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칼 차이스(Carl Zeiss카를 차이스독일어, 1816년 9월 11일 ~ 1888년 12월 3일)는 독일의 선구적인 정밀 기계공이자 광학자, 사업가로, 현대 광학 산업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1846년 예나에 자신의 작업장을 설립하여 이후 세계적으로 명망 높은 칼 자이스 AG로 성장시켰다. 차이스는 당시 경험에 의존하던 광학 기기 제작 방식을 이론적이고 과학적인 접근으로 전환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특히 물리학자 에른스트 아베와의 협력을 통해 현미경 렌즈 설계의 이론적 기반을 혁신하고, 화학자 오토 쇼트와의 협력을 통해 새로운 광학 유리를 개발하여 광학 기기의 성능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 그는 단순 현미경에서 시작하여 복합 현미경, 사진 렌즈, 그리고 아포크로마트 대물렌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고품질 광학 제품을 선보였으며, 엄격한 정밀도 기준과 선구적인 직원 복지 정책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차이스의 이러한 노력은 광학 분야의 과학적 발전을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정밀 기기 제조 산업 전반에 걸쳐 지속적인 유산과 영향력을 남겼다.
2. 생애
칼 차이스는 독일 광학 산업의 토대를 마련한 인물로, 그의 삶은 정밀 기술과 과학적 탐구에 대한 끊임없는 열정으로 점철되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기계와 자연과학에 깊은 관심을 보였으며, 이는 훗날 광학 분야의 혁신을 이끄는 중요한 자산이 되었다.
2.1. 출생과 가족
칼 차이스는 1816년 9월 11일 바이마르에서 6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요한 고트프리트 아우구스트 차이스(Johann Gottfried August Zeiss, 1785~1849)는 라슈텐베르크 출신으로, 100년 넘게 장인 가업을 이어온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우구스트는 부모님과 함께 바이마르 북쪽의 작은 지역 중심지인 부트슈테트로 이주하여 요한나 앙투아네트 프리데리케 슈미트(Johanna Antoinette Friederike Schmith, 1786~1856)와 결혼했다. 칼 차이스의 어머니는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배우자인 크리스티아네 불피우스와 친척 관계였다. 이후 아우구스트 차이스는 가업을 형제들에게 맡기고 바이마르로 이주하여 상아, 호박, 자개 등 이국적인 재료로 선반 가공품을 만드는 숙련된 장식 선반공으로 명성을 얻었다. 그는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 카를 프리드리히(1783~1853)와 교류하며 40년간 스승과 제자로서 우정을 이어갔다. 칼 차이스는 대공의 이름을 따서 칼 프리드리히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의 형제자매 중 세 명의 누이와 두 명의 형이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았다. 1885년 이전에는 그의 성이 Zeiß로 표기되었다.
칼 차이스는 1849년 5월 29일 목사의 딸 베르타 샤터(Bertha Schatter, 1827~1850)와 결혼했으나, 그녀는 이듬해 2월 첫 아들 로데리히(Roderich)를 낳다가 사망했다. 로데리히는 살아남아 훗날 아버지의 회사에 합류했다. 1853년 5월, 차이스는 교장의 딸 오틸리에 트링클러(Ottilie Trinkler)와 재혼하여 아들 카를 오토(Karl Otto, 1854~1925)와 두 딸 헤트비히(Hedwig, 1856~1935), 시도니(Sidonie, 1861~1920)를 두었다.
2.2. 교육 및 훈련
당시 사회적 신분 상승의 유일한 길은 고등 교육이었기에, 아우구스트 차이스는 세 아들 모두를 대학 준비 고등학교인 김나지움에 보냈다. 두 형은 문헌학과 역사를 공부하여 교육 분야에서 성공적인 경력을 쌓았다. 그러나 칼은 서혜부 탈장을 앓아 항상 탈장대를 착용해야 했으므로 학자로서 책상에 앉아 지내는 삶은 그에게 적합하지 않아 보였다. 그는 바이마르의 빌헬름 에른스트 김나지움에 다녔으나 일찍이 학교를 떠났다. 그는 특정 과목, 특히 자연과학을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특별 졸업 시험을 치렀다.
