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스코틀랜드 출신의 역사가, 경제학자, 정치 이론가, 철학자인 제임스 밀(James Mill, James Milne제임스 밀른영어, 1773년 4월 6일 ~ 1836년 6월 23일)은 존 스튜어트 밀의 아버지이자 공리주의 철학자 제러미 벤담의 주요 동료이자 제자이다. 그는 리카르도 학파 경제학의 창시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으며, 저서 『영국령 인도의 역사』(1817)를 통해 식민주의적 관점을 취한 주요 역사학자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인도 역사를 힌두교, 이슬람교, 영국 시대로 분류하는 방식의 초석을 다졌는데, 이러한 분류는 인도 역사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밀은 자신의 저작과 활동을 통해 철학, 경제학, 정치학, 심리학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나, 인도와 제국주의에 대한 그의 배타적이고 편향된 시각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논란과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2. 초기 생애와 교육
제임스 밀은 1773년 4월 6일, 스코틀랜드 앵거스의 로지 페르트 교구에 위치한 노스워터 브리지에서 James Milne제임스 밀른영어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제화공이자 소규모 농부였고, 어머니 이사벨 펜턴은 자코바이트 반란과 연관되어 어려움을 겪었던 가문 출신이었다. 어머니는 그가 최고의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결심했고, 교구 학교를 마친 후 그를 몬트로즈 아카데미로 보냈다. 그는 몬트로즈 아카데미에서 17세 반이라는 이례적인 나이까지 학업을 이어갔다. 이후 그는 에든버러 대학교에 입학하여 그리스어 학자로 두각을 나타냈으며, 신학 분야에서 교육을 마쳤다. 그의 어머니는 그의 성을 스코틀랜드식 표기인 Milne에서 잉글랜드식 표기인 Mill로 바꾸도록 했다.
3. 종교관 및 도덕 철학
제임스 밀은 스코틀랜드 장로교의 신조 아래 양육되었으나, 젊은 시절 자신의 연구와 성찰을 통해 전통적인 종교적 신념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가지게 되었다. 특히 그는 조지프 버틀러의 『종교의 유추』(Anology of Religion)를 접하면서 계시 종교뿐만 아니라 소위 자연 종교의 기초까지도 일찍이 거부하게 되었다. 그는 내세나 지옥을 이용하여 현세의 삶을 통제하려는 당시의 기독교를 혐오스러운 시각으로 바라보았으며, 결국 루크레티우스처럼 모든 종교가 도덕적 악이라고 주장하며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인류의 기원에 대해서는 신의 기원과 마찬가지로 알 수 없는 것이라고 보았다.
밀의 도덕적 이상향은 소크라테스였다. 그는 아들 존 스튜어트 밀에게도 이러한 확신을 심어주었다. 밀의 인생관은 스토아 학파, 에피쿠로스 학파, 견유 학파의 특성을 각각 계승하며 실리적인 관점을 취했다. 그는 어떤 행위가 쾌락을 낳는지 고통을 낳는지에 따라 선악의 기준을 설정했다. 그러나 만년에는 특히 지불해야 할 대가에 비할 만한 쾌락은 거의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는 "절제"를 가장 큰 미덕으로 보았고, 이것이 교육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감정"이 지나치게 강조되는 현대의 풍조가 고대에 비해 개탄스러운 습관이며, 올바른 행위를 방해한다고 보았다. 그는 행위자의 동기보다 행위 자체의 선악(효용)을 판단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4. 제러미 벤담과의 교류

제임스 밀은 1808년 당시 자신보다 25세 연상이었던 제러미 벤담과 교류를 시작했으며, 이후 수년간 벤담의 주요 동반자이자 동맹이 되었다. 그는 벤담의 공리주의 원칙을 전적으로 수용하고, 이를 세상에 알리는 데 모든 에너지를 쏟겠다고 결심했다. 밀은 벤담의 사상을 이해하고 추종하는 한편, 벤담으로부터 잉글랜드에서 경제적, 사회적으로 입지를 확보하는 데 전폭적인 후원을 받았다. 벤담의 사상을 중심으로 근본적인 사회 개혁을 추구했던 인물들을 가리켜 "철학적 급진주의자"라고 불렀는데, 밀은 이 운동에서 젊은이들을 실질적으로 이끄는 지도자 역할을 하며 벤담과의 협력을 통해 자신의 경력과 사상을 발전시켰다.
