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체사레 보르자의 출생 연도는 1475년 또는 1476년으로 논란이 있으나, 이탈리아 라치오 지방의 수비아코에서 태어났다는 설이 유력하다. 그의 개인적인 배경과 성장 과정은 보르자 가문의 권력 상승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1.1. 출생과 가족
체사레 보르자는 추기경 로드리고 랴솔 이 데 보르하, 즉 훗날의 교황 알렉산데르 6세와 그의 이탈리아인 애인 반노차 카타네이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이다. 반노차 카타네이에 대한 정보는 많지 않다. 스테파노 인페수라와 같은 일부 역사가들은 추기경 보르자가 체사레를 반노차 카타네이의 명목상 남편인 도메니코 다리냐노의 합법적인 아들이라고 거짓 주장했다고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1480년 10월 1일 교황 식스토 4세는 교황 칙서를 통해 체사레가 자신의 출생을 증명할 필요가 없다고 명시했다.
보르자 가문은 원래 발렌시아 왕국 출신으로, 15세기 중반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체사레의 종조부인 알폰소 보르하(1378년 ~ 1458년)는 발렌시아의 주교였으며, 1455년에 교황 갈리스토 3세로 선출되었다. 체사레의 아버지인 알렉산데르 6세는 사생아들을 공개적으로 자신의 친자식으로 인정한 최초의 교황이다. 체사레에게는 루크레치아 보르자, 후안 보르자, 호프레 보르자 등의 동복 형제자매가 있었으며, 알려지지 않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이복 형제 돈 페드로 루이스 데 보르하와 지롤라마 데 보르하도 있었다.
1.2. 교육
체사레는 어린 시절부터 교회 경력을 위해 양육되었다. 그는 페루자와 피사에서 학교를 다녔으며, 이후 스투디움 우르비스(현재의 로마 라 사피엔차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그는 학업 외에도 사냥과 무예 전반에 능했으며, 훗날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체사레를 "용모가 매우 아름답고 당당하며, 무기를 들면 용맹했다"고 묘사했다. 체사레는 아버지 로드리고의 지원 덕분에 어린 나이부터 여러 교회 고위직을 역임했다. 1483년 3월에는 교황청 서기장, 1483년 7월에는 발렌시아 대성당 참사회원, 1483년 8월에는 간디아 사제 등을 맡았다. 1484년 9월에는 카르타헤나 대성당 재무관 및 타라고나 대성당 참사회원, 1491년 9월에는 팜플로나 주교로 임명되었다. 15세에 팜플로나 주교, 17세에 발렌시아 대주교가 되었으며, 1493년에는 알비와 페르피냥-엘느의 주교로도 임명되었다. 1494년에는 생미셸 드 퀴샤 수도원의 수도원장 직함도 받았다.
2. 교회 경력
체사레 보르자는 아버지의 영향력 아래 성직자로서의 경력을 시작했으나, 이후 군사적 야망을 위해 그 직책을 내려놓았다.
2.1. 추기경 임명
1492년 8월, 그의 아버지 로드리고 보르하가 교황 알렉산데르 6세로 선출되면서, 체사레는 18세의 나이에 추기경으로 서임되었다. 이는 보르자 가문이 교황청 내에서 자신들의 후계자를 암시하는 중요한 조치로 여겨졌다. 1492년 발렌시아 대주교로 임명된 데 이어, 1493년 9월 추기경 회의에서 알렉산데르 6세의 승인을 받아 발렌시아 추기경이 되었다.
2.2. 추기경직 사임
1497년 6월, 보르자 가문의 옛 영지인 간디아 공작이자 교황군 총사령관이었던 체사레의 형 후안 보르자가 로마 시내에서 의문의 암살을 당했다. 몇몇 동시대인들은 체사레가 후안의 암살자일 수 있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후안의 죽음이 체사레에게 오랫동안 염원했던 군사 경력을 열어줄 수 있었고, 또한 체사레의 어린 동생 호프레 보르자의 아내이자 체사레와 후안 모두의 정부였던 아라곤의 산차를 둘러싼 질투를 해소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추측이 있었다. 프란체스코 구이차르디니는 알렉산데르 6세가 후안을 편애한 것에 대한 체사레의 질투가 주된 원인이라고 기록했다. 그러나 체사레의 역할은 명확하지 않으며, 후안이 성적인 관계로 인해 살해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후안의 죽음은 보르자 가문의 정치 및 군사 부문을 담당할 인물이 사라지는 결과를 낳았다.