그는 일찍부터 기술 연구에 관심을 보여 바이마르 대공국 기술 학교의 강의를 수강했으며, 결국 정밀 기계공 견습 과정을 밟기로 결정했다. 1834년 부활절에 칼 차이스는 예나로 이주하여 예나 대학교의 궁정 정밀 기계공이자 사강사였던 프리드리히 쾨르너(Friedrich Körner, 1778~1847) 밑에서 견습 과정을 시작했다. 쾨르너는 지역 대학 도시를 넘어 잘 알려진 인물이었으며, 그의 작업장은 유명한 박식가 요한 볼프강 폰 괴테를 위한 기구를 제작하고 수리했기에 잘 기록되어 있다. 차이스는 4년간 견습생으로 머물렀으며, 마지막 2년 동안은 김나지움 졸업 증명서에 따라 학생으로 등록하여 학기당 한 과목의 수학 또는 과학 강의를 수강했다. 그는 1838년에 견습 과정을 마쳤고, 쾨르너의 좋은 평가와 추천서, 그리고 대학에서의 학업 증명서를 가지고 수습공 시절을 시작했다.
2.3. 초기 경력 및 견습
1838년부터 1845년까지 수습공 시절 동안 칼 차이스는 슈투트가르트, 다름슈타트, 빈, 베를린 등 여러 도시에서 일했다. 이 시기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많지 않으나, 다름슈타트에서는 광학 및 과학 기기 제작과 증기 동력 분야에서 활동하던 기기 제작자이자 궁정 기계공이었던 헥토르 뢰슬러(Hektor Rössler) 밑에서 일했던 것으로 보인다. 중부 유럽의 중장비 생산 중심지였던 빈에서는 롤레 운트 슈빌케(Rollé und Schwilqué)에서 일했으며, 빈 공과대학에서 대중 기계학 일요 강의를 수강하고 시험에 합격하는 기회를 얻었다. 마지막으로 베를린에서는 기계공장에서 근무했다. 이 시기 동안 그는 훗날 현미경 생산에 대한 영감을 주게 될 식물학자 마티아스 야코프 슐라이덴의 강의도 들었다.
긴 숙고 끝에 차이스는 쾨르너 밑에서 배운 실험 과학 장치 제작이라는 원래의 관심 분야로 돌아가 정밀 기계 독립 제작자로 자리매김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고품질 현미경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광학에 대한 그의 초기 관심을 자극했던 식물학자 마티아스 야코프 슐라이덴(1804~1881)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기 위해 잘 알려진 도시 예나로 돌아왔다. 또한 그의 형 에두아르트가 예나의 지역 공립학교 교장을 맡고 있어 도시의 발전에 대한 정보를 계속해서 얻을 수 있었다.
이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복잡한 관료주의를 인내해야 했다. 그는 먼저 거주 허가가 필요했는데, 이는 대학에 등록된 학생 신분으로 가장 쉽게 얻을 수 있었다. 차이스는 1845년 11월부터 수학과 화학 강의를 수강하며 학생으로 등록했다. 또한 그는 여러 교수들과 함께 사립 생리학 연구소에서 기술자로 일하며 다양한 장치를 제작했다. 당시 예나에는 이미 두 개의 기구 작업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쾨르너의 작업장과 쾨르너의 견습생이었던 브라우나우의 작업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거리가 많았다.
차이스는 1846년 5월 10일 바이마르 정부에 예나에 기계공 아틀리에 설립 허가를 신청했다. 그는 과학 장비에 대한 수요 증가를 언급하며, 대학 과학자들과의 긴밀한 협력의 중요성을 들어 예나에서 일하고 싶다는 소망을 정당화했다. 예나 대학교의 존경받는 교수들의 추천에도 불구하고, 바이마르 정부는 그의 요청을 천천히 처리했다. 차이스는 8월에 필기시험을 치러야 했고, 마침내 11월에 "기계 및 광학 장치 제작 및 판매, 그리고 예나에 정밀 기계 아틀리에 설립에 대한 허가"를 받았다. 수수료를 지불하고 예나 당국 앞에서 의례적인 맹세를 한 후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다.
