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및 교육
헨리 배서스트는 유년기부터 학창 시절을 거쳐 유럽 여행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경험을 쌓으며 훗날 정치 경력의 기반을 다졌다.
1.1. 출생 및 가족 배경
헨리 배서스트는 1762년 5월 22일, 제2대 배서스트 백작 헨리 배서스트와 그의 아내 트라이피나 스카웬(Tryphena Scawen)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트라이피나 스카웬은 토머스 스카웬의 딸이었다. 그는 1794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제3대 배서스트 백작위를 계승하기 전까지는 '앱슬리 경'(Lord Apsley영어)이라는 의례 칭호로 불렸다.
1789년 4월, 배서스트는 조지 레녹스 경의 딸인 레이디 조지아나 레녹스(Lady Georgiana Lennox, 1765년 ~ 1841년)와 결혼했다. 조지아나 레녹스 여사는 제2대 리치먼드 공작 찰스 레녹스의 차남의 딸이었다. 부부는 슬하에 네 아들과 두 딸을 두었다. 자녀들은 다음과 같다.
- 헨리 조지(Henry George, 1790년 ~ 1866년): 아버지의 작위를 계승하여 제4대 배서스트 백작이 되었다.
- 윌리엄 레녹스(William Lennox, 1791년 ~ 1878년): 형의 뒤를 이어 제5대 배서스트 백작이 되었다.
- 루이자 조지아나(Louisa Georgina, 1792년 ~ 1874년)
- 피터 조지 앨런(Peter George Allen, 1794년 ~ 1796년)
- 시모어 토머스(Seymour Thomas, 1795년 ~ 1834년)
- 에밀리 샬럿(Emily Charlotte, 1798년 ~ 1877년): 프레더릭 폰손비와 결혼했다.
- 찰스(Charles, 1802년 ~ 1842년)
레이디 배서스트는 1841년 1월, 7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헨리 배서스트는 1834년 7월 27일, 72세의 나이로 런던 아링턴 스트리트 16번지에 위치한 자택에서 사망했으며, 사이렌스터 수도원 교구 교회에 안장되었다.
1.2. 학력
배서스트는 1773년부터 1778년까지 이튼 칼리지에서 교육을 받았다. 이후 옥스퍼드 대학교 크라이스트 처치에 진학했으며, 1779년 4월 22일 16세의 나이로 입학했다. 당시 크라이스트 처치는 옥스퍼드에서 가장 학구적인 대학으로 평가받았다. 그는 이튼 시절 가장 친했던 친구들인 윌리엄 윈덤 그렌빌, 리처드 웰즐리 경, 그리고 사촌인 캐논 배서스트와 함께 대학 생활을 했다.
1781년, 배서스트는 학위를 마치지 않고 유럽 그랜드 투어를 떠나기로 결정했다. 그는 그렌빌과 함께 독일을 여행했으며, 스위스를 거쳐 이탈리아로 향했다가 북쪽으로 이동하여 파리에 도착했다. 그러던 중 제2대 셸번 백작 윌리엄 페티의 정부가 폭스-노스 연립내각에 의해 도전받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1783년 2월 런던으로 돌아왔다. 그는 정계에 입문하자마자 윌리엄 피트의 애국심과 웅변에 감탄하며 그를 따르게 되었다.
2. 초기 정치 경력
배서스트는 20대 초반에 의회에 입성하여 윌리엄 피트의 강력한 지지자로서 초기 정부 직책을 수행하며 정치적 기반을 다졌다.
2.1. 의회 입성
배서스트는 1783년 7월, 21세가 되자마자 사이렌스터 선거구의 하원 의원으로 선출되어 영국 의회에 입성했다. 그는 휘그당과의 협력을 거부하고 토리당의 윌리엄 피트와의 우정을 고수했다. 그의 첫 의회 연설은 영국 동인도 회사 법안에 용감하게 반대하는 내용이었으며, 이는 정부를 무너뜨릴 만큼 인상적이었다. 1783년 새해 전야, '민스 파이' 행정부는 그가 사이렌스터로 불려가면서 젊은 배서스트 경 없이 진행되었다. 그는 1794년 아버지의 사망으로 배서스트 백작위를 물려받아 상원으로 옮길 때까지 사이렌스터 의원직을 유지했다.
