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교육
제임스 듀이 왓슨은 1928년 4월 6일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사업가인 제임스 D. 왓슨과 진 (미첼) 왓슨 부부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주로 식민지 시대 영국 이민자 후손이었고, 어머니의 아버지는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출신의 재단사 로클린 미첼, 어머니는 아일랜드 티퍼레리 카운티 출신 부모의 딸 리지 글리슨이었다. 왓슨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어머니와 신앙을 잃은 성공회 신자였던 아버지 밑에서 가톨릭 신자로 자랐지만, 나중에 자신을 "가톨릭 종교로부터의 탈출자"라고 묘사했다. 그는 "내게 일어난 가장 운 좋은 일은 아버지가 신을 믿지 않았다는 것"이라고 말하며, 11세에 미사 참석을 중단하고 "과학적, 인문학적 지식 추구"에 몰두했다.
1.1. 어린 시절과 가족 배경
왓슨은 시카고 남부에서 성장하며 호러스 맨 초등학교와 사우스 쇼어 고등학교 (시카고) 등 공립학교에 다녔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새 관찰을 취미로 삼았고, 한때 조류학을 전공할 것을 고려하기도 했다. 어린 시절에는 똑똑한 어린이들이 질문에 답하는 인기 라디오 프로그램 퀴즈 키즈에 출연하기도 했다.
1.2. 학력
시카고 대학교 총장 로버트 메이너드 허친스의 자유로운 정책 덕분에 왓슨은 15세의 나이에 시카고 대학교에 학비 장학금을 받고 입학했다. 그곳에서 그는 비판적 사고 능력과 "진실 탐구를 방해하는 바보들을 용납하지 않으려는 윤리적 강박"을 배웠다고 자서전 지루한 사람과 어울리지 마라(Avoid Boring People)에서 회고했다. 그의 교수 중 한 명인 루이 레온 서스턴으로부터 왓슨은 요인 분석을 배웠는데, 이는 나중에 그의 논란이 된 인종에 대한 견해에서 언급되기도 했다.
1946년 에르빈 슈뢰딩거의 저서 생명이란 무엇인가?(What Is Life?)를 읽은 후, 왓슨은 조류학 연구에서 유전학으로 진로를 변경했다. 그는 1947년 시카고 대학교에서 동물학 학사 학위를 받았다. 1947년, 왓슨은 1946년 노벨상 수상자 헤르만 조지프 뮐러가 재직 중인 인디애나 대학교로 진학했다. 뮐러는 1922년, 1929년, 그리고 1930년대에 발표한 중요한 논문들에서 슈뢰딩거가 1944년 저서에서 제시한 유전 물질의 모든 기본 특성을 설명한 바 있다. 왓슨은 1950년 인디애나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살바도르 루리아가 그의 박사 지도교수였다.
2. 과학 경력 및 DNA 구조 발견
2.1. 초기 영향과 파지 그룹
왓슨은 살바도르 루리아의 연구에 이끌려 분자생물학에 발을 들였다. 루리아는 유전적 돌연변이의 본질에 관한 연구인 루리아-델브뤽 실험으로 1969년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루리아는 박테리아를 감염시키는 바이러스인 박테리오파지를 활용하는 연구자 그룹의 일원이었다. 그와 막스 델브뤽은 초파리 같은 실험 시스템에서 미생물 유전학으로 전환하는 유전학자들의 중요한 움직임인 새로운 "파지 그룹"의 선두 주자였다.
1948년 초, 왓슨은 인디애나 대학교 루리아의 연구실에서 박사 연구를 시작했다. 그해 봄, 그는 루리아의 아파트에서 델브뤽을 처음 만났고, 여름에는 왓슨의 콜드 스프링 하버 연구소(Cold Spring Harbor Laboratory, CSHL) 첫 방문 중 다시 만났다. 파지 그룹은 왓슨이 과학자로 성장하는 지적 환경이 되었다. 중요한 것은 파지 그룹 구성원들이 유전자의 물리적 본질을 발견하는 길에 있다고 느꼈다는 점이다. 1949년, 왓슨은 펠릭스 하우로위츠의 강의를 수강했는데, 당시 통념이었던 "유전자는 단백질이며 스스로 복제할 수 있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염색체의 다른 주요 분자 구성 요소인 DNA는 "어리석은 테트라뉴클레오타이드"로 여겨지며 단백질을 지지하는 구조적 역할만 한다고 널리 생각되었다. 그러나 이 초기 시기에도 왓슨은 파지 그룹의 영향으로 DNA가 유전 물질임을 시사한 에이버리-맥클라우드-맥카티 실험을 알고 있었다. 왓슨의 연구 프로젝트는 X선을 사용하여 박테리아 바이러스를 불활성화하는 것이었다.
왓슨은 1950년 9월, 박사후 연구를 위해 코펜하겐 대학교의 생화학자 헤르만 칼크라의 연구실로 향했다. 칼크라는 핵산의 효소 합성에 관심이 있었고 파지를 실험 시스템으로 사용하려 했다. 그러나 왓슨은 DNA 구조를 탐구하고 싶어 했고, 그의 관심사는 칼크라와 일치하지 않았다. 칼크라와 함께 그해 일부를 보낸 후, 왓슨은 남은 시간을 코펜하겐에서 파지 그룹의 일원이었던 미생물 생리학자 올레 말로에와 함께 실험을 수행했다. 왓슨이 지난여름 콜드 스프링 하버 파지 학회에서 배웠던 실험은 방사성 인산염을 추적자로 사용하여 파지 입자의 어떤 분자 구성 요소가 바이러스 감염 중 실제로 표적 박테리아를 감염시키는지 확인하는 것을 포함했다. 그 목적은 단백질 또는 DNA가 유전 물질인지 확인하는 것이었지만, 막스 델브뤽과의 상담 후, 그들은 자신들의 결과가 결정적이지 않으며 새로 표지된 분자를 DNA로 특정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왓슨은 칼크라와 건설적인 상호 작용을 발전시키지 못했지만, 이탈리아에서 열린 회의에 칼크라와 동행하여 모리스 윌킨스가 DNA의 X선 회절 데이터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보았다. 왓슨은 이제 DNA가 해명될 수 있는 명확한 분자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확신했다.
1951년, 캘리포니아의 화학자 라이너스 폴링은 아미노산 알파 나선 모델을 발표했는데, 이는 폴링의 X선 결정학 및 분자 모델 구축 노력의 결과였다. 인디애나 대학교, 스테이텐스 혈청 연구소(덴마크), CSHL,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에서 수행한 파지 및 기타 실험 연구에서 일부 결과를 얻은 후, 왓슨은 DNA 구조를 결정하기 위해 X선 회절 실험을 수행하는 방법을 배우고 싶어 했다. 그해 여름, 루리아는 존 켄드루를 만났고, 그는 왓슨을 위해 영국에서 새로운 박사후 연구 프로젝트를 마련했다. 1951년 왓슨은 나폴리의 동물학 연구소(Stazione Zoologica 'Anton Dohrn')를 방문했다.
