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찰스 푸어 킨들버거는 Charles Poor Kindleberger영어, 1910년 10월 12일 뉴욕시에서 태어나 2003년 7월 7일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에서 사망한 미국의 저명한 경제사학자이자 경제학자이다. 그는 30권이 넘는 책을 저술하며 국제 경제학 및 금융 위기 분야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특히 1978년 출간된 투기적 주식 시장 버블에 관한 저서 『광기, 패닉, 붕괴』는 닷컴 버블 이후 2000년에 재출간되며 다시금 주목받았다. 킨들버거는 국제 통화 시스템의 안정을 위해서는 패권국의 역할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하는 패권 안정론을 발전시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독특한 서술적, 역사적 연구 방법론은 경제학계에 신선한 시각을 제시했으며, 이코노미스트지는 그를 금융 위기 분석에 있어 "장르의 대가"라고 평가했다. 킨들버거의 업적은 특히 대공황과 같은 거대한 경제 위기의 원인을 분석하고, 국제적인 협력과 안정화 장치의 필요성을 강조함으로써, 시장의 자율성에만 의존하기보다는 정부와 국제 기구의 적극적인 역할을 옹호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2. 생애 초기 및 교육
킨들버거의 개인적인 배경과 학업 과정은 그의 독특한 연구 접근 방식과 세계관 형성에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2.1. 출생 및 배경
찰스 푸어 킨들버거는 1910년 10월 12일 뉴욕시에서 태어났다. 그는 새라 마일스 킨들버거와 59년간 결혼 생활을 유지하며 슬하에 찰스 P. 킨들버거 3세, 리처드 S. 킨들버거(보스턴 글로브 기자), 새라 킨들버거, E. 랜들 킨들버거 등 네 명의 자녀를 두었다.
2.2. 학력
킨들버거는 1928년 켄트 스쿨을 졸업했다. 이후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 진학하여 1932년에 학사 학위(BA)를 취득했다. 그는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1934년에 석사 학위(MA)를, 1937년에 박사 학위(PhD)를 받았다. 1931년 여름, 그는 유럽을 여행하며 살바도르 데 마다리아가가 주최하는 세미나에 참석했다. 마다리아가가 미국 주재 스페인 대사로 임명되자, 킨들버거는 제네바의 국제관계대학원에서 앨프레드 지머른 경의 강의를 들었다.
3. 경력
킨들버거는 학계와 공직을 넘나들며 다양한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의 경력은 특히 국제 경제학과 금융 분야에서 깊은 통찰력을 제공했다.
3.1. 공직 활동
킨들버거는 학위 논문을 작성하는 동안 미국 재무부 국제부서에서 해리 덱스터 화이트의 지휘 아래 임시직으로 근무했다. 이후 뉴욕 연방준비은행에서 1936년부터 1939년까지 전임으로 일했으며, 스위스의 국제결제은행(BIS)에서 1939년부터 1940년까지, 그리고 연방준비제도 이사회에서 1940년부터 1942년까지 근무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전략사무국(OSS)에서 복무했다. 1945년부터 1947년까지는 미국 국무부 독일 및 오스트리아 경제 담당 국장을 역임했다. 또한 1945년부터 1947년까지 국무부 경제 안보 정책실 임시 국장을 지냈으며, 1947년부터 1948년까지는 잠시 유럽 부흥 계획(마셜 플랜)의 고문으로 활동했다.
3.1.1. 마셜 플랜 기여
킨들버거는 마셜 플랜의 주요 설계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1973년 인터뷰에서 마셜 플랜을 개발하고 시작하기 위한 밤샘 작업을 "엄청난 흥분의 감각"으로 회고했다. 그는 당시 조지 마셜 장군을 "위대하고, 특이하지만 위대한 도덕적 품성을 지닌 올림푸스 신과 같았다"고 묘사했다. 이 시기, 마셜 플랜 작업을 위해 펜타곤의 컴퓨터를 밤에 사용했는데, 이는 경제학 분야에서 컴퓨터를 사용한 최초의 사례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이 작업에 매진하면서 "엄청난 만족감"을 느꼈다고 밝혔다.