2.2. 초기 정부 직책
배서스트는 1783년부터 1789년까지 해군 본부의 하급 민간 위원(junior civil lord of the Admiralty영어)으로 재직하며 피트파에 확고히 충성했다. 당시 해군 본부에는 배서스트를 포함한 5명의 위원(모두 하원 의원)과 20명의 서기, 그리고 비서 폴 스티븐스(Paul Stephens)가 있었다. 그는 '성실한' 찰스 미들턴(Charles Middleton) 대령의 도움을 받았다.
1790년 총선에서는 아버지의 이익을 위해 사이렌스터 선거구에 출마했다. 1786년 하드윅 경으로부터 연간 2700 GBP의 가치를 지닌 재무부 출납관이라는 명예직을 부여받았고, 1791년까지 재무부 위원으로 재직했다. 그는 의회 표결에서 정부의 득표수를 계산하고 지출을 기록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1791년 4월 19일, 그는 노예 무역 폐지 첫 투표에서 폐지에 찬성표를 던졌다. 그러나 그는 스코틀랜드의 심사율령 폐지에는 반대했다. 1791년 6월 3일, 그는 웨일스 공의 시민 목록 및 칼턴 하우스에 있는 왕위 계승자의 가계에 부여된 자금 사용에 대한 조사 위원회에 참여했다. 하지만 6월 21일에는 병든 아버지를 돌보기 위해 사임했다.
1793년부터 무급 인도청 위원(Commissioner of the Board of Control영어)으로 활동했으며, 6월 21일 추밀원에 서임되었다. 피트가 급여를 제안했을 때, 그는 이미 여러 명예직으로 충분히 수입을 얻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거절했다. 그는 다시 내각의 중심에 있었지만, 10일마다 열리는 회의의 4분의 1만 참석하는 등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하원에서는 소극적인 연설가였고 훌륭한 웅변가는 아니었기에 고위 공직으로의 승진이 지연되었다. 1794년 아버지의 사망으로 공직에서 물러났다. 모닝턴 경이 마드라스 총독직을 제안했지만, 그의 아내가 강력히 반대하여 인도로 가는 것을 철회했다.
1801년에는 연간 1100 GBP의 가치를 지닌 대법원 서기(Joint clerk of the crown in Chancery영어)를 겸임하며 청구 및 민사 소송을 감독하여 행정 역량을 높였다. 보나파르트의 침공 위협이 고조되자,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사이렌스터 자원 기병대를 지휘했다. 1804년 5월, 피트가 다시 총리직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그는 오랜 친구인 배서스트를 왕립 조폐국장(Master of the Mint영어)으로 임명했다.
3. 주요 공직 및 활동
헨리 배서스트는 여러 중요한 공직을 거치며 영국의 국내외 정책에 깊이 관여했다. 특히 육군 및 식민지 장관으로서의 장기 재임은 그의 경력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평가된다.
3.1. 조폐국장
윌리엄 피트가 1804년 5월 다시 총리로 취임하자, 그는 오랜 친구인 배서스트를 왕립 조폐국장으로 임명했다. 조폐국은 로버트 스미르케가 새로 지은 건물에 자리 잡았다. 배서스트는 피트에게 자신이 "잘 준비되어 있다"고 말했다. 그는 피트와 그렌빌 파벌을 통합하려 노력했다. 휘그당이 왕궁에 소환되었을 때, 그는 그렌빌에게 국왕이 국가 위기 상황에서 군대에 가톨릭 장교를 용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1806년 1월 23일 피트의 사망은 배서스트가 정계를 떠나게 하는 계기가 되었으나, '모든 재능의 내각'은 매우 짧게 유지되었다.
이후 1807년 3월 포틀랜드 공작 내각에서 다시 조폐국장으로 임명되었고, 스펜서 퍼시벌 내각에서도 이 직책을 유지했다. 그는 1812년 6월 리버풀 경 휘하에서 육군 및 식민지 장관이 되면서 이 직책에서 물러났다.