2.2. DNA 구조 탐색
왓슨과 크릭은 처음에는 DNA가 삼중나선일 것이라고 생각하여 3가닥 모형을 만들었다. 그러나 염기들의 수소 결합을 암시하는 노팅엄 대학교 매슨 걸랜드 연구팀의 DNA의 산성도에 따른 점성도 변화 실험을 뒤늦게 알게 되면서 이중 나선 구조를 고려하게 되었다.
2.2.1. 프랜시스 크릭과의 협력
1951년 10월, 왓슨은 케임브리지 대학교 캐번디시 연구소 물리학과에서 연구를 시작했고, 그곳에서 프랜시스 크릭을 만났다. 왓슨과 크릭은 진정한 지적 협력을 통해 불과 1년 반 만에 DNA 구조를 발견할 수 있었다. 크릭은 나선형 회절 이론을 지배하는 수학적 문제를 해결하고 방정식을 만들 수 있었고, 왓슨은 1951년 말까지 파지 그룹의 모든 주요 DNA 결과를 알고 있었다. 왓슨과 크릭은 1951년 말부터 윌킨스와 비공식적인 교류를 시작했다. 11월에 왓슨은 로잘린드 프랭클린이 레이먼드 고슬링과 함께 수행한 X선 회절 데이터에 대해 발표한 세미나에 참석했다. 이 데이터는 DNA가 어떤 종류의 나선형 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나타냈다. 세미나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왓슨과 크릭은 인산염이 구조의 안쪽에 있는 잘못된 DNA 모델을 만들었는데, 프랭클린은 인산염이 바깥쪽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왓슨과 크릭은 그녀의 의견이 옳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이 정보를 사용하여 나선형 구조를 결정했다. 모리스 윌킨스는 프랭클린에게 알리지 않고 그녀의 발견을 왓슨과 크릭에게 가져다주었다. 1952년에는 알렉산더 토드와 같은 생화학자들이 DNA 골격의 화학 구조에 대한 세부 사항을 밝혀낼 수 있었다.
1952년, 크릭과 왓슨은 DNA 분자 구조 모델 구축 작업을 중단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왓슨은 공식적으로 담배 모자이크 바이러스에 대한 X선 회절 실험을 수행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 바이러스는 1892년에 처음 발견되고 1935년에 순수 분리된 최초의 바이러스였다. 전자 현미경은 이 바이러스 결정이 감염된 식물에서 형성된다는 것을 보여주었으므로, X선 회절을 사용하여 이 바이러스를 분리하고 연구하는 것이 가능했다. 1950년 이전에 X선 회절을 통해 바이러스 이미지가 수집되었으며, 왓슨은 1950년까지 모든 X선 이미지에서 담배 모자이크 바이러스가 나선형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결론 내릴 수 있었다. 이 임무에도 불구하고, DNA의 수수께끼에 대한 도전은 매력적이었고, 크릭과 함께 그는 다시 DNA 구조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1952년 4월, 왓슨의 박사 지도교수였던 루리아는 영국에서 열리는 회의에서 강연할 예정이었으나, 냉전 정치적 이유로 여행이 금지되었다. 왓슨은 루리아의 예정된 시간을 이용하여 방사성 DNA에 대한 자신의 연구와 파지 그룹의 연구, 즉 파지 바이러스의 물질이 DNA라는 것을 발표했다. 회의 보고서에는 왓슨이 X선 회절을 사용하여 DNA 분자 크기를 계산하는 등 여러 연구자들이 이전에 발견한 내용을 논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계산은 전자 현미경 데이터를 포함한 여러 출처의 연구 결과를 종합한 것으로, DNA 분자의 크기가 약 2 nm임을 보여주었다.
왓슨과 크릭은 두 가지 운 좋은 여행 기회를 얻었다. 첫째는 1952년 어윈 샤가프의 영국 방문이었다. 샤가프는 왓슨과 크릭에게 뉴클레오타이드 생화학에 대해 더 많이 연구하도록 영감을 주었다. 뉴클레오타이드는 구아닌(G), 시토신(C), 아데닌(A), 티민(T)의 네 가지 기본 뉴클레오타이드로 구성된다. "샤가프의 법칙"은 실험을 통해 DNA에서 G의 양이 C와 같고 A의 양이 T와 같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제리 도나휴는 왓슨과 크릭에게 4개의 염기 구조가 정확하다고 설명했다. 둘째는 냉전으로 인해 라이너스 폴링의 영국 방문 계획이 취소된 사건이었다. 이로 인해 폴링은 킹스 칼리지 런던의 DNA X선 회절 데이터에 접근할 기회를 잃었고, 이 데이터는 1953년에야 출판되었다.
1953년, 크릭과 왓슨은 연구소장의 허가를 받아 DNA 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다. 윌킨스 또한 DNA 모델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2.2.2. 로잘린드 프랭클린과 모리스 윌킨스의 기여

1953년 3월 중순, 왓슨과 크릭은 DNA의 이중 나선 구조를 추론했다. 이 발견에 결정적이었던 것은 킹스 칼리지 런던에서 주로 로잘린드 프랭클린이 수집한 실험 데이터였는데, 그들은 이에 대한 적절한 공로를 인정하지 않았다. 로버트 P. 크리즈는 "그러한 인색한 행동은 과학자들 사이에서 알려지지 않았거나 심지어 드물지 않은 일일 수 있다"고 언급했다. 프랭클린의 고품질 DNA X선 회절 패턴은 미발표 결과였으며, 왓슨과 크릭은 그녀의 지식이나 동의 없이 이를 DNA 이중 나선 모델 구축에 사용했다. 프랭클린의 결과는 DNA 결정의 수분 함량 추정치를 제공했으며, 이 결과는 두 개의 당-인산 골격이 분자 바깥쪽에 있음을 시사했다. 프랭클린은 크릭과 왓슨에게 골격이 바깥쪽에 있어야 한다고 말했는데, 그전까지 라이너스 폴링과 왓슨, 크릭은 사슬이 안쪽에 있고 염기가 바깥쪽을 향하는 잘못된 모델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DNA 결정 공간군 식별은 크릭에게 두 DNA 가닥이 역평행임을 보여주었다.
고슬링과 프랭클린이 수집한 X선 회절 이미지는 DNA의 나선형 특성에 대한 최고의 증거를 제공했다. 왓슨과 크릭은 프랭클린의 미발표 데이터에 대한 세 가지 출처를 가지고 있었다.
- 왓슨이 참석했던 1951년 그녀의 세미나
- 프랭클린과 같은 연구실에서 일했던 윌킨스와의 토론
- 영국 의학 연구 위원회(UK)가 지원하는 연구실 간의 조정을 촉진하기 위한 연구 진행 보고서. 왓슨, 크릭, 윌킨스, 프랭클린 모두 MRC 연구실에서 일했다.
