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타라스 흐리호로비치 셰우첸코는 농노의 아들로 태어나 유년 시절부터 농노로서의 고난을 겪었으며, 이후 예술적 재능을 인정받아 농노 신분에서 해방되었다. 그는 제국 예술 아카데미에서 수학하며 문학적, 예술적 성공을 거두었으나, 우크라이나의 비참한 현실을 목격하고 정치적 활동에 참여하면서 체포와 유배를 경험하게 된다. 그의 삶은 농노제와 전제군주제에 대한 저항, 그리고 우크라이나 민족 해방을 향한 열정으로 점철되었다.
1.1. 유년기와 초기 생활

셰우첸코는 1814년 3월 9일(율리우스력 2월 25일) 러시아 제국 키예프현 모린치 마을에서 농노인 흐리호리 이바노비치 셰우첸코와 카테리나 야키미우나 셰우첸코(보이코)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두 명의 누나 카테리나와 형 미키타가 있었고, 아래로는 남동생 요시프와 눈먼 여동생 마리아가 있었다. 그의 부모는 원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백성이었으나, 러시아 제국에 의해 우크라이나 영토가 병합되면서 농노 신분이 되었다. 가족 전설에 따르면 타라스의 조상은 17세기와 18세기 자포리자에서 복무하며 코사크 봉기에 참여했던 코사크 출신이었다.
1816년, 셰우첸코 가족은 엔겔하르트 소유의 또 다른 마을인 키릴리우카(현재의 셰우첸코베)로 이주했으며, 타라스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그곳에서 태어났다. 소년은 이 마을에서 성장했다. 1822년부터 셰우첸코는 글을 배우기 위해 마을 교회의 성가대 지휘자인 "소우히르"라는 별명을 가진 선생에게 보내졌다. 그는 매주 토요일 아이들을 때리는 엄격한 훈육자였다.
1823년 9월 1일(율리우스력 8월 20일) 어머니 카테리나 셰우첸코가 사망했다. 여섯 자녀(13세에서 4세 사이)를 돌보게 된 홀아비 흐리호리는 재혼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모린치 출신의 과부 옥사나 테레셴코와 결혼했는데, 그녀에게는 세 자녀가 있었다. 흐리호리는 1825년 4월 2일(율리우스력 3월 21일) 병으로 사망했으며, 한동안 계모가 타라스와 그의 형제자매들을 잔인하게 대했다. 이후 할아버지 이반 셰우첸코에 의해 계모가 쫓겨났다. 한동안 타라스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형제인 파블로와 함께 살았으며, 돼지치기나 마부 보조원으로 일했다. 12세에 그는 마을 성가대 지휘자이자 교사였던 보호르스키(Sovhyr를 대체) 밑에서 학생 보조원이자 하인으로 일하기 위해 집을 떠났다. 보호르스키는 이전 스승보다 훨씬 더 폭력적이었으며, 셰우첸코의 의무 중 하나는 죽은 자에게 시편을 읽어주는 것이었다. 셰우첸코의 계모가 그의 정부가 되자 보호르스키는 소년을 더욱 폭력적으로 대했다.
1827년 2월, 13세의 셰우첸코는 마을을 탈출하여 리시안카의 부제 밑에서 며칠 일한 후, 타라시우카로 이동했다. 예술가가 되려는 시도가 좌절되자 그는 고향 마을로 돌아왔다. 이 무렵 셰우첸코는 그의 첫사랑인 옥사나 코발렌코를 만났다. 이 사실은 그가 나중에 쓴 시 「마리아나, 수녀」(Mariana, the nun)에 대한 헌사에서 확인된다.
이 시기 셰우첸코는 형 미콜라에게서 수레 제작 기술을 배웠고, 키릴리우카의 사제인 흐리호리 코시치아 가족과 함께 살면서 일했다. 코시치아는 타라스를 잘 대해주었다. 그의 임무는 사제의 아들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부르티와 슈폴라 시장에 과일을 운반하는 것이었다.
1.2. 농노 생활과 예술 활동의 시작

1828년 엔겔하르트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중 한 명인 파블로 엔겔하르트가 셰우첸코 가족의 새로운 지주가 되었다. 당시 14세였던 타라스 셰우첸코는 빌샤나 영지에서 새 주인의 부엌 하인이자 코자초크(궁정 하인)로 훈련받았다. 그곳에서 그는 러시아 귀족의 사치를 처음으로 보게 되었다.
