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토마스 타로 히가는 하와이에서 오키나와계 이민자 부모 밑에서 태어나 오키나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이후 일본 본토에서의 직업 경험을 통해 전기 기술에 대한 관심을 키웠다.
1.1. 하와이와 오키나와에서의 성장
토마스 타로 히가는 1916년 9월 22일, 하와이주호놀룰루에서 오키나와 출신의 이민자 부모 카나와 카메조 히가 사이에서 12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1900년대 초, 많은 오키나와와 서일본 출신 사람들이 "이민 노동자"로서 새로운 삶을 개척하고 명예롭게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하와이로 이주했다. 히가의 부모님은 자녀들을 직접 양육할 시간이 부족했고, 일본 교육을 받게 하고자 하와이에서 태어난 자녀들을 친척에게 맡겨 오키나와로 돌려보냈다. 히가는 아홉 살 때까지 형, 누나와 함께 선조의 고향인 오키나와현 나카가미군기타나카구스쿠촌 시마부쿠로에서 조부모의 손에 자랐다.
1.2. 일본에서의 경험
어린 시절을 보낸 후, 히가는 사촌의 꿈을 따라 사촌과 그의 아내, 자녀들과 함께 새로운 땅에서 살기 위해 오사카로 건너갔다. 그의 첫 직업은 와카야마현 출신 소유의 노무라초 다이마루 쇼텐이었다. 이후 그는 도야마현 출신 도쿄제국대학 졸업생이 운영하는 호리코시 고테쓰 상점이라는 화장품 도매상에서 "숙식 견습생"으로 일했다. 또한 그는 야스타로 고토 밑에서 군용 철 경화 가마를 제조하는 후지 덴로 공업 유한회사에 고용되기도 했다. 일본 본토에서 히가는 오키나와 출신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경험했다. 나중에 하와이에 있는 히가의 아버지가 대규모 농장을 운영하게 되어 더 많은 도움이 필요해지자, 히가는 충분히 자란 뒤 하와이로 돌아갔다.
1937년 히가는 전기 기술을 배우기 위해 도쿄로 갔다. 도쿄 특허국에 여러 특허를 신청하기 위해 미국 시민권을 증명해야 했고, 이를 위해 여러 차례 미국 대사관을 방문했다. 이러한 행동으로 인해 그는 일본 비밀경찰에 의해 스파이로 의심받았고, 심문과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결국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기 1년 전인 1940년에 하와이로 돌아왔다.
2. 군 복무 및 제2차 세계 대전
토마스 타로 히가는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미국 육군에 복무하며 유럽 전선에서 큰 활약을 펼쳤고, 일본계 미국인의 전쟁 지원을 독려하는 강연 활동을 벌였으며, 오키나와 전투에서는 인도주의적 활동으로 수많은 생명을 구했다.
2.1. 미국 육군 입대 및 훈련
하와이로 귀국한 히가는 이듬해인 1941년 6월 징집되어 오아후섬의 미 육군 기지 스코필드 막사에 배치되었다. 같은 해 12월 7일 일본군의 진주만 공격에 충격을 받았으나, 즉시 다른 니세이 부대원들과 함께 해안 순찰 임무를 수행했다. 이후 시작된 일본계 미국인 강제 수용에 따라, 그는 호놀룰루에서 위스콘신주 캠프 맥코이로, 다시 미시시피주 캠프 셸비로 이송되어 일본계 2세들로 구성된 제100 보병대대에서 기초 훈련을 받았다.