1954년 기사에서 왓슨과 크릭은 프랭클린의 데이터 없이는 "우리 구조의 공식화가 불가능하지는 않더라도 매우 어려웠을 것"이라고 인정했다. 이중 나선에서 왓슨은 나중에 "로지(프랭클린)는 물론 우리에게 직접 데이터를 주지 않았다. 오히려 킹스 칼리지의 누구도 그 데이터가 우리 손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고 인정했다. 최근 몇 년 동안 왓슨은 프랭클린에 대한 "여성 혐오적 대우"와 DNA 연구에 대한 그녀의 공로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은 점으로 인해 대중과 과학 언론에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한 비평가에 따르면, 이중 나선에서 왓슨이 프랭클린을 묘사한 것은 부정적이었고, 그녀가 윌킨스의 조수이며 자신의 DNA 데이터를 해석할 수 없다는 인상을 주었다. 프랭클린이 크릭과 왓슨에게 나선형 골격이 바깥쪽에 있어야 한다고 말했기 때문에 왓슨의 비난은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2003년 브렌다 매덕스의 네이처 기사에서는 "왓슨의 책에서 '로지'를 경멸하는 다른 언급들은 1960년대 후반에 부상하던 여성 운동의 주목을 받았다. '분명히 로지는 떠나야 하거나 제자리에 놓여야 했다... 불행히도 모리스는 로지를 내쫓을 마땅한 방법을 찾지 못했다.' 그리고 '확실히 끔찍한... 11월 밤에 당신이 훈련받지 않은 주제에 대해 의견을 내는 것을 삼가라고 여자가 말하는 것은 나쁜 퇴장 방식이었다'"라고 언급되었다.
로버트 P. 크리즈는 "[프랭클린]은 DNA 구조를 알아내는 데 가까웠지만, 해내지 못했다. '발견자'라는 칭호는 조각들을 처음으로 맞춘 사람들에게 돌아간다"고 언급했다. 제레미 번스타인은 프랭클린이 "희생자"였다는 것을 부정하며 "[왓슨과 크릭]이 이중 나선 체계를 작동하게 만들었다. 그만큼 간단하다"고 말한다. 매튜 콥과 나다니엘 C. 컴포트는 "프랭클린은 DNA 이중 나선이 어떻게 해결되었는지에 대한 희생자가 아니었지만, 구조 해결에 동등하게 기여했다"고 썼다.
CSHL 기록 보관소에 있는 프랭클린과 왓슨 간의 서신을 검토한 결과, 두 과학자는 나중에 건설적인 과학적 서신을 교환한 것으로 밝혀졌다. 프랭클린은 담배 모자이크 바이러스 RNA 연구에 대해 왓슨과 상의했다. 프랭클린의 편지는 "친애하는 짐에게"로 시작하여 "안녕히, 로잘린드"로 끝나는 정상적이고 평범한 인사말로 구성되어 있었다. 각 과학자들은 DNA 구조 발견에 대한 자신들의 독특한 기여를 별도의 기사로 발표했으며, 모든 기여자들은 네이처의 같은 호에 자신들의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이 고전적인 분자생물학 논문들은 다음과 같다: 왓슨 J. D. 및 크릭 F. H. C. "A Structure for Deoxyribose Nucleic Acid". 네이처 171, 737-738 (1953); 윌킨스 M. H. F., 스톡스 A. R. & 윌슨 H. R. "Molecular Structure of Deoxypentose Nucleic Acids". 네이처 171, 738-740 (1953); 프랭클린 R. 및 고슬링 R. G. "Molecular Configuration in Sodium Thymonucleate". 네이처 171, 740-741 (1953).
2.2.3. 이중 나선 모델 발표
왓슨과 크릭이 일하던 캐번디시 연구소의 소장인 로렌스 브래그 경은 1953년 4월 8일 벨기에에서 열린 단백질 솔베이 회의에서 이 발견을 처음 발표했지만, 언론에는 보도되지 않았다. 왓슨과 크릭은 1953년 4월 25일에 과학 저널 네이처에 "핵산의 분자 구조: 디옥시리보스 핵산의 구조"라는 제목의 논문을 제출했다. 이 발견은 다른 생물학자들과 노벨상 수상자들로부터 20세기 가장 중요한 과학적 발견 중 하나로 불리게 되었다. 브래그는 1953년 5월 14일 목요일 런던의 가이즈 병원 의과대학에서 강연을 했고, 이는 1953년 5월 15일 런던 신문 뉴스 크로니클의 리치 캘더 기자가 쓴 "당신이 당신인 이유. 생명의 비밀에 더 가까이"라는 기사로 이어졌다.
시드니 브레너, 잭 두니츠, 도로시 호지킨, 레슬리 오겔, 베릴 M. 아우턴은 1953년 4월 옥스퍼드 대학교 화학과에서 일하던 중 크릭과 왓슨이 만든 DNA 구조 모델을 처음 본 사람들 중 일부였다. 모두 새로운 DNA 모델에 깊은 인상을 받았는데, 특히 나중에 케임브리지의 캐번디시 연구소와 새로운 분자생물학 연구소에서 크릭과 함께 일하게 된 브레너가 그랬다. 케임브리지 대학교 학생 신문인 바시티 (케임브리지)도 1953년 5월 30일 이 발견에 대한 짧은 기사를 실었다.
왓슨은 1953년 6월 초, 왓슨과 크릭의 논문이 네이처에 실린 지 6주 후, 제18회 콜드 스프링 하버 바이러스 심포지엄에서 DNA 이중 나선 구조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다. 당시 회의에 참석한 많은 사람들은 아직 이 발견에 대해 듣지 못했었다. 1953년 콜드 스프링 하버 심포지엄은 많은 사람들이 DNA 이중 나선 모델을 처음으로 볼 기회였다. 왓슨, 크릭, 윌킨스는 핵산 구조에 대한 연구로 1962년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수상했다. 로잘린드 프랭클린은 1958년에 사망하여 후보 자격이 없었다. DNA 이중 나선 구조의 발표는 과학의 전환점으로 묘사되어 왔다. 생명에 대한 이해가 근본적으로 변화했고 현대 생물학 시대가 시작되었다.
3. 학술 및 연구 경력
3.1. 하버드 대학교
1956년, 왓슨은 하버드 대학교 생물학과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조교수에서 부교수, 정교수로 연속 승진했다. 하버드에서의 그의 연구는 RNA와 유전 정보 전달에서의 그 역할에 초점을 맞추었다. 왓슨은 하버드 대학교의 초점을 고전 생물학에서 분자생물학으로 전환하는 것을 옹호하며, 생태학, 발생 생물학, 분류학 (생물학), 생리학 등과 같은 분야들이 정체되어 왔으며 분자생물학과 생화학의 기초 분야가 그 근본 원리를 밝혀낸 후에야 발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심지어 학생들이 이러한 분야를 연구하는 것을 만류하기도 했으며, 1976년에 하버드 대학교를 떠났다.
하버드 재직 중 왓슨은 베트남 전쟁 반대 시위에 참여하여 12명의 생물학자 및 생화학자 그룹을 이끌고 "미군 즉각 철수"를 요구했다. 1975년, 히로시마 원폭 투하 30주년에는 2,000명 이상의 과학자 및 엔지니어 중 한 명으로 제럴드 포드 대통령에게 핵 확산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다. 그는 방사성 폐기물의 안전한 처분 방법이 입증되지 않았으며, 핵 발전소가 테러리스트의 플루토늄 절도 가능성 때문에 안보 위협이 된다고 주장했다.