1829년, 셰우첸코는 연대 주둔지인 바르샤바로 이동하는 엔겔하르트 일행의 일원이었다. 1829년 말 그들은 빌노(현 빌뉴스)에 도착했다. 1829년 12월 18일(율리우스력 12월 6일), 엔겔하르트는 한밤중에 셰우첸코가 코사크 장군 마트베이 플라토프의 초상화를 그리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소년의 뺨을 때리고 채찍질을 명령했다. 일행이 바르샤바에 도착하자 엔겔하르트는 자신의 하인을 화가-장식가에게 견습생으로 보내기로 주선했고, 그 화가는 소년의 예술적 재능을 인정하고 폴란드 화가이자 전문 예술가인 프란치셰크 크사베리 람피에게서 수업을 받을 것을 추천했다.
1830년 11월 봉기가 발발하자 엔겔하르트와 그의 연대는 바르샤바를 떠나야 했다. 셰우첸코를 포함한 그의 하인들은 나중에 도시에서 추방되어 무장 경비 아래 폴란드 영토를 떠나야 했고, 이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향했다. 그곳에 도착하자 셰우첸코는 시동의 삶으로 돌아갔다. 그의 예술 훈련은 1년 동안 지연되었고, 그 후 그는 바르샤바의 주인보다 훨씬 더 잔인하고 통제적인 인물인 화가 바실리 시리야예프 밑에서 4년간 공부할 수 있었다. 여름밤은 셰우첸코가 도시의 여름 정원을 방문하여 조각상들을 그릴 수 있을 만큼 밝았다.
셰우첸코는 자신의 소설 『예술가』에서 아카데미 이전 시기에 『아폴로 벨베데레』, 『프라클레테』, 『헤라클레이토스』, 『건축물 부조』, 『운명의 가면』과 같은 작품들을 그렸다고 묘사했다. 그는 견습생으로서 볼쇼이 극장의 그림 작업에 참여했다. 1830년 제국 예술 아카데미 공모전을 위해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의사 필리포스에게 신뢰를 보이다』라는 작품이 제작되었다.
1.3. 농노 해방과 아카데미 생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여름 정원에서 그림을 복사하던 중, 셰우첸코는 자신의 고향 마을 근처 보후슬라우 출신의 젊은 우크라이나 예술가이자 제국 예술 아카데미 학생이었던 이반 소셴코와 알게 되었다. 소셴코는 셰우첸코의 그림에 관심을 보였고, 젊은이의 재능을 인정했다. 셰우첸코는 주말과 주중 여가 시간에 소셴코에게서 소묘와 수채화 수업을 받을 수 있었다. 셰우첸코는 초상화가로서 상당한 진전을 보여 엔겔하르트가 그에게 자신의 정부들을 초상화로 그려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소셴코는 셰우첸코를 에르미타주 박물관을 포함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미술관들로 데려갔다. 그는 셰우첸코를 작가이자 시인인 예우헨 흐레빈카, 미술사학자 바실 호리호로비치, 러시아 화가 알렉세이 베네치아노프와 같은 다른 동포들에게 소개했다. 이들을 통해 셰우첸코는 1832년 6월경 당시 가장 인기 있던 화가인 카를 브률로프에게 소개되었다. 브률로프는 셰우첸코에게 관심을 보이며 그의 작품을 칭찬하고 그를 제자로 받아들일 의향을 밝혔다. 그러나 농노 신분이었던 셰우첸코는 아카데미에서 브률로프 밑에서 공부할 자격이 없었기 때문에 브률로프는 엔겔하르트에게 그의 자유를 요청했으나 거절당했고, 이는 브률로프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엔겔하르트는 2500 RUB의 비용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자신의 하인을 풀어주기로 설득되었다. 이 금액을 모으기 위해 브률로프는 러시아 시인 바실리 주콥스키의 초상화를 그려 황실 가족을 위한 복권 경품으로 내놓았으며, 당첨 복권은 황후가 뽑았다. 엔겔하르트는 1838년 5월 5일(율리우스력 4월 22일) 셰우첸코를 농노 신분에서 해방시키는 서류에 서명했다.
제국 예술 아카데미의 학생이 되고 브률로프의 멘토링을 받게 된 후, 셰우첸코는 대부분의 시간을 아카데미와 브률로프의 스튜디오에서 보냈다. 그들은 함께 문학 및 음악의 밤에 참석하고 작가와 예술가들을 방문했다. 셰우첸코의 사교 생활은 그의 지평을 넓히고 창의력을 자극했다. 이 시기 그의 친구로는 평생 친구가 된 작가이자 흑해 코사크 부대의 장교인 야코프 쿠하렌코와 예술가 카를 요아힘이 있었다.
1838년 6월부터 11월까지 셰우첸코의 시험 성적이 향상되어 구도 드로잉 수업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수업에서 그린 초기 그림 중 하나인 『코사크 연회』는 그해 12월에 완성되었다. 다음 달 그의 작품은 제국 예술 장려회로부터 인정받아 매달 30 RUB의 유지비를 받기로 합의했다.
