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페르골레시는 짧은 생애 동안 나폴리와 로마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오페라와 종교 음악에서 중요한 발자취를 남겼다.
1.1. 어린 시절과 교육
조반니 바티스타 페르골레시는 교황령의 일부였던 예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상들이 마르케주의 페르골라 출신이었기 때문에, 그는 흔히 그 지역 주민을 뜻하는 별칭인 "페르골레시"로 불리게 되었다. 그는 어린 시절 예시에서 지역 음악가인 프란체스코 산티에게 음악을 배웠다. 이후 1725년 나폴리로 가서 나폴리 음악원에 입학하여 가에타노 그레코와 프란체스코 페오 등에게 사사했다. 그는 바이올린에 뛰어났으며, 특히 스승들이 감탄할 정도로 뛰어난 즉흥 연주 솜씨를 지니고 있었다.
1.2. 초기 활동과 경력
1731년 21세의 나이로 음악원을 졸업한 페르골레시는 곧바로 작곡가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졸업 작품으로 2부작 오라토리오 La fenice sul rogo, o vero La morte di San Giuseppe불타는 불사조, 또는 성 요셉의 죽음이탈리아어과 3막의 성극 아퀴타니아 공작 성 굴리엘모의 회심과 죽음에서의 신성한 은총의 기적을 공연하며 명성을 얻었다. 같은 해 그의 첫 오페라 세리아인 살루스티아를 초연했으나, 이 작품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1732년 나폴리어로 된 오페라 부파 로 프라테 인나모라토를 초연하며 첫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짧은 생애의 대부분을 스틸리아노의 페르디난도 콜론나 공작과 마달로니의 도메니코 마르치오 카라파 공작과 같은 귀족 후원자들을 위해 일했다. 1734년 2월, 24세의 젊은 나이로 나폴리 시의 예배당 악장 대리에 취임했다.
1.3. 주요 작품 활동
페르골레시는 1733년 8월 28일 나폴리의 산 바르톨로메오 극장에서 오페라 세리아 일 프리조니에르 수페르보를 초연했다. 이 오페라 자체는 실패로 끝났지만, 이 작품에 포함된 2막짜리 부파 막간극 마님이 된 하녀는 그 자체로 매우 인기 있는 작품이 되었다. 특히 1752년 파리에서 이 작품이 공연되자, 장바티스트 륄리와 장필리프 라모와 같은 프랑스 진지 오페라의 지지자들과 새로운 이탈리아 희극 오페라의 지지자들 사이에 이른바 '부퐁 논쟁'이 촉발되었다. 이 논쟁은 2년 동안 파리 음악계를 양분했으며, 페르골레시는 이 논쟁에서 이탈리아 스타일의 모범으로 추앙받았다.
그의 다른 오페라 작품으로는 1734년 10월 25일 나폴리에서 초연된 오페라 세리아 아드리아노 인 시리아와 그 안에 포함된 막간극 리비에타 에 트라콜로, 1735년 1월 로마의 토르디노나 극장에서 초연된 오페라 세리아 올림피아데 (그의 오페라 중 나폴리 외에서 초연된 유일한 작품), 그리고 1735년 가을 나폴리의 테아트로 누오보에서 초연된 나폴리어 희극 오페라 일 플라미니오 등이 있다.
