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유카와 히데키는 일본의 물리학자로서, 그의 생애는 학문적 업적뿐만 아니라 사회적 참여로도 큰 발자취를 남겼다.
1.1. 출생 및 유년 시절
유카와 히데키는 1907년 1월 23일 도쿄부 도쿄시 아자부구 이치이베이초(현 도쿄도 미나토구 롯폰기)에서 지질학자인 아버지 오가와 다쿠지(옛 성 아사이)와 어머니 오가와 고유키 사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908년, 그가 한 살 되던 해에 아버지 다쿠지가 교토 제국대학 교수로 취임하면서 가족 모두 교토부 교토시로 이주했다. 이로 인해 유카와는 도쿄에서 태어났지만, 유년 시절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인생의 대부분을 교토에서 보냈으며, 자서전에서 "나의 기억은 교토로 이사 온 때부터 시작된다. 역시 교토가 고향이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회고했다. 그가 노벨상 수상의 대상이 된 중간자 이론을 발표한 시점에는 오사카 제국대학에 재직하며 니시노미야시의 구라쿠엔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유카와의 외할아버지 오가와 고마키쓰는 과거 기슈번의 번사이자 유학자였다. 그는 한학에 대한 깊은 소양을 가지고 있었으며, 메이지 시대 이후에는 서양 학문을 배우고 말년까지 꾸준히 London Times런던 타임스영어를 구독하던 인물이었다. 유카와는 5~6세 무렵 외할아버지로부터 한문 서적을 소리 내어 읽는 소독을 배웠다. 그는 당시에는 의미를 알지 못하고 읽었던 한문 서적이 훗날 자신에게 큰 수확을 가져다주었다고 회고하며, "나는 이 때쯤에 한문 서적을 읽고 배운 것을 쓸데없는 일이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의미도 모른 채 읽기 시작했던 한문 서적들이 나에게 큰 수확을 가져오게 만들었다. 그 후 어려운 책들을 읽을 때 문자에 대한 저항감은 전혀 없었다. 한자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익숙해진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단지 외할아버지의 목소리에 따라 읽는 것만으로도 모르는 사이에 한자와 친숙해져 그 후 글을 읽기 쉬워졌다는 것은 사실이다"라고 기록했다.
유카와는 교토시립교고쿠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1919년 교토부립교토제1중학교에 입학했다. 중학생 시절의 그는 별로 눈에 띄지 않는 존재였으며, 말수가 적어 '곤베에'(権兵衛곤베에일본어)나 '이왕 짱'(イワンちゃん이완짱일본어)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러한 과묵함 때문에 아버지 다쿠지로부터 "대체 뭘 생각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는 말을 들으며 다른 형제들에 비해 능력이 낮게 평가되기도 했다. 심지어 아버지는 그를 대학 대신 전문학교에 보낼까 고민하기도 했다. 그러나 중학교 교장은 그의 수학적 잠재력을 높이 평가하며 학업을 계속할 수 있도록 직접 입양을 제안하기도 했다. 교토 제1중학교 동기 중에는 학자의 자녀가 많았고, 훗날 학자가 된 이들도 많았다. 특히 같은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도모나가 신이치로는 그의 중학교 1년 선배이자 제3고등학교와 교토 제국대학 동기였다.
1.2. 교육
유카와는 1929년 교토 제국대학 이학부 물리학과를 졸업한 후 4년간 같은 대학의 다마키 가주로 연구실에서 조수로 재직했다. 졸업 후 그는 이론물리학, 특히 소립자 이론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1931년경에는 교토 구죠야마의 간사이 일불학관에서 프랑스어를 배우기도 했다.