1839년 4월, 셰우첸코는 아카데미 평의회로부터 은메달을 수상했다. 그는 유화 기법을 숙달하기 시작했으며, 『성 세바스티아누스 포즈의 모델』은 그의 초기 시도 중 하나였다. 11월부터 그는 장티푸스로 심하게 앓았다. 그해 그는 유화 『개에게 빵을 주는 거지 소년』으로 또 다른 은메달을 받았다. 1841년 9월, 예술 아카데미는 셰우첸코에게 『집시 점술가』 그림으로 세 번째 은메달을 수여했다. 이듬해 5월, 잦은 결석으로 인해 예술 장려회는 그를 무료 하숙생 명단에서 제외할 수밖에 없었다. 수입을 벌기 위해 그는 니콜라이 나데즈딘의 『의지의 힘』 이야기, 올렉산드르 바슈츠키의 『우리의, 러시아인들이 자연에서 쓴』 출판물, 볼프강 프란츠 폰 코벨의 『갈바노그래피』(1843), 니콜라이 폴레보이의 『러시아 장군들』(1845)과 같은 책 삽화를 제작했다.
1839년 말, 셰우첸코는 조각가이자 미술 교사인 이반 마르토스를 만났는데, 그는 셰우첸코의 시에 큰 관심을 보였다. 그는 시를 출판할 것을 제안했지만, 셰우첸코는 즉시 동의하지 않았다. 흐레빈카는 『코브자르』(1840) 출판에 적극적이고 직접적인 역할을 했으며, 그가 원고를 상트페테르부르크 검열 위원회에 제출했다. 『코브자르』는 완판되었다. 이는 노골적으로 혁명적인 행동을 요구하지는 않았지만, 사회 불의에 대한 항의와 자유로운 삶에 대한 열망을 표현했다.
1840년 3월, 흐레빈카는 「프리치나」(Prychynna)와 「바람이 불어온다」(The wind is raging), 「푸른 바다로 흐르는 물」(Water flows into the blue sea)이라는 셰우첸코의 시를 포함한 문집 『라스티우카』(Lastivka)의 원고를 검열관에게 제출했다.
1841년, 셰우첸코는 그의 서사시 『하이다마키』를 자비로 출판했다. 이 시는 문학 비평가 비사리온 벨린스키로부터 날카로운 비판을 받았다. 그는 『오테체스트베니예 자피스키』(Otechestvennye Zapiski) 잡지에서 셰우첸코의 "낭만적인 거창한 독창성에 대한 경향"을 비판했다. 이 시기 셰우첸코가 쓴 다른 시로는 「마리아나 수녀」(Maryana the Nun), 「익사한 여자」(Drowned), 「맹인」(Blind Man) 등이 있다.
1.4. 우크라이나 방문과 정치적 참여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거주하는 동안 셰우첸코는 우크라이나를 세 번(1843년, 1845년, 1846년) 방문했다. 우크라이나인들이 겪는 어려운 상황은 시인이자 화가인 그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셰우첸코는 여전히 농노 신분이었던 그의 형제자매들과 다른 친척들을 방문했다. 그는 저명한 우크라이나 작가이자 지식인인 예우헨 흐레빈카, 판텔레이몬 쿨리시, 미하일로 막시모비치를 만났으며, 특히 바르바라를 포함한 레프닌 공작 가족과 친분을 쌓았다.
1844년, 러시아 제국 내 우크라이나 지역의 비참한 상황에 낙담한 셰우첸코는 고향의 역사적 유적과 문화 유물을 에칭 앨범에 담기로 결정했으며, 이를 『그림 같은 우크라이나』라고 불렀다. 그러나 자금 부족으로 인해 처음 여섯 점의 에칭만 인쇄되었다. 1845년에는 역사적인 장소의 수채화와 연필 그림으로 구성된 앨범이 제작되었다.
셰우첸코의 희곡 『맹인 미녀』는 1841년경에 쓰였으나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 1842년 그는 비극 『미키타 하이다이』의 일부를 발표했으며, 1843년에는 드라마 『나자르 스토돌리아』를 완성했다.
1842년 가을, 셰우첸코는 스웨덴과 덴마크로의 뱃길 여행을 계획했지만, 병으로 인해 레벨(현 탈린)에 도착한 후 집으로 돌아왔다.

1843년 5월, 셰우첸코는 우크라이나를 여행하며 미래의 성 키릴과 메토디우스 형제단 회원인 바실 빌로제르스키를 포함하여 가능한 한 많은 지식인, 시인, 예술가들을 만났다. 키이우에 머무는 동안 셰우첸코는 도시의 역사적 명소와 풍경을 스케치했다。 한 달 후 그는 야호틴으로 가서 부유한 레프닌 가족과 친분을 쌓았다. 1843년 10월, 그는 코사크의 영웅적인 과거를 상징하는 것으로 많은 우크라이나인들이 여기는 매장지에 대한 최근의 고고학 발굴을 방문한 후 시 「파헤쳐진 무덤」(The Dug Grave)을 썼다.