5. 경력 및 공직 생활
제임스 밀은 젊은 시절 스코틀랜드 교회의 목사로 안수받았으나, 그의 설교가 교인들에게 쉽게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에 오래가지 않아 그 직책을 떠났다. 그는 목사직을 그만둔 후에도 학문적 열정을 잃지 않고 1802년 킨카딘셔의 국회의원이었던 존 스튜어트 경과 함께 런던으로 이주하여 문학 활동에 전념했다. 1803년부터 1806년까지 그는 모든 주요 인문 지식을 요약하여 제공하려는 야심 찬 정기간행물 『리터러리 저널』(Literary Journal)의 편집자로 활동했으며, 이 시기에 같은 소유주가 발행하는 『세인트 제임스 크로니클』(St James's Chronicle)도 편집했다.
1804년에는 곡물 수출에 대한 관세(또는 '보조금')에 반대하는 옥수수 무역에 관한 팜플렛을 저술했다. 1805년에는 샤를 드 빌레르의 종교 개혁에 관한 저서 『루터 종교개혁의 정신과 영향에 관한 에세이』를 번역하여 주석과 인용문을 덧붙여 출판했으며, 교황 제도에 대한 비판도 담았다. 같은 해 말, 그는 3~4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했던 『영국령 인도의 역사』 집필을 시작했으며, 이 작업은 무려 12년간 이어졌다.
1806년에는 해리엇 버로우와 결혼하여 존 스튜어트 밀을 낳았다. 1806년부터 1818년 사이에 그는 『안티-자코뱅 리뷰』(Anti-Jacobin Review), 『브리티시 리뷰』(British Review), 『에클렉틱 리뷰』(Eclectic Review)에 기고했으나, 그의 기고문들을 모두 추적할 방법은 없다. 1808년에는 더욱 유명한 『에든버러 리뷰』(Edinburgh Review)에 글을 쓰기 시작하여 1813년까지 꾸준히 기고했는데, 그의 첫 번째 기사는 "화폐와 환율"이었다. 그는 또한 스페인령 아메리카, 중국, 프란시스코 데 미란다, 영국 동인도 회사, 언론의 자유에 대해서도 글을 썼다. 1808년 『연례 리뷰』(Annual Review)에는 그의 두 편의 기사, "폭스 역사서 검토"와 "벤담의 법률 개혁"이 확인되는데, 이는 아마도 벤담에 대한 그의 첫 번째 출판된 언급일 것이다. 1811년, 그는 윌리엄 앨런과 협력하여 『필란트로피스트』(Philanthropist)라는 정기간행물을 발행했다. 그는 교육, 언론의 자유, 감옥 규율(여기서 그는 벤담의 파놉티콘을 해설했다)을 주요 주제로 삼아 모든 호에 대량으로 기고했다. 그는 모니터링 시스템과 관련된 벨 및 랭카스터 논란과 관련하여 교회에 대한 강력한 공격을 가했으며, 1825년 런던 대학교 설립을 이끈 논의에 참여했다. 1814년에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제5판 보충판을 위해 "법학", "감옥", "정부", "국제법" 등의 중요한 글들을 포함하여 공리주의를 설명하는 다수의 기사를 썼다.
5.1. 동인도 회사에서의 경력
1818년에 『영국령 인도의 역사』가 출판되면서 밀의 운명은 크게 바뀌었다. 이듬해 그는 인도 하우스에서 인도 서신 심사관이라는 중요한 직책에 임명되었다. 그는 점차 승진하여 1830년에는 사무실 책임자로 임명되었으며, 급여는 1900 GBP였고, 1836년에는 2000 GBP로 인상되었다. 그는 자신의 직책 덕분에 동인도 회사 이사회의 대변인 역할을 수행하며 1831년부터 1833년까지 동인도 회사 헌장 갱신 논란 동안 회사를 강력하게 옹호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5.2. 영국 정치에 미친 영향
제임스 밀은 영국 정치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철학적 급진주의"라고 불리는 운동의 주요 인물이었다. 정부에 대한 그의 저술과 당시 영국 자유당 정치인들 사이에서 그의 개인적인 영향력은 프랑스 혁명에서 비롯된 인권 및 남녀 절대 평등 이론에서 벗어나, 광범위한 선거권 확대를 통해 좋은 정부를 보장하자는 시각으로의 변화를 이끌었다. 이러한 기치 아래 개혁 법안이 추진되어 통과되었다.