1932년에는 교토 제국대학 강사로 임용되었으며, 1933년 도호쿠 제국대학에서 열린 일본 수학물리학회 연회에서 야기 히데쓰구를 만나게 되었다. 당시 오사카 제국대학 이학부 물리학과(시오미 이화학 연구소)의 초대 주임교수로 부임한 야기의 요청으로 오사카 제국대학 강사를 겸임하게 되었다. 학생들 사이에서는 그의 목소리가 작고 강의가 상당히 난해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오사카 제국대학으로 옮긴 후에도 연구 성과가 미미하자 야기는 그에게 더욱 학업에 정진할 것을 당부하며, 본래는 도모나가 신이치로를 채용하려 했으나 유카와의 형의 부탁으로 그를 채용했으니 도모나가에게 지지 않도록 공부를 확실히 해야 한다고 질책하기도 했다. 우치야마 료유에 따르면 야기는 독설로 유명했다고 한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 수학자가 되는 것을 포기했는데, 이는 그가 어떤 정리(定理)를 교사가 예상한 방식과 다르게 증명하자 교사가 그의 답을 틀렸다고 채점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대학 시절에는 분광학 실험에 필수적인 유리 세공에 서투름을 보여 실험 물리학자의 길을 포기했다. 1938년에는 중간자의 존재 예측과 핵력의 본질에 대한 이론적 연구로 오사카 제국대학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 연구 업적은 훗날 그가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3. 결혼과 가족
1932년 유카와는 오사카 위장 병원(1950년 유카와 위장 병원으로 개칭) 원장인 유카와 겐요의 둘째 딸 유카와 스미(본명 스미코)와 결혼했다. 그는 아들이 많은 집안 출신이었으나 장인 겐요에게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일본의 데릴사위 관습(婿養子무코요시일본어)에 따라 유카와 가문의 양자로 들어가 성을 오가와에서 유카와로 변경했다. 부부 사이에는 하루미와 다카아키 두 아들을 두었다. 장남 유카와 하루미는 1933년 4월 8일에 태어나 훗날 헤이본샤에서 근무한 뒤 근세연극연구가가 되었다. 차남 유카와 다카아키는 1934년 9월 29일에 태어나 고단샤 재직 중이던 1971년 심장 발작으로 급사했다.
유카와 가문에는 다양한 분야의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의 아버지 쪽 할아버지인 아사이 아쓰시는 다나베번의 유학자였고, 어머니 쪽 할아버지인 오가와 고마키쓰는 관료이자 사업가였다. 아버지 오가와 다쿠지는 지질학자이자 교토 대학 명예교수였으며, 어머니는 고유키였다. 누이로는 가요코와 다에코가 있었고, 형으로는 야금학자이자 도쿄 대학 교수였던 오가와 요시키, 동양사학자이자 교토 대학 명예교수이며 문화훈장을 수상한 가이즈카 시게키가 있었다. 동생으로는 중국 문학자이자 교토 대학 명예교수였던 오가와 다마키와 제2차 세계 대전 중 병으로 사망한 마스키가 있었다. 바이올리니스트 다이아나 유카와는 유카와 히데키의 먼 친척으로 알려져 있다. 이 외에도 기업인 다케다 구니오, 정치가 가키자와 고지, 전 내각총리대신 모리 요시로, 배우 미부 신야 등이 그의 먼 친척이다.
2. 학술 경력 및 업적
유카와 히데키는 20세기 물리학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인물로, 특히 핵력에 대한 그의 이론은 소립자 물리학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2.1. 중간자 이론과 핵력
1930년대 초, 유카와는 원자핵이 양성자들의 강한 반발력에도 불구하고 붕괴하지 않고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현상에 주목했다. 그는 이 현상이 핵 내의 양성자와 중성자 사이에 작용하는 핵력 때문이라고 보았으며, 이 핵력이 강력하지만 그 도달 범위가 매우 짧다는 점을 설명하고자 했다. 1934년 그는 중간자 이론 구상을 발표하고, 이듬해인 1935년에는 "소립자의 상호 작용에 대해"라는 논문을 발표하며 핵력을 매개하는 새로운 입자인 중간자(현재의 파이 중간자)의 존재를 예측했다. 그는 이 입자의 질량이 전자 질량의 약 200배에 달할 것이라고 추정했다.
당시 대부분의 서구 과학자들은 관찰되지 않은 새로운 입자의 존재를 주장하는 유카와의 학설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양자역학의 개척자인 닐스 보어조차 1937년 일본을 방문했을 때 유카와에게 "자네는 그렇게 새로운 입자를 만들고 싶은 건가?"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중일 전쟁의 격화로 서구 국가들로부터 고립되어 있던 일본 과학자들의 연구는 해외에서 쉽게 평가받지 못했다. 그러나 1936년 칼 데이비드 앤더슨과 그의 지도 학생 세스 네더마이어가 우주선에서 중간자와 비슷한 질량의 새로운 입자(뮤 입자)를 발견하면서 유카와의 중간자 이론은 세계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비록 뮤 입자가 처음에는 유카와가 예측한 중간자로 오인되었지만, 이는 사실 유카와가 제창한 파이 중간자와는 다른 입자였다.