셰우첸코는 우크라이나와 그 과거와 관련된 장소와 사건을 에칭으로 새기고 설명하는 앨범 『그림 같은 우크라이나』를 출판할 계획이었으며, 그 수익으로 가족들의 자유를 살 작정이었다. 예술 장려회는 『그림 같은 우크라이나』 제작을 돕기 위해 300 RUB를 주었지만, 그의 서툰 계획과 사업 수완 부족으로 인해 의도했던 에칭 중 일부와 그에 딸린 텍스트만이 출판되었고, 형제자매들의 자유를 사기 위한 충분한 돈은 벌리지 못했다.
1.5. 체포와 유배 생활
1845년 3월 22일, 예술 아카데미 평의회는 셰우첸코에게 비특기 예술가(non-classed artist) 칭호를 수여했다. 그는 다시 우크라이나로 여행하여 역사가 미콜라 코스토마로우와 슬라브 민족의 연방체로의 변혁과 제국의 정치적 자유화를 지향하는 비밀 사회인 성 키릴과 메토디우스 형제단의 다른 구성원들을 만났다.
1844년, 셰우첸코는 러시아 상류층에 의한 우크라이나인들의 사회적, 민족적 억압을 묘사한 시 「꿈」(Dream)을 썼다. 2월, 그는 우크라이나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왔다. 이 시의 사본들은 사회 구성원들로부터 압수되었고, 스캔들의 주요 쟁점 중 하나가 되었다.
셰우첸코는 1847년 4월 5일 형제단 구성원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니콜라이 1세는 셰우첸코의 시 「꿈」을 읽었다. 비사리온 벨린스키는 그의 회고록에서 니콜라이 1세가 우크라이나어를 아주 잘 알았기 때문에 자신에 대한 부분을 읽을 때는 웃고 즐거워했지만, 그의 아내에 대한 부분을 읽었을 때는 금세 극심한 증오로 변했다고 기록했다. 셰우첸코는 황후가 데카브리스트의 난과 가족을 죽이려는 계획을 두려워하여 생긴 초라한 외모와 얼굴 경련을 조롱했던 것이다。 이 부분을 읽은 후 차르는 분개하며 "그가 나를 싫어할 이유가 있었겠지만, 그녀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는가?"라고 말했다.

알렉세이 표도로비치 오를로프의 공식 보고서에서 셰우첸코는 "소러시아어"(우크라이나어의 옛 러시아어 명칭)로 "어처구니없는 내용"의 시를 지어냈으며, 농노 신분에서 해방된 것에 대해 감사할 줄 모른다고 비난받았다. 보고서에서 오를로프는 셰우첸코의 죄목을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을 옹호하고 고무하며, 우크라이나의 노예화와 불행을 주장하고, 코사크 헤트만국과 코사크의 자유를 찬양하고, "믿을 수 없는 대담함으로 황실 인물들에게 비방과 악의를 퍼부었다"고 명시했다.
조사 기간 동안 셰우첸코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제3부서의 감옥에 수감되었다. 유죄 판결을 받은 후 그는 오렌부르크의 러시아 군사 주둔지 오르스크로 일등병으로 유배되었다. 니콜라이 1세는 직접 그의 형을 확정하며 "가장 엄격한 감시 아래,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릴 권리 없이"라는 문구를 추가했다. 그는 이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오렌부르크와 오르스크로 강제 행진하게 되었다.
이듬해인 1848년, 그는 부타코프 중위의 지휘 아래 함선 "콘스탄틴"을 타고 아랄해 최초의 러시아 해군 탐험대에 배정되었다. 공식적으로는 일반 병사였지만, 셰우첸코는 탐험대의 다른 구성원들과 동등하게 대우받았다. 그는 아랄해 연안의 다양한 풍경을 스케치하는 임무를 맡았다. 18개월간의 항해(1848~1849)를 마친 후, 셰우첸코는 스케치와 그림 앨범을 가지고 오렌부르크로 돌아왔다. 이 그림들 대부분은 탐험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위해 제작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19세기 중반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정복이 시작될 무렵, 아랄해의 자연과 카자흐족 사람들에 대한 많은 독특한 예술 작품을 창조했다.
그는 이후 최악의 유형지 중 하나인 망기슐라크 반도의 외딴 노보페트로프스크 요새로 보내져 7년간의 끔찍한 세월을 보냈다。 1851년, 동료 군인 브로니슬라프 잘레스키의 제안으로 마옙스키 중령은 그를 망기슐라크(카라타우) 지질 탐험대에 배정했다. 1857년, 셰우첸코는 새로운 황제의 사면을 받아 마침내 유배에서 풀려났지만,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오는 것은 허용되지 않고 니즈니노브고로드에 머물러야 했다.