페르골레시는 또한 종교 음악도 작곡했는데, F장조 미사와 세 개의 살베 레지나 곡이 포함된다. 그의 가장 잘 알려진 종교 작품은 소프라노, 알토, 현악 오케스트라 및 통주저음을 위한 스타바트 마테르 (1736년)이다. 이 작품은 성모 마리아를 기리는 연례 성금요일 명상을 주관하는 콘프라테르니타 데이 카발리에리 디 산 루이지 디 팔라초의 의뢰로 작곡되었다. 페르골레시의 작품은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가 1724년 작곡했던 스타바트 마테르를 대체했는데, 당시 스카를라티의 작품은 이미 "구식"으로 인식될 만큼 대중의 취향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이 작품은 고전적인 범위를 가지면서도, 첫 부분은 더 빠른 연결된 베이스라인 위에 수많은 계류를 특징으로 하는 이탈리아 바로크의 '두레체 에 리가투레' 스타일(durezze e ligature)에 대한 페르골레시의 숙달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인기를 유지하며 18세기에 가장 자주 인쇄된 음악 작품이 되었고,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를 포함한 여러 다른 작곡가들에 의해 편곡되기도 했다. 바흐는 이 곡을 재오케스트라화하고 마리아 신심과 관련 없는 가사를 붙여 칸타타 틸게, 회히스터, 마이네 쥔덴 (BWV 1083)으로 각색했다.

1.4. 건강 악화와 죽음
1735년경부터 지병인 결핵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1735년 로마에서 오페라 올림피아데를 초연했으나 실패한 후 나폴리로 돌아왔다. 이 무렵부터 결핵으로 인해 건강이 급격히 나빠져 종교 음악 작곡에 몰두하게 되었다. 1736년 2월, 의사의 권유로 요양을 위해 나폴리 근교의 포추올리에 있는 성 프란체스코 수도원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곳에서 그는 나폴리 귀족들의 모임인 '슬픔의 성모 기사단'으로부터 의뢰받은 스타바트 마테르를 마지막 힘을 다해 완성했다. 작품을 완성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는 1736년 3월 16일 또는 17일, 26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신은 하루 뒤인 3월 17일 프란체스코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2. 음악 세계와 스타일
페르골레시는 바로크 시대와 고전파 시대를 잇는 중요한 위치에 있으며, 독특한 음악적 특징을 지닌다.
2.1. 나폴리 악파와 바로크 음악
페르골레시는 나폴리 악파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으며, 그가 계승한 바로크 음악 전통을 바탕으로 작곡했다. 그의 스타바트 마테르의 서두 부분은 이탈리아 바로크의 '두레체 에 리가투레(durezze e ligature)' 스타일, 즉 더 빠르고 연결된 베이스라인 위에 수많은 계류를 사용하는 기법에 대한 그의 숙달을 보여준다. 그는 당대 이탈리아 음악의 중심이었던 나폴리에서 교육받고 활동하며, 당시 유행하던 오페라 세리아와 희극 오페라의 흐름을 따랐다.
2.2. 고전파 음악으로의 전환
페르골레시는 바로크 양식에서 고전파 양식으로의 전환기에 활동한 핵심적인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오페라 부파의 초기 중요한 작곡가 중 한 명으로, 이후 모차르트나 로시니와 같은 작곡가들에게 이어지는 오페라 부파의 기초를 다졌다. 그의 음악은 명료하고 간결하며, 감정적인 깊이를 통해 고전주의 시대의 문을 여는 데 기여했다. 그의 혁신적인 스타일은 바로크 시대의 복잡한 대위법적 구조에서 벗어나, 선율의 명확성과 단순성을 강조하며 새로운 음악적 언어를 제시했다.
2.3. 음악적 특징
페르골레시의 작풍은 장대한 구성력은 다소 부족하다는 평도 있지만, 선율의 매끄러움과 신선한 아름다움, 풍부한 화성의 뉘앙스, 그리고 섬세함으로 걸출하다. 특히 성악 작법에서는 광채를 느낄 수 있다. 그의 작품은 감성적이고 표현력이 풍부하며, 자연스럽고 단순한 표현 방식을 특징으로 한다. 이는 당시 유행하던 바로크 음악의 장식적이고 복잡한 경향에서 벗어나, 보다 직관적이고 서정적인 음악을 추구했음을 보여준다.
