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카를 에두아르트 폰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1884년 7월 19일 ~ 1954년 3월 6일)은 영국의 왕자이자 작센코부르크고타 공국의 마지막 통치 공작이었으며, 이후에는 나치당의 유력 정치인이자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그는 빅토리아 여왕의 손자로서 영국에서 태어나 교육받았으나, 15세에 독일 공작위를 계승하며 독일에 정착하게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독일 제국을 지지하여 영국 왕실의 작위와 직위를 박탈당했으며, 독일 혁명으로 공작위를 상실했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는 극우 정치 세력 및 반유대주의 단체를 적극적으로 후원하며 폭력적인 행동을 용인했고, 이는 후에 나치즘의 발흥에 기여하게 된다. 1933년 나치당에 공식 가입한 그는 돌격대의 상급집단지도자로 활동했으며, 독일 적십자사 총재로서 나치 정권의 이념에 따라 적십자사를 재편하고 우생학적 사상을 적극 지지하여 나치의 장애인 학살 프로그램에 간접적으로 관여했다. 또한 나치 독일의 비공식 외교관으로서 영국 등 유럽 각국과 일본, 미국을 방문하며 나치 정권의 이미지를 개선하고 외교적 지지를 모색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연합군에 체포되어 비나치화 재판을 받았으나 가벼운 형을 선고받았고, 남은 여생을 독일에서 보냈다. 그의 나치당 연루 행적은 오늘날까지도 역사학계와 언론에서 비판적으로 재조명되고 있으며, 그의 삶은 사회적 약자와 인권에 대한 무관심, 그리고 반민주적 이데올로기에 동조한 특권층의 책임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남겼다.
2. 초기 생애 및 배경
카를 에두아르트는 1884년 7월 19일 영국 서리주의 클레어몬트 하우스에서 태어났다. 그는 영국 왕실의 일원으로서 유년기를 보냈으며, 이후 독일 공작위를 계승하기 위해 독일에 건너가 교육을 받았다.
2.1. 출생 및 가족 관계
카를 에두아르트의 본명은 레오폴트 찰스 에드워드 조지 앨버트(Leopold Charles Edward George Albert)이며, 그는 주로 찰스 에드워드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그의 아버지는 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 공의 막내아들인 레오폴드 공자였다. 역사가 카리나 우르바흐(Karina Urbach)는 레오폴드를 "빅토리아 여왕의 자녀들 중 가장 지적인 인물"이라고 묘사했다. 그의 어머니는 발데크피르몬트 공녀 헬레나로, 발데크피르몬트 공자 게오르크 빅토르의 딸이자 네덜란드의 엠마 왕비의 여동생이었다. 레오폴드 공자는 혈우병을 앓았으며, 카를 에두아르트가 태어나기 몇 달 전인 1884년 3월 28일 칸에서 급사했다. 카를 에두아르트는 태어나자마자 아버지의 작위인 올버니 공작위를 비롯하여 클라렌스 백작과 아크로우 남작의 작위를 상속받았다. 그는 혈우병의 영향을 받을 위험이 없었는데,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혈우병을 물려받지 않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한 살 반 많은 누나 앨리스가 있었다. 카를 에두아르트는 극도로 불안정한 성격의 아이였으며, 성인이 되어서도 누나 앨리스에게 자주 의지하는 습관이 있었다. 두 남매는 서로에게 "샴쌍둥이" 같았다고 묘사되기도 했다.
18세기와 19세기에 걸쳐 영국 왕실은 유럽 대륙의 개신교 왕가, 특히 독일의 통치 왕가들과 긴밀한 가족 관계를 맺고 있었다. 빅토리아 여왕의 직계 가족은 작센코부르크고타 가문에 속해 있었다. 빅토리아 여왕의 남편인 앨버트 공은 자녀가 없었던 에른스트 2세 공작의 남동생이었다. 에른스트 2세는 독일 제국 내의 작센코부르크고타 공국을 통치했다. 빅토리아와 앨버트의 장녀 독일 황후 빅토리아는 빌헬름 2세의 어머니였다. 장남인 앨버트 에드워드 공자는 영국 왕위 계승자였으므로, 삼촌 에른스트 2세의 뒤를 이어 1893년 공작위를 계승한 것은 그들의 차남 알프레트 공자였다. 작가 테오 아론슨(Theo Aronson)은 1887년 빅토리아 여왕의 재위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의뢰된 가족 그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이 인상적인 인물들은 서로에게 '더키', '모시', '소시'와 같은 별명으로 불렸을지 모르지만, 이들 중에는 미래의 수많은 왕, 왕비, 황제, 황후들이 있었다. 시간이 흘러 빅토리아 여왕의 직계 후손들은 무려 10개 이상의 유럽 왕좌에 앉게 될 것이다. '유럽의 할머니'로 불린 옛 여왕에게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군주가 보이는 모습만큼 중요하다고 여겨지던 시대에, 어린 아이가 그들이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일족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2.2. 유년 시절 및 교육

카를 에두아르트는 생후 15년 동안 영국 왕자로 자랐다. 그는 병약한 아이였으며, 할머니인 빅토리아 여왕과 유일한 형제인 누나 앨리스 공녀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그는 1884년 8월 4일 클레어몬트에서 비공개로 유아 세례를 받았고, 병세가 호전된 후 1884년 12월 4일 에셔의 성 조지 교회에서 공개적으로 세례를 인증받았다.
아론슨은 클레어몬트 저택의 앨버니 가정을 "아늑하고, 편안하며, 질서 정연했다"고 묘사했다. 남편 사망 후 영국 의회는 헬레나 공녀에게 연간 6000 GBP의 보조금을 지급했으며, 이는 1890년 기준 약 63.80 만 GBP (2023년 기준)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이 덕분에 그녀는 여러 하인, 특히 자녀들을 돌보는 하인들을 고용할 수 있었다. 카를 에두아르트의 어린 시절 유모 중 한 명은 그를 "섬세하고 민감하며, 신경질적이고 피곤한 아이"라고 표현했다. 왕실이 자문한 의료 전문가들은 그의 어머니가 임신 중 겪었던 슬픔이 그에게 영구적인 해를 끼쳤다고 믿었다. 카를 에두아르트 자신의 어린 시절 기억은 남아있지 않지만, 앨리스는 이 시기를 행복하게 회상했다.
두 아이의 양육은 주로 유모들의 책임이었지만, 매일 정해진 시간 동안 어머니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어머니는 아이들에게 뜨개질과 같은 실용적인 기술을 가르쳤고, 주일학교 수업을 진행했다. 헬레나 공녀는 아이들에게 19세기 유명한 영국 및 스코틀랜드 작가들의 문학 작품을 읽어주었다. 그녀는 애정 깊은 어머니였지만 엄격하기도 했는데, 아이들이 엄격한 훈육을 받고 의무감을 키우도록 했다. 카를 에두아르트는 이에 잘 반응하지 못하고, 어머니와 일반적으로 권위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다.
카를 에두아르트, 그의 어머니, 누나는 빅토리아 여왕과 가까운 다른 왕실 구성원들에게 둘러싸여 자랐다. 그들은 여왕의 여러 사유지에서 자주 시간을 보냈다. 카를 에두아르트는 빅토리아 여왕이 가장 아끼는 손자라고 알려져 있었다. 소년과 그의 누나는 자주 밸모럴 성을 방문하여 미래의 지위에 대비했다. 빅토리아 여왕은 손자들이 자신이 주입하고 싶었던 종교적 가치를 반영하는 극적인 장면을 연기하는 것을 즐겼다. 가족 친구였던 루이스 캐럴은 카를 에두아르트를 궁정 예절과 의식에 잘 훈련된 "완벽한 어린 왕자"라고 묘사했다. 헬레나 공녀는 또한 자녀들을 데리고 독일과 네덜란드에 있는 친척들을 방문했다.
공적인 의무는 왕실의 기능 중 일부였는데, 아론슨은 그들이 많은 영국 국민이 살았던 비참한 환경에 대해 순진했다고 언급했다. 카를 에두아르트의 어머니는 독일 귀족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사회 문제에 특히 관심을 가졌고, 앨리스의 말에 따르면 아이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공감하고 자선 활동에 참여하도록 장려되었다. 카를 에두아르트는 어린 나이에 군사 및 왕실 행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어린 시절 영국군 시포스 하이랜더스 연대의 첫 의례적 직위를 맡았다. 빅토리아 여왕은 자신의 일기에서 다섯 살 난 공자가 "시포스 하이랜더스 연대의 완전한 제복"을 입고 있는 것을 언급했다. 그의 13번째 생일 직전, 카를 에두아르트는 빅토리아 여왕 즉위 60주년 기념식 퍼레이드에 참가했다. 그는 행사 전에 버킹엄궁 지붕에 올라 군중을 지켜보았으며, 당시 언론 보도에서는 가장 큰 환영을 받은 참가자 중 한 명으로 묘사되었다.
역사가 후베르투스 뷔셸(Hubertus Büschel)은 영국 왕실이 어린 구성원들의 교육에 높은 기대를 걸었다고 지적했다. 카를 에두아르트의 첫 스승은 "포츠 부인(Mrs Potts)"이라는 가정교사로, 그녀는 그와 그의 누나를 함께 가르쳤다. 남매는 그녀의 수업에서 역사적 장면을 연기하는 것을 허용받으며 평생 역사에 대한 관심을 키웠다. 이후 그는 누나 없이 학교에 진학하여 사립 공립 학교 시스템에서 공부했다. 카를 에두아르트는 두 곳의 예비 학교에 다녔는데, 처음에는 서리주의 산드로이드 학교, 그 다음에는 린드허스트의 파크 힐 학교(Park Hill School)에 다녔다. 1896년 일기에서 빅토리아 여왕은 후자 학교의 교장인 "로운슬리 씨(Mr Rawnsley)"와 그의 아내를 만났다고 언급하며 "그들이 말한 모든 것이 매우 만족스러웠다. 그는 매우 신중하고 친절한 것 같다"고 평했다. 1898년 공자는 이튼 칼리지에 입학했으며, 그의 어머니는 그가 궁극적으로 옥스퍼드 대학교에 진학하기를 희망했다. 이튼 칼리지는 영국 상류층과 밀접하게 연관된 기숙학교였다. 언론 보도에서는 그가 학교에서 거만하게 행동한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그는 이튼에서 행복했으며, 평생 그곳에서의 시간을 향수에 젖어 회상했다. 아론슨은 10대 초반의 공자를 "작고 푸른 눈을 가진, 매우 잘생기고 신경질적인" 인물로 묘사했다. 그는 특별히 저명한 인물로 성장할 것으로 예상되지 않았다.
3.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위 계승
카를 에두아르트는 1900년 숙부 알프레트 공작의 사망으로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그는 독일에 건너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며 독일식 교육을 받았다.
3.1. 후계자 선정 과정
알프레트 공작의 외아들인 알프레트 세습 공자가 1899년에 사망하면서, 건강이 좋지 않았던 알프레트 공작의 후계자 문제가 왕실 내의 중요한 쟁점으로 부상했다. 많은 독일 지배층은 알프레트 공작을 부적절한 외국인으로 여겼고, 일부 독일 공자들은 공국을 분할하기를 원했다.
초기에는 빅토리아와 앨버트의 셋째 아들인 아서 공자가 추정 상속인이었다. 그러나 독일 언론 일부는 외국인이 왕위를 차지하는 것에 반대했고, 빌헬름 2세는 영국군에 복무했던 인물이 독일 국가의 통치자가 되는 것을 반대했다. 아서 공자의 아들인 아서 공자는 이튼 칼리지에서 카를 에두아르트와 함께 공부하고 있었다. 빌헬름 2세는 어린 아서에게 독일식 교육을 요구했지만, 이는 코노트 공작에게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결국 카를 에두아르트의 삼촌과 사촌 모두 공작위 계승권을 포기했고, 카를 에두아르트가 다음 계승자가 되었다. 공자는 가족의 압력으로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미국 언론에서는 어린 아서가 카를 에두아르트가 직위를 수락하지 않으면 그를 신체적으로 공격하거나 위협했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그는 자신에게 부과된 상황 변화에 불행해 보였다. 역사가 앨런 R. 러시턴(Alan R. Rushton)은 그가 "빌어먹을 독일 공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고 인용했다. 러시턴은 주변의 어른들이 카를 에두아르트가 새로운 역할을 받아들이도록 격려한 것 같다고 시사했다. 그의 누나는 어머니가 "나는 항상 찰리를 좋은 영국인으로 키우려고 노력했는데, 이제는 그를 좋은 독일인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고 기억했다. 프레데릭 로버츠 원수는 그에게 "좋은 독일인이 되도록 노력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뷔셸과 아론슨은 모두 그의 어머니의 발언을 새로운 상황에 대한 좌절감의 표현으로 해석했다.
당시 14세였던 카를 에두아르트의 어린 나이와 독일인 어머니, 그리고 영국인 아버지의 부재는 그가 나이든 남자와는 달리 독일 사회에 동화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되는 요인이었다. 코부르크 지역 신문은 이러한 선택을 칭찬했다. 독일에선 카를 에두아르트의 행보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컸다. 러시턴에 따르면 일부 독일인들은 "이제 영국 소년이 독일인 남성과 그의 입양된 땅의 지도자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꼈다." 공자는 독일에 가기 전에 견진성사를 받았다. 빅토리아 여왕은 자신의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베아트리스가 나에게 의식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해 주었다. 불쌍한 헬레나와 찰리는 예식 동안 잘 버텼지만, 나중에는 감정에 북받쳤다. 가엾은 아이가 이렇게 뿌리 뽑혀야 하는 것이 매우 힘들고, 그에게는 당연히 큰 고통이며, 그의 어머니에게는 자신의 행복하고 조용한 집을 당분간 포기하고 아버지 없는 아들을 미지의 세계로 보내야 하는 것이 정말 끔찍한 일이다!"
3.2. 독일에서의 교육 및 적응
카를 에두아르트는 15세에 어머니, 누나와 함께 독일로 이주했다. 그는 독일어를 거의 하지 못했다. 알프레트 공작은 카를 에두아르트를 어머니와 분리하기를 원했고, 그래서 그의 어머니는 아들을 시동생인 뷔르템베르크의 빌헬름 2세에게 데려가 가정교사를 구해주었다. 헬레나는 아들이 어떻게 교육을 받아야 할지 고민했다. 우선순위는 그가 적절한 독일식 방식으로 양육되고 있음을 독일인들에게 안심시키는 것이었다. 여러 친척들이 제안을 했다. 알프레트 공작은 자신의 후계자에 대한 책임을 맡고 싶어 했지만, 너무 영국적이라고 여겨졌다. 앨리스의 말에 따르면, 황후 아우구스테 빅토리아가 제안한 학교는 유대인 학생이 너무 많다고 느껴졌다. 헬레나는 결국 아들의 교육에 대한 통제권을 빌헬름에게 넘겼다.