3.1.2. 해리 덱스터 화이트 사건
킨들버거는 1950년대의 반공주의 조사 대상에서는 제외되었지만, 이후 해리 덱스터 화이트와의 인연이 자신에게 많은 문제를 야기했다고 회고했다. 화이트가 곤경에 처하면서 그와 연관된 사람들도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는 것이다. 킨들버거의 회고에 따르면, 연방수사국(FBI)은 그의 전화 통화를 도청했으며, 국무부 근무 중 그가 한 말에 대한 가십과 왜곡된 정보를 조지 소콜스키와 같은 칼럼니스트들에게 흘렸다. 이는 J. 에드거 후버가 직접 제공한 가십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경험은 킨들버거가 정부 기관의 정치적 역학과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이해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3.2. 학계 활동
1948년 이후 킨들버거는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MIT)의 국제 경제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그는 1976년 전임 교수직에서 은퇴했으나, 1981년 완전히 은퇴하기 전까지는 선임 강사로 계속 강의를 이어갔다. 그는 MIT에서 포드 국제 경제학 교수(Ford International Professor of Economics) 직책을 맡았다. 또한 미국 외교협회(Council on Foreign Relations)의 작업 그룹에도 참여했다. 1981년에는 버몬트주의 미들베리 칼리지에서 객원 교수를 역임했으며, 1984년에는 미국 경제학회 회장을 맡기도 했다.
3.3. 기타 전문 경력
킨들버거는 학계와 공직 외에도 다양한 기관에서 전문적인 경험을 쌓았다. 그의 경력에는 뉴욕의 연방준비은행, 국제결제은행, 그리고 미국 국무부에서의 실무 경험이 포함된다. 이러한 실무 경험은 그의 이론적 연구에 현실적인 기반을 제공하는 데 기여했다.
4. 주요 경제 이론 및 저술
킨들버거는 복잡한 경제 현상을 이해하기 위한 독특한 접근 방식을 제시했으며, 특히 국제 금융 시스템과 금융 위기 분석에 있어 혁신적인 기여를 했다.
4.1. 연구 방법론 및 특징
경제사학자로서 킨들버거는 수학적 모델에 의존하기보다는 서술적인 접근 방식을 사용했다. 그는 자신의 저서 『대공황 1929-1939』의 서문에서 "이것은 표나 그래프 없이 단순히 설명된 이야기이다"라고 언급하며 자신의 연구 방식이 이론의 증명보다는 사료의 검증을 통해 결론을 도출하는 데 중점을 두었음을 강조했다. 그는 흥미로운 사례를 수집하고 검증하며 분류하는 작업을 중요하게 여겨, 마치 자연과학자처럼 연구에 몰두했다고 평가받는다. 경제학자 로버트 솔로는 킨들버거의 연구를 비글호를 타고 항해했던 찰스 다윈에 비유하기도 했다.
4.2. 패권 안정론
킨들버거는 1973년과 1986년에 출간된 저서 『대공황 1929-1939』에서 대공황의 원인과 성격에 대한 특이한 국제주의적 견해를 제시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세계 경제가 안정되기 위해서는 패권국이 필요하다는 패권 안정론을 발전시켰다. 킨들버거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영국이 더 이상 국제 경제의 리더 역할을 수행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미국이 세계 경제의 리더십을 넘겨받는 데 주저했기 때문에 대공황의 기간이 길어지고 깊어졌다고 보았다. 그는 "세계 경제가 안정되려면 안정자, 즉 하나의 안정자가 있어야 한다"고 결론 내리며, 특히 전간기의 맥락에서 이 안정자가 미국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킨들버거는 세계 경제를 안정화하기 위해 미국이 수행해야 할 다섯 가지 책임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 긴급 판매 상품에 대한 상대적으로 개방된 시장 유지
- 경기 대응적이거나 적어도 안정적인 장기 대출 제공
- 환율의 상대적 안정성 유지 및 관리
- 국가들의 거시 경제 정책 조정 보장
- 금융 위기 시 최종 대부자 역할 수행을 통한 유동성 공급
킨들버거는 밀턴 프리드먼과 애나 슈워츠의 통화주의적 대공황 원인론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보였다. 그는 통화주의적 관점이 너무 좁고 교조적일 수 있다고 보았으며, 폴 새뮤얼슨의 "우연한" 또는 "요행적인" 해석을 즉시 일축했다.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는 『대공황 속의 세계』를 "이 주제에 관한 최고의 책"이라고 극찬했다. 킨들버거는 국제 기관의 주요 문제는 공공재 제공에서 국가들이 무임승차하려는 유인이 있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맨슈어 올슨의 이론을 따라, 킨들버거는 무임승차 문제의 해결책은 협력 비용을 기꺼이 단독으로 부담할 만큼 충분히 큰 행위자(패권국)가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4.3. 금융 위기 분석
킨들버거의 저서 『광기, 패닉, 붕괴: 금융 위기의 역사』는 오늘날까지도 미국의 MBA 프로그램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다. 그는 버블 경제에 대해 몇 가지 명확한 패턴을 제시했다. 첫째, 자산 가격 버블은 신용 팽창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소득 증가 전망이 없는 차입자에게 대출 기관이 적극적으로 자금을 지원하는 패턴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둘째, 자산 가격 버블에는 간과된 위험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대출 기관들은 새로운 채무 상품이 안전하다고 믿으며, 이러한 안전해 보이는 채무가 버블을 증폭시킨다.
