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가족
튜링겐의 유디트는 약 1135년에 태어났으며, 튜링겐 변경백 루트비히 1세와 그의 아내 구덴스베르크의 헤트비히의 딸이다. 그녀의 혈통은 루도빙거 왕조에 속하며, 그녀의 언니는 로트링겐의 베르타이다. 유디트는 바르트부르크 성에 위치한 튜링겐 궁정에서 성장하며 교육을 받았다.
2. 결혼과 왕비 시절
유디트는 1153년 보헤미아 공작 블라디슬라프 2세와 결혼했는데, 이는 그의 첫 번째 아내 바벤베르크의 게르트루트가 사망한 지 3년 후였다. 당시 유디트의 나이는 약 18세였고, 블라디슬라프 2세는 그녀보다 15~20세 연상이었다. 이 결혼의 주요 정치적 배경은 유디트의 오빠인 튜링겐 변경백 루트비히 2세와 그의 아내 호엔슈타우펜의 유디트를 통해 그녀가 새로운 독일 국왕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와 친척 관계였다는 점이다.
블라디슬라프 2세가 1158년에 황제 프리드리히로부터 왕위를 받아 보헤미아의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유디트는 왕비가 되었다. 그녀의 실제 즉위식은 공식 문서로 기록되지 않았지만, 당시 연대기 학자들은 그녀를 '유디트 왕비'라고 기록하고 있다.
2.1. 교육과 지성
프라하의 수사 빈켄티우스(Vincent)의 기록에 따르면, 유디트는 매우 아름답고 총명했으며, 라틴어와 정치학에 대한 깊은 교육을 받았다. 그녀의 뛰어난 지적 능력은 당대 연대기 학자들에 의해 여러 차례 언급되었다.
2.2. 정치적 역할과 섭정
유디트는 블라디슬라프 2세가 자리를 비울 때 그를 대신하여 국정을 돌보는 경우가 많았다고 전해진다. 그녀는 궁정 업무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심지어 아들의 이름 작명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녀의 첫 아들인 오토카르 1세의 이름은 프르셰미슬 왕조의 전설적인 시조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는데, 이는 유디트의 생각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3. 주요 기여와 후원
유디트는 특히 공공 사업과 종교 기관에 대한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음으로써 사회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그녀의 이러한 후원은 당시 보헤미아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3.1. 유디트 다리

블라디슬라프 2세의 통치 기간 중 약 1160년부터 프라하의 블타바강에 새로운 석조 다리가 건설되었다. 이 다리는 오늘날 유명한 카를교가 서 있는 자리에 위치했으며, 중앙유럽에서 건설된 최초의 석조 다리 중 하나였다. 유디트는 이 다리 건설에 재정적인 지원을 했으며, 그녀를 기리기 위해 다리는 유디트 다리(Juditin most체코어)라고 명명되었다. 1342년의 홍수로 유디트 다리가 유실되었지만, 일부 교각과 아치 잔해가 여전히 남아있으며, 말라 스트라나 강변에는 보존된 교량 탑(Juditina věž체코어)도 남아있다.
3.2. 테플리체 수도원 설립
유디트는 약 1164년에 테플리체에 베네딕토회 수도원을 설립했다. 그녀가 사망한 후 그녀의 유해는 이 수도원에서 발견되었는데, 이는 그녀가 이 수도원에 대한 깊은 애착을 가지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 수도원은 그녀의 종교적 신념과 공공 복지에 대한 헌신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산으로 남아있다.
4. 자녀
유디트와 블라디슬라프 2세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자녀들이 있었다.
- 오토카르 1세 (약 1155년 ~ 1230년): 1192/93년에 보헤미아 공작이 되었고, 1197년부터 다시 공작위를 계승했다. 1198년에는 보헤미아 국왕이 되어 세습 왕조의 시조가 되었다.
- 블라디슬라프 3세 (약 1160년 ~ 1222년): 1197년에 보헤미아 공작이 되었으며, 1197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모라비아 변경백을 지냈다.
- 리케자 (1182년 사망): 뫼들링의 하인리히 1세와 결혼했는데, 그는 오스트리아의 하인리히 2세 공작의 어린 아들이었다.
5. 말년과 망명
프라하 왕위 계승을 둘러싼 지속적인 투쟁 속에서 유디트는 그녀의 아들 오토카르의 계승권을 지지했다. 그러나 블라디슬라프 공작은 그의 이복동생인 보헤미아 공작 프리드리히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1172년 그녀의 남편이 마침내 퇴위하자, 유디트는 그를 따라 튜링겐으로 망명했다. 블라디슬라프 2세는 2년 후 메에라네 성에서 사망했다.
6. 사망
유디트가 어디에서 사망했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녀의 유해는 그녀가 약 1164년에 설립했던 테플리체의 옛 베네딕토회 수도원에서 발견되었다. 역사학자 에마누엘 블체크에 따르면, 그녀는 약 1210년에 75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그녀의 장남 오토카르 1세가 성공적으로 통치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7. 유산
튜링겐의 유디트는 당대에 뛰어난 미모와 비상한 지성으로 명성이 높았으며, 라틴어와 정치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그녀가 궁정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기반이 되었다. 그녀는 남편을 대신하여 국정을 돌보고 아들의 이름 작명에 개입하는 등 정치적으로도 활발하게 활동했다. 특히, 그녀의 가장 큰 유산은 중앙유럽 최초의 석조 다리 중 하나인 유디트 다리 건설을 후원한 것과 테플리체에 베네딕토회 수도원을 설립한 것이다. 이 건축물들은 그녀의 통치 기간 동안 공공 복지와 종교적 발전에 기여하려는 그녀의 의지를 보여주며, 후대에 그녀의 위대한 업적으로 기억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