우르바흐에 따르면, 빌헬름은 어린 사촌을 "프로이센 장교"로 만들기를 원했다. 그는 가족을 자신의 여름 거주지인 베를린 근처의 포츠담으로 초대했다. 카를 에두아르트는 리히터펠데의 프로이센 중앙 사관학교에 다녔다. 빌헬름은 빅토리아 여왕에게 자신의 참모 중 한 명이 "그를 위한 학급을 구성할 8명의 품행 단정한 소년들을 선택했다"고 전보로 알렸다. 공자는 독일어와 군사학을 공부했다. 그는 1900년 16세 생일에 기병 중위로 임명되었고, 포츠담의 제1 보병 근위 연대에 입대했다. 1903년 카를 에두아르트는 대학 입학 자격 시험을 마쳤다. 그의 성적은 공개되지 않았다. 이후 카를 에두아르트는 프로이센 정부 부처에서 정부 관리학을 공부했다. 그는 본 대학교에 다녔고 법학을 공부했지만, 학구적인 젊은이는 아니었으며 주로 보루시아 본 코어에 참여하는 것을 즐겼다.
빌헬름 2세는 카를 에두아르트가 독일 사회에 동화되는 것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이 때문에 그는 황실에서 "황제의 일곱 번째 아들"로 불렸다. 공자는 그의 어머니와 누나와 함께 여가 시간의 대부분을 베를린의 독일 궁정에서 보냈는데, 그곳에서 그들은 황제의 가족으로 대우받았다. 빌헬름에게는 일곱 명의 자녀가 있었고, 그 중 나이 많은 자녀들은 앨버니 남매와 비슷한 나이였다. 앨리스는 나중에 그들이 "또 다른 남매 같았다"고 기록했다. 여성들은 아우구스테 빅토리아 황후와 잘 지냈고, 빌헬름은 카를 에두아르트에게 아버지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 빌헬름은 카를 에두아르트를 감수성이 풍부하다고 보았다. 그는 공자에게 반유대주의, 독일 민족주의, 제국의회에 대한 적대감 등을 포함한 자신의 세계관을 주입했다. 1908년 한 정치 스캔들 중에 그 젊은이가 빌헬름과 동성애적 활동을 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카를 에두아르트는 종종 베를린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을 즐기지 못했는데, 황제가 그에게 분개하고 자주 괴롭혔기 때문이다. 1905년 베를린 궁정의 한 관리의 일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황제는 그(카를 에두아르트)와 노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보통 일어나는 일은 그가 그를 너무 꼬집고 부풀려서 불쌍한 작은 공작이 실제로 구타당한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그의 신부인 빅토리아 공녀와 그녀의 부모님도 참석했다. 이 때문에 불쌍한 작은 공작은 거의 울음을 터뜨릴 뻔했고, 그날 저녁 내내 마치 다음 날 아침에 교수형을 당할 것처럼 불행한 표정을 지었다."

카를 에두아르트는 1900년 7월에 삼촌 알프레트 공작이 55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16세의 나이로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위를 상속받았다. 우르바흐는 그 소년이 장례식에서 울었던 것을, 그가 관계가 거의 없었던 삼촌에 대한 슬픔이라기보다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의 표현으로 해석했다. 빌헬름은 카를 에두아르트가 21세가 될 때까지 호엔로에링겐뷔르크 공자 에른스트를 섭정으로 임명했다. 1901년 그는 프로이센 후사르 연대 제복을 입고 빅토리아 여왕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영국 왕위를 계승한 그의 가장 나이 많은 삼촌인 에드워드 7세는 장례식에서 카를 에두아르트를 포옹하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새로운 왕은 1902년 조카를 가터 훈장 기사로 임명했다. 1903년 카를 에두아르트의 어머니는 그가 스스로를 돌볼 만큼 성장했다고 판단하고 앨리스와 함께 독일을 떠났다. 1905년 5월, 에드워드 7세는 그를 영국 육군 연대인 시포스 하이랜더스 연대의 연대장으로 임명했다.
카를 에두아르트는 성공회 종교 예배에 참여하는 등 영국과의 연계를 유지하면서도 최대한 동화되려 노력했다. 우르바흐는 그가 독일어를 빨리 배웠으며, 그의 "독일어 에세이가 영어 에세이보다 높은 점수를 받았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이 시기 공자가 한 여러 발언들은 그가 향수병에 걸려 자신의 상황에 불행해했음을 시사한다. 그의 옥스퍼드 국립 전기 사전 항목을 쓴 샬럿 지프자트(Charlotte Zeepzat)는 그를 "예술과 음악을 좋아하고 양심적인 젊은이"로 묘사하며, 이 시기 코부르크에서 인기를 얻었다고 했다. 아론슨도 비슷하게 카를 에두아르트가 "시끄러운 프로이센 군국주의 분위기에서 성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교양 있고... 음악과 연극을 좋아했으며, 역사와 건축에 관심이 많았다"고 언급했다. 우르바흐는 젊은 공작을 "미성숙했다"고 묘사했다. 당시 언론 보도에 따르면, 그는 "스포츠와 모험"을 좋아했다. 1905년 외신을 다루는 영국 신문 '더 스피어'의 기사는 다음과 같이 평했다.
"모든 [독일] 신문은 젊은 공작을 칭찬하고 그의 호감 가는 성격과 태도를 묘사한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그가 얼마나 독일인이 되었는지, 젊은 시절의 영국식 교육을 완전히 잊고 독일의 이익과 모든 면에서 동일시하고 있는지 강조하는 데 지치지 않는다."
4.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으로서의 통치
카를 에두아르트는 1905년 성년이 되어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으로서 친정(親政)을 시작했다. 그는 통치 기간 동안 다양한 정책과 활동을 펼쳤으나, 제1차 세계 대전 중 독일을 지지하며 영국과의 관계가 단절되었고, 결국 독일 혁명으로 공작위를 상실하게 된다.
4.1. 결혼 및 자녀