3. 사후 명성과 영향
페르골레시는 생전에 주로 나폴리와 로마 지역에서만 명성을 얻었지만, 사후 그의 명성은 유럽 전역으로 급격히 확산되었고, 이는 음악사에서 전례 없는 현상으로 기록되었다.
3.1. 사후 명성 확산 및 신화 형성
역사가이자 여행가인 찰스 버니는 "그의 죽음이 알려진 순간부터 이탈리아 전역은 그의 작품을 듣고 소유하려는 강한 열망을 드러냈다"고 기록했다. 실제로 그의 사후 유럽 전역에서 그의 삶과 작품을 둘러싸고 형성된 신화는 음악사에서 이례적인 현상이다. 모차르트 또한 사후 비슷한 현상을 겪게 된다. 19세기 동안 시인들과 예술가들은 페르골레시를 낭만적인 시각으로 재해석했다. 그의 삶과 작품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가 부족했기 때문에, 그의 비극적인 죽음이 자연적인 원인이 아니라 그의 재능을 질투한 음악가들의 독살 때문이라는 상상 속의 일화들이 만연하게 되었다. 그에게 아폴론적인 아름다움과 수많은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가 귀속되기도 했다.
3.2. 부퐁 논쟁에서의 역할
페르골레시의 마님이 된 하녀는 1752년 파리에서 이탈리아 희극 오페라 극단에 의해 공연되었을 때, 유명한 '부퐁 논쟁'을 촉발시켰다. 이 논쟁은 프랑스 음악의 옹호자들과 이탈리아 오페라 부파의 지지자들 사이에서 일어났다. 특히 장자크 루소에게 페르골레시 음악의 신선함과 우아함은 이탈리아 오페라가 프랑스 서정 비극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명확히 보여주는 증거였다. 프랑스 작곡가 앙드레 그레트리는 "페르골레시가 태어났고, 진실이 알려졌다!"고 말했다. 페르골레시는 이 논쟁에서 이탈리아 스타일의 모범으로 추앙받으며 파리 음악계를 2년 동안 양분시켰다.
3.3. 작품의 위작 및 오용
페르골레시의 사후 명성이 비정상적으로 확산되면서 그의 작품 목록은 예측 불가능한 운명을 맞았다. 18세기와 19세기 동안 유럽에서는 투기를 목적으로 나폴리 악파의 음악 스타일을 가진 모든 악보를 그의 이름으로 출판하는 관행이 퍼졌다. 이로 인해 19세기 말에는 그의 '비공식' 작품 목록에 500곡이 넘는 작품이 포함되기에 이르렀다. 현대 연구에서는 페르골레시의 진정한 작품을 50곡 미만으로 줄였으며, 이 중 단 28곡만이 확실한 그의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가장 잘 알려진 작품 중에서도 F단조 살베 레지나와 같이 작자 귀속에 대한 심각한 의심이 남아있는 경우가 많다. 여러 음악 및 음반 출판사들은 이러한 불확실성을 지속시키며, 다른 작곡가들의 작품을 그의 이름으로 출판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Se tu m'ami만약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면이탈리아어은 19세기 후반 음악학자 알레산드로 파리조티가 확실히 작곡한 곡이며, 트레 조르니 손 케 니나는 빈첸초 레그렌치오 치암피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D장조 마니피카트는 그의 스승인 프란체스코 두란테가 작곡한 것이다.
페르골레시 작품 목록의 극심한 불확실성은 이고리 스트라빈스키의 발레 풀치넬라의 경우를 통해 쉽게 설명될 수 있다. 1920년 예시 출신 작곡가의 스타일에 대한 헌정으로 작곡된 이 작품은, 최근 음악 비평가들의 연구에 따르면 이 작품에 사용된 21곡 중 무려 11곡이 다른 작곡가(주로 도메니코 갈로)의 작품으로, 2곡은 작자 미상이며, 단 8곡(주로 그의 오페라에서 발췌)만이 페르골레시의 작품으로 귀속될 수 있다고 밝혀졌다.