6. 주요 저작 및 지적 기여
제임스 밀은 『영국령 인도의 역사』, 『정치경제학 원리』, 『인간 정신 현상 분석』 등 여러 주요 저작을 통해 역사학, 경제학, 심리학, 윤리학, 정치학 등 다양한 분야에 지대한 지적 기여를 남겼다.
6.1. 『영국령 인도의 역사』
1818년에 출판된 『영국령 인도의 역사』(The History of British India)는 제임스 밀의 대표작이자 출세작이며, 출판 즉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책은 영국이 인도 제국을 획득하는 과정을 묘사하며, 특히 영국 제국주의를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정당화했다. 밀은 이 책에서 인도를 영국의 '문명화 사명'의 대상이자 영국 통치를 통해 인도 사회를 개선할 수 있다는 시각을 견지했다. 그는 인도 사회를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야만적이라고 묘사하며, 인도인들이 스스로 통치할 능력이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힌두교도들이 결코 "높은 수준의 문명을 소유한 적이 없다"고 단언했다.
이 저작은 밀이 단 한 번도 인도 식민지를 방문하지 않고 오직 문헌 자료와 기록에만 의존하여 집필되었다는 점에서 심각한 비판을 받았다. 저명한 경제학자 아마르티아 센은 밀의 이러한 태도를 강하게 비판했다. 학자 토마스 트라우트만은 밀의 이 책이 "영국인들의 인도 혐오와 동양주의에 대한 적대감의 가장 중요한 단일 원천"이라고 주장했다. 밀은 이 책에서 힌두교도들이 "겉으로는 온화하지만 내면에는 기만과 배신을 일삼는 성향이 있다"고 썼으며, "동일한 불성실, 허위, 배신; 타인의 감정에 대한 동일한 무관심; 동일한 매춘과 금전욕"이 힌두교도와 무슬림 모두의 특징이라고 보았다. 특히 힌두교도에 대해서는 "고자인 유니크처럼 노예의 자질에 탁월하다"고 폄하했으며, 중국인과 힌두교도 모두 "교양 없는 사회의 일반적인 수준을 뛰어넘는 지나친 기만적, 배신적, 허위적인 경향이 있다"고 보았다. 또한 "자신과 관련된 모든 것에 대해 지나치게 과장하는 경향"이 있으며, "겁 많고 몰인정하며", "지극히 자만하고 타인에 대한 인위적인 경멸로 가득하다"고 묘사했다。 더 나아가 "육체적으로는 더럽고 불결한 외모와 집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밀은 인도 역사학에서 인도의 역사를 힌두교, 이슬람교, 영국 시대로 처음으로 분류했는데, 이 분류는 인도 역사 연구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이 분류법 자체도 종교적 정체성을 기반으로 인도 사회를 단순화하고 분열시키는 식민주의적 관점을 반영한다는 비판을 받는다. 이 책은 막스 뮐러에게 "인도인들이 '열등한 민족'이라는 의견에 반대하는" 주장의 원인이 되었는데, 뮐러는 그러한 견해가 잘못되었을 뿐만 아니라 영국인의 인도 생활을 '도덕적 망명'으로 만들었다고 지적하며 밀의 『영국령 인도의 역사』가 인도에 일어난 "가장 큰 불행의 일부를 책임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인도 통치를 위해 나가는 이들이 "광기로 변질될 수 있는 국가적 편견을 버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6.2. 『정치경제학 원리』
1821년에 출판된 밀의 경제학 대작 『정치경제학 원리』(Elements of Political Economy)는 그의 친구 데이비드 리카도의 견해를 따랐다. 1911년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이 책이 주로 역사적 흥미를 가질 뿐 "이제는 대체로 폐기된 견해를 정확하게 요약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 책의 주요 주장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포함된다.
- 실제 개혁가들의 주요 문제는 인구 증가를 제한하는 것인데, 이는 자본이 인구와 같은 속도로 자연스럽게 증가하지 않는다는 가정에 기반한다.
- 사물의 가치는 전적으로 투입된 노동의 양에 달려있다.
- 현재 "불로소득"으로 알려진 토지의 증가는 세금 부과의 적절한 대상이 되어야 한다.