3.2. 콜드 스프링 하버 연구소
1968년, 왓슨은 콜드 스프링 하버 연구소(CSHL)의 소장이 되었다. 1970년에서 1972년 사이에 왓슨 부부의 두 아들이 태어났고, 1974년에는 젊은 가족이 콜드 스프링 하버에 영구 거주지를 마련했다. 왓슨은 약 35년 동안 연구소의 소장과 총장을 역임했으며, 나중에는 총장 직함을 맡았고 이후 명예 총장이 되었다.
3.2.1. 소장 및 총장으로서의 역할
소장, 총장, 그리고 명예 총장으로서 왓슨은 CSHL이 "암, 신경 질환 및 기타 인간 고통의 원인을 이해하고 진단하며 치료하는 능력을 발전시키기 위해 분자생물학과 유전학을 탐구하는 데 헌신한다"는 현재의 사명을 명확히 하도록 이끌었다. CSHL은 왓슨의 지휘 아래 연구와 과학 교육 프로그램을 크게 확장했다. 그는 "작은 시설을 세계 최고의 교육 및 연구 기관 중 하나로 탈바꿈시킨" 공로를 인정받고 있다. "인간 암의 원인을 연구하는 프로그램을 시작하여, 그의 지휘 아래 과학자들은 암의 유전적 기초를 이해하는 데 주요한 기여를 했다." 연구소장 브루스 스틸먼은 왓슨의 업적을 회고하며 "짐 왓슨은 과학계에서 비할 데 없는 연구 환경을 조성했다"고 말했다.
2007년, 왓슨은 "나는 좌파를 등졌다. 그들은 유전학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유전학은 때때로 우리가 나쁜 유전자 때문에 실패한다는 것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삶의 모든 실패가 사악한 시스템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3.2.2. 암 연구 중심
이중 나선을 발견한 후 왓슨은 영국을 떠나 미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에 잠시 머무른 다음 1956년에 하버드 대학교 생물학 교수로 부임했다. 1962년 노벨상 수상은 생물학자로서 그의 삶에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정작 하버드에서 왓슨은 순조롭게 적응하지 못했다. 그는 하버드에서의 교수 생활 대신에 뉴욕주 롱아일랜드 북부 해변에 위치한 콜드 스프링 하버 연구소를 이끌어나가는 연구관리자 일에 매력을 느꼈다. 19세기 말에 생물학자들의 여름철 휴양을 겸한 실험연구소 용도로 세워진 콜드 스프링 하버 연구소는 특히 멘델 유전학의 수용에 앞장서면서 미국 유전학의 발전에 기여하기 시작했다.
1940년대에는 파지 유전학자들의 요람 역할을 톡톡히 수행하기도 했지만, 1960년대에 들어서는 그 규모와 비전에서 쇠퇴한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과거 이곳을 본거지로 삼았던 파지 그룹의 한 사람이기도 한 왓슨은 일찍부터 콜드 스프링 하버 연구소의 청사진을 그려나가고 있었다. 시간제로 하버드와 콜드 스프링 하버를 오가며 근무하던 왓슨은 1968년 끝내 하버드의 교수직을 정리하고 콜드 스프링 하버의 연구소장직에 전념했다. 소장으로서 그의 청사진은 연구소를 세계적 분자생물학 연구센터로 거듭나게 하는 것이었다. 왓슨은 분자생물학 혁명의 목적이 우리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 있다고 보았다. 그는 유전자 치료와 암 정복에 대한 도전을 연구소의 모토로 삼았다.
1911년에 미국의 프랜시스 라우스가 후대에 라우스 육종 바이러스라 불리는 발암 바이러스를 발견해 1966년에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수상하는 등, 암의 원인 규명과 정복에 대한 관심과 경쟁이 일었다. 왓슨은 연구소의 새로운 일을 바로 분자생물학과 유전학의 측면에서의 암 연구에서 찾았다. 연구소장으로서 그의 궁극적인 목표는 콜드 스프링 하버 연구소를 세계 최고의 암 연구센터로 키워내는 것이었다.
1971년 12월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은 국가 암 퇴치법을 통과시켜 역사상 최대의 암 정복 운동을 벌였다. 법안의 요지는 미국 연방 정부가 국립 암 연구소를 통해 암 정복의 기초 연구에 엄청난 규모의 연구 기금을 10여 년에 걸쳐 지원한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생명 메커니즘을 이해하기 위한 DNA 연구가 꾸준히 이루어져온 결과, 1960년대 말에는 분자유전학, 바이러스학, 동물 세포 배양 기술 등이 고등 동물 세포 내에서의 생화학적 연구를 혁명적으로 변모시켰다. 예를 들어 포유류와 인간의 세포를 마치 박테리아의 경우처럼 배양 접시에서 성장시킬 수 있는 획기적인 방법론이 개발되었다. 또한 종양 바이러스로 알려진 일부 동물 바이러스는 배양 세포를 암세포로 변화시키는 기능이 있음이 보고되었다. 이러한 노하우를 응용해 세균 배양용 샬레에서 암세포를 키워 악성 종양의 기원과 진행에 대한 통제된 실험을 수행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이로부터 실험실에서의 암 연구는 새로운 호기를 맞게 되었다.
1958년 이후 콜드 스프링 하버 연구소는 동물 세포와 그 바이러스를 배양하는 새로운 기법을 소개할 수 있는 여름 학술 프로그램의 개발에 주력했다. 또한 이전의 파지 생물학자들에게는 암 기초 연구에 전념하게 함으로써 종양 바이러스 모델의 개발에만 마음을 쓰게 했다. 박테리오파지가 박테리아 세포의 유전학을 증명하는 수단을 제공했듯이, 이제 종양 바이러스는 포유동물 세포에 비슷한 방법으로 접근할 수 있게 만들었다. 왓슨은 분자 바이러스학이 암의 신비를 밝혀내는 핵심 열쇠라고 믿었다. 그는 규모도 작고 전망도 없어 보였던 이 연구소의 소장으로 부임하자마자 후원자를 찾아 나섰다. 1968년 미국 국립 보건원(National Institutes of Health, NIH)의 지원 하에 동물 바이러스와 종양 바이러스에 대한 과제 수행에 나섰다. 왓슨의 지도에 따라 연구소의 재원은 엄청나게 늘어났다. 과학 지도자로서 왓슨의 능력은 돋보였다. 특히 연구소가 나아갈 과학 어젠다의 설정과 인물을 바라보는 통찰력이 두드러졌다.
왓슨은 콜드 스프링 하버를 최상의 암 연구소로 도약시키고자 했다. 암을 일으키는 바이러스는 DNA와 RNA 종양 바이러스 두 가지로 분류되는데, DNA 종양 바이러스는 세포를 암 변형시키는 서열, 즉 암 유전자를 가지고 있어 세포나 동물에 감염되면 암을 발생시킬 수 있었다. 종양 바이러스 연구 프로그램을 구축하려 한 왓슨은 당시 널리 알려진 종양 바이러스인 SV40(Simian vacuolating virus 40영어) DNA 연구로 유명한 젊은 바이러스학자 조지프 샘브룩을 연구소로 초빙했다. 그리하여 샘브룩을 중심으로 종양 바이러스 그룹이 연구소에 설치되었다.
