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최자실 목사는 개인적인 고난과 좌절을 신앙을 통해 극복하고, 이를 바탕으로 평생을 소외된 이들을 위한 사역과 복음 전파에 헌신하며 한국 교회의 성장에 크게 기여하였다.
1.1. 유년기 및 교육
최자실은 1915년 8월 15일 황해도 해주시에서 태어났다. 그녀가 6세 되던 해에 아버지가 지병으로 사망하여, 홀어머니의 삯 바느질로 생계를 이어가는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다. 12세가 되던 해, 이웃 친구의 권유로 이성봉 목사가 인도하는 천막 부흥회에 참석하여 기독교 신앙을 접하게 되었고, 이후 불교 신자였던 어머니를 교회로 인도하여 함께 신실한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그녀는 가난 속에서도 학업에 매진하여 동급생의 가정교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졸업을 몇 달 앞둔 명신여학교에서 평양 도립병원 간호원 양성소 입학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하였고, 1935년에 졸업하며 직장 여성으로서 간호사 생활을 시작했다. 그녀는 환자를 돌보는 일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고 믿으며 일에 몰두했다.
1.2. 결혼 및 사업 활동
청년 시절 최자실은 한경직 목사가 시무하던 신의주 제2장로교회에 출석했으며, 같은 교회의 찬양대원이자 배재학당과 일본 주오대학 법과를 졸업한 김창기와 26세에 결혼했다. 그러나 결혼 후 남편은 신앙생활에 소홀해지고 세상일에 바빠졌으며, 그녀 또한 두 딸과 두 아들을 키우면서 점차 신앙에서 멀어졌다. 이후 서울로 내려와 사업에 뛰어들어 성냥 공장과 비누 공장으로 큰 성공을 거두며 전국적인 사업가로 자리매김했다. 돈벌이에 집중하며 신앙생활이 소홀해지자 그녀의 어머니는 밤마다 금식 기도를 하며 딸을 위해 눈물로 간구했다.
1.3. 시련과 신앙적 전환
사업의 성공과 함께 시련이 닥쳐왔다. 1953년, 그녀의 신앙의 기둥이었던 어머니가 69세로 소천했고, 불과 열흘 후에는 맏딸마저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사업 실패로 그 많던 재물을 모두 잃고 심장병까지 발병하면서 모든 것을 상실한 비참한 상황에 놓였다. 가정 불화와 빚 독촉으로 인한 극심한 고통 속에서 수년을 보내다 결국 삶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그녀는 자살을 결심하고 극약을 산 뒤, 현재의 북한산 자락인 삼각산으로 향했다. 극약을 마시려는 순간 갑작스러운 돌개바람이 불어 약봉지가 날아가 버리면서 자살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에도 거듭 자살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고, 그곳에서 놀라운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자살을 시도했던 장소 근처에서 30년 만에 우연히 어릴 적 친구의 권유로 참석했던 이성봉 목사의 집회가 열렸고, 그곳에서 예수를 깊이 만나게 되었다. 그녀에게는 자살을 시도했던 고통의 장소가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전환점이 된 것이다.
1.4. 목회 입문 및 신학교 시절
산에서 내려온 후 최자실은 이성봉 목사를 찾아갔고, 이성봉 목사의 소개로 현재의 한세대학교로 발전한 순복음 신학교에 입학하여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곳에서 그녀는 후에 사위가 되는 조용기 목사를 만났고, 신학교 시절부터 조용기와 함께 팀을 이루어 전도와 기도 사역을 시작하며 미래 목회의 기틀을 다졌다. 당시 신학생들은 방학 중에도 학교에 남아 철야 기도를 하며 학문뿐 아니라 실천적인 신앙을 강조했다. 특히 최자실은 기숙사 생활을 하며 밤새 철야 기도를 하고 틈만 나면 노방 전도에 나서는 등 열정적인 전도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그녀는 1958년 순복음 신학교 제4회로 졸업했다.
2. 주요 사역 및 활동
최자실 목사는 천막 교회 개척부터 세계적인 교회와 기도원 건립에 이르기까지 한국 기독교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으며, 해외 선교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복음 전파에 헌신하였다.
