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주앙 카를루스 드 살다냐의 초기 생애와 가족 배경, 그리고 브라질에서의 활동은 그의 군사적, 정치적 경력의 초석을 다졌다.
1.1. 출생, 가족 관계 및 교육
살다냐는 1790년 11월 17일, 포르투갈의 아진하가에서 태어났다. 그는 주제 1세 국왕의 국무장관이었던 폼발 후작의 손자로, 명망 있는 가문에서 성장했다. 살다냐는 코임브라 대학교에서 학업을 마쳤으며, 이는 그의 지적 기반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1.2. 초기 경력과 브라질에서의 활동
살다냐는 학업을 마친 후 프랑스 제1제국에 맞서 군 복무를 시작했으며, 1810년에는 포로가 되기도 했다. 석방된 후 그는 브라질로 건너가 군사 및 외교 분야에서 활동했다. 브라질에서는 1821년부터 1822년까지 히우그란지두술주의 주지사를 역임했으며, 이후 1822년에는 히우그란지두술의 지방 총독으로 재직했다. 브라질 독립 선언 이후 그는 포르투갈로 귀국했다.
2. 정치 및 군사 경력
살다냐의 경력은 1820년 자유주의 혁명부터 그의 사망에 이르기까지 포르투갈의 전쟁과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그는 여러 차례의 쿠데타와 고위직 재임을 통해 포르투갈의 역사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2.1. 자유주의 전쟁과 초기 각료 활동
일반적으로 '살다냐 공작'으로 알려진 그는 페드루 4세와 그의 동생 미겔 1세 사이의 자유주의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1825년에 외무장관으로 임명되었고, 1826년부터 1827년까지 포르투의 총독을 지냈다.

살다냐는 찬탈자 미겔에 맞서 페드루 편에 합류했으며, 벨파스타다 전투, 포르투 공방전, 알모스테르 전투 등 주요 전투에 참전했다. 1833년, 그는 포르투갈군의 원수 칭호를 받았고, 이듬해인 1834년에는 패배한 찬탈자 미겔과 에보라몬트 조약을 체결하며 전쟁을 종결시키는 데 기여했다.
2.2. 첫 번째 총리직과 망명기
1835년, 살다냐는 포르투갈의 전쟁장관 겸 국무회의 의장으로 임명되었으며, 이는 그의 첫 번째 총리직(제3대 총리)이었다. 그러나 같은 해에 사임했다. 그는 1836년 9월 혁명을 선동했으며, 이후 망명길에 올랐다가 1846년에 귀국 요청을 받았다.
2.3. 정권 복귀와 헤네라상 시대
1846년 망명에서 돌아온 살다냐는 살다냐 공작으로 승작되었다. 그는 1846년부터 1849년까지 내각을 구성하고 이끌었으나, 1849년에 해체되었다. 1851년, 그는 다시 한번 새로운 반란을 조직하여 셉템브리스트와 불만을 품은 차티스트들의 연합 정당을 이끌고 최고 장관이 되었다. 그는 1856년 페드루 5세가 즉위할 때까지 권력을 유지했으며, 이 기간은 포르투갈의 '헤네라상'(Regeneration, 재생) 시대로 불린다.
2.4. 후기 정부 역할과 마지막 대사직
살다냐는 이후 1862년부터 1864년, 그리고 1866년부터 1869년까지 로마 주재 대사를 역임하며 외교 무대에서도 활동했다. 1870년 5월부터 8월까지는 잠시 다시 총리직을 수행했는데, 당시 80세가 넘는 고령임에도 루이스 1세 재위 초기 쿠데타를 감행하며 여전한 정치적 영향력을 보여주었다. 1871년, 그는 런던 주재 대사로 파견되었고,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3. 사상 및 저작
살다냐는 군사 및 정치 분야의 업적 외에도 뛰어난 지적 능력과 학식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3.1. 지적 관심사와 언어 능력
그는 숙련된 언어학자로,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또한 그는 다양한 분야에 걸친 학식을 갖춘 박식한 학자였다.
3.2. 출판된 철학 저작
살다냐는 "진정한 과학과 계시 종교의 연관성에 대하여(On the Connexion between true Sciences and Revealed Religion온 더 코넥션 비트윈 트루 사이언시즈 앤 리빌드 릴리전영어)"라는 제목의 철학 저서를 저술했으며, 이 책은 베를린에서 출판되었다.
4. 개인 생활 및 가족
살다냐는 개인적인 삶에 대한 정보가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의 가족 관계에 대한 일부 기록이 남아있다. 그의 아들은 1845년 베를린에서 사망했다.
5. 사망
주앙 카를루스 드 살다냐는 1876년 11월 20일(일부 기록에서는 11월 21일) 런던에서 사망했다. 당시 그는 포르투갈의 런던 주재 대사로 재직 중이었다.
6. 유산과 평가
주앙 카를루스 드 살다냐의 길고 영향력 있는 경력은 동시대인들과 후대 역사가들로부터 다양한 평가를 받았다. 그는 포르투갈 정치 발전의 중요한 전환점에 기여했지만, 그의 행동 중 일부는 논란의 여지가 있었다.
6.1. 동시대의 평가
1846년, 테런스 휴즈는 살다냐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살다냐 원수 공작은 매우 고귀한 외모의 노병으로, 그의 외모, 태도, 교양은 유럽의 어떤 귀족에게도 영광을 안겨줄 만했다. 그의 흰 머리카락, 콧수염, 구레나룻은 매우 풍성하며 그의 군인다운 갈색 안색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그의 코는 약간 무디지만, 입은 자비롭고, 눈은 밝고 표현력이 풍부하며, 이마는 넓다. 그는 중간 키에 편안하고 신사적인 체형을 가졌으며, 적어도 62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놀랍도록 곧은 자세를 유지했다. 공작은 군사 및 외교 분야에서 모두 뛰어났으며, 반도 전쟁 전체에 걸쳐 복무했고, 이후 미겔 1세에 맞선 전쟁에서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단연코 포르투갈에서 가장 유능한 장군이었고, 그의 전략적 재능의 탁월함에 대해서는 어떤 이견도 없었다. 그는 콘데 데 살다냐의 아버지였던 유명한 베르나르도 델 카르피오의 후손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러한 평가는 살다냐가 동시대인들에게 군사적, 외교적 능력과 고귀한 인품을 겸비한 인물로 인식되었음을 보여준다.
6.2. 역사적 평가와 정치적 영향
살다냐의 공헌은 포르투갈의 입헌군주제 확립과 자유주의 체제 안정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자유주의 전쟁에서의 그의 군사적 리더십은 페드루 4세 세력의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그는 1851년부터 1856년까지 최고 장관으로서 포르투갈의 '헤네라상' 시대를 이끌며 국가의 경제적, 사회적 발전을 도모했다.
그러나 살다냐의 경력은 그의 빈번한 쿠데타 시도로 인해 논란의 여지가 많다. 그는 1820년 혁명부터 사망에 이르기까지 무려 7차례 이상 쿠데타를 주도하며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비헌법적인 수단을 자주 사용했다. 이러한 행동은 포르투갈의 불안정한 정치 상황을 심화시키고, 민주주의와 입헌주의의 발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의 행동은 포르투갈의 정치적 안정성을 저해하고 권력 이양의 불확실성을 증대시켜, 장기적으로는 사회 발전에 걸림돌이 되었다는 평가도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