우르바흐에 따르면 카를 에두아르트는 여성에 대해 "모호한"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그의 가족은 그가 어린 나이에 정략결혼을 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빌헬름 2세는 자신의 아내의 조카인 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글뤽스부르크 공녀 빅토리아 아델하이트를 카를 에두아르트의 신부로 선택했다. 그녀는 적응력이 뛰어나고 빌헬름의 황실에 충성하는 인물로 여겨졌다. 그녀의 국적은 중요하게 여겨졌으며, 빅토리아 아델하이트는 비독일계나 유대인 혈통이 전혀 없었다. 젊은 공자는 그녀에게 청혼하라는 지시를 받았고, 그는 이를 따랐다. 젊은 부부 사이에는 어느 정도의 애정이 존재했다. 그들은 1905년 10월 11일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글뤽스부르크 성에서 결혼했으며, 다섯 명의 자녀를 두었다. 지프자트는 그들이 행복했다고 언급했지만, 우르바흐는 그렇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두 부부 사이에는 다섯 명의 자녀가 태어났다.
- 요한 레오폴트 공자(1906년 ~ 1972년)
- 지빌라 공녀(1908년 ~ 1972년) - 스웨덴 칼 16세 구스타프 국왕의 어머니.
- 후베르투스 공자(1909년 ~ 1943년)
- 카롤리네 마틸데 공녀(1912년 ~ 1983년)
- 프리드리히 요시아스 공자(1918년 ~ 1998년)
당시 상류층 가정에서 예상되었던 것처럼, 자녀 양육은 대부분 하인들에게 맡겨졌다. 가족은 집에서 주로 영어를 사용했지만, 아이들은 독일어를 유창하게 배웠다. 후베르투스는 공작이 가장 아끼는 자녀였다. 1914년 영국 신문 '더 스피어'에 실린 가족 프로필은 자녀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코부르크 가족은 밝고 행복한 아이들로, 자연스러운 삶을 살며 성의 아름다운 영지에서 많은 시간을 야외에서 보낸다. 그들은 승마를 매우 좋아한다. 작센코부르크고타의 혹독한 겨울에는 스키와 눈 오는 날씨에 적합한 다른 야외 활동을 즐긴다."
우르바흐는 후년의 가족에 대해 언급했다. 그녀는 카를 에두아르트의 자녀들이 아버지를 두려워했으며, 아버지는 그들을 "군사 부대처럼" 다루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가족 사진에서 종종 불행해 보인다고 언급했다. 그의 막내딸 카롤리네 마틸데 공녀는 아버지가 자신을 성적으로 학대했다고 주장했으며, 이는 그녀의 오빠 중 한 명의 증언으로 뒷받침되었다. 카를 에두아르트는 자신의 왕가의 명성을 높이기 위해 전략적인 결혼을 추진하던 시기에 자녀들의 연애 선택에 자주 실망했다.
4.2. 통치 및 관심사

카를 에두아르트는 1905년 7월 19일 성년이 되면서 완전한 헌법적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즉위식에서 그는 독일 제국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는 연설을 낭독했고, 지역 음식을 공개적으로 시식한 후 관중들의 환호를 받았다. 그는 새로 얻은 영토에 만족했는데,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충성심을 강조하기 위해 다양한 애국 단체에 가입했다. 그러나 우르바흐에 따르면, 공작은 인기가 없었다. 특히 좌파 성향의 가난한 도시 고타에서는 그가 절대주의적으로 보였다. 부유하고 보수적인 도시인 코부르크에서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카를 에두아르트에게 더 동정적이었지만, 그에게서 감지되는 이국적인 느낌을 싫어했다. 그는 여전히 영국식 억양을 사용했다. 그는 스코티시 테리어 개를 키우고 항상 경찰 경호원과 함께 대중 앞에 나타나는 것에 대해 비난을 받았다.
역사가 프리드리히 파치우스는 카를 에두아르트가 처음에는 자유주의자였으나 점차 권위주의적인 방향으로 바뀌었다고 묘사했다. 그는 황제를 지지했고 정부 기관을 이해했다. 새로운 공작은 보수 성향의 프로이센 정부 관리인 에른스트 폰 리히터를 수상으로 임명했다. 러시턴에 따르면 공작의 정치적 세계관은 빌헬름 2세에 의해 주입된 "보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것이었다. 그는 주로 자신이 임명한 내각에 통치를 맡겼다. 그들은 "모든 것은 예전과 같이"라는 모토로 접근 방식을 설명했다. 카를 에두아르트는 지역 행사를 자주 방문했다. 그는 많은 문화 및 자선 단체의 의장을 맡고 후원을 제공하는 등 지역 시민 생활에서 중요한 인물이었다.
공작은 새로운 교통수단, 특히 자동차와 비행선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고타에 새로운 비행선 도킹 베이 건설에 투자했는데, 이는 상업적으로 합리적인 결정으로 보였다. 1913년, 그는 독일 황제에게 그곳의 민간 비행 학교를 군사 학교로 전환해 줄 것을 요청했고, 빌헬름은 비밀리에 이를 승인했다. 그는 양 도시의 궁정 극장을 열정적으로 지원했고, 1908년부터 1924년까지 진행된 페스테 코부르크 복원 작업을 조직했다. 1910년, 그는 군주제 지지 정치 단체인 "사회민주주의에 반대하는 제국 협회"에 가입했다. 카를 에두아르트는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에 대해 불안해했으며, 그의 관리들은 여론 조사를 실시했다. 공작은 크리스마스 축제나 전통 의상과 같은 문화적 전통을 통해 독일과의 충성심을 자주 강조하려고 노력했다.
카를 에두아르트는 영국 왕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며 정기적으로 영국을 방문했다. 1910년 '데일리 미러'는 그가 시포스 하이랜더스 연대의 제복을 입고 재향 군인회 검열에 참석한 사진을 게재했다. 개인적으로 그는 독일에 있을 때도 자주 영국식 활동에 참여했다. 공작 부부는 백파이프에 맞춰 스코틀랜드 컨트리 댄스를 추었다. 그의 직계 가족은 영어식 별명을 사용했다. 카를 에두아르트는 앨리스와 그의 처남 테크 공자 알렉산더로부터 정기적인 방문을 받았다. 그는 1910년대 초 웨일스 공 에드워드가 대학생이던 시절 그와 친밀한 유대 관계를 형성했다. 공작은 일반적으로 정치, 특히 영국과 독일 간의 외교 문제에는 관여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뷔셸은 이 시기 카를 에두아르트의 독일인으로 보이려는 시도가 자신의 정체성 표현이라기보다는 빌헬름 2세와 독일 민족주의자들을 기쁘게 하기 위한 노력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독일 정치 엘리트들은 공작이 영국과 계속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에 종종 불쾌감을 표했다. 특히 프랑코니아의 하위 귀족들로부터 더 강한 비판이 나왔는데, 이들은 자신들을 독일 귀족 중 가장 순수한 독일인으로 여겼다. 예를 들어, 콘스탄틴 폰 게브자텔 남작은 독일 작위를 가진 "외국인"이 유대교의 "암"과 SPD (좌파 독일 정당), 그리고 "자유"에 대한 필수적인 전투를 방해하기 때문에 "골칫거리"라고 주장했다. 독일 제국 정부는 그만큼 급진적이지는 않았지만, 카를 에두아르트의 일부 행동에 불만을 표했다. 1910년 에드워드 7세의 장례식에서 자신의 의례용 영국 연대 제복을 입기로 한 그의 결정은 특히 짜증을 유발했다. 주영국 독일 대사관 관리들은 그의 잦은 영국 방문을 의심했다.

공작은 또한 주요 지역 지주가 되었고 연간 약 250.00 만 DEM의 수입을 올렸다. 1910년의 250.00 만 DEM은 당시 약 12.20 만 GBP에 해당했다. 1918년에는 그의 재산이 약 5000.00 만 DEM에서 6000.00 만 DEM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는 매년 코부르크와 고타에서 몇 달씩 살았으며, 산속이나 사냥 오두막도 방문했다. 그는 보통 오전에 일하고 오후에는 하이킹과 같은 여가 활동을 했다. 여가 활동이 대부분의 시간을 차지했고 그는 자주 해외나 독일의 다른 지역에 있었다. 카를 에두아르트는 사회적 교류, 특히 자신과 다른 사람들과의 교류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지역 주민들이 자신의 성 주변 시골에 들어오는 것을 막았는데, 이는 그의 고립을 더 심화시켰다. 그는 정기적으로 자신을 칭찬하는 궁정 신하들과 많은 시간을 보냈다. 역사가 줄리엣 니콜슨(Juliet Nicolson)은 이 시기를 "완벽한 여름"이라고 묘사했는데, 특권층 사람들이 정치와 조직 노동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위협을 부인하며 자신들의 부와 사회적 이점을 누린 시기였다. 러시턴은 이 시기 공작의 개인적인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카를 에두아르트는 자신의 삶에 만족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건강하게 성장하는 가족, 최소한의 직무, 매우 잘 살 수 있는 기회, 유럽 상류층의 친구 및 친척들과 교류할 기회... 1914년이 시작될 무렵, 카를 에두아르트는 유럽 귀족의 황금기가 절정에 달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는 계속 사냥하고 여행하며 절대적인 주권자처럼 행동했다... 군주로서의 그의 삶은 대다수 신민들의 삶과는 거의 관련이 없는 평행 세계에 존재하는 것 같았다."
4.3. 제1차 세계 대전과 영국의 관계
제1차 세계 대전은 카를 에두아르트에게 충성심의 갈등을 야기했지만, 그는 독일 제국을 지지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암살 사건 당시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민법학 명예 박사 학위를 받기 위해 영국에 있었다. 그는 누나에게 영국을 위해 싸우고 싶지만, 자신의 영국 혈통 때문에 여론이 그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한 공국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느꼈다. 그는 7월 9일에 독일로 돌아왔다. 전쟁 후 그는 1914년의 사건들을 누나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개인적인 "행복"의 끝이라고 묘사했다.
전쟁 초기 독일 언론은 독일 귀족의 외국 관계를 비판했으며, 카를 에두아르트는 특히 심한 공격을 받아 "반쪽 영국인"으로 비난받았다. 공작은 영국이 독일을 공격했다고 공개적으로 비난하며, 시포스 하이랜더스 연대장 직위를 포기했다. 그는 자신의 영국 군사 훈장을 반환하는 대신 팔았는데, 뷔셸은 이를 가족에 대한 경멸의 제스처로 보았지만, 아마도 과시용이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영국과 벨기에 궁정의 가족들과 관계를 단절했지만, 이것만으로는 독일에서의 그의 충성심에 대한 의심을 극복하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그의 태도는 전쟁이 진행될수록 더욱 진정으로 친독일적으로 변해갔다.

