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지미 존스톤은 어린 시절부터 축구에 대한 남다른 재능을 보였으며, 체계적인 교육과 개인적인 노력을 통해 그 재능을 발전시켰다.
1.1. 어린 시절과 교육
존스톤은 1944년 9월 30일, 노스 래너크셔의 뷰파크에 있는 올드 에든버러 로드에 위치한 집에서 매튜와 사라 존스톤 부부의 다섯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뷰파크의 세인트 콜럼버스 초등학교와 어딩스톤의 세인트 존스 중등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의 축구 실력은 초등학교 때부터 두각을 나타냈는데, 1953-54 시즌 세인트 콜럼버스 팀이 세 개의 트로피를 차지하는 데 기여했다. 중등학교인 세인트 존스 축구팀은 그보다 실력이 떨어졌지만, 체육 교사인 토미 캐시디가 당시 셀틱에서 뛰던 새미 윌슨의 친구였다. 캐시디는 자신의 인맥을 활용하여 존스톤이 셀틱의 볼보이로 활동할 수 있도록 주선했다.
존스톤은 집에서 매일 복도를 따라 우유병을 드리블하며 몇 시간씩 기술을 연마했다. 또한 스탠리 매튜스가 다리 근육 강화를 위해 무거운 부츠를 신고 블랙풀 경기장까지 걸어갔다는 이야기를 읽고, 자신도 작업용 부츠를 신고 스프린트와 축구를 하며 훈련했다. 그는 이 훈련이 자신의 "속도를 약 3 yd 정도 더 빠르게 만들었다"고 회고했다.
1.2. 유소년 축구 경력
셀틱의 볼보이로 활동하는 것에 대한 설렘에도 불구하고, 존스톤은 직접 축구를 하고 싶어 했다. 그는 셀틱을 떠나 지역 소년 길드 팀에서 뛰기 시작했다. 이 팀은 지역 경기뿐만 아니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유소년 팀과 경기를 하기 위해 원정 경기도 다녔다. 존스톤의 뛰어난 실력은 잉글랜드의 거대 클럽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눈길을 사로잡았지만, 스코틀랜드로 돌아온 후 셀틱 스카우트 존 히긴스의 설득으로 셀틱과 계약하게 되었다. 그는 몇 마일 떨어진 곳에 살던 왼쪽 수비수 토미 게멜과 같은 날 유소년 계약을 맺었다. 경험을 쌓기 위해 존스톤은 주니어 클럽인 블랜타이어 셀틱으로 임대되었다.
2. 클럽 경력
지미 존스톤은 셀틱 FC에서 전설적인 선수 생활을 보냈으며, 이후 여러 클럽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2.1. 셀틱 FC
존스톤은 1963년 3월 27일 킬마녹과의 리그 원정 경기에서 6대0으로 패하며 셀틱 1군 데뷔전을 치렀다. 한 달 뒤 하츠와의 원정 경기에서 다시 출전하여 4대3으로 패했지만, 자신의 첫 성인 무대 골을 기록했다. 비록 패배했지만, 존스톤의 활약은 1963년 5월 4일 스코틀랜드 컵 결승전 레인저스와의 경기에 출전할 기회를 안겨주었다. 젊은 윙어는 자신감 넘치는 드리블로 훌륭한 활약을 펼치며 셀틱의 1대1 무승부에 기여했다. 그는 또한 골을 넣었지만, 팀 동료 존 휴스의 파울로 인해 취소되었다. 존스톤은 재경기에서 제외되었고, 셀틱은 레인저스에게 3대0으로 완패했다.
다음 시즌 존스톤은 팀의 주전 선수로 자리 잡았다. 그는 리그 25경기에 출전하여 6골을 기록했다. 또한 셀틱이 유러피언 컵 위너스컵 준결승에 진출하는 데 기여했는데, 1라운드 FC 바젤과의 홈 경기에서 5대0 승리 시 득점했고, 준결승 1차전 MTK 부다페스트와의 경기에서 3대0 승리 시에도 득점했다. 그러나 셀틱은 헝가리에서 열린 2차전에서 4대0으로 패하며 합계에서 탈락했다.
