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카를 알렉산더 폰 로트링겐은 로렌 공작 레오폴드 (로렌 공작)와 엘리자베트 샤를로트 도를레앙의 아들로 태어나, 오스트리아 제국에 봉사하며 군사 및 행정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의 생애는 군사적 도전과 행정적 성공이 교차하는 시기였다.
1.1. 출생 및 가계
카를 알렉산더는 1712년 12월 12일 루네빌에서 로렌 공작 레오폴드 (로렌 공작)와 엘리자베트 샤를로트 도를레앙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형인 로렌 공작 프랑수아 에티엔은 이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는 마리아 테레지아 대공녀와 결혼하여 합스부르크가와 인척 관계를 맺었다. 1738년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의 종전 조건 중 하나로 형 프란츠가 로렌 공국을 전 폴란드 국왕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에게 넘기고 그 대가로 토스카나 대공국을 얻게 되면서, 로렌과 바르 공국의 공작위는 1766년 레슈친스키 사망 시 프랑스 국왕 루이 15세에게 넘어갔다. 그러나 프란츠와 그의 후계자들은 로렌과 바르의 공작 작위를 계속해서 사용할 권리를 유지했다.
1.2. 교육 및 초기 경력
그는 군인이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으며, 1737년 오스트리아 제국군에 입대했다. 1737년과 1738년 오스트리아-러시아-튀르크 전쟁의 전역에 참전하며 초기 군사 경력을 쌓았다.
1.3. 결혼 및 가족
1744년 1월 7일, 카를 알렉산더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유일한 여동생이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6세의 차녀인 마리아 안나 폰 외스터라이히 대공녀와 결혼하여, 마리아 테레지아의 이중 매부가 되었다. 두 사람은 같은 해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의 공동 총독으로 임명되어 브뤼셀로 부임했다. 그러나 마리아 안나는 같은 해 12월 16일 브뤼셀에서 출산 중 사망했다. 마리아 안나의 사망에도 불구하고, 카를의 대중적 인기와 마땅한 후임자가 없었던 관계로 그는 1780년 자신이 사망할 때까지 총독직을 계속 수행했다.

마리아 안나 사망 이후 그의 사생활은 불분명한 점이 많지만, 그의 정부(情婦)였던 엘리자베트 드 보(Elisabeth de Vaux)와의 사이에서 아들 샤를 알렉상드르 기욤 조제프(Charles Alexandre Guillaume Joseph)와 그를 통해 손자 귀스타브 오귀스트(Gustav Auguste)를 두었다. 또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다른 정부와의 사이에서 사산된 딸과 아들 샤를 프레데리크(Charles Frédéric)를 두었으며, 또 다른 정부와의 사이에서 아들 장 니콜라(Jean Nicholas)와 딸 안 프랑수아즈(Anne Françoise)를 두었다. 레기나 엘리자베트 바르톨로티 폰 포르텐펠트(Regina Elisabeth Bartholotti von Porthenfeld, 1725년생)와의 사이에서는 딸 마리아 레기나 요한나 폰 메레이(Maria Regina Johanna von Merey, 훗날 하켈베르크-란다우 남작부인, 1744년-1779년)를 두었다. 그의 자녀 중 일부는 벨기에의 네덜란드어 사용 지역에서 일시적 또는 영구적으로 거주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첫째 아들 샤를 알렉상드르 기욤 조제프는 훗날 로렌의 루네빌로 돌아와 상당한 유산을 청구했으며, 1788년에 아들 귀스타브 오귀스트를 두었다. 그는 낭시에서 사망했다.
2. 군사 경력
카를 알렉산더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과 7년 전쟁에서 오스트리아군의 주요 지휘관 중 한 명으로 활동했다. 그의 군사 경력은 프리드리히 대왕이 이끄는 프로이센군에게 여러 차례 패배를 겪으며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2.1.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하자, 카를 알렉산더는 마리아 테레지아에 의해 원수로 임명되었고 오스트리아군의 주요 지휘관 중 한 명이 되었다. 1742년 5월 17일 코투지츠 전투에서 프리드리히 대왕이 이끄는 프로이센군에게 패배했지만, 병력을 잘 통제하여 질서정연하게 퇴각하는 데 성공했으며 프로이센군에게 더 큰 인명 피해를 입혔다. 1743년에는 프랑스와 바이에른에 대한 전역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1744년 전역에서 그는 오스트리아군을 이끌고 라인강을 성공적으로 도하하여 로렌 공국을 침공했으나, 프리드리히 대왕이 보헤미아를 침공하면서(제2차 슐레지엔 전쟁) 로렌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즉시 보헤미아로 향했고, 노장 오토 페르디난트 폰 트라운의 조언을 받아 프로이센군을 보헤미아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듬해 슐레지엔 전역에서는 트라운의 조언 없이 1745년 호헨프리트베르크 전투와 조어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에게 대패했다. 1746년 네덜란드 전역에서는 로쿠르 전투에서 프랑스 장군 모리스 드 삭스에게 패배했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종전 후에는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의 통치에 관여하며 많은 개혁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대중의 인기를 얻었다.
2.2. 7년 전쟁
7년 전쟁이 1756년에 발발하고 오스트리아군이 초기 전투에서 패배하자, 마리아 테레지아는 카를 알렉산더를 다시 불러들였다. 그러나 카를 알렉산더는 1757년 프라하 전투에서 다시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패배하여 프라하 성에 고립되었다. 이후 프로이센군이 콜린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프라하 포위가 풀렸다. 카를 알렉산더는 같은 해 11월 브레슬라우 전투 (1757년)에서 소규모 프로이센군을 격파하는 승리를 거두었지만, 프리드리히 대왕은 직후 로스바흐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했으며, 12월 5일 로이텐 전투에서 카를 알렉산더에게 완승을 거두었다. 로이텐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은 병력이 절반에 불과하고 대포도 적으며 12일간의 긴 행군으로 지쳐있던 프로이센군에게 압도적으로 패배했다. 카를과 그의 부사령관 레오폴트 요제프 폰 다운은 "절망의 나락"에 빠졌고, 카를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카를은 과거 프리드리히와의 전투에서 혼합된 전적을 가지고 있었지만 로이텐에서처럼 심하게 패배한 적은 없었다. 이 참패 이후 마리아 테레지아는 그를 다운 백작으로 교체했다. 카를은 군 복무에서 은퇴했으며, 이후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의 총독으로 재직했다. 비록 군사 지도자로서는 성공적이지 못했지만, 카를은 유능한 행정가임을 입증했으며 주민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그의 통치 아래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는 번성했고, 그는 자신의 지역 문화 생활에 깊이 관여했다.
3. 행정 및 통치
군사 경력에서 아쉬운 성과를 보였던 카를 알렉산더는 행정가로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며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의 번영을 이끌었다.
3.1.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 총독
1744년 마리아 안나 폰 외스터라이히와 함께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의 공동 총독으로 임명된 카를 알렉산더는 마리아 안나 사망 후에도 1780년 자신이 사망할 때까지 총독직을 유지했다. 그는 유능한 행정가로서 주민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는 번성했으며, 그는 지역의 문화 생활에 깊이 관여했다. 그는 많은 개혁을 적극적으로 추진했으며, 1775년에는 브라반트 의회가 브뤼셀에 카를 알렉산더의 동상을 세울 정도로 대중의 존경을 받았다.