2.1. 천막 교회 개척
최자실 목사의 첫 번째 사역은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시작되었다. 온 동네를 다니며 아이들을 불러 모아 알사탕을 사주고, 찬송가와 성경 말씀을 가르쳤으며, 일일이 껴안고 안수기도를 해주었다. 이렇게 모인 아이들이 60~70명에 달하자 1958년 5월 18일 은평구 대조동에 천막 교회를 세웠다. 처음 천막 교회는 어린이 예배로 시작되었으며, 성인 예배는 최자실 전도사, 조용기 전도사, 그리고 최자실 전도사의 딸 김성혜와 아들 김성광, 비를 피해 왔던 한 할머니 등 총 5명으로 출발했다. 당시 가난하고 병들고 소망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최자실 전도사의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이들에게 음식을 나누고 기도를 통한 신유의 역사가 나타나면서 교회가 부흥하기 시작했다. 무당들이 회개하고 주정뱅이들이 변화되는 등 다양한 역사가 일어나자, 최자실 전도사는 혼자 감당하기 어려워 조용기 전도사에게 사역 협력을 부탁했다. 이후 조용기 전도사의 설교를 통해 수많은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다.
2.2. 서대문 순복음 중앙교회 시대
은평구 대조동 천막 교회는 1958년 6월 5명으로 출발했던 재적 교인이 꾸준히 500명으로 늘어나면서 성장했다. 이에 따라 1961년 11월, 천막 교회 개척 3년 만에 서대문구 의주로에 순복음 중앙 교회를 개척하게 되었다. 1961년 9월 1일에는 서대문 로터리 서커스단이 자주 공연하던 터에서 샘 토트 목사를 강사로, 조용기 전도사를 통역으로 하는 천막 부흥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1961년 10월 15일에는 서대문 순복음 부흥 회관을 개척하였다. 1962년 5월 13일에는 교회 명칭을 순복음 중앙 교회로 변경했다. 이곳에서는 조용기 목사의 설교와 최자실 전도사의 치유 사역을 통해 더욱 큰 부흥이 일어났다. 1964년에는 재적 성도가 3,000명을 돌파하는 등 폭발적인 성장을 이루었다. 동북아시아 세계 선교 대회를 주최하는 등 세계적인 규모의 성회를 통해 최자실 전도사의 사역은 국제적으로 확장되기 시작했다. 참고로 서대문 순복음 중앙 교회 건물은 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동에 위치하며, 서울 충정로 우체국 부근에서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총회 회관과 바위샘교회로 사용되고 있다.
2.3. 오산리 기도원 건립
최자실 목사는 기도의 동산을 세우는 꿈을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었다. 경기도 파주시 조리읍 오산리에 위치한 교회 묘지의 연장 창고에서 철야 기도를 쌓은 지 석 달째 되던 날,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기도원 건립을 추진하게 되었다. 1973년에는 순복음 금식 기도원(현 오산리 최자실 기념 금식 기도원)을 설립했다. 기도원 집회를 인도하며 수많은 사탄의 방해 공작 속에서도 기도로 극복하여 세계 최대 규모의 기도원을 설립하였다. 최자실 목사가 소천한 뒤, 그녀의 눈물 어린 기도와 헌신을 기념하여 기도원의 정식 명칭을 '오산리 최자실 기념 금식 기도원'으로 변경하게 되었다.
2.4. 여의도 성전 건축
서대문 순복음 중앙 교회는 나날이 폭발적으로 부흥을 거듭하여 성도 수가 10,000명을 초과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서대문 교회는 더 이상 성도들을 수용할 수 없게 되어 새 성전 건축을 위한 부지를 찾기 시작했다. 여러 곳이 부지로 거론되었지만, 많은 성도들이 모이기에 적합한 장소를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때 여의도가 새로운 부지로 추천되었다. 당시 여의도는 비행기 활주로로 이용되던 황폐한 섬으로, 육지와 연결되는 다리조차 없어 교통 문제가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그러나 조용기 목사는 하나님으로부터 기도의 응답을 받고 여의도에 성전을 세우겠다는 계획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최자실 목사 또한 이 비전에 동참하여 신념으로 함께 나아갔다. 마침내 교회는 여의도에 부지를 구입하게 되었으나, 건축비가 너무 비싸 거대한 빚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가 컸다. 하지만 조용기 목사와 최자실 목사는 하나님의 기적을 믿고 불타오르는 소망을 가지고 건축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1969년 3월 3일 신축 공사를 착공한 이후부터 여러 가지 문제들이 닥쳐오기 시작했다. 건축이 시작되자마자 교회는 자금 문제에 봉착했다. 특히 중동 오일 쇼크의 여파로 달러에 대한 원화의 가치가 하락하여 건축 자재의 가격이 폭등했고, 교회 헌금도 감소하게 되었다. 이러한 재정적, 사회적 난관 속에서도 최자실 목사는 기도로 이를 극복하려는 노력을 계속했다. 이 교회는 1985년 교회 외부 리모델링 전까지 순복음 중앙 교회로 불렸다.