6.3. 『인간 정신 현상 분석』
1829년에 출판된 『인간 정신 현상 분석』(Analysis of the Phenomena of the Human Mind)은 제임스 밀에게 심리학 및 윤리학 분야에서 중요한 위치를 부여했다. 그는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철학자였던 토머스 리드, 더갈드 스튜어트, 토머스 브라운의 방식대로 정신의 문제를 다루었으나, 데이비드 하틀리의 영향과 자신의 독자적인 사고를 통해 새로운 시작을 알렸다. 그는 연합주의(associationism) 원칙을 복잡한 정서 상태, 즉 애정, 미적 감정, 도덕적 감정의 분석에 적용하여 이 모든 것을 즐겁고 고통스러운 감각으로 환원시키려 했다. 이 저서의 가장 큰 장점은 용어의 정확한 정의와 교리의 명확한 진술을 끊임없이 추구한다는 점이다. 이 책은 프란츠 브렌타노에게 큰 영향을 미쳐 그의 경험 심리학에 반영되었다.
밀은 감각 지각과 인간 정신 분석에 대한 그의 이론에서, 존 로크의 관념에 대한 견해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보았다. 감각은 인간의 감각 기관과 외부로부터 오는 자극의 직접적인 접촉의 결과이며, 관념은 기억 속에 나타나는 감각의 일종의 복사본이다. 밀은 감각과 관념을 분리하기 어렵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감각이 관념을 일으키고, 사람이 먼저 감각을 경험하지 않고서는 관념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밀은 관념들이 서로 연결될 수 있으며, 한 관념을 다른 관념과 연결하는 메커니즘을 연합(association)이라고 불렀다. 이 연합은 밀의 이론에서 매우 중요하며, 그는 연합이 오직 하나의 법칙, 즉 인접성(contiguity)의 법칙에만 따른다고 주장했다. 그는 연합의 강도를 결정하는 세 가지 기준을 제시했다.
- 항구성: 강한 연합은 영구적이며, 항상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영구성이 적은 연합은 약하며 잠시 후에 쉽게 사라진다.
- 확실성: 연합이 강하다면 연합하는 사람이 그 연합의 진실성을 확신한다.
- 용이성: 연합이 강하려면 주변 환경에 연합의 발생을 용이하게 하는 충분한 인프라나 시설이 있어야 하므로, 사람이 연합을 하기 위해 깊이 생각하거나 상상할 필요가 없다.
6.4. 기타 저술
제임스 밀은 주요 저서 외에도 정부, 법학, 언론의 자유 등 다양한 주제에 걸쳐 중요한 에세이와 저술들을 남겼다. 그는 1820년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정부"에 대한 글을 기고했으며, 1825년에는 "언론의 자유"에 대한 글을 썼다. 1823년에는 "정부, 법학, 언론의 자유, 교육, 감옥 및 감옥 규율에 관한 에세이"를 출판하여 자신의 폭넓은 관심사를 드러냈다.
1835년에 출판된 그의 마지막 저서 『매킨토시에 대한 단편』(Fragment on Mackintosh)은 제임스 매킨토시 경의 『윤리 철학의 진보에 대한 논문』(1830)의 부실함과 왜곡을 혹독하게 비판하며, 저자 자신의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윤리의 기초를 논했다. 또한 그는 1830년 『투표에 대한 에세이 및 매킨토시에 대한 단편』을 저술하기도 했다. 1836년에는 『런던 리뷰』(London Review)에 "정치 경제학이 유용한가"라는 제목의 주목할 만한 기사를 썼다. 1837년에는 『관용의 원리』(The Principles of Toleration)가 출판되었다. 밀은 또한 1824년부터 1826년까지 급진주의 정당의 기관지였던 『웨스트민스터 리뷰』(Westminster Review)에 다수의 기사를 기고하며 『에든버러 리뷰』와 『쿼터리 리뷰』(Quarterly Review), 그리고 교회 기관을 공격했다. 그는 1834년 윌리엄 몰스워스 경이 창간한 『런던 리뷰』를 위해 "교회와 그 개혁"이라는 주목할 만한 기사를 썼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너무 회의적이어서 『웨스트민스터 리뷰』에 손해를 입혔다. 밀 자신은 무신론자였다.
