|---|---|---|---|---|
출전 | 득점 | 출전 | 득점 | 출전 | 득점 | 출전 | 득점 | ||
셀틱 | 1948-49 | 9 | 3 | - | - | 21 | 01 | 11 | 3 |
총계 | 9 | 3 | 0 | 0 | 2 | 0 | 11 | 3 | |
프레스턴 노스 엔드 | 1949-50 | 15 | 0 | 1 | 0 | 0 | 0 | 16 | 0 |
1950-51 | 42 | 0 | 2 | 0 | 0 | 0 | 44 | 0 | |
1951-52 | 42 | 0 | 1 | 0 | 0 | 0 | 43 | 0 | |
1952-53 | 41 | 0 | 3 | 0 | 0 | 0 | 44 | 0 | |
1953-54 | 26 | 0 | 8 | 0 | 0 | 0 | 34 | 0 | |
1954-55 | 39 | 3 | 3 | 0 | 0 | 0 | 42 | 3 | |
1955-56 | 41 | 1 | 1 | 0 | 0 | 0 | 42 | 1 | |
1956-57 | 37 | 0 | 6 | 0 | 0 | 0 | 43 | 0 | |
1957-58 | 40 | 1 | 1 | 0 | 0 | 0 | 41 | 1 | |
총계 | 323 | 5 | 26 | 0 | 0 | 0 | 349 | 5 | |
아스널 | 1958-59 | 38 | 1 | 4 | 0 | 0 | 0 | 42 | 1 |
1959-60 | 24 | 0 | 3 | 0 | 0 | 0 | 27 | 0 | |
1960-61 | 21 | 0 | 0 | 0 | 0 | 0 | 21 | 0 | |
총계 | 83 | 1 | 7 | 0 | 0 | 0 | 90 | 1 | |
첼시 | 1961-62 | 4 | 0 | 0 | 0 | 0 | 0 | 4 | 0 |
총계 | 4 | 0 | 0 | 0 | 0 | 0 | 4 | 0 | |
시드니 FC 프라하 | 1965 | 1 | 0 | 0 | 0 | 0 | 0 | 1 | 0 |
총 경력 | 420 | 9 | 33 | 0 | 2 | 0 | 455 | 9 |
- 1글래스고 자선컵 출전 기록
4.2. Managerial statistics
팀 | 시작일 | 종료일 | 기록 | ||||
---|---|---|---|---|---|---|---|
경기 | 승 | 무 | 패 | 승률 | |||
첼시 | 1961년 10월 | 1967년 10월 | 247 | 121 | 53 | 73 | 48.98% |
로더럼 유나이티드 | 1967년 11월 | 1968년 11월 | 47 | 14 | 16 | 17 | 29.79% |
퀸스 파크 레인저스 | 1968년 11월 | 1968년 12월 | 4 | 1 | 0 | 3 | 25.00% |
애스턴 빌라 | 1968년 12월 | 1970년 1월 | 46 | 13 | 16 | 17 | 28.26% |
포르투 | 1970년 1월 28일 | 1971년 5월 3일 | 35 | 21 | 5 | 9 | 60.00% |
스코틀랜드 (임시) | 1971년 9월 12일 | 1971년 11월 11일 | 2 | 2 | 0 | 0 | 100.00% |
스코틀랜드 | 1971년 11월 11일 | 1972년 12월 22일 | 10 | 5 | 3 | 2 | 50.00%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 1972년 12월 22일 | 1977년 7월 4일 | 215 | 99 | 54 | 62 | 46.05% |
더비 카운티 | 1977년 9월 17일 | 1979년 5월 10일 | 78 | 24 | 21 | 33 | 30.77% |
퀸스 파크 레인저스 | 1979년 5월 11일 | 1980년 10월 1일 | 51 | 20 | 16 | 15 | 39.22% |
시드니 올림픽 | 1981년 2월 15일 | 1981년 6월 14일 | 17 | 6 | 6 | 5 | 35.29% |
프레스턴 노스 엔드 | 1981년 6월 15일 | 1981년 12월 3일 | 17 | 3 | 6 | 8 | 17.65% |
사우스 멜버른 | 1982년 5월 16일 | 1982년 9월 5일 | 13 | 6 | 4 | 3 | 46.15% |
시드니 올림픽 | 1983년 3월 13일 | 1983년 8월 21일 | 21 | 8 | 9 | 4 | 38.10% |
울버햄프턴 원더러스 | 1984년 6월 8일 | 1985년 7월 4일 | 48 | 9 | 12 | 27 | 18.75% |
알트링엄 | 1987년 9월 28일 | 1988년 2월 4일 | 20 | 6 | 3 | 11 | 30.00% |
총계 | 842 | 348 | 224 | 270 | 41.33% |
5. Honours and achievements
토미 도허티는 선수와 감독 경력 전반에 걸쳐 다음과 같은 주요 명예와 개인적인 영예를 얻었다.
5.1. As player
- 프레스턴 노스 엔드
- 2부 리그: 1950-51
- FA컵 준우승: 1953-54
- 셀틱
- 글래스고 컵: 1949
5.2. As manager
- 첼시
- 풋볼 리그 컵: 1964-65
- FA컵 준우승: 1966-67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 2부 리그: 1974-75
- FA컵: 1976-77
- FA컵 준우승: 1975-76
- 스코틀랜드
-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 1971-72 (공동 우승)
- 사우스 멜버른
- 빅토리아 암폴 야간 축구 컵: 1982
5.3. Individual accolades
- 스코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 2013년 헌액
6. Death
토미 도허티는 오랜 투병 끝에 2020년 12월 31일, 9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7. Legacy and reception
토미 도허티는 스코틀랜드 축구계에서 가장 다채롭고 논란이 많았던 인물 중 한 명으로 기억된다. 그의 유산과 평가는 긍정적인 기여와 비판적인 시각이 공존한다.
7.1. Positive reception and influence
도허티는 뛰어난 지도력과 선수단에 미친 긍정적인 영향으로 찬사를 받았다. 그는 젊은 선수들을 발굴하고 육성하는 데 탁월한 재능을 보였으며, 특히 첼시에서 '도허티의 다이아몬드'로 불린 젊은 팀을 구축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카리스마 넘치는 성격과 재치 있는 언변은 언론과 팬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었으며, 팀에 활력을 불어넣는 원동력이 되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팀이 강등된 후 곧바로 챔피언으로 복귀시킨 능력은 그의 감독으로서의 역량을 분명히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그는 단순히 전술적인 감독을 넘어, 선수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팀 스피릿을 끌어올리는 데 능숙했다.
7.2. Criticism and controversies
도허티의 경력은 여러 비판과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가장 큰 논란은 1977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감독직에서 해고된 배경에 있었던 그의 혼외정사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당시 언론의 큰 주목을 받았고, 그의 결혼 생활뿐만 아니라 공적인 이미지에도 큰 타격을 주었다. 그의 개인적인 행동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으며, 이는 그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쌓은 명예를 퇴색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또한, 울버햄프턴 원더러스 재임 시절과 같이 재정적으로나 성적 면에서 어려운 클럽을 맡았을 때의 결과는 그의 감독 경력에서 도전적인 부분으로 남았다. 그는 때로 이적 정책이나 구단주와의 관계에서 갈등을 빚어 단기간에 팀을 떠나는 경우도 있었으며, 이는 그의 다소 변덕스러운 성격을 보여주는 사례로 언급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