유카와는 핵력의 기본 상호작용을 설명하기 위해 중간자를 보스 입자로 가정하여 강한 힘을 성공적으로 도출했으며, 더 나아가 엔리코 페르미의 약한 힘까지 설명할 수 있었다. 중간자 이론은 당시 약한 힘과 강한 힘을 모두 포함하는 가장 기본적인 장의 이론으로 간주되었다. 또한 이 이론은 힘이 입자에 의해 매개된다는 개념을 명확히 제시하며, 장을 형성하는 입자라는 생각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 비록 베르너 하이젠베르크가 유카와 이전에 전자가 강한 힘을 전달한다는 아이디어를 제시했지만, 이는 기존에 알려진 입자였고 이론적으로 실패했기 때문에 장을 담당하는 입자라는 개념은 확립되지 못했다. 이러한 이유로 유카와의 중간자 이론은 소립자론의 문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2.2. 노벨 물리학상 수상
유카와의 중간자 이론의 진가는 1947년 세실 프랭크 파월, 주세페 오키알리니, 세자르 라테스 등에 의해 파이 중간자가 실제로 발견되면서 명확히 증명되었다. 이 결정적인 발견에 힘입어 유카와는 1949년 11월 3일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그는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와 찬드라세카라 벵카타 라만에 이어 아시아인으로서 세 번째 노벨상 수상자이자, 일본인으로서는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였다.

당시 패전과 연합국 점령하에서 자신감을 잃었던 일본 국민들에게 유카와의 노벨상 수상 소식은 엄청난 희망과 용기를 주었다. 물리학자 사토 가쓰히코는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서구 과학자들이 풍요로운 환경에서 연구하는 반면, 일본이라는 가난한 나라에서 종이와 연필, 그리고 자신의 두뇌만으로 새로운 입자를 예측해낸 유카와를 영웅이자 동경의 대상으로 여겼다고 밝혔다. 2000년 유카와의 노벨상 선정 관련 문서를 조사한 오카모토 다쿠지는 추천장의 대부분이 외국인 추천자로부터 나왔다는 점 등을 언급하며, "노벨상 역사 가운데에서도 보기 드물게 연구 성과와의 관계가 명료한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2.3. 후기 연구 및 이론
노벨상 수상 이후 유카와는 K-포획 이론 연구를 포함하여 이론 물리학 분야에서 지속적인 탐구를 이어갔다. 그는 비국소장 이론과 소영역 이론 등을 제창했으나, 이들 이론은 중간자 이론만큼의 이론적 성공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특히 그는 머리 겔만의 쿼크 이론에 대해 "전하가 1/3이나 2/3처럼 그렇게 어중간하게 존재할 리가 없다"며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
유카와는 또한 물리학의 근본적인 문제인 인과율의 파괴 가능성에 대한 탐구에 평생을 바쳤다. 그는 민코프스키 공간상에서 폐곡면의 확률 진폭을 정의할 때 인과율이 파괴될 수 있다는 문제를 제기했으며, 이를 '유카와의 원(湯川の丸○일본어)'이라고 불렀다. 폴 디랙 또한 비슷한 문제를 제기한 바 있다. 유카와의 이 문제는 도모나가 신이치로의 초다시간 이론이 인과율 문제를 공간적인 것으로 제한하여 회피함으로써 유카와의 아이디어를 살려 장의 양자론을 상대론적으로 공변한 형태로 재구성하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초대칭성을 세계 최초로 제기한 미야자와 히로나리는 유카와가 제기한 인과율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으며, 현대 물리학이 이 근본적인 문제를 회피하고 현상론에 치우쳤다고 주장한다. 유카와 이전에는 확률 진폭이 일정한 시간으로만 정의되어 있었다.
3. 학술 활동 및 직책
유카와 히데키는 그의 학문적 경력 전반에 걸쳐 다양한 대학과 연구소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으며 이론 물리학의 발전에 기여했다.
3.1. 교수 및 연구소 활동
유카와는 1929년 교토 제국대학 이학부 물리학과를 졸업한 후 4년간 같은 대학의 조수로 재직했다. 1932년에는 교토 제국대학 강사로 임용되었고, 1933년에는 오사카 제국대학 강사를 겸임하기 시작했다. 1936년에는 오사카 제국대학 이학부 조교수로 승진했으며, 1939년에는 교토 제국대학 교수로 부임했다. 1942년에는 도쿄 제국대학 이학부 교수로도 활동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48년에는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의 객원교수로 초빙되었고, 1949년 7월에는 컬럼비아 대학교 객원교수로 취임한 뒤 1950년부터는 정식 교수로 재직했다. 1953년에는 교토 대학 기초 물리학 연구소의 초대 소장으로 취임하여, 연구소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같은 해 국제이론물리학회 도쿄 및 교토 회의의 의장을 맡기도 했다.