1970년 의학계와 정치권의 관심에 힘입어 암 정복이라는 국가적 과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자, 콜드 스프링 하버는 이러한 준비 덕에 그 수혜자가 될 수 있었다. 1972년에는 5년 동안의 암 연구 기금을 국립 암 연구소로부터 유치하면서 샘브룩은 최고 수준의 젊은 종양 바이러스학자들을 연구소로 끌어들여 연구 역량을 한층 강화했다. 콜드 스프링 하버의 연구자들은 1970년대에 선보인 제한 효소 기술을 신속하게 채택했다. 또한 그들은 분자 수준의 DNA와 RNA 분석에 필요한 제한 효소 사용 기술을 개발하는 데 주력했다. 그들은 강력한 새 분석 도구인 에티듐 브로마이드 아가로오스 겔(ethidium bromide agarose gel영어)로 크기가 다른 DNA 분자를 분리할 수 있는 값싸고 신속한 방법을 개발했다.
이러한 기법은 제한 효소에 의해 잘려진 바이러스 DNA의 단편을 분리하는 데 효과적인 방법임이 입증되었다. 이 기법은 또한 암세포 변형을 초래한 종양 바이러스 DNA의 부위를 알아내고 이러한 변형 유전자가 바이러스 염색체상에 존재하는 위치를 파악하는 데도 사용되었다. 배양 세포에서 악성 종양의 변화를 유도하는 유전자들을 종양 유전자라고 부르는데, 콜드 스프링 하버 연구소는 바로 종양 유전자에 의해 생성된 단백질을 정제하고 바이러스 복제에서의 그 기능을 규명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종양 바이러스 그룹의 초기 연구는 바이러스 DNA가 단백질 합성을 위해 RNA 정보로 전사하는 메커니즘에서 성과를 거두었다. 1977년 연구소의 리처드 로버츠가 RNA 접합절단 또는 분할 유전자를 발견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mRNA는 핵 안의 DNA로부터 유전 정보를 읽어 단백질 합성이 일어나는 세포질에 유전 정보를 전달한다. 정보를 전달하기 전 미성숙 mRNA는 불필요한 염기 서열인 인트론을 제거하고 유용한 염기인 엑손을 연결하는 과정인 접합절단을 거치게 된다. 콜드 스프링 하버의 실험 과학자들은 MIT의 연구자들과 함께 RNA 정보는 단백질 합성 이전에 편집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기능 유전자 내에 띄엄띄엄 있는 것은 단백질 합성을 위해 잘려나간 쓸데없는 DNA 염기였다.
1972년경 로버츠는 수많은 미생물로부터 새로운 제한 효소를 정제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1980년경이 되어 세상에 알려진 제한 효소의 절반 이상이 그의 실험실에서 분리되었다. 이러한 효소들이 DNA 재조합 관련 업체에 의해 상업적으로 활용될 기미가 보이자, 로버츠는 새롭게 발견된 효소를 무료로 전 세계 학계 연구자들에게 제공했다. 이를 계기로 콜드 스프링 하버는 종양 바이러스 연구자들을 위한 메카가 되었으며, 이 연구소의 소장으로서 암과의 전쟁에 선봉에 선 왓슨은 다시 한 번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3.3. 인간 게놈 프로젝트

1988년, 60세의 왓슨은 NIH 산하 인간 게놈 연구 기획에 합류했고, 이듬해인 1989년에는 인간 게놈 연구 센터의 초대 소장에 임명되었다. 1990년 8월에는 NIH와 미국 에너지부(Department of Energy영어, DOE) 공동으로 인간 게놈 프로젝트(Human Genome Project영어, HGP)가 시작되었다. 미국 연방 정부가 산하 기관을 통해 지원하는 이 프로젝트는 인간으로서의 기능을 발휘하게 하는 청사진인 모든 유전 정보를 완전히 해독한다는 목표를 가졌다. 인간 유전체의 염기 서열 전부를 해독하고, 아울러 게놈 지도를 가능한 한 정확하게 작성하는 일에도 초점을 맞추는 것이었다. 게놈 지도는 유전자 지도와 물리 지도로 분류해 연구되었다.
유전자 지도는 염색체 위에 유전 표지판들이 어떤 순서로 놓여 있는지, 즉 각 표지의 상대적인 위치를 파악하는 것이다. 물리 지도는 염색체상에 놓여 있는 유전 표지판의 절대적인 위치를 파악하는 것이다. 즉, 유전자 지도 작성은 유전체의 기본 구조를 밝혀내는 것이고, 물리 지도 작성은 어느 서열이 정확히 염색체의 어디에 있는지 밝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염색체에서 각 서열이 있는 정확한 위치를 알면 그것을 기준으로 삼아 다른 서열이 있는 위치도 찾아낼 수 있다. 인간 게놈 분석은 2005년 완성을 목표로 약 15년 동안 연간 2.00 억 USD 정도의 비용이 들 것이라고 예상되었다.
HGP에서 왓슨의 역할과 관련해 주목할 것이 있다. 그가 이 프로젝트에 내재한 잠재적 분란에 대한 제도적인 대비책을 마련한 것이다. 그는 HGP 예산의 일부를 이 프로젝트가 일으킬 수 있는 과학적, 윤리적 문제에 대한 연구에 투입하도록 주도했다. 왓슨은 "우리는 과거 우생학이 잘못 사용된 예를 잘 살펴보아야 한다. 바로 미국과 독일에서 불완전한 지식이 오만하고 끔찍한 방식으로 사용되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DNA가 개인적인 것이며 아무도 그것을 손에 넣을 수 없다는 점을 확신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왓슨의 선언에 힘입어 HGP가 본격화된 1990년부터 게놈 연구의 윤리적, 법적, 사회적 의미를 연구하는 프로젝트 '윤리, 법, 사회 관계'(Ethical, Legal, and Social Implications영어, ELSI)에 연간 예산의 5%가 투입되었다. HGP에서의 ELSI 연구는 HGP로부터 예상되는 문제점 도출과 그에 대한 실제적인 제도적 대안 마련, 교육 프로그램의 개발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으며, 이후 ELSI 연구는 생명공학 프로젝트 등에서 필수적인 세부 과제로 점차 자리 잡게 되었다.
또한 왓슨이 이끄는 HGP는 양적으로도 상당한 지원을 확보할 수 있었다. 한 의학 잡지는 "왓슨의 매력은 과학적으로 무지한 의원들을 충동하고 현혹하는 데 더없이 중요한 마법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 이 저명한 『이중 나선』의 저자는 그들의 마음을 쉽게 사로잡았다"고 적었다.
안타깝게도 1992년 HGP가 본궤도에 오르기 시작할 무렵 왓슨은 NIH의 소장으로 부임한 버너딘 힐리와 충돌을 빚으면서 HGP 일선에서 물러났다. 두 사람의 분쟁 원인은 DNA의 특허 문제 때문이었다. 왓슨은 NIH의 연구자들이 분석한 수천 건의 DNA 서열을 가지고 정부 특허 취득에 나서겠다고 한 힐리의 결정을 비판하고 나섰다. 힐리는 유전체 덩어리에 특허권을 얹어 상업적 가능성을 얻어 정부의 이익을 보호하고자 했다. 하지만 왓슨은 불확실한 유전자에 특허를 내줄 경우 장기적으로 유전자를 이용한 의학 연구와 발전은 끔찍하리만큼 지체될 것이라고 보았다. 특허 문제에 대한 공개 논쟁이 종료되면서 왓슨은 HGP를 떠났다. 왓슨은 "세계의 국가들은 인간 게놈이 그들의 국가가 아닌 세계 인류의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하며, 유전자 서열에 대한 특허권 획득 시도에 반대했다. 그는 1992년 NIH가 뇌 특이적 cDNA에 대한 특허를 신청하겠다고 발표한 지 몇 주 만에 프로젝트를 떠났다.
