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교육
조유 후미히로는 1962년 12월 17일 후쿠오카현 구루메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규슈 대학 출신으로 후쿠오카 은행에 근무했으며, 어머니는 후쿠오카 교육대학 출신으로 교사였다. 아버지는 원래 변호사를 지망했으나 은행원이 되었고, 조유가 4살 때 도쿄로 전근하면서 가족이 상경했다. 이후 아버지가 도쿄에서 라이터 판매 무역 회사로 이직했으나, 아버지의 여성 문제로 부모는 별거하게 되었고, 조유는 어머니와 단둘이 살게 되었다. 부모의 정식 이혼은 조유가 출가할 무렵에 이루어졌으며, 조유는 아버지가 이혼 후에도 양육비를 꾸준히 지급했음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조유는 어릴 적부터 우주전함 야마토, 바빌 2세, 울트라맨 시리즈, 기동전사 건담 등의 작품을 좋아했으며, 초능력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학업 성적이 우수했던 조유는 와세다 대학 고등학원을 졸업하고 1981년 와세다 대학 이공학부 전자통신학과에 입학했다. 1985년에는 와세다 대학 대학원 이공학 연구과에서 인공지능을 전공하며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대학 시절에는 영어 회화 서클(WESA)에서 영어 디베이트 활동에 참여하여 대회에서 입상하는 등 두각을 나타냈으며, 이후 일본 영어 디베이트를 총괄하는 일본 디베이트 협회의 창립 이사 중 한 명이 되었다. 이 디베이트 서클 활동을 통해 토마베치 히데토와도 안면이 있었다.
1986년 4월, 조유는 당시 우주항공연구개발기구(JAXA)의 전신인 우주개발사업단에 취직했다. 그는 당시 우주개발사업단 회장이 NHK 교육 텔레비전에서 "미래 지구를 구할 것은 우주다"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감명받았으며, 아폴로 계획의 달 착륙을 본 세대로서 우주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취직 직전부터 시작했던 옴진리교의 전신 단체인 '옴신선회'에 흥미를 느끼면서, 입사 한 달 만인 5월 1일 퇴직하고 출가하여 옴진리교의 출가 신자가 되었다. 그의 출가 번호는 13번이었다.
2. 옴진리교 입단 및 활동
조유 후미히로는 대학원 재학 중이던 1986년 8월, 오컬트 잡지 '트와일라이트 존'에 실린 아사하라 쇼코의 요가 자세 해설 기사를 계기로 '옴신선회'에 입회했다. 당시 그는 초능력, 건강, 신비주의에 관심이 많았지만 요가 자체에는 흥미가 없었다. 입회 후 참가한 탄자와 세미나에서 하루 10시간에 달하는 엄격한 수행과 요가 호흡법 등 금욕적이고 과격한 수행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이후 몇 차례 수행을 반복하며 신비 체험을 겪었고, 최종적으로 쿤달리니까지 경험하면서 아사하라를 올바른 요가 지도자로 인식하게 되었다.
옴진리교에서 조유는 일찍부터 인정받아 1987년에는 수백 명의 회원 중 10명 정도만 인정받았던 '대사'의 지위를 얻었다. 같은 해 10월경에는 뉴욕에 옴진리교 지부를 개설하고 지부장을 맡았으며, 1989년에는 오사카 지부장을 역임했다. 그는 유창한 영어 실력을 바탕으로 달라이 라마 14세, 티베트 불교 승려 칼 린포체, 스리랑카의 고승 아난다 마이트레야 등 해외의 많은 종교인 및 정치인들과 아사하라의 통역으로서 면담하고 교류했다. 뉴욕 지부에서는 입신자를 늘리지 못해 질책을 받기도 했으나, 1992년에는 다시 뉴욕 지부를 방문했고, 1993년에는 러시아 지부로 부임했다.
1989년 사카모토 변호사 일가 살해 사건이 발생하기 직전, 조유는 아사하라의 "마이니치 신문사에 트럭으로 돌진할까"라는 발언에 "위험합니다"라고 반대하는 등 아사하라에게 이견을 제시했다. 이로 인해 그는 이시이 히사코와 함께 공모의 장에서 제외되어 이 사건에는 직접 관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사하라로부터 사건의 전모를 알지 못한 채 교단의 대변인으로서 사건을 "덮는 역할"을 명령받았다. 이 과정에서 그가 언론에 보인 수많은 발언들은 "아아 이에바 조유"(ああいえば、上祐아아 이에바 조유일본어)라는 별명을 얻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 별명은 일본어 표현 "아아 이에바 코이우(ああ言えばこう言う)", 즉 지나치게 반대 의견을 내는 사람을 비꼬는 말에서 유래했다. 그는 훗날 TV 아사히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자신이 알지 못했던 옴진리교의 범죄를 고려할 때 사카모토 변호사에게 선견지명이 있었다고 증언했다.