1498년 8월 17일, 체사레는 군사 경력을 추구하기 위해 추기경직을 사임했다. 이는 역사적으로 추기경직을 사임한 최초의 인물로 기록된다. 같은 날, 프랑스의 루이 12세는 체사레를 발렌티노 공작으로 임명했다. 이 작위명은 그의 별명인 '일 발렌티노'(Il Valentino이탈리아어, 발렌시아인)와 동음이의어인데, 이는 아버지의 라틴어 교황 칭호인 '발렌티누스'(Valentinus라틴어, 발렌시아인)에서 유래했으며, 아라곤 왕국의 하티바에서 태어난 그의 출생지를 나타낸다. 또한 체사레가 이전에 발렌시아 추기경이었던 것과도 연관이 있다. 1499년 9월 6일, 그는 모든 교회 직무에서 해제되고 부제 서품에서도 평신도로 환속되었다.
3. 군사 및 정치 경력
체사레 보르자의 군사 및 정치 경력은 그의 야망과 아버지 알렉산데르 6세의 전폭적인 지원을 바탕으로 중앙 이탈리아에 자신만의 국가를 건설하려는 시도로 특징지어진다.
3.1. 발렌티노 공작 및 로마냐 공작 작위
체사레의 경력은 아버지의 후원 능력과 이탈리아 전쟁 과정에서 프랑스와의 동맹(나바라의 후안 3세의 누이 알브레의 샤를로트와의 결혼으로 강화됨)에 기반을 두었다. 1498년 7월, 추기경직 사임이 승인된 후, 알렉산데르 6세와 프랑스 국왕 루이 12세는 체사레에게 발렌스 등의 공작령을 부여하고 군사적 지원을 제공하며 성 미카엘 기사단 기사 작위를 수여하는 협정을 맺었다. 이 협정의 이행을 위해 체사레는 10월에 미켈레토 코렐라 등 측근과 함께 프랑스로 건너가 잠시 체류했다.
1499년 5월, 루이 12세의 후원 아래 체사레는 나바라 국왕 후안 3세의 누이 샤를로트 달브레와 결혼하여 앙부아즈성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이후 그는 성 미카엘 기사단 기사로 서임되었고, 프랑스 왕가와의 양자 결연을 통해 '체사레 보르자 디 프란치아'(César Borgia de Francia프랑스어, 프랑스의 세자르 보르자)로 불리게 되었다. 이 모든 의식을 마친 체사레는 '발렌티노 공작'으로서 프랑스군에 합류하기 위해 밀라노로 향했다.
1501년 5월, 체사레는 로마냐 공작으로 임명되었다. 이 외에도 그는 안드리아와 베나프로의 군주, 디오이스 백작, 피옴비노, 카메리노, 우르비노의 지배자, 교황군의 총사령관이자 기수 등 여러 작위를 보유했다.
3.2. 이탈리아에서의 군사 작전
1499년 루이 12세가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루도비코 스포르차를 밀라노에서 축출하자, 체사레는 국왕과 함께 밀라노에 입성했다. 이때 알렉산데르 6세는 이 유리한 상황을 이용하여 체사레를 위해 북이탈리아에 독자적인 국가를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이를 위해 그는 로마냐와 마르케 지방의 모든 교황 대리들을 폐위시켰다. 이 통치자들은 이론적으로는 교황에게 직접 종속되었지만, 수 세대 동안 사실상 독립적이거나 다른 국가에 의존하고 있었다. 시민들은 이 대리들을 잔인하고 보잘것없는 존재로 여겼으며, 체사레가 권력을 잡았을 때 그를 큰 개선으로 보았다.
체사레는 이탈리아 용병들과 함께 교황군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프랑스 국왕이 보낸 300명의 기병과 4,000명의 스위스 보병의 지원을 받았다. 알렉산데르 6세는 그를 카테리나 스포르차가 통치하는 이몰라와 포를리를 점령하도록 보냈다. 이 두 도시를 정복한 후 프랑스군이 철수했음에도 불구하고, 보르자는 로마로 돌아와 승리를 기념하고 아버지로부터 교황군 기수 직함을 받았다. 1500년에는 12명의 새로운 추기경을 임명하여 알렉산데르 6세는 체사레가 비텔로초 비텔리, 잔 파올로 발리오니, 줄리오 오르시니, 파올로 오르시니, 올리베로토 에우프레두치 등의 용병들을 고용하여 로마냐 캠페인을 재개할 충분한 자금을 확보했다.
체사레의 누이 루크레치아 보르자의 첫 남편이었던 조반니 스포르차는 곧 페사로에서 축출되었고, 판돌포 4세 말라테스타는 리미니를 잃었다. 파엔차는 항복했고, 그 젊은 군주 아스토레 3세 만프레디는 후에 체사레의 명령으로 테베레강에 수장되었다. 1501년 5월, 체사레는 로마냐 공작으로 임명되었다. 피렌체에 고용된 체사레는 이후 피옴비노 영지를 그의 새로운 영토에 추가했다.