1994년, 왓슨은 CSHL의 총장이 되었고, 프랜시스 콜린스가 인간 게놈 프로젝트의 책임자 역할을 이어받았다. 1992년을 기점으로 HGP는 국제적인 양상을 띠게 되었다. 프로젝트를 미국이 주도하고 분석 작업 역시 절반 이상이 미국에서 이루어졌지만,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을 비롯한 쟁쟁한 국가들이 이 프로젝트에 추가로 동참했다. HGP는 전 세계 18개국의 연구진이 참여하는 국제 컨소시엄으로 발전했다. 예를 들어 인간 이외에도 세균에서 꼬마선충에 이르기까지 몇 가지 생물의 염기 서열 분석이 완료되는 등 그 범위와 속도를 더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HGP 연구 성과에 탄력을 준 일은 1998년 미국의 민간 생명공학 회사인 셀레라 지노믹스 사가 인간 유전체 연구에 뛰어들면서 HGP와 경쟁 구도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이에 유전자 해독 작업은 급류를 타기 시작하여 2005년까지 끝내기로 한 것을 2003년으로 앞당겨 끝냈다. 2000년 6월에는 HGP 컨소시엄과 셀레라 지노믹스 사가 공동으로 인간 게놈 지도 초안을 완성하여 발표했다. 마침내 수정된 목표보다 2년여가 더 빠른 2001년 2월에 이 두 조직은 전체 인간 게놈 지도를 완성했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이에 따라 생명 현상에 대한 좀 더 확실한 접근이 가능해지고, 인류가 시달려왔던 많은 유전병 치료와 의약용으로 쓰일 각종 생체 물질의 연구와 생산이 가능하게 됐다. 인간 게놈 지도가 완성됨으로써 암과 심장병 같은 복잡한 유전병에 대해 얻게 될 생물학적 통찰력은 물론 의학적 혜택 또한 엄청나다. 이는 각종 인간 질병의 예방과 치료 등 의학 분야에 혁명을 가져올 것이다. 또한 인간의 생명 현상을 이해하는 기초가 될 위대한 업적으로 평가된다. 이로써 의학과 건강, 인류의 복지에서 혁명적 진전이 가능할 것이다. 이미 반세기 전 DNA 이중 나선 구조의 발견으로 생명 현상의 신비를 규명하는 데 가장 강력한 불씨를 지핀 주인공의 하나인 왓슨은, 약 반세기가 지난 지금, 다시 인류 복리를 위한 응용을 목적으로 HGP라는 거대한 도전에도 뛰어들었다.
2007년 1월, 왓슨은 샹팔리모 재단(Champalimaud Foundation영어)의 회장 레오노르 벨레자의 초청을 받아 재단의 과학 자문 위원회 책임자가 되었다. 2017년 3월, 왓슨은 중국 투자 회사인 치어랜드 투자 그룹(Cheerland Investment Group영어)의 수석 컨설턴트로 임명되었는데, 이 회사는 그의 여행을 후원했다. 왓슨은 또한 앨런 뇌 과학 연구소(Allen Institute for Brain Science영어)의 고문으로 활동했다.
4. 저술 및 출판물
4.1. 이중 나선
1968년, 왓슨은 이중 나선: DNA 구조 발견에 대한 개인적인 이야기(The Double Helix: A Personal Account of the Discovery of the Structure of DNA)를 저술했으며, 이는 모던 라이브러리 선정 '논픽션 100선' 중 7위에 올랐다. 이 책은 DNA 구조 발견 과정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당시의 인물들, 갈등, 논란, 그리고 그의 개인적인 감정적 인상들을 상세히 다룬다. 왓슨의 원래 제목은 "정직한 짐"이었다. 이 책의 출판을 둘러싸고 논란이 일었다. 왓슨의 책은 원래 하버드 대학교 출판부에서 출판될 예정이었으나, 프랜시스 크릭과 모리스 윌킨스 등이 반대했다. 왓슨의 모교는 프로젝트를 중단했고, 이 책은 상업적으로 출판되었다. 앤 세이어가 쓴 로잘린드 프랭클린과 DNA (1975년 출판, 2000년 재출간)를 위한 인터뷰에서 프랜시스 크릭은 왓슨의 책을 "경멸스러운 헛소리 덩어리"라고 평했다.
4.2. 교과서 및 기타 저작
왓슨의 첫 교과서인 유전자의 분자생물학(The Molecular Biology of the Gene, 1965)은 '헤드'라는 간결한 선언적 소제목 개념을 사용했다. 그의 다음 교과서는 세포의 분자생물학(Molecular Biology of the Cell)으로, 그는 과학자-저술가 그룹의 작업을 조율했다. 그의 세 번째 저서는 재조합 DNA(Recombinant DNA)로, 유전 공학이 유기체가 어떻게 기능하는지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가져온 방식을 설명했다.
그는 또한 유전자, 소녀들, 그리고 가모프: 이중 나선 이후(Genes, Girls, and Gamow: After the Double Helix, 2002), DNA: 생명의 비밀(DNA: The Secret of Life, 2003), 그리고 회고록 지루한 사람과 어울리지 마라: 과학자의 삶에서 얻은 교훈(Avoid Boring People: Lessons from a Life in Science, 2007) 등 여러 과학 서적을 저술했다.
5. 사상, 논란의 발언 및 평가
왓슨은 종종 유전자 연구 영역 내에서 논쟁적이거나 공격적인 발언을 하였다. 2000년 컨퍼런스에서 왓슨은 피부 색깔과 성욕 사이의 관계에 대해 발표했다. 이때 그는 비키니를 입은 여자의 사진을 슬라이드에 띄우고, 피부의 멜라닌이 성 충동을 향상시킨다며 "이것이 당신에게 라틴계 연인이 있는 이유입니다. 영국인 연인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을 것입니다. 오직 '잉글리시 페이션트'만 있을 뿐이죠"라고 발언하여 논란이 되었다.
왓슨은 "만약 어떤 여자가 동성애적 성향을 가진 아이를 원치 않고, 우리가 성적 취향에 관여하는 유전자를 찾을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여자의 결정을 존중해야 한다"라고 말한 것이 선데이 텔레그래프에 인용되었다. 한편 이에 대해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왓슨의 말이 잡지에서 왜곡되었고, 왓슨은 낙태를 찬성하는 입장을 표명한 것이 아니라 단지 그런 부모의 결정을 존중해야 할 필요성도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또 그는 "당신은 뚱뚱한 사람을 면접을 보게 되면 그 사람을 고용하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에 기분이 나쁘다"라며 비만에 대해 논란거리가 될 만한 발언을 했다. 왓슨은 '멍청함'을 질환이라고 얘기하며, '정말 멍청한' 하위 10%의 사람들은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사람의 '미모'는 유전자 조작을 통해 조작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왓슨은 "사람들은 모든 여자가 예쁘게 되면 끔찍할 것이라고 말하지만, 난 그 편이 좋을 것 같다"라고 말했다.