카를 에두아르트는 썰매 사고로 다리에 영구적인 부상을 입었기 때문에 전투에 참여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영토에서 온 육군 군단에 비전투 지원을 제공하며 전투가 벌어지는 지역으로 함께 이동했다. 그는 초기에 독일의 벨기에 침공에 참여했다. 이곳에서 공작은 독일 병사들이 수백 명의 벨기에 민간인을 살해한 디낭 학살을 목격했다. 그의 부관 마르셀 폰 샤크(Marcel von Schack)는 벨기에 민간인들이 올바르게 대우받았다고 생각했지만, 이 사건이 공작에게 "잊을 수 없는 인상"을 남겼다고 기록했다. 그는 1914년 9월 초 동부 전선으로 전속되었다. 그는 동부 전선에서 만난 현지인들의 생활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특히 유대인들의 집이 더럽다고 생각했다. 카를 에두아르트는 1914년 말 "용기"로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 중기 전쟁 기간 동안 카를 에두아르트는 서부 전선과 발칸 반도의 분쟁 지역을 여러 차례 방문했다.
공작은 한 번도 지휘권을 갖지 못했다. 그의 공국 출신 병사들은 카를 에두아르트 전쟁 훈장을 받았다. 공작의 부관은 그의 활동에 대한 일기를 작성했는데, 이는 독일 군사령부에 보고되었고 선전 목적으로 독일 언론에 유포되었다. 이 일기들은 그가 병사들의 어려운 생활 조건을 공유하고 그들과 크리스마스를 보냈다고 묘사했다. 실제로는 그는 류머티즘과 강직성 척추염으로 건강이 좋지 않았다. 그는 보통 전선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정기적으로 치료를 위해 독일로 돌아왔다. 이는 젊은 병사가 질병을 억제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부 독일 엘리트들 사이에서 불만을 야기했다. 우르바흐에 따르면 카를 에두아르트는 "대부분 초콜릿 병사였고, 전선 뒤의 여러 카지노에서 식사를 하고 '자신의' 코부르크 병사들을 방문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공작은 독일 정부와 중앙 동맹국의 일원이었던 불가리아 왕국의 통치자 페르디난트 1세 사이의 중개자 역할을 했다. 페르디난트는 1908년 오스만 제국으로부터의 불가리아 독립을 선언했고, 제2차 발칸 전쟁 이후 왕국은 경제 위기에 처했다. 카를 에두아르트는 이 모든 사건 동안 페르디난트에게 재정 지원을 포함하여 많은 도움을 제공했다. 1916년 페르디난트는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벌이기를 원했지만, 독일은 오스만 제국과 동맹 관계였기 때문에 이를 원하지 않았다. 카를 에두아르트는 빌헬름을 대신하여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로 가서 페르디난트를 설득하여 전쟁을 중단시켰다.
공작은 영국에서 반역자로 비난받았다. 그는 영국 작위를 가지고 있었지만 중앙 동맹국 편에 섰던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거주하는 귀족 그룹 중 한 명이었는데, 이 그룹은 영국 언론에서 종종 "반역자 귀족"으로 지칭되었다. 예를 들어, 전쟁이 끝난 직후 '더 선데이 포스트'는 "우리 반역자 공작들"에 대한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에는 카를 에두아르트의 삶에 대한 부정적이고 개인적으로 악의적인 프로필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의 전쟁 역할을 "그의 치욕스러운 경력에서 가장 암울한 장 중 하나"라고 불렀다. 뷔셸은 공작을 반역자로 묘사하는 것이 정확하다고 지적했는데, 그는 여전히 영국 국민이었고 영국에 대항하는 전쟁에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공식적으로 독일 국적을 취득한 적이 없었다.
1915년 조지 5세 국왕은 그의 이름을 가터 훈장 등록 명단에서 삭제하라고 명령했다. 1917년 코부르크의 법 변경으로 카를 에두아르트의 영국 친척들이 공작위를 계승하는 것이 사실상 금지되었다. 이 결정은 독일 신문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는데, 한 신문은 그가 자신의 출신 국가와의 관계를 "찢어버렸다"고 선언했다. 1917년 여름, 고타에서 제작된 폭격기들은 런던과 잉글랜드 남동부에서 여러 차례 공습을 감행하여 수백 명의 영국 민간인을 살해했다. 그해 카를 에두아르트의 수백만 파운드 상당의 영국 재산이 압수되었다. 카를 에두아르트는 이에 대응하여 자신의 영국 친척들이 다른 재산을 상속받는 것을 영원히 막는 법적 변경을 도입했다. 영국 왕실은 나중에 독일식 이름인 작센코부르크고타에서 윈저 가문으로 이름을 변경했다. 작위 박탈법 (1917년)은 그의 영국 작위를 제거하는 과정을 시작했다. 우르바흐는 카를 에두아르트가 자신의 행동이 메리 왕비의 보호 아래 런던에 살고 있는 자신의 어머니에게 보복의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개의치 않는 듯했다고 언급했다.

카를 에두아르트는 후기 전쟁 기간 동안 서부 전선에서 군 참모로 근무했다. 그는 자신의 개인 재산 중 25.00 만 DEM을 자신의 영토 출신 사망한 병사 가족들을 위한 재정 지원으로 기부했다. 전쟁 후 몇 년 뒤 '더 타임스'에 실린 한 보고서는 그가 영국 포로들을 자주 도왔다고 언급했는데, 이를 그의 "배려와 인간성"의 증표라고 묘사했다. 공작은 1918년 러시아 황실 학살에 경악했다. 알렉산드라 황후는 그의 사촌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자신의 가족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날까 봐 걱정했다. 러시턴은 이것이 그의 향후 정치 활동을 정의할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의 시작이었다고 기록했다. 그는 독일 황제 지지자들의 조직인 황제 충성 연맹에 가입했지만, 지도자로는 독일의 장군이자 사실상 군사 독재자였던 파울 폰 힌덴부르크를 선호했다. 뷔셸은 카를 에두아르트의 제1차 세계 대전 경험이 "민족주의, 폭력, 반유대주의의 학교"였다고 주장했다.
전쟁은 독일 국민에게 심각한 부담을 주었고, 1918년 중반 이후 제국의 군사 상황은 붕괴되었다. 그해 말 휴전이 체결되었고, 독일에서 혁명이 발발했다. 1918년 11월 11일 코부르크에서 공작에 반대하는 평화 시위가 일어났다. 공국의 수상 헤르만 쿼크는 상대적으로 부유한 구성원이 많았던 지역 SPD를 설득하여, 더 이상의 불안이 도시의 경관에 위험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람들이 굶주리던 고타의 정치 분위기는 더 급진적이었고, 노동자 및 병사 평의회가 사실상 통제권을 장악했다. 카를 에두아르트는 다른 독일 공자들보다 상황에 늦게 대응했다. 그는 11월 14일에 "통치를 중단했다"고 발표했지만, 명시적으로 퇴위하지는 않았다. 러시턴에 따르면, 카를 에두아르트의 퇴위가 늦어진 것은 그가 살해될까 봐 불안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코부르크의 권력 이양은 독일의 다른 지역에 비해 상당히 평온하고 질서 정연했다. 독일 귀족들은 혁명 동안 물리적인 공격을 받지는 않았지만, 그 상황은 그들에게 깊은 두려움을 주었고 많은 불만을 야기했다.
5.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및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카를 에두아르트는 공작위를 잃고 일반인으로 돌아왔으나, 전후 독일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극우 정치 세력에 깊이 경도되며 나치당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활동을 시작했다.
5.1. 영국 작위 및 재산 상실
우르바흐는 카를 에두아르트가 인기가 없었고 일부 사람들에게 여전히 영국인으로 여겨졌다고 기록했다. 전쟁이 끝날 무렵, 좌파이자 반군주주의 언론은 그를 그의 외국 혈통을 언급하며 "앨버니 씨"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코부르크에서 상당히 만족스럽게 살 수 있었다. 러시턴에 따르면 그는 여전히 많은 위신을 유지했으며, 그의 이전 신민들은 그를 여전히 공작으로 여겼다. 코부르크는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도시였고, 새로운 전후 세계는 많은 사람들에게 두려운 존재였다. 주민들은 계속해서 카를 에두아르트에게 지도를 요청했다. 전쟁 직후 코부르크는 바이에른주의 일부가 되었고, 고타는 튀링겐의 일부가 되었다. 바이에른이 코부르크와 잘 어울리는 보수적인 정치 문화를 가졌지만, 문화적으로는 상당한 변화를 의미했다. 이는 전 공작과 그의 가족이 여전히 지역 사회의 자연스러운 지도자로 남아 있다는 인식을 더했다.
1919년 그는 영국 작위도 잃었다. 그러나 그가 10대에 독일에 강제로 보내졌던 방식 때문에 영국 정치계에서는 그에게 어느 정도의 개인적인 동정심이 남아 있었다. 그는 남은 평생 동안 영국 왕실과 관련된 일부 상징과 작위를 계속 사용했다. 그는 1921년 런던에서 어머니와 누나를 방문했지만, 일반적으로 영국에서는 환영받지 못했다. 카를 에두아르트의 어머니가 1922년에 사망하자 영국 정부는 그가 클레어몬트 하우스를 상속받는 것을 막았고, 이는 그를 화나게 했다.
1919년 그의 코부르크에 있던 재산과 소장품들은 현재까지 존재하는 "코부르크 주 재단"으로 이전되었다. 고타의 유사한 해결책은 더 오래 걸렸으며, 튀링겐 자유주와의 법적 분쟁 끝에 1928년에서 1934년에야 설립되었다. 1919년 이후 가족은 칼렌베르크 성, 다른 일부 재산(오스트리아의 재산을 포함) 및 페스테 코부르크에 거주할 권리를 유지했다. 또한 상실된 재산에 대해 상당한 재정적 보상을 받았다. 페스테 코부르크의 보수 작업은 국가 예산으로 완료되었다. 튀링겐의 일부 추가 부동산은 1925년에 공작 가문에게 환원되었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의 전후 민주 독일 국가는 그의 재산에 거의 위협을 가하지 않았지만, 카를 에두아르트는 계속해서 공산주의 혁명에 대해 편집증적으로 생각했다. 그는 1928년 누나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 겨울이 조용하기를 바랄 뿐이지만, 러시아인들은 우리 공산주의자들을 움직이는 것 같다... 독일의 여러 지역에서 그들은 우리 민족주의자들을 공격하기 시작했지만, 다행히도 머리가 깨지는 선에서 격퇴되었다. 지도자들이 노동자들을 내버려 두면 좋으련만. 그들은 너무나 분별력이 있다, 'wenn sie nicht verhetzt werden독일어' (선동되지 않으면)."
5.2. 극우 정치 활동 및 나치당 지원
카를 에두아르트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에도 스스로를 군주주의자라고 묘사했다. 그는 "튀링겐의 왕"으로서 정치 권력을 되찾고 싶어 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의 복원에 대한 열정은 상당히 미온적이었다. 독일 황제에 대한 그의 감정적 애착은 빌헬름의 망명으로 대부분 끝이 났다. 전 공작은 폐위된 독일 황제보다 더 강력한 대안으로 여겨지는 정치적 선택지를 찾기 시작했다.
카를 에두아르트는 폐위된 후 훨씬 더 노골적으로 정치에 관여했으며, 민족주의적이고 보수적인 우파를 지지했다. 전 공작은 전전 독일의 모습, 특히 그 군국주의를 그리워했으며 공산주의를 두려워했다. 우르바흐는 또한 그가 자신의 부족한 신체적 힘에서 비롯된 남성적 신체 강인성에 대한 강박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고 시사했다. 전 공작은 다양한 우익 준군사 및 정치 단체와 연관되었다. 러시턴은 그가 "준군사 조직인 Coburg Einwohnerwehr코부르크 주민 방위대독일어, 바이킹 동맹 및 재향 군인 단체인 철모 전선의 회원 및 후원자가 되었다"고 기록했다. 바이킹 동맹은 1920년대 초 콘술 조직이었는데, 그는 이 단체에도 자금을 지원하고 참여했다. 이 단체는 정치적 동기에 의한 정치인 카를 가라이스와 발터 라테나우 살해에 연루되었다. 우르바흐는 "카를 에두아르트 자신은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지만, 살인자들에게 자금을 지원했다"고 언급했다. 당시 경찰 보고서에는 그와 빅토리아 아델하이트 공작부인이 극우 테러리즘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는 술집 연설에 참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카를 에두아르트는 또한 다양한 반유대주의 민족주의 단체에 자금을 지원했다. 1922년 그는 지역 김나지움을 졸업하는 최고 성적 학생이 연설할 수 있는 전통 행사에 초청받았다. 그해의 학생은 한스 모겐소라는 유대인 젊은이였다. 전 공작은 모겐소에게 등을 돌리고 연설 내내 코를 막는 것으로 자신의 불만을 표출했다. 1922년 10월 14일, 나치당은 코부르크에서 상당한 폭력을 수반한 '독일의 날'이라는 민족주의 행사에 참여했다. 그날 저녁, 카를 에두아르트는 히틀러가 연설하는 당 주최 식사에 참석했다. 다음 날 그는 히틀러와 악수를 나누며 공개적으로 히틀러를 지지한 최초의 귀족이 되었다. 경찰은 전 공작이 그의 장남 요한 레오폴트가 반유대주의 준군사 조직인 청년 독일 기사단에 가입하도록 부추겼는지 조사했다. 1923년 가을, 레오폴트가 코부르크 주변 지역에서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한 일련의 공격을 주도했으며, 특히 유대인 농부들이 심각한 부상을 입은 아우텐하우젠 마을의 여러 사건이 주목받았다고 언론에 보도되었다. 전 공작이 아들이 기소되는 것을 막기 위해 증인들에게 뇌물을 주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1920년, 그는 정부에 대한 실패한 카프 반란에 참여한 후 프라이코어 지휘관이자 나중에 콘술 조직의 지도자가 된 헤르만 에어하르트를 자신의 성 중 한 곳에 무기와 함께 숨겨주었다. 뷔셸은 빌헬름과 그의 후계자인 빌헬름 황태자에게 불만을 품었던 에어하르트가 카를 에두아르트를 독일 전체의 군주로 만들기를 원했을 수도 있다고 시사한다. 1923년 독일 마르크화의 가치가 붕괴되었다. 정치의 급진 좌파와 우파 모두 이를 정부 체제를 바꿀 기회로 보았다. 공산주의자들은 튀링겐과 작센에서 혁명을 시작하려 했다. 에어하르트와 그의 추종자 5,000명(카를 에두아르트의 장남 포함)은 튀링겐으로 진군할 준비를 하며 이에 대응했다. 연방 독일 정부는 여론의 관점에서 해당 지역의 좌파 주정부를 제거하고 권위를 재확립했다. 카를 에두아르트는 나치당의 실패한 맥주홀 폭동에 짜증을 냈는데, 이는 히틀러가 자신에 대한 쿠데타를 시작하기 전에 에어하르트가 연방 정부에 대한 쿠데타를 계획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전 공작은 폭동 후 자신의 성 중 한 곳에 나치당원들을 숨겨주었다.
5.3. 나치당 초기 연루