1990년 제3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옴진리교가 진리당으로 출마했을 때, 조유는 기베 데쓰야와 함께 끝까지 반대했으나, 결국 도쿄 5구에서 출마하여 최하위로 낙선했다. 선거 참패 후 아사하라가 "국가 권력에 의해 표가 조작되었다"는 음모론을 주장하자, 조유는 유일하게 이의를 제기하며 "자신이 독자적으로 전화 조사를 한 결과 아사하라 쇼코에게 투표하겠다는 유권자는 100명 중 아무도 없었다"고 반박했다.
1991년 11월, 조유는 땅속에 매립된 3 m 사방의 목제 상자 안에서 5일간 음식물 섭취 없이 지내는 '언더그라운드 사마디' 수행을 완료했다. 이는 깊은 명상을 통해 산소 섭취량을 줄여야 생존할 수 있다는 주장에 기반한 것으로, 그는 교단 간부 신자 중 처음으로 이를 완수했다.
1992년 옴진리교 러시아 지부로 파견되었으며, 1993년 9월에는 러시아 지부장이 되었다. 그는 러시아에서 '구루'와 같은 존재로 여겨졌으며, 1994년에는 모스크바시의 인가를 받은 별도의 종교 법인을 설립하여 그 대표로 활동했다. 1992년에는 '대승 요가'의 성취를 인정받아 '정대사'(正大師쇼다이시일본어, 당시 신자명은 マイトレーヤ마이트레야일본어)로 승진했다.
옴진리교의 생화학 무기 개발에도 관여하여 생물 무기인 풍선 폭탄 개발, 포스겐 폭탄 계획, 제7 사티안 사린 공장 계획, 가메이도 악취 사건 등과 관련이 있었다. 특히 1993년 6~7월의 가메이도 악취 사건에서는 탄저균 배양의 총책임을 맡았다. 그러나 탄저균 배양의 직접 담당자였던 엔도 세이이치가 "무독성 균주를 유독성으로 변형시키는 것은 과학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사하라가 제조를 명령했기 때문에, 조유는 아사하라가 실제로 유독성 물질을 제조할 의도가 없었고, 제자들에게 합리적인 판단을 넘어 아사하라에게 복종하도록 요구하는 일종의 정신적 훈련('마하무드라')이라고 생각했다고 증언했다.
1995년 도쿄 지하철 사린 가스 살포 사건 발생 직후 아사하라의 지시로 러시아에서 일본으로 귀국하여 '긴급 대책 본부장'에 취임했다. 그는 교단의 홍보 책임자로서 아오야마 요시노부나 무라이 히데오 등과 함께 매일같이 TV 와이드쇼, 뉴스 프로그램, 라디오에 출연했다. 그는 아사하라와 교단의 지시에 따라 무리가 있음을 알면서도 옴진리교에 비판적인 모든 의견에 철저히 반박했으며, 수많은 의혹 사건들이 창가학회나 미국군, 자위대를 비롯한 국가 권력의 음모이며, 사린 피해를 입고 있는 것은 옴진리교라는 견해를 계속해서 주장했다. 해외 언론에 대해서도 유창한 영어로 반론을 펼쳤다. 기자회견장에서는 분노를 표출하며 책상을 내리치기도 했고, 무라이 히데오 피살 사건 직후에는 기자들에게 "아사하라를 죽일 건가요?"라고 격앙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당시 그는 연일 미디어에 출연하며 보인 언변 퍼포먼스로 인해 저널리스트 니키 히로타카로부터 "아아 이에바 조유"라는 별명을 얻었고, '조유 갤'이라 불리는 열광적인 여성 팬들이 등장하여 팬클럽이 생기는 등 일약 화제의 인물이 되었다. '조유 갤'들은 그에게 "모성 본능을 자극한다", "애인이 되어도 좋다", "옴진리교를 나와 제대로 된 종교 단체를 만들면 유혹에 넘어가 입회할 것", "(신비성을 유지하기 위해) 무라이 씨처럼 살해당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등의 반응을 보였다.
1995년 10월 6일, 구마모토현 아소시 나미노무라 토지 취득을 둘러싼 옴진리교 국토이용계획법 위반 사건으로 체포되었다. 그는 위증과 유인사문서 위조 및 행사죄 혐의로 10월 28일 기소되었다. 아사하라의 측근으로 여겨졌으나, 1992년 이후 러시아 지부에 있었기 때문에 일련의 옴진리교 사건에서 교단 본부의 공모나 실행 현장에 없었다는 점, 사린 공장 건설 사건에서는 건설 시작 전에 러시아로 출장 갔다는 점, 그리고 가메이도 악취 사건 등 생물 무기 제조 살포에서 실제로 유독성 탄저균을 제조할 의도나 능력이 없었다는 점(불능범) 등으로 인해 사린 공장 건설이나 생물 무기 제조 살포에 대해서는 기소되지 않았다. 법정에서 그는 아사하라에 대해 "아사하라 존사는 모든 의미에서 인도자이자 구세주이며, 나의 전부"라고 말했다. 이후 그는 징역 3년의 실형 판결을 받고 히로시마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3. 알레프(Aleph) 대표 시기
조유 후미히로가 수감 중이던 1997년경부터 아사하라 쇼코가 불규칙한 발언을 시작하고, 1999년 아사하라가 예언한 아마겟돈이 일어나지 않으면서 아사하라에 대한 의문이 강해졌고, 이는 10년 뒤인 2007년 알레프(구 옴진리교) 탈퇴로 이어졌다. 조유의 출소 이틀 전인 1999년 12월 27일에는 무차별 대량 살인 행위를 행한 단체의 규제에 관한 법률(단체 규제법, 이른바 '옴 신법')이 시행되었다. 이는 조유의 복귀로 교단이 과격화될 것을 우려한 조치로 알려졌다.