용병들이 1502년에 끝난 피옴비노 공성전을 맡는 동안, 체사레는 프로스페로 콜론나와 파브리치오 콜론나가 방어하는 나폴리와 카푸아 공성전에서 프랑스군을 지휘했다. 1501년 6월 24일, 보르자 군대는 카푸아 공성전을 끝내기 위해 카푸아를 습격했다.
1502년 6월, 그는 마르케로 향하여 우르비노와 카메리노를 배신을 통해 점령할 수 있었다. 그는 다음으로 볼로냐를 정복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의 용병들, 특히 비텔로초 비텔리와 오르시니 형제들(줄리오, 파올로, 프란체스코)은 체사레의 잔혹성을 두려워하여 그에 대항하는 음모를 꾸몄다. 구이도발도 다 몬테펠트로와 조반니 마리아 다 바라노는 우르비노와 카메리노로 돌아왔고, 포솜브로네는 반란을 일으켰다. 체사레는 충성스러운 장군들을 이몰라로 불러들여 적들의 느슨한 동맹이 붕괴되기를 기다렸다. 체사레는 화해를 제안했지만, 세니갈리아에서 용병들을 감금한 후 교살했다. 이는 역사가 파올로 조비오에 의해 "놀라운 기만"으로 묘사되었다. 1503년, 그는 산마리노를 정복했다.
3.3. 중앙 이탈리아에서의 국가 건설
체사레는 아버지의 교황 재위 기간 동안 중앙 이탈리아에 자신만의 강력한 국가를 건설하려는 야심 찬 계획을 추진했다. 그는 로마냐 지역을 중심으로 이몰라, 포를리, 페사로, 리미니, 파엔차, 우르비노, 카메리노 등을 차례로 정복하며 영토를 확장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무력뿐만 아니라 교묘한 외교와 기만적인 전략을 사용하여 반대 세력을 약화시키고 제거했다.
그는 정복한 도시들에 자신의 행정 체계를 구축하고, 효율적인 통치를 위해 노력했다. 특히 라미로 데 로르카를 로마냐 총독으로 임명하여 질서를 확립하고 치안을 강화했다. 비록 로르카의 통치가 잔혹하다는 비판을 받았으나, 마키아벨리는 체사레가 로르카를 처형함으로써 백성들에게 자신의 정의로움을 보여주었다고 평가했다. 체사레의 통치는 기존의 분열되고 부패한 군소 참주들의 지배에 지쳐있던 백성들에게는 오히려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그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치를 통해 혼란스러웠던 로마냐에 평화와 안정을 가져왔다.

체사레의 궁극적인 목표는 중앙 이탈리아에 안정적이고 독립적인 국가를 세우는 것이었으며, 이를 위해 그는 교황령의 위성국가 형태를 넘어선 진정한 군주국을 꿈꿨다. 그는 자신의 영토를 확장하고 통합하기 위해 끊임없이 군사 작전을 수행하고 정치적 음모를 꾸몄다. 그러나 그의 국가 건설은 아버지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권력과 재정적 지원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으며, 이는 훗날 그의 몰락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마키아벨리는 체사레가 새로운 교황의 호의를 얻을 수 있었다면 매우 성공적인 통치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며, 그의 통치에 있어 교황청의 선의에 대한 의존이 가장 큰 단점이었다고 지적했다.
4. 주요 관계 및 연관
체사레 보르자의 삶과 경력은 그를 둘러싼 주요 인물 및 사건과의 복잡한 관계 속에서 형성되었다.
4.1. 교황 알렉산데르 6세와의 관계

체사레 보르자의 모든 경력은 아버지인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전폭적인 후원과 영향력에 기반을 두었다. 알렉산데르 6세는 교황으로서의 권위를 이용하여 체사레에게 군사적 지휘권과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체사레를 교황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이탈리아 중부의 군소 도시들을 정복하여 체사레의 개인 영지로 삼는 것을 도왔다. 이는 교황령의 권위를 회복하고 교황청에 불복하는 세력들을 제압하려는 알렉산데르 6세의 목표와도 일치했다.
