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와 군 복무 시작
라파예트는 1757년 9월 6일 프랑스 중남부의 오베르뉴 지방(현재 오트루아르 주) 샤바니악에 위치한 샤바니악 성에서 미셸 루이 크리스토프 로슈 질베르 폴레트 뒤 모티에 드 라파예트 후작과 마리 루이즈 졸리 드 라 리비에르 사이에서 태어났다.
1.1. 가계와 유년기
라파예트 가문은 오베르뉴, 나아가 프랑스 전체에서도 가장 오래되고 명망 있는 가문 중 하나였다. 라파예트 가문의 남성들은 용기와 기사도 정신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라파예트의 먼 조상인 질베르 모티에 드 라파예트 3세는 1429년 오를레앙 포위전에서 잔 다르크 군대의 전우로 프랑스 원수를 지냈다. 또 다른 조상은 제6차 십자군 원정 중 가시 면류관을 획득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외가 쪽 조상들도 주목할 만하다. 그의 증조부(어머니의 외할아버지)인 라 리비에르 백작은 1770년 사망할 때까지 루이 15세의 개인 기병 호위대인 '검은 총사대', 즉 총사대의 사령관을 지냈다。 라파예트의 부계 삼촌 자크 로슈는 1734년 1월 18일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 중 밀라노에서 오스트리아군과 전투 중 사망했으며, 그의 죽음으로 후작 작위는 동생인 미셸에게 넘어갔다.
라파예트의 아버지 미셸 또한 전장에서 사망했다. 1759년 8월 1일, 미셸 드 라파예트는 베스트팔렌의 민덴 전투에서 영국-독일 연합군과 싸우다 포탄에 맞아 전사했다. 이로써 라파예트는 샤바니악의 후작이자 영주가 되었으나, 영지는 어머니에게 돌아갔다. 남편의 죽음으로 황폐해진 어머니는 아버지와 할아버지와 함께 파리로 이주했고, 라파예트는 샤바니악 성을 가문으로 가져온 할머니 샤바니악 부인(Mme de Chavaniac)에 의해 샤바니악에서 자랐다.
1768년, 11세가 된 라파예트는 어머니와 증조부와 함께 룩셈부르크궁에 있는 백작의 저택에서 살기 위해 파리로 소환되었다. 그는 파리 대학교의 일부인 플레시 학원에 입학했으며, 가문의 군사적 전통을 이어가기로 결정했다. 증조부인 백작은 라파예트를 미래의 총사대원으로 훈련시키는 프로그램에 등록시켰다. 라파예트의 어머니와 할아버지는 각각 1770년 4월 3일과 24일에 사망하여, 라파예트에게 2.50 만 FRF의 수입을 남겼다. 삼촌의 죽음으로 12세의 라파예트는 연간 12.00 만 FRF의 수입을 상속받게 되었다. 이로써 라파예트는 브르타뉴, 오베르뉴, 투렌 등지에 영지를 소유한 대영주가 되었다.
1.2. 초기 교육과 군 경력
1771년 5월, 14세가 되기 전 라파예트는 총사대 소위로 임관했다. 그의 임무는 군사 퍼레이드에 참여하고 루이 국왕에게 경의를 표하는 등 대부분 의례적인 것이었으며, 그는 평소처럼 학업을 계속했다.
이 시기 노아이유 공작 장폴 프랑수아 드 노아이유는 다섯 딸 중 몇 명을 결혼시키려 했다. 14세의 어린 라파예트는 12세의 딸 마리 아드리엔 프랑수아즈와 잘 어울리는 상대로 보였고, 공작은 라파예트의 후견인(새로운 백작 작위를 받은 라파예트의 삼촌)과 협상했다. 그러나 공작의 아내 앙리에트 안 루이즈 다게소는 부부, 특히 딸이 너무 어리다고 생각하여 혼사에 반대했다. 이 문제는 2년 동안 결혼 계획을 언급하지 않고, 그동안 두 예비 배우자가 가끔 캐주얼한 환경에서 만나 서로를 알아가도록 합의하면서 해결되었다. 이 계획은 성공적이었고, 두 사람은 사랑에 빠져 1774년 결혼부터 1807년 아드리엔이 사망할 때까지 행복하게 지냈다.
1773년 결혼 계약이 체결된 후, 라파예트는 어린 아내와 함께 베르사유에 있는 장인의 집에서 살았다. 그는 베르사유의 기마 학교(동기생 중에는 훗날의 샤를 10세도 있었다)와 명문 아카데미 드 베르사유에서 학업을 계속했다. 1773년 4월, 라파예트의 장인의 요청으로 왕실 연대에서 이적하여 노아이유 용기병대의 중위로 임관했다. 라파예트 부부는 매주 왕비의 무도회에 참석했지만, 라파예트는 춤을 잘 추지 못해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놀림을 받았고, 술도 약해 궁정에서 잘 어울리지 못했다.
2. 미국 독립 혁명 참전 계기
미국 독립 혁명은 라파예트에게 개인적인 복수의 기회이자, 자유주의 이상을 실현할 대의명분으로 다가왔다.
2.1. 미국 독립 대의와의 만남
1775년, 라파예트는 메츠에서 소속 부대의 연례 훈련에 참가하여, 동부군 사령관 루페크 후작 샤를 프랑수아 드 브로이를 만났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두 사람은 13개 식민지에서 진행 중인 영국 통치에 대한 반란에 대해 논의했다. 역사학자 마크 립슨은 라파예트가 "아버지를 죽인 영국을 증오하며 자랐기에", 이 분쟁에서 미국의 승리가 영국의 국제적 위상을 약화시킬 것이라고 느꼈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역사학자는 라파예트가 최근 프리메이슨에 가입했으며, 반란 소식이 미국인들을 "자유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로 묘사하며 그의 기사도적이고 이제는 프리메이슨적인 상상력을 자극했다고 언급했다. 세 번째 역사학자 제임스 R. 게인스는 라파예트가 당시 영국의 조지 3세의 동생인 글로스터 공작과 저녁 식사를 함께 했는데, 글로스터 공작이 영국 통치에 반대하는 미국인들을 비난하고 평등과 인민 자치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조롱했다고 회상했다. 라파예트는 훗날 그 저녁 식사가 자신의 생각에 전환점이 되었다고 회상하며, 조지 워싱턴이 대륙군을 위해 병력을 모집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덧붙였다.
1775년 9월, 라파예트가 18세가 되자 파리로 돌아와 결혼 선물로 약속받았던 용기병 대위로 임관했다. 12월에는 첫 자녀 앙리에트가 태어났다. 이 몇 달 동안 라파예트는 미국 독립 혁명이 자신의 신념과 일치한다고 확신하게 되었고, "내 마음은 헌신되었다"고 말했다. 1776년에는 실라스 딘을 포함한 미국 사절단과 루이 16세, 외무장관 샤를 드 베르젠느 백작 사이에 섬세한 협상이 이루어졌다. 국왕과 장관은 미국에 무기와 장교를 공급함으로써 북미에서 프랑스의 영향력을 회복하고 7년 전쟁에서 프랑스의 패배에 대한 영국에 대한 복수를 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라파예트는 프랑스 장교들이 미국으로 파견된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도 그들 중 한 명이 되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는 딘을 만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포함될 수 있었다. 1776년 12월 7일, 딘은 라파예트를 소장으로 임명했다.
프랑스 장교(및 기타 형태의 지원)를 미국에 파견하려는 계획은 영국이 이를 듣고 전쟁을 위협하자 무산되었다. 라파예트의 장인 드 노아이유는 젊은 라파예트를 꾸짖으며 런던에 가서 주영 프랑스 대사이자 라파예트의 처삼촌인 노아이유 후작을 방문하라고 지시했고, 그는 1777년 2월 그렇게 했다. 그러나 그동안 그는 미국으로 갈 계획을 포기하지 않았다. 라파예트는 조지 3세에게 소개되었고 런던에서 3주를 보냈다. 프랑스로 돌아오는 길에 그는 장인(이자 상급 장교)을 피해 숨어들었고, 그에게 미국으로 갈 계획이라고 편지를 썼다. 드 노아이유는 격분하여 루이에게 프랑스 장교들이 미국에서 복무하는 것을 금지하는 칙령을 내리도록 설득했으며, 특히 라파예트의 이름을 명시했다. 베르젠느는 국왕에게 라파예트의 체포를 명령하도록 설득했을 수도 있지만, 이는 불확실하다.
2.2. 미국으로의 출국과 항해
라파예트는 대륙 회의에 자신의 항해 비용을 댈 자금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자신의 돈으로 112,000 파운드에 범선 '빅투아르'호를 구입했다. 그는 빅투아르호가 출항 준비를 하던 보르도로 가서, 가족의 반응에 대한 정보를 요청하는 전갈을 보냈다. 아내와 다른 친척들의 편지를 포함한 답변은 그를 감정적인 혼란에 빠뜨렸다. 출항 직후, 그는 함께 여행하던 장교들의 불만에도 불구하고 배를 되돌려 보르도로 돌아갔다. 그곳의 육군 사령관은 라파예트에게 마르세유에 있는 장인의 연대에 보고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드 브로이는 미국에서 군사 및 정치 지도자가 되기를 희망했고, 보르도에서 라파예트를 만나 정부가 실제로 그가 가기를 원한다고 설득했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었지만, 미국 독립의 대의가 인기가 있었던 파리에서는 라파예트에 대한 상당한 대중적 지지가 있었다. 라파예트는 그것을 믿고 싶어했고 마르세유에 보고하라는 명령에 따르는 척하며 동쪽으로 몇 킬로미터만 간 후 되돌아와 배로 돌아왔다. 빅투아르호는 1777년 3월 25일 지롱드강 유역의 포이야크를 떠났다. 그러나 라파예트는 영국 스파이나 프랑스 왕실에 의해 신분이 드러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배에 타지 않았다. 배는 바스크주파사이아에 정박하여 기푸스코아주의 공장에서 5,000정의 소총과 탄약을 공급받았다. 그는 1777년 4월 26일 빅투아르호에 합류하여 미국으로 출발했다. 신세계로의 두 달 간의 항해는 뱃멀미와 지루함으로 가득했다. 선장 르부르시에(Lebourcier)는 화물을 팔기 위해 서인도 제도에 들를 예정이었지만, 라파예트는 체포될까 봐 두려워 섬에 정박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화물을 구입했다. 그는 1777년 6월 13일 조지타운 근처의 노스 아일랜드에 상륙했다.
3. 미국 독립 전쟁에서의 활약
미국 독립 전쟁 기간 동안 라파예트는 조지 워싱턴과 깊은 유대 관계를 맺고 주요 전투에서 용맹을 떨치며 미국 독립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3.1. 첫 전투와 워싱턴과의 관계
미국에 도착한 라파예트는 부유한 지주인 벤자민 휴거 소령을 만나 2주 동안 머무른 후 혁명 수도인 필라델피아로 떠났다. 필라델피아에서 소집된 제2차 대륙 회의는 딘에 의해 모집된 많은 프랑스 장교들, 그들 중 다수가 영어를 할 줄 모르거나 군사 경험이 부족한 이들 때문에 압도되어 있었다. 라파예트는 항해 중에 영어를 일부 배웠고, 도착 후 1년 이내에 유창해졌으며, 그의 프리메이슨 회원 자격은 필라델피아에서 많은 문을 열어주었다. 라파예트가 무급으로 복무하겠다고 제안하자, 의회는 1777년 7월 31일 그를 소장으로 임명했다. 라파예트의 지지자 중에는 최근 프랑스에 도착한 미국 사절 벤자민 프랭클린도 있었는데, 그는 의회에 서한을 보내 젊은 프랑스인을 환대할 것을 촉구했다.
대륙군 총사령관 조지 워싱턴 장군은 군사 문제에 대해 의회에 보고하기 위해 필라델피아에 왔다. 라파예트는 1777년 8월 5일 저녁 식사에서 그를 만났다. 립슨에 따르면, "두 사람은 거의 즉시 유대감을 형성했다." 워싱턴은 젊은이의 열정에 감명받았고 동료 프리메이슨을 좋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으며, 라파예트는 그저 사령관에게 경외심을 느꼈다. 워싱턴 장군은 프랑스인을 자신의 군사 캠프로 데려갔다. 워싱턴이 캠프와 병사들의 상태에 대해 당혹감을 표하자, 라파예트는 "저는 배우러 왔지, 가르치러 온 것이 아닙니다"라고 답했다. 그는 워싱턴의 참모진이 되었지만, 그의 지위에 대한 혼란이 있었다. 의회는 그의 임명을 명예직으로 간주했지만, 그는 워싱턴이 자신을 준비되었다고 판단할 때 사단 지휘권을 부여받을 완전한 지휘관으로 여겼다. 워싱턴은 라파예트에게 외국인이기 때문에 사단 지휘권은 불가능하다고 말했지만, 그를 "친구이자 아버지"로서 신뢰하는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라파예트는 1777년 9월 11일 채즈포드 근처의 브랜디와인 전투에서 처음으로 전투를 경험했다. 영국군 사령관 하우 경은 대규모 대륙군이 주둔하고 있던 델라웨어만을 통하지 않고 배로 병력을 남쪽 체서피만으로 이동시킨 다음 육로로 도시로 진입하여 필라델피아를 점령할 계획을 세웠다. 영국군이 미국군의 측면을 공격하자 워싱턴은 라파예트를 존 설리반 장군에게 합류하도록 보냈다. 도착하자마자 라파예트는 토머스 콘웨이 여단장 휘하의 제3 펜실베이니아 여단과 함께 진군하여 공격에 맞서 부대를 재정비하려 했다. 영국군과 헤센 용병 부대는 우세한 병력으로 계속 진격했고, 라파예트는 다리에 총상을 입었다. 미국군의 후퇴 중, 라파예트는 부상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을 재정비하여 보다 질서 있는 후퇴를 가능하게 한 후 부상 치료를 받았다. 전투 후, 워싱턴은 그를 "용감함과 군사적 열정"으로 칭찬했으며, 한 달 후 영국군이 필라델피아를 점령하면서 급히 대피하던 의회에 보낸 편지에서 그를 사단 지휘관으로 추천했다.
라파예트는 모라비아 정착촌인 베들레헴에서 두 달간 요양한 후 11월에 전장으로 돌아왔고, 이전에 애덤 스테판 소장이 지휘하던 사단의 지휘권을 받았다. 그는 너새니얼 그린 장군을 도와 뉴저지의 영국군 진지를 정찰했다. 1777년 11월 24일, 그는 300명의 병력으로 글로스터에서 수적으로 우세한 헤센군을 격파했다.