3. 작업장 설립 및 초기 사업
칼 차이스는 1846년 11월 17일에 자신의 작업장을 열었다. 초기 자본금은 형 에두아르트로부터 빌린 100 Taler였으며, 이는 나중에 아버지 아우구스트가 갚아주었다. 그는 처음에는 혼자서 다양한 물리 및 화학 장치를 제작하고 수리했다. 특히 거울 블랭크를 잘라 만든 확대경이 수요가 많았다. 안경, 망원경, 현미경, 제도 도구, 온도계, 기압계, 저울, 유리 불기 액세서리 및 해외 공급업체로부터 구매한 기타 장치들도 작은 상점에서 판매되었다. 1849년까지 작업장은 901 Taler의 매출에 197 Taler의 이익을 올렸다.
3.1. 초기 제품 및 사업 발전
1847년에 칼 차이스는 단순 현미경 제작을 시작했으며, 이는 거의 즉시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파리의 루이 뱅상 슈발리에, 빈의 시몬 플뢰슬, 그리고 그의 스승 쾨르너와 같은 경쟁자들의 제품에 비해 그의 현미경은 더 저렴할 뿐만 아니라 더 우수했다. 차이스의 현미경은 대물대 대신 광학 부품을 지지하는 기둥을 움직여 초점을 맞출 수 있었는데, 이는 해부 현미경에서 훨씬 편리한 방식이었다.
사업이 너무 잘 되어서 1847년 초에는 조수를 고용하고 더 큰 작업장으로 이전할 수 있었다. 1847년 7월 1일, 차이스는 17세의 아우구스트 뢰버(August Löber, 1830~1912)를 첫 견습생으로 받아들이는 중요한 조치를 취했다. 뢰버는 차이스 작업장에서 가장 중요한 직원 중 한 명이 되었고, 이익 분배 파트너가 되어 사망할 때까지 차이스와 함께했다. 1847년에는 대공국 국경 너머의 고객들에게 총 27개의 단순 현미경이 배송되었다. 이후 흉작, 사업 위기, 대공국 내 혁명으로 인해 3년간 어려운 시기가 이어졌으나, 1850년에는 차이스와 그의 현미경이 충분히 좋은 명성을 얻어 프로이센의 그라이프스발트 대학교로부터 매력적인 제안을 받았다. 대학의 기구 제작자 노베르트가 이주하자, 여러 교수진은 차이스에게 물리학 캐비닛의 큐레이터로 임명되어 200 Taler의 급여를 받는 자리를 채워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영향력 있는 수학자가 그러한 직책은 "외국인"이 채울 수 없다고 주장하여 이 제안은 무산되었고, 차이스는 좋든 싫든 예나에 남게 되었다.
4. 현미경 기술 발전
1846년 현미경 생산은 제조 기업이라기보다는 수공예이자 예술에 가까웠다. 각 작업자는 분업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기구를 제작했다。 초기 제품에는 제작자의 이름이 서명되어 있기도 했다. 대물대와 같이 특히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조립품만이 미리 대량 생산되었다. 1857년에 차이스는 뢰버가 담당하는 광학 부품 제작과 스탠드의 금속 가공을 분리하면서 보다 효율적인 분업을 시작했다.
마티아스 야코프 슐라이덴은 회사 설립 이래로 열렬한 후원자이자 조언자였으며, 자주 작업장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는 차이스에게 빠르게 발전하는 세포 해부학 과학에 필수적이며 수요가 많은 현미경에 노력을 집중할 것을 조언했다. 슐라이덴은 이것이 자신의 연구 분야였기에 개인적인 관심이 있었다. 이러한 교류의 결과로 작업장의 첫 현미경 제품인 단순 현미경은 끊임없이 개선되었다. 이들은 영향력 있는 현미경학자이자 식물학자인 레오폴트 디펠(Leopold Dippel, 1827~1914)로부터 매우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단순 현미경용 광학 부품에는 5 Taler에 200배 확대 삼중렌즈와 8 Taler에 300배 확대 삼중렌즈가 포함되어 단순 현미경의 한계를 뛰어넘었다. 더 높은 배율을 위해서는 복합 현미경이 필요했으며, 경쟁자들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 차이스는 제품군을 확장해야 했다.