1.6. 말년과 귀환

셰우첸코는 마침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오는 것이 허용되었다. 1858년 겨울, 그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셰익스피어 배우 아이라 올드리지의 연극 공연을 관람했다. 통역사를 통해 두 사람은 예술과 음악, 그리고 그들이 공유하는 억압 경험에 대한 대화를 나누며 좋은 친구가 되었다. 셰우첸코는 올드리지의 초상화를 그렸고, 올드리지는 나중에 미하일 미케신으로부터 셰우첸코의 초상화를 선물받았다.
1859년 5월, 셰우첸코는 우크라이나로 돌아갈 허락을 받았다. 그는 페카리 마을 근처의 땅을 사려고 했다. 7월, 그는 다시 신성 모독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풀려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1.7. 사망과 재매장

타라스 셰우첸코는 말년을 새로운 시, 그림, 판화 작업을 하고 이전 작품들을 편집하며 보냈다. 그는 또한 우크라이나 아이들을 위한 문법책인 『남부 러시아 문자표』의 출판을 만들고 자금을 지원했다. 그러나 유배 생활의 어려운 세월은 그에게 병을 안겨주었다. 셰우첸코는 1861년 3월 10일, 47번째 생일 다음 날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사망했다.
그는 처음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스몰렌스크 묘지에 묻혔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그의 장례식에는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이반 투르게네프, 미하일 살티코프-셰드린, 니콜라이 레스코프와 같은 러시아 문학계의 거장들이 참석했다. 그러나 시 「유언」(Zapovit)에서 표현된 셰우첸코의 우크라이나에 묻히고 싶다는 소원을 이루기 위해 그의 친구들은 그의 유해를 기차로 모스크바로, 그 다음 마차로 고향으로 이송하는 것을 주선했다. 셰우첸코는 5월 8일 카니우의 드니프로강 근처 체르네차 호라 (승려의 언덕; 오늘날 타라스 언덕)에 재매장되었다. 그의 무덤 위에는 높은 흙무덤이 세워졌으며, 현재는 카니우 박물관-보존 지역의 기념비적인 부분이 되었다.
사랑과 삶에서 끔찍한 불운에 시달리던 시인은 1861년 농노 해방이 발표되기 7일 전에 사망했다. 그의 작품과 삶은 전 세계 우크라이나인들에게 숭배받으며 우크라이나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2. 작품 활동
셰우첸코의 작품 활동은 시, 산문, 희곡을 망라하는 문학적 영역과 더불어 회화, 드로잉, 판화 등 다양한 시각 예술 영역에 걸쳐 있으며, 그의 철학적, 정치적 사상을 담고 있다. 그는 현대 우크라이나 문학과 예술의 기초를 다진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2.1. 문학 작품

셰우첸코는 총 237편의 시를 썼지만, 이 중 28편만이 러시아 제국에서 출판되었다. 그의 생애 동안 6편은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출판되었다. 그의 첫 시집 『코브자르』는 1840년에 발표되었고, 1841년에는 서사시 『하이다마키』가 출판되었다. 이 외에도 「마리아나 수녀」, 「익사한 여자」, 「맹인」과 같은 시와 아홉 편의 소설, 일기, 자서전 등이 있다. 셰우첸코의 희곡 『맹인 미녀』(1841년경)는 현재 전해지지 않지만, 1842년에는 비극 『미키타 하이다이』의 일부를, 1843년에는 드라마 『나자르 스토돌리아』를 완성했다.
그의 문학 작품은 현대 우크라이나 문학의 초석이자, 상당 부분 현대 우크라이나어의 기초로 간주된다. 그의 시는 사회 불의에 대한 항의와 자유로운 삶에 대한 열망을 표현했으며, 우크라이나인의 비참한 삶을 폭로하고 민족 의식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2.2. 예술 작품
셰우첸코의 알려진 회화 및 드로잉 작품 중, 주로 우크라이나, 러시아, 카자흐스탄과 관련된 835점이 원본 작품이나 그의 생애 동안 제작된 판화 또는 사본 형태로 남아 있다. 270점의 다른 작품들은 유실되었다. 셰우첸코는 캔버스에 유화, 수채화, 세피아, 먹물, 연필을 사용하여 초상화, 신화적, 역사적, 가사적 주제의 구성, 건축 드로잉, 풍경화는 물론, 에칭도 제작했다. 그의 예술적 스타일과 방법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스케치와 습작들도 알려져 있다. 그의 작품 중 서명된 작품은 거의 없으며, 날짜가 기재된 작품은 더욱 드물다.