킨들버거는 만년에 부동산 시장에 주목했다. 2002년 월스트리트 저널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은행들이 주택 담보 대출을 일제히 판매하려 하는 것이 위험한 징후라고 언급했다. 그가 2003년에 사망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발생하며 그의 통찰력이 입증되었다.
4.4. 기타 경제 이론 및 개념
킨들버거의 관심사는 국제 경제학뿐 아니라 경제사 전반에 걸쳐 있었다. 그의 저서 『유럽의 전후 성장: 노동 공급의 역할』(1967)에서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후 수년간 서유럽의 폭발적인 성장이 옛 동독, 튀르키예, 유고슬라비아, 스페인, 알제리 출신 외국인 노동자 없이는 독일과 프랑스의 경제적 기적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국제 통화의 혜택에 대해서도 깊이 있게 다루었다. 1953년에 출간된 『국제 경제학』은 E. 데스프레스와 W.S. 샐런트 등 새로운 공동 저자들과 함께 현재까지도 꾸준히 판매되고 있다.
5. 주요 저서 및 출판물
킨들버거는 생전에 30권 이상의 책을 저술했으며, 그의 저술은 국제 경제학, 금융 역사, 경제사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중요한 기여를 했다。다음은 그의 주요 저서 목록이다.
- 『국제 단기 자본 이동』(International Short-term Capital Movements영어, 1937년)
- 『국제 경제학』(International Economics영어, 1953년)
- 『경제 발전』(Economic Development영어, 1958년)
- 『대외 무역과 국민 경제』(Foreign Trade and the National Economy영어, 1962년)
- 『유럽과 달러』(Europa and the Dollar영어, 1966년)
- 『유럽의 전후 성장: 노동 공급의 역할』(Europe's Postwar Growth. The Role of Labor Supply영어, 1967년)
- 『해외의 미국 기업』(American Business Abroad영어, 1969년)
- 『국제 통화의 혜택』(The Benefits of International Money영어, 1972년)
- 『대공황: 1929-1939』(The World in Depression: 1929-1939영어, 1973년, 1986년 증보판)
- 『광기, 패닉, 붕괴: 금융 위기의 역사』(Manias, Panics, and Crashes: A History of Financial Crises영어, 1978년)
- 『서유럽 금융사』(A Financial History of Western Europe영어, 1984년)
- 『역사 경제학 - 예술인가 과학인가?』(Historical Economics - Art or Science?영어, 1990년)
- 『세계 경제적 우위: 1500-1990』(World Economic Primacy: 1500 - 1990영어, 1996년)
- 『중앙 집중 대 다원주의』(Centralization versus Pluralism영어, 1996년)
- 『경제 법칙과 경제사』(Economic Laws and Economic History영어, 1997년)
6. 개인 생활 및 사망
킨들버거의 개인 생활은 그의 학자적 면모와 더불어 안정적인 가족 관계를 보여주며, 그의 삶의 마지막 순간은 왕성한 연구 활동의 끝을 알렸다.