1999년 12월 29일 히로시마 형무소에서 출소한 조유는 교단으로 복귀했다. 출소 직후 공안경찰은 그가 교단 재활성화의 위험성이 있다고 우려했다. 그러나 2000년, 러시아에서 불법화된 옴진리교 신자들이 일본에서 테러를 통해 아사하라를 탈환하고 러시아로 탈출하려는 계획을 알게 되자, 그는 러시아 경찰과 일본 경시청 공안부에 이를 통보하고 신자들을 동원하여 저지를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도쿄 입국관리국에 해당 신자들의 입국 불허를 요청했으나, 도쿄 입국관리국이 불법성이 없다며 입국을 허용하자 자신과 가까운 신자들을 러시아 신자 감시에 파견하기도 했다.
출소 후 교단으로 돌아온 그는 사건 후 5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사고 정지나 망상에 빠져 있는 교단 간부 및 신자들의 실태에 크게 당황했다. 그는 사건의 사실과 아사하라의 현실을 전달하는 활동에 전념하게 되었다. 교단 간부 중에는 1999년 아마겟돈 예언이 빗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아사하라가 불규칙 발언 속에서 아마겟돈이 일어났다고 발언했으니 예언은 성취되었다"고 생각하려는 사람까지 있었다고 한다.
조유가 출소한 지 두 달 뒤인 2000년 2월, 옴진리교는 '알레프'로 개칭되었다. 당시 교단 최고 간부였던 아사하라의 자녀 두 명이 체포되면서 아사하라 가족은 교단 운영에서 배제되었고, '정오사' 계급의 무라오카 다쓰코가 대표로 취임했다. 2000년 7월 6일, 교단은 피해자 배상 계약을 체결했다. 이는 옴진리교가 일련의 사건 배상 채무로 인해 파산한 후, 잔존 자산을 관리하며 배상금을 지급하던 파산 재단 옴진리교의 파산 관재인(고 아베 사부로 변호사)과 체결된 것으로, 실질적으로 조유가 주도한 것이었다.
2002년, 조유는 알레프의 대표로 취임했다. 그는 "옴진리교 사건을 반성하고 아사하라 쇼코의 영향을 배제한다"는 사회에 융화적인 개혁을 추진했다. 그러나 아사하라의 아내인 마쓰모토 도모코가 출소한 2003년 이후, 아사하라의 자녀들(셋째 딸 마쓰모토 레이카와 둘째 딸)이 비밀리에 교단 운영에 관여하며 교단의 주도권을 장악하려 했다. 이들은 조유의 개혁을 "구루 배제"(즉, 구루인 아사하라의 부정)라 비판하며, 조유가 악마에 씌어 아사하라를 비판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노다 세이진, 무라오카 다쓰코 등 정오사(조유보다 한 단계 낮은 간부)들에게 조유를 알레프 교단 운영에서 배제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조유는 갑자기 교단 운영에서 배제되어 사실상 실각하고 '수행'이라는 명목으로 자기 방에 연금되었다(이른바 '조유 유폐'). 조유가 제자 중 최고위 계급인 '정대사'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사하라의 자녀들의 지시로 교단 운영에서 배제되거나 연금될 수 있었던 이유는, 아사하라가 자신의 자녀들에게 조유보다 높은 '황자'(모든 제자 위의 계급)라는 교단 내 계급을 부여했기 때문이었다.
이 기간 동안 옴진리교의 분파인 '케로욘 클럽'에서 상해치사 사건이 발생하자, 그룹 내부에서 조유 등 알레프 간부들에게 고발이 들어왔다. 아사하라 가족의 반응이 둔한 가운데, 조유는 고발한 신자에게 경시청에 고발하도록 촉구하기도 했다. 당시 교단 신자들에 따르면, "교단 내부에서는 조유에 대한 반발이 더욱 격화되었다. 간부 회합에서는 조유를 막 부르며 혐오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오만한 태도로 직접적으로 욕설을 퍼붓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러한 극심한 배제 행동을 보고 오히려 이상하다고 여기며 그만두는 사람들도 다수 나왔을 정도였다." 또한, 조유가 연금되어 있는 동안 아사하라 가족의 지원을 받아 조유를 비판하는 '이야기 모임'이라는 회합이 적어도 20회 이상 열렸다. 그 내용은 "조유가 개혁이라는 명목으로 어떻게 아사하라를 배제하고 부정했으며, 아사하라의 뜻이 아닌 외도 활동을 함으로써 조유 주변의 신자들과 함께 마경에 떨어져 교단에 재앙을 가져왔는지 설명하는 연표를 참가자들에게 배포하고, 그 내용이 아사하라 가족의 셋째 딸 레이카도 똑같이 말하고 있음을 암시하며 해설을 진행했다"고 한다.