라파예트는 1777년-1778년 겨울 밸리 포지에 있는 워싱턴의 병영에 머물며 병사들과 함께 고난을 겪었다. 그곳에서 호레이쇼 게이츠가 이끄는 전쟁 위원회는 라파예트에게 올버니에서 퀘벡을 침공할 준비를 요청했다. 라파예트가 올버니에 도착했을 때, 그는 침공을 감행하기에는 병력이 너무 적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워싱턴에게 상황에 대해 편지를 썼고, 밸리 포지로 돌아갈 계획을 세웠다. 떠나기 전에, 그는 오네이다족을 미국 편으로 영입했다. 오네이다족은 라파예트를 '카예울라'(무서운 기수)라고 불렀다. 밸리 포지에서 그는 겨울에 퀘벡을 침공하려는 위원회의 결정을 비판했다. 대륙 회의는 이에 동의했고, 게이츠는 위원회를 떠났다. 한편, 미국과 프랑스가 체결한 조약은 1778년 3월에 공개되었고, 프랑스는 공식적으로 미국 독립을 인정했다.
3.2. 뉴저지 및 로드아일랜드 전역
프랑스의 개입 가능성에 직면한 영국군은 뉴욕시에 육해군을 집중시키려 했고, 1778년 5월 필라델피아에서 철수하기 시작했다. 워싱턴은 5월 18일 라파예트를 2,200명의 병력과 함께 배런힐 근처를 정찰하도록 파견했다. 다음 날, 영국군은 그가 근처에 주둔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5,000명의 병력을 보내 그를 포획하려 했다. 하우 장군은 5월 20일 추가로 6,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라파예트의 좌측면을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측면이 흩어지자, 라파예트는 영국군이 주저하는 동안 퇴각을 조직했다. 수적 우위를 가장하기 위해 라파예트는 병사들에게 (현재 라파예트 힐)의 숲에서 나타나 주기적으로 영국군에게 사격하도록 명령했다. 그의 병력은 동시에 함몰된 도로를 통해 탈출할 수 있었고, 그는 나머지 병력을 이끌고 매트슨 포드(Matson's Ford)를 건널 수 있었다.
영국군은 필라델피아에서 뉴욕으로 진격했다. 대륙군은 그들을 추격하여 먼마우스 법원에서 마침내 공격했다. 워싱턴은 찰스 리 장군을 먼마우스 전투 공격군 사령관으로 임명했고, 리는 1778년 6월 28일 영국군 측면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전투가 시작된 직후 혼란스러운 명령을 내려 미국군 진영에 혼란을 야기했다. 라파예트는 워싱턴에게 전선으로 오도록 전갈을 보냈고, 워싱턴이 도착했을 때 리의 병력은 후퇴 중이었다. 워싱턴은 리를 해임하고 지휘권을 장악하여 미국군을 재정비했다. 먼마우스에서 상당한 사상자를 낸 후, 영국군은 밤에 철수하여 성공적으로 뉴욕에 도달했다.

프랑스 개입 가능성에 직면한 영국군은 뉴욕시에 육해군을 집중시키려 했고, 1778년 5월 필라델피아에서 철수하기 시작했다. 데스탱 제독 휘하의 프랑스 함대는 1778년 7월 8일 델라웨어 만에 도착했다. 워싱턴 장군은 데스탱과 함께 북부의 또 다른 주요 영국군 기지인 뉴포트를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라파예트와 그린 장군은 3,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공격에 참여하도록 파견되었다. 라파예트는 프랑스-미국 연합군을 지휘하기를 원했지만 제독에게 거절당했다. 8월 9일, 미국 육군은 데스탱과 상의 없이 영국군을 공격했다. 미국군은 데스탱에게 함대를 내러갠셋만에 배치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그는 거절하고 해상에서 영국 왕립해군을 격파하려 했다. 폭풍이 양 함대를 흩어지게 하고 손상을 입히면서 전투는 결론 없이 끝났다.
데스탱은 수리를 위해 함대를 북쪽 보스턴으로 이동시켰는데, 그곳에서 뉴포트에서의 프랑스 함대 이탈을 탈영으로 간주한 보스턴 시민들의 분노에 찬 시위에 직면했다. 존 핸콕과 라파예트는 상황을 진정시키기 위해 파견되었고, 라파예트는 데스탱의 이탈로 인해 필요해진 후퇴를 준비하기 위해 로드아일랜드로 돌아갔다. 이러한 행동으로 인해 그는 대륙 회의로부터 "용맹, 기술, 신중함"으로 칭찬받았다. 그는 미국 다른 지역과 심지어 프랑스 국기 아래 유럽에서 영국군과 싸우기 위해 전쟁을 확대하기를 원했지만, 그의 제안에 대한 관심은 거의 없었다. 1778년 10월, 그는 워싱턴과 의회에 휴가차 귀국 허가를 요청했다. 그들은 동의했고, 의회는 그에게 프랑스에서 수여될 의례용 검을 주기로 투표했다. 그의 출발은 질병으로 지연되었고, 그는 1779년 1월 프랑스로 출항했다。
3.3. 프랑스 귀환 및 지원 확보
라파예트는 1779년 2월 파리에 도착하여 미국으로 갔다는 이유로 국왕의 명령을 어긴 죄로 8일간 자택 연금을 당했다. 이는 루이 16세의 체면치레에 불과했으며, 라파예트는 영웅으로 환영받았고 곧 국왕과의 사냥에 초대되었다. 미국 특사가 병환 중이었으므로, 벤자민 프랭클린의 손자 윌리엄 템플 프랭클린이 대륙 회의가 주문한 금세공 검을 라파예트에게 수여했다.

