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찰스 바너드 그로브스는 1915년 런던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음악에 대한 깊은 열정을 키웠고, 평생에 걸쳐 영국의 주요 지휘자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했다.
1.1. 유년기 및 교육
그로브스는 1915년 3월 10일 런던에서 프레데릭 그로브스와 애니(화이트헤드)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1921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입은 부상으로 아버지를 여의고, 4년 뒤 어머니마저 사망하면서 열 살의 나이에 고아가 되었다. 음악은 그에게 큰 위안이 되었으며, 그는 세인트 폴 대성당 학교에 입학하여 성가대에서 노래를 불렀고 13세부터 피아노와 오르간을 공부했다. 현재 세인트 폴 대성당 학교에는 그를 기리는 건물이 있다. 1930년부터 1932년까지 켄트주의 서턴 발렌스 학교에서 수학했으며, 이 학교에도 그를 기념하는 그로브스 홀이 있다. 서턴 발렌스 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왕립 음악 대학에 진학했다. 왕립 음악 대학에서는 리트와 반주를 주로 공부했지만, 학생 오페라 제작에 음악 코치로 참여하며 경험을 쌓았다. 그는 탁월한 유창성과 거의 모든 악보를 초견으로 읽는 능력을 타고났으나, 훗날 피아노 공부에 게을리했음을 고백하며 콘서트 피아니스트의 꿈을 포기했다. 그는 랄프 본 윌리엄스의 《휴 더 드로버》와 프레더릭 딜리어스의 《어느 마을의 로미오와 줄리엣》 공연에서 토머스 비첨이 객원 지휘할 때 타악기 연주자로 참여하기도 했다. 그로브스는 지휘 수업도 들었으나, 세 번째 오케스트라 이상으로 진전하지는 못했다. 1937년, 아직 학생 신분이었을 때 그는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의 지휘 아래 요하네스 브람스의 《독일 레퀴엠》, 주세페 베르디의 《레퀴엠》,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미사 솔렘니스》 합창 리허설의 반주를 맡았다.
1.2. 초기 경력
그로브스는 BBC에서의 활동을 포함하여 프리랜서 반주자로 전문 경력을 시작했다. 1938년, 그는 스탠포드 로빈슨이 이끄는 BBC 음악 프로덕션 유닛의 합창 지휘자로 임명되어 방송 오페라 제작에 참여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그로브스는 런던에서 소개(疎開)된 BBC의 상주 합창 지휘자로 이브셤과 나중에 베드퍼드로 파견되었다. 1943년에는 주로 경음악을 연주하는 BBC 레뷰 오케스트라를 지휘할 것을 요청받았다. 이 시기 그로브스는 거트루드 로렌스가 주연한 쿠르트 바일의 《레이디 인 더 다크》를 지휘했다.
1.3. 주요 지휘 활동
그로브스는 생애 동안 여러 중요한 지휘자 직책을 맡으며 영국 음악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3.1. BBC 및 본머스 심포니 오케스트라
그로브스는 1944년부터 1951년까지 맨체스터에 위치한 BBC 필하모닉의 전신인 BBC 노던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 활동하며 매주 여러 스튜디오 콘서트를 지휘했고, 이를 통해 예외적으로 방대한 레퍼토리를 습득했다. 맨체스터에 머무는 동안 그는 BBC 동료 힐러리 바처드를 만났고, 1948년 그녀와 결혼했다. 스튜디오 기반의 작업에서 벗어날 필요성을 느낀 그로브스는 1951년부터 1961년까지 본머스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직을 수락했으며, 매년 약 150회의 공연을 지휘했다. 재정적 어려움으로 본머스와 버밍엄 시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합병 제안이 나왔을 때, 그로브스는 본머스 오케스트라가 새로운 웨일스 국립 오페라의 상주 오케스트라 역할을 추가로 맡는 대안을 지지했다. 그는 1961년부터 1963년까지 웨일스 국립 오페라의 음악 감독을 역임하며 회사의 합창 및 오케스트라 전통을 확립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 시기 그는 당시 거의 공연되지 않던 주세페 베르디의 《롬바르디아인》과 《시칠리아의 저녁 기도》 등 여러 작품을 지휘했으며, 이들 공연은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으며 런던에서도 공연되었다.
