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타탕카 이요타케는 미국 정부의 팽창 정책에 맞서 아메리카 원주민의 자유와 영토를 지키기 위해 싸운 위대한 전사이자 영적 지도자였다. 그의 생애는 미국 서부 개척 시대에 아메리카 원주민이 겪었던 고난과 저항의 역사를 상징한다.
1.1. 어린 시절과 성장

타탕카 이요타케는 1831년에서 1837년 사이 오늘날 미국 노스다코타주의 그랜드강 인근에 위치했던 다코타 준주에서 태어났다. 2007년 그의 증손자는 가족의 구전 전통에 따라 그가 현재 몬타나주 마일시티 남쪽의 옐로스톤강을 따라 태어났다고 주장했다. 그는 태어날 때 '호카 프시체'(Ȟoká Psíčelkt, 뛰는 오소리)라는 이름을 얻었으며, 신중하고 여유로운 성품 때문에 '훙케시니'(Húŋkešnilkt, 느림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의 아버지는 '뛰는 소'(Jumping Bull영어), 어머니는 '그녀의 성스러운 문'(Her-Holy-Door영어)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강인하고 대담한 성격을 보였는데, 어린 나이에 위험한 상황에서도 울지 않고 오히려 즐거워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전사로서의 훈련을 받았다. 8세 때 아버지는 그를 시험하기 위해 강 건너편으로 보내고 삼촌에게 늑대 울음소리를 내며 위협하게 했지만, 그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10세에는 처음으로 아메리카들소를 사냥했으며, 12세에는 자신을 공격하는 들소 송아지의 뿔을 잡고 올라타 길들이는 대담함을 보였다.
14세가 되던 해, 그는 아버지와 삼촌 '네 개의 뿔'(Four Horns영어)을 포함한 라코타 전사들과 함께 크로우족의 말들을 빼앗기 위한 습격에 동행했다. 그는 용감하게 돌진하여 크로우족 전사 한 명에게 '카운팅 쿱'을 성공시켰다. 캠프로 돌아온 후, 그의 아버지는 축하 잔치를 열고 자신의 이름인 '타탕카 이요타케'(Tȟatȟáŋka Íyotakelkt, 자신의 자리에 앉아 무리 너머를 보는 들소)를 아들에게 물려주었다. 이후 그의 아버지는 '뛰는 소'로 불리게 되었다. 이 의식에서 아버지는 아들에게 전사의 상징인 독수리 깃털, 전사의 말, 그리고 들소 가죽 방패를 주며 라코타 전사로서의 성인식을 치러주었다.
15세 때, 그는 크로우족 마을에서 말을 훔치던 중 총에 맞아 왼쪽 다리를 관통당했고, 이 부상으로 평생 다리를 절게 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17세에는 크로우족 여성 포로가 화형 당하는 것을 보고 연민을 느껴 그녀를 화살로 쏘아 죽였다. 그는 잘생기지는 않았지만 예의 바르고 친절하여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았으며, 평생 9명의 아내를 두었다. 그의 아내들로는 '밝은 머리카락'(Light Hair영어), '네 개의 옷을 입은 여인'(Four-Robes-Woman영어), '눈 위의 그녀'(Snow-on-Her영어), '민족에게 보인 여인'(Seen-by-her-Nation영어), '붉은 여인'(Scarlet Woman영어) 등이 있었다.
그는 점차 자신의 영적인 자질을 깨달았다. 사냥 중 회색곰과 딱따구리를 만나는 꿈을 꾸고, 딱따구리의 지시에 따라 곰을 죽여 그 발톱으로 목걸이를 만들었다. 이 목걸이와 독수리 깃털 관은 그의 가장 소중한 보물이 되었다. 또한 블랙힐스의 호수에서 독수리로부터 미래의 위대한 전사가 될 것이라는 예언을 들었고, 부상당한 늑대를 도와주며 자신의 이름이 위대해질 것이라는 계시를 받았다.
젊은 시절 타탕카 이요타케는 용감한 전사로 명성을 떨쳤다. 그는 '아키치타'(Akíčhitalkt, 경호 전사)와 '토카라'(Tokálalkt, 키트 폭스 전사단)에 가입했으며, 25세에는 '찬테 친자'(Čhaŋté Tȟíŋzalkt, 강한 심장 전사단)의 가장 용감한 전사로서 붉은 긴 띠를 어깨에 두르는 영예를 얻었다. 이 띠는 전투 중 화살로 땅에 고정하여 동료가 올 때까지 그 자리에서 싸우겠다는 맹세를 상징했다. 그는 사냥과 카운팅 쿱에서 뛰어났으며, 유머러스하고 조용한 말투로 동료들에게 사랑받았다. 또한 뛰어난 '위카사 와칸'(Wichasa Wakanlkt, 주술사 또는 의술사)으로서 다양한 치료술과 주술에 능통하여 부족민들을 도왔다. 그는 동료들로부터 "고집스럽고 두려움을 모르는, 고집 세고 머리를 숙이지 않으며, 겨울 눈보라 속에서도 결코 도망치지 않고 바람을 거슬러 나아가는 들소"에 비유되어 "들소 같은 남자"로 불렸다.
q=Grand River, South Dakota|position=right
1.2. 젊은 시절과 전사로서의 활동
1862년 미국 정부와 수족 사이에 다코타 전쟁이 발발했지만, 타탕카 이요타케의 부족은 직접적으로 이 전쟁에 관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전쟁은 미국 정부가 중남부 미네소타주의 굶주린 다코타족의 요구를 거부하자, 다코타족이 서부 정착민과 병사들을 공격하며 시작되었다. 당시 미국 남북 전쟁으로 여력이 없던 미군은 1864년이 되어서야 다코타족을 진압했다. 이 과정에서 타탕카 이요타케의 라코타족은 다코타족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앨프레드 셜리 장군이 이끄는 2,200명의 미군 병력에게 공격받았다. 이에 라코타족과 다코타족은 연합하여 킬디어산 전투에서 미군에 맞섰다. 타탕카 이요타케는 라코타의 피지(Phizílkt, 쓸개)와 다코타의 잉크파두타(Iŋkpáduta다코타어, 붉은 점)와 함께 방어를 지휘했다. 그들은 밀려났지만 8월의 배드랜즈 전투까지 소규모 전투를 이어갔다.
1864년 9월, 타탕카 이요타케는 약 100명의 라코타 훙크파파 전사들과 함께 오늘날 노스다코타주의 마르머스 인근에서 제임스 L. 피스크 대위가 이끄는 마차 행렬을 기습했다. 이 기습에서 그는 왼쪽 엉덩이에 총상을 입었으나, 총알이 등 쪽으로 빠져나가 심각한 부상은 아니었다. 이 사건을 통해 그는 "동족을 백인의 세계에서 멀리하고, 부당한 조약에 결코 서명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굳혔다.