2.2. 유럽 전선에서의 활약
1943년 8월, 그가 소속된 제100 보병대대는 알제리 오랑에 상륙했고, 9월에는 이탈리아 살레르노에 도착했다. 제100 보병대대는 이탈리아의 제34보병사단에 배속되었으며, 히가는 11월 5일 카시노 전투에서 집중적인 포격을 받아 중상을 입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부상당한 두 명의 전우를 150 yd가량 떨어진 안전한 곳으로 옮겼으며, 이후에도 전우들을 돕기 위해 다시 전투 지역으로 돌아가는 용기를 보였다. 그는 포격으로 인한 대규모 화재로 두 번째 중상을 입었으며, 이러한 공로로 퍼플 하트 훈장과 실버 스타 훈장을 수여받고 제대했다. 그는 조지아주의 육군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2.3. 일본계 미국인 지원을 위한 강연 활동
치료 후 요양 중에 히가는 동향인 오키나와 출신자들과 함께 콜로라도주의 일본계 미국인 강제 수용소를 방문하여 유럽 전선에서 활약하는 일본계 병사들에 대해 강연했다. 이를 계기로 전미 일본계 시민 연맹 (JACL)의 요청을 받아, 1944년 6월부터 1945년 1월까지 7개월간 미국 육군 재배치국과 전미 일본계 시민 연맹의 후원으로 미국 전역의 75개 일본계 미국인 강제 수용소를 방문하여 일본계 미국인 병사들에 대한 인식 제고와 지원을 독려하는 강연 투어를 진행했다.
2.4. 오키나와 전투에서의 역할
히가는 영어, 일본어, 그리고 오키나와어 (しまくとぅば시마쿠투바ryu)에 능통했기 때문에 미군에게 매우 귀중한 인재였다. 그는 오키나와가 전쟁터가 될 것임을 알게 되자, 다시 통역병으로 자원하여 켄달 J. 필더 장군의 추천으로 오키나와에 파견되었다. 필더 장군은 히가가 오키나와 주민들과 개인적인 유대 관계를 형성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하여 그들에게 동굴 밖으로 나와 항복하도록 설득해달라고 요청했다.
히가는 비무장 상태로 직접 동굴 속으로 들어가 "나는 나카구스쿠촌의 히가 타로입니다. 믿고 나와주십시오." (ワンネー、ヤマグスクヌタルーヤイビーン。ンジティクミソーリヨー나는 나카구스쿠촌의 히가 타로입니다. 믿고 나와주십시오.ryu)라고 오키나와어로 외치며 투항을 권유했다. 그는 12차례 동굴에 진입하여 이 중 11차례 주민들을 성공적으로 설득하여 항복시켰다. 이처럼 자신의 목숨을 걸고 주민들을 설득하여 수많은 마을과 생명을 구한 그의 인도주의적 활동은 소수자 보호 및 인권 증진 측면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3. 전후 활동 및 공헌
전쟁 이후 토마스 타로 히가는 황폐해진 오키나와의 구호와 재건을 적극적으로 지원했으며, 일본계 미국인들의 시민권 획득을 위한 운동에도 참여하며 사회에 큰 기여를 했다.
3.1. 오키나와 구호 및 재건 지원
1945년 9월 13일, 오키나와 전투를 마치고 하와이로 귀국한 히가는 전쟁으로 황폐해진 고향 오키나와의 비참한 상황을 구하기 위해 다시금 각지에서 강연회를 열었다. 하와이의 오키나와 공동체는 즉시 그의 목소리에 호응하여 돼지를 비롯한 식량, 의류, 의약품 등 구호 물품을 보내는 활동을 전개했다. 1945년 10월 29일에는 하와이에서 오키나와 의류 구제회가 조직되었다. 초기 구호 물품 수송은 미 해군의 협력으로 이루어졌으나, 1946년 7월 이후 미군의 오키나와 통치가 해군에서 육군으로 이관되면서 해군의 협력이 어려워져 수송이 일시 중단되었다. 그러나 1946년부터 라라 (LARA) (아시아 구제 연맹)로 인계되어 의류, 식량, 학교 문구류, 채소 씨앗 등 모든 종류의 구호 물품이 오키나와에 전달되었다.