알렉산데르 6세는 체사레의 세력을 이용하여 교황권에 필적하는 영향력을 가졌던 콜론나 가문과 오르시니 가문을 약화시키고 그들의 영토를 교황령에 편입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는 생전에 베네치아 공화국의 사절에게 다음 교황은 "베네치아 출신이거나 체사레의 뜻에 맞는 인물이 좋겠다"고 말하며 체사레에 대한 깊은 신뢰와 기대를 드러내기도 했다. 이처럼 아버지의 절대적인 지지는 체사레가 자신의 야망을 펼치고 중앙 이탈리아에 강력한 기반을 구축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는 체사레가 아버지의 권력에 지나치게 의존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고, 아버지의 죽음이 곧 그의 몰락으로 이어지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4.2. 니콜로 마키아벨리와 『군주론』에 미친 영향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피렌체 공화국의 외교관이자 비서로서 체사레 보르자를 만나 그의 행동을 면밀히 관찰했다. 마키아벨리는 1502년 10월 7일부터 1503년 1월 18일까지 체사레의 궁정에 머물면서 피렌체 상관들에게 정기적으로 보고서를 보냈으며, 이 보고서들은 오늘날까지 남아 마키아벨리의 작품집에 출판되어 있다.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저서 『군주론』에서 체사레 보르자를 다른 사람의 힘으로 군주국을 획득하는 것의 위험성을 설명하는 예시로 사용했다. 그는 체사레의 아버지가 그에게 권력을 부여했지만, 체사레는 로마냐를 대부분 능숙하고 재치 있게 통치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가 죽고 보르자 가문의 경쟁자가 교황좌에 오르자 체사레는 몇 달 만에 몰락했다. 마키아벨리는 만약 체사레가 새로운 교황의 호의를 얻을 수 있었다면 매우 성공적인 통치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마키아벨리는 체사레 보르자에게 두 가지 주요 일화를 부여한다. 첫째는 마키아벨리가 『군주론』 제7장에서 묘사한 로마냐를 평정한 방법이고, 둘째는 1502년 새해 전야에 세니갈리아에서 자신의 용병대장들을 암살한 사건이다.
마키아벨리의 보르자 활용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일부 학자들은 마키아벨리의 보르자를 20세기 국가 범죄의 선구자로 보기도 한다. 반면, 토머스 바빙턴 매콜리와 존 달버그액턴을 포함한 다른 학자들은 마키아벨리의 보르자를 역사화하여, 그러한 폭력에 대한 찬사가 당시의 일반적인 범죄성과 부패의 결과라고 설명한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체사레를 "고매한 정신과 광대한 목적을 품고 달성하기 위해 스스로의 행동을 제어했으며, 새로 군주가 된 자는 본받아야 할 인물"이라고 평가하며, "야만적인 잔혹 행위나 압제로부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신이 보낸 인물처럼 보였다"고 기록했다.
4.3.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고용

체사레 보르자는 1502년부터 1503년 사이에 예술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군사 건축가이자 기술자로 잠시 고용했다. 체사레는 레오나르도에게 자신의 영지 내에서 진행 중이거나 계획된 모든 건설을 검사하고 지시할 수 있는 무제한 통행증을 제공했다. 레오나르도는 로마냐에 머무는 동안 체세나에서 체세나티코 항구까지 운하를 건설했다.
체사레를 만나기 전, 레오나르도는 루도비코 스포르차의 밀라노 궁정에서 오랫동안 일했지만, 루이 12세가 스포르차를 이탈리아에서 몰아낸 후 그 관계는 끝났다. 체사레 이후 레오나르도는 이탈리아에서 다른 후원자를 찾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가 레오나르도를 자신의 궁정으로 설득했고, 레오나르도 생애의 마지막 3년은 프랑스에서 일하며 보냈다.
레오나르도는 체사레를 "가장 친한 친구"로 여겼으며, 체사레의 초상화 스케치와 이몰라에서의 연구 결과 스케치 등 여러 작품을 남겼지만, 체사레 개인에 대한 평가는 남기지 않았다.
5. 개인 생활
체사레 보르자의 개인 생활은 그의 정치적 야망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으며, 결혼을 통해 동맹을 강화하고 자녀를 두었다.
5.1. 결혼과 자녀
1499년 5월 10일, 체사레는 나바라의 후안 3세의 누이인 알브레의 샤를로트(1480년 ~ 1514년 3월 11일)와 결혼했다. 이 결혼은 새로 선포된 프랑스 국왕 루이 12세와의 관계에서 왕족 혈통의 신부를 제공함으로써 긴장을 완화하려는 나바라 군주들의 계획의 일환이었다.
체사레와 샤를로트 사이에는 딸 루이사 보르자(1500년 ~ 1553년)가 있었다. 루이사는 훗날 부르봉-뷔세 가문의 사생아 가계와 결혼하여 체사레의 혈통을 이어나갔다. 체사레는 또한 최소 11명의 사생아를 두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들 중에는 카르피 백작부인 이사벨라와 결혼한 지롤라모 보르자, 그리고 체사레 사망 후 큰이모 루크레치아 보르자의 궁정인 페라라로 옮겨진 카밀라 루크레치아 보르자(어린 루크레치아)가 있다.