그는 백인의 침략에 단호히 맞섰고, 그의 저항은 부족원들뿐만 아니라 백인들에게도 인상 깊게 각인되었다. 1866년에는 북부 대평원의 위대한 전사로서 오글랄라족의 크레이지 호스와 함께 명성을 얻었다. 그는 붉은 구름 전쟁에서도 눈부신 활약을 펼쳤으며, 이듬해인 1867년에는 '찬테 친자' 전사단의 핵심 전사가 되었다. 그는 당시 "옛 전사들은 더 이상 없다. 나 자신이 용기를 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훗날 백인들에게 전사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에게 전사란 당신들이 생각하는 단순히 싸우는 자가 아니다. 본래 누구에게도 타인의 생명을 빼앗을 권리는 없으므로, 전사는 우리를 위해, 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자이다. 그 사명은 나이 든 자나 약한 자, 자신을 지킬 수 없는 사람들, 그리고 미래를 짊어질 아이들을 보살피고 지켜내는 데 있다."
2. 백인과의 충돌과 저항
타탕카 이요타케는 미국 백인 정착민과 정부의 끊임없는 영토 침범에 맞서 아메리카 원주민의 권리와 삶의 방식을 지키기 위해 헌신적으로 저항했다. 그의 저항은 단순히 무력 충돌을 넘어, 원주민의 주권과 문화적 정체성을 수호하려는 강력한 의지를 담고 있었다.
2.1. 붉은 구름 전쟁

1866년부터 1868년까지 오글랄라 라코타족의 지도자 붉은 구름은 몬타나주의 파우더강 유역을 지키기 위해 미군과 싸웠다. 타탕카 이요타케는 붉은 구름을 지원하며 1865년부터 1868년까지 버솔드 요새, 스티븐슨 요새, 버포드 요새 및 그들의 동맹군을 여러 차례 공격했다. 이 봉기는 붉은 구름 전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1868년 초, 미국 정부는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원했고, 붉은 구름의 요구대로 필 키르니 요새와 C.F. 스미스 요새에서 철수하는 데 동의했다. 훙크파파족의 피지와 다른 훙크파파, 시하사파족(Sihásapalkt, 검은 발), 양크톤 다코타족의 대표들은 1868년 7월 2일 라이스 요새에서 라라미 요새 조약에 서명했다. 이 조약은 사우스다코타주를 중심으로 한 그레이트 수 보호구역을 설치하고 이 지역이 아메리카 원주민의 영토임을 인정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타탕카 이요타케는 이 조약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정부의 연락책이었던 예수회 선교사 피에르 장 드스메에게 "나는 내 나라의 작은 일부라도 팔 생각이 없으며, 강변의 나무들, 특히 참나무들을 백인들이 베어가는 것을 원치 않는다. 나는 참나무 숲을 사랑하고 존경한다. 그들은 여름의 더위와 겨울의 추위를 견디며 우리처럼 굳건히 자라 무성하게 서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후 1860년대 후반부터 1870년대 초반까지 미주리강 상류 지역의 요새들에 대한 치고 빠지는 공격을 계속했다.
1866년에서 1868년 사이의 사건들은 타탕카 이요타케의 삶에서 역사적으로 논쟁이 많은 시기이다. 역사가 스탠리 베스탈은 1930년에 생존한 훙크파파족과의 인터뷰를 통해 타탕카 이요타케가 이 시기에 "전체 수족의 최고 추장"이 되었다고 주장했지만, 후대 역사가들과 민족학자들은 라코타 사회가 매우 분권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을 반박했다. 라코타 부족과 그들의 원로들은 전쟁을 포함한 개별적인 결정을 내렸으며, 특정 개인이 부족 전체를 통솔하는 절대 권력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백인들은 '추장'을 '부족장'으로 오해했고, 미국 평화 위원회는 인디언 추장들과 조약을 맺음으로써 수족을 복종시키려 했다. 그러나 타탕카 이요타케와 크레이지 호스는 백인 평화 위원회의 평화 회담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수족 대다수도 타탕카 이요타케의 생각에 동조했다. 수족 사회는 고도의 개인주의 사회였고, 타탕카 이요타케 주위에 모인 사람들도 자유 의지에 따른 행동이었다. 하지만 미국은 타탕카 이요타케와 크레이지 호스를 부족의 통솔자로 간주하고 서부 인디언 전쟁에서 가장 큰 반역자로 여겼다.
2.2. 블랙힐스 전쟁과 그 배경

타탕카 이요타케가 이끄는 훙크파파족은 1860년대 후반에도 이주민 행렬과 요새를 계속 공격했다. 1871년 노던 퍼시픽 레일웨이는 훙크파파족 영토를 직접 가로지르는 북부 평원 철도 노선 측량을 실시했다. 이 철도는 사람과 물자뿐만 아니라 군대도 몰고 들어올 것이 분명했기에, 라코타족은 강력히 저항했다. 타탕카 이요타케와 훙크파파족은 측량대를 공격하여 철수시켰다. 1873년에는 측량대가 다시 군대의 호위를 받으며 돌아왔지만, 타탕카 이요타케의 병력은 "가장 강력하게" 측량에 저항했다. 1873년 대불황으로 노던 퍼시픽 레일웨이의 후원자들이 파산하면서 라코타, 다코타, 나코타족 영토를 지나는 철도 건설은 중단되었다.
1848년 시에라네바다 산맥에서 금이 발견되고 막대한 부를 얻게 되자, 사람들은 블랙힐스의 금광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1874년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 중령은 노스다코타주 비스마르크 인근의 에이브러햄 링컨 요새에서 블랙힐스로 군사 원정을 이끌고 금을 탐사하며 군사 요새의 적합한 위치를 물색했다. 커스터가 블랙힐스에서 금을 발견했다고 발표하자 블랙힐스 골드 러시가 촉발되었고, 라코타족과 블랙힐스로 이주하려는 유럽계 미국인들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타탕카 이요타케는 1874년 커스터의 원정대를 직접 공격하지는 않았지만, 미국 정부는 시민들로부터 블랙힐스를 채광과 정착에 개방하라는 압력을 점점 더 많이 받았다. 블랙힐스를 매입하거나 임대하려는 협상이 실패하자, 워싱턴 정부는 1868년 라라미 요새 조약에서 수족의 영토를 보호하겠다고 약속한 것을 회피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정부는 타탕카 이요타케가 부추긴 일부 수족의 습격 보고에 경각심을 가졌다.
1875년 11월, 율리시스 S. 그랜트 대통령은 그레이트 수 보호구역 밖에 있는 모든 수족 부족에게 보호구역 안으로 이주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1876년 2월 1일, 미국 내무부는 보호구역 밖에 계속 거주하는 부족들을 '호전적'으로 분류했다. 이 분류는 군대가 타탕카 이요타케와 다른 라코타 부족들을 '적대자'로 추격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다.
