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교육
칼 데이비드 앤더슨은 스웨덴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 뉴욕에서 유년기를 보냈고,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에서 물리학 및 공학 분야에서 학사 및 박사 학위를 취득하며 학문적 기반을 다졌다.
1.1. 출생 및 가족 배경
칼 데이비드 앤더슨은 1905년 9월 3일 미국 뉴욕 시에서 스웨덴 이민자인 칼 데이비드 앤더슨과 엠마 아돌피나 아약손의 아들로 태어났다.
1.2. 교육
그는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에서 물리학과 공학을 전공하여 1927년에 학사 학위(B.S.)를, 1930년에는 로버트 A. 밀리컨 교수의 지도 아래 최우수 성적(magna cum laude)으로 박사 학위(Ph.D.)를 취득했다. 그의 박사 학위 논문은 X선에 의해 기체에서 방출되는 전자의 공간 분포에 관한 것이었으며, 피지컬 리뷰에 게재되었다.
2. 과학 경력 및 발견
앤더슨은 입자 물리학 분야에서 획기적인 연구를 수행하며 양전자와 뮤온이라는 중요한 아원자 입자들을 발견하여 과학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2.1. 우주선 연구
1930년대 초, 앤더슨은 그의 지도 교수였던 노벨상 수상자 로버트 밀리컨의 지도 아래 우주선 연구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이 연구 과정에서 그는 자신이 사용하던 안개 상자 사진에서 예상치 못한 아원자 입자의 흔적들을 발견했다. 이 흔적들은 당시 알려진 전자와 질량은 같지만 전하가 반대인 입자에 의해 생성된 것으로 정확히 해석되었다.
2.2. 양전자 발견
앤더슨은 1932년에 이 발견을 발표했으며, 이는 이후 다른 연구자들에 의해 확인되었다. 그의 발견은 폴 디랙이 이론적으로 예측했던 양전자의 존재를 실험적으로 검증한 것이었다. 앤더슨은 처음에는 우주선에서 양전자를 감지했지만, 이후 자연 방사성 핵종인 ThC'' (208Tl의 옛 표기법)에서 생성된 감마선을 다른 물질에 쏘아 양전자-전자 쌍을 생성함으로써 양전자의 존재에 대한 보다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했다. 이 연구로 앤더슨은 1936년 빅터 프랜시스 헤스와 함께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50년 후, 앤더슨은 자신의 발견이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 동문인 자오충야오(Chung-Yao Chao충야오 자오영어)의 연구에서 영감을 받았음을 인정했다. 자오의 연구는 앤더슨의 많은 연구의 기초를 형성했지만, 당시에는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2.3. 뮤온 발견
1936년, 앤더슨은 그의 첫 대학원생인 세스 네더마이어와 함께 뮤온을 발견했다. 뮤온은 당시 '뮤-메손'으로도 알려져 있었으며, 전자보다 약 207배 무겁지만 전자와 동일한 음전하와 스핀 1/2을 가진 아원자 입자였다. 앤더슨과 네더마이어는 처음에는 이 입자가 유카와 히데키가 강한 상호작용 이론에서 가정했던 파이온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앤더슨이 발견한 입자가 파이온이 아니라는 것이 명확해지자, 물리학자 이지드어 아이작 라비는 이 예상치 못한 발견이 입자 물리학의 어떤 논리적 체계에도 어떻게 들어맞을 수 있을지 당혹스러워하며 "누가 저런 걸 주문했어?"라고 질문했다는 일화가 있다(때로는 그가 동료들과 중국 식당에서 식사 중이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뮤온은 이후 발견된 수많은 아원자 입자들 중 첫 번째였으며, 이 입자들은 처음에는 이론가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윌리스 램은 1955년 노벨상 수상 강연에서 "새로운 기본 입자를 발견한 사람에게는 과거에 노벨상이 주어졌지만, 이제는 그런 발견에 대해 1.00 만 USD의 벌금이 부과되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고 농담하기도 했다.

2.4. 과학적 맥락 및 평가
앤더슨의 발견은 당시 입자 물리학의 지형을 크게 변화시켰다. 특히 뮤온의 발견은 기존 이론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새로운 입자들의 '동물원'을 열었으며, 이는 나카노-니시지마-겔만 법칙과 같은 새로운 입자 분류 체계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앤더슨이 자신의 발견이 자오충야오의 연구에 영감을 받았음을 인정한 것은 과학적 발견의 상호 연결성과 선행 연구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라비와 램의 반응은 당시 과학계가 새로운 입자들의 등장에 대해 느꼈던 혼란과 유머를 잘 보여준다.
3. 제2차 세계 대전 및 후기 경력
칼 데이비드 앤더슨은 그의 학문적 및 연구 경력 전체를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에서 보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에서 로켓 연구에 참여했으며, 국방 연구 위원회와 과학 연구 개발국에서도 활동했다. 그는 맨해튼 프로젝트의 지휘를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았으나, 자신이 적임자가 아니라고 판단하여 거절하고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에서 로켓 기술 연구를 계속했다. 1963년부터 1966년까지는 미국 국립과학원 물리학 부문 의장을 역임했다. 그는 핵무기와 관련된 정치적 운동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지만, 다른 학회 회원들과 함께 수소폭탄 실험에 반대하는 청원서에 서명하기도 했다.
4. 수상 및 인정
앤더슨은 그의 뛰어난 과학적 업적을 인정받아 여러 중요한 상과 영예를 얻었다.
- 1936년: 노벨 물리학상 (양전자 발견 공로)
- 1937년: 엘리엇 크레슨 메달
- 1938년: 미국 국립과학원 회원 선출
- 1938년: 미국 철학회 회원 선출
- 1950년: 미국 예술 과학 아카데미 펠로우 선출
- 1975년: 미국 성취 아카데미의 골든 플레이트상
5. 개인 생활
앤더슨은 1946년 로레인 버그만과 결혼하여 마셜과 데이비드 두 아들을 두었다. 그의 아내 로레인은 1984년에 사망했다. 칼 데이비드 앤더슨은 1991년 1월 11일 캘리포니아주 샌마리노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유해는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의 포레스트 론 메모리얼 파크 (할리우드 힐스)에 안장되었다.
6. 유산 및 영향력
칼 데이비드 앤더슨의 과학적 발견은 입자 물리학과 기초 과학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양전자의 발견은 폴 디랙의 반물질 이론을 실험적으로 증명함으로써 양자장론의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뮤온의 발견은 당시 알려진 기본 입자들의 목록을 확장하고 새로운 입자들의 존재를 시사하며, 이후 강입자와 경입자의 분류, 그리고 표준 모형의 정립에 이르는 현대 입자 물리학의 토대를 마련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의 연구는 우주선 물리학 분야의 선구적인 업적으로 평가되며, 미지의 아원자 세계를 탐구하는 데 있어 안개 상자와 같은 실험 기법의 중요성을 입증한다.
7. 주요 논문
- Anderson, C. D. (1932). "The Apparent Existence of Easily Deflectable Positives." Science, 76(1967), 238-239.
- Anderson, C. D. (1933). "The Positive Electron." 피지컬 리뷰, 43(6), 491-494.
- Anderson, C. D. (기술 자문). (1957). The Strange Case of the Cosmic Rays. 벨 연구소 과학 시리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