그러나 조유는 2004년 1월, 아사하라 가족과 그 뜻에 따르는 신자들의 강한 반대를 무릅쓰고 교단에 복귀했고, 이른바 '조유파'가 형성되었다. 그 결과 내부 대립이 격화되어 조유에 반대하는 반조유파와 조유를 지지하는 조유파, 그리고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중간파의 세 갈래로 분열되었다. 2006년 4월 30일, TBS 텔레비전의 '보도특집'은 조유가 새로운 교단 설립 계획을 명언했다고 보도했다. 이 시기 조유파는 지바현 나라시노시의 한 아파트를 도장으로 사용했으나, 관리자로부터 퇴거를 요구받아 같은 해 9월 퇴거를 완료하고 도쿄도 세타가야구 미나미카라스야마의 아파트를 거점으로 삼았다.
4. 빛의 바퀴(Hikari no Wa) 설립 및 활동
조유 후미히로는 2007년 3월 8일 알레프를 공식 탈퇴하고, 다음 날인 3월 9일 믹시 계정을 개설했음을 공식 웹사이트 블로그를 통해 공표했다. 그의 믹시 친구 신청은 단 이틀 만에 상한선인 1,000명에 도달했다.
2007년 5월 7일, 그는 아사하라의 교의를 완전히 배제했다고 주장하는 새로운 단체 '빛의 바퀴'를 설립하고 대표직에 취임했다. 빛의 바퀴는 만물이 하나이며, 옴진리교처럼 사회를 선악의 이분법으로 나누는 것을 부정하는 '일원 사상'을 제창하고 있다. 조유는 빛의 바퀴를 "불교 사상이나 심리학을 배우고, 요가 체조나 호흡법을 실습하며, 성지 순례(파워 스폿, 전국 각지의 신사 불각 및 그에 수반하는 자연 등)를 하는 곳"이라고 설명한다. 그들의 활동 상황은 인터넷 웹사이트와 유튜브 채널을 통해 공개되고 있다.
일본 공안조사청은 빛의 바퀴가 아사하라의 영향력을 불식시킨 것처럼 위장한 옴진리교의 후계 단체이며, 아사하라의 사형이 집행된 2018년 7월 이후에도 여전히 아사하라의 영향 아래 있는 위험한 체질이라는 인식을 바꾸지 않고 있다. 반면, 공안조사청에서 35년간 근무했던 전 공안조사관은 빛의 바퀴에 대한 감사 결과, 빛의 바퀴는 아사하라의 영향 아래 있지 않으며 위험성이 없다고 2020년 9월 30일자 보고서에서 밝혔다. 또한, 도쿄 지방재판소는 2017년 9월 25일 판결에서 "원고(빛의 바퀴)의 설립이 별도 단체를 조직하여 역할 분담을 하면서 활동하기를 원했던 마쓰모토(아사하라)의 뜻에 따라 이루어졌다고는 인정할 수 없다"고 사실을 인정하며, 아사하라의 뜻에 따라 설립된 단체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미국 국무부 역시 옴진리교 자체에 대해 테러 위험이 없다고 판단하여 1997년부터 25년간 지속해온 '외국 테러 조직(FTO)' 지정을 2022년 5월 20일 해제했다.
2009년 7월 6일, 조유는 빛의 바퀴 대표로서 옴진리교 사건의 피해자 단체(옴진리교 범죄 피해자 지원 기구)와 배상 계약을 체결하고 이행을 계속하고 있다. 2013년 12월 31일, 빛의 바퀴는 종교 단체가 아닌 사상 철학 학습 교실로 개혁하는 규약을 채택했다.
5. 사상 및 철학
조유 후미히로는 '2000년 이후는 물병자리의 시대이며, 종교와 과학이 융합된 영적 과학 문명이 도래할 것'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한 바 있다(빛의 바퀴 설립 이전 알레프 시절 발언). 그는 무지개를 좋아하며, 알레프 대표 취임 시에도 천둥과 무지개가 나타나 축복해주었다고 언급했다. 빛의 바퀴 설립 이후에는 무지개를 "종교적으로도 신성한 의미를 지닌다"고 표현하고 있다. 또한, 그는 요정의 존재를 믿으며, 식물은 요정이 관리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옴진리교 시절에는 아사하라가 즐겨 하던 세계 정세 예언을 하기도 했다.
옴진리교와 알레프를 탈퇴하고 빛의 바퀴를 설립한 이후, 조유는 '종교가 아닌 종교 철학으로서: 이성으로 종교를 해석하고 활용한다', '심리학·물리학도 배우고, 동서양의 사상 철학의 융합을 목표로 한다'는 등 '맹신·강제를 배제한 사상·철학·종교에 대한 자세'를 강조하고 있다.