역사가 마고 리버티는 부족의 구전 역사를 바탕으로 많은 라코타 부족들이 샤이엔족과 동맹을 맺고 평원 전쟁에 참여한 것은 샤이엔족이 미국으로부터 공격받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이론화했다. 1860년 이래 북부 샤이엔족은 평원 인디언들 사이에서 여러 전투를 이끌었다. 1876년 이전에 미군은 다른 어떤 부족보다 많은 일곱 개의 샤이엔 부족 캠프를 파괴했다. 그러나 로버트 M. 우틀리나 제롬 그린과 같은 다른 역사가들은 라코타 구전 증언을 사용했지만, 타탕카 이요타케가 명목상 수장이었던 라코타 연합군이 연방 정부의 평화 캠페인의 주요 목표였다고 결론지었다. 이 때문에 블랙힐스의 관할권을 놓고 벌어진 전쟁은 "그레이트 수족 전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1868년에서 1876년 동안 타탕카 이요타케는 가장 중요한 아메리카 원주민 정치 지도자 중 한 명이 되었다. 1868년 라라미 요새 조약과 그레이트 수 보호구역 설치 이후, 붉은 구름과 같은 많은 전통적인 수족 전사들은 보호구역에 영구 거주지를 마련했지만, 백인의 침범과 들소 떼의 감소로 인해 생존 자원이 줄어들면서 미국 인디언 관리국에 의존하게 되었다. 타탕카 이요타케는 미국 정부에 대한 어떠한 의존도 거부했고, 때로는 그의 소규모 전사 무리와 함께 대평원에 고립되어 살았다. 미국이 아메리카 원주민을 위협하자, 다양한 수족 부족과 북부 샤이엔족과 같은 다른 부족의 많은 구성원들이 타탕카 이요타케의 캠프로 모여들었다. 유럽계 미국인들을 계속 피하면서 그의 "강력한 주술"에 대한 명성이 높아졌다.
1875년 북부 샤이엔족과 훙크파파, 오글랄라, 상사크, 미네콘주족이 함께 태양 춤을 위해 모였다. 샤이엔족의 주술사 '흰 소'(White Bull영어) 또는 '얼음'(Ice영어)과 타탕카 이요타케가 함께 참여했다. 이 의식적 동맹은 1876년 그들이 함께 싸우기 전에 이루어졌다. 타탕카 이요타케는 중요한 계시를 받았다. 그는 절정의 순간에 "위대한 영혼이 우리에게 적들을 주었다. 우리는 그들을 파괴할 것이다. 우리는 그들이 누구인지 모른다. 그들은 병사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얼음' 또한 "그때는 아무도 적이 누구인지, 어느 부족인지 몰랐다... 그들은 곧 알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1876년 1월 1일, 미군이 보호구역 밖에 사는 수족과 다른 부족들을 적대자로 추적하기 시작하자,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타탕카 이요타케의 캠프에 모였다. 그는 이 "통합 캠프"를 적극적으로 장려했다. 그는 보호구역으로 정찰대를 보내 전사들을 모집하고, 훙크파파족에게 합류한 아메리카 원주민들과 보급품을 공유하도록 지시했다. 그의 관대함의 예로, 그는 레이놀즈 대위의 1876년 3월 17일 공격으로 황폐해져 안전을 위해 타탕카 이요타케의 캠프로 피난 온 나무 다리의 북부 샤이엔 부족에게 식량을 제공했다.
3. 리틀빅혼 전투와 그 이후
타탕카 이요타케는 리틀빅혼 전투에서 직접적인 군사 지휘관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예언과 영적 리더십은 아메리카 원주민 연합군에게 큰 용기를 주어 역사적인 승리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이 승리는 미국 정부의 더욱 강력한 보복을 불러왔고, 결국 그는 캐나다로 망명하게 되었다.
3.1. 선댄스와 예언
침략군의 군대가 다가오는 가운데, 수족의 대규모 집단은 '태양 춤' 의식을 거행했다. 45세의 타탕카 이요타케는 4일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태양을 응시하며 춤을 추는 선댄서로 자원했다. 그는 '피어싱의 맹세'를 했고, 4일째에는 피를 흘리는 '피어싱 의식'을 치렀다. 이 의식에서는 선댄서의 가슴과 팔의 살점에 독수리 발톱을 꿰뚫고 생가죽으로 성스러운 기둥과 연결했다. 이 의식의 보조는 그가 몇 년 전 아시니보인족에서 의붓동생으로 맞이한 '뛰는 소'(Tȟatȟáŋka Pȟálkt, 황소 머리)가 맡았다.
이 피어싱 의식 중에 타탕카 이요타케는 "푸른 군복을 입은 백인들이 인디언에게 패배할 것"이라는 환영을 보았다. 환영 속에서 기병대 병사들은 하늘에서 거꾸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는 "이 백인들은 와칸 탕카(Wakȟáŋ Tȟáŋkalkt, 위대한 신비)의 선물이며, 그들을 죽여야 한다. 그러나 그들의 총이나 말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 백인의 것을 탐하면 우리 인디언에게 저주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선댄스 의식이 예년처럼 진행된 후, 수족과 샤이엔족, 아라파호족의 대규모 집단은 '기름진 풀밭 강'이라고도 불리는 리틀빅혼강 강변으로 이동하여 회의용 티피를 세우고 백인에 대한 향후 정책을 연일 논의했다.
3.2. 리틀빅혼 전투

q=Little Bighorn Battlefield|position=right
1876년 상반기 동안 타탕카 이요타케의 캠프는 안전을 위해 그에게 합류하는 아메리카 원주민들로 계속 확장되어, 전사와 가족들을 합쳐 1만 명이 넘는 대규모 마을을 형성했다. 1876년 6월 25일,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 중령은 세 개의 대대로 이루어진 제7기병연대를 이끌고 이 대규모 마을에 도착했다. 커스터와 그의 장교들은 아메리카 원주민 마을이 이처럼 클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보호구역을 벗어나 타탕카 이요타케를 따르는 전사들만 2천 명에 달하는 규모였다.
타탕카 이요타케는 직접적인 군사 지휘관 역할을 맡지 않았다. 대신 그는 영적 지도자로서, 전투 일주일 전 태양 춤을 수행하며 자신의 팔에서 100조각 이상의 살점을 바치는 희생을 치렀다. 그의 예언대로 기병대가 마을로 돌진하자, 크레이지 호스와 피지, 투 문스(Two Moons영어), 원 불(One Bull영어) 등 저명한 전사들이 이끄는 전사들이 맞서 싸워 그들을 격퇴했다. 커스터의 제7기병연대는 양 측면에서 공격받아 전열이 무너진 채 포위당했고, 결국 리틀빅혼 전투에서 궤멸했으며 커스터 중령 또한 전사했다. 타탕카 이요타케의 조카인 '흰 소'(White Bull영어)는 자신이 커스터를 죽였다고 믿었다. 이 승리는 타탕카 이요타케의 예언이 성취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승리 축하는 오래가지 못했다. 커스터의 패배와 죽음에 대한 대중의 충격과 분노, 그리고 남은 수족의 군사적 역량에 대한 정부의 이해는 미국 전쟁부가 수천 명의 병력을 추가로 파병하게 만들었다. 이듬해 새로운 미군 병력은 라코타족을 추격하여 많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전투에서 타탕카 이요타케의 "백인의 총이나 말을 빼앗지 말라"는 경고는 무시되었고, 인디언들은 전리품으로 기병대의 안장, 제복, 권총, 카빈총, 1만 발의 탄약을 가져갔다.