셀틱은 1960년대 내내 고전하고 있었으나, 1965년 조크 스틴이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전환점을 맞았다. 당시 존스톤은 주전 자리를 지키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스틴은 존스톤을 너무 개인적인 선수로 여겨 팀 전체에 해가 된다고 판단했으며, 1965년 스코틀랜드 컵 결승전에서 그를 제외하기도 했다. 그러나 존스톤은 곧 자신의 기술로 스틴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1965년 10월 23일 스코틀랜드 리그 컵 결승전에서 레인저스를 2대1로 꺾고 셀틱의 첫 우승 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 시즌 그의 리그 32경기 출전과 9골은 셀틱이 12년 만에 첫 리그 우승을 차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존스톤은 또한 고 어헤드 이글스를 상대로 두 골을 넣으며 셀틱이 두 번째 유럽 준결승에 진출하는 데 기여했으나, 리버풀에 합계 2대1로 패하며 컵 위너스컵에서 탈락했다.
존스톤은 1967년 셀틱이 유러피언컵을 우승한 리스본 라이온스의 일원이었다. 낭트와의 초기 라운드 경기에서 존스톤의 교묘한 윙 플레이는 프랑스 언론으로부터 "날아다니는 벼룩"이라는 별명을 얻게 했다. 그 시즌 그의 활약은 유럽 올해의 축구 선수 투표에서 3위를 차지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유러피언컵 우승 2주 후인 1967년 6월 7일, 셀틱은 은퇴한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의 기념 경기를 위해 레알 마드리드와 경기를 치렀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스타디움에서 10만 명이 넘는 팬들 앞에서 열린 이 경기는 치열한 접전 끝에 버티 올드와 레알 마드리드의 아만시오가 퇴장당하는 상황까지 발생했다. 디 스테파노는 처음 15분 동안 뛰었지만, 경기 내내 스페인 서포터즈들조차 "올레!"를 외치게 할 정도로 짜릿한 활약을 펼친 것은 지미 존스톤이었다. 존스톤은 보비 레녹스에게 패스를 연결하여 셀틱이 1대0으로 승리하는 유일한 골을 만들어내며 뛰어난 활약을 마무리했다.

존스톤은 비행 공포증이 있었는데, 조크 스틴 감독은 이를 한 번은 매우 효과적으로 활용했다. 1968년 11월 레드 스타 베오그라드와의 유러피언컵 1차전 홈 경기를 앞두고, 스틴은 존스톤에게 셀틱이 4골 차로 이기면 유고슬라비아로 떠나는 2차전 원정 경기에 가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존스톤은 이 경기에서 두 골을 넣고 다른 세 골을 어시스트하며 5대1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1969-70 시즌 셀틱이 또 다른 유러피언컵 결승전에 진출하는 데 기여했다. 특히 햄던 파크에서 열린 리즈 유나이티드와의 준결승 2차전에서의 활약은 매우 뛰어났으며, 후반 그의 현란한 돌파는 보비 머독의 강력한 슛으로 이어져 셀틱의 2대1 승리 골을 만들어냈다. 리즈의 수비수 테리 쿠퍼는 나중에 "징키를 차고 싶었지만, 그에게 가까이 갈 수조차 없었다!"고 농담하기도 했다. 빌리 브렘너는 존스톤의 활약을 "내가 본 가장 위대한 전시 중 하나"라고 묘사하며 "지미는 막을 수 없는 경기를 펼쳤다"고 덧붙였다. 셀틱은 결승전에서 페예노르트와 맞붙었지만, 존스톤이 항상 이중 마크를 당하면서 1967년 결승전처럼 활약할 수 없었다. 페예노르트가 경기를 지배했고, 연장전 끝에 셀틱을 2대1로 꺾었다.
존스톤은 셀틱에서 총 리그 308경기에 출전하여 82골을 기록했다. 또한 스코틀랜드 컵, 리그 컵, 유럽 대회에서 207경기에 더 출전하여 총 515경기를 소화했다. 그는 1968년과 1969년에도 발롱도르 후보에 올라 각각 24위와 23위를 기록했다.
2.2. 후기 클럽 경력
셀틱을 떠난 후 존스톤은 새너제이 어스퀘이크스, 셰필드 유나이티드, 던디, 셸본, 그리고 엘진 시티에서 뛰었다. 던디에서의 감독은 전 팀 동료였던 토미 게멜이었다. 그러나 존스톤은 셀틱에서 방출된 후 다른 클럽에서 뛰는 것에 대한 동기를 잃어버렸고, 던디에서의 짧은 기간 동안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고 나중에 진술했다. 그는 1979년 엘진 시티에서 은퇴했다.
3. 국가대표 경력
존스톤은 스코틀랜드 국가대표팀에서도 활약하며 중요한 순간들을 만들어냈다.
그는 1964년 2월 5일 스코틀랜드 U-23 대표팀으로 잉글랜드 U-23과의 친선 경기에서 2대0으로 패하며 국제 무대에 데뷔했다. 그해 5월에는 프랑스 U-23 원정 경기에서 3대0 승리를 거두며 U-23 대표팀에서 한 경기를 더 뛰었다.