7. 인도 및 제국주의에 대한 견해
제임스 밀은 인도에 대한 편향되고 비판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의 저서 『영국령 인도의 역사』는 이러한 시각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는 한 번도 인도를 방문한 적이 없었고 힌디어를 전혀 알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영어로 된 문헌과 2차 자료만을 기반으로 인도를 기술했다. 이로 인해 그의 인도 묘사는 인도 사회 및 인민에 대한 깊이 없는 이해와 서구 중심주의적 편견이 강하게 드러난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는 인도 사회를 "도덕적으로 타락했고", "야만적이며", "스스로 통치할 능력이 없다"고 묘사했다. 특히 힌두교도들을 "기만적이고 배신적인 기질을 가졌으며", "매춘과 금전욕이 심하고", "겁 많고 몰인정하며", "더럽고 불결한 외모를 가졌다"고 노골적으로 비하했다. 그는 이러한 특성들이 인도인들을 "하등한 문명"에 속하는 국민으로 만든다고 주장하며, 중국, 페르시아, 아라비아, 일본, 코친차이나, 태국, 미얀마, 말레이 반도, 티베트 등과 동일한 수준으로 평가했다.
밀은 영국 제국주의를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정당화했다. 그는 인도를 '문명화 사명'의 대상으로 보고, 영국 통치가 인도 사회를 개선하고 발전시킬 것이라고 믿었다. 그의 이러한 관점은 영국의 식민 통치자들이 인도를 통치하는 데 필요한 "바이블"로 여겨졌으며, 인도인에 대한 부정적인 고정관념을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는 그의 저작이 단순한 역사 기술을 넘어 식민주의를 옹호하고 인도의 전통과 문명을 폄하하는 이데올로기적 도구로 활용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는 예를 들어 아라비아 숫자와 십진법이 고대 인도에서 발명되었다든지, 아리아바타(476~550)가 땅이 둥글고 주위에 별이 있다는 생각을 했었다는 등의 기록을 서양 문명이 전파된 다음에 날조된 이야기로 일축했다. 이러한 태도는 그의 연구가 객관적인 역사 탐구가 아니라 이미 정해진 식민주의적 관점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비판을 더욱 부각시킨다.
8. 사생활
제임스 밀은 철학자이자 자유주의와 공리주의 사상가이며 영국 동인도 회사의 식민 행정관이었던 존 스튜어트 밀의 아버지이다. 그의 아내는 해리엇 버로우였다.
9. 사망
제임스 밀은 1836년 6월 23일에 사망했다.
10. 유산과 평가
제임스 밀은 공리주의 사상, 정치 개혁, 심리학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저작들은 오늘날까지도 비판적으로 수용되고 있다.
10.1. 긍정적 평가
밀은 제러미 벤담의 공리주의 사상을 체계화하고 확산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공리주의 원칙을 교육, 정부, 법학 등 다양한 사회 문제에 적용하며 사상의 발전에 기여했다. 특히 그는 "철학적 급진주의자" 운동의 주도적인 인물로서 영국 정치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광범위한 선거권 확대를 통한 좋은 정부의 보장을 주장하며 개혁 법안의 통과에 기여했고, 이는 영국 자유주의 개혁의 중요한 부분으로 평가된다.
또한 그의 저서 『인간 정신 현상 분석』은 심리학, 특히 연합주의의 발전에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그는 복잡한 감정 상태를 단순한 감각으로 환원시키려는 시도와 용어의 명확한 정의를 통해 후대 심리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데이비드 리카도의 경제학 이론을 정리하고 발전시키는 데 기여하여 고전 경제학의 한 축을 형성했다.
10.2. 비판과 논란
제임스 밀은 그의 저작, 특히 『영국령 인도의 역사』에서 드러난 식민주의적 관점으로 인해 지속적인 비판과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다. 인도를 방문하지 않고 2차 자료만으로 인도 사회를 야만적이고 열등하게 묘사한 그의 역사적 방법론은 편향되고 왜곡된 시각을 반영한다는 지적을 받는다. 이는 그의 저서가 제국주의를 정당화하고 인도의 전통과 문화를 폄훼하는 이데올로기적 도구로 활용되었다는 비판을 야기했다. 그의 경제학 이론 역시 1911년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서 "대부분 폐기된 견해"로 평가될 정도로 한계를 지적받았다. 또한, 그의 엄격하고 절제적인 도덕 철학은 인간의 감정을 지나치게 경시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의 아들 존 스튜어트 밀은 자서전에서 아버지의 엄격한 교육 방식과 감정의 억압이 자신에게 미친 부정적인 영향을 언급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