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니에프스의 삶은 과학적 탐구와 발명에 대한 끊임없는 열정으로 점철되었으며, 이는 종종 재정적 어려움과 개인적인 고난 속에서도 이어졌다. 그의 생애 전반에 걸쳐 다양한 역할과 경험이 그의 발명 활동에 영향을 미쳤다.
1.1. 어린 시절과 교육
니에프스는 1765년 3월 7일 프랑스 손에루아르주의 샬롱쉬르손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부유한 변호사였으나, 프랑스 혁명으로 인해 가족은 많은 재산을 잃었다. 그에게는 연구와 발명에서 협력자였던 형 클로드(1763년 ~ 1828년)와 여동생, 그리고 남동생 베르나르가 있었다. 그는 세례명인 조제프 대신에 9세기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성 니키포로스를 기리기 위해 니세포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니에프스는 앙제의 오라토리오회 대학에서 과학과 실험 방법론을 배웠으며, 빠르게 재능을 발휘하여 졸업 후에는 해당 대학의 교수로 재직하기도 했다.

1.2. 군 복무
니에프스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휘하의 프랑스군에서 참모 장교로 복무하며 이탈리아와 사르데냐섬에서 몇 년을 보냈다. 그러나 건강 문제로 인해 군에서 퇴역해야 했다. 이후 그는 아녜스 로메로와 결혼하고 혁명 후 프랑스 니스 지역의 행정관이 되었다. 1795년, 그는 형 클로드와 함께 과학 연구를 추구하기 위해 니스 행정관 직을 사임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그의 사임은 대중적인 인기가 없었기 때문이라고도 전해진다.
1.3. 개인적인 삶과 가족
니에프스는 아녜스 로메로와 결혼하여 아들 이시도르(1805년 ~ 1868년)를 두었다. 이시도르는 아버지 사후 루이 다게르와 협력 관계를 맺었으며, 1839년 니세포르의 헬리오그래피 과정 기술을 공개하는 대가로 정부 연금을 받았다.
1801년, 니에프스 형제는 과학 연구를 계속하기 위해 샬롱의 가족 영지로 돌아왔고, 이곳에서 어머니, 여동생, 남동생 베르나르와 재회했다. 그들은 자산가 농부로서 가족 영지를 관리하며 사탕무를 재배하고 설탕을 생산하기도 했다.
그의 형 클로드는 연구와 발명에서 중요한 협력자였으나, 재정적으로 불운한 인물이었다. 1827년 니에프스는 런던 근교 큐에 살고 있던 병든 형 클로드를 방문하기 위해 영국으로 떠났다. 클로드는 망상에 시달렸으며, 피레올로포르의 사업 기회를 추구하다가 가족의 재산 대부분을 탕진한 상태였다.
니에프스의 사촌인 클로드 펠릭스 아벨 니에프스 드 생빅토르(1805년 ~ 1870년)는 화학자로, 사진에 알부민을 처음 사용한 인물이었다. 그는 또한 강판에 사진 인쇄판을 제작했으며, 1857년부터 1861년까지 우라늄 염이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의 방사선을 방출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포토저널리스트 자닌 니에프스(1921년 ~ 2007년)는 니에프스의 먼 친척이다.
2. 과학 연구 및 발명
니에프스는 생애 동안 여러 분야에 걸쳐 광범위한 과학 연구와 발명 활동을 수행했다. 특히 사진술과 내연 기관 분야에서 혁신적인 성과를 거두어 인류 기술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2.1. 사진술
니에프스는 인쇄술에 대한 관심과 카메라 옵스큐라의 매혹적인 광경에서 영감을 받아 사진술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의 초기 실험은 빛에 반응하는 물질을 찾아 이미지를 영구적으로 고정하는 데 집중되었으며, 이는 헬리오그래피의 개발로 이어졌다.
2.1.1. 초기 실험과 헬리오그래피
니에프스의 첫 사진 실험 날짜는 불확실하다. 그는 새로운 리소그래피 기술에 관심을 가졌지만, 필요한 기술과 예술적 재능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신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 부유한 아마추어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던 드로잉 보조 도구인 카메라 옵스큐라에 익숙해지면서 영감을 얻었다. 카메라 옵스큐라가 만들어내는 아름답지만 순간적인 "빛 그림"은 토머스 웨지우드와 헨리 폭스 탤벗을 포함한 여러 사람들에게 이 이미지를 연필로 스케치하는 것보다 더 쉽고 효과적으로 포착할 방법을 찾도록 영감을 주었다.