2.5. 해외 선교 활동
최자실 전도사의 사역은 이제 세계를 향해 나아갔다. 1964년 10월 28일 일본 순회 전도 여행을 시작으로 1966년 1월 23일 대만 순회 선교 여행, 1974년 4월 5일 미국 순회, 1975년 4월 조용기 목사와 함께 미국 및 유럽 선교 여행, 1977년 6월 조용기 목사와 함께 일본 도쿄 부흥 성회 인도 등 해외 각국에서 성회를 인도하며 활발한 해외 활동을 펼쳤다. 특히 1972년 6월에는 일본 제2차 아시아 신도 대회에 참석하였고, 1974년 7월 8일에는 로스앤젤레스 바이블 칼리지에서 명예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녀의 마지막 공식 활동은 1989년 11월 8일 미국 워싱턴 D.C. 순복음 교회 부흥 성회 인도와 로스앤젤레스 국제 금식 기도원 창립 4주년 기념 새 성전 기공 예배였다.
3. 저작
최자실 목사는 자신의 신앙과 사역 경험을 담은 여러 서적을 저술하여 많은 이들에게 영적 영향을 미쳤다.
- Korean Miracles코리안 미러클스영어 (1978년, 영산출판사)
- Hallelujah Lady할렐루야 레이디영어 (2009년, 서울 로고스)
4. 사망
최자실 목사는 1985년 10월 3일 목회자 정년 은퇴 이후에도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1989년 6월 2일에는 여의도순복음교회 창립 30주년 기념 잠실 서울 올림픽 주경기장 성회에서 공로패를 수상하였다. 그녀는 1989년 11월 9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미주 순방 성회를 마치고 향년 75세를 일기로 심장마비로 소천하였다. 그녀의 유해는 1989년 11월 15일 한국으로 옮겨져 발인과 함께 오산리 최자실 기념 금식 기도원에 안장되었다.
5. 평가 및 기념
최자실 목사는 한국 기독교의 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오순절 운동과 여성 목회자들에게 큰 영감과 본보기가 되었다. 그의 헌신은 다양한 기념 사업을 통해 오늘날까지 기려지고 있다.
5.1. 영향 및 공헌
최자실 목사는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소속의 개신교 목사로서, 한국 기독교계, 특히 오순절 운동의 확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간호사 출신의 여성 전도사로서, 당시 남성 중심의 교계에서 여성 목회자의 길을 개척하며 많은 여성들에게 영적 리더십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조용기 목사와 함께 대조동 천막 교회에서 시작하여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세계 최대 규모의 교회로 성장시키는 데 있어 영적 동반자이자 실질적인 사역의 주축이 되었다.
그녀의 사역은 특히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헌신에서 빛을 발했다. 가난하고 병든 자, 소외된 이들을 직접 찾아가 돌보고, 기도를 통해 신유의 역사를 이루며 수많은 이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그녀의 깊은 기도와 금식 사역은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영적 토대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오늘날까지도 많은 성도들에게 영적 귀감이 되고 있다. 해외에서의 활발한 오순절 교회 선교 활동을 통해 한국 개신교의 국제적인 영향력을 확대하는 데도 크게 공헌했다.
5.2. 기념 사업
최자실 목사의 헌신적인 삶과 사역을 기리기 위한 대표적인 기념 사업은 경기도 파주시 조리읍에 위치한 '오산리 최자실 기념 금식 기도원'이다. 이 기도원은 그녀가 눈물로 기도하며 건립에 헌신했던 장소로, 그녀의 소천 후 그녀의 정신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공식 명칭이 변경되었다. 이곳은 최자실 목사의 영성을 계승하고 기도와 금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장소로, 전 세계에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찾는 영적 명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