그는 1946년 제국 학술원 회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55년에는 일본 유네스코 국내 위원회 위원과 사단법인 일본 물리학회 회장을 역임하며 학술계의 리더십을 발휘했다. 1956년에는 원자력 위원장 쇼리키 마쓰타로의 요청으로 원자력 위원회 위원이 되었으나, 쇼리키가 기초 연구를 생략하고 실용적인 원자력 발전소 건설을 서두르려는 지론에 대해 "기초 연구를 생략한 채 원자력 발전소 건설에 서두르는 것은 장래에 엄청난 재앙을 부를 수도 있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그는 하루 만에 사임하려 했으나 모리 가즈히사 등의 만류로 철회했다. 그러나 쇼리키와의 대립이 심화되자 결국 건강상의 이유를 들어 이듬해인 1957년 3월 29일, 재임 1년 3개월 만에 위원직에서 사임했다. 이후 1958년에는 원자력 위원회 참여로 활동을 이어갔다.
1970년, 유카와는 교토 대학에서 정년 퇴임하며 교토 대학 명예교수가 되었다. 그는 또한 학술지 Progress of Theoretical Physics프로그레스 오브 시오리티컬 피직스영어의 편집자로 활동했으며, 1946년 "양자역학 서론", 1948년 "소립자론 서론" 등의 저서를 출판했다.
4. 사상 및 철학
유카와 히데키는 단순히 뛰어난 과학자를 넘어, 과학과 인간, 그리고 사회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은 철학적 사유를 펼쳤다.
4.1. 과학 철학 및 세계관
유카와는 과학이 20세기에 급속도로 발전했다고 평가하며, 자신의 자서전 서문에서 "나는 과거에 그랬듯이 낯선 땅의 여행자이자 새로운 나라의 식민지 개척자가 되기를 열망한다"고 밝혔다. 이는 미지의 학문적 영역을 탐험하고자 하는 그의 끊임없는 열정을 보여준다. 그는 또한 입자 상호작용에 대한 1934년 논문을 발표한 후 "마치 산비탈 정상의 작은 찻집에서 쉬는 여행자 같았다. 그때는 더 많은 산이 앞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언급하며, 하나의 중요한 업적을 달성한 후에도 안주하지 않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려는 학자로서의 태도를 드러냈다.
그는 만년에 생물학에도 관심을 가졌으며, 특히 생명 현상에서 정보가 수행하는 역할에 주목했다. 또한 에도 시대 후기의 사상가인 미우라 바이엔에게 깊이 심취했다. 유카와는 휘호를 부탁받으면 종종 "지어락"(知魚楽치교라쿠일본어,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라')이라는 문구를 썼는데, 이는 장자의 '추수'(秋水) 편 마지막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이는 그가 자연과 생명에 대한 깊은 통찰과 조화를 추구했음을 보여준다.
4.2. 인과율 문제에 대한 탐구
유카와는 물리학의 근본적인 문제 중 하나인 인과율의 파괴 가능성에 대해 평생에 걸쳐 탐구하고 고민했다. 그는 민코프스키 공간상에서 폐곡면의 확률 진폭을 정의할 경우 인과율이 파괴될 수 있다는 문제를 제기했으며, 이를 '유카와의 원(湯川の丸○일본어)'이라고 명명했다. 폴 디랙 또한 유사한 문제를 제기한 바 있다.
유카와가 제기한 인과율 문제는 도모나가 신이치로의 초다시간 이론이 공간적인 제약을 통해 인과율 문제를 회피하고, 이를 통해 양자장론을 상대론적으로 공변한 형태로 재구성하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유카와는 이 문제를 비국소장 이론으로 다루려 했으나 성공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초대칭성을 세계 최초로 제기한 미야자와 히로나리는 유카와가 제기한 인과율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으며, 현대 물리학이 이 근본적인 문제를 회피하고 현상론에 치우쳤다고 주장한다. 유카와 이전에는 확률 진폭이 일정한 시간으로만 정의되어 있었다. 이러한 그의 탐구는 물리학의 기초에 대한 깊은 성찰과 새로운 패러다임 모색을 보여준다.
5. 사회 활동 및 평화 운동
유카와 히데키는 단순한 과학자를 넘어, 사회 문제에 대한 깊은 통찰과 책임감을 가지고 평화 증진을 위한 다양한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5.1. 반핵 운동 및 평화주의
유카와는 핵무기의 위험성을 깊이 인식하고 반핵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55년, 그는 버트런드 러셀과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주도한 러셀-아인슈타인 선언에 막스 보른 등 10명의 다른 저명한 과학자 및 지식인들과 함께 서명하며 핵군축을 강력히 촉구했다.