1816년경 그의 처제에게 보낸 편지에서 니에프스는 염화 은을 코팅한 종이 위에 작은 카메라 이미지를 포착하는 데 성공했다고 밝혔다. 이는 그러한 시도에서 성공을 거둔 최초의 사례 중 하나로 보이지만, 결과물은 네거티브 이미지였고, 빛에 노출하면 전체가 어두워지는 것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니에프스는 빛에 영향을 받는 다른 물질로 시선을 돌렸고, 결국 고대부터 다양한 목적으로 사용되어 온 천연 아스팔트인 유대 비투멘에 집중했다. 그의 시대에 비투멘은 판화를 만들 때 구리판의 내산성 코팅으로 사용되었다. 예술가는 코팅 위에 그림을 긁어내고, 노출된 부분을 에칭하기 위해 판을 산에 담근 다음, 용매로 코팅을 제거하고 그 판으로 그림의 잉크 사본을 종이에 인쇄했다. 니에프스가 관심을 가졌던 것은 비투멘 코팅이 빛에 노출된 후 용해도가 낮아진다는 사실이었다.
니에프스는 비투멘을 라벤더 기름에 녹여(이는 바니시에 자주 사용되는 용매였다) 석판이나 금속 또는 유리판 위에 얇게 코팅했다. 코팅이 마른 후, 일반적으로 종이에 인쇄된 판화인 시험 대상을 표면에 밀착시킨 다음, 이 둘을 직사광선에 노출시켰다. 충분히 노출된 후, 용매를 사용하여 시험 대상의 선이나 어두운 부분에 의해 빛으로부터 가려져 굳지 않은 비투멘만 씻어낼 수 있었다. 그렇게 노출된 표면 부분은 산으로 에칭되거나, 남은 비투멘이 석판 인쇄에서 발수성 물질로 사용될 수 있었다. 니에프스는 자신의 과정을 문자 그대로 "태양으로 그리기"라는 의미의 헬리오그래피(héliographie)라고 불렀다.
1822년, 그는 이 기술을 사용하여 세계 최초의 영구적인 사진 이미지로 알려진 교황 비오 7세의 판화를 접촉 노광 방식으로 복사했지만, 니에프스가 이를 인쇄하려고 시도하는 과정에서 나중에 파괴되었다.
2.1.2. 최초의 사진 유물
니에프스가 1825년에 제작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사진 유물들은 17세기 판화 중 말을 끄는 남자와 물레를 든 여인의 복사본이다. 이들은 일반적인 에칭, 인그레이빙, 또는 리소그래프처럼 인쇄기에서 잉크로 인쇄된 평범한 종이 시트이지만, 인쇄에 사용된 판은 니에프스의 과정으로 사진처럼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포토에칭이다. 말을 끄는 남자의 인쇄본 한 점은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물레를 든 여인의 인쇄본 두 점은 코네티컷주 웨스트포트의 개인 소장품으로 남아있다.

니에프스가 카메라 옵스큐라에서 이미지를 영구적인 사진으로 만드는 데 성공한 첫 사례는 1822년에서 1827년 사이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그의 형 클로드와의 서신을 통해 보존되었다. 그 결과물은 현재까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카메라 사진이다. 이 역사적인 이미지는 20세기 초에 사라진 것으로 보였으나, 사진 역사가인 헬무트와 앨리슨 게른스하임이 1952년에 이를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 사진을 찍는 데 필요한 노출 시간은 보통 8~9시간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태양이 하늘을 가로지르며 건물 양쪽을 비추는 모습에서 유추된 20세기 중반의 추정치였다. 이는 본질적으로 하루 종일 노출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니에프스의 기록과 역사적으로 정확한 재료를 사용하여 그의 과정을 재현한 후대 연구자들은 비투멘 코팅 판에 그러한 이미지를 적절히 포착하려면 실제로 카메라에서 "며칠"의 노출이 필요했음을 밝혀냈다.

2.1.3. 루이 다게르와의 협력
1829년, 니에프스는 카메라를 사용하여 영구적인 사진 이미지를 만들 방법을 찾고 있던 루이 다게르와 협력 관계를 맺었다. 그들은 함께 피사우토타입을 개발했는데, 이는 라벤더 오일 증류액을 감광 물질로 사용하는 개선된 과정이었다. 이 협력 관계는 니에프스가 1833년 사망할 때까지 지속되었으며, 그 후 다게르는 계속해서 실험을 진행하여 니에프스의 것과 겉보기에만 유사한 과정을 완성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따서 이를 "다게레오타이프"라고 명명했다. 1839년, 다게르는 프랑스 정부가 프랑스 국민을 대신하여 자신의 발명품을 구매하도록 만들었다. 프랑스 정부는 다게르에게 평생 동안 매년 6000 FRF를 지급하고, 니에프스의 유족에게는 매년 4000 FRF를 지급하기로 합의했다. 이러한 합의는 다게르가 아버지의 모든 업적을 가로채고 있다고 주장하는 니에프스의 아들을 격분시켰다. 어떤 면에서는 그의 말이 맞았는데, 오랫동안 니에프스는 자신의 기여에 대해 거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후대 역사가들은 니에프스를 상대적인 무명에서 벗어나게 했고, 이제 그의 "헬리오그래피"는 오늘날 우리가 "사진술"이라고 부르는 것, 즉 감광 표면에 빛의 작용과 후속 처리를 통해 합리적으로 빛에 안정하고 영구적인 이미지를 생성하는 최초의 성공적인 사례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다게레오타이프의 도입으로 인한 흥분 속에서 처음에는 무시되고, 카메라로 사진을 찍기에는 너무 감도가 낮아 실용적이지 못했지만, 니에프스 원본 과정의 주요 목적에 대한 유용성은 결국 실현되었다. 1850년대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얇은 비투멘 코팅은 인쇄판 제작을 위한 느리지만 매우 효과적이고 경제적인 포토레지스트로 널리 사용되었다.