5.1. 인종과 지능에 대한 견해
특히 왓슨은 인종과 지능의 연관성을 여러 차례 주장해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인종에 관한 선입견에는 유전자적 근거가 있다며, "유대인은 실제로 영리하고, 중국인은 영리하지만 순응성에 치우친 자연선택으로 창의적이지 못하고, 인도인은 카스트 제도 하의 족내혼으로 인해 노예 근성이 있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2007년 영국 선데이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흑인들이 백인과 동일한 지적 능력을 갖췄다는 전제 하에 이뤄지고 있는 서구 국가들의 아프리카 관련 정책들은 잘못됐다"며 "인종 간 지능의 우열을 가리는 유전자가 앞으로 10년 안에 발견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해 파문을 일으켰다. 당시 그는 문제가 커지자 지난 10월 18일 보도 자료를 통해 "벌어진 일들에 대해 당혹감을 느낀다"며 공식 사과했지만 영국에서는 왓슨 박사의 발언을 놓고 논란이 계속됐다. 인간 게놈 지도 제작을 이끈 크레이그 벤터 박사는 "피부색과 지능 간의 상관관계가 있다는 과학적 근거는 물론 그런 유전 정보도 없다"며 왓슨 박사의 발언에 대해 유감을 표했고 켄 리빙스턴 런던 시장은 "근거 없는 인종주의 이론이 유전 공학을 악용해 인종 간 우열 순위를 매기려 한다"며 왓슨 박사의 발언을 과학의 탈을 쓴 인종주의적 선전 문구라고 비난했다.
그의 발언은 "도발적이고 정치적으로 편향되어 있다"는 평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옥스퍼드 대학교의 콜린 블레이크모어 교수와 리처드 도킨스 교수는 "뛰어난 과학자가 불쾌한 견해로 인해 침묵을 강요당하는 것은 불행한 일이며, 왓슨 박사에게 있을 오류는 과학적 논쟁을 통해 규명되어야 한다"는 의견을 보였다.
5.2. 로잘린드 프랭클린에 대한 태도
왓슨은 회고록 이중 나선에서 로잘린드 프랭클린을 "기분 나쁘고 히스테릭한 다크 레이디"라고 묘사했는데, 이는 그와 크릭, 윌킨스가 프랭클린의 연구 결과를 부적절하게 입수하고 사용한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그녀가 사망한 것을 이용해 부당하게 폄하했다는 비판을 프랭클린의 전기 작가들로부터 받았다.
5.3. 사회적 및 기관적 반응
왓슨의 논란이 된 발언들로 인해 영국에서는 그가 참석할 예정이었던 다양한 행사가 줄줄이 취소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콜드 스프링 하버 연구소는 왓슨 박사에 대해 직무 정지 결정을 내렸으며, 왓슨은 이에 대해 사과했다. 이후 왓슨은 79세의 나이로 CSHL에서 은퇴했는데, 연구소는 이를 "거의 40년간의 훌륭한 봉사"라고 표현했다. 왓슨은 자신의 은퇴를 나이와 "예상하거나 원할 수 없었던 상황"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2008년, 왓슨은 CSHL의 명예 총장으로 임명되었지만, 연구소의 프로젝트 작업을 계속 자문하고 지도했다. 그해 BBC 다큐멘터리에서 왓슨은 자신을 인종주의자로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2019년 1월, 전년도에 제작된 TV 다큐멘터리에서 그가 인종과 유전자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다시 한번 반복하자, CSHL은 왓슨에게 수여했던 명예 직함을 모두 철회하고 그와의 모든 관계를 단절했다. 왓슨은 이러한 조치에 대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2014년, 왓슨은 자신이 논란이 된 발언들로 인해 "아무도 아닌 사람"이 되었다고 불평하며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자신의 노벨상 메달을 매각했다. 매각 대금의 일부는 과학 연구를 지원하는 데 사용될 예정이었다. 이 메달은 2014년 12월 크리스티 경매에서 410.00 만 USD에 팔렸다. 왓슨은 수익금을 롱아일랜드의 보존 활동과 더블린 트리니티 칼리지의 연구 기금으로 기부할 생각이었다. 그는 살아있는 노벨상 수상자 중 처음으로 메달을 경매에 내놓았다. 이 메달은 나중에 구매자인 알리셰르 우스마노프에 의해 왓슨에게 반환되었다.
6. 개인적인 삶
왓슨은 무신론자이며, 2003년에는 인본주의 선언문에 서명한 22명의 노벨상 수상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타임 (잡지)에 2016년 버니 샌더스 대통령 선거 운동에 1000 USD를 기부했다고 밝혔다.
6.1. 결혼과 자녀
왓슨은 1968년 엘리자베스 루이스와 결혼했다. 그들은 루퍼스 로버트 왓슨(1970년생)과 던컨 제임스 왓슨(1972년생) 두 아들을 두었다. 왓슨은 때때로 조현병을 앓고 있는 아들 루퍼스에 대해 이야기하며, 유전학이 정신 질환에 어떻게 기여하는지 밝혀냄으로써 정신 질환의 이해와 치료 발전을 장려하고자 노력한다.
7. 수상 및 영예
왓슨은 수많은 상을 수상했다.
7.1. 노벨 생리학·의학상
왓슨, 크릭, 윌킨스는 "핵산의 분자 구조와 생체 내 정보 전달에 대한 그 중요성"을 발견한 공로로 1962년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수상했다. 이 발견은 생명 이해의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고, 현대 생물학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전환점으로 평가받는다.
7.2. 기타 주요 수상
연도 | 상 이름 |
---|---|
1960 | 앨버트 래스커 기초 의학 연구상 |
1960 | 일라이 릴리 생화학상 |
1993 | 코플리 메달 (영국 왕립 학회) |
1994 | 로모노소프 금메달 |
1997 | 미국 국가 과학상 |
2000 | 벤자민 프랭클린 메달 (미국 철학회) |
2000 | 리버티 메달 |
2002 | 가드너 국제상 |
2002 | 대영 제국 훈장 명예 기사 사령관 (KBE) |
2005 | 오트머 금메달 |
1977 | 대통령 자유 메달 |
그는 또한 다음을 포함한 여러 명예 학위를 받았다.