1929년부터 카를 에두아르트는 나치당에 재정적 지원을 제공했다. 1932년 칼렌베르크 성이 보수되었고 탑에 하켄크로이츠가 추가되었다. 전 공작은 당의 군국주의와 반공주의에 매료되었다. 히틀러 또한 왕실 재산 몰수에 대한 반대를 표명한 바 있었다. 카를 에두아르트는 나치가 정권을 잡기 전 프랑코니아와 독일 전역에 걸쳐 광범위한 연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나치에게 유용한 동맹이었다.
1929년 그의 지원은 코부르크가 독일에서 최초로 나치당 시의회를 선출하는 데 기여했다. 이 선거는 나치 지지자가 유대인을 공격했다는 이유로 직장에서 해고된 분쟁으로 인해 치러졌다. 카를 에두아르트가 나치당 행사에 방문한 것은 지역 언론에 보도되어 당의 인지도와 위신을 높였다.
1929년 나치당이 지역 선거에서 승리한 후, 정치적 동기에 의한 반대파에 대한 폭력이 흔해졌고 지역 경찰은 이를 용인했다. 코부르크의 유대인 인구 또한 신체적 학대와 차별이 증가했다. 러시턴은 전 공작의 공개적으로 표명된 신념과 재정 지원이 코부르크와 독일 전체에서 유대인에 대한 증오를 확산시키는 데 기여했다고 기록한다. 카를 에두아르트와 그의 아내가 반유대주의자라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러시턴에 따르면 카를 에두아르트는 자신이 참여한 운동의 폭력적인 행동을 알고 있었지만 결코 반대하지 않았다. 제1차 세계 대전은 그에게 정치적 폭력의 장점을 확신시켰다.
전 공작과 발데마르 팝스트는 1931년 "파시즘 연구 학회"를 설립했다. 이 조직은 이탈리아 파시즘의 사례를 바탕으로 독일 통치 계획을 수립하기 위한 것이었다. 무솔리니의 독재는 카를 에두아르트와 그와 같은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끌었다. 그들에게 파시즘은 전통 귀족과 새로운 엘리트를 융합할 수 있는 국가 운영 방식처럼 보였다. 전 공작은 1932년 국민 클럽의 지도자로 선출되었다. 이는 전후 정부 체제를 싫어하는 사업가들로 주로 구성된 사교 클럽이었다. 그는 그들에게 나치당 가입을 권유했고, 연말까지 70%가 가입했다. 또한 1932년 그는 하르츠부르크 전선 창설에 참여하여 독일 민족인민당과 유사한 견해를 가진 다른 단체들이 나치당과 연계되었다. 그는 또한 1932년 대통령 선거에서 유권자들에게 히틀러를 지지할 것을 공개적으로 요청했다. 나치당은 독일 전역에서 그 선거에서 패배했지만, 코부르크에서는 승리했다.

1932년 카를 에두아르트의 딸 지빌라는 스웨덴 왕세자의 장남이자 스웨덴 왕위 계승 서열 2위인 구스타프 아돌프 공자와 결혼했다. 이 결혼은 지빌라가 스웨덴 왕비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카를 에두아르트는 이 행사를 자신의 이념을 공개적으로 과시하고 공작 가문의 손상된 명성을 회복하기 위한 기회로 활용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지 10년이 넘는 시점에서 이는 그들이 국제 왕실계에서 다시 중요한 인물로 나타날 수 있는 기회였다. 코부르크는 스웨덴 국기와 나치 깃발로 장식되었다. 나치 제복을 입은 5,000명의 남성들이 페스테 코부르크 외부를 행진했다. 아돌프 히틀러와 헤르만 괴링은 결혼을 축하했다.
조지 5세는 카를 에두아르트의 정치적 견해에 대한 반대 때문에 웨일스 공 에드워드가 결혼식에 참석하는 것을 막았지만, 카를 에두아르트의 일부 영국 친척들은 참석했다. 당시 정치적으로 불안정하고 공화주의 운동이 커지고 있던 스웨덴에서는 이 결혼식이 사용된 상징과 구스타프가 나치 동조자라는 사실 때문에 상당히 논란이 되었다. 스웨덴 정부는 행사 프로그램에 일부 변경이 있을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지만, 이는 지켜지지 않았다. 결혼식은 독일과 해외 언론에서 많은 보도를 받았다.
6. 나치 정권 하에서의 활동
카를 에두아르트는 나치당 가입 이후 나치 정권 내에서 여러 요직을 맡으며 이데올로기 전파와 외교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특히 독일 적십자사 총재로서의 역할과 우생학 사상 지지는 인권 침해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6.1. 나치당 가입과 주요 직책
1933년, 나치당이 독일에서 집권했다. 카를 에두아르트는 페스테 코부르크에 나치 깃발을 게양하기 시작했다. 그는 1933년 3월 공식적으로 나치당에 가입했으며, 동시에 돌격대(SA)의 상급집단지도자가 되었다. 한편, 코부르크 시내 한복판에는 유대인과 정권 반대자들을 고문하는 임시 감옥이 설치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전혀 비밀로 유지되지 않았다. 전 공작은 빠르게 다양한 의례적 직책을 부여받았고, 여러 기업의 이사회에서도 직위를 가졌다. 새 정권의 고위 인사들의 사진 모음집에는 그가 43번째 인물로 포함되어 있었다. 카를 에두아르트는 1934년에 "나는 영원히 히틀러를 맹목적으로 따를 것이다"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우르바흐에 따르면 전 공작은 "크게 존경받는" 당원이 되었으며, 고위 당원들과 함께 사진에 등장하고 베를린에 관계 형성을 위한 사무실을 열었다. 그녀는 그가 나치당원인 것을 자랑스러워했으며, SA 제복을 통해 전쟁 전의 자신처럼 느낄 수 있었다고 기록했다. 그는 장검의 밤 사건 이후 SA 제복을 사용할 권리를 잃었지만, 정치적 살인을 받아들였다. 그는 나중에 국방군 장군 제복을 받았다. 나치당 내 일부 인물들은 전 공작이 야망에 사로잡혀 있거나 군주제를 복원하려 한다고 의심하며 그를 경계했다. 그는 1936년 정권에 의해 중단될 때까지 여러 나치 지지자들에게 자신의 개인 훈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카를 에두아르트는 국가사회주의 자동차 군단의 총재가 되었는데, 이 조직은 홀로코스트 실행에 사용된 차량을 포함하여 독일 국가에 차량을 제공했다. 1936년부터 1945년까지 그는 나치당을 대표하여 제국의회 의원으로 활동했다. 그가 1932년부터 1940년까지 작성한 비서 일정표에는 당에 대한 그의 열정적인 지지가 자주 표현되어 있다. 예를 들어, 그는 1936년 단일 정당 선거 결과를 자세히 기록하고 그 결과를 칭찬했다. 뷔셸은 전 공작이 이 시점에서는 자신을 완전히 독일인으로 인식한 것 같다고 평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카를 에두아르트의 생활 방식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카를 에두아르트가] 히틀러 정권에 대해 가졌던 중요성은 그의 지위에 걸맞는 호화로운 아파트와 대규모 차량 함대, 근면한 부관, 행정관 및 하인, 그리고 풍부한 외화를 통해 명백했다... 카를 에두아르트는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보다 국가사회주의 하에서 코부르크 성과 그의 수많은 다른 성에서 더 방해받지 않고 살았다.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후 국가 당국에 의해 몰수되었던 튀링겐과 오스트리아의 재산 분쟁은 고위 국가사회주의 당원들의 개입 덕분에 공작 가문에 유리하게 조속히 해결되었다."
6.2. 독일 적십자사 총재로서의 역할