복합 현미경 생산에는 광범위한 연구가 필요했으며, 그는 이를 오래 전부터 예측하고 있었다. 차이스는 제한된 여가 시간에 현미경 이론에 대해 이용 가능한 모든 것을 연구하는 독서광이 되었다. 그는 무엇보다도 높은 배율의 복합 렌즈를 구성하는 렌즈 세트를 경험적으로 맞춰보는 기존의 현미경 생산 방식을 벗어나고 싶어 했다. 경험적 방식은 여러 렌즈를 선택하고 교환하며 검사하고, 렌즈 간격을 계속해서 변경하여 사용할 수 있는 렌즈를 얻는 방식이었다. 현미경 렌즈에 사용되는 세 가지 요소를 조합하기 위해 수십 개의 렌즈를 검사해야 했다. 이 방식으로 얻은 비교적 좋은 렌즈는 최상의 결과를 찾기 위해 계속해서 변경하고 시도되었다. 어느 정도는 이러한 설계를 재현할 수 있었지만, 각 제품은 사용된 작업 방식으로는 정확히 재현할 수 없는 작은 요소들의 경험적 조합이었다.
차이스는 처음부터 광학자라기보다는 정밀 기계공에 가까웠다. 이는 그가 동시대 광학자들의 전통적인 작업 방식과 사고방식에 덜 얽매였고 혁신에 더 개방적이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는 전문가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이론적 계산을 기반으로 현미경 광학 설계를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이러한 의견에도 불구하고, 요제프 폰 프라운호퍼(1787~1826)는 이미 1819년에 계산을 통해 망원경 대물렌즈를 제작했으며, 요제프 페츠발은 1840년 빈에서 요한 프리드리히 포이트랜더(Johann Friedrich Voigtländer)와 함께 카메라 대물렌즈에 대해 같은 작업을 수행했다. 차이스는 이미 저녁 문헌 연구를 통해 필요한 이론을 습득하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하자, 그의 스승 쾨르너와 함께 일했고 차이스의 단순 현미경 삼중렌즈 문제에 성공적으로 기여했던 예나의 수학 교수 프리드리히 빌헬름 바르푸스(Friedrich Wilhelm Barfuss)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 협력은 교수의 사망까지 이어졌지만, 복합 현미경 문제에 대한 진전은 없었다.
차이스의 첫 복합 현미경은 1858년 5번째 가격표에 처음 등장했다. 이들은 "필드 렌즈와 두 개의 접안렌즈로 구성된 작은 몸체 튜브와 스탠드에 튜브를 부착하는 어댑터, 그리고 스탠드 1~5의 이중렌즈 대물렌즈를 사용하여 복합 현미경 방식으로 두 가지 더 강한 배율을 얻을 수 있도록 함. 단순 현미경의 120배 이중렌즈는 이 방식으로 300배 및 600배 확대 배율을 제공한다"고 설명되었다.
슐라이덴의 승인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임시방편적인 복합 현미경은 장기적인 해결책이 아니었다. 유사한 배열인 브뤼케의 확대경은 해부 스탠드와 함께 수년간 계속 제공되었지만, 원래의 단순 현미경 이중렌즈는 목적에 맞게 설계된 복합 현미경의 색수차 보정 대물렌즈를 대체하기에는 부족했다. 1861년 8월 7번째 가격표가 발행될 무렵, 새로 개발된 복합 현미경이 5가지 다른 버전으로 등장했다. 이 중 가장 큰 것은 55 Taler였으며, 유명한 파리 현미경 제작자 게오르크 오버하우저(Georg Oberhaeuser)가 대중화시킨 말굽 모양의 받침대였다. 차이스는 대물대 아래에 돔형 조리개 판과 거울을 설치하여 좌우뿐만 아니라 전방으로도 움직여 사선 조명을 생성할 수 있도록 했다. 각 현미경 세트는 고객의 주문에 따라 제작되어, 고객이 선호하는 광학 부품(대물렌즈, 접안렌즈, 조명)을 선택할 수 있었다.