성인 스코틀랜드 국가대표팀 데뷔는 1964년 10월 3일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 웨일스전에서 레인저스의 윙어 윌리 헨더슨을 대신하여 출전했다. 그는 스코틀랜드의 두 번째 골로 이어진 플레이에 관여했지만, 경기는 웨일스의 3대2 승리로 끝났다. 같은 달 햄던 파크에서 열린 월드컵 예선 핀란드전에서도 출전했지만, 스코틀랜드는 3대1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존스톤의 경기력은 "정확성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인상적이지 못했다.
존스톤은 1966년 4월 2일 햄던 파크에서 열린 잉글랜드와의 경기에서 4대3으로 패했지만, 자신의 첫 두 국제 골을 기록하며 다시 스코틀랜드 대표팀에서 뛰게 되었다. 첫 골은 스코틀랜드가 4대1로 뒤지고 있을 때 데니스 로의 패스를 받아 잉글랜드 수비진을 제치고 고든 뱅크스 골키퍼를 가까운 거리에서 뚫어냈다. 그는 짐 백스터의 프리킥을 받아 골문으로 향하는 공을 쫓아가 골대 하단을 맞고 들어가는 강력한 슛으로 스코틀랜드의 또 다른 골을 기록했다. 존스톤은 데니스 로와 함께 스코틀랜드 최고의 활약을 펼친 선수 중 한 명으로 평가받았으며, 그의 플레이로 인해 잉글랜드의 노비 스타일스는 그에게 거친 태클을 가해 경고를 받기도 했다. 존스톤은 스코틀랜드 대표팀에서 간헐적으로 계속 뛰었으며, 다음 국제 골은 1969년 10월 22일 서독과의 월드컵 예선 원정 경기에서 기록했지만, 스코틀랜드는 3대2로 패했다.
1974년 5월, 1974년 FIFA 월드컵을 앞두고 햄던 파크에서 잉글랜드와의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 경기를 며칠 앞둔 시점, 존스톤과 다른 스코틀랜드 팀 동료들은 에어셔 라지스의 호텔에서 술을 마셨다. 새벽녘에 일행은 해변으로 향했고, 존스톤은 노 젓는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다. 그러나 배에는 노를 고정하는 장치가 없어 존스톤은 조류에 휩쓸려 바다 한가운데에 고립되었다. 바다에서 표류하던 존스톤은 해안경비대에 의해 구조되었고, 이 사건은 며칠 동안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이러한 당혹스러운 헤드라인에도 불구하고, 존스톤은 잉글랜드와의 경기에서 2대0 승리에 기여하는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존스톤은 1974년 여름 서독에서 열린 월드컵 스코틀랜드 대표팀 명단에 포함되었지만, 세 경기 모두 출전하지는 못했다.
그는 스코틀랜드 국가대표팀에서 총 23경기에 출전하여 4골을 기록했다.
4. 선수 시절 플레이 스타일
지미 존스톤은 스코틀랜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작은 체구의 윙어였다. 그는 특유의 기술과 드리블 능력으로 유명했다.
그의 별명인 "징키"(Jinky영어)는 상대를 현혹시키는 그의 드리블 스타일에서 유래했다. 그는 쉽게 수비수를 제칠 수 있었고, 안쪽으로 파고들어 직접 득점하거나 동료의 골에 기여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휴 매킬베니는 존스톤이 "그 어떤 선수보다도 복잡하고 집중된 기만적인 움직임으로 상대를 압도했으며, 공으로 경이로운 일을 해내는 데 있어 더할 나위 없는 환희를 전달했다"고 극찬했다. 또한 로저 베일리는 그를 "마법과 장난으로 살았던 천재"라고 표현하며 그의 독특한 플레이 스타일을 강조했다.
5. 개인적인 삶과 말년
존스톤은 선수 경력 이후 개인적인 어려움을 겪었으나, 질병과의 싸움 속에서도 사회 활동과 기념 사업을 통해 긍정적인 유산을 남겼다.
5.1. 질병과 사회 활동
선수 경력이 끝난 후, 존스톤의 알코올 문제는 가족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악화되었다. 1992년, 그는 자신의 메달을 팔기 위해 글래스고 사업가이자 셀틱 팬인 윌리 호기에게 접근했다. 호기는 메달을 사는 대신 존스톤의 중독 극복을 위한 지원과 지도를 제공했고, 두 사람은 이후에도 절친한 친구로 남았다.