1933년 12월 1일, 카를 에두아르트는 독일 적십자사 총재로 임명되었다. 히틀러는 전 공작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임명을 승인했다. 그는 카를 에두아르트가 나치의 인종 이론과 우생학에 대한 사상을 지지한다고 믿었다. 전 공작의 임명은 또한 귀족들이 인도주의 활동에 참여하는 역사적 전통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의 유럽 왕족과의 연계는 그가 해외에서 조직의 유용한 상징적 인물로 여겨지게 했다. 그는 독일 적십자사 부총재인 파울 호하이젠과 권력을 공유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카를 에두아르트의 총재 재임 초기 몇 달 동안, 총재가 조직 내에서 자신의 권위를 주장하려 하면서 두 사람 사이에 권력 투쟁이 발생했다. 1934년 여름, 당은 독일 적십자사에 대한 통제권을 대부분 호하이젠에게 이양했다.
조직은 빠르게 정부의 목표에 부합하도록 개편되었다. 러시턴은 "새 정권 수립 2년 후, 독일 적십자사(DRK)는 분쟁 시 군인들에게 지원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준군사 조직으로 재편되었다"고 언급했다. 나치 집권 후 투옥된 나치 반대자들인 독일 내 정치범 대우는 정권 초기 몇 년 동안 국제적인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1934년 스웨덴 적십자사가 이 문제에 대한 조사를 요청한 후, 국제 적십자 위원회는 조사를 시작했다. 독일 적십자사는 수감자들의 조건이 그들의 평소 생활 수준보다 좋다고 주장했다. 카를 에두아르트는 1935년 국제 적십자사 총재인 친구 칼 야콥 부르크하르트가 다하우를 포함한 나치 강제 수용소를 엄격하게 통제된 상태로 시찰하도록 주선했다. 부르크하르트는 사적으로 수용소가 "잔인하다"고 느꼈지만, 그의 보고서는 심하게 검열되어 조건이 적절하다고 기술되었다. 부르크하르트는 전 공작에게 시찰을 주선해 준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하는 편지를 썼다.
1937년, 에른스트-로베르트 그라비츠가 SS와의 연계를 강화하기 위해 부총재로 임명되었다. 카를 에두아르트는 "총통 관청의 장교"로 임명되어 정부 업무에 대한 비공개 정보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독일 적십자사의 고위직은 점차 나치당원들로 채워졌고, 조직원들은 "유대인, 슬라브족, 만성 질환자, 장애인...은 무가치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교육을 받았다. 카를 에두아르트는 정권 초기 몇 년 동안 독일 내에서 점차 대중적인 인물이 아니게 되었고, 1937년 그라비츠가 임명된 후에는 국내 공개석상에 거의 전혀 나타나지 않게 되었다. 정권은 점점 더 급진적이 되어가고 있었고, 전 공작을 과거의 상징으로 보았다.
6.3. 우생학 및 나치 이데올로기 참여
우생학은 19세기 말에 시작되어 나치 집권 이전 수십 년 동안 독일 학계에서 점점 더 인기를 얻었던 사이비 과학 이론으로, 특정 사람들이 자녀를 낳도록 장려하고 다른 사람들을 막음으로써 인구를 여러 세대에 걸쳐 "개선"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20세기 초,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부유한 가정의 아이들에 비해 건강이 좋지 않고 파괴적인 행동을 보일 가능성이 높았다. 따라서 일부 사람들에게는 사회 계층 간의 차이가 유전적일 수 있다는 생각이 암묵적으로 타당하게 여겨졌다. 독일 민족의 유전적 건강에 대한 불안감은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더욱 증폭되었는데, 이때 수많은 건강한 남성들이 사망하거나 불구자가 되었고, 전투에 참여할 수 없었던 남성들은 집에 남아 있었다.
이후 몇 년 동안 우생학에 대한 과학적 연구가 늘어났고, 히틀러는 1920년대에 이 사상을 지지했다. 대공황은 장애인들이 공공 자원을 낭비한다는 우려를 심화시켰고, 과학자들과 비나치 정치인들은 이 집단에 대한 자발적 불임에 대한 논의를 점점 더 많이 진행했다. 나치당은 1930년대 초 우생학에 대한 강력한 지지를 표명했다. 20세기 초, 우생학적 사상은 정치적 스펙트럼 전반에 걸쳐 광범위한 국제적 지지를 받았고, "결함이 있는" 사람들에 대한 강제 불임과 같은 우생학 정책은 여러 국가에서 도입되었다. 이 이론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나치가 대량 학살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면서 주류 지지를 잃었다.
카를 에두아르트는 1933년부터 1945년까지 카이저 빌헬름 학회의 이사회에서 활동했다. 그는 1934년부터 1937년까지 집행 이사회 비서였다. 이 직책에서 그는 우생학적 사상을 독일 대중, 특히 독일 사회의 권력자들에게 홍보하는 데 참여했다. 유전병 자손 예방법은 독일 국가에 불필요한 부담으로 간주되는 특정 집단에 대해 강제 불임을 도입했다. 독일 정부는 정권 후기에 장애인 살해를 위한 여러 계획을 조직했다. 첫 번째 계획은 아동을 대상으로 했으며, 1939년부터 전쟁 종료까지 진행되어 5,300명의 장애 아동을 살해했다. 두 번째 계획은 1939년 말부터 1941년 중반까지 진행되었으며,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6개 살해 센터에서 주로 가스실을 통해 70,000명 이상의 장애인을 살해했다. 그라비츠는 이 작업에 깊이 관여했다. 1941년 8월, 이 계획은 독일인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전쟁 중 사기를 저하시킨다고 판단되어 중단되었다. 세 번째 계획은 전쟁 후기 몇 년 동안 더 은밀한 방법, 즉 고의적인 굶주림을 사용했다. 이는 100,000명에서 180,000명 사이의 사람들을 살해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사건에서 독일 적십자사의 관여 수준을 명확히 할 수 있는 대부분의 증거는 전쟁이 끝날 무렵 우연히 또는 고의적으로 파괴되었다. 희생자들의 대부분 수송은 이를 위해 만들어진 대리 조직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독일 적십자사는 일부 수송에 관여했다. 장애인을 살해하는 데 관여한 많은 간호사들은 독일 적십자사 직원이었으며, 조직에 의해 세뇌되었다. 러시턴은 카를 에두아르트가 이러한 계획에 대해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미디어를 많이 소비했고 많은 사회적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당시 정권이 수집한 증거와 이후의 연구들은 이것이 독일인들 사이에서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음을 시사한다. 전 공작의 친척인 마리아 카롤리네 공녀는 1941년 이 프로그램에 의해 살해되었다. 상류층 장애인들은 일반적으로 사립 의료 서비스 이용과 가족의 정치적 연줄 덕분에 어느 정도 보호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발생한 일이었다. 러시턴에 따르면, 카를 에두아르트는 "그녀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개입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자연사했다는 위로 편지를 받았지만, 이를 믿지 않았다. 가족 행사에 거의 빠지지 않던 그에게는 이례적으로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6.4. 비공식 외교관 활동

나치 정권은 카를 에두아르트를 비공식 외교관으로 적극 활용했다. 독일 적십자사는 기본적으로 정권의 통제 하에 있었지만, 외국에는 독립적인 인도주의 조직으로 비쳤다. 전 공작은 국내 통치에는 거의 영향력이 없었지만, 중요한 국제적 상징적 인물 역할을 했다. 카를 에두아르트는 1934년 새 독일 정부를 대표하여 첫 세계 순방을 했다. 그는 일본을 방문하여 전쟁 중 민간인 보호에 관한 회의에 참석하고 쇼와 천황에게 히틀러의 생일 축하 메시지를 전달했다. 이 회의를 통해 카를 에두아르트는 전 세계적으로 인도주의적 인물로 비치며 정권의 국제적 명성을 높일 수 있었다. 히틀러는 일본 정부와의 동맹에 관심이 있었고, 카를 에두아르트는 이 방문을 통해 일본 황실과 연계를 구축했다. 그가 히틀러에게 제출한 순방 보고서에서 전 공작은 종종 편견을 드러내는 견해를 표명하며 미국 내 유대인의 영향력을 불평했다.