이 새로운 복합 현미경의 대물렌즈는 여전히 경험적으로 설계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오폴트 디펠로부터 즉각적인 승인을 받았다. 디펠은 가장 유용한 대물렌즈인 A, C, D, F의 광학 품질을 검사하고 차이스의 새로운 대물렌즈에 대해 상당한 찬사를 보냈다. D 대물렌즈는 벨틀레(Belthle)와 하트나크(Hartnack, 오버하우저의 후계자)의 유사한 성능 대물렌즈와 매우 유리하게 비교되었다. F 대물렌즈는 기존 제작자들의 훨씬 비싼 대물렌즈와 동등하다고 평가되었으며, 하트나크의 수침 대물렌즈와 거의 비슷하다고 평가되었다. 그러나 바로 이것이 문제였다. 각 분야의 선두에 있는 연구자들에게 판매할 때 "거의 비슷하다"는 것은 상업적인 재앙이었다. 차이스는 자신의 가장 강력한 대물렌즈가 하트나크의 수침 대물렌즈의 품질과 일치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만족스러운 수침 대물렌즈를 경험적으로 설계하려는 모든 시도는 실패했다.
5. 에른스트 아베와의 협력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칼 차이스는 대물렌즈를 이론적인 계산을 기반으로 설계하려는 원래의 계획으로 돌아갔다. 그는 협력자를 다시 찾았고, 이번에는 예나 대학교의 사강사(부교수)였던 에른스트 아베(Ernst Abbe, 1840~1905)를 선택했다. 50세의 차이스와 26세의 아베 간의 공식적인 협력은 에밀 하트나크(Emil Hartnack)의 것과 동등한 해상도를 가진 수침 대물렌즈를 개발하는 것을 목표로 1866년 7월에 시작되었다.
광학 제품의 합리적인 생산을 위한 첫 단계는 작업장 방식의 현대화였다. 이는 전통적인 방식을 선호했던 뢰버와 다른 직원들의 일부 저항에 부딪혔으나 달성되었다. 계획은 광학 시스템의 정밀한 재현을 위해 대물렌즈를 제작하기 전에 각 렌즈 요소의 모든 개별 특성을 측정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D 대물렌즈에는 5개의 렌즈가 포함되어 있었다. 각 렌즈는 특정 굴절률을 가진 유리로 구성되었고, 정확한 곡률과 특정 초점 거리, 그리고 정확한 간격을 가지고 있었다. 뢰버는 이미 뉴턴의 고리 현상을 사용하여 유리 기준 게이지로 렌즈 표면의 곡률을 비교하는 방식으로 한 가지 요구 사항을 조사했다. 요제프 폰 프라운호퍼는 오래 전에 동일한 해결책에 도달했지만, 그 절차는 그의 작업장의 영업 비밀로 남아 있었다. 아베는 초점 거리와 굴절률을 측정하기 위해 일련의 새로운 측정 장치를 제작했다. 이러한 모든 노력의 결과는 1869년까지 명확해졌다. 겉으로는 현미경이 거의 변하지 않았지만, 작업 흐름의 합리화 덕분에 동일한 인원으로 더 많은 현미경이 생산되었다. 가격은 25% 인하되었다.