라파예트는 프랑스군 내에서 주요 지휘권을 가질 것을 조건으로 영국 침공을 추진했다. 스페인은 이제 영국에 대항하는 프랑스의 동맹국이었고, 지원을 위해 영국 해협으로 함선을 보냈다. 스페인 함선은 1779년 8월이 되어서야 도착했고, 프랑스와 스페인 연합 함대가 따라잡을 수 없는 더 빠른 영국 함대에 의해 저지되었다. 9월에 침공은 포기되었고, 라파예트는 미국으로 돌아갈 희망을 돌렸다. 1779년 12월, 아드리엔은 조르주 워싱턴 라파예트를 낳았다.
라파예트는 벤자민 프랭클린과 협력하여 장바티스트 드 로샹보 장군이 지휘하는 6,000명의 병력을 미국에 파견하겠다는 약속을 확보했다. 라파예트는 로샹보와 워싱턴(두 나라 군대를 모두 지휘할 예정이었다) 사이의 연락관 역할을 하며 미국군 소장 직위를 재개할 예정이었다. 1780년 3월, 그는 로슈포르에서 '에르미온' 프리깃함을 타고 미국으로 떠났으며, 1780년 4월 27일 보스턴에 도착했다.
3.4. 버지니아 전역과 요크타운 포위전
프랑스에 두 번째로 방문한 라파예트는 몇 차례의 군사적 패배, 특히 남부에서의 패배로 미국 독립의 대의가 침체기에 있음을 발견했다. 라파예트는 보스턴에서 "기사도 시대에서 온, 빛나는 갑옷을 입고 나라를 구하러 온 기사"로 여겨지며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그는 남서쪽으로 여행하며 1780년 5월 10일 모리스타운에서 워싱턴과 즐거운 재회를 가졌다. 워싱턴과 그의 장교들은 라파예트에게 약속된 대규모 프랑스군이 자신들을 도우러 올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기뻐했다. 워싱턴은 라파예트의 인기를 알고 있었기에 그에게 (알렉산더 해밀턴이 그의 철자를 교정하며) 주 관리들에게 대륙군에 더 많은 병력과 보급품을 제공하도록 촉구하는 편지를 쓰게 했다. 이는 라파예트가 프랑스 함대의 도착을 기다리는 동안 몇 달 안에 결실을 맺었다. 그러나 함대가 도착했을 때, 예상보다 적은 병력과 물자가 있었고, 로샹보는 영국군과의 전투를 모색하기 전에 증원군을 기다리기로 결정했다. 라파예트는 이에 불만스러웠고, 뉴욕시와 다른 지역을 점령하기 위한 웅장한 계획을 제안했으며, 로샹보는 라파예트가 사과할 때까지 그를 만나기를 잠시 거부했다. 워싱턴은 후작에게 인내심을 가지라고 조언했다.
그 여름 워싱턴은 라파예트에게 병력 사단 지휘를 맡겼다. 후작은 자신의 지휘부, 즉 북부 뉴저지와 인접한 뉴욕주를 순찰하는 데 엄청난 돈을 썼다. 라파예트는 큰 전투를 치르지 못했고, 11월에 워싱턴은 사단을 해산하고 병사들을 원래의 주 연대로 돌려보냈다. 미국에게 전쟁은 여전히 불리하게 진행되었고, 남부의 대부분 전투에서 패배했으며, 베네딕트 아널드 장군은 미국군을 버리고 영국군으로 넘어갔다.
라파예트는 1780년-1781년 겨울의 첫 부분을 필라델피아에서 보냈는데, 그곳에서 미국 철학 학회는 그를 첫 외국인 회원으로 선출했다. 의회는 그에게 더 많은 병력과 물자를 로비하기 위해 프랑스로 돌아가라고 요청했지만, 라파예트는 거절하고 대신 편지를 보냈다.

1781년 1월 사우스캐롤라이나주에서 벌어진 카우펜스 전투에서 대륙군이 승리한 후, 워싱턴은 라파예트에게 필라델피아에서 병력을 재편성하고 남쪽 버지니아로 가서 슈토이벤 남작이 지휘하는 부대와 합류하라고 명령했다. 연합군은 베네딕트 아널드가 지휘하는 영국군을 포위하려 했으며, 프랑스 함대가 해상 탈출을 막을 예정이었다. 라파예트가 성공했다면 아널드는 즉시 교수형에 처해졌을 것이다. 영국군의 해상 지배력으로 계획은 무산되었지만, 라파예트와 그의 병력 일부는 요크타운에서 슈토이벤과 합류할 수 있었다. 슈토이벤은 워싱턴에게 육군과 프랑스 함대를 이용하여 콘월리스 경 휘하의 주력 영국군을 포위할 계획을 제안했다. 워싱턴으로부터 새로운 명령을 받지 못한 라파예트는 병력을 북쪽 필라델피아로 이동하기 시작했지만, 버지니아에서 군사 지휘를 맡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격분한 라파예트는 결정적인 전투가 다른 곳에서 벌어지는 동안 자신이 후방에 버려지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헛되이 명령에 반대했다。 그는 또한 필라델피아 주재 프랑스 대사 라 뤼제른 기사에게 자신의 병력이 얼마나 보급이 부족한지 설명하는 편지를 보냈다. 라파예트가 희망했던 대로, 라 뤼제른은 대규모 프랑스 지원을 추천하는 편지를 프랑스로 보냈고, 이는 국왕의 승인을 받아 다가올 전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었다. 워싱턴은 편지가 영국군에게 포획될까 봐 라파예트에게 콘월리스를 결정적인 작전으로 포위할 계획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라파예트는 리치먼드에서 콘월리스의 포획 시도를 회피했다. 1781년 6월, 콘월리스는 런던으로부터 체서피만으로 진격하여 항구 건설을 감독하고, 육로로 필라델피아를 공격할 준비를 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영국군이 이동하는 동안, 라파예트는 소규모 부대를 보내 예상치 못한 곳에 나타나 후위 부대나 보급 부대를 공격하며, 자신의 병력이 실제보다 많다는 인상을 주었다.
7월 4일, 영국군은 윌리엄스버그를 떠나 제임스강을 건널 준비를 했다. 콘월리스는 강 남쪽에 선발대만을 보내고, 많은 병력을 북쪽 숲에 숨겨 라파예트를 매복하려 했다. 7월 6일, 라파예트는 앤서니 웨인 장군에게 약 800명의 병력으로 북쪽의 영국군을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웨인은 자신이 수적으로 훨씬 열세임을 깨달았지만, 후퇴하는 대신 총검 돌격을 감행했다. 이 돌격은 미국군에게 시간을 벌어주었고, 영국군은 추격하지 않았다. 그린스프링 전투는 콘월리스의 승리였지만, 병사들의 용감한 모습에 미국군의 사기는 고무되었다.
8월에 콘월리스는 요크타운에 영국군을 배치했고, 라파예트는 맬번 힐에 진지를 구축하여 요크강과 가까운 영국군을 포위하고, 햄프턴 로드의 영국 함선을 보호하기 위한 요새를 건설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라파예트의 포위 작전은 프랑스 함대가 도착하여 버지니아곶 해전에서 승리함으로써 콘월리스의 해군 보호를 박탈하여 영국군을 곤경에 빠뜨렸다. 1781년 9월 14일, 워싱턴의 병력이 라파예트의 병력과 합류했다. 9월 28일, 프랑스 함대가 영국군을 봉쇄한 가운데, 연합군은 요크타운을 포위했다. 10월 14일, 미국군 우익에 있던 라파예트의 400명 병력은 알렉산더 해밀턴의 병력이 보루 10을 백병전으로 공격한 후 보루 9를 점령했다. 이 두 보루는 영국군 방어선을 무너뜨리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영국군의 반격이 실패한 후, 콘월리스는 1781년 10월 19일에 항복했다.