3.4. 후대 음악에 미친 영향
페르골레시는 후대 음악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그의 스타바트 마테르를 자신의 칸타타 틸게, 회히스터, 마이네 쥔덴 (BWV 1083)으로 재편곡하고 가사를 각색했다. 그는 오페라 부파의 선구자로서 모차르트와 로시니와 같은 후대 작곡가들이 이 장르를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토대를 마련했다. 또한 이고리 스트라빈스키는 그의 작품을 바탕으로 발레 풀치넬라를 작곡하여 신고전주의 음악의 서막을 알리는 데 기여했다. 이는 페르골레시의 음악이 시대를 초월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재해석되고 활용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4. 작품 목록
페르골레시의 작품에 대한 표준 목록은 마빈 페이머가 1977년에 작성했으며, 각 항목에 고유한 P 번호를 부여하여 예를 들어 잘 알려진 스타바트 마테르는 P.77로 표기된다.
4.1. 오페라
- 살루스티아 (1732년 1월, 나폴리 산 바르톨로메오 극장; 아포스톨로 제노의 알레산드로 세베로를 바탕으로 한 세바스티아노 모렐리의 대본으로 추정)
- 로 프라테 인나모라토 (1732년 9월 27일, 나폴리 피오렌티니 극장)
- 일 프리조니에르 수페르보, 막간극 마님이 된 하녀 포함 (1733년 8월 28일, 나폴리 산 바르톨로메오 극장)
- 아드리아노 인 시리아, 막간극 리비에타 에 트라콜로 포함 (1734년 10월 25일, 나폴리 산 바르톨로메오 극장)
- 올림피아데 (1735년 1월, 로마 토르디노나 극장)
- 일 플라미니오 (1735년 가을, 나폴리 테아트로 누오보)
4.2. 종교 음악
- 안티포나 In caelestibus regnis천상의 왕국에서라틴어 (1731)
- Confitebor tibi Domine주님, 당신을 찬양하나이다라틴어 (시편 111편) C장조, 소프라노, 알토, 합창, 현악 및 통주저음 (1732)
- Dixit Dominus주께서 말씀하시기를라틴어 (시편 110편) 소프라노, 베이스, 2개 합창단 및 2개 오케스트라 (1732)
- Laudate pueri Dominum어린이들아, 주님을 찬양하라라틴어 (시편 113편) D장조, 소프라노, 메조, 합창 및 오케스트라 (1734)
- 미사 D장조 (1732)
- 미사 F장조 "산 에미디오" (Missa romana로마 미사라틴어) 소프라노, 알토, 2개 합창단, 2개 오케스트라 및 통주저음 (1732)
- 오라토리오 La fenice sul rogo, o vero La morte di San Giuseppe불타는 불사조, 또는 성 요셉의 죽음이탈리아어 (1731, 나폴리 지로라미니 교회 아트리움)
- 성극 아퀴타니아 공작 성 굴리엘모의 회심과 죽음에서의 신성한 은총의 기적 (1731, 나폴리 산탄옐로 마조레 수도원)
- 살베 레지나 A단조, 소프라노, 현악 및 통주저음 (1731)
- 살베 레지나 C단조, 소프라노, 현악 및 통주저음 (1735)
- 살베 레지나 F단조, 알토, 현악 및 통주저음 (1736, C단조 살베 레지나에서 각색)
- 스타바트 마테르 F단조 (1735년 작곡, 1736년 나폴리 초연)
4.3. 기악 음악
- 신포니아 B♭장조
- 신포니아 D장조
- 신포니아 F장조
- 신포니아 G장조, P.35
- 신포니아 G단조, P.24c
- 플루트 협주곡 G장조, P.33 (매우 의심스러움)
- 플루트와 2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 D장조
- 플루트와 2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 G장조
- 2대의 하프시코드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
- 바이올린 협주곡 B♭장조
- 하프시코드 소나타 A장조, P.1
- 하프시코드 소나타 D장조
- 오르간 소나타 F장조
- 오르간 소나타 G장조
- 트리오 소나타 G장조, P.12
- 트리오 소나타 G단조
-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미지 안단티노
- 바이올린 소나타 G장조
- 2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 1번 G장조
- 첼로와 통주저음을 위한 신포니아 F장조
4.4. 위작 및 의심 작품
페르골레시의 사후 명성이 급상승하면서 수많은 작품이 잘못 귀속되었으며, 그의 진정한 작품 목록을 확정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다음은 그에게 잘못 귀속되었거나 작자 미상으로 의심되는 유명한 작품들이다.