2.2. 피레올로포르
세계 최초의 실용적인 내연 기관 중 하나인 피레올로포르는 니에프스 형제가 1807년에 발명하고 특허를 받았다. 이 엔진은 석송자 분진의 제어된 폭발로 작동했으며, 손강을 항해하는 보트에 설치되어 성공적으로 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10년 후, 형제는 세계 최초로 연료 분사 장치를 사용하여 엔진을 작동시켰다. 1807년 7월 20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이 발명에 대한 특허를 니에프스 형제에게 수여했다.
2.3. 기타 발명
니에프스는 사진술과 내연 기관 외에도 다양한 분야에서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발명품을 제작하며 과학적 호기심을 발산했다.
2.3.1. 마를리 기계 개선 제안
1807년, 프랑스 황실 정부는 세느강에서 베르사유 궁전으로 물을 공급하던 기존의 마를리 기계를 대체할 수력 기계에 대한 공모전을 열었다. 이 기계는 1684년 부지발에 건설되었으며, 1킬로미터 거리에 걸쳐 물을 펌프질하여 150 m 높이로 끌어올렸다. 니에프스 형제는 이 기계를 위한 새로운 정역학적 원리를 고안했고, 1809년에 한 번 더 개선했다. 이 기계는 더 정밀한 피스톤을 포함하여 여러 부품이 변경되었고, 훨씬 적은 저항을 발생시켰다. 그들은 여러 차례 시험했고, 그 결과 4피트 4인치의 물 낙차로 3.4 m (11 ft)의 물을 들어 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1809년 12월, 그들은 너무 오래 지체하여 황제가 자크 콩스탕 페리에에게 마를리의 펌프를 작동할 증기 기관을 만들도록 결정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2.3.2. 벨로시페드
1818년, 니에프스는 카를 폰 드라이스가 1817년에 발명한 자전거의 전신인 라우프마쉬네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직접 모형을 제작하고 이를 "벨로시페드" (빠른 발이라는 뜻)라고 불렀으며, 지역 시골길에서 상당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니에프스는 자신의 기계를 조절 가능한 안장으로 개선했으며, 이 기계는 현재 니에프스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니에프스는 그의 형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기계를 동력화하는 것을 구상하기도 했다.
3. 사망 및 재정 상황
니세포르 니에프스는 1833년 7월 5일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그는 사망 당시 재정적으로 파산 상태였으며, 그의 무덤은 생루드바렌 공동묘지에 지자체의 지원을 받아 조성되었다. 이 묘지는 그가 실험을 하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현존하는 사진 이미지를 만들었던 가족의 집 근처에 위치해 있다. 그의 재정적 어려움은 형 클로드 니에프스가 피레올로포르 사업 기회를 추구하다가 가족의 재산 대부분을 탕진한 것과 연관이 있었다.
4. 유산과 기념
니에프스는 사진술의 발전에 혁명적인 기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그의 업적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그러나 후대에 그의 진정한 가치가 재조명되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그의 유산이 기려지고 있다.
4.1. 인정과 영향
니에프스의 헬리오그래피는 다게레오타이프의 도입으로 인해 초기에는 무시되었지만, 결국 그의 원본 과정은 주된 목적에 대한 유용성이 실현되었다. 1850년대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얇은 비투멘 코팅은 인쇄판 제작을 위한 느리지만 매우 효과적이고 경제적인 포토레지스트로 널리 사용되었다. 그는 사진술의 선구자로서 루이 다게르와 윌리엄 헨리 폭스 탤벗과 같은 후대 발명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달에 있는 크레이터 중 하나는 '니에프스'로 명명되었다. 또한, 1955년부터 프랑스에서 3년 이상 거주하며 활동한 전문 사진작가에게 매년 니에프스상이 수여되고 있다. 이 상은 알베르 플레시(Albert Plécy)가 설립한 '이미지의 사람들 협회'(l'Association Gens d'Images)에 의해 니에프스를 기리며 제정되었다.
니에프스가 샬롱쉬르손의 자택 창문에서 촬영한 역사적인 사진 유물인 "르그라의 창문 풍경"은 텍사스 대학교 오스틴 캠퍼스의 해리 랜섬 센터에 영구 전시되어 있다. 이 사진은 1952년 역사가 앨리슨과 헬무트 게른스하임에 의해 재발견되었고, 1963년에 인문학 연구 센터(후에 해리 랜섬 센터로 명칭 변경)에 매각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