4. 프랑스 혁명 이전의 활동
라파예트는 미국 독립 전쟁의 영웅으로서 프랑스와 미국 양국에서 명성을 얻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사회적, 정치적, 외교적 활동을 펼쳤다. 특히 노예 제도 폐지에 대한 그의 헌신은 주목할 만하다.
4.1. '두 세계의 영웅'으로서의 외교 활동
요크타운 전투는 미국 독립 혁명의 마지막 주요 지상전이었지만, 영국은 여전히 몇몇 주요 항구 도시를 점령하고 있었다. 라파예트는 이들을 점령하기 위한 원정대를 이끌고 싶어했지만, 워싱턴은 그가 프랑스에서 추가 해군 지원을 구하는 것이 더 유용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의회는 그를 유럽 주재 미국 사절단, 파리의 벤자민 프랭클린, 마드리드의 존 제이, 헤이그의 존 애덤스의 고문으로 임명하며, 그들에게 "그와 모든 것을 소통하고 동의하라"고 지시했다. 의회는 또한 라파예트 후작을 칭찬하는 공식 서한을 루이 16세에게 보냈다.
라파예트는 1781년 12월 18일 보스턴을 떠나 프랑스로 향했고, 그곳에서 영웅으로 환영받았으며, 1782년 1월 22일 베르사유 궁전에서 영접을 받았다. 그는 딸의 탄생을 목격했고, 토머스 제퍼슨의 추천에 따라 마리앙투아네트 비르지니(Marie-Antoinette Virginie)라고 이름 지었다. 그는 여러 계급을 건너뛰어 마레샬 드 캄프(Maréchal de camp, 소장급 지위)로 승진했으며, 성 루이 훈장의 기사 작위를 받았다. 아직 공식적인 평화 조약이 체결되지 않았으므로, 그는 1782년 영국령 서인도 제도에 대한 프랑스와 스페인 연합 원정에 참여했지만, 1783년에 영국과 미국 사이에 파리 조약이 체결되면서 원정은 불필요해졌다. 라파예트는 그 협상에 참여했다.
라파예트는 제퍼슨과 협력하여 미국과 프랑스 간의 무역 협정을 체결했는데, 이는 프랑스에 대한 미국의 부채를 줄이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는 흑인 친구 협회, 즉 대서양 노예 무역의 폐지와 자유 유색 인종의 동등한 권리를 옹호하는 프랑스 노예 폐지론 단체에 가입했다. 그는 1783년 워싱턴에게 보낸 편지에서 미국 노예의 해방과 그들을 소작농으로 정착시키는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워싱턴은 그의 노예들을 해방시키는 것을 거부했지만, 젊은이의 생각에 관심을 표명했고, 라파예트는 프랑스령 기아나의 카옌에 세 개의 플랜테이션을 구입하여 이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라파예트는 1784년-1785년에 미국을 방문하여 열렬한 환영을 받았으며, 모든 주를 방문했다。 이 여행에는 8월 17일 워싱턴의 마운트 버넌 농장 방문이 포함되었다. 그는 버지니아 대의원 회의에서 "모든 인류의 자유"를 외치며 노예제 폐지를 촉구했고, 펜실베이니아주 의회에 연방 결성을 돕도록 촉구했다(당시 주들은 연합규약에 의해 묶여 있었다). 그는 1778년에 만난 적이 있는 이로쿼이족과의 평화 협상에 참여하기 위해 뉴욕의 모호크 계곡을 방문했다. 그는 하버드 대학교에서 명예 학위를 받았고, 보스턴 시로부터 워싱턴의 초상화를, 버지니아 주로부터 흉상을 받았다. 메릴랜드 주 의회는 그와 그의 남성 상속인들을 "주에서 태어난 자연 시민"으로 만들면서 그를 기렸다. 이는 1789년 미국 헌법 비준 후 그를 미국에서 태어난 시민으로 만들었다. 라파예트는 훗날 프랑스 시민권이라는 개념이 존재하기 전에 자신이 미국 시민이 되었다고 자랑했다. 코네티컷, 매사추세츠, 버지니아 주도 그에게 시민권을 부여했다.
라파예트는 파리의 '리 드 부르봉'에 있는 라파예트 호텔을 미국인들의 중요한 회합 장소로 만들었다. 벤자민 프랭클린, 존과 사라 제이, 존과 애비게일 애덤스는 매주 월요일 그곳에서 만나 라파예트 가족 및 클레르몽토네르와 마담 드 스탈을 포함한 자유주의 귀족들과 함께 식사를 했다. 라파예트는 계속해서 프랑스에서 미국 상품에 대한 무역 장벽을 낮추는 일에 힘썼고, 프랭클린과 제퍼슨이 유럽 국가들과 우호 통상 조약을 체결하는 것을 도왔다. 그는 또한 한 세기 전에 낭트 칙령이 폐지된 이후 프랑스 내 위그노들이 겪었던 불의를 바로잡으려 했다.
1785년에는 프로이센 군사 훈련을 참관하기 위해 실레지아로 가서 프리드리히 2세 국왕을 알현했고, 이어서 방문한 오스트리아에서는 요제프 2세 황제를 알현하는 등 유럽 각국의 군주 및 귀족들과 교류를 확대했다. 1786년에는 공작령 승격을 꾀하며 오베르뉴랑자크를 18.88 만 FRF에 매입하여 영지를 확장했으나, 공작 승진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4.2. 노예제에 대한 견해와 폐지론 운동
라파예트는 1789년 인권 선언의 저자이자 노예 제도에 대한 강력한 반대자였다. 그의 저작물에서 노예 제도를 특별히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워싱턴과 제퍼슨 같은 친구 및 동료들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이 논쟁적인 주제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는 노예가 소유되는 것이 아니라 플랜테이션 소유주의 땅에서 자유로운 소작농으로 일해야 한다고 제안했으며, 자신의 아이디어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 1785년과 1786년에 카옌, 프랑스령 기아나에 세 곳의 플랜테이션을 구입하여 70명의 노예를 사고팔지 않도록 명령했다. 그는 노예들을 해방시키지 않았으며, 1795년에 프랑스 당국이 그의 재산을 몰수했을 때, 세 플랜테이션에 남아 있던 63명의 노예들은 카옌 식민지 관리들에 의해 팔렸다. 그는 노예 제도가 많은 경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인식하면서도 노예들을 점진적으로 해방시켜야 한다고 제안하며 평생을 노예 폐지론자로 보냈다. 라파예트는 자신의 생각이 워싱턴에 의해 채택되어 미국에서 노예가 해방되고 거기서부터 확산되기를 희망했다. 워싱턴은 결국 마운트 버넌 자신의 플랜테이션에서 그러한 관행을 시행하기 시작했지만, 그는 죽는 날까지 노예를 소유했다. 라파예트는 매튜 클락슨, 필라델피아 시장에게 보낸 편지에서 "만약 제가 그것으로 인해 노예의 땅을 세우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더라면, 저는 결코 미국의 대의를 위해 칼을 뽑지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썼다.
5. 프랑스 혁명에서의 역할
라파예트는 프랑스 혁명 초기부터 국민 위병대의 총사령관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인권 선언 초안 작성에 기여하는 등 혁명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급진화되는 혁명 속에서 중도적 입장을 유지하려던 그의 노력은 결국 명성 실추와 망명으로 이어졌다.
5.1. 명사회의 소집과 삼부회
1786년 12월 29일, 루이 16세는 프랑스의 재정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명사회를 소집했다. 국왕은 라파예트를 이 기구에 임명했으며, 이는 1787년 2월 22일 소집되었다. 연설에서 라파예트는 정부 토지 구매에 대한 사전 지식으로 이득을 취한 궁정 내 연루자들을 비난하며 개혁을 옹호했다. 그는 프랑스 전체를 대표하는 "진정으로 국가적인 의회"를 요구했다. 대신 국왕은 1789년에 소집될 삼부회를 소집하기로 결정했다. 라파예트는 리옹에서 귀족(제2신분) 대표로 선출되었다. 삼부회는 전통적으로 성직자, 귀족, 평민의 세 신분 각각이 한 표를 행사하는 방식이었는데, 이는 훨씬 더 큰 규모의 평민 계급이 일반적으로 표결에서 밀린다는 것을 의미했다.

삼부회는 1789년 5월 5일 소집되었고, 대표들이 머리수대로 투표할지 신분별로 투표할지에 대한 논쟁이 시작되었다. 신분별로 투표하면 귀족과 성직자가 평민을 압도할 수 있었고, 머리수대로 투표하면 더 큰 제3신분이 지배할 수 있었다. 회의 전에 "30인 위원회"의 일원이었던 라파예트는 신분별이 아닌 머리수대로 투표할 것을 선동했다. 그는 자신의 신분인 귀족 계급의 과반수 동의를 얻지는 못했지만, 성직자들은 평민과 합류할 의지가 있었고, 5월 17일, 이 집단은 스스로를 국민의회로 선언했다. 왕당파의 반응은 라파예트가 포함된 집단을 회의장에서 배제하는 것이었고, 의회를 지지하지 않는 이들은 실내에서 회의했다. 이 행동은 테니스 코트의 서약으로 이어졌고, 여기서 배제된 의원들은 헌법이 제정될 때까지 해산하지 않을 것을 맹세했다. 의회는 계속 회의를 가졌고, 1789년 7월 11일, 라파예트는 토머스 제퍼슨과 협의하여 자신이 작성한 "인권 선언" 초안을 의회에 제출했다. 다음 날, 개혁가로 여겨지던 재무장관 자크 네케르가 해고되자, 변호사 카미유 데물랭은 700명에서 1,000명 사이의 무장한 폭도를 모았다. 국왕은 드 브로이 공작 휘하의 왕실 군대로 파리를 포위했다. 7월 14일, 바스티유 요새가 폭도들에 의해 습격당했다.
5.2. 국민 위병대 총사령관