1956년 1월, 궁중 가회시에 초대받았던 유카와는 "春浅み藪かげの道おほかたは すきとほりつつ消えのこる雪" (어느 이른 봄 덤불이 무성한 길에 고르게 쌓여 투명하게 비치며 미처 녹지 않은 눈)라는 시를 읊었다.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 해군을 중심으로 한 원폭 개발 프로젝트(F연구) 회의에 초청되어 관여했던 사실이 확인되기도 했다. 그러나 개발이 본격화되기 전에 일본이 패전을 맞았고, 그는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에 대한 해설을 요구하는 신문사의 의뢰를 거절했다. 전후에는 일본을 점령한 미군으로부터 이와 관련된 조사를 받기도 했다. 이러한 배경을 기록한 그의 일기가 2017년 12월 교토 대학 유카와 기념관 자료실에 공개되어 그의 전후 평화 운동의 발자취를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1956년, 그는 쇼리키 마쓰타로 원자력 위원장의 요청으로 원자력 위원회 위원이 되었으나, 쇼리키가 기초 연구를 생략하고 실용적인 원자력 발전소 건설을 서두르려는 입장에 대해 "기초 연구를 생략한 채 원자력 발전소 건설에 서두르는 것은 장래에 엄청난 재앙을 부를 수도 있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이로 인해 쇼리키와의 대립이 심화되었고, 결국 그는 건강상의 이유로 이듬해인 1957년, 재임 1년 3개월 만에 위원직에서 사임했다.
1962년 5월 7일, 유카와는 교토시 덴류지에서 제1회 과학자 교토 회의를 주재하며 퍼그워시 정신에 입각하여 핵무기 금지 조약 체결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1966년에는 노벨 평화상 후보자로 추천되기도 했다. 1981년 6월, 그는 15년 만에 개최된 제4회 과학자 교토 회의의 발기인 중 한 명으로 참여하여, 이미 건강 상태가 악화되어 휠체어에 의지한 채 참석했음에도 불구하고 핵 폐기를 강력히 호소했다.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에 있는 평화의 상 '와카바'(若葉와카바일본어)의 대좌에는 유카와가 지은 단카인 "재앙의 불이여 두 번 다시 이곳에 오지 마라 평화를 기원하는 사람만이지 이곳은"(まがつびよ ふたたびここに くるなかれ 平和をいのる 人のみぞここは일본어)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여기서 '마가쓰비'는 원자폭탄을 의미한다.
5.2. 세계 헌법 제정 제안
유카와는 핵무기 없는 평화로운 세계를 만들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세계 헌법 제정 움직임에도 참여했다. 그는 세계 헌법 초안 작성을 위한 회의 소집 협정에 서명한 인물 중 한 명이었으며, 이후 세계 헌법 제정 의회가 소집되어 '지구 연방 헌법'을 초안하고 채택하는 데 기여했다. 이는 그의 평화주의적 신념이 단순히 핵무기 반대에 그치지 않고, 인류 전체의 보편적 질서와 평화를 위한 제도적 기반 마련에까지 확장되었음을 보여준다.
6. 수상 및 영예
유카와 히데키는 그의 뛰어난 학문적 업적과 사회적 기여를 인정받아 수많은 상과 영예를 얻었다.
- 1940년: 제국 학사원 은사상
- 1941년: 노마 학술상
- 1943년: 문화훈장 (최연소 수상)
- 1949년: 노벨 물리학상
- 1953년: 교토시 명예시민
- 1963년: 왕립학회 외국인 회원(ForMemRS영어) 선출
- 1964년: 로모노소프 황금 메달
- 1967년: 서독 푸르 르 메리트 훈장
- 1967년: 교황청 과학원 훈장
- 1977년: 훈1등 욱일대수장
- 1981년: 종2위 (사후 추서)
이 외에도 그는 파리 대학교에서 명예 박사 학위(honoris causa라틴어)를 받았으며, 에든버러 왕립학회, 인도 과학원, 국제 철학 및 과학 아카데미, 미국 국립과학원, 미국 예술 과학 아카데미, 미국 철학회의 명예 회원으로 활동했다. 스위스 제네바의 CERN에는 그의 이름을 딴 '유카와 거리'(Route Yukawa영어)가 있다. 또한, 핵력의 도달 거리의 기준이 되는 1 fm를 '1 yukawa'라고 부르자는 제안이 있었으나 널리 보급되지는 못했다.