1.3.2. 웨일스 국립 오페라 및 로열 리버풀 필하모닉
그로브스는 1963년부터 1977년까지 로열 리버풀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 및 수석 지휘자로 재임하며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는 자신이 말했듯이 "요한 수난곡부터 올리비에 메시앙과 카를하인츠 슈토크하우젠에 이르는 모든 작품"을 지휘했다. 그는 매년 9개월을 로열 리버풀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하며 오케스트라의 연주 수준을 크게 향상시켰다. 나머지 3개월 동안은 런던과 해외에서 객원 지휘자로 활동했다. 그는 1966년과 1968년 독일과 스위스, 1970년 폴란드에서 로열 리버풀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찬사를 받은 투어를 이끌었다. 리버풀 재직 기간 동안 그로브스는 젊은 지휘자들을 위한 일련의 세미나를 개최했으며, 이 세미나에서 초기에 모습을 드러낸 지휘자로는 앤드루 데이비스, 마크 엘더, 존 엘리엇 가디너, 제임스 저드, 배리 워즈워스 등이 있다. 한 세미나에서 그로브스는 오케스트라에 추가 타악기 연주자로 참여하고 있던 십대인 사이먼 래틀을 언급하기도 했다.
1.3.3. 이후 활동 및 국제 무대
1967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그로브스는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부지휘자로 활동하며 미국 투어를 이끌었다. 1970년대에는 프롬스의 '마지막 밤' 정기 지휘자 중 한 명이었다(다른 지휘자로는 노먼 델 마르와 제임스 로플런이 있었다).
그로브스는 1978년부터 1979년까지 잉글리시 내셔널 오페라의 음악 감독을 역임했으나, 카를 마리아 폰 베버의 《에우리안테》의 호평받은 복원 공연에도 불구하고 이 임명은 성공적이지 못했고, 그는 이듬해 직책을 내려놓았다. 그는 행정 업무와 지휘를 병행하는 것이 너무 스트레스가 많다고 느꼈다. 그로브스는 또한 영국 국립 청소년 오케스트라의 회장(1977년~1992년)을 역임했으며, 특히 경력의 마지막 10년 동안에는 전 세계 수많은 오케스트라의 객원 지휘자로 활동했다. 1984년에는 잉글리시 신포니아의 회장 겸 예술 고문으로 합류했으며, 나중에 길퍼드 필하모닉의 수석 지휘자(1987년)와 리즈 필하모닉 소사이어티의 음악 감독(1988년)도 역임했다.
2. 음악적 지향 및 레퍼토리
찰스 그로브스는 폭넓은 음악적 스펙트럼과 현대 음악에 대한 옹호자로서의 확고한 지휘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2.1. 지휘 철학
그로브스는 대규모 작품을 확신 있게 지휘하는 능력으로 특히 유명했으며, 구스타프 말러의 모든 교향곡을 영국에서 처음으로 완벽하게 지휘한 지휘자이기도 했다。 그는 또한 현대 작곡가들을 격려하는 것으로 유명했으며, 자주 그들의 작품을 자신의 프로그램에 포함시켰다. 그로브스는 특정 하위 장르에 집중하는 것을 거부하고 폭넓은 레퍼토리를 지휘했다. 그는 "나는 컨설턴트라기보다는 종합 의사(GP)와 같은 느낌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특히 영국 작곡가들의 옹호자로 알려졌으며, 해외 투어 시에는 항상 영국 작품을 프로그램에 포함시켰다.
2.2. 주요 레퍼토리 및 초연
그의 방대한 영국 레퍼토리에는 맬컴 아놀드, 아서 블리스, 하버갈 브라이언, 프랭크 브리지, 벤저민 브리튼, 조지 버터워스, 에릭 코츠, 프레더릭 딜리어스, 에드워드 엘가, 알렉산더 죄르, 알룬 호디노트, 구스타프 홀스트, 조지 로이드, 윌리엄 마티아스, 마이클 티펫, 시아 머스그레이브, 피터 맥스웰 데이비스, 아서 설리번, 랄프 본 윌리엄스, 윌리엄 월튼 등의 작품이 포함되어 있다.