히가는 1969년, 오키나와 이민자들이 1900년 1월 8일 하와이에 처음 도착한 지 6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오키나와계 하와이 이민의 65년 발자취를 그린 컬러 다큐멘터리 영화 ハワイに生きる沖縄移民65年の足跡하와이에 사는 오키나와 이민 65년의 발자취일본어, 또는 Life in Hawaii라이프 인 하와이영어를 제작했다. 또한 1974년에는 하와이와 북미, 남미로 이주한 오키나와 이민자들의 삶을 다룬 서적 移民は生きる이민은 살아있다일본어 (Immigrants Live On)를 출판했으며, 1982년에는 ある二世の轍어떤 니세이의 발자취일본어 (Memoirs of a Certain Nisei)를 출판했다.
3.2. 일본계 미국인의 시민권 운동
전후 하와이에서 콜로라도 타임스 편집장으로 일하던 히가는 1946년, 당시 일본계 미국인들에게만 허용되지 않았던 귀화권에 대한 차별에 항의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미 대륙 귀화권 획득 기성 동맹회의 강연 활동 등을 통해 귀화권 획득을 위한 하와이에서의 큰 물결에 기여했다. 그 결과, 1952년 이민 및 국적법에 따라 일본계 미국인의 귀화권이 인정되었다.
4. 발명 및 특허
토마스 타로 히가는 전기 기술에 대한 깊은 관심과 재능을 바탕으로 다양한 발명품을 만들고 특허를 출원하는 등 기술적인 공헌도 남겼다.
4.1. 전기 기술 및 발명
히가의 전기 기술에 대한 관심은 호리코시 고테쓰 상점에서 전기 관련 서적을 읽으면서 처음 시작되었다. 하와이로 돌아온 그는 석유 램프를 전기 발전기로 대체하고자 했다. 그는 집 옆을 흐르는 개천의 물을 동력으로 활용하고, 폐기물과 버려진 자동차 부품을 사용하여 자가 발전기를 만들었다. 이 소문이 퍼지면서 와세다 대학 이공학부 학장인 야마모토 다다오키 교수가 히가를 만나러 왔고, 일본에 와서 공부할 것을 권유했다. 이후 그는 15개의 다른 발명품을 완성했으며, 도쿄 특허국에 여러 특허를 신청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미국 시민권을 증명하기 위해 여러 차례 미국 대사관을 방문해야 했다.
5. 개인 생활
토마스 타로 히가는 전쟁 중 미래의 아내와 편지를 통해 관계를 발전시켰고, 전쟁이 끝난 후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었다.
5.1. 결혼
히가는 1945년 11월 22일, 아내 카우아이에서 태어난 토시코 치넨과 결혼했다. 히가는 그녀가 보낸 격려의 편지를 통해 치넨을 처음 알게 되었다. 그녀는 히가에게 자주 편지를 썼고, 히가는 그녀를 직접 만나기를 바랐다. 그들은 편지를 통해 오키나와에 있는 가족과 친구들에 대해 이야기했으며, 곧 건강과 더욱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나누기 시작했다. 이렇게 관계를 발전시킨 두 사람은 히가가 전쟁에서 돌아오자마자 결혼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은 서로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큰 도박이었다. 히가는 결혼에 대해 망설였으나, 1943년 12월 18일 옛 선생님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편지에는 "불행이 때로는 축복으로 변할 수도 있다. 낙심하지 마라. 사람의 정신력이 신체 상태를 지배한다. 너의 정신력으로 상처를 치유하라. 네가 이것을 해낼 수 있다는 것을 의심치 않는다."라고 쓰여 있었다. 이 편지를 받은 지 2년 후, 그는 토시코 치넨과 결혼했다.
6. 사망
토마스 타로 히가는 1985년 2월 11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사망했다.
7. 유산 및 평가
토마스 타로 히가는 제2차 세계 대전 중의 영웅적인 행동과 전후 사회 공헌으로 인해 다양한 수상과 표창을 받았으며, 그의 삶과 활동은 여러 문화적 기념 사업을 통해 후대에 전해지고 있다.