7. 연보
- 1907년: 1월 23일, 도쿄시 아자부구(현 도쿄도 미나토구)에서 지질학자 오가와 다쿠지의 셋째 아들로 태어남.
- 1908년: 가족 모두 교토로 이주.
- 1919년: 교토시립교고쿠초등학교 졸업.
- 1923년: 교토부립교토제1중학교 졸업.
- 1926년: 제3고등학교 이과 갑류 졸업.
- 1929년: 교토 제국대학 이학부 물리학과 졸업. 같은 대학 다마키 가주로 연구실 조수가 됨.
- 1931년: 교토 구죠야마의 간사이 일불학관에 다니며 프랑스어를 배움.
- 1932년: 유카와 스미와 결혼. 유카와 가문의 데릴사위가 되어 성을 오가와에서 유카와로 변경. 교토 제국대학 강사로 활동.
- 1933년: 오사카 제국대학 강사 겸임.
- 1934년: 중간자 이론 구상을 발표.
- 1935년: "소립자의 상호 작용에 대해" 논문을 발표, 중간자의 존재를 예언.
- 1936년: 오사카 제국대학 이학부 조교수.
- 1937년: 솔베이 회의에 초청받음.
- 1938년: 이학박사 학위 취득(오사카 제국대학). 논문 제목은 "On the interaction of elementary particles" (소립자의 상호작용에 대해서).
- 1939년: 교토 제국대학 교수.
- 1940년: 제국 학사원 은사상 수상.
- 1941년: 노마 학술상 수상.
- 1942년: 도쿄 제국대학 이학부 교수.
- 1943년: 최연소로 문화훈장 수훈.
- 1946년: 제국 학술원 회원. "양자역학 서론" 출판.
- 1947년: 세실 프랭크 파월 등이 파이 중간자를 발견하여 유카와 이론 증명.
- 1948년: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객원교수. "소립자론 서론" 출판.
- 1949년: 7월 컬럼비아 대학교 객원교수 취임. 10월 노벨 물리학상 수상.
- 1950년: 컬럼비아 대학교 교수. 8월 10일 미국에서 귀국, 11일 쇼와 천황과 고준 황후에게 배알.
- 1953년: 교토 대학 기초 물리학 연구소 초대 소장. 국제이론물리학회 도쿄 및 교토 의장. 교토시 명예시민.
- 1955년: 일본 유네스코 국내 위원회 위원. 사단법인 일본 물리학회 회장. 러셀-아인슈타인 선언 공동 서명.
- 1956년: 원자력 위원회 위원. 궁중 가회시에 초대받아 시를 읊음.
- 1957년: 3월 29일 원자력 위원직에서 사임(재임 기간 1년 3개월).
- 1958년: 원자력 위원회 참여.
- 1962년: 5월 7일 교토시 덴류지에서 제1회 과학자 교토 회의 주재.
- 1963년: 왕립학회 외국인 회원 선출.
- 1964년: 로모노소프 황금 메달 수상.
- 1966년: 노벨 평화상 후보자로 추천됨.
- 1967년: 서독 푸르 르 메리트 훈장, 교황청 과학원 훈장 수상.
- 1970년: 교토 대학 정년 퇴임, 교토 대학 명예교수.
- 1975년: 전립선암 발병, 수술 후 자택 요양.
- 1977년: 훈1등 욱일대수장 수훈.
- 1981년: 6월 제4회 과학자 교토 회의 발기인으로 참여, 휠체어에 의지한 채 핵 폐기 호소. 9월 8일 폐렴 및 심부전 합병증으로 교토시 사쿄구 자택에서 향년 74세로 사망. 종2위 추서. 묘소는 교토시 히가시야마구 지온인에 위치.
- 2005년: 유네스코가 유카와 히데키 메달을 제작.
- 2021년: 사후 40년 만에 그의 저택이 교토 대학에 기증되어 연구 및 방문객 시설로 활용될 예정.
8. 저술
유카와 히데키는 물리학 전문 서적뿐만 아니라 그의 깊은 사상과 철학을 담은 에세이, 자서전 등 다양한 저작을 남겼다.