그의 수많은 그림, 드로잉, 에칭 작품들은 그의 독특한 예술적 재능을 증명한다. 그는 또한 사진에도 실험적인 시도를 했으며, 셰우첸코가 러시아 제국에서 에칭 예술을 개척한 선구자 중 한 명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사실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1860년 제국 예술 아카데미로부터 에칭 분야의 업적으로 아카데미 회원 칭호를 수여받았다. 1844년에는 우크라이나의 역사적 유적과 문화 기념물을 에칭으로 담은 앨범 『그림 같은 우크라이나』를 제작하기도 했다.
2.3. 철학적, 정치적 견해

셰우첸코는 "우크라이나 사회 사상사에서 혁명적 민주주의적 경향의 창시자"이자 공상적 사회주의자로 간주된다. 그의 정치적, 미학적, 철학적 세계관은 알렉산드르 헤르첸, 비사리온 벨린스키, 니콜라이 도브롤류보프, 니콜라이 체르니솁스키와 같은 러시아 혁명적 민주주의자들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다. 그의 견해는 러시아 제국의 봉건-농노 제도의 위기 시대인 19세기 중반 우크라이나 농민의 이익을 반영했다. 셰우첸코는 폴란드 혁명 운동의 사상에도 강한 영향을 받았는데, 아담 미츠키에비치와 같은 작가들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초기 시에서는 우크라이나인에 대한 폴란드의 역사적 태도를 비판했지만, 말년에는 차르 체제에 맞선 폴란드와의 투쟁에서 동포들에게 연대를 촉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러시아 지주와 차르의 억압을 끊임없이 폭로하면서도 범슬라브주의적 견해를 공유했으며 러시아 지식인들과의 관계를 유지했다. 그의 태도는 17세기 우크라이나 코사크 지도자 보흐단 흐멜니츠키에 대한 그의 견해에서 알 수 있는데, 그는 흐멜니츠키를 "영광스러운 자 중의 영광스러운 자"로 칭찬하면서도 동시에 모스크바에 의한 우크라이나 자치권 청산을 위한 길을 열었다고 비판했다. 셰우첸코는 민주주의적 기반 위에서 슬라브 민족의 통일을 옹호했다.
러시아 비평가 니콜라이 도브롤류보프의 말에 따르면, 농노 신분에서 해방된 셰우첸코는 "민중의 시인... 그는 민중에게서 나왔고, 민중과 함께 살았으며, 생각뿐만 아니라 삶의 환경에서도 민중과 가깝고 혈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셰우첸코는 우크라이나의 비밀 정치 조직인 성 키릴과 메토디우스 형제단의 가장 적극적인 참여자 중 한 명이었고, 그 안에서 혁명적 핵심을 이끌었다. 그는 농민 봉기 계획에서 우크라이나에서의 자신의 혁명적 활동을 이용하고자 했던 페트라솁스키 서클 그룹(젊은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와 급진적 공상적 사회주의자들도 포함된 1840년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진보적 지식인 문학 토론 그룹)과 연관되어 있었다. 유배 후 셰우첸코는 문학, 사회, 정치 잡지 『소브레멘니크』와 그 편집자 니콜라이 체르니솁스키, 니콜라이 도브롤류보프와 가까워졌다.
셰우첸코는 현존하는 사회 시스템이 흔들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증기 기관의 발전으로 인해 농노 제도가 어디에서나 파괴될 것이고, 사회 생활의 근본적인 변화에 가장 중요한 역할은 대중이 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정신의 힘이 물질 없이는 드러날 수 없다고 주장했지만, 자신의 철학적 입장을 "유물론"이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그는 이 단어를 루트비히 뷔히너, 야코프 몰레쇼트, 카를 포크트와 같은 당시 사상가들의 저속한 유물론으로 이해했으며, 이를 거부했다. 시 「이단자」에서 셰우첸코는 평민의 이익과 슬라브 민족의 통일을 위한 15세기 초 보헤미아 종교 개혁가 얀 후스의 투쟁을 찬양했다.
셰우첸코의 미학적 견해에 따르면, 그가 그의 『일기』에서 표현했듯이, 아름다움의 원천은 자연이다. 자연의 영원한 아름다움에서 벗어나려는 어떤 시도도 예술가를 "도덕적 괴물"로 만든다. 셰우첸코는 민족적(민속적)이면서 동시에 사실적인 예술을 추구했으며, 그로 인해 체르니솁스키와 시인 사후 그의 유명한 초상화를 그린 러시아 이동파 화가 이반 크람스코이의 칭찬을 받았다.
1840년대와 1850년대, 제국 지식인 내부에서 혁명적 성향의 급진파와 온건한 자유주의파 사이의 정치적 투쟁 시대에 셰우첸코는 러시아 혁명적 민주주의자들의 편에 섰다. 지하로 퍼져나간 그의 투쟁 시는 농노제에 맞서는 싸움에서 날카로운 무기였다. 셰우첸코는 우크라이나의 혁명적 사회 사상과 이반 프랑코, 미하일로 코추빈스키, 레샤 우크라인카 등 전반적인 우크라이나 문화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3. 개인 생활
셰우첸코는 평생 독신으로 지냈다. 그는 여섯 명의 형제자매와 최소 세 명의 이복 형제자매가 있었다. 알려진 이복 형제자매는 스테판 테레셴코(1820년대 출생, 사망 미상)뿐이다. 일부 자료는 그를 우크라이나 산업가인 테레셴코 가문과 연관시키기도 한다.