이 해 9월, 조지 크룩 장군은 그랜드강 근처 훙크파파족 마을에서 48 km밖에 떨어지지 않은 블랙힐스 베어 뷰트에서 미네콘주족의 티피 37채를 습격했다. 타탕카 이요타케 일행이 구원하러 갔을 때는 이미 늦어 마을은 파괴된 상태였다. 여성, 어린이, 아기를 포함한 수족이 학살당하고 미군 병사들에 의해 두피가 벗겨졌다. 한 달 후, 옐로스톤강을 따라 마차 행렬을 호위하던 미군 E. S. 오티스 대령은 훙크파파족으로부터 경고문을 받았다. 역사가들은 이를 타탕카 이요타케가 대필시킨 것으로 보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나는 네가 이 길에서 무엇을 하려는지 알고 싶다. 너는 들소들을 놀라게 하여 도망치게 했다. 나는 여기서 사냥하고 싶다. 여기서 떠나주길 바란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싸울 뿐이다."
오티스의 상관인 넬슨 마일스 대령은 타탕카 이요타케와 대화할 준비를 했고, 그와 그의 동료들이 평화롭게 보호구역 관리 사무소에 출두하도록 협상했다. 처음에는 예의 바르게 시작된 이 회담은 곧 양측에 분노를 불러왔다. 타탕카 이요타케는 "백인을 사랑한 인디언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백인도 결코 인디언을 사랑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회담은 결렬되었고, 미군은 수족에게 발포했다. 양측의 전투는 이틀 동안 계속되었고, 마일스는 대포를 사용하여 수족을 쫓아냈다.
10월 27일에는 미네콘주족과 이타지프초족 2천 명이 마일스에게 투항했지만, 마일스에게는 이 많은 인원에게 줄 식량이 없었다. 그래서 마일스는 추장 5명을 인질로 잡음으로써 11월 30일에는 40가구의 인디언들을 샤이엔강 보호구역 관리 사무소에 출두시키는 데 성공했다. 여기서 수족은 마침내 블랙힐스와 파우더강 유역 토지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는 문서에 서명(×표시)했다. 이는 '그레이트 수 네이션' 면적의 3분의 1에 해당했지만, 그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에 따르지 않으면 미국이 수족에게 식량 및 기타 보급품 지급을 중단하겠다고 위협했기 때문이다. 현재 미국 연방 대법원은 미국에 의한 이 조약 위반을 완전한 불법 행위로 단정하고 있다.
끝까지 보호구역 입주를 거부하며 싸움을 계속했던 오글랄라족의 위대한 전사 크레이지 호스도 더 이상 동족을 희생시킬 수 없다고 보고 투항하여 1,500명의 동료와 함께 보호구역에 들어갔다. 이렇게 수족 중에서 보호구역 입주를 거부하고 저항을 계속하는 위대한 전사는 타탕카 이요타케만이 남게 되었다.
3.3. 캐나다 망명
타탕카 이요타케는 항복을 거부하고 1877년 5월, 자신을 따르는 무리를 이끌고 국경을 넘어 오늘날 캐나다 서스캐처원주에 해당하는 노스웨스트 영토의 우드산으로 망명했다. 그는 그곳에서 4년 동안 머물며 미국으로 돌아갈 기회를 엿보았다. 캐나다 영토로 넘어왔을 때, 그는 지역 노스웨스트 기마 경찰의 사령관 제임스 모로우 월시를 만났다. 월시는 타탕카 이요타케에게 라코타족이 이제 영국령에 있으므로 영국법을 따라야 한다고 설명했다. 월시는 자신이 법을 공평하게 집행하며, 영토 내 모든 사람이 정의를 누릴 권리가 있다고 강조했다. 월시는 타탕카 이요타케의 옹호자가 되었고, 두 사람은 평생 좋은 친구로 지냈다.
캐나다에 머무는 동안 타탕카 이요타케는 식시카족을 이끌던 까마귀 큰 발(Issapóómahksika식시카어)도 만났다. 식시카족은 오랫동안 라코타족과 샤이엔족의 강력한 적이었다. 타탕카 이요타케는 식시카족과 화친을 맺고 평화의 담배를 나누고 싶어 했다. 평화를 옹호하던 까마귀 큰 발은 기꺼이 평화 제의를 받아들였다. 타탕카 이요타케는 까마귀 큰 발에게 깊은 감명을 받아 자신의 아들 중 한 명에게 그의 이름을 지어주었다.
캐나다의 정착지는 평화로웠지만, 캐나다 내 들소 떼의 규모가 작아 타탕카 이요타케와 그의 부족은 식량을 구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게다가 미국 정부는 그의 송환을 계속 요구하여 캐나다와 미국 정부 간의 긴장을 고조시켰다. 타탕카 이요타케는 캐나다 정부에 수족의 사냥을 위한 광대한 토지를 할양해 달라고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미국 측으로의 원정은 미군에 의해 저지되었다. 캐나다에서도 들소는 백인들에 의해 거의 멸종되었고, 캐나다의 혹독한 겨울 추위와 기아가 그들을 덮쳤다. 위대한 전사 피지도 미국에 투항했고, 1881년에는 캐나다에 남은 수족은 노인들과 그의 친척 185명뿐이었다. 캐나다 정부가 그들에게 식량 공급을 거부하자, 타탕카 이요타케는 마침내 굶주린 동족을 구하기 위해 미국에 투항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캐나다 기마경찰에게 "우리는 버림받았다"고 말했다. 캐나다를 떠나기 전, 그는 월시를 마지막으로 방문하여 기념으로 의식용 머리 장식을 남겼을 가능성이 있다.