마키아벨리는 체사레 보르자와의 외교 여행 중에 기록한 바에 따르면, 체사레는 때로는 비밀스럽고 과묵했지만, 다른 때에는 수다스럽고 허풍을 떨기도 했다. 그는 밤새도록 사절들을 맞이하고 파견하는 악마적인 활동과, 아무도 만나기를 거부하며 침대에 머무는 설명할 수 없는 나태함을 번갈아 보였다. 그는 쉽게 화를 내고 측근들과는 다소 거리를 두었지만, 백성들에게는 매우 개방적이었고, 지역 스포츠에 참여하기를 좋아하며 멋진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다른 때에 체사레가 "무궁무진한" 에너지와 군사 문제, 그리고 외교 문제에 있어 끊임없는 천재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잠을 자지 않고 며칠 밤낮을 보낼 수 있었다고 관찰했다.
6. 몰락과 죽음
체사레 보르자의 몰락은 아버지 알렉산데르 6세의 죽음과 함께 시작되었으며, 이는 그의 권력 기반이 얼마나 취약했는지를 보여주었다.
6.1. 아버지 사후 정치적 몰락
체사레는 매우 유능한 장군이자 정치가였지만, 지속적인 교황의 후원 없이는 자신의 영지를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체사레가 아버지의 통제 아래 있는 교황청의 호의에 의존했던 것이 그의 통치의 주요 단점이었다고 지적했다. 마키아벨리는 체사레가 새로운 교황의 호의를 얻을 수 있었다면 매우 성공적인 통치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1503년, 체사레가 토스카나 정복을 계획하고 있을 때, 아버지 알렉산데르 6세의 죽음 소식이 전해졌다. 알렉산데르 6세가 치명적인 병에 걸렸을 때와 같은 시기에 체사레 또한 말라리아 열병으로 산탄젤로성에서 요양 중이었다. 그의 병세가 심각하여 상황 변화에 기민하게 대응할 수 없었다. 이 기회를 틈타 구이도발도 다 몬테펠트로와 잔 파올로 발리오니 등은 원래의 영지로 돌아갔지만, 이몰라와 포를리는 카테리나 스포르차의 귀환을 거부하고 체사레에게 충성을 유지했다.
알렉산데르 6세의 뒤를 이어 교황 비오 3세가 교황이 되었으나, 그는 체사레 보르자를 지지하고 그를 교황군 기수로 재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26일이라는 짧은 재위 기간 후 사망했다. 이후 체사레의 치명적인 적이었던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가 교묘한 외교술로 약해진 체사레 보르자를 속여 로마냐 정책에 대한 금전적 지원과 지속적인 교황의 후원을 약속하며 자신을 지지하도록 유도했다. 그러나 그는 1503년 10월 교황 선거에서 추기경들의 거의 만장일치로 교황 율리오 2세로 선출되자마자 이 약속들을 무시했다.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체사레는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바꾸려 했지만, 율리오 2세는 모든 면에서 그의 실패를 확실히 했다. 예를 들어 체사레는 율리오 2세에 의해 산마리노를 6개월간 점령한 후 포기하도록 강요받았다.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의 적대감에 직면한 체사레 보르자는 나폴리에서 자신이 동맹으로 여겼던 곤살로 페르난데스 데 코르도바에게 배신당해 감금되었고, 그의 영토는 교황청에 의해 다시 점령되었다. 1504년 그는 스페인으로 이송되어 라만차의 친치야 데 몬테아라곤성에 처음 투옥되었으나, 탈출 시도 후 세고비아 근처 메디나 델 캄포의 라모타성으로 옮겨졌다.
6.2. 죽음

체사레는 라모타성에서 도움을 받아 탈출에 성공했으며, 산탄데르, 두랑고, 기푸스코아를 거쳐 1506년 12월 3일 나바라의 후안 3세 국왕이 통치하는 팜플로나에 도착했다. 후안 3세는 곧 다가올 스페인의 나바라 정복에 대비하여 경험 많은 군사 지휘관을 필요로 했으므로 체사레를 크게 환영했다.
보르자는 루이 드 보몽 백작의 세력에 충성하는 군대가 장악하고 있던 비아나를 탈환했으나, 성은 함락시키지 못하고 포위했다. 1507년 3월 11일 이른 아침, 심한 폭풍우 속에서 적 기사단이 성을 탈출했다. 공성전의 비효율성에 분노한 보르자는 그들을 추격하다가 홀로 남겨졌다. 홀로 있는 그를 발견한 기사단은 그를 매복 공격하여 창에 치명적인 부상을 입혔다. 그는 모든 호화로운 의복, 귀중품, 그리고 말년에는 매독으로 인해 변형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얼굴 절반을 가린 가죽 가면까지 벗겨졌다. 보르자는 알몸으로, 단지 붉은 타일 하나로 성기를 가린 채 방치되었다. 그는 1507년 3월 12일 사망했다.