8.1. 물리학 관련 저서
- "β선 방사능의 이론" (1936)
- "양자역학 서론" (1947)
- "소립자론 서론" (상권, 1948)
- "물리 강의" (하라 오사무 편, 1975)
- "이론물리학을 말한다" (에자와 히로시 편, 1997)
- "유카와 히데키 물리 강의를 읽는다" (고누마 미치지 감수, 2007)
- "비국소장의 이론" (이노우에 겐 역·해설, 1952)
8.2. 사상, 에세이 및 자서전
- "최근의 물질관" (1939)
- "존재의 이법" (1943)
- "눈에 보이지 않는 것" (1946)
- "이론물리학 강화" (1946)
- "자연과 이성" (1947)
- "사고와 관측" (1948)
- "물질관과 세계관" (1948)
- "극미의 세계" (1950)
- "창조적 인간" (1966)
- "창조에의 비약" (1968)
- "나의 창조론 - 동정과 결합" (1981)
- "물리학에 뜻을 두어" (1944)
- "나그네 - 어느 물리학자의 회상" (1958)
- "유카와 히데키 일기 - 쇼와 9년: 중간자론으로의 길" (고누마 미치지 편, 2007)
- "유카와 히데키 일기 1945 - 교토에서 기록한 전중전후" (고누마 미치지 편, 2020)
- "자기 발견" (1972)
- "천재의 세계" (이치카와 기쿠야, 1973)
- "과학자의 마음" (1977)
- "외적 세계와 내적 세계" (1976)
- "원자와 인간" (1948)
- "과학과 인간성" (1948)
- "잠깐의 행운" (1954)
- "현대과학과 인간" (1961)
- "책 안의 세계" (1963)
- "마음 풍부하게" (1969)
- "학문과 인생" (1971)
- "우주와 인간 - 일곱 개의 수수께끼" (마에다 조사쿠 그림, 1974)
- "이 지구에 태어나게 해달라" (1975)
- "과학을 살다 - 유카와 히데키 에세이집" (이케우치 사토루 편, 2015)
- "유카와 히데키 가문집" (호소카와 미쓰히로 선, 2016)
- "유카와 히데키 시와 과학" (2017)
- "과학자의 창조성 - 잡지 《자연》으로부터" (2021)
또한 그의 저작은 여러 선집과 저작집으로도 출판되었다.
- "유카와 히데키 선집" (전 5권, 1955-1956)
- "유카와 히데키 자선집" (전 5권, 1971)
- "유카와 히데키 저작집" (전 10권 및 별권, 1989-1990)
그는 다양한 학자들과 공저 및 편저 활동도 활발히 했다.
- "원자핵 및 원소의 인공 전환" (기쿠치 세이시 공저, 1938-1940)
- "대화 - 인간의 진보에 대해" (고바야시 히데오 공저, 1948)
- "과학과 문학 대담" (에바라 다이조 공저, 1949)
- "원자핵론" (고바야시 미노루 공편, 1949)
- "물리학의 방향" (이노우에 겐 등 공저, 1949)
- "속 이론물리학 강화" (스즈키 히로시 공저, 1949)
- "소립자론" (고바야시 미노루 공편, 1951)
- "진리의 장에 서서" (사카타 쇼이치, 다케타니 미쓰오 공저, 1951)
- "우주선 및 중간자론" (고바야시 미노루, 이노우에 겐 공편, 1955)
- "물리학 통론" (다무라 마쓰헤이 공저, 상·중·하권, 1955-1962)
- "교토 내 어린날의..." (이지마 쓰토무, 가와바타 야노스케 공저, 1960)
- "소립자" (가타야마 야스히사, 후쿠도메 히데오 공저, 1961)
- "평화 시대를 창조하기 위해서 - 과학자는 호소한다" (도모나가 신이치로, 사카타 쇼이치 공편, 1963)
- "물리의 세계" (가타야마 야스히사, 야마다 에이지 공저, 1964)
- "인류의 생활을 바꾼 사람들: 새로운 세계의 전기 7" (유카와 히데키 감수, 이치카와 사다오 등 그림, 1965)
- "원시와 인간" (이타쿠라 기요노부 등 편, 1965)
- "현대의 대화" (우메하라 다케시, 구와바라 다케오, 스에카와 히로시 공저, 1966)
- "인간에게 있어서 과학이란 무엇인가" (우메사오 다다오 공저, 1967)
- "보람의 창조 - 창조에의 대화" (이치카와 기쿠야 공저, 1967)
- "유카와 박사 환갑 기념 문집" (다니카와 야스타카 등 편, 1968)
- "일본 문화의 창조 - 일본인이란 무엇인가" (우에다 마사아키 공저, 1968)
- "핵시대를 넘다 - 평화의 창조를 목표로 해서" (도모나가 신이치로, 사카타 쇼이치 공편, 1968)
- "대담 - 우주와 마음의 세계" (다니카와 데쓰조 공저, 1969)
- "학문의 세계 대담집" (유카와 히데키 편, 1970)
- "현대 학문론" (사카타 쇼이치, 다케타니 미쓰오 공저, 1970)
- "물리의 세계 수리의 세계" (기타가와 도시오 대담, 1971)
- "한나절 한담집" (유카와 히데키 편, 1971)
- "인간의 재발견" (이치카와 기쿠야, 우메하라 다케시 정담, 1971)
- "물리학자 군상 대담" (도모나가 신이치로 공저, 1972)
- "평화의 사상" (유카와 히데키 책임 편집, 1973)
- "과학과 인간의 행방 - 한나절 한담집" (유카와 히데키 편, 1973)
- "슈뢰딩거 선집" (에르빈 슈뢰딩거 저, 유카와 히데키 감수, 전 2권, 1974)
- "인간의 발견 - 유카와 히데키 대담집" (유카와 히데키 편, 1976)
- "핵군축에의 새로운 구상" (도모나가 신이치로, 도요다 도시유키 공편, 1977)
- "통계물리학" (도다 모리카즈 저, 구보 료고 편, 유카와 히데키 감수, 1978)
- "전원잡감 외" (데라다 도라히코, 나카야 우키치로 공저, 1984)
그의 학술 논문 중 주요한 것들은 다음과 같다.