빛의 바퀴에서 탐구하는 사상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설명한다. "빛의 바퀴에서는 저를 포함한 멤버들의 지난 수십 년간의 경험 반성과 성과를 바탕으로, 고금동서의 다양한 사상·철학·정신과학·의학 등을 토대로 '옛것을 익히고 새것을 안다'는 정신으로 배우면서도, 비합리적인 것, 맹신·미신·광신에 해당하는 것은 최대한 배제하고 있습니다. 종교에 관해서는 '신' 등의 숭배 대상은 그 신성한 의식을 이끌어내는 상징이며, 그 자체가 유일 절대적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에게 필요하지 않다면 가질 필요 없고, 당신에게 유익하다면 당신에게 맞는 것을 존중하면 되며, 사람마다 달라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종교를 믿을 자유도 믿지 않을 자유도 인정하고, 종교 간의 대립을 넘어 융화를 가져오는 새로운 사상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교실 안에서도 여러분에게 일본인에게 맞다고 생각되는 불상·불화나 자연의 상징을 소개할 때가 있지만, 그것 또한 전혀 강제가 아닙니다. 싫지 않다면 시도해 보거나 가볍게 즐기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빛의 바퀴의 학습·실천은 당연히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스스로 잘 생각하며 배우고, 납득한 것을 취사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빛의 바퀴의 지도원도, 대표인 저를 포함하여, 보통 의미의 교실 선생님일 뿐 불완전한 인간 중 한 명입니다."
6. 저술 및 미디어 활동
조유 후미히로는 옴진리교 사건에 대한 반성과 총괄을 담은 여러 저서를 출판했다. 주요 저서로는 『각성 신세기』(2002), 『조유 후미히로가 말한다 - 고뇌로부터의 해방』(2002), 『조유 후미히로가 말한다 <2> 마음의 해방과 신비의 세계』(2003) 등이 있다. 2011년 말부터 2012년 사이에 히라타 마코토, 다카하시 가쓰야, 기쿠치 나오코 등 도주 중이던 옴진리교 신자들이 출두·체포되면서 옴진리교에 대한 관심이 다시 높아지자, 그는 옴진리교에 대한 반성과 총괄을 담은 서적들을 전문가들과의 공저 형태로 출판하기 시작했다. 2012년에는 『옴진리교 사건 17년째의 고백』(조유 후미히로 저, 아리타 요시후 검증), 2013년에는 『위험한 종교를 구별하는 방법』(조유 후미히로, 타하라 소이치로 공저), 『끝나지 않는 옴진리교』(조유 후미히로, 스즈키 구니오, 조 히로유키 공저)를 출간했다. 2015년에는 『지하철 사린 사건 20년 피해자인 내가 묻는다』를 사카하라 아쓰시와 공저했다.
그는 언론 인터뷰, 방송 출연, 유튜브 채널 운영, 공개 토크쇼 참여 등 다양한 미디어 활동을 통해 대중과 소통하고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2012년 9월 13일부터는 '조유 후미히로·빛의 바퀴 채널'이라는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며 사상, 철학, 심리 분야의 콘텐츠를 제공하고 있다. 이 채널은 2025년 2월 25일 기준으로 구독자 13,900명, 총 조회수 3,740,000회를 기록하고 있다.
2021년 7월, 유튜브 채널 '마치로쿠ch~당신의 인생, 알려주세요~'에 출연하여 옴진리교 시절의 반성과 현재 상황을 이야기한 영상은 전·후편 모두 2,000,000회에 가까운 조회수를 기록하며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후에도 그는 다른 많은 유튜브 채널에 출연하고 있다. 2022년 통일교 문제가 불거졌을 때, 그는 자신의 블로그와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옴진리교 경험을 바탕으로 정보를 발신하며 주목받았다. 2023년에는 행복의 과학의 오카와 류호와 창가학회의 이케다 다이사쿠가 사망했을 때, 애도와 사과의 뜻을 표명하며 옴진리교의 경험을 바탕으로 미래 종교의 방향성에 대해 논하기도 했다.
그는 TV 도쿄의 '이케가미 아키라의 선거 라이브', NHK 스페셜 '미해결 사건 File.02 옴진리교', TV 아사히의 '세기적 순간 & 미해결 사건 4시간 반 스페셜', '슈퍼 J 채널', '하토리 신이치 모닝쇼', BS-TBS의 '보도 1930' 등 다수의 TV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인터넷 방송으로는 '타하라 소이치로, 조유 후미히로와의 대담에 대해 말하다', '마치로쿠ch', '마루야마 곤잘레스의 뒷세계 저니', '뉴스 오프에드', '신일본 문화 채널 사쿠라', '간닝구 다케야마의 토요 The NIGHT', 'JBpress', '주간! (뒤)혼조 쓰요시', '이에다 쇼코 채널', '돈트텔미 아라이의 '어른의 교양TV'', '코지 채널', '토마호크 Tomahawk' 등에 출연하며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그의 활동은 영화로도 제작되었는데, '나의 마경'은 국내외 11개 영화제에서 입선 및 수상했다. 또한, 그는 이에다 쇼코, 나가이 히데카즈, 오시마 데루, 나카야마 이치로, 히로유키, 스이도바시 하카세, 미야다이 신지 등 다양한 분야의 인사들과 공개 대담에 참여하여 종교, 사회, 문화 문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나누고 있다.