7. 유산과 평가
체사레 보르자의 삶과 업적은 후대에 걸쳐 상반된 평가와 끊임없는 논란을 낳았으며, 그의 유해 처리 과정 또한 그의 파란만장한 삶만큼이나 복잡했다.
7.1. 유해와 매장
체사레 보르자는 원래 스페인 북부 나바라의 비아나에 있는 산타 마리아 교회 제단에 나바라의 후안 3세 국왕이 지시하여 건설된 대리석 영묘에 묻혔다. 이 교회는 산티아고 순례길의 경유지 중 하나였다. 16세기 몬도녜도 주교 안토니오 데 게바라는 교회를 방문했을 때 무덤에 새겨진 비문을 기억에 의존하여 출판했다. 이 비문은 수년에 걸쳐 문구와 운율에 여러 변화를 겪었으며, 오늘날 가장 흔히 인용되는 버전은 18세기 사제이자 역사가인 프란시스코 데 알레손이 출판한 것이다.
{{Lang|es|Aquí yace en poca tierra | 여기 작은 흙 속에 잠든 이 |
보르자는 아라곤의 페르난도의 오랜 적이었고, 페르난도의 1512년 후안 3세와 나바라의 카테리나에 대한 침공을 위한 길을 닦은 백작과 싸우고 있었다. 정확한 상황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1523년에서 1608년 사이에 산타 마리아 교회가 개조 및 확장되는 동안 무덤은 파괴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칼라오라 이 라 칼사다-로그로뇨 교구의 한 주교가 "그 타락한 자"의 유해가 교회에 있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여겨, 기념비를 철거하고 보르자의 뼈를 교회 앞 거리 아래에 재매장하여 마을을 지나는 모든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도록 했다고 전해진다.
비센테 블라스코 이바녜스는 『비너스의 발치에서』에서 당시 산타 마리아 교회의 주교가 자신의 아버지가 알렉산데르 6세 아래에서 투옥된 후 사망했기 때문에 보르자를 교회에서 추방했다고 기록했다. 수년 동안 뼈가 사라졌다고 여겨졌지만, 사실 지역 전통은 그 위치를 상당히 정확하게 표시했으며, 보르자의 죽음과 유령에 대한 민속이 생겨났다. 뼈는 실제로 두 번 발굴되었고(1886년 첫 발굴에는 프랑스 역사가 샤를 이리아르테가 참여), 1945년에 두 번째로 발굴된 후 빅토리아노 후아리스티라는 외과 의사이자 보르자 애호가에 의해 상당히 긴 법의학적 조사를 받았다. 이 검사는 19세기에 수행된 예비 검사와 일치했으며, 뼈가 보르자의 것임을 증명하는 증거가 있었다.
체사레 보르자의 유해는 이후 산타 마리아 교회 바로 맞은편에 있는 비아나 시청으로 보내져 1953년까지 보관되었다. 그 후 유해는 산타 마리아 교회 바로 바깥에 다시 매장되었으며, 더 이상 거리 아래에 있어 밟힐 위험이 없게 되었다. 그 위에는 기념비가 세워졌는데, 이는 보르자가 교황군과 나바라군의 총사령관이었음을 선언하는 내용이었다. 1980년대 후반에 보르자를 다시 발굴하여 산타 마리아 교회 안으로 옮기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교황이나 추기경 직함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매장할 수 없다는 최근의 교회 규정으로 인해 이 제안은 최종적으로 거부되었다. 팜플로나 대주교 페르난도 세바스티안 아길라르가 50년 이상의 청원 끝에 2007년 3월 11일, 그의 사망 500주기 전날에 보르자의 유해를 교회 안으로 옮기는 것을 허락할 것이라는 보도가 있었으나, 대주교 대변인은 교회에서 그러한 관행을 승인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지역 교회는 "우리는 그의 유해 이장에 대해 아무런 반대도 하지 않는다. 그가 생전에 무엇을 했든, 이제는 용서받을 자격이 있다"고 말했다.