아베는 이제 실제 작업인 이론적 대물렌즈 설계 계산을 진행할 수 있었다. 차이스는 작업장에서 가능한 모든 지원과 작업장에서 가장 유능한 직원인 아우구스트 뢰버의 도움을 제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복해야 할 많은 장애물이 있었다. 1872년이 되어서야 작업이 완료되었다. 아베는 기존의 A부터 F까지의 대물렌즈를 체계적인 생산을 위해 재계산했으며, 이 시리즈에 AA부터 DD까지 네 가지 새로운 대구경 대물렌즈를 추가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트나크, 군들라흐 또는 다른 경쟁사 제품과 동등한 해상도와 이미지 품질을 가진 세 가지 수침 대물렌즈를 추가했다는 점이다. 카탈로그 번호 19, "현미경 및 현미경 액세서리"에서는 "여기에 제시된 현미경 시스템은 모두 예나의 에른스트 아베 교수의 최근 이론적 계산을 기반으로 제작되었다"고 발표되었다. 더 이상 어떤 경쟁사의 제품에도 뒤지지 않았다. 이는 가격에도 반영되었다. 1871년 최고의 현미경 가격이 127 Taler였던 반면, 1872년에는 최고급 제품에 387 Taler를 지불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업은 활발했으며, 새로운 대물렌즈 시스템은 라이프치히에서 열린 자연과학자 및 의사 회의에서 높은 찬사를 받았다.
차이스는 아베의 노력에 대해 작업장에서 관대한 이익 분배 계약을 맺어 보답했으며, 1875년에는 그를 파트너로 삼았다. 아베는 재정적 참여의 한 조건으로 대학에서의 책임을 더 이상 확장하지 않기로 했다. 광학 계산은 회사의 재산으로 간주되어 출판되지 않기로 했는데, 이는 아베의 원래 계획과 상반되는 것이었다. 이들의 협력은 사인 조건(sine condition)의 발견으로 이어져 렌즈 제작 방식을 크게 개선하는 데 기여했다.
6. 광학 유리 개발
이론적 계산을 기반으로 한 대물렌즈 생산 문제를 해결한 후에도 한 가지 문제가 남아 있었는데, 바로 적합한 광학 유리의 생산이었다. 당시 광학 유리는 영국, 프랑스 또는 스위스에서 수입되었으며, 품질, 안정적인 가용성, 광학 특성 선택 및 신속한 배송 면에서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광학 특성은 배치마다 일관되지 않았고, 중요한 것은 얻을 수 있는 유리들이 현미경 대물렌즈에서 최상의 보정을 제공하도록 계산된 특성에 이상적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베와 차이스는 특정 특성을 가진 유리를 얻을 수 있다면 현미경 대물렌즈의 광학 품질을 더욱 향상시킬 수 있다고 확신했다. 불행히도 그러한 유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차이스는 다시 한번 작업장의 자원을 활용하여 아베의 이론적 작업을 지원했으며, 1873년까지 그의 이론을 시험하기 위해 렌즈 삼중렌즈에 액체를 사용하는 대물렌즈(작업장에서는 폴리옵 대물렌즈로 알려짐)를 제작했다. 액체 렌즈 삼중렌즈는 새로운 아이디어가 아니었다. 데이비드 브루스터는 1837년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실린 그의 현미경 논문에서 이를 설명했다. 이들은 유리에서는 접근할 수 없는 여러 광학 특성에 접근할 수 있게 해주었다. 불행히도 상업적으로는 실현 가능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비싸고 상업적으로 무용했던 실험들은 아베의 예측이 옳았음을 증명했다. 더 우수한 광학 보정이 가능했다. 아베와 차이스의 1872년 대물렌즈 시리즈(수침 대물렌즈 포함)는 당시 제작된 어떤 제품과도 동등한 수준이었다. 처음으로 이 대물렌즈들은 다른 어떤 곳에서 만들어진 것보다 더 우수했다. 이 결과는 새로운 유리를 개발해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가 되었다.
아베는 광학 유리의 특성 범위를 확장하는 문제를 주요 생산자들과 논의했지만 성공하지 못했고, 계속해서 해결책을 모색했다. 화학자이자 유리 기술자인 오토 쇼트가 새로운 유리 화학 조성을 특성화하는 데 도움을 구하기 위해 아베에게 연락했을 때, 차이스와 아베는 매우 열정적으로 반응했다. 쇼트는 고품질의 실험용 유리 조성을 소량 생산하는 데 독보적인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예나로 이주하여 실험을 확장하도록 설득되었다. 수십 번의 성공적인 실험을 시연한 후, 차이스는 자신의 신뢰와 인맥을 활용하여 프로이센 정부로부터 이 노력에 대한 재정 지원을 얻어냈다. 예나에 유리 공장을 설립한 지 2년 이내에 차이스, 아베, 쇼트는 반복 가능한 조성으로 잘 특성화된 수십 가지 광학 유리를 대규모로 제공할 수 있었다. 이 회사는 오늘날에도 쇼트 AG로 운영되고 있다.