1789년 7월 15일, 라파예트는 파리 시에서 질서 유지를 위해 의회의 통제 하에 설립된 무장 병력인 파리 국민 위병대의 총사령관으로 추대되었다. 이는 치안 유지, 교통 통제, 위생, 조명 등 지역 행정의 여러 문제를 포함하는 업무였다. 라파예트는 이 부대의 명칭과 상징(파리 시의 빨간색과 파란색에 왕실의 흰색을 결합한 청색, 백색, 적색 코카르드)을 제안했으며, 이것이 프랑스 삼색기의 기원이 되었다. 그는 국민 위병대장으로서 어려운 과제에 직면했다. 국왕과 많은 왕당파는 그와 그의 지지자들을 혁명가나 다름없다고 여겼고, 반면 많은 평민들은 그가 국왕의 권력 유지를 돕고 있다고 느꼈다.
국민 의회는 8월 26일 인권 선언을 승인했지만, 국왕은 10월 2일 이를 거부했다. 3일 후, 여성 생선 상인들이 이끄는 파리 군중은 빵 부족에 항의하며 베르사유로 행진했다. 라파예트는 마지못해 국민 위병대를 이끌고 행진을 뒤따랐다. 베르사유에서 국왕은 인권 선언에 대한 의회의 투표를 수락했지만, 파리로 갈 것을 거부했고, 새벽에 군중이 궁전에 난입했다. 라파예트는 왕실 가족을 궁전 발코니로 데려가 질서를 회복하려 했으나, 군중은 국왕과 가족이 파리의 튈르리궁으로 이동할 것을 주장했다. 국왕이 발코니에 나오자 군중은 "국왕 만세!"를 외치기 시작했다. 이어서 마리 앙투아네트가 자녀들과 함께 나타났지만, 아이들을 다시 안으로 보내라는 말을 들었다. 그녀는 혼자 돌아왔고 사람들은 그녀를 쏘라고 소리쳤지만, 그녀는 굳건히 서 있었고 아무도 발포하지 않았다. 라파예트가 그녀의 손에 입맞춤하자 군중은 환호했다.
라파예트는 훗날 10월 사건에 대한 국민 의회 내 조사를 시작하여, 샤브루(Jean-Baptiste-Charles Chabroud)가 폭도를 선동한 자들(그는 미라보와 오를레앙 공작 루이 필리프 2세라고 생각했다)을 규탄하기 위해 사건의 정확한 경과와 절차를 축적한 688페이지 분량의 '형사 절차' 보고서를 작성하게 했다. 그러나 국민 의회는 두 명의 중요한 혁명가를 규탄하는 것이 혁명 정부의 진전과 대중의 수용에 해를 끼칠 것이라고 생각했다.
국민 위병대장으로서 라파예트는 급진파의 영향력이 커지는 와중에도 질서를 유지하고 중도적 입장을 취하려 노력했다. 그와 파리 시장 장 실뱅 바이이는 1790년 5월 12일 자코뱅파의 영향력에 균형을 맞추기 위한 목적으로 '1789년 협회'라는 정치 클럽을 설립했다.
라파예트는 1790년 7월 14일 연맹제에 대한 조직 및 지휘에 참여했으며, 그곳에서 그는 국민 위병대와 국왕과 함께 샹 드 마르스에서 "국가, 법, 국왕에게 영원히 충성하며, 국민 의회가 제정하고 국왕이 승인한 헌법을 최대한의 힘으로 지지할 것"을 맹세했다. 왕당파의 입장에서는 라파예트가 국왕의 안전을 염려하여 샹 드 마르스에서 규율 없는 집단을 주최한 것은 큰 위험 부담이었고, 반면 자코뱅파에게는 이 사건이 라파예트의 왕당파적 성향과 일반 대중의 군주제 지지를 부추긴 것으로 비춰졌다.
라파예트는 다음 몇 달 동안 질서 유지를 위해 계속 노력했다. 1791년 2월 28일, 그와 국민 위병대의 일부는 뱅센에서의 분쟁을 처리하기 위해 튈르리궁을 떠났고, 수백 명의 무장한 귀족들이 그가 없는 동안 국왕을 보호하기 위해 튈르리궁에 도착했다. 그러나 이 귀족들이 국왕을 데리고 반혁명의 선봉에 세우려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라파예트는 급히 튈르리궁으로 돌아와 잠시 대치한 후 귀족들의 무장을 해제시켰다. 이 사건은 단검의 날로 알려지게 되었고, 국왕을 신속하게 보호한 라파예트의 프랑스 국민들 사이에서의 인기를 높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실 가족은 궁전의 죄수 신세가 되었다. 국민 위병대는 4월 18일 라파예트의 명령에 불복종하고 국왕이 생클루로 미사에 참석하러 가는 것을 막았다.
5.3. 왕실의 바렌 도주 사건과 실각
바렌 도주 사건으로 알려진 음모는 1791년 6월 20일 국왕이 프랑스를 탈출할 뻔하게 만들었다. 국왕과 왕비는 기본적으로 라파예트와 국민 위병대의 감시 아래 튈르리 궁전을 탈출했다. 그들의 탈출 소식을 들은 라파예트는 탈출한 왕족을 되찾기 위해 위병대를 여러 방향으로 파견했다. 닷새 후, 라파예트와 국민 위병대는 왕족의 마차를 파리 시내로 다시 이끌고 왔고, 군중은 왕족과 라파예트의 목을 요구하며 아우성을 쳤다. 라파예트는 국민 위병대장으로서 왕실 가족의 보호를 책임지고 있었고, 따라서 조르주 당통과 같은 극단주의자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당통은 라파예트에게 "당신은 왕이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맹세했다. 당신은 조국을 팔았거나, 신뢰할 수 없는 사람에 대해 약속을 한 어리석은 사람이다... 프랑스는 당신 없이도 자유로울 수 있다"고 연설했다. 그는 막시밀리앵 로베스피에르에 의해 국민에 대한 배신자로 불렸다. 이러한 비난은 라파예트를 왕당파로 보이게 했고, 대중의 눈에 그의 명성을 손상시켰으며, 그에 반대하는 자코뱅파와 다른 급진파의 입지를 강화했다. 그는 계속해서 헌법에 따른 법치를 주장했지만, 폭도와 그들의 지도자들에게 묻혀버렸다.
5.4. 샹 드 마르스 학살과 망명

라파예트의 대중적 지위는 1791년 하반기 내내 계속 하락했다. 급진적인 코르들리에 클럽은 7월 17일 샹 드 마르스에서 군주제를 폐지하거나 국민 투표로 그 운명을 결정하도록 국민 의회에 청원서를 제출하기 위한 행사를 조직했다. 모인 군중은 10,000명에서 50,000명 사이로 추정되었다. 시위대들은 행사에서 제단 아래 숨어 있던 두 남자를 발견했는데, 이들은 스파이이거나 폭발물을 설치하려 한 것으로 고발되었고, 결국 이들을 가로등에 매달고 창 끝에 그들의 머리를 꽂았다. 라파예트는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병력을 이끌고 샹 드 마르스로 진입했지만, 군중은 돌을 던지며 그들을 맞이했다. 실제로 라파예트에 대한 암살 시도가 있었으나, 근거리에서 총격범의 권총이 불발되었다. 병사들은 처음에 군중을 위협하고 해산시키기 위해 머리 위로 발포하기 시작했지만, 이는 오히려 반격을 불러와 결국 두 명의 의용 사냥꾼이 사망하는 결과를 낳았다. 국민 위병대는 군중에게 발포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알 수 없는 수의 사람들이 부상당하거나 사망했다. 라파예트 측근의 증언에 따르면 약 10명의 시민이 사망했다고 주장하는 반면, 다른 증언은 54명이라고 주장하며, 선정적인 신문 발행인 장폴 마라는 그날 밤 400구 이상의 시신이 강으로 버려졌다고 주장했다.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조르주 당통과 장폴 마라와 같은 폭도 지도자들은 도피하여 숨었다. 라파예트의 평판은 많은 정치 클럽들 사이에서 급격히 떨어졌는데, 특히 파리 혁명과 같은 언론 기사들이 샹 드 마르스 사건을 "연맹의 들판에서 국가의 제단 위에 남성, 여성, 어린이가 학살당했다"고 묘사했기 때문이다. 학살 직후, 폭도 군중이 라파예트의 집을 습격하여 그의 아내를 해치려 했다. 의회는 9월에 헌법을 최종 확정했고, 라파예트는 헌법적 법치가 회복된 것처럼 보이자 10월 초에 국민 위병대에서 사임했다.
라파예트는 1791년 10월 고향인 오베르뉴로 돌아왔다. 프랑스는 1792년 4월 20일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를 했고,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오늘날의 벨기에) 침공 준비가 시작되었다. 1791년 6월 30일 중장으로 승진했던 라파예트는 1791년 12월 14일 메츠에 주둔한 세 군대 중 하나인 중부군 사령관을 맡았다. 라파예트는 신병과 국민 위병대원들을 응집력 있는 전투 병력으로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많은 병력이 자코뱅 동조자였고 상관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792년 4월 23일, 막시밀리앵 로베스피에르는 라파예트에게 사임할 것을 요구했다. 이러한 감정은 군대 내에서 흔한 일이었는데, 마르카앵 전투 후 패주한 프랑스군이 지휘관 테오발드 디용을 릴로 끌고 가 폭도들에게 갈기갈기 찢겨 죽게 한 사건에서 드러났다. 군대 사령관 중 한 명인 로샹보는 사임했다. 라파예트는 세 번째 사령관 니콜라 뤼크네르와 함께 병사들이 또 다른 전투를 겪을 경우 어떤 일이 일어날지 우려하며 의회에 평화 회담을 시작해 달라고 요청했다.
1792년 6월, 라파예트는 자신의 야전 주둔지에서 의회에 보낸 편지를 통해 급진파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비판했으며, 편지 말미에는 그들의 정당이 "강제로 폐쇄되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는 시기를 오판했는데, 파리는 급진파가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라파예트는 그곳으로 가서 6월 28일 의회에서 자코뱅파와 다른 급진파 단체들을 비난하는 격렬한 연설을 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병력을 버리고 탈영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라파예트는 자코뱅파에 맞설 지원자들을 모집했지만, 몇 명밖에 나타나지 않자 그는 대중의 분위기를 이해하고 급히 파리를 떠났다. 로베스피에르는 그를 반역자라고 불렀고, 폭도들은 그의 인형을 불태웠다. 그는 1792년 7월 12일 북부군 사령관으로 전임되었다.
브라운슈바이크 선언은 7월 25일 국왕이 해를 입으면 파리가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에 의해 파괴될 것이라고 경고했으며, 이는 라파예트와 왕실 가족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8월 10일 폭도들이 튈르리궁을 공격했고, 국왕과 왕비는 의회에 감금된 후 타ンプル로 끌려갔다. 의회는 군주제를 폐지했다. 국왕과 왕비는 다음 달에 참수될 예정이었다. 8월 14일, 법무장관 당통은 라파예트의 체포 영장을 발부했다. 미국으로 가기를 희망했던 라파예트는 오스트리아 네덜란드로 들어갔다.
6. 투옥과 석방
라파예트는 망명 중 오스트리아에 체포되어 수년간 감옥에 갇혔고, 복잡한 외교적 노력 끝에 석방되었다.
6.1. 수감 생활과 가족의 노력

라파예트는 로슈포르 근처에서 오스트리아군에게 포로로 잡혔는데, 이는 또 다른 전 프랑스 장교 장그자비에 뷔로 드 퓌시가 프랑스 장교 집단을 대표하여 오스트리아 영토 통과권을 요청했고, 이는 프랑스를 탈출한 다른 이들에게 그랬듯이 처음에는 허가되었으나, 유명한 라파예트가 발견되자 취소되었기 때문이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오스트리아의 프랑스 동맹국이었는데, 그는 프랑스 혁명 이전에 라파예트를 한 번 영접했지만, 이제는 그를 다른 군주제를 전복시키는 것을 막기 위해 구금되어야 할 위험한 반란 선동자로 보았다.
라파예트는 니벨레에 구금되었다가 룩셈부르크로 이송되었고, 그곳에서 연합군 군사재판소는 그와 드 퓌시, 그리고 다른 두 명을 혁명에서의 역할 때문에 국가 수감자로 선언했다. 재판소는 복권된 프랑스 국왕이 그들에 대한 최종 판결을 내릴 때까지 그들을 구금하도록 명령했다. 1792년 9월 12일, 재판소의 명령에 따라 포로들은 프로이센에 인계되었다. 일행은 프로이센 요새 도시 베젤로 이동했고, 그곳에서 프랑스인들은 1792년 9월 19일부터 12월 22일까지 중앙 요새의 옴이 들끓는 독방에 머물렀다. 승리한 프랑스 혁명군이 라인란트를 위협하기 시작하자,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 국왕은 포로들을 동쪽 마그데부르크의 요새로 이송했고, 그들은 1793년 1월 4일부터 1794년 1월 4일까지 꼬박 1년을 그곳에 머물렀다.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예상치 못하게 성공적인 프랑스군과 계속 싸워 얻을 것이 거의 없으며,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 자신의 군대를 위한 더 쉬운 먹잇감이 있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그는 공화국과의 무력 충돌을 중단하고 국가 포로들을 자신의 전 동맹국인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 군주 프란츠 2세에게 다시 넘겨주었다. 라파예트와 그의 동료들은 처음에는 실레지아의 나이세(현재 니사)로 보내졌다. 1794년 5월 17일, 그들은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어갔고, 그곳에서 군사 부대가 그들을 맞이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다음 날, 오스트리아인들은 포로들을 모라비아의 요새 도시 올뮈츠(현재 체코)에 있는, 예전 예수회 대학이었던 병영 감옥으로 데려갔다.