카를 에두아르트는 영국 귀족들 사이에서 친독일 정서를 조성하려는 나치의 시도에 특히 중요했다. 우르바흐는 카를 에두아르트가 1930년대에 "영국으로 끝없이 정찰 여행"을 다녔다고 언급했다. 그는 독일 정부가 영국과 동맹을 맺는 것을 돕고, 개인적으로 클레어몬트 하우스를 돌려받기를 원했다. 우르바흐는 카를 에두아르트가 누나의 도움으로 영국의 귀족 사회 생활에 다시 통합되었으며, 저명한 귀족과 정치인들과 교류했다고 기록했다. 이들 중에는 1937년 영국 총리가 된 네빌 체임벌린과 친독일 성향이 강했던 영국 왕실, 특히 웨일스 공 에드워드가 포함되었다. 전 공작은 독일-영국 협회 회장이었으며, 친독일적이라고 여겨지는 영국인들에게 로비를 펼쳤다. 그는 정권이 조직을 충분히 친나치적으로 보지 않자 이 조직의 수장이 되었다. 그는 조지 5세의 장례식에 독일 군복과 헬멧을 착용하고 참석했다. 그는 또한 영국에서 재향 군인회 모임에 참석했다. 영국 육군 장관 더프 쿠퍼는 1936년 앨리스의 시골 집에서 카를 에두아르트를 위해 조직된 파티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그 파티의 목적은 그녀의 오빠인 코부르크 공작을 만나는 것이었다. 그곳은 침울한 작은 파티였다. 너무나 독일 부르주아 가정 같았다... 점심 식사 후 나는 공작과 둘만 남게 되었고, 그는 나에게 독일의 현재 상황을 설명하고 히틀러의 평화로운 의도를 확신시키려 했다. 우리가 대화하는 도중 그의 공작부인(빅토리아 아델하이트)이 몇 가지 끔찍한 리본 견본을 들고 나타나, (조지 5세의) 장례식에 보낼 화환을 어떻게 묶어야 할지 그에게 물었다. 그는 중얼거리는 독일어 욕설을 퍼부으며 그녀를 물러나게 했고, 그 후에는 자신의 논지를 이어가지 못했다."
샬럿 지프자트는 카를 에두아르트의 주장이 성공을 거두지 못했으며, 그가 이 시점에서 자신이 성장했던 사람들이 자신을 외국인으로 보는 정도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반대로 우르바흐는 2015년 저서에서 전간기 영국 사회가 겪었던 긴장이 영국 엘리트층의 일부를 급진화시켰고, 귀족들 사이에서 파시즘 (특히 나치즘에 대한 불편함은 있었지만)에 대한 상당한 공감대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카를 에두아르트가 영국-독일 해군 협정, 독일의 라인란트 재무장, 뮌헨 협정과 같은 1930년대 독일 유화 정책의 사례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고 시사했다.

카를 에두아르트는 1937년 윈저 공작 부부의 독일 방문과 관련된 국제 언론 투어를 주최했다. 그는 또한 에드워드와 월리스 심프슨을 방문 기간 동안 직접 맞이했다. 그는 1938년 이탈리아를 방문하여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국왕과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를 만났다. 그는 독일과 소련이 침공하기 반년 전 폴란드를 방문하여 폴란드 관리들을 만났다.
1940년 카를 에두아르트는 모스크바와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여행했으며, 루스벨트 대통령을 백악관에서 만났다. 그는 독일 적십자사가 최근 정복된 폴란드인들의 복지를 보호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미국 적십자사는 방문에 대해 상당히 적대적이었고 미국 신문들에서 일부 비판이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그는 미국 언론에서 꽤 잘 받아들여졌다. 주미 독일 대사관의 비공개 보고서에는 공작의 개인적인 호소력이 외교적으로 독일인들에게 잘못될 뻔한 방문을 막았다고 주장했다. 전 공작은 미국 적십자사와 폴란드에 인도주의적 원조를 보낼 수 있도록 하는 협정을 체결했지만, 이 중 상당 부분은 결국 SS에 의해 압수되었다. 일본에서는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으로 인해 독일과 일본 정부 간의 분쟁이 발생한 후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했다. 그는 일본이 점령한 만주국을 방문하여 기자들과 함께 병원 및 유사 기관을 둘러보았다. 뷔셸은 이는 아마도 일본 당국이 만주국의 사람들이 새로운 통치자들로부터 적절한 인도주의적 지원을 받고 있다고 세계 여론을 설득하려는 시도였을 것이라고 시사한다.
6.5. 제2차 세계 대전 중 행보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을 때 카를 에두아르트는 다시 자신의 출신 국가와 반대편에 서게 되었다. 이에 대해 그가 어떤 고통을 겪거나 정치적 신념을 의심했다는 증거는 없다. 전 공작은 현역 복무를 하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았지만, 그의 세 아들은 국방군에서 복무했다. 1941년 그는 전쟁 소식을 기록하기 위해 일기를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다른 정보 출처마다 다른 색깔의 펜을 사용했다. 1943년 그의 아들 후베르투스가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했을 때, 그는 일기에 "후베르투스 조국을 위해 사망했다(Hubertus † fürs Vaterland독일어)"고 적었다.