2001년 11월, 존스톤은 불치병인 근위축성 측색 경화증 (MND) 진단을 받았다. 이후 그는 이 질병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기 위한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자선 모금 행사에 참여하고 줄기세포 연구를 강력히 지지했다. 또한 심플 마인즈의 짐 커와 함께 〈더티 올드 타운〉의 리메이크 버전을 발표하기도 했다.
5.2. 다큐멘터리 및 기념 사업
존스톤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지미 존스톤: 로드 오브 더 윙(Lord of the Wing영어)은 제이미 도란이 제작하고 스코틀랜드의 희극인 빌리 코널리가 내레이션을 맡았으며, 2004년 4월 25일 BBC에서 처음 방영되었다.
2005년 6월, 칼 파베르제의 증손녀인 사라 파베르제는 존스톤과 관련된 19개의 보석 장식 달걀을 제작하여 선보였다.
6. 사망 및 유산
지미 존스톤은 근위축성 측색 경화증과의 긴 싸움 끝에 2006년 사망했으며, 그의 죽음은 축구계와 대중에게 깊은 슬픔을 안겼다. 그의 삶과 업적은 다양한 기념 사업을 통해 후대에 기려지고 있다.
존스톤은 2006년 3월 13일, 61세의 나이로 어딩스톤에 있는 자택에서 사망했다. 그의 사망 소식은 5년 전 불치병인 근위축성 측색 경화증 진단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전해졌다. 그에게 마지막으로 전화를 건 사람은 오랜 레인저스의 라이벌이었지만 절친한 친구가 된 윌리 헨더슨이었다.
장례식이 열린 2006년 3월 17일, 셀틱 파크 밖에는 셀틱 팬들을 포함하여 숙적 레인저스 팬 등 수많은 클럽의 팬들이 모여 그를 추모했다. 2006년 셀틱과 던펌린 애슬레틱 간의 스코틀랜드 리그 컵 결승전 전에도 존스톤을 기리는 추모식이 거행되었다. 경기 전 1분간의 박수가 있었고, 셀틱 선수단 전원은 그의 등번호인 7번이 새겨진 반바지를 입고 경기에 임했다.
존스톤은 2004년 스코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그의 유산은 동상으로도 기려지고 있다. 2008년에는 케이트 로빈슨이 제작한 존스톤의 청동 동상이 셀틱 파크 정문 앞에 세워졌다. 2011년에는 존 매케나가 제작한 존스톤의 동상과 기념 정원이 뷰파크의 올드 에든버러 로드에 있는 그의 옛 학교 부지에 조성되었다. 이 정원은 존스톤의 아내와 가족, 그리고 살아남은 리스본 라이온스 팀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개장되었다. FIFA 100에 선정된 네덜란드의 위대한 선수 롭 렌센브링크는 존스톤을 세계적인 스코틀랜드 축구 선수 중 최고로 꼽았다.
7. 수상 경력
지미 존스톤은 선수 경력 동안 클럽과 국가대표팀에서 수많은 우승을 차지했으며, 개인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 셀틱
- 스코틀랜드 1부 리그 (9회): 1965-66, 1966-67, 1967-68, 1968-69, 1969-70, 1970-71, 1971-72, 1972-73, 1973-74
- 스코틀랜드 컵 (4회): 1966-67, 1970-71, 1971-72, 1973-74
- 스코틀랜드 리그 컵 (5회): 1965-66, 1966-67, 1968-69, 1969-70, 1974-75
- 유러피언컵: 1967
- 준우승: 1970
; 스코틀랜드
-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 (4회): 1966-67, 1969-70, 1971-72, 1973-74
; 개인
- 발롱도르 (3위): 1967
- 로스만스 골든 부츠 어워드: 1970, 1972
8. 경력 통계
8.1. 클럽
클럽 | 시즌 | 디비전 | 리그 | 내셔널 컵 | 리그 컵 | 대륙 대회 | 기타 | 합계 | ||||||
---|---|---|---|---|---|---|---|---|---|---|---|---|---|---|
출전 | 득점 | 출전 | 득점 | 출전 | 득점 | 출전 | 득점 | 출전 | 득점 | 출전 | 득점 | |||
셀틱 | 1962-63 | 스코틀랜드 1부 리그 | 4 | 1 | 1 | 0 | 0 | 0 | 0 | 0 | 0 | 0 | 5 | 1 |