라파예트는 체포되었을 때 자신에게 부여된 미국 시민권을 이용하여 석방을 확보하려 했고, 헤이그 주재 미국 공사 윌리엄 쇼트에게 연락했다. 쇼트와 다른 미국 사절들은 라파예트가 자국에 봉사한 공로 때문에 그를 매우 돕고 싶어했지만, 프랑스 장교로서의 그의 지위가 미국 시민권 주장보다 우선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워싱턴은 사절들에게 유럽 문제에 미국을 얽매이게 하는 행동을 피하도록 지시했으며, 미국은 프로이센이나 오스트리아와 외교 관계를 맺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라파예트와 프랑스에 투옥된 그의 아내를 위해 돈을 보냈다. 국무장관 토머스 제퍼슨은 1777년부터 1783년까지 소장으로서의 라파예트의 봉사에 대해 이자를 포함하여 지급할 수 있는 허점을 발견했다. 법안은 의회를 통과하여 워싱턴 대통령의 서명을 받았다. 이 자금 덕분에 라파예트 부부는 구금 생활에서 특권을 누릴 수 있었다.
전직 장군을 돕기 위한 더 직접적인 수단은 알렉산더 해밀턴의 처제 안젤리카 스카일러 처치와 그녀의 남편 존 바커 처치, 즉 대륙군에서 복무했던 영국 하원 의원이 후원한 탈출 시도였다. 그들은 하노버 출신의 젊은 의사 유스투스 에리히 볼먼을 고용했고, 볼먼은 사우스캐롤라이나 출신 의대생 프랜시스 킨로크 휴거를 조수로 고용했다. 휴거는 라파예트가 처음 미국에 도착했을 때 머물렀던 벤자민 휴거의 아들이었다. 그들의 도움으로 라파예트는 올뮈츠 외곽 시골에서 호송 마차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했지만, 길을 잃고 다시 붙잡혔다.
아드리엔이 프랑스 감옥에서 풀려난 후, 그녀는 주프랑스 미국 공사 제임스 먼로의 도움을 받아 코네티컷 주로부터 자신과 두 딸의 여권을 얻어냈는데, 코네티컷 주는 라파예트 가족 전체에게 시민권을 부여했었다. 그녀의 아들 조르주 워싱턴 라파예트는 프랑스에서 몰래 빠져나와 미국으로 보내졌다. 아드리엔과 두 딸은 빈으로 가서 프란츠 황제를 알현했고, 세 여성이 라파예트와 함께 구금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 1년 전 탈출 시도 이후 혹독한 독방 생활을 견뎌냈던 라파예트는 1795년 10월 15일 병사들이 감옥 문을 열고 아내와 딸들을 안내하자 깜짝 놀랐다. 가족은 다음 2년 동안 함께 감금 생활을 했다.
외교, 언론, 개인적인 호소를 통해 대서양 양쪽의 라파예트 지지자들은 자신들의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가장 중요하게는 공포 정치 이후의 프랑스 정부에 영향을 미쳤다. 젊고 승리한 장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캄포 포르미오 조약의 결과로 올뮈츠에 갇힌 국가 수감자들의 석방을 협상했다. 이로써 라파예트의 5년이 넘는 감금 생활은 끝이 났다. 라파예트 가족과 함께 구금되었던 동료들은 1797년 9월 19일 이른 아침 오스트리아 호송대를 따라 올뮈츠를 떠나, 프라하 북쪽의 보헤미아-작센 국경을 넘어 10월 4일 함부르크에서 미국 영사에게 공식적으로 인계되었다.
함부르크에서 라파예트는 보나파르트 장군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냈다. 프랑스 정부인 총재정부는 라파예트가 충성을 맹세하지 않는 한 귀국을 원치 않았는데, 그는 총재정부가 헌법에 위배되는 방식으로 권력을 잡았다고 믿었기 때문에 기꺼이 맹세하지 않았다. 이에 대한 복수로 총재정부는 그의 남은 재산을 매각하여 그를 가난하게 만들었다. 아메리카에서 돌아온 조르주 워싱턴 라파예트가 곧 합류한 가족은 아드리엔 이모의 소유인 함부르크 근처의 한 부동산에서 요양했다. 미국과 프랑스 간의 갈등 때문에 라파예트는 희망했던 대로 미국으로 갈 수 없게 되어 무국적자가 되었다.

아드리엔은 파리로 갈 수 있었고, 프랑스에서 더 많은 승리를 거두고 돌아온 보나파르트를 치켜세우며 남편의 귀국을 확보하려 했다. 브뤼메르 18일 쿠데타 (1799년 11월 9일) 이후, 라파예트는 정권 교체로 인한 혼란을 이용하여 "모티에"라는 이름의 여권으로 프랑스에 잠입했다. 보나파르트는 분노를 표했지만, 아드리엔은 그가 단지 꾸며내는 것이라고 확신했고, 라파예트가 자신을 지지하겠다고 맹세한 후 자신이 되찾은 부동산인 라 그랑주에서 공직에서 은퇴할 것을 제안했다. 프랑스의 새로운 통치자는 라파예트가 프랑스에 머무는 것을 허락했지만, 처음에는 시민권이 없었고 정치에 관여하면 즉시 체포될 수 있었으며, 나중에는 시민권 복권을 약속받았다. 라파예트는 라 그랑주에서 조용히 지냈고, 1799년 12월에 사망한 워싱턴을 위해 보나파르트가 파리에서 추모 예배를 열었을 때, 라파예트는 추모사를 해달라는 요청을 받을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초대받지 못했고, 그의 이름도 언급되지 않았다.
7. 나폴레옹 시대와 부르봉 왕정복고 시기 활동
나폴레옹 집권기와 부르봉 왕정복고 시기 동안 라파예트는 민주주의 원칙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바탕으로 정치적 행보를 이어갔다.
7.1. 나폴레옹 시대의 정치적 은퇴
보나파르트는 1800년 3월 1일 라파예트의 시민권을 복권시켰고, 그는 일부 재산을 되찾을 수 있었다. 마렝고 전투 이후, 제1통령은 그에게 주미 프랑스 대사직을 제안했지만, 라파예트는 미국에 너무 애착이 많아 외국 사절로서 행동할 수 없다고 말하며 거절했다. 1802년, 그는 보나파르트를 종신 집정관으로 만든 국민투표에서 반대표를 던진 소수파에 속했다. 보존 상원 의석과 레지옹 도뇌르 훈장은 보나파르트에 의해 반복적으로 제안되었지만, 라파예트는 다시 거절했다. 그러나 그는 민주 정부로부터의 명예는 기꺼이 받아들였을 것이라고 밝혔다.
1804년, 보나파르트는 라파예트가 참여하지 않은 국민투표를 거쳐 황제 나폴레옹으로 즉위했다. 은퇴한 장군은 비교적 조용히 지냈지만, 바스티유의 날 연설을 하기도 했다. 루이지애나 매입 후,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은 그에게 주지사직에 관심이 있는지 물었지만, 라파예트는 개인적인 문제와 프랑스의 자유를 위해 일하고 싶다는 열망을 이유로 거절했다.
1807년 오베르뉴 여행 중, 아드리엔은 감옥 생활로 인한 합병증으로 병이 들었다. 그녀는 혼수상태에 빠졌지만, 크리스마스 이브에 가족들을 침대 주변에 모이게 할 만큼 회복되어 라파예트에게 "제 모든 것이 당신 것입니다" (Je suis toute à vous프랑스어)라고 말했다. 그녀는 다음 날 사망했다. 그녀의 죽음 이후 몇 년 동안 라파예트는 나폴레옹의 유럽 내 권력이 커지고 약해지는 동안 대부분 라 그랑주에서 조용히 지냈다. 많은 영향력 있는 인사들과 대중, 특히 미국인들이 그를 방문했다. 그는 많은 편지를, 특히 제퍼슨에게 썼고, 워싱턴과 그랬던 것처럼 선물을 교환했다.
7.2. 부르봉 왕정복고 시기의 의회 활동
1814년, 나폴레옹에 반대하는 제6차 대프랑스 동맹이 프랑스를 침공하여 군주제를 복원했다. 처형된 루이 16세의 동생 프로방스 백작은 루이 18세로 즉위했다. 라파예트는 새로운 국왕의 환영을 받았지만, 확고한 공화주의자였던 그는 2,500만 명의 국민 중 90,000명에게만 투표권을 부여하는 새롭고 매우 제한적인 대의원 선거 제도에 반대했다. 라파예트는 1814년 선거에 출마하지 않고 라 그랑주에 머물렀다.
프랑스에서는 제대 군인들과 다른 사람들 사이에 불만이 있었다. 나폴레옹은 토스카나 제도엘바섬에 유배되어 있었고, 기회를 엿보아 1815년 3월 1일 소수의 추종자들과 함께 칸에 상륙했다. 프랑스인들은 그의 깃발 아래 몰려들었고, 그 달 말에 파리를 점령하여 루이 18세는 헨트로 도피했다. 라파예트는 나폴레옹이 새로운 정부에서 복무하라는 요청을 거부했지만, 1815년 헌법에 따라 새로 구성된 하원 의원으로 선출되는 것은 받아들였다. 그곳에서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이 패배한 후, 라파예트는 그의 퇴위를 요구했다. 황제의 동생 뤼시앵 보나파르트에게 답변하며, 라파예트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어떤 권리로 감히 황제의 이익을 위한 국민의 인내심 부족을 비난하는가? 국민은 이탈리아의 들판, 이집트의 사막, 독일의 평원, 러시아의 얼어붙은 사막을 가로질러 그를 따랐다... 국민은 그의 패배와 승리에서 50번의 전투에서 그를 따랐으며, 그렇게 하면서 우리는 3백만 명의 프랑스인들의 피를 흘렸다."
워털루 전투 4일 후인 1815년 6월 22일, 나폴레옹은 퇴위했다. 라파예트는 전 황제의 미국행을 주선했지만, 영국이 이를 막았고, 나폴레옹은 세인트헬레나섬에서 여생을 마쳤다. 하원은 해산하기 전에 라파예트를 평화 위원회에 임명했지만, 프랑스 대부분을 점령한 승전 연합국들은 이를 무시했고, 프로이센군은 라 그랑주를 본부로 사용했다. 프로이센군이 1815년 말에 떠나자, 라파예트는 다시 평민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파리와 라 그랑주에 있는 라파예트의 집은 독립 혁명의 영웅을 만나고 싶어하는 미국인들과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개방되었다. 아일랜드 소설가 시드니 모건 부인이 1818년 라 그랑주에서 한 달 동안 머무는 동안 식사 자리에서 만난 사람들 중에는 네덜란드 화가 아리 셰페르와 역사가 오귀스탱 티에리도 미국인 관광객과 함께 앉아 있었다. 그 외에도 철학자 제레미 벤담, 미국 학자 조지 틱너, 작가 패니 라이트가 방문했다.
부르봉 왕정복고의 첫 10년 동안 라파예트는 프랑스와 다른 유럽 국가들의 여러 음모를 지원했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그는 다양한 카르보나리 음모에 연루되었고, 프랑스군 주둔지였던 벨포르 시로 가서 혁명 정부에서 주요 역할을 맡기로 동의했다. 왕실 정부가 음모를 알아냈다는 경고를 받고, 그는 노골적인 연루를 피하기 위해 벨포르로 가는 길에서 되돌아왔다. 더 성공적으로는, 그는 1821년에 시작된 그리스 독립 전쟁을 지지했고, 편지를 통해 미국 관리들에게 그리스인들과 동맹을 맺도록 설득하려 했다. 루이 정부는 그리스 독립 노력을 기울이던 라파예트와 조르주 워싱턴을 모두 체포하는 것을 고려했지만, 그렇게 할 경우의 정치적 파급 효과를 우려했다. 라파예트는 1823년까지 복원된 하원 의원으로 남아 있었지만, 새로운 복수 투표 규칙으로 인해 재선에서 낙선했다.
8. 1830년 7월 혁명과 말년
라파예트는 1830년 프랑스 7월 혁명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루이 필리프의 즉위에 기여했으나, 훗날 그의 통치에 실망하여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의 말년은 지속적인 건강 악화와 함께 민주주의 이상을 위한 그의 헌신을 기억하는 국제 사회의 추모 분위기 속에서 마무리되었다.
8.1. 7월 혁명에서의 핵심 역할