그로브스는 오케스트라의 레퍼토리에 모험적인 신작들을 추가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작곡가 올리버 크누센은 "그는 연주자들의 존경과 연주자들의 애정을 얻어냈다. 그는 현대 음악에 대해 모범적인 태도와 실적을 가지고 있었다. 초연뿐만 아니라 두 번째 공연을 선보이는 그의 정책은 이타적이고 이상적이었다"고 말했다. 그로브스가 초연했던 작품으로는 레녹스 버클리, 데이비드 블레이크, 저스틴 코놀리, 아놀드 쿡, 고든 크로스, 조너선 하비, 로빈 홀로웨이, 대니얼 존스, 존 매케이브, 프리아우크 레이니어, 에드윈 록스버그, 에드먼드 루브라, 자일스 스웨인, 휴 우드 등의 작품이 있다.
3. 수상 및 영예
그로브스는 그의 음악적 업적으로 수많은 영예를 안았다. 그는 1958년 대영 제국 훈장 장교장(OBE)에, 1968년에는 사령관장(CBE)에 임명되었고, 1973년에는 기사작위를 받았다. 그는 4개의 대학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76년에는 런던 시의 명예 시민이 되었고, 1990년에는 로열 필하모닉 소사이어티의 명예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왕립 북방 음악 대학의 동료(1973년부터 1990년까지 이 대학의 이사회를 의장했으며, 이 대학에도 그를 기리는 건물이 있다)이자 왕립 음악 대학, 길드홀 음악 연극 학교, 트리니티 음악 대학, 런던 음악 대학의 특별 연구원으로 임명되었고, 왕립 음악원의 명예 회원이기도 했다. "음악을 만드는 찰스 그로브스 경 상"은 그의 이름을 따서 제정된 전국적인 상으로, 영국 음악에 뛰어난 공헌을 한 개인이나 단체에게 수여된다. 피터 맥스웰 데이비스는 그로브스를 기리는 추모곡으로 《찰스 경: 그의 파반》을 작곡했다.
4. 사생활

콘서트 홀 밖에서 그로브스는 영국 문학의 감식가였으며 열렬한 스포츠 팬이기도 했다. 젊었을 때 그는 스스로를 겸손하게 표현하며 "와스프스 F팀"에서 럭비를 했고, 크리켓 선수로서는 "약삭빠른 느린 투수"였다고 한다. 찰스와 힐러리 그로브스 부부는 샐리, 메리, 조너선 세 자녀를 두었으며, 이 중 첫째와 막내는 음악계에 종사했다.
5. 사망
찰스 그로브스는 1992년 초 심장마비를 겪었고, 4개월 후인 1992년 6월 20일 77세의 나이로 런던에서 사망했다. 그의 추모 돌은 세인트 폴 대성당에 놓여졌다.
6. 음반 목록
찰스 그로브스는 레코드 회사들이 그를 영국 음악 전문가로 여겼음에도 불구하고, 독일, 프랑스, 러시아 음악을 포함한 다양한 음반을 녹음했다.
- 루트비히 판 베토벤: 《교향곡 4번》, 《교향곡 6번》
- 가브리엘 포레: 《마스크와 베르가마스크》, 《파반》
- 요제프 하이든: 《교향곡 92번 (옥스퍼드)》, 《교향곡 104번 (런던)》
- 모리스 라벨: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
- 에리크 사티: 《짐노페디》
- 표트르 차이콥스키: 《로코코 주제에 의한 변주곡》 (첼로 폴 토르틀리에 협연)
- 안토닌 드보르자크: 《교향곡 6번》
- 장 시벨리우스: 《템페스트 부수 음악》
그로브스가 녹음한 영국 음악은 다음과 같다.