1963-64 | 25 | 6 | 4 | 2 | 2 | 0 | 7 (컵 위너스컵) | 2 | 4 (글래스고 컵) | 0 | 42 | 10 | ||
1964-65 | 24 | 1 | 1 | 0 | 10 | 3 | 4 (페어스컵) | 0 | 1 (글래스고 컵) | 0 | 40 | 4 | ||
1965-66 | 32 | 9 | 7 | 1 | 8 | 1 | 7 (컵 위너스컵) | 3 | - | 54 | 14 | |||
1966-67 | 25 | 13 | 5 | 0 | 10 | 1 | 9 (유러피언컵) | 2 | 2 (글래스고 컵) | 0 | 51 | 16 | ||
1967-68 | 29 | 5 | 1 | 0 | 8 | 5 | 2 (유러피언컵) | 0 | 5 (인터콘티넨탈컵 3회, 글래스고 컵 2회 1골) | 1 | 45 | 11 | ||
1968-69 | 31 | 5 | 6 | 2 | 8 | 0 | 5 (유러피언컵) | 2 | 0 | 0 | 50 | 9 | ||
1969-70 | 27 | 10 | 4 | 1 | 6 | 0 | 9 (유러피언컵) | 0 | 0 | 0 | 46 | 11 | ||
1970-71 | 30 | 8 | 8 | 2 | 9 | 5 | 4 (유러피언컵) | 4 | 1 (글래스고 컵) | 0 | 52 | 19 | ||
1971-72 | 23 | 9 | 2 | 0 | 8 | 1 | 6 (유러피언컵) | 0 | 1 (드라이브로 컵) | 0 | 40 | 10 | ||
1972-73 | 22 | 7 | 7 | 2 | 7 | 1 | 3 (유러피언컵) | 0 | 2 (드라이브로 컵) | 3 | 41 | 13 | ||
1973-74 | 15 | 3 | 2 | 1 | 9 | 1 | 6 (유러피언컵) | 3 | 0 | 0 | 32 | 8 | ||
1974-75 | 19 | 5 | 0 | 0 | 7 | 3 | 2 (유러피언컵) | 0 | 3 (드라이브로 컵) | 1 | 31 | 9 | ||
합계 | 306 | 82 | 48 | 11 | 92 | 21 | 64 | 16 | 19 | 5 | 529 | 135 | ||
새너제이 어스퀘이크스 | 1975 | 북미 축구 리그 | 9 | 0 | - | - | - | - | 9 | 0 | ||||
셰필드 유나이티드 | 1975-76 | 잉글랜드 1부 디비전 | 6 | 1 | 1 | 0 | 0 | 0 | - | 1 (셰필드 앤 홀럼셔 카운티 컵) | 0 | 8 | 1 | |
1976-77 | 잉글랜드 2부 디비전 | 5 | 1 | 0 | 0 | 0 | 0 | - | 0 | 0 | 5 | 1 | ||
합계 | 11 | 2 | 1 | 0 | 0 | 0 | - | 1 | 0 | 13 | 2 | |||
던디 | 1977-78 | 스코틀랜드 1부 디비전 | 3 | 0 | 0 | 0 | 0 | 0 | - | 0 | 0 | 3 | 0 | |
총합계 | 329 | 84 | 49 | 11 | 92 | 21 | 64 | 16 | 20 | 5 | 554 | 137 |
8.2. 국제 경기 출전
스코틀랜드 국가대표팀 | ||
---|---|---|
연도 | 출전 | 득점 |
1964 | 2 | 0 |
1965 | - | |
1966 | 2 | 2 |
1967 | 2 | 0 |
1968 | 1 | 0 |
1969 | 2 | 1 |
1970 | 2 | 0 |
1971 | 4 | 0 |
1972 | 2 | 0 |
1973 | - | |
1974 | 6 | 1 |
합계 | 23 | 4 |
8.3. 국제 경기 득점
:스코어와 결과는 스코틀랜드의 득점을 먼저 표기한다.
# | 날짜 | 경기장 | 상대 | 스코어 | 결과 | 대회 |
---|---|---|---|---|---|---|
1 | 1966년 4월 2일 | 햄던 파크, 글래스고 | ENG잉글랜드영어 | 2-3 | 3-4 | 1965-66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 |
2 | 1966년 4월 2일 | 햄던 파크, 글래스고 | ENG잉글랜드영어 | 3-4 | 3-4 | 1965-66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 |
3 | 1969년 10월 22일 | 폴크스파르크슈타디온, 함부르크 | FRG서독영어 | 1-0 | 2-3 | 1970년 월드컵 예선 |
4 | 1974년 6월 1일 | 클로케 스타디온, 브뤼헤 | BEL벨기에영어 | 1-1 | 1-2 | 친선 경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