쇼트 유리 공장의 제품 라인을 발표하는 동일한 출판물에서 차이스는 아베의 작업을 기반으로 기존 렌즈보다 더 높은 표준으로 보정된 새로운 대물렌즈 세트를 발표했다. 이 아포크로마트 대물렌즈는 거의 20년간 지속된 협력의 성공을 상징했다. 특히 쇼트가 1886년에 크라운 유리를 개발하면서 아베의 원리를 충분히 활용할 수 있게 되었고, 이는 거의 색수차가 없는 수침식 보정 접안렌즈와 같은 새로운 종류의 현미경 대물렌즈를 탄생시켰다.
7. 사진 렌즈 개발
카메라의 발명 이후, 칼 차이스의 회사는 사업 영역을 확장하여 사진용 고품질 렌즈 개발에 착수했다. 1886년에는 당시 유능한 수학자로 알려진 파울 루돌프를 영입하여 사진 렌즈 개발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초기에는 현미경 렌즈만 생산했으나, 카메라의 등장과 함께 고품질 카메라 렌즈 생산으로 사업을 다각화하며 광학 기술의 적용 범위를 넓혔다.
8. 고용주로서의 칼 차이스
칼 차이스는 엄격한 가부장제 방식으로 작업장을 운영했다. 견습생들이 제작한 현미경 중 그가 정한 엄격한 정밀도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는 것은 차이스가 직접 작업장 모루 위에서 파괴했다. 작업 시간은 오전 6시부터 오후 7시까지였으며, 오전 중 15분 휴식과 점심시간 1시간을 포함하면 하루 11.75시간의 긴 노동 시간이었다.
이러한 엄격한 규칙에도 불구하고 작업장의 근무 환경은 매우 좋았다. 새로 채용된 직원들은 그의 집에서 와인 한 잔을 마시며 광범위한 면접을 보았다. 직원들은 종종 차이스 집의 정원으로 초대되어 와인과 다과를 즐겼으며, 작업장에서는 매년 건초 마차를 타고 언덕으로 떠나는 직원 야유회 비용을 지불했다. 1856년에는 가장 오래 근무한 견습생 뢰버가 주당 3 Taler를 벌었고, 다른 직원들은 주당 2.5 Taler를 벌었다.
차이스는 정밀 기계 가공 및 광학 지식을 향상시키기 위해 상당한 양의 책을 수집했다. 이 책들은 기계공들을 위한 도서관이 되어 모든 직원이 추가 교육을 위해 이용할 수 있었다. 회사가 확장됨에 따라 1875년에는 차이스 건강 클리닉이 설립되어 직원들에게 클리닉 의사의 무료 치료와 무료 약품 접근을 보장했다. 직원이 일을 할 수 없게 되면 6주 동안은 임금이 전액 지급되었고, 이후 6주 동안은 임금의 절반이 지급되었다. 이러한 선구적인 정책은 1883년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도입한 국가 복지법보다도 앞선 것이었다. 차이스 공장의 직원 사기는 일관되게 좋았다.
9. 회사 확장 및 성장
1876년 10월 14일, 3,000번째 현미경 완성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렸으며, 직원 수는 60명으로 늘어났다. 같은 해 차이스의 아들 로데리히가 회사에 합류하여 상업 및 행정 업무를 맡았고, 1879년에는 파트너가 되었다. 로데리히는 또한 미세 사진 장치 설계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칼 차이스는 매일 회사 업무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의 공헌을 인정받아 칼은 1880년 오랜 협력자였던 동물학자 에른스트 헤켈 교수의 추천으로 예나 대학교로부터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
에른스트 아베는 회사의 현대화와 확장을 장려했지만, 차이스는 자신이 겪었던 많은 좌절 때문에 다소 보수적인 입장을 유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80년대에는 대규모 운영으로의 전환이 진행되고 있었다. 1883년까지 회사는 견고한 사업 성공을 누렸다. 회사는 카탈로그 번호 26을 80페이지 분량의 삽화가 포함된 제본된 책자로 5,000부 발행했다. 항상 검소했던 차이스는 소매업자들에게 부당 3 실버 그로셴 또는 4 실버 그로셴의 비용을 분담하도록 요구했다. 런던의 회사 소매업자인 베이커는 종종 한 번에 40개 이상의 대물렌즈를 주문하기도 했다. 회사는 심지어 국내외에 지사를 개설하기 시작했다.