- "On the Interaction of Elementary Particles. I" (1935)
- "On the Theory of Internal Pair Production" (사카타 쇼이치 공저, 1935)
- "Elementary Calculations on the Slowing Down of Neutrons by a Thin plate" (1936)
- "Theory of Disintegration of the Nucleus by Neutron Impact" (미야가와 유키히코 공저, 1936)
- "Supplement to "On the Theory of the β-Disintegration and the Allied Phenomenon."" (사카타 쇼이치 공저, 1936)
- "On a Possible Interpretation of the Penetrating Component of the Cosmic Ray" (1937)
- "On the Interaction of Elementary Particles II" (사카타 쇼이치 공저, 1937)
- "On the Interaction of Elementary Particles. III" (사카타 쇼이치, 다케타니 미쓰오 공저, 1938)
- "The Mass and the Life Time of the Mesotron" (사카타 쇼이치 공저, 1939)
9. 영향 및 평가
유카와 히데키의 과학적 업적은 물리학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그의 중간자 이론은 소립자 물리학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핵력의 본질을 설명하며 장 이론에서 입자가 힘을 매개한다는 개념을 확립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그의 이론은 당시 서구 과학자들의 회의적인 시각에도 불구하고, 파이 중간자의 발견으로 그 정당성이 입증되었다.
그러나 그의 후기 연구인 비국소장 이론이나 소영역 이론은 큰 이론적 성과로 이어지지 못했으며, 머리 겔만의 쿼크 이론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보인 것은 그의 학문적 한계로 지적되기도 한다. 또한 그가 평생을 바쳐 탐구한 인과율 파괴 문제인 '유카와의 원'은 미야자와 히로나리와 같은 학자들에 의해 여전히 미해결 문제로 남아있으며, 현대 물리학이 현상론에 치우치면서 이 근본적인 문제를 회피하고 있다는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카와는 1949년 일본인 최초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함으로써 제2차 세계 대전 패전과 연합국 점령으로 인해 자신감을 잃었던 일본 국민들에게 큰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었다. 물리학자 사토 가쓰히코는 유카와를 영웅이자 동경의 대상으로 여겼다고 회고했으며, 오카모토 다쿠지는 그의 노벨상 수상 연구가 매우 명료하게 평가받았다고 분석했다.
학술적 업적 외에도 유카와는 과학자로서의 사회적 책임감을 강조하며 반핵 운동과 평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러셀-아인슈타인 선언에 서명하고 세계 헌법 제정 움직임에 기여하는 등, 그는 과학이 인류의 평화와 복지에 기여해야 한다는 신념을 실천했다. 그의 이러한 활동은 과학자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중요한 본보기가 되었다.
10. 관련 항목
- 유카와 퍼텐셜
- 유카와 상호작용
- Progress of Theoretical Physics
- 퍼그워시 회의
- 니시나 요시오
- 세계평화어필 7인 위원회
- 사와노 히사오
- 일본여성과학자의회
- FACOM
구분 | 인물 |
---|---|
은사 | 다마키 가주로, 야기 히데쓰구 |
동료 및 라이벌 | 도모나가 신이치로, 고바야시 미노루, 사카타 쇼이치, 다니카와 야스타카, 다케타니 미쓰오, 우치야마 료유 |
인과율 문제 관련 학자 | 폴 디랙, 미야자와 히로나리 |
생물물리·우주물리 | 데라모토 에이, 하야시 주시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