4. 항복과 보호구역 생활
캐나다에서의 망명 생활을 마친 타탕카 이요타케는 결국 미국으로 돌아와 항복했다. 이후 그는 보호구역에서 생활하며 미국 당국의 감시와 통제 속에서도 부족의 전통과 권리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4.1. 미국으로의 귀환 및 항복


식량 부족과 절망감에 시달리던 타탕카 이요타케는 결국 그의 가족을 포함한 186명의 부족민들과 함께 미국으로 돌아왔고, 1881년 7월 19일 항복했다. 타탕카 이요타케의 어린 아들 까마귀 발(Crow Foot영어)은 버포드 요새의 지휘관 데이비드 H. 브라더턴 소령에게 자신의 윈체스터 라이플을 건네주며 항복 의사를 밝혔다. 타탕카 이요타케는 브라더턴에게 "내가 우리 부족 중에서 총을 내려놓고 항복한 마지막 사람이란 것을 기억해주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다음날 지휘관 숙소에서 열린 작은 기념식에는 4명의 병사와 20명의 전사, 그리고 다른 손님들이 모였다. 브라더턴 소령은 병사들과 백인들을 이제 친구로 여겨주기를 바랐고, 타탕카 이요타케는 아들에게 세상을 배우는 새로운 방법을 가르쳐 줄 사람이 있는지 물었다. 그는 아들이 영어를 읽고 쓸 줄 알기를 바랐다. 2주 후, 캐나다에 남아있던 다른 부족원들이 모두 합류하자, 타탕카 이요타케와 그의 부족은 예이츠 요새 인근의 스탠딩락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이송되었다. 이 보호구역은 현재 노스다코타주와 사우스다코타주의 경계에 걸쳐 있다. 타탕카 이요타케는 50세가 되었고, 미군 중위 윌리엄 보웬은 그를 보고 "견뎌온 심로와 굶주림이 역력했고, 그는 늙어 있었다. 증오스러운 백인에게 항복하고 그가 원했던 독립을 포기하는 것은 그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주었다. 그는 심하게 지쳐 있었다"고 동정했다. 미국은 그가 다시 반란을 일으킬 것을 우려하여 보호구역 남단에 위치한 랜들 요새로 보내 2년 동안 전쟁 포로로 구금했는데, 이는 타탕카 이요타케의 항복 합의 조건을 위반한 것이었다.
4.2. 보호구역에서의 삶과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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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구역에 들어간 후에도 타탕카 이요타케는 다른 훙크파파족과 어울리지 못하도록 분리되어 인디언 관리국의 감시를 받았다. 미국 육군 당국은 그가 최근 항복한 북부 부족들 사이에서 문제를 일으킬 것을 우려했다. 1881년 8월 26일, 미국 인구조사원 윌리엄 T. 셀윈이 방문하여 타탕카 이요타케의 직계 가족은 12명이었고, 그를 따르는 부족민은 41가구 총 195명으로 기록했다.
미군은 이들을 전쟁 포로로 간주하고 미주리강을 따라 증기선에 실어 오늘날 사우스다코타주 픽스타운 근처의 랜들 요새로 이송했다. 그들은 그곳에서 다음 20개월을 보냈다. 1883년 5월, 그들은 다시 북쪽의 스탠딩락 관리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1883년, 타탕카 이요타케가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세례를 받았다는 소문이 뉴욕 타임스에 보도되었지만, 스탠딩락 관리국의 인디언 요원 제임스 맥러플린은 이러한 보도를 일축하며 "내가 아는 한 시팅 불의 세례는 잘못된 보도이다. 그러한 의식이 임박했다는 징후는 없다"고 말했다.
1883년 타탕카 이요타케는 북서쪽으로 510 km 떨어진 미주리강변의 스탠딩락 보호구역 관리 사무소로 이송되었다. 이 보호구역의 감독관은 백인과 수족 혼혈 아내를 둔 제임스 맥러플린이었다. 맥러플린은 타탕카 이요타케의 영향력을 매우 경계했다. 맥러플린은 사사건건 그에게 간섭했고, 그가 두 명의 아내를 두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간섭하며 한 명만 두도록 강요했다. 타탕카 이요타케는 "그렇게 말할 거라면, 당신이 직접 아내들 각자에게 가서 말해보라"고 대답했다. 인디언 사회에서는 결혼과 이혼이 개인의 자유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무장 해제되고 보호구역에 들어온 타탕카 이요타케를 백인 사회는 명사로 대우하기 시작했다. 백인들은 그를 "모든 수족의 대지도자"라고 오해했기 때문에, 아파치족의 제러니모를 그렇게 대했듯이, 그를 구경거리로 재미있어했다.
5. 대중문화 활동
타탕카 이요타케는 백인 사회와의 교류를 통해 자신의 부족이 처한 현실을 알리고자 노력했다. 그는 버펄로 빌의 와일드 웨스트 쇼에 출연하며 대중의 이목을 끌었지만, 그 과정에서도 아메리카 원주민의 존엄성을 지키려 했다.
5.1. 애니 오클리와의 만남
1884년, 쇼 흥행사 앨버런 앨런은 인디언 요원 제임스 맥러플린에게 타탕카 이요타케가 '시팅 불 커넥션'이라는 쇼에 출연하여 캐나다와 미국 북부를 순회 공연하는 것을 허락해달라고 요청했다. 이 순회 공연 중에 타탕카 이요타케는 오늘날 미네소타주에서 애니 오클리를 만났다. 앨런은 타탕카 이요타케를 "커스터 중령을 죽인 장본인"이라고 선전했고, 그가 우호적인 인사를 건네는 옆에서 이를 백인 군중에게 리틀빅혼 전투의 끔찍한 이야기로 왜곡하여 소개했다.
타탕카 이요타케는 명사수 애니 오클리의 묘기 사격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65 USD를 지불하여 함께 사진을 찍었다. 오클리는 키가 1.5 m (5 ft)에 불과했지만 무대 위에서 양손으로 놀라운 사격 솜씨를 뽐냈다. 타탕카 이요타케는 오클리가 양손으로 그렇게 정확하게 쏠 수 있는 것은 초자연적인 "축복"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의 존경은 상호적이었다. 오클리 또한 타탕카 이요타케가 자신을 "매우 귀여워했다"고 말했다. 이러한 존경심의 결과로, 그는 1884년 오클리를 상징적으로 양녀로 삼고 "리틀 슈어 샷"(Little Sure Shot영어, 귀여운 백발백중)이라는 아메리카 원주민식 이름을 지어주었다. 오클리는 이후 자신의 경력 내내 이 이름을 사용했다. 그러나 앨런이 약속했던 대통령과의 만남은 결국 이행되지 않았다.