6.1. 개인 생활
킨들버거는 새라 마일스 킨들버거와 59년간 결혼 생활을 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찰스 P. 킨들버거 3세, 리처드 S. 킨들버거, 새라 킨들버거, E. 랜들 킨들버거 등 네 명의 자녀가 있었다.
6.2. 사망
킨들버거는 2003년 7월 7일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에서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향년 92세였다.
7. 수상 및 영예
찰스 푸어 킨들버거는 그의 뛰어난 학문적 업적과 공직 기여를 인정받아 다양한 상과 명예를 수상했다.
- 1944년: 동성훈장 (Bronze Star)
- 1945년: 공로훈장 (Legion of Merit)
- 1954년: 미국 예술 과학 아카데미 회원 선출
- 1966년: 파리 대학교 명예 박사 학위 (Dr. h.c.)
- 1977년: 헨트 대학교 명예 박사 학위 (Dr. h.c.)
- 1978년: 킬 세계 경제 연구소 하름스 상 (Harms Prize)
- 1984년: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명예 이학 박사 학위 (Dr. Sci. h.c.)
- 1987년: 미국 철학회 회원 선출
- 1989년: 조지타운 대학교 200주년 기념 메달 (Bicentennial Medal)
8. 유산 및 평가
킨들버거의 업적은 경제학계와 국제 정책 수립에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오늘날에도 그의 이론과 통찰력은 다양한 관점에서 평가되고 있다.
8.1. 긍정적 평가
킨들버거는 그의 저서 『대공황 1929-1939』로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로부터 "이 주제에 관한 최고의 책"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그의 저술은 뛰어난 문체뿐만 아니라 고상함과 매력을 지닌 것으로 평가받았다. 이는 그가 복잡한 경제학적 개념을 명확하고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능력을 지녔음을 보여준다. 그의 독특한 연구 방법론, 즉 수학적 모델보다는 서술적이고 역사적인 접근 방식은 경제 현상을 다층적으로 이해하는 데 기여했으며, 특히 금융 위기 분석에서의 선견지명은 그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로 꼽힌다.
8.2. 비판 및 논란
킨들버거는 미국 재무부에서 해리 덱스터 화이트 밑에서 일했던 경력 때문에 후일 상당한 곤란을 겪었다. 화이트가 공산주의자로 지목되면서 그와 연관된 사람들도 문제에 휘말렸기 때문이다. 연방수사국(FBI)은 킨들버거의 전화 통화를 도청했고, J. 에드거 후버는 그에 대한 가십과 잘못된 정보를 칼럼니스트들에게 흘렸다. 비록 그 자신이 1950년대의 반공주의 조사 대상에서 벗어났지만, 이러한 경험은 그에게 정부 기관의 정치적 간섭에 대한 깊은 인상을 남겼다. 또한 킨들버거는 밀턴 프리드먼과 애나 슈워츠의 통화주의적 대공황 원인론에 대해 매우 회의적이었다. 그는 이를 너무 협소하고 교조적이며 어쩌면 폴 새뮤얼슨의 "우연한" 해석에 불과하다고 일축하는 등, 주류 경제학 이론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유지했다.
8.3. 영향과 파급력
킨들버거의 저서 『광기, 패닉, 붕괴: 금융 위기의 역사』는 오늘날까지도 미국 경영전문대학원의 MBA 과정에서 널리 사용되며, 금융 위기 분석의 고전으로 자리 잡고 있다. 특히 2002년 월스트리트 저널 인터뷰에서 그가 은행들이 주택 담보 대출을 적극적으로 판매하는 것이 위험한 징후라고 경고했던 점은, 그가 사망한 직후 발생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와 글로벌 금융 위기를 예견한 것으로 평가되며 그의 통찰력이 얼마나 깊었는지 보여준다. 그의 패권 안정론은 국제 관계학과 국제 정치 경제학 분야에서 중요한 이론적 기반을 제공했으며, 국제 경제 시스템의 안정성에 대한 논의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킨들버거의 연구는 단순한 이론을 넘어 역사적 맥락과 실증적 증거를 중시함으로써 경제 현상을 이해하는 데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9. 같이 보기
- 패권 안정론
- 마셜 플랜
- 대공황
- 금융 위기
- 해리 덱스터 화이트
-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