그의 형제자매들은 다음과 같다.
- 카테리나 흐리호리우나 크라시츠카(셰우첸코)(1806~1850): 안톤 흐리호로비치 크라시츠키(1794~1848)와 결혼
- 야킴 크라시츠키
- 막심 크라시츠키(사망 미상~1910)
- 스테판 크라시츠키
- 페도라 크라시츠카(1824년경 출생, 사망 미상): 화가로 알려져 있다.
- 미키타 흐리호로비치 셰우첸코(1811~1870년경)
- 이리나 코우툰(셰우첸코)
- 프로코프 셰우첸코
- 페트로 셰우첸코(1847~1944년경)
- 마리아 흐리호리우나 셰우첸코(1814년경 출생, 사망 미상)
- 야리나 흐리호리우나 보이코(셰우첸코)(1816~1865): 페디르 콘드라티에비치 보이코(1811~1850)와 결혼
- 마리나 보이코
- 우스티나 보이코(1836년경 출생, 사망 미상)
- 일라리온 보이코(1840년경 출생, 사망 미상)
- 로흐빈 보이코(1842년경 출생, 사망 미상)
- 이반 보이코(1845년경 출생, 사망 미상)
- 라우렌티 보이코(1847년경 출생, 사망 미상)
- 마리아 흐리호리우나 셰우첸코(1819~1846)
- 요시프 흐리호로비치 셰우첸코(1821~1878): 먼 친척인 마트로나는 흐리호리우나 셰우첸코(1820년경 출생, 사망 미상)와 결혼
- 안드리 셰우첸코
- 이반 셰우첸코
- 트로힘 셰우첸코(1843년 9월 20일 출생, 사망 미상)
4. 유산과 평가
셰우첸코는 현대 우크라이나 문학과 민족 의식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작품은 오늘날에도 우크라이나인의 정체성과 저항 정신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그의 유산은 긍정적인 평가와 함께 일부 비판적 시각도 존재하며, 전 세계적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기념되고 있다.
4.1. 긍정적 평가와 영향

그의 문학적 유산은 현대 우크라이나 문학의 토대로 간주된다. 셰우첸코의 시는 우크라이나 민족 의식 발전에 기여했으며, 오늘날까지도 우크라이나의 지적, 문학적, 민족 생활의 다양한 측면에 그의 영향력이 느껴진다.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은 셰우첸코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사상과 자신만의 비전을 담은 예술 작품을 표현하는 방법을 성공적으로 찾아냈다.
그의 그림 작품의 영향은 종종 간과되지만, 오늘날 그의 예술적 작품은 문학 작품보다 더 높이 평가되기도 한다. 그의 그림 중 상당수는 독특한 예술 작품의 증거로 잘 보존되어 있다. 그는 또한 사진을 실험하기도 했으며, 러시아 제국에서 에칭 예술을 개척한 선구자 중 한 명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사실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1860년 에칭 분야의 업적으로 제국 예술 아카데미에서 아카데미 회원 칭호를 받았다.
셰우첸코의 여성에 대한 사회적 태도를 개선하는 데도 기여했다. 당시 여성은 "혼외" 임신 시 사회적으로 억압받고 배제되었다. 셰우첸코는 사회의 통념에 굴하지 않고 러시아 병사에게 배신당한 젊은 우크라이나 여성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담은 「카테리나」를 썼다.
우크라이나 문화에 대한 그의 영향력은 매우 커서, 소련 시대에도 소련 고위층은 셰우첸코의 시에 나타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를 억압하고, 러시아 제국에서의 계급 투쟁 측면을 강조하려고 했다. 농노로 태어나 제국에 반대하는 정치적 견해로 고통받았던 셰우첸코는 소련 시대 동안에는 제국의 착취에 반대하는 국제주의자로 묘사되었고, 우크라이나 민족의 주창자로서의 영향력은 축소되었다.
이러한 견해는 오늘날 바뀌었으며, 그는 우크라이나 민족에게 매우 중요한 인물로 여겨진다. 이러한 견해는 오늘날까지도 셰우첸코를 존경하는 거의 모든 우크라이나 디아스포라가 공유하고 있다.
그는 유로마이단 시위 당시 일부 시위자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그의 시 「유언」(Zapovit)은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당시 우크라이나의 지속적인 투쟁과 "공명"하며 저항의 상징이 되었다. 그는 세계 문학사에서 알렉산드르 푸시킨, 요한 볼프강 폰 괴테, 모리스 마테를링크와 같은 천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인물로 평가된다.