5.2. 와일드 웨스트 쇼 출연


1885년, 타탕카 이요타케는 버펄로 빌 코디의 《버펄로 빌의 와일드 웨스트》 쇼에 출연하기 위해 보호구역을 떠나는 것이 허락되었다. 그는 한 번 경기장을 도는 대가로 매주 약 50 USD를 벌었으며, 대중에게 인기 있는 볼거리였다. 그가 쇼 중에 라코타어로 관객을 저주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역사가 우틀리는 이를 부인했다. 역사가들은 타탕카 이요타케가 쇼 출연 당시 젊은이들을 위한 교육과 수족과 백인 간의 관계 개선에 대한 연설을 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역사가 에드워드 라자러스는 타탕카 이요타케가 1884년 노던 퍼시픽 레일웨이 완공을 축하하는 공연에서 라코타어로 저주를 한 것이 맞다고 기록했다. 마이클 힐칙은 "앉은 소가 라코타어로 '나는 모든 백인을 증오한다'... '너희는 도둑이자 거짓말쟁이다. 너희는 우리 땅을 빼앗고 우리를 버림받게 만들었다'고 선언했지만, 통역사는 원래의 연설문(우호적인 태도로 작성된)을 읽었기 때문에 율리시스 S. 그랜트 대통령을 포함한 관객들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타탕카 이요타케는 4개월 동안 쇼에 출연한 뒤 집으로 돌아왔다. 이 기간 동안 관객들은 그를 유명인이자 낭만주의적인 전사로 여겼다. 그는 서명과 사진을 통해 상당한 수입을 올렸지만, 벌어들인 돈의 상당 부분을 노숙자와 거지들에게 주었다. 코디는 타탕카 이요타케를 그로버 클리블랜드 대통령에게 소개했지만, 부족의 어려운 상황을 호소하려던 그의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워싱턴 순회공연에서 그는 쇼를 보러 온 백인들에게 "너희들은 거짓말쟁이다. 우리 땅을 훔친 도둑이다"라고 연설했지만,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관중들은 큰 박수로 화답했다. 그는 코디와 친한 친구가 되었고, 코디는 그에게 회색 말과 솜브레로를 선물했다.
1887년, 버펄로 빌은 그에게 쇼의 런던 공연에 동행하여 빅토리아 여왕의 즉위 50주년 기념식에 참석할 것을 제안했지만, 그는 거절하며 "내가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것은 우리의 주장에 좋지 않다. 나는 여기서 할 일이 많다. 우리 땅에 대해 할 말이 많다"고 말했다.
미국은 다시 조약을 위반하여 서부 다코타의 수족 보호구역에서 4.00 만 km2의 땅을 4000 km2당 0.5 USD라는 놀랍도록 싼 가격에 사들이려 했다. 이미 평원에는 그들의 생명줄인 들소가 사라진 상태였다. 백인들은 인디언들을 멸망시키기 위해 들소를 멸종시켰다. 미국은 사들인 수족의 땅을 백인 정착민들에게 4000 km2당 25 USD에 팔아넘길 계획이었다. 타탕카 이요타케는 백인들의 이러한 제안에 강력히 반발하며 다른 보호구역의 수족들을 설득했다.
1888년 8월, 정부 관리들이 수족의 땅을 헐값에 사들이기 위해 스탠딩락 관리 사무소에 왔다. 예이츠 요새에서 수많은 미국 대표들 앞에서 타탕카 이요타케는 열변을 토하며 미국의 협박성 협상을 교묘하게 방해했고, 관리들이 그의 발언을 막으려는 시도가 여러 차례 있었다. 타탕카 이요타케는 추장들과 합의하여 결국 백인들이 제안한 토지 매각 '수용' 또는 '거부' 문서에 거의 전원 거부 서명을 했다.
1888년 10월 15일, 워싱턴 D.C.에서 제임스 맥러플린 보호구역 감독관의 주도로 타탕카 이요타케를 비롯한 수족 대표단 60명과 내무장관 윌리엄 바이러스 간의 협상이 열렸다. 미국은 매입 가격을 4000 km2당 1 USD까지 올렸지만, 수족은 납득하지 못했다. 고향에서는 보호구역 감독관의 태만과 횡령으로 식량 연금이 제대로 배급되지 않아 부족민들은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었다. 1889년, 미국은 매입 가격을 4000 km2당 1.25 USD까지 올리고, 도스법에 따라 "수족 세대주 한 명당 130 ha의 토지를 부여한다"는 조건을 추가했다. 또한, 백인들에게 땅을 속아 빼앗기지 않도록 "이 토지의 권리를 25년간 연방 정부에 신탁 보류시킨다"고 명시했다. 이 조건 하에 수족은 미국에 떠밀려 각자 토지 매각 합의 문서에 서명했다. 타탕카 이요타케는 분노에 차 "인디언이라고? 나 말고는 더 이상 인디언이 남아있지 않다!"고 말했다. 이 도스법의 "수족 세대주 한 명당 130 ha의 토지를 부여한다"는 조건은 큰 문제를 내포하고 있었다. 인디언 사회는 모계 중심이었고, 재산권은 원래 아내가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부계 사회의 규칙을 강제로 적용하여 재산권을 모계에서 부계로 옮기는 이 정책은 인디언 사회를 혼란시키고 붕괴시키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타탕카 이요타케의 부족이 처한 곤경에 대한 호소는 동부 백인 사회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1889년 봄, 뉴욕 사교계의 백인 여성 캐롤라인 웰던이 그의 "초상화를 그리고 싶다"며 보호구역을 찾아왔다. 이 화가는 동부 백인 단체인 전국 인디언 방어 협회(National Indian Defense Association영어, NIDA)의 회원이었으며, 초상화 제작을 핑계로 그와 친분을 쌓고 "타탕카 이요타케를 뉴욕으로 데려가 인디언 보호구역을 백인에게 개방하려는 미국의 정책을 비판하는 유세를 펼치게 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제임스 맥러플린 보호구역 감독관은 이에 놀라 타탕카 이요타케가 보호구역을 떠나는 것을 금지하여 그녀의 계획을 좌절시켰다. 또한 맥러플린은 "웰던이 타탕카 이요타케와 연인 관계이며, 그에게 나폴레옹이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전기를 읽어주며 다시 반란 충동을 부추기고 있다"는 근거 없는 소문을 퍼뜨렸다. 타탕카 이요타케의 집에서 웰던은 살아남은 그의 두 아내와 함께 집안일과 식사 준비를 도왔는데, 이는 인디언들에게는 구혼의 의사를 나타내는 행동이었다. 타탕카 이요타케는 인디언의 예의에 따라 그녀에게 구혼했지만, 웰던은 이를 모욕으로 오해하고 완성된 초상화를 남기고 뉴욕으로 돌아갔다. 웰던이 그린 타탕카 이요타케의 초상화는 몇 달 후 그가 암살당했을 때 인디언 경찰에 의해 칼로 옆구리가 찢겨졌다.