7. 개인사 및 에피소드
조유 후미히로는 어린 시절 우주전함 야마토, 바빌 2세, 울트라맨 시리즈, 기동전사 건담을 좋아했던 소년이었다. 옴진리교 시절과는 대조적으로, 성인 이전의 조유는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편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여 집에 돌아오지 않아 모자가정 상태가 되었고, 조유가 역이나 공원에서 망연자실해 있던 모습도 목격되었다고 한다.
와세다 대학 재학 중이던 1982년, 그는 영어회(WESA)에 입회하여 영어 디베이트, 스피치, 토론 등을 배웠고, 디베이트 대회에서 활약했다. 이 활동을 통해 그는 일본 영어 디베이트를 총괄하는 일본 디베이트 협회의 창립 이사 중 한 명이 되었다.
조유의 연인이었던 도자와 가즈코도 함께 출가 신자가 되었다. 입회 후 도자와는 아사하라에게 이끌려 조유에게서 멀어지는 면이 있었지만, 조유는 이를 존사의 마하무드라(시련)라고 인식하고 이해함으로써 극복할 수 있었다고 한다. 1995년 이와카미 야스미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존사는 번뇌를 차단하는 힘이 강하므로 누구와 섹스해도 좋다", "그녀(도자와)가 아사하라 존사와 융합한다면 그것은 정신적 단계가 높아지는 것이므로, 나와 융합하는 것보다 좋다고 생각한다. 나는 연인을 아사하라 존사에게 바치고 싶다. 나는 그런 것은 부담스럽다"고 말했다.
1989년 사카모토 츠츠미 변호사와의 교섭에서 조유는 아오야마 요시노부, 하야카와 기요히데 등과 함께 소송 회피를 위한 협상을 진행하고 TBS에 사카모토 변호사 인터뷰 방송 중단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성년자뿐만 아니라 조유와 같은 성인도 부모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사카모토의 견해와 차이가 발생하여 결렬되었다. 이때 '신앙의 자유'를 주장하는 조유에게 사카모토가 "사람을 불행하게 할 자유는 없다"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조유에 따르면 이러한 대화는 없었다고 한다. 아사하라가 (사카모토의 이름을 직접 언급하지 않고) 교단에 비판적인 존재를 '포아'(살해)하는 것에 대해 의견을 물었을 때, 조유는 강하게 반대했다. 이 때문에 사카모토 변호사 살해 사건에서는 그와 마찬가지로 반대했던 이시이 히사코와 조유를 제외하고 아사하라가 살해를 모의하여 사카모토 츠츠미 변호사 일가 살해 사건을 일으켰다. 폭력 행위가 아닌 자신의 홍보 활동으로 비판의 영향을 완화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조유는 교단이 일으킨 사건임을 짐작했을 때 불만을 느끼고 아사하라에게 전화했으나, 오히려 사건을 정당화하도록 설득당했다.
1990년 제39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진리당으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선거가 참패로 끝나자 아사하라가 "국가 권력에 의해 표가 조작되었다"는 음모론을 주장했는데, 조유는 유일하게 이의를 제기하며 자신의 전화 조사에서는 아사하라 쇼코에게 투표하겠다는 유권자가 한 명도 없었다고 발언했다.
옴진리교의 병기 개발에도 관여하여 생물 무기인 풍선 폭탄 개발, 포스겐 폭탄 계획, 제7 사티안 사린 공장 계획, 가메이도 악취 사건 등과 관련이 있었으나, 사린 공장은 구상 단계만 알았을 뿐 이후 러시아로 가게 되었고, 포스겐이나 가메이도에서의 탄저균 제조는 유독성 물질을 제조할 기술이나 의도가 없었다고 인정되어 기소되지 않았다. 특히 1993년 6~7월의 가메이도 악취 사건에서는 탄저균 배양의 총책임을 맡았다.
1992년부터 옴진리교 모스크바 지부에 파견되었다. 하야카와 기요히데는 러시아에서의 조유가 "구루 같았고, 작은 아사하라 같았다"고 말했다. 조유는 러시아 지부장을 맡았고, 1994년에는 모스크바시가 인가하는 별도의 종교 법인을 설립하여 그 대표로 활동했다. 1994년 이후 아사하라로부터 "일본에 있으면 재앙이 미칠 것"이라는 말을 듣고 대부분의 시간을 러시아 연방에서 보냈으나, 일시적으로 일본에 돌아왔을 때 교단이 약물을 사용한 '이니시에이션'을 받아 아사하라에 대한 귀의를 더욱 깊게 했다.