3.2. 독일 기사단 총장
1761년, 카를 알렉산더는 독일 기사단의 총장으로 임명되어 1780년 사망할 때까지 그 직책을 수행했다.
4. 건축
카를 알렉산더는 건축 활동에도 관심을 기울여 여러 건축물을 건설하고 개조했다.


그는 자신의 휴식처로 샤토 드 라 파보리트 (루네빌)를 건설했으며, 브뤼셀에는 로렌 공자 궁전을 지었다. 또한 기존의 테르뷔런 성과 마리몽 성을 개조하여 활용했다. 특히 테르뷔런에 샤토 샤를을 의뢰하여 건설하는 등 그의 건축적 취향과 투자를 엿볼 수 있다.


5. 사망
카를 알렉산더는 1780년 7월 4일 테르뷔런 성에서 사망했다. 그의 장례식은 7월 10일 브뤼셀의 성 미카엘과 성녀 구둘라 대성당에서 거행되었고 그곳에 안장되었다. 그의 심장은 적출되어 조상들이 잠들어 있는 낭시의 코르들리에 교회에 안치되었다.
6. 평가 및 영향
카를 알렉산더 폰 로트링겐의 생애와 업적은 군사적 실패와 행정적 성공이라는 대조적인 측면으로 평가된다. 그는 군사 지도자로서는 한계를 보였지만, 총독으로서의 역할은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6.1. 긍정적 평가
카를 알렉산더는 군사적 지도력에서는 아쉬운 평가를 받았으나, 행정가로서는 매우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 총독으로서 재임하는 동안 주민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으며, 그의 통치 아래 해당 지역은 번영을 누렸다. 그는 적극적으로 많은 개혁을 추진했고, 지역의 문화 생활에 깊이 관여하며 사회 발전에 기여했다. 1775년 브라반트 의회가 브뤼셀에 그의 동상을 세운 것은 그가 대중으로부터 얼마나 큰 존경과 사랑을 받았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이다. 이러한 평가는 그가 단순히 군사적 인물이 아니라, 민생과 행정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인물이었음을 시사한다.
6.2. 비판
카를 알렉산더의 군사 경력은 프리드리히 대왕이 이끄는 프로이센군에게 여러 차례 결정적인 패배를 당한 것으로 특징지어진다. 코투지츠 전투, 호헨프리트베르크 전투, 조어 전투, 로쿠르 전투, 프라하 전투, 그리고 특히 로이텐 전투에서의 완패는 그의 군사적 리더십에 대한 비판의 주된 근거가 되었다. 비록 그가 일부 전투에서 선전하거나 병력을 질서정연하게 퇴각시키는 능력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대규모 전투에서 패배한 기록은 그를 "성공적이지 못한 군사 지도자"로 평가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군사적 한계는 그의 생애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