6. 유령의 춤 운동과 죽음
타탕카 이요타케는 유령의 춤 운동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존재 자체가 미국 정부에게는 위협으로 인식되었다. 이는 결국 그의 비극적인 죽음으로 이어졌고, 아메리카 원주민 저항 운동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6.1. 유령의 춤 운동 참여
타탕카 이요타케가 《버펄로 빌의 와일드 웨스트》 쇼 출연을 마치고 스탠딩락 관리국으로 돌아온 후, 그와 감시자였던 인디언 요원 맥러플린 사이에는 긴장이 고조되었다. 특히 그레이트 수 보호구역의 일부를 분할하여 매각하려는 움직임이 생긴 후 갈등은 더욱 격화되었다. 1889년, 인디언 권리 활동가이자 전국 인디언 방어 협회(National Indian Defense Association영어, NIDA) 회원이었던 캐롤라인 웰던은 뉴욕 브루클린에서 타탕카 이요타케를 찾아와 그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옹호했다. 웰던은 어린 아들 크리스티와 함께 그랜드강에 있는 그의 거처에서 그와 그의 가족과 함께 생활하며 그의 비서 역할을 자처했다.
1889년과 1890년 겨울은 혹독하게 추웠고, 수족 보호구역은 가뭄에 시달렸다. 부족의 아이들은 영양실조로 인해 홍역, 독감, 백일해 등에 걸려 대량 사망했다. 게다가 기상 이변으로 보호구역에 흉작이 들었다. 사냥 민족인 평원 인디언들은 농업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 무렵, 파이우트족인 워보카(Wovoka영어, 나무꾼)가 네바다주 동부에서 대평원에 이르기까지 아메리카 원주민들 사이에 새로운 종교 운동인 유령의 춤(Nanissáanah카도어)의 열풍을 불러왔다. 그들은 이 춤 의식을 통해 죽은 선조들이 부활하고 사라진 들소들이 평원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다. 이 춤에는 총알을 막아준다고 알려진 셔츠도 포함되었다. 이 운동이 스탠딩락에 전해졌을 때, 타탕카 이요타케는 춤추는 사람들을 자신의 캠프에 받아들였다. 그가 직접 춤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이 운동의 주요 선동자로 여겨졌다. 이 소식은 인근 백인 정착촌에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이 무렵 타탕카 이요타케는 과거 독수리로부터 예언을 받았던 바위산에 다시 올랐다. 바위산 정상에는 야생 종달새 한 마리가 있었다. 종달새는 그에게 "너는 수족에게 살해될 것이다"라고 예언했다. 수족의 '차는 곰'(Kicking Bear영어)은 보호구역을 몰래 빠져나와 워보카를 만나 그의 교리에 감명받아 이를 수족에게 전파했다. 수족들 사이에서 유령의 춤은 순식간에 유행했으며, '유령의 춤 셔츠'를 입으면 백인의 총알을 튕겨낼 수 있다는 교리를 덧붙였다. 타탕카 이요타케는 이 교리를 믿지 않았다. 그도 유령 춤을 시도했지만, 결국 '차는 곰'에게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백인의 총알을 막아주는 옷을 얻을 수 있다"는 그들의 교리에 제임스 맥러플린 보호구역 감독관은 강한 경계심을 품었다. 맥러플린은 타탕카 이요타케가 이 유령의 춤의 주모자라고 오해한 채 정부에 보고했고, 타탕카 이요타케에게 일련의 의식을 중단하라고 명령했다. 타탕카 이요타케는 맥러플린의 요구에 이렇게 답했다. "그럼 당신과 함께 이 춤을 전파한 인디언 부족들을 돌아다녀 보자.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춤을 처음 시작한 부족에게 가서, 그들이 구세주를 불러내지 못하고 죽은 자도 부활하지 않았다면, 나는 돌아가 수족에게 그것이 모두 거짓말이라고 말해주겠다. 만약 정말로 구세주를 보았다면, 당신은 그대로 춤을 계속하게 해야 할 것이다." 맥러플린은 이 말을 속임수로 받아들이고, 이 종교의 주모자가 타탕카 이요타케라는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맥러플린은 정부에 이렇게 보고했다. "스탠딩락 보호구역에 관한 한, 이 종교는 처음부터 시팅 불에게 이용당한 것이다. 그는 수족에 대한 과거의 영향력을 잃었기 때문에, 부족에 대한 지도력을 되찾으려고 이를 도입하고 이용하려 했다. 그렇게 하면 그는 자신이 목표로 하는 어떤 비도덕적인 계획에도 안심하고 부족을 이끌 수 있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수족을 비롯한 인디언 사회에는 '개인의 지도자'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것은 합의로 결정되었으므로, 맥러플린의 이러한 생각은 인디언 문화에 대한 오해였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보호구역 인디언 부족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보호구역 감독관이라는 점이었다. 또한 파인리지 보호구역의 감독관 대니얼 F. 로이어는 유령의 춤의 유행을 수족 반란의 전조로 보고, 1890년 11월 중순에 "눈 속에서 인디언들이 미친 듯이 춤을 추며 흉포해지고 있으니, 당장 우리를 보호해 달라"고 미국 정부에 전보를 보냈다.
이렇게 로이어와 맥러플린의 보고에 따라, 미국 정부는 "어떤 폭동도 진압하도록 경계하라"는 지시를 각 인디언 보호구역의 미군에 내렸다. 요새에 수천 명 단위로 속속 집결하는 미군 병사들의 모습에 수족은 학살에 대한 위기감을 느끼고, 많은 부족원들이 관리 사무소를 중심으로 정해진 거리 내에서 벗어나 블랙힐스 동쪽에 있는 바위산 지대인 배드랜즈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미군은 보호구역에서 도망친 자들을 적으로 간주하고 이들을 체포하기 위해 출동했다. 타탕카 이요타케는 그랜드강 근처에 머물렀지만, 백인들은 인디언의 대이동을 타탕카 이요타케의 선동에 의한 것으로 단정했다.
6.2. 죽음

백인들은 타탕카 이요타케를 '선동자'로 체포하기를 원했고, 군과 민간이 체포권을 놓고 다퉜다. 가장 먼저 나선 것은 맥러플린 보호구역 감독관이었다. 넬슨 마일스 장군은 민간인인 보호구역 감독관을 경멸했으며, 맥러플린을 따돌리기 위해 타탕카 이요타케의 오랜 친구인 버펄로 빌 코디를 이용하여 요새로 유인하려 했다. 이에 맥러플린은 자신이 무시당한 것에 분노하여 연방 정부에 호소하여 마일스의 계획을 저지했다.
1890년 12월 14일, 타탕카 이요타케가 스탠딩락 보호구역 남쪽에 있는 파인리지 보호구역 관리 사무소를 방문할 것이라는 소식을 들은 맥러플린은 이를 그의 체포를 위한 절호의 기회로 판단하고, '유령의 춤 주모자'라는 허위 보고를 통해 체포 영장을 발부받았다. 주변 인디언들을 경계하여 맥러플린은 그의 체포를 인디언 경찰에게 맡기기로 했다. '인디언 경찰'은 보호구역 관리관이 보호구역 내에서 순종적인 부족민들 중에서 선발한 인디언 경찰관이었다. 맥러플린은 이 임무를 수족 경찰관 헨리 불헤드 부경감에게 명령했다.