도쿄 지하철 사린 가스 살포 사건 이후, 교단의 홍보 책임자로서 연일 TV와 라디오에 출연했다. 아사하라와 교단의 지시에 따라 무리가 있음을 알면서도 옴진리교에 비판적인 모든 의견에 철저히 반박했으며, 수많은 의혹 사건들이 국가 권력의 음모이며, 사린 피해를 입고 있는 것은 옴진리교라는 견해를 계속해서 주장했다. 해외 언론에 대해서도 유창한 영어로 반론을 펼쳤다.
당시 연일 미디어에 출연하며 보인 언변 퍼포먼스 때문에 저널리스트 니키 히로타카로부터 "아아 이에바 조유"라는 별명을 얻었고, '조유 갤'이라 불리는 열광적인 여성 팬들이 등장하여 팬클럽이 생기는 등 일약 화제의 인물이 되었다.
구마모토현 아소시 나미노무라의 토지 취득을 둘러싼 옴진리교 국토이용계획법 위반 사건으로 1995년 10월 6일 체포되어 위증과 유인사문서 위조 및 행사 혐의로 기소되었고, 징역 3년의 실형 판결을 받아 히로시마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2010년 12월 3일자 『FRIDAY』 지상에서 그는 아사하라 쇼코가 카리스마적인 능력이 있었지만, 그것이 인격과 일치하지 않고, 과대망상과 피해망상의 정신병리학적인 인물이었다고 평가했다. 아사하라의 인격의 근원은 어린 시절부터의 부모와 사회에 대한 반감·원한이 아니었을까 추측했다. 그는 아사하라가 '공상허언증'과 '과대자기 증후군'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고 지적하며, 이러한 인물에 경도되지 않기 위한 방책을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밝혔다. 그는 또한 러시아에 가기 전부터 옴진리교가 사린을 연구하고 있었음을 알고 있었지만, 당시 반대하지 못했던 것은 그것이 신자들에게는 일반인과 마찬가지로 아사하라 쇼코에게 '포아'되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옴진리교가 사건에 연루되어 있음을 어렴풋이 짐작하면서도, 당시에는 언론에 무관하다고 계속 거짓말을 했다. 나는 거짓말쟁이였다"고 고백했다. 사린 사건이 교단이 일으킨 것임을 아사하라로부터 들은 것은 귀국 후 한 달 뒤(무라이 히데오 피살 사건 이후)였으며, 일련의 사건 전모를 알게 된 것도 그 무렵이었다고 한다.
무라이 히데오 피살 사건에 관해서는, 그는 당초 각성제 거래 등으로 관계가 깊었던 폭력단에 의한 입막음설, 무라이가 살아있음으로써 제2·제3의 사린 사건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당국이 일으킨 모략설, 그리고 예언을 실현시키기 위해 옴진리교가 일으킨 자작극의 가능성 등을 언급했다. 그러나 2013년 이후 실행범 조 히로유키와 대담한 후에는 "조 씨를 만나보니 그것은 단독범이라고 느꼈다. 그의 거악인 옴진리교를 쓰러뜨리려는 의분 때문이었다. 배경에 옴진리교도 폭력단도 관련이 없다고 생각한다"며 단독범설을 주장하게 되었다.
2012년 6월 19일자 『SPA!』 인터뷰 기사에서 조유가 "기쿠치 나오코는 사린 생성에 관여하여 형사 책임을 졌다"고 말한 것에 대해, 기쿠치는 사실이 아니라고 도쿄 구치소에서 조유에게 철회를 요구하는 편지를 보냈으나 답장이 없었다. 기쿠치는 또한 조유가 사린 생성에 관여했는지 여부는 관련자들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사 기관의 정보(언론 보도)를 맹신하고 이야기했으며, 기쿠치와 거의 대화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기쿠치의 성격에 대해서도 언급한 태도를 비판했다. 이에 대해 조유는 자신의 블로그에서 주간지 기사는 자신의 인터뷰를 편집한 것이므로 오해가 생길 수 있는 문장이며, 기사에서 '형사 책임을 졌다'고 한 주체는 기쿠치를 지칭한 것이 아니라고 해명했다. 또한, 기쿠치가 지명수배된 이후에는 관련자들과 연락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밝혔다. 그는 또한 조유 등의 출두 요청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도주를 계속한 기쿠치가 사린 사건 등에서 결과적으로 무죄였다 하더라도, 도주 중 자신을 남성에게 숨겨주게 하여 그 남성이 (기쿠치 본인의 유죄·무죄와 관계없이 형법 규정에 따라) 범인 은닉 및 증거 인멸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으므로, 이 책임은 면할 수 없으며 자신의 도주 행위의 문제를 잘 인식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2018년 7월 11일, 신초샤의 『주간 신초』는 조유가 옴진리교 여성 신자 살해 사건 현장에 동석하여 살해 장면을 목격했음을 보도했고, 조유도 이를 인정했다. 그는 아사하라의 사형 집행을 지연시키지 않기 위함이었고, 조유의 이반을 안 아사하라가 신자들에게 지시하여 조유의 신변에 위험을 초래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종교학자 오타 토시히로는 아사하라가 조유에게 반대하면 살해당할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살인 현장을 목격하게 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시게노 슈이치의 만화 작품 『이니셜 D』의 등장인물 '후미히로'와 그 후속작 『MF 고스트』에 등장하는 '조유 후미히로'가 조유를 모델로 했다는 설이 존재한다. 조유 본인도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이 문제에 대해 언급하며, "이 발음의 성명을 가진 인간은 일본에 한 명밖에 없다"고 말하고, 극 중 후미히로의 직책이 팀의 '외보부장'으로 자신의 옴진리교 시절 직책명과 같다는 점을 들었다. 그는 또한 "당시 사회 상황을 고려할 때 이 캐릭터가 전혀 불타오르지 않았다는 것은 매우 신기하다"고 코멘트했다. 조유 자신은 『이니셜 D』 자체를 모르고 있었으며, 도요타 AE86을 애차로 가지고 있던 지인으로부터 듣고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고 한다.