라파예트가 프랑스에 도착했을 때, 루이 18세는 사망한 지 약 1년이 되었고, 샤를 10세가 왕위에 있었다. 샤를은 군주의 절대 통치를 복원하려 했고, 라파예트가 도착했을 때 그의 칙령은 이미 항의를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라파예트는 국왕에게 반대하는 가장 저명한 인물이었다. 1827년 선거에서 70세의 라파예트는 다시 하원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결과에 불만을 품은 샤를은 하원을 해산하고 새로운 선거를 명령했는데, 라파예트는 다시 의석을 확보했다.
라파예트는 샤를의 시민 자유 제한과 새로 도입된 언론 검열에 대해 계속해서 거침없이 비판했다. 그는 하원에서 격렬한 연설을 하며 새로운 칙령들을 비난하고 미국식 대의 정부를 옹호했다. 그는 라 그랑주에서 미국인, 프랑스인 등 다양한 손님들을 초대하여 만찬을 열었고, 모두 그의 정치, 자유, 권리, 자유에 대한 연설을 들으러 왔다. 그는 샤를이 안전하게 체포할 수 없을 만큼 인기가 많았지만, 샤를의 스파이들은 철저했다. 한 정부 요원은 "미국 자유를 기리는 그의 [라파예트의] 선동적인 건배사"를 기록했다.
1830년 7월 25일, 국왕은 중산층의 선거권을 박탈하고 하원을 해산하는 7월 칙령에 서명했다. 칙령은 다음 날 공포되었다. 7월 27일, 파리 시민들은 도시 곳곳에 바리케이드를 세우고 폭동을 일으켰다. 이에 맞서 하원은 계속 회의를 가졌다. 라 그랑주에 있던 라파예트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듣고 도시로 달려왔고, 혁명의 지도자로 환영받았다. 동료 의원들이 우유부단하자, 라파예트는 바리케이드로 향했고, 곧 왕실 군대는 패주했다. 1789년 혁명의 과격한 행동이 되풀이될 것을 우려한 의원들은 라파예트를 복원된 국민 위병대의 수장으로 임명하고 질서 유지를 맡겼다. 하원은 그를 통치자로 선포할 의향이 있었지만, 그는 헌법에 위배된다고 판단하여 권력 부여를 거부했다. 그는 또한 8월 2일에 퇴위한 샤를과도 거래하기를 거부했다. 많은 젊은 혁명가들은 공화국을 원했지만, 라파예트는 이것이 내전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했고, 대신 미국에서 살았던 경험이 있고 샤를보다 훨씬 더 서민적이었던 오를레앙 공작 루이 필리프에게 왕위를 제안하기로 결정했다. 라파예트는 루이 필리프에게 여러 개혁을 수용하도록 합의를 받아냈다. 라파예트는 국민 위병대 사령관으로 남아 있었다. 이것은 오래가지 못했다. 국왕 즉위 당시의 짧은 화합은 곧 사라졌고, 하원의 보수적 다수파는 1830년 12월 24일 라파예트의 국민 위병대 직위를 폐지하는 데 투표했다. 라파예트는 다시 은퇴했다.
8.2. 루이 필리프와의 갈등과 최종 은퇴
라파예트는 개혁을 철회하고 약속을 부인한 루이 필리프에게 점점 더 실망했다. 은퇴한 장군은 국왕과 분노에 찬 결별을 했고, 리옹에서 파업을 진압하기 위해 정부가 무력을 사용하면서 이 균열은 더욱 커졌다. 라파예트는 하원 의석을 활용하여 자유주의적 제안을 추진했고, 1831년에는 이웃 주민들이 그를 라 그랑주 마을의 시장으로, 센에마른주의 도의원으로 선출했다. 다음 해, 그는 루이 필리프의 또 다른 반대자였던 장 막시밀리앙 라마르크 장군의 장례식에서 운구자로 참석하여 추도 연설을 했다. 그는 침착함을 호소했지만, 거리에서는 폭동이 일어났고 바스티유 광장에는 바리케이드가 세워졌다. 국왕은 이 6월 봉기를 강제로 진압했고, 라파예트는 이에 격분했다. 그는 1832년 11월 하원이 회의를 열 때까지 라 그랑주로 돌아갔는데, 이때 그는 샤를 10세가 그랬던 것처럼 검열을 도입한 루이 필리프를 비난했다.
8.3. 마지막 투병과 사망

라파예트는 1834년 1월 3일 하원에서 마지막으로 공개 연설을 했다. 다음 달, 그는 장례식에서 폐렴으로 쓰러졌다. 그는 회복되었지만, 다음 5월은 비가 많이 왔고, 그는 뇌우에 노출된 후 병상에 눕게 되었다. 그는 1834년 5월 20일 76세의 나이로 파리 앙주생토노레가 6번지(현재 파리 8구 앙주가 8번지)에서 사망했다. 그는 아내 옆 피크퓌스 묘지에 벙커힐 흙을 아들 조르주 워싱턴 라파예트가 뿌려주며 묻혔다. 루이 필리프 국왕은 대중의 접근을 막기 위해 군사 장례식을 명령했고, 이에 항의하며 군중이 모여들었다.

미국에서는 앤드루 잭슨 대통령이 1799년 12월 사망한 조지 워싱턴에게 베풀었던 것과 같은 추모 의식을 라파예트에게 베풀 것을 명령했다. 양원 의사당은 30일 동안 검은 휘장으로 가려졌고, 의원들은 조의 배지를 착용했다。 의회는 미국인들에게도 유사한 애도 관행을 따를 것을 촉구했다. 그해 말, 전 대통령 존 퀸시 애덤스는 라파예트에 대한 세 시간짜리 추도 연설을 하며 그를 "인류의 순수하고 사심 없는 은인의 명단에 높이 올라있는 인물"이라고 칭했다.
9. 사상과 신념
라파예트는 입헌 군주제의 확고한 신봉자였다. 그는 전통적인 이상과 혁명적인 이상이 민주적인 국민 의회가 군주와 협력함으로써 융합될 수 있다고 믿었다.
9.1. 정치적 이념과 입헌 군주제
그의 정치적 이념과 입헌 군주제에 대한 그의 신념은 조지 워싱턴과 토머스 제퍼슨과 같은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과의 긴밀한 관계 덕분에 민주주의 체제의 구현을 직접 목격할 수 있었던 기회에서 비롯되었다. 프랑스의 잠재적인 정부 구조에 대한 그의 견해는 영국 정부 형태의 영향을 받은 미국 정부 형태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예를 들어, 라파예트는 미국처럼 양원제를 믿었다. 자코뱅파는 프랑스에서 군주제라는 생각 자체를 혐오했고, 이로 인해 국민 의회는 이에 반대 투표를 했다. 이러한 생각은 특히 막시밀리앵 로베스피에르가 권력을 잡았을 때 그의 몰락에 기여했다.
9.2. 노예 제도 폐지론
라파예트는 1789년 인권 선언의 저자이자 노예 제도에 대한 확고한 반대자였다. 그의 저작물에서 노예 제도를 명시적으로 언급한 적은 없지만, 워싱턴과 제퍼슨 같은 친구 및 동료들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이 논란의 여지가 있는 문제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는 노예가 소유되지 않고 농장주의 땅에서 자유로운 소작인으로 일해야 한다고 제안했으며, 자신의 아이디어를 실천에 옮기기 위해 1785년과 1786년에 카옌에 세 곳의 노예 플랜테이션을 구입하여 플랜테이션의 노예 70명 중 어느 누구도 사고팔지 못하게 명령했다. 그는 노예들을 해방시키지 않았으며, 1795년에 프랑스 당국이 그의 재산을 몰수했을 때, 세 플랜테이션에 남아 있던 노예 63명은 카옌 식민지 관리들에 의해 팔렸다. 그는 노예 제도가 많은 경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인식하면서도 노예들을 점진적으로 해방시켜야 한다고 제안하며 평생을 노예 폐지론자로 보냈다. 라파예트는 자신의 아이디어가 워싱턴에게 채택되어 미국에서 노예가 해방되고 거기서부터 확산되기를 희망했다. 워싱턴은 결국 마운트 버넌 자신의 플랜테이션에서 그러한 관행을 시행하기 시작했지만, 그는 죽는 날까지 노예를 소유했다. 매튜 클락슨, 필라델피아 시장에게 보낸 편지에서 라파예트는 "만약 제가 그것으로 인해 노예의 땅을 세우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더라면, 저는 결코 미국의 대의를 위해 칼을 뽑지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썼다.
10. 유산과 역사적 평가
라파예트는 계몽주의 시대의 이상을 구현한 인물로서, 프랑스와 미국 양국의 민주주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양국에서 다소 복합적으로 나타나지만, 인류 보편적 가치에 대한 그의 헌신은 높이 평가된다.
10.1. 미국에서의 평가