- 맬컴 아놀드: 《교향곡 2번》
- 아서 블리스: 《색채 교향곡》, 《모닝 히어로즈》
- 하버갈 브라이언: 교향곡 8번 및 9번
- 프랭크 브리지: 《봄의 시작》, 《바다》, 《여름》
- 벤저민 브리튼: 《프랭크 브리지 주제에 의한 변주곡》
- 조지 버터워스: 《초원 은행》
- 프레더릭 딜리어스: 《코앙가》, 《삶의 미사》, 《첫 뻐꾸기 소리를 듣고》
- 에드워드 엘가: 《카락타쿠스》, 첼로 협주곡 (첼로 폴 토르틀리에 협연), 《아침의 노래》, 《밤의 노래》, 《인도 왕관 모음곡》, 《수수께끼 변주곡》, 《생명의 빛》, 《어린이 모음곡》, 현악 세레나데, 《세번 모음곡》, 바이올린 협주곡 (바이올린 휴 빈 협연)
- 구스타프 홀스트: 《합창 교향곡》, 《행성》, 《세인트 폴 모음곡》
- 아서 설리번: 《무곡 서곡》, 《사보이 오페라 서곡들》, 《E장조 교향곡 (아일랜드)》
- 마이클 티펫: 《코렐리 주제에 의한 환상 협주곡》
- 랄프 본 윌리엄스: 《토마스 탈리스 주제에 의한 환상곡》, 《휴 더 드로버》
- 윌리엄 월튼: 《부를레스크 기상곡》, 《임관식 행진곡》, 《햄릿 장례 행진곡》, 《요하네스버그 축제 서곡》, 《보주와 왕홀》, 《리처드 3세 전주곡 및 모음곡》, 《스카피노》, 《스핏파이어 전주곡 및 푸가》
- 피터 워록: 《카프리올 모음곡》
7. 영향 및 평가
찰스 그로브스는 젊은 음악가들을 격려하고 새로운 음악적 시도에 개방적이었던 그의 접근 방식으로 영국 음악계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7.1. 긍정적 평가 및 기여
그로브스는 젊은 지휘자들을 양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가 리버풀에서 개최한 젊은 지휘자 세미나에서는 훗날 저명한 지휘자가 된 여러 인물들이 초기 경력을 시작했다. 또한 그는 현대 작곡가들의 옹호자로서 그들의 작품을 오케스트라 프로그램에 적극적으로 포함시켰다. 작곡가 올리버 크누센은 그로브스가 "연주자들의 존경과 애정을 얻어냈으며, 현대 음악에 대한 모범적인 태도와 실적을 가졌다. 초연뿐만 아니라 두 번째 공연까지 선보이는 그의 정책은 이타적이고 이상적이었다"고 평가하며 그의 공헌을 높이 샀다. 그는 대규모 작품에 대한 확실한 지휘 능력과 더불어 광범위한 레퍼토리를 소화하는 '종합 의사' 같은 면모를 보여주며 다양한 청중에게 클래식 음악을 소개하는 데 힘썼다.
7.2. 비판 및 논란
그로브스는 1978년부터 1979년까지 잉글리시 내셔널 오페라의 음악 감독으로 재임했으나, 행정 업무와 지휘를 병행하는 데서 오는 스트레스로 인해 이 직책이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이듬해 사임했다. 이는 그의 경력에서 드물게 비판적인 시각을 받은 부분으로, 그가 지휘자로서의 역할에 더 집중하기를 선호했음을 시사한다.
8. 기념 및 추모
찰스 그로브스를 기리기 위한 다양한 추모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왕립 북방 음악 대학에는 그의 이름을 딴 건물이 있으며, "음악을 만드는 찰스 그로브스 경 상"은 영국 음악에 뛰어난 공헌을 한 개인이나 단체에게 수여되는 상이다. 작곡가 피터 맥스웰 데이비스는 그로브스를 추모하며 《찰스 경: 그의 파반》을 작곡했다.
9. 함께 보기
- 지휘자
- 영국 음악
- 클래식 음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