12월 15일 새벽 5시 30분경, 39명의 경찰관과 4명의 자원봉사자가 타탕카 이요타케의 집을 포위했다. 불헤드는 노크를 하고 들어가 체포를 알리고 그를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셰이프헤드 경사가 "저항하면 이 자리에서 사살하겠다"고 경고했다. 타탕카 이요타케는 "좋다, 옷을 입을 테니 기다려 달라"고 말했지만, 제압당한 채 옷을 입도록 강요받았고, 이로 인해 몸싸움이 벌어졌다. 이 사태에 집 주변에는 수족 부족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타탕카 이요타케는 집 밖으로 끌려 나왔을 때 각오를 다졌다. 그는 "나는 가지 않겠다!"고 외쳤다.
타탕카 이요타케의 외침을 들은 한 인디언이 불헤드 부경감에게 소총을 발사했지만 빗나갔다. 불헤드는 중상을 입고 쓰러지면서도 타탕카 이요타케의 가슴에 총탄을 박아 넣었다. 그를 제압하고 있던 레드 토마호크 경사가 이 위대한 전사의 머리에 한 발을 더 쏘았다. 순식간에 인디언과 인디언 경찰 사이에 격렬한 총격전이 벌어졌고, 인디언 경찰 6명과 인디언 마을 주민 8명이 사망했다. 이 중에는 타탕카 이요타케의 17세 아들 까마귀 발과 의붓동생 '뛰는 소'도 포함되어 있었다. 타탕카 이요타케는 정오에서 오후 1시 사이에 숨을 거두었다.
7. 장례와 유해


타탕카 이요타케의 시신은 군용 마차에 실려 예이츠 요새로 압송되었다. 그곳의 미국 육군 목수가 만든 관에 안치되어 예이츠 요새 부지에 묻혔다. 그의 유해가 사우스다코타주로 옮겨진 후, 그의 매장지를 표시하기 위한 기념비가 설치되었다.
1953년, 라코타족 가족들은 타탕카 이요타케의 유해라고 믿는 것을 발굴하여 그의 출생지 근처인 사우스다코타주 모브리지로 이장했다. 그곳에 그를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졌다.
8. 유산과 평가
타탕카 이요타케는 아메리카 원주민 저항의 상징이자, 그의 백인 적대자들의 후손들에게도 존경받는 인물로 남아있다. 그의 삶은 아메리카 원주민의 주권과 문화적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투쟁의 역사를 대변하며,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8.1. 문화적 상징성
타탕카 이요타케가 사망한 후, 그가 살던 오두막은 1893년 시카고 세계 박람회로 옮겨져 전시되었다. 박람회 기간 동안 아메리카 원주민 무용수들이 그 앞에서 공연을 펼쳤다. 1989년 9월 14일, 미국 우정청은 '위대한 미국인 시리즈'의 일환으로 타탕카 이요타케의 초상이 담긴 28 cent 우표를 발행했다.
1996년 3월 6일, 스탠딩락 컬리지는 타탕카 이요타케를 기리기 위해 이름을 시팅 불 컬리지로 개명했다. 이 대학은 노스다코타주와 사우스다코타주에 걸쳐 있는 스탠딩락 지역의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고등 교육을 제공하고 있다. 2010년 8월, 코펜하겐 대학교의 고대 DNA 전문가인 에스케 빌러슬레브가 이끄는 연구팀은 타탕카 이요타케의 후손들의 승인을 받아 그의 생전에 얻은 머리카락 샘플을 사용하여 그의 게놈을 시퀀싱할 의사를 발표했다. 2021년 10월, 빌러슬레브는 라코타족 작가이자 활동가인 어니 라포인트가 타탕카 이요타케의 증손자이며, 그의 세 자매가 타탕카 이요타케의 생물학적 증손녀임을 DNA를 통해 확인했다.
그는 아메리카 원주민 저항 운동의 상징이자, 과거 그의 적이었던 이들의 후손들에게도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다.
8.2. 대중문화에서의 재현
타탕카 이요타케는 여러 할리우드 영화와 다큐멘터리의 주제 또는 주요 인물로 등장했으며, 이는 그와 라코타 문화에 대한 미국 사회의 변화하는 인식을 반영한다.
- 《시팅 불: 적대적인 수족 인디언 추장》(Sitting Bull: The Hostile Sioux Indian Chief영어, 1914년)
- 《스피릿 레이크 학살의 시팅 불》(Sitting Bull at the Spirit Lake Massacre영어, 1927년) - 치프 요울라치가 주연을 맡았다.
- 《애니 오클리》(Annie Oakley영어, 1935년) - 치프 선더버드가 연기했다.
- 《애니여 총을 잡아라》(Annie Get Your Gun영어, 1950년) - J. 캐럴 나이시가 연기했다.
- 《대추장》(Sitting Bull영어, 1954년) - J. 캐럴 나이시가 다시 주연을 맡았다. 일본어 제목은 '대추장'이지만, 타탕카 이요타케는 추장이 아니었다.
- 《샤이엔》(Cheyenne영어, 1957년) - 프랭크 데코바가 타탕카 이요타케 역을 맡았다.
- 《버펄로 빌과 인디언들, 또는 시팅 불의 역사 수업》(Buffalo Bill and the Indians, or Sitting Bull's History Lesson영어, 1976년) - 프랭크 카퀴츠가 연기했다.
- 《크레이지 호스》(Crazy Horse영어, 1995년) - 영어, 모호크, 스위스-독일계 배우 어거스트 셸렌버그가 타탕카 이요타케 역을 맡았는데, 그는 이 역할이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역할이었다고 말했다.
- 《버펄로 걸스》(Buffalo Girls영어, 1995년 미니시리즈) - 러셀 민스가 연기했다.
- 《헤리티지 미닛: 시팅 불》(Heritage Minute: Sitting Bull영어, 캐나다 60초 단편 영화) - 그레이엄 그린이 연기했다.
- 《서부로》(Into the West영어, 2005년 미니시리즈) - 에릭 슈바이크가 연기했다.
- 《시팅 불: 내 심장의 돌》(Sitting Bull: A Stone in My Heart영어, 2006년 다큐멘터리)
- 《내 심장을 운디드니에 묻어주오》(Bury My Heart at Wounded Knee영어, 2007년) - 어거스트 셸렌버그가 연기했다.
- 《여인이 앞서 걷다》(Woman Walks Ahead영어, 2017년) - 마이클 그레이아이즈가 연기했다.
8.3. 기념
- 덴마크 빌룬에 있는 레고랜드 빌룬에는 11 m (36 ft) 높이의 레고로 만든 타탕카 이요타케 조형물이 있다.
- 컴퓨터 게임 《시드 마이어의 문명 IV》에서 아메리카 원주민 문명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아동 도서 《나는 너에게 노래한다: 내 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13명의 위대한 미국인 중 한 명으로 언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