7.2. 역사적 평가
체사레 보르자는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극명하게 엇갈리는 평가를 받았다.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피렌체 공화국의 사절로서 체사레를 직접 만나 그의 행동을 면밀히 관찰했으며, 그를 크게 존경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체사레를 "고매한 정신과 광대한 목적을 품고 달성하기 위해 스스로의 행동을 제어했으며, 새로 군주가 된 자는 본받아야 할 인물"이라고 극찬했다. 그는 체사레가 "야만적인 잔혹 행위나 압제로부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신이 보낸 인물처럼 보였다"고까지 표현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 제17장에서 "체사레 보르자는 냉혹, 잔인하다 생각되었지만, 그 냉혹함에 의해 로마냐에 질서를 형성하고, 평화와 충성을 가져오게 되었다. 사랑과 공포를 겸비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지만, 사랑은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쉽게 깨지지만, 공포는 반드시 닥쳐올 처벌 때문에 깨지지 않는다"고 기록했다. 이러한 평가는 '마키아벨리즘'을 대표하는 문구로 여겨지며, 체사레 보르자가 마키아벨리즘을 구현한 인물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남겼다.
반면, 프란체스코 구이차르디니는 체사레를 "배신과 육욕, 터무니없는 잔혹함을 지닌 인물"로 묘사하면서도, 당시 피렌체의 혼란스러운 상황과 비교하여 "지배자로서 유능했으며, 병사들에게도 사랑받는 인물"이었다고 평가했다.
야코프 부르크하르트와 같은 19세기 역사가들은 체사레를 훨씬 더 비판적으로 보았다. 부르크하르트는 보르자 가문의 "비전의 독"이라 불린 칸타렐라 등을 통해 자신의 지위를 위협하는 정적이나 교회 관계자들을 차례로 숙청하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했다는 점(이는 과장되었을 가능성도 있다)과 "세니갈리아 사건"에서의 잔혹한 대응을 들어 체사레를 "대범죄자", "음모가", "피에 굶주려 만족할 줄 모르고, 사람을 파멸시키는 데 악마적인 기쁨을 느끼는 성격"이라고 혹평했다.
7.3. 비판과 논란
체사레 보르자의 삶은 그의 군사적, 정치적 업적만큼이나 잔혹성과 도덕적 논란으로 얼룩져 있다. 그를 둘러싼 주요 비판과 논란은 다음과 같다.
- 잔혹성**: 체사레는 자신의 권력을 확립하고 유지하기 위해 극단적인 잔혹성을 서슴지 않았다. 특히 1502년 세니갈리아에서 자신에게 반기를 들었던 용병대장들을 화해를 명분으로 유인하여 무자비하게 처형한 '세니갈리아 사건'은 그의 냉혹한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로 꼽힌다. 그는 또한 정복한 도시의 지도자들을 처형하거나 추방하여 자신의 지배를 공고히 했다.
- 형제 살해 의혹**: 1497년 그의 형 후안 보르자가 암살당했을 때, 체사레가 그 배후에 있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이는 후안의 죽음이 체사레가 성직자 경력을 포기하고 군사적 야망을 추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기 때문이다. 비록 명확한 증거는 없지만, 이 의혹은 그의 잔인한 이미지에 크게 기여했다.
- 독살 의혹**: 체사레와 그의 아버지 알렉산데르 6세는 정적들을 독살하여 재산을 몰수했다는 의혹에 시달렸다. 특히 '칸타렐라'라는 보르자 가문의 비전의 독이 사용되었다는 소문이 퍼졌다. 1503년 알렉산데르 6세의 죽음에 대해서도 말라리아 외에 독살설이 제기되었는데, 이는 교황과 체사레가 한 추기경의 독이 든 음식을 먹고 암살당했다는 이야기로 전해진다. 이러한 독살 의혹은 보르자 가문의 악명 높은 이미지를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 권력 지향적 태도**: 체사레의 모든 행동은 개인적인 권력과 가문의 영달을 위한 것이었다. 그는 교회의 고위직을 자신의 야망을 위한 발판으로 삼았으며, 군사적 성공 또한 이탈리아의 통일이나 백성의 복지보다는 자신의 국가를 건설하려는 목적에 집중되었다. 그의 통치가 일부 지역에 질서를 가져왔다는 평가도 있지만, 이는 강력한 무력과 냉혹한 통치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체사레의 이러한 행동들은 당시 이탈리아 사회 및 정치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의 잔혹한 방식은 다른 군주들에게 공포와 불신을 심어주었으며, 이탈리아 내 세력들 간의 불신과 분열을 심화시키는 데 일조했다. 그의 삶은 르네상스 시대의 정치적 혼란과 도덕적 타락을 상징하는 인물로 자주 언급된다.
8. 문화적 영향
체사레 보르자는 그의 파란만장한 삶과 논란이 많은 행적으로 인해 문학, 예술, 영화, 게임 등 다양한 매체에서 영감을 주며 묘사되고 해석되었다.