4.2. 비판과 논란
그의 시 『하이다마키』는 문학 비평가 비사리온 벨린스키로부터 "낭만적인 거창한 독창성에 대한 경향"이라는 날카로운 비판을 받았다. 벨린스키는 셰우첸코의 작품을 "촌뜨기 언어"를 사용하는 "촌뜨기 시인"이라고 폄하했다. 셰우첸코의 시 「꿈」은 니콜라이 1세와 황후를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 그의 체포와 유배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황제는 시의 자신에 대한 부분에는 웃음을 보였으나, 황후에 대한 조롱에는 격분하며 셰우첸코의 "신성 모독"을 강하게 비판했다.
일부 연구자들은 셰우첸코의 러시아어 산문 작품(소설, 일기, 희곡 「나자르 스토돌리아」, 「미키타 하이다이」)을 저명한 러시아 작가의 작품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4.3. 기념과 추모

셰우첸코의 첫 동상은 1918년 10월 롬니에서 우크라이나국이 쇠퇴하던 시기에 제막되었으며, 이후 소련에서 많은 동상이 건립되었다. 1918년 11월 모스크바와 1918년 12월 페트로그라드에 세워진 동상들은 재료가 열악하여 나중에 철거되었고, 재건축이 필요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세워진 그의 이름의 기념비는 2000년에 다시 만들어졌다. 카니우 기념비, 키이우 중심부, 하르키우, 리비우, 루한스크 등 우크라이나 전역에 셰우첸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우크라이나가 소련으로부터 독립한 후, 우크라이나의 일부 블라디미르 레닌 동상은 셰우첸코 동상으로 대체되었다.
셰우첸코 기념비는 다른 나라들에도 세워졌다. 여기에는 워싱턴 D.C.의 타라스 셰우첸코 기념비, 이탈리아 로마(성 소피아 대성당 옆)의 기념비, 뉴욕 주 소유지우카의 기념비, 브라질의 쿠리치바와 프루덴토폴리스, 크로아티아의 수도 자그레브에 있는 동상들이 포함된다. 캐나다 매니토바 주 비타의 셰우첸코 학교에는 1987년에 셰우첸코의 흉상이 제막되었고, 2010년 9월 24일에는 코펜하겐의 외스트레 안라그 공원에 또 다른 흉상이 세워졌다.
1957년, 우크라이나계 미국인 작곡가 안틴 루드니츠키는 셰우첸코의 동명 시를 바탕으로 칸타타 『포슬라니에』를 작곡했다. 1966년부터 1968년까지 예술가 한나 베레스는 셰우첸코에게 헌정하는 일련의 장식용 직물을 만들었다. 이 직물들은 1971년 『코브자르』 판본의 삽화로 사용되었다.
그의 이름은 키이우의 지하철역인 타라사 셰우첸카역과 타라스 셰우첸코 국립 키이우 대학교를 포함한 수많은 기관, 거리, 지폐(100 우크라이나 흐리우냐)에 사용되었다.
5. 번역
셰우첸코의 작품은 전 세계적으로 널리 번역되어 그의 사상과 예술적 가치를 알리는 데 기여했다. 특히 그의 대표작인 시 「유언」은 15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어 그의 국제적 위상을 보여준다.
5.1. 한국어 번역
한국에서는 김석원 번역가가 셰우첸코의 시 77편을 『아 우크라이나여! 드네프르강이여!』라는 제목으로 번역하여 소개한 바 있다.
5.2. 타 언어 번역
셰우첸코의 1845년 작 「유언」(Zapovit)은 15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었고, 1870년대에는 H. 흘라드키에 의해 곡이 붙여지기도 했다.
베트남어로는 시인 떼 하인이 1959년부터 프랑스어를 통해 2편의 시를 번역한 것을 시작으로, 1961년 시인 사망 100주년에는 『문학』지에서 튀 토안과 응우옌 쑤언 산이 러시아어와 프랑스어를 통해 번역한 시들을 게재했다. 2004년에는 셰우첸코 탄생 190주년을 기념하여 베트남 작가 협회가 응우옌 비엣 탕이 우크라이나어 원본에서 직접 번역한 『타라스 셰우첸코 시집』 36편을 출판했다. 2012년에는 베트남 작가 협회에서 36편의 시를 우크라이나어-베트남어 이중 언어로 수록한 『타라스 셰우첸코 시집』과 1959년부터 베트남에서 소개된 셰우첸코의 모든 번역 및 발췌본을 수록한 제2부를 출판했다. 현재 응우옌 비엣 탕은 『타라스 셰우첸코 - 시 150편과 서사시』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며, 현재까지 100편 이상의 시가 베트남어로 번역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