- Miserere미제레레라틴어 C단조 (위작으로 추정)
- 마니피카트 C장조 (위작)
- 막간극 Il maestro di musica음악 선생이탈리아어 (주로 피에트로 아울레타의 작품을 바탕으로 한 파스티초)
- 가곡 니나 (Tre giorni son che Nina삼일 밤낮으로 니나이탈리아어) (빈첸초 레그렌치오 치암피 작으로 추정)
- 가곡 Se tu m'ami만약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면이탈리아어 (알레산드로 파리조티 작)
- 플루트 협주곡 (1번 G장조, 2번 D장조)
- 합주 협주곡 콘체르티 아르모니치 6곡 (우니코 빌헬름 판 바세나르 작)
- 그 외 트리오 소나타 및 쳄발로 연습곡 다수
5. 대중 매체에서의 작품
페르골레시의 음악은 여러 영화와 다큐멘터리에서 사용되어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다.
- 영화 파리넬리 (1994)에서는 페르골레시의 살베 레지나가 주요하게 연주되며, 파리넬리가 스타바트 마테르 돌로로사를 유일한 듀엣으로 공연한다.
- 영화 몬트리올의 예수 (1989)의 사운드트랙에는 페르골레시의 스타바트 마테르의 첫 부분과 마지막 부분이 사용되었다.
- 영화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1997)의 사운드트랙에는 스타바트 마테르의 다섯 번째 부분("Quis est homo이 사람은 누구인가라틴어")이 사용되었다.
- 영화 아마데우스 (1984)와 안드레이 타르콥스키 감독의 영화 거울 (1975)에서도 스타바트 마테르의 마지막 부분이 사용되었다.
- 호주 감독 폴 콕스의 영화 선인장 (1986)에도 페르골레시의 스타바트 마테르가 사운드트랙으로 포함되었다.
- 글로리아 밴더빌트와 앤더슨 쿠퍼에 대한 2016년 다큐멘터리 Nothing Left Unsaid남겨진 말은 없다영어에서는 페르골레시의 스타바트 마테르의 마지막 악장("Quando Corpus / Amen몸이 죽을 때 / 아멘라틴어")이 사용되었다.
6. 평가
페르골레시는 26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짧은 활동 기간 동안 높은 예술적 가치와 역사적 중요성을 지닌 작품들을 창조했다. 그는 바로크 음악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고전파 음악의 새로운 시대를 여는 데 중요한 교량 역할을 한 작곡가로 평가받는다. 특히 마님이 된 하녀를 통해 오페라 부파의 발전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으며, 이는 후대 모차르트와 로시니 같은 작곡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음악은 장대한 구성력보다는 선율의 매끄러움, 신선한 아름다움, 풍부한 화성적 뉘앙스, 그리고 섬세함에서 탁월하다는 평을 받는다. 특히 성악 작법은 빛나는 재능을 보여주었다. 사후 그의 명성이 급격히 확산되면서 수많은 위작과 오용 문제가 발생했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그의 음악이 대중에게 얼마나 큰 영향력을 미쳤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페르골레시는 짧지만 강렬한 생애를 통해 음악사에 지울 수 없는 발자취를 남긴 천재적인 작곡가로 기억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