평생 동안 라파예트는 계몽 시대의 이상, 특히 인권과 시민적 민족주의의 옹호자였으며, 그의 견해는 대서양 양안의 지식인들과 다른 사람들에게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여졌다. 미국에서의 그의 이미지는 자신의 나라가 아닌 다른 나라의 자유를 위해 무급으로 싸운 그의 "사심 없음"에서 비롯되었다. 새뮤얼 애덤스는 그가 "가정생활의 즐거움을 포기하고 자유라는 영광스러운 대의를 위해" 전쟁의 고난과 위험에 몸을 던진 것을 칭찬했다. 이러한 견해는 많은 동시대인들에 의해 공유되었으며, 라파예트가 한 나라의 이익이 아니라 모든 인류의 자유를 증진하려 한다는 이미지를 확립했다. 프랑스 혁명 동안 미국인들은 그를 미국 이상을 옹호하고 신세계에서 구세계로 옮기려 하는 인물로 보았다. 이는 국부이자 미국 이상을 구현한 인물로 여겨지던 조지 워싱턴의 대리 아들이자 제자로서의 그의 위치에 의해 더욱 강화되었다. 소설가 제임스 페니모어 쿠퍼는 1820년대 파리에 머무는 동안 라파예트와 친구가 되었다. 그는 라파예트의 귀족적 자유주의를 칭송했으며, 그를 "자유의 원칙에 젊음, 인격, 재산을 바친" 인물로 찬양했다.
라파예트가 미국의 상징이 된 이유 중 하나는 그가 미국 내 특정 지역과 관련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외국에서 태어났고, 미국에 거주하지 않았으며, 뉴잉글랜드, 중부 대서양 주, 남부에서 싸웠기 때문에 통일된 인물로 자리매김했다. 프랑스 혁명에서의 그의 역할은 그가 중도를 지키려 했다는 점에서 이러한 인기를 더욱 높였다. 미국인들은 공화주의적 대의에 본능적으로 공감했지만, 루이 16세를 미국의 초기 친구로 기억하기도 했다. 1792년 라파예트가 실각했을 때, 미국인들은 그를 당파를 초월한 인물로 보았기에, 그의 해임을 당파주의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었다.

1824년 라파예트는 1819년 공황과 미주리 타협으로 인한 지역 갈등으로 공화국의 성공에 의문을 제기하던 시기에 미국을 방문했다. 라파예트를 초대한 이들은 그를 독립의 성공 여부를 판단할 인물로 여겼다. 문화 역사가 로이드 크레이머에 따르면, 라파예트는 "19세기 초 미국 국가 정체성을 형성하고 이후에도 국가 이데올로기의 지배적인 주제로 남아 있는 자아상, 즉 미국의 건국의 아버지, 제도, 자유가 세계에서 가장 민주적이고 평등하며 번영하는 사회를 만들었다는 믿음에 대한 외국의 확증을 제공했다."
역사가 질베르 시나르는 1936년에 다음과 같이 썼다: "라파예트는 너무 일찍이 전설적인 인물이자 상징이 되었고, 후대 세대는 그 신화를 너무나 기꺼이 받아들였기에, 젊은 영웅에게서 그의 공화주의적 후광을 빼앗으려는 어떤 시도도 거의 우상 파괴적이고 신성 모독적인 것으로 간주될 것이다." 그 전설은 정치적으로 이용되었다. 1917년 제1차 세계 대전에 미국의 참전을 위한 대중적 지지를 얻기 위해 라파예트의 이름과 이미지가 반복적으로 언급되었고, 이는 찰스 E. 스탠턴의 유명한 발언 "라파예트, 우리가 여기 있습니다"로 절정에 달했다. 이는 미국 내 라파예트의 이미지에 어느 정도 손실을 가져왔다. 전선에서 돌아온 참전 용사들은 "우리는 라파예트에게 빚을 갚았으니, 이제 누구에게 빚을 졌는가?"라고 노래했다. 앤 C. 러브랜드에 따르면, 전쟁이 끝날 무렵 "라파예트는 더 이상 국가적 영웅 상징으로 기능하지 않았다." 그러나 2002년, 의회는 그에게 명예 시민권을 부여하기로 투표했다.
10.2. 프랑스에서의 평가
라파예트의 프랑스 내 평판은 더 복잡하다. 토머스 게인스는 라파예트의 죽음에 대한 반응이 미국보다 프랑스에서 훨씬 더 잠잠했다고 지적하며, 이는 프랑스 정부의 변화가 훨씬 더 혼란스러웠던 반면, 미국에서는 라파예트가 유일한 혁명의 마지막 살아남은 영웅이었기 때문일 수 있다고 시사했다. 라파예트의 역할은 프랑스 역사학, 특히 프랑스 혁명에서 그에 대한 더 미묘한 그림을 그렸다. 19세기 역사가 쥘 미슐레는 그를 그의 재능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보다 훨씬 더 군중에게 추대된 "평범한 우상"이라고 묘사했다. 장 튈라르, 장프랑수아 파야르, 알프레 피에로는 그들의 '프랑스 혁명의 역사와 사전'에서 나폴레옹의 임종 시 라파예트에 대한 발언을 언급했다. 그는 만약 자신이 프랑스 혁명 당시 라파예트의 위치에 있었다면 "국왕은 여전히 왕위에 앉아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라파예트를 "텅 빈 정치적 난쟁이"이자 "프랑스 군주제 파괴에 가장 책임이 있는 사람들 중 한 명"으로 평가했다. 게인스는 이에 동의하지 않았고, 자유주의적이고 마르크스주의적 역사가들도 이러한 견해에 반대했다고 지적했다. 로이드 크레이머는 1989년 혁명 200주년 직전 실시된 설문조사에서 프랑스인의 57%가 라파예트를 혁명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았다고 전했다. 라파예트는 "1990년대 초에는 1790년대 초보다 분명히 더 많은 프랑스 지지자들을 모을 수 있었다."
마크 립슨은 라파예트의 삶에 대한 그의 연구를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라파예트 후작은 결코 완벽하지 않았다. 그는 때때로 허영심이 많고, 순진하며, 미숙하고, 자기중심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이상을 일관되게 고수했으며, 심지어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위태롭게 할 때도 그러했다. 그러한 이상은 세계에서 가장 지속적인 두 국가, 미국과 프랑스의 건국 원리가 되었음을 증명했다. 이는 몇몇 군사 지도자, 정치인, 또는 정치가가 견줄 수 있는 유산이다."
10.3. 전반적인 기여와 영향
라파예트는 프랑스와 미국 양국의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한 전반적인 업적과 인류 보편적 가치에 대한 그의 헌신은 매우 높이 평가된다. 그는 인권, 자유, 평등의 원칙을 확산시키는 데 기여했으며, 특히 노예 제도 폐지론에 대한 그의 선구적인 노력은 그를 시대를 앞서간 인물로 만들었다. 그의 삶은 이상주의적인 열정과 실용적인 정치적 행보가 교차하는 복합적인 양상을 띠지만, 궁극적으로 그는 자유와 정의를 위한 투쟁에 일생을 바친 '두 세계의 영웅'으로 기억되고 있다.
11. 추모와 기념물

라파예트를 기리기 위해 수많은 기념물, 동상, 장소 등이 프랑스와 미국에 세워졌다. 그는 특히 미국에서 '국빈'으로 불리며 지속적인 존경을 받았다.
미국에서는 라파예트 공원(워싱턴 D.C.)과 라파예트 칼리지(펜실베이니아주 이스턴), 그리고 페이엣빌을 포함한 수많은 도시와 군, 지명들이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1899년에는 라파예트 은화가 발행되었고, 1952년, 1957년, 1977년에는 그의 미국 도착 및 탄생을 기념하는 우표가 발행되었다.

이 우표들은 라파예트의 미국에 대한 헌신과 미국 독립 전쟁에서의 그의 중요한 역할을 기리기 위해 발행되었다.
1958년에는 프랑스에서 복무한 미국 장교들에게 수여하는 라파예트 훈장이 제정되었다. 라파예트는 1824년과 2002년 두 차례에 걸쳐 미국 명예 시민권을 받은 유일한 인물이다.
프랑스에서는 1780년 라파예트를 미국으로 데려다준 프리깃함 '에르미온'의 복원선이 로슈포르에 건조되었다. 파리의 라파예트 거리는 유명한 백화점 갤러리 라파예트의 이름의 기원이 되기도 했다. 2007년 그의 유해를 팡테옹에 안치하는 것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나, 그의 공화주의 사상에 대한 논쟁으로 인해 결정되지 못했다.
라파예트의 묘지는 파리 피크퓌스 묘지에 있으며, 그의 유언에 따라 벙커힐의 흙이 뿌려져 있다. 이는 미국 독립의 대의를 위한 그의 헌신을 상징하는 영원한 표식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