연도 | 학위 | 기관 |
---|---|---|
1961 | DSc | 시카고 대학교, 미국 |
1963 | DSc | 인디애나 대학교, 미국 |
1965 | LLD | 노트르담 대학교, 미국 |
1970 | DSc | 롱아일랜드 대학교 (CW 포스트), 미국 |
1972 | DSc | 아델피 대학교, 미국 |
1973 | DSc | 브랜다이스 대학교, 미국 |
1974 | DSc | 앨버트 아인슈타인 의과대학, 미국 |
1976 | DSc | 호프스트라 대학교, 미국 |
1978 | DSc | 하버드 대학교, 미국 |
1980 | DSc | 록펠러 대학교, 미국 |
1981 | DSc | 클락슨 대학교, 미국 |
1983 | DSc | 뉴욕 주립 대학교 패밍데일, 미국 |
1986 | MD | 부에노스아이레스, 아르헨티나 |
1988 | DSc | 럿거스 대학교, 미국 |
1991 | DSc | 바드 칼리지, 미국 |
1993 | DSc | 스텔렌보스 대학교, 남아프리카 공화국 |
1993 | DSc | 페어필드 대학교, 미국 |
1993 | DSc | 케임브리지 대학교, 영국 |
1998 | DrHC | 프라하 카를로바 대학교, 체코 |
2001 | ScD | 더블린 대학교, 아일랜드 |
왓슨은 다음을 포함한 여러 전문 및 명예 단체에 소속되어 있었다.
- 미국 예술 과학 아카데미
- 미국 암 연구 협회
- 미국 철학회
- 미국 생물 화학자 협회
- 런던 아테나이움 클럽 회원
- 케임브리지 대학교, 클레어 칼리지 명예 펠로우
- 콜드 스프링 하버 연구소, 명예 총장; 명예 이사; 올리버 R. 그레이스 명예 교수 (모두 2019년 철회됨)
- 유럽 분자 생물학 기구 (1985년 이후 회원)
- 미국 국립 과학 아카데미
- 옥스퍼드 대학교, 뉴턴-아브라함 방문 교수
- 덴마크 왕립 과학 문학 아카데미
- 영국 왕립 학회, 외국인 회원 (ForMemRS) (1981년 이후)
-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
8. 유산과 영향력
8.1. 분자 생물학 및 유전학에 미친 영향
왓슨의 DNA 이중 나선 구조 발견은 분자 생물학 및 유전학 분야에 혁명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는 크릭과 함께 DNA가 뉴클레오타이드로 구성된 이중 나선 구조라고 설명했다. DNA 이중 나선을 꼬여진 사다리로 생각한다면, 발판은 수소 결합으로 연결된 아데닌(A)-티민(T)과 구아닌(G)-시토신(C) 염기쌍이고, DNA의 가로대는 공유 결합으로 연결된 디옥시리보스와 인산이 교대로 배열되어 있다. DNA 뉴클레오타이드에는 디옥시리보스, 염기, 인산이 각각 하나씩 있다. DNA는 흔히 직선 구조로 묘사되지만 실제로는 아주 복잡하고 그 복잡성이 DNA 기능에 도움이 된다. DNA 뉴클레오타이드에 포함된 염기는 아데닌, 구아닌, 시토신, 티민이다. 아데닌과 구아닌은 2개의 유기 고리 구조를 갖는 퓨린이고, 시토신과 티민은 1개의 유기 고리 구조를 갖는 피리미딘이다. A와 T 그리고 G와 C가 수소 결합으로 연결된 염기쌍은 각 염기쌍이 하나의 고리 구조와 2개의 고리 구조를 갖기 때문에 나선 사이의 거리가 일정하다. 이러한 퓨린-피리미딘 쌍을 상보적 염기쌍 또는 염기쌍이라 부른다. 상보적 염기쌍은 유전자 기능과 DNA 복제의 기본이다.
DNA 이중 나선을 구성하는 두 개의 사슬은 서로 반대 방향으로 달리고 있는데, 이러한 머리-꼬리 배열은 DNA가 역평행임을 의미한다. 화학 규칙에 따라 디옥시리보스의 탄소에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차례대로 번호를 붙이면 분명해진다. DNA 가닥은 디옥시리보스의 5번 탄소에서 시작하여 3번 탄소에서 끝이 난다. 두 가닥은 서로 반대 방향으로 놓여 있다. 하나의 완전한 나선의 회전은 10개의 염기쌍인 34 Å의 길이에 해당한다. 각 염기쌍은 3.4 Å에 해당하며 가닥들이 교차하는 지역에서는 관찰자에게 수직인 염기쌍들이 숨겨져 있다. 내경은 10 Å이고 외경은 20 Å이다. 이중 나선의 원통형 윤곽은 크고 작은 두 개의 고랑을 가지며 모두 폴리펩타이드 사슬을 수용할 정도로 충분히 크다. 아데닌-티민(A-T) 염기쌍은 두 개의 수소 결합을 가지는 반면, 구아닌-시토신(G-C) 염기쌍은 세 개의 수소 결합을 가진다.
엄청난 양의 DNA가 간단한 세포 안에 채워져 있는데, 만일 인간의 염색체 46개에 있는 DNA 염기를 A, C, T, G로 표기하면 32억 개의 문자가 차지하는 분량은 500쪽 책 4,000권에 해당된다. 세포는 DNA를 실패에 감듯이 히스톤 단백질을 이용하여 체계화시킨다. 진핵 세포에서 하나의 염색체를 형성하기 위하여, 146개의 염기쌍이 8개의 히스톤 단백질로 이루어진 구조물 주위를 두 번 휘감아 1개의 뉴클레오솜을 형성한다. 뉴클레오솜의 지름은 10 nm이다. 연속적인 DNA는 실에 꿰인 구슬처럼 뉴클레오솜을 연결하고, 이것이 다시 접혀 지름 30 nm의 구조물을 형성한다. 이러한 DNA 응축 방법은 분열하는 세포에서 고도로 응축된 중기 염색체를 만든다. 분열하는 세포는 DNA 응축 정도를 달리하면서 필요한 부분에 효소가 접근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 DNA가 부분 부분이 풀리면서 RNA로 전사된다. 전사를 하기 위하여 DNA가 히스톤에서 떨어져 나오거나 단단히 감겨있어도 DNA 본래의 구조와 염기 서열은 그대로 유지된다. 마찬가지로, 세균과 고균의 DNA도 단백질과 함께 응축되어 있다.
8.2. 과학 문화에 미친 영향
왓슨은 DNA 구조 발견 과정을 대중에게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의 저서 이중 나선은 과학적 발견의 흥미진진한 과정과 과학자들의 인간적인 면모를 생생하게 보여주며 과학 대중화에 기여했다. 그러나 이 책에서 로잘린드 프랭클린의 기여를 축소하고 그녀를 부정적으로 묘사한 점은 과학계와 여성 운동으로부터 강한 비판을 받았다. 이러한 논란은 과학적 공로 인정과 과학자의 윤리적 책임에 대한 중요한 논의를 촉발했다.
왓슨의 인종과 지능에 대한 논란이 된 발언들은 과학자의 사회적 역할과 책임에 대한 심각한 질문을 던졌다. 그의 주장은 과학적 근거가 부족하며 인종 차별적이라는 비판을 받았고, 이로 인해 그는 소속 기관에서 명예직을 박탈당하는 등 사회적 비난에 직면했다. 이는 과학적 발견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과학자가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할 때 가져야 할 신중함과 윤리 의식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는 사례가 되었다. 그의 발언들은 과학적 자유와 사회적 책임 사이의 균형에 대한 지속적인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9. 관련 항목
- 프랜시스 크릭
- 모리스 윌킨스
- 로잘린드 프랭클린
- DNA
- 이중 나선
- 분자생물학
- 유전학
- 인간 게놈 프로젝트
- 인종과 지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