그는 국방군 보고서에 사용했던 색깔로 죽음을 나타내는 약자 십자가에 밑줄을 그었다. 1942년 카를 에두아르트는 친척인 스웨덴 공자 에우옌으로부터 노년의 유대인 여성인 마르타 리버만이 미국으로 이민 허가를 받을 수 있도록 주선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는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고, 리버만은 나중에 테레지엔슈타트 게토로 강제 이주 명령을 받은 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카를 에두아르트의 나치즘에 대한 지지는 전쟁 기간 동안 더욱 강해졌고 결코 약해지지 않았다. 히틀러는 전쟁 후 그를 노르웨이 국왕으로 만들 생각을 했다. 전 공작은 1940년 이후 비공식 외교관 역할을 중단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의 건강은 악화되고 있었고, 실제 나이보다 더 늙어 보였다. 그는 계속해서 군복을 입었고, 독일이 점령했거나 추축국의 일원이었거나 중립국인 나라들을 여행했다. 1941년 독일이 점령한 프랑스에서 배포된 뉴스 영화 'Les Actualités mondiales'는 그가 무명 용사의 무덤을 방문하고 프랑스에서 독일 적십자사 활동을 수행하는 것을 다루었다. 전시 기간 동안 해외 여행은 소수의 독일 민간인에게만 허용된 특권이었다. 이 시기 카를 에두아르트가 정치적으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그는 히틀러가 자신에게 유용하다고 판단한 측근들을 위해 마련한 기금에서 독일 정부로부터 매달 4000 RM을 받고 있었다. 1940년 카를 에두아르트는 영국과 독일 정부 간의 포로 대우에 대한 외교적 분쟁을 중재하여 양측의 여러 포로들이 족쇄를 채우는 것을 막았다. 1943년 히틀러의 지시에 따라 카를 에두아르트는 국제 적십자사에 카틴 학살을 조사해 달라고 요청했다.
1945년 4월, 블레츨리 파크의 암호 해독가들은 카를 에두아르트가 포로로 잡히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히틀러의 명령을 해독했다. 우르바흐에 따르면, 이는 히틀러가 그를 죽이기를 원했다는 의미였다. 그달, 카를 에두아르트는 미군에 페스테 코부르크를 항복시키는 데 동의했다. 그는 포격으로 시작된 성 박물관의 화재를 진압하는 데 미군의 도움을 받았다. 그는 미군의 전범 용의자 명단에 있었고, 11월에 포로 수용소로 이송될 때까지 가택 연금되었다. 그는 심문을 받았고 성의 거실에서 심문관들과 와인을 마셨다. 그의 심문관들은 그를 무지하고 불쾌하며 정신적으로 불안정할 수도 있다고 보았다. 그는 인터뷰에서 새로운 독일 정부에 참여하겠다는 제안을 받아들일 것이며, 그 아이디어와 관련된 일련의 요구를 하고, "어떤 독일인도 전쟁 범죄에 유죄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이 발언은 연합국 선전에 매우 유용하다고 판단되어 1945년 4월 라디오 방송에서 사용되었다. 그는 또한 유대인들을 공직 생활에서 제거하는 것이 옳았으며 독일인들은 본질적으로 민주주의에 적합하지 않다는 견해를 표명했다.
7. 전후 시기 및 사망
전쟁 후 카를 에두아르트는 연합군에 의해 체포되어 비나치화 재판을 받았다. 재산 몰수와 건강 악화 속에서 말년을 보냈으며, 1954년 사망했다.
7.1. 전범 재판 및 비나치화 과정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카를 에두아르트는 1945년부터 1946년까지 미국 군사 당국에 의해 수감되었다. 그의 누나는 건강상의 이유로 석방을 위해 로비를 했다. 석방 후, 그와 빅토리아 아델하이트는 칼렌베르크 성 외곽의 작은 집으로 이사했다. 그 성은 난민들을 위한 주거지로 사용되고 있었다. 앨리스는 1948년에 이 부부를 방문했는데, 그녀의 증언에 따르면 그들은 빈곤했고 오빠는 심한 관절염으로 매우 아팠다. 그녀는 당국을 설득하여 그들이 그의 거주지 일부로 이사할 수 있도록 했는데, 이는 그의 처제가 음식을 살 수 있는 곳과 더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1946년 4월, 카를 에두아르트의 딸 지빌라는 아들 칼 구스타프를 낳았는데, 그는 태어날 때 스웨덴 왕위 계승 서열 3위였다. 1947년 1월, 지빌라의 남편이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했고, 1950년 10월 구스타프 5세가 사망하자 카를 에두아르트의 외손자는 스웨덴 왕세자가 되었고, 나중에 칼 16세 구스타프 국왕이 되었다.
카를 에두아르트의 재판은 4년 동안 진행되었고 두 번의 항소가 포함되었다. 앨리스와 다른 많은 지인들은 그의 편에 서서 정권에서의 그의 연루를 최소화하며 부정직하게 증언했다. 전쟁 후 1년여 만에 서방 연합국들의 우선순위는 전직 나치들을 처벌하는 것에서 냉전 중 서방권의 일부가 되기 위해 점령지를 준비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1950년 (혹은 그의 옥스퍼드 국립 전기 사전 항목에 따르면 1949년 8월), 전 공작은 비나치화 법정에서 '동조자' 및 '경미한 죄의 동조자'로 판결받았다. 전 공작의 전기 작가인 칼 샌들러(Carl Sandler)는 이 결과를 "우스꽝스러운 일"이라고 불렀다. 카를 에두아르트는 제2차 세계 대전 참전으로 인해 상당한 재산을 잃었다. 소련 점령 지역에 위치한 고타의 그의 재산은 몰수되어 재분배되었다.
카를 에두아르트는 비나치화 법정이 부과한 벌금과 소련에 의해 많은 재산이 압류되면서 상대적인 빈곤에 시달리며 남은 여생을 은둔하며 보냈다. 그러나 그의 생활 방식은 재판 후 상당 부분 정상으로 돌아왔다. 1953년, 그는 앰뷸런스와 휠체어를 타고 코부르크의 영화관에서 영국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을 관람했다. 그는 누나를 포함한 친척들을 보면서 거의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고 전해진다. 그해 '더 스코츠맨'에 실린 한 칼럼에 따르면, 전 공작은 한때 연대장을 맡았던 영국 육군 연대인 시포스 하이랜더스 연대와 다시 연계를 맺었는데, 이 연대는 당시 영국 점령 지역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 칼럼은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연대 무도회 때 공작에게 초청장이 보내졌고, 연대장(P. J. 존스턴 중령)의 쪽지에는 거리가 멀어 참석하기 어려울 수 있지만, 모든 대대 장교들이 전 연대장을 초청하고 싶어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공작은 건강상 참석할 수 없지만, 시포스 하이랜더스 연대와 자신 사이에 오랫동안 존재했던 옛 연계가 다시는 끊어지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며 초청에 깊이 감동했다고 답했다. 그는 코부르크에 들르는 모든 동지들을 손님으로 기꺼이 맞이할 것이라고 말하며 '카를 에두아르트.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앨버니 공작'이라고 서명했다."
7.2. 사망
카를 에두아르트는 1954년 3월 6일, 69세의 나이로 코부르크의 자택에서 암으로 사망했다. 그는 아들 프리드리히 요시아스에게 빅토리아 여왕이 항상 그가 "좋은 독일인"이 되기를 원했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더 타임스'의 그의 부고는 "...그는 히틀러의 사람이었다... 그가 나치 일당의 내부 회의에 어느 정도까지 참여했는지는 아직 미지수이다"라고 언급했다. 유럽 각국의 여러 왕실 대표들이 조의를 표했지만, 영국 왕실은 언급하지 않았다.
카를 에두아르트의 장례식은 3월 10일에 열렸으며, 나치 정권 하에서 교회 관리였던 루터교 목사가 주재했다. 그는 카를 에두아르트가 타인에게 조종당하고 연합군에게 부당하게 대우받은 좋은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전 공작의 죽음은 코부르크에서 공식적으로 애도되었다. 그의 장례식에서 깃발을 반쯤 내리는 것을 거부한 한 공무원은 바이로이트의 지역 의회에 보고되어 바이에른 주의회 의원에게 비난받았다. 빅토리아 아델하이트는 남편 사망 후 몇 주 동안 전직 고위 나치당원들을 포함하여 많은 지지 편지를 받았다. 카를 에두아르트의 매장식은 10월 12일에 거행되었으며, 많은 조문객들이 지켜보았다. 그는 코부르크의 바이에르스도르프 지역에 있는 발트프리트호프 묘지에 묻혔다.
8. 유산 및 평가
카를 에두아르트의 복잡하고 논란이 많은 생애는 그의 가족과 동시대인, 그리고 현대 학계와 언론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평가되고 재조명되어 왔다. 특히 그의 나치 연루 행적은 사회 정의와 인권, 소수자 보호에 대한 심각한 영향을 비판적으로 조명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8.1. 가족 및 동시대인의 평가
그의 누나 앨리스의 자서전 '나의 손주들을 위하여'(1966)는 카를 에두아르트의 삶을 다룬다. 그녀는 오빠가 제1차 세계 대전 중 편견의 희생자였으며, 가족 때문에 독일에 머물기로 결정했을 뿐이라고 느꼈다. 그녀는 그가 나치 정권에서 미미한 역할을 했다고 주장했다. 우르바흐는 이 자서전이 의도적으로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선택적이라고 비판했다. 1981년 출판된 앨리스의 전기에서 아론슨은 영국 왕실의 일부 구성원들이 카를 에두아르트가 "히틀러가 독일을 공산주의로부터 구했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정권을 지지했다고 느꼈다고 언급했다. 그는 앨리스가 오빠가 전쟁 후 수감되었을 때 형편없이 대우받았다고 느꼈다고 기록했다. 앨리스는 "그는 견디기 힘든 조건을 발견했다... 그의 동료 수감자들 중 많은 이들이 그곳에서 사망했다..."고 말했지만, "의심할 여지 없이, 그들의 간수들은 끔찍한 독일 강제 수용소 중 일부를 보았고 이 노장교들을 최대한 가혹하게 대하기로 결심했다"고도 말했다.
코부르크의 아마추어 역사가 루돌프 프리스너는 1977년 카를 에두아르트의 첫 전기를 썼다. 전 공작의 아들 프리드리히 요시아스는 프리스너에게 편지를 써서 그 책을 비판했다. 다른 오류들 중에서도 그는 책이 자신의 아버지에게 지나치게 동정적이라고 느꼈는데, 자신의 아버지가 홀로코스트에 대해 알고 있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형제인 후베르투스가 유대인들을 절멸 수용소로 이송하는 것을 목격했으며, 가족들과 이 문제에 대해 자주 이야기했다고 썼다. 프리드리히 요시아스는 아버지에 대한 전기를 쓸 계획이었지만 끝내 그러지 못했다.
8.2. 현대적 재조명 및 비판
2007년 12월, 영국의 채널 4는 카를 에두아르트에 대한 1시간짜리 다큐멘터리 '히틀러가 가장 아끼는 왕족'을 방영했다. '가디언'의 한 평론은 이 영화를 "나약한 남자와 비참한 가족에 대한 견고한 다큐멘터리"라고 묘사했다. '데일리 텔레그래프'의 또 다른 평론은 이 다큐멘터리가 카를 에두아르트에게 지나치게 동정적이었다고 지적하며, "이야기는 순수한 비극으로 드러났다. 의심할 여지 없이 부분적으로는 그랬지만," 그가 "공작으로 승격되고 그것을 잃은 트라우마가 그에게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능력을 빼앗아간 것처럼" 묘사되었다고 했다.
우르바흐는 2007년 다큐멘터리 제작팀 내에서 카를 에두아르트를 그에게 외국인인 나라에서 정치적으로 고군분투하는 인물로 묘사해야 할지, 아니면 이념적인 나치로 묘사해야 할지에 대한 이견이 있었으며, 이로 인해 그의 인물 묘사가 모순적이었다고 기록했다. 그녀는 2007년에서 2015년 사이에 새로운 증거가 발견되면서 그가 "분명히 상황의 순진한 희생자가 아니라 히틀러의 매우 적극적인 지지자였다"는 것이 밝혀졌다고 말했다. 우르바흐는 카를 에두아르트가 히틀러와 유사한 성격을 가졌으며, "이념적으로나 물론 그들의 나르시시스트적인 성격(두 사람 모두 좋아한다고 선언한 유일한 생명체는 그들의 개였다)"을 공유했다고 언급했다. 그녀는 또한 그의 삶을 "철저한 재교육의 예... 그가 자란 입헌군주제에서 독재로의 전환"이라고 묘사했다. 우르바흐의 2015년 저서 '히틀러를 위한 중개인들'은 카를 에두아르트를 포함한 여러 귀족들이 나치 독일을 위한 비공식 외교관 역할을 어떻게 했는지 다룬다. '더 타임스'의 한 평론은 카를 에두아르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그 이후로 수년 동안 독일 혁명 이후 카를 에두아르트는 역사의 단순한 각주로, 20세기 초의 지진 같은 격변에 의해 떠내려간 무해하고 이상한 늙은 귀족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러한 온건한 해석은 최근 수정되었다. 우리는 이제 카를 에두아르트가 나치당원이었고, 준군사 테러리즘의 후원자였으며, 우르바흐의 훌륭한 책이 보여주듯이 히틀러를 위한 중요한 '중개인'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뷔셸은 2016년 카를 에두아르트의 전기에서 그가 어린 시절부터 제1차 세계 대전 결과까지 겪었던 다양한 압력으로 인해 해리성 정체성 장애와 나르시시즘을 겪었을 수 있다고 시사했다. 작가는 나치 정권이 전 공작에게 제1차 세계 대전 후 잃었던 지위의 많은 부분을 되찾게 해주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카를 에두아르트가 "강압, 두려움, 세뇌, '최고의 자리'를 유지하려는 노력, 그리고 아마도 내면의 고향 없는 상태와 고독"의 영향을 받았다고 언급했다. 그는 이는 공작의 많은 독일 동시대인들과 비슷했다고 시사한다. 그러나 뷔셸은 카를 에두아르트가 독일을 떠나는 것이 비교적 쉬웠음에도 불구하고 나치 정권을 자유롭게 지지하기로 선택했다고 믿었다. 그는 전 공작이 정권의 귀족 지지자들 중 가장 적극적이고 열정적인 인물이었다고 기록한다. 그는 카를 에두아르트를 "2선 가해자"로 묘사하는데, 이는 정권의 핵심 인물은 아니었지만 수백만 명의 죽음으로 이어질 정책을 은폐하는 데 도움을 준 인물이라는 의미이다.
러시턴은 2018년 전 공작과 장애인 살해와의 관계에 대한 저서에서 카를 에두아르트의 삶을 "왕족으로 태어나 인간 파괴의 정치에 얽매이게 된 한 남자의 이야기. 비극적인 이야기다"라고 묘사했다. 러시턴은 카를 에두아르트와 그의 가족이 정권의 어떤 행동에 반대하기로 선택했다면 위험에 처했을 것이며, 박해받은 다른 전직 귀족들의 예를 들었다. 러시턴은 카를 에두아르트가 이미 영국 왕자와 독일 공작으로서의 지위를 잃었기 때문에 나치당 지도자로서의 새로운 정체성이 그에게 깊이 감정적으로 중요했다고 지적했다. 러시턴은 카를 에두아르트의 행동에 영향을 미친 요인들이 많은 독일인들과 비슷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역사가도 전 공작이 히틀러와 친밀한 우정을 맺었으며, 그가 히틀러에게 특정 잔학 행위를 중단하도록 권유할 수도 있었다고 주장했다. 작가는 카를 에두아르트가 자신의 친척의 죽음에 대응하지 못한 것이 "의지박약"을 나타낸다고 보았다. 그는 이것이 "...도덕적 성격 결함... 낮은 자존감과 적은 자존심... [행동 부족은 종종] 공동체의 타인의 의견과 편안하고 안전한 생활 방식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2015년 코부르크에서 나치 정권과 연관된 사업가 막스 브로제의 이름을 거리에 붙여야 하는지에 대한 지역적 논쟁이 있었다. 이에 대한 응답으로 코부르크 시의회는 역사학자들에게 코부르크에서 나치에 대한 지지가 비정상적으로 빨리 발전한 이유와 해당 기간 동안 도시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조사하도록 의뢰했다. 2024년에 결과를 보고한 이 위원회는 카를 에두아르트가 도시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으며, 그의 폴키쉬 조직에 대한 지지가 극우 정치의 성장에 기여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