8.1. 문학, 예술 및 기타 매체에서의 묘사
- 문학:
- 마리오 푸조의 소설 『패밀리』에서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 알렉상드르 뒤마의 『몽테크리스토 백작』과 『보르자 가문』에서도 보르자 가문의 음모와 술수가 언급된다. 뒤마는 또한 자신의 저서 『유명한 범죄』에서 보르자 시대에 그려진 일부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들이 체사레 보르자를 모델로 삼았으며, 그 시대 이후의 예수 이미지에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 새뮤얼 셸러바거의 역사 소설 『여우의 왕자』와 이를 원작으로 한 1949년 영화에서 오슨 웰스가 체사레를 연기했다.
- 장 플레디의 『일곱 언덕의 마돈나』와 『루크레치아의 빛』, 그레고리 맥과이어의 『거울아 거울아』, 라파엘 사바티니의 『황소의 깃발』, 잔 칼로그리디스의 『보르자 신부』, 나이젤 발친의 『보르자 유언』, 마커스 반 헬러의 『보르자 가문의 욕망』, 세실리아 홀랜드의 『신의 도시, 보르자 소설』, 윌리엄 서머싯 몸의 『옛날과 지금』 등 수많은 소설에서 체사레 보르자가 다뤄졌다.
- 프리드리히 니체의 『안티크리스트』(1895), 『선악의 저편』(1886), 『우상의 황혼』(1889) 등 철학 작품에서도 언급된다.
- 테오도어 아도르노의 『미니마 모랄리아』(1951), 루이 알튀세르의 『만남의 철학』(2006), 막스 호르크하이머의 『이기주의와 자유 운동: 부르주아 시대의 인류학에 대하여』(1982) 등 철학 서적에서도 체사레가 논의되었다.
- 페르 라게르크비스트의 『난쟁이』(1944)는 보르자를 모델로 한 부도덕한 왕자 캐릭터를 묘사한다.
- 브라질 문학에서는 미겔 M. 아브라앙의 소설 『악마의 줄무늬』에서 체사레 보르자가 주요 인물 중 한 명으로 등장한다.
- 만화:
- 소료 후유미의 『체자레: 파괴의 창조자』는 15세부터의 그의 삶을 다룬 역사 만화이다. 2023년에는 뮤지컬로도 각색되어 초연되었다.
- 히구리 유의 『칸타렐라』는 초자연적 요소가 가미된 다크 판타지 역사 만화이다.
- 사이토 치호의 『화관의 마돈나』, 이토 유카리의 『블러디 M - 하얀 독약』, 카와하라 이즈미의 『바빌론까지 몇 마일?』, 호시노 유키노부의 『요녀전설 "보르자 가문의 독약"』 등 일본 만화에서도 체사레 보르자가 등장한다.
- 영화 및 TV 시리즈:
- 1949년 영화 『여우의 왕자』에서 오슨 웰스가 체사레를 연기했다.
- 1981년 BBC TV 시리즈 『보르자 가문』에서는 올리버 코튼이 체사레를 연기했다.
- 2011년 미국 TV 시리즈 『보르자 가문』에서는 프랑수아 아르노가 체사레를 연기했다.
- 2011년 유럽 TV 시리즈 『보르자』에서는 마크 라이더가 체사레를 연기했다.
- 2006년 영화 『로스 보르히아』, 2001년 영화 『독, 또는 독살의 세계사』 등에서도 체사레 보르자가 등장한다.
- 1926년 무성 영화 『루크레치아 보르자』와 1935년 『루크레치아 보르자』도 있다.
- 『호러블 히스토리즈』 시즌 4에서는 보르자 가문의 삶을 다룬 아담스 패밀리 패러디에서 매튜 베인턴이 체사레 보르자를 연기했다.
- 비디오 게임:
- 2010년 비디오 게임 『어쌔신 크리드: 브라더후드』의 주요 적대자로 등장하며, 안드레아스 아페르기스가 목소리를 연기했다.
- 음악:
- 하츠네 미쿠와 KAITO의 노래 "칸타렐라"는 체사레 보르자와 그의 누이 루크레치아 보르자를 기반으로 한다.
- 무대:
- 다카라즈카 가극단의 『체사레 보르자 -야망의 궤적-』이 공연되었다.
- 예술:
- 존 콜리어의 1893년 작품 체사레 보르자와 와인 한 잔은 보르자 가문의 배신적인 성격을 표현한다.
9. 관련 항목
- 보르자 가문
- 교황 알렉산데르 6세
- 루크레치아 보르자
- 이탈리아 전쟁
- 마키아벨리즘
- 연고주의
- 칸타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