7.1. 수상 및 표창
1983년 5월, 히가는 전쟁 중과 전후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오키나와 정부와 류큐 대학으로부터 표창을 받았다. 같은 해 7월에는 오키나와 타임스 상을 수상했으며, 1984년 8월에는 호놀룰루에서 열린 전미 일본계 시민 연맹 (JACL) 전국 대회에서 감사장을 받았다. 또한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미군에 대한 위대하고 용감한 복무로 실버 스타 훈장을 수여받았다. 이 훈장은 1943년 11월 5일 이탈리아에서 격렬한 포화 속에서 보여준 그의 활약에 대해 수여되었다. 히가는 등 부위에 부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명의 전우를 안전한 장소로 옮기며 동료 병사들을 계속 도왔고, 이후에도 더 많은 도움을 제공하기 위해 다시 전장으로 돌아갔다. 토마스 히가의 영웅적인 행동은 실버 스타 훈장의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
7.2. 문화적 기념 및 영향
1995년, 히가를 비롯한 이들의 활동은 시모지마 테츠로의 저서 海から豚がやって왔다바다에서 돼지가 왔다일본어 (1995년)에 묘사되었고, 이 책은 뮤지컬로도 상연되며 전후 오키나와 구호 운동의 상징적인 사건이 되었다.
2015년 4월 24일, 히가의 장남이자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거주하는 오키나와계 3세 히가 앨빈 (아이사쿠)이 오키나와를 방문했다. 그는 오타 마사히데 전 지사와의 교류에 대해 이야기하며, 히가가 남긴 많은 사진과 수기들이 오키나와현 공문서관 등에 기증되었음을 밝혔다. 또한 앨빈은 기노자촌 등을 방문하기 전날 밤, 아버지 히가가 꿈에 나타나 "오키나와어가 오키나와를 구했지만, 이제는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적어져 위기적인 상황이다. 오키나와어를 도와달라"고 말했다고 전하며 자신도 앞으로 오키나와어를 공부하고 싶다고 밝혔다.
2015년 NHK는 히가를 다룬 다큐멘터리 드라마 戦場の真心(チムグクル)~沖縄を救った日系人~전장의 진심 (치무구쿠루)~오키나와를 구한 일본계 미국인~일본어을 제작했다. 나카에 유지 감독이 연출했으며, 개그맨 고리가 출연과 나레이션을 맡았다. 촬영은 히가의 부모님의 고향인 기타나카구스쿠촌 시마부쿠로에서 이루어졌으며, 현지 주민들이 엑스트라로 참여했다.
2017년 3월 5일, 우루마시 우루마 시민 예술극장 부지 내에 "바다에서 돼지가 왔다" 기념비가 건립되었다. 이듬해 시모지마 테츠로는 미국에서의 강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든 일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먼저 하와이에 오키나와를 구하자는 한 알의 씨앗을 뿌린 젊은 니세이가 있었습니다. 오키나와 구제 운동과 시민권 획득 운동 등 사회를 위해 헌신한 것으로 알려진 히가 타로입니다. 이 단 한 알의 씨앗은 하와이 전체의 큰 운동으로 확산되었을 뿐만 아니라, 마치 봉선화 씨앗이 터지듯이 세계의 우치난추 (오키나와 디아스포라) 사회라는 풍요로운 토양으로 퍼져나갔습니다."
7.3. 사회적 영향력
토마스 타로 히가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목숨을 걸고 오키나와 주민들의 생명을 구한 인도주의적 영웅으로서의 업적을 남겼다. 또한 전쟁 이후에는 고향 오키나와의 재건을 돕기 위한 구호 활동을 주도하고, 다큐멘터리와 서적을 제작하여 이민자들의 삶과 역사를 기록했다. 일본계 미국인으로서 시민권 획득을 위한 차별 철폐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소수자 권익 향상에 크게 기여했다. 그의 이러한 활동들은 문화적, 사회적, 인도주의적 측면에서 다층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사회적 연대와 복구 노력의 중요성, 그리고 인권과 소수자 권리 보호의 가치를 후대에 각인시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