1889년에는 에른스트 아베의 주도로 칼 차이스 재단(Carl-Zeiss-Stiftung)이 설립되어, 모든 광학 기기 제조사로서 높은 국제적 평가를 얻으며 오늘날까지도 운영되고 있다.
10. 만년과 사망
1885년 12월, 칼 차이스는 가벼운 뇌졸중을 겪었으나 완전히 회복되었다. 1886년 그의 70번째 생일에는 대공이 그에게 백색 매 기사단 훈장을 수여했다. 같은 해 아포크로마트 대물렌즈가 시장에 출시되었다. 이 렌즈들은 차이스가 영감을 주고 가능하게 했으며 아베가 실현한 대물렌즈의 이론적 설계라는 원대한 구상의 최종적인 실현을 나타냈으며, 이전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이미지 품질을 제공했다. 러시아 의사 회의 회원들은 새로운 대물렌즈에 깊은 감명을 받아 차이스를 명예 회원으로 추대했다.
차이스는 1886년 9월 24일 10,000번째 현미경 완성 기념 행사에 참석할 수 있었다. 이 행사에는 모든 직원과 배우자가 초대되었으며, 예나에서는 수십 년 동안 기억될 만큼 성대한 파티였다. 이후 차이스의 건강은 급격히 악화되었고, 1888년 마지막 분기에 여러 차례 뇌졸중을 겪은 후 1888년 12월 3일에 사망했다. 그는 예나에 안장되었다.

11. 유산과 영향력
칼 차이스의 공헌을 최종적으로 분석할 때, 비록 그가 현미경 역학에 몇 가지 개선을 도입했지만, 개인적으로 획기적인 혁신을 이루지는 않았다고 결론 내려야 한다. 그의 결정적인 공헌은 자신의 작업과 직원들의 제품에서 최고의 정밀도를 고집했다는 점과, 처음부터 현미경 설계에 귀중한 통찰력을 제공한 과학자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는 점이다.
차이스의 가장 큰 공헌은 이론을 기반으로 현미경 대물렌즈를 생산하려는 그의 아이디어를 끈질기게 추구했다는 점이다. 비록 그의 개인적인 노력과 바르푸스와의 협력이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최종적인 과업은 아베에 의해 달성되었지만, 아베의 광학에 대한 관심을 일깨우고 그 엄청난 과업을 위해 가능한 모든 개인적, 물질적, 재정적 지원을 제공한 것은 차이스의 공로로 인정되어야 한다. 이론적 설계를 기반으로 한 대물렌즈 생산은 차이스가 항상 가장 큰 강조를 두었던 최고의 정밀도로 작업하도록 훈련된 숙련된 장인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또 다른 최종적인 성과는 작업장을 대기업으로 내부적으로 재조직하고 변혁하는 과정을 이끌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변혁만이 최고 정밀도의 현미경을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게 했다. 확장의 원동력은 에른스트 아베였지만, 차이스가 최종 결정권을 가졌고 그 노력을 전적으로 지지했다. 광학 시스템의 계산과 대기업으로의 전환을 받아들이지 않은 경쟁 작업장들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에른스트 아베는 여러 주요 연설에서 칼 차이스의 공헌을 기렸으며,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칼 차이스 재단(Carl-Zeiss-Stiftung)의 설립을 통해 그를 기념했다. 그의 이름을 딴 FC 칼 차이스 예나 축구 클럽도 그의 유산을 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