8. 사회적 영향 및 평가
조유 후미히로는 옴진리교의 대변인으로서 사건의 진실을 은폐하고 교단을 옹호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의 언변과 미디어 대응 능력은 '아아 이에바 조유'라는 별명을 낳았고, 일부 대중에게는 컬트적인 인기를 얻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옴진리교의 범죄 행위를 부인하고 피해자들에게 고통을 안겨준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비판을 받았다.
수감 생활과 아사하라의 예언 불일치 등을 겪으며 그는 아사하라에 대한 의문을 갖기 시작했고, 출소 후에는 알레프 대표로서 옴진리교의 책임을 인정하고 피해자들에게 사과하며 배상 기금을 설립하는 등 개혁을 시도했다. 그러나 아사하라 가족과의 내부 갈등으로 인해 알레프를 탈퇴하고 빛의 바퀴를 설립하면서, 그는 옴진리교와의 단절을 더욱 명확히 하려 노력했다.
그는 옴진리교의 범죄에 대해 "나도 교단에서 중대한 책임이 있었다. 피해자 유족에게 깊이 사과하고 싶다"고 여러 차례 밝혔다. 특히 아사하라 쇼코의 사형 집행에 대해서는 찬성 입장을 표명하며, "아사하라를 사형 집행하지 않으면 국민 감정과 타협할 수 없다. 사형 집행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아사하라가 '처형되지 않는 구세주'로서 알레프는 더 많은 신자를 늘리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형 집행 당일(2018년 7월 6일) 기자회견에서는 자신이 아사하라로부터 이반하고 비판하며 배신자였기 때문에 집행에 안도했다고 밝히며 다시 한번 집행에 찬성했다. 또한, 아사하라의 유골이 아사하라 숭배에 악용되지 않도록 '바다에 유골을 뿌리는 것'에 찬성하기도 했다.
조유의 활동과 변화에 대한 사회적 평가는 엇갈린다. 도쓰카 히로시는 그를 "수행이 부족하다", "동료를 경찰에 팔아넘긴 배신자", "단순한 편차치 수재"라고 비판하며, 아사하라 쇼코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전 신자는 그에 대해 "디베이트는 잘하지만, 상대를 이기려고만 해서 교섭은 서툴다"고 평했다. 아리타 요시후는 처음에는 "대단한 녀석이라고 들었는데, 대결해보니 존재감, 위압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고 평가했으나, 이후에는 "자신의 아버지나 어머니에 대해 그가 보통이라면 말하지 않을 것까지 쓰고 있다. 그 심경의 변화는 역시 변화로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긍정적인 변화를 인정했다.
타하라 소이치로는 조유에 대해 "조유 씨는 (종교가) 아니고 (종교를 벗어나) 종교의 무서움을 몸소 잘 알고 있다"고 평가했다. 시모조 신스케는 조유의 저서가 옴진리교 사건 관련 서적 중 "가장 잘 정리되어 있고", "가장 깊이 파고들었다"고 높이 평가하며, "무엇보다 아사하라와 젊은 신자들의 심리를 내부에서 분석한 것이 탁월하다"고 언급했다. 종교학자 오타 토시히로는 "조유 씨는 현재 그 입장 때문에 비판이나 비난을 많이 받지만, 이는 곧 그가 옴진리교 사건의 책임에 응답하는 주체로서 누구보다 정면에 서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며 그의 노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로프트 그룹의 창립자 히라노 유는 조유를 처음 만났을 때 "매우 반짝거렸고, 그에게서 나오는 파동, 오라가 나를 압도하는 느낌이었다"고 표현하며, "완전히 아사하라 색깔을 탈피했다", "체포되고 고통받으며 지옥을 보았을 것이다. 크게 탈피했다. 실로 균형 감각 있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성실하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일반적인 종교라는 개념을 넘어선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느낌이 들었다"고 평했다.
이러한 평가들은 조유 후미히로가 옴진리교 사건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물이지만, 동시에 자신의 과거를 반성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며 사회와 소통하려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