3.2. 상무부 장관
1807년 3월 상무부 장관(President of the Board of Trade영어)으로 임명된 배서스트의 첫 번째 관심사는 나폴레옹의 대륙 봉쇄령에 대항하는 자유 무역이었다. 그러나 그는 모든 영국 항구를 폐쇄하고 국내외에서 항해 조례를 발동한 내각의 강경파들에게 패배했다. 이에 대한 배서스트의 대응은 1807년 11월 11일과 25일에 발표된 추밀원령이었다. 그는 버클리 제독의 리스본 파견과 그에 따른 포르투갈의 주앙 6세를 브라질 황제로 옹립하는 것을 지지했다. 나폴레옹의 신트라 협정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자, 조지 캐닝은 이 정책을 "가장 비참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3.3. 외무 장관
1809년 10월 11일부터 12월 6일까지 두 달 동안 배서스트는 잠시 외무부 장관을 겸임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포르투갈로의 여행 금지를 부과하고 외교관 헨리 윌리엄스-윈을 철수시켰다. 그는 토레스 베드라스 선의 전선을 생각하며 국왕에게 백개먼 판을 보냈는데, 이는 전략적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3.4. 육군 및 식민지 장관
배서스트는 1812년 6월 리버풀 경 휘하에서 육군 및 식민지 장관(Secretary of State for War and the Colonies영어)으로 임명되어 1827년 4월 리버풀 경이 사임할 때까지 이 직책을 유지했다.
그는 반도 전쟁의 수행을 개선하는 데 기여했으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대한 정부의 처우를 옹호하는 임무를 맡았다. 1812년 1812년 전쟁이 발발하자 배서스트는 조지 프레보스트 경의 영국령 북아메리카 정책을 지지했다. 그는 주 방위 해병대를 영국 해군 인력으로 교체하고 오대호 점령을 승인했으며, 캐나다 방어를 염두에 두고 조직했다. 이 전략은 1814년 나폴레옹이 엘바섬으로 유배될 때까지 본질적으로 방어적이었고 자금도 부족했다. 배서스트는 대규모 증원군 파견을 거부했다. 그러나 작전이 브리티시컬럼비아주의 북서부 숲과 밴쿠버 해협의 만으로 전환되자, 국경 침입을 막기 위해 20,000명의 병력이 도착했다. 플래츠버그 전투의 실패는 프레보스트의 왕립 해군 장교들 사이에서의 명성을 실추시켰다. 그는 배서스트의 명령으로 군법 회의에 회부되기 위해 소환되었으나, 1815년에 사망했다.
3.5. 추밀원 의장
리버풀 경의 사임 후 조지 4세가 조지 캐닝에게 정부 구성을 요청했을 때, 배서스트는 웰링턴 공작과 엘던 경과 함께 토리당의 극우파인 '울트라 토리(Ultra Tories)'에 속하여, 캐닝의 겸손한 출신, 자유주의 정책, 그리고 가톨릭 해방령 지지를 이유로 그의 밑에서 일하기를 거부했다. 몇 달 후 캐닝의 사망으로 웰링턴 공작이 정부를 구성하게 되었을 때, 그는 중도적인 내각을 선택했고, 배서스트는 상대적으로 중요도가 낮은 추밀원 의장(Lord President of the Council영어) 직책에 만족해야 했다. 그는 1828년부터 1830년까지 웰링턴 공작 내각에서 추밀원 의장으로 재직했다.
4. 정치적 입장 및 사상
헨리 배서스트는 '고보수당'으로서 확고한 정치적 신념을 가졌으며, 이는 그의 식민지 정책과 주요 정치적 결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4.1. 고보수당(High Tory) 성향
배서스트는 캐슬레이 자작과 웰링턴 공작의 절친한 친구였으며, 정부의 첫 번째 책임은 국내외에서 확립된 질서를 보존하는 것이라는 그들의 견해를 공유했다. 그는 재무부 출납관과 대법원 서기라는 명예직 수입을 누렸으며, 이로 인해 급진주의자들이 혐오했던 '구 부패' 체제의 수혜자였다. 그는 고교회파이자 고보수당이었으며, 글로스터셔주의 중요한 지주로서 평생 농업 이익을 지지하고 곡물법을 옹호했다.
4.2. 식민지 정책 및 사회적 이슈
식민지 장관으로서 배서스트는 영국 식민지 내에서 대의제도 도입과 언론의 자유 발전에 모두 적대적이었다. 그는 식민지청을 전통적이고 가부장적인 방식으로 운영했으며, 해외 파견은 지위, 족벌주의, 가족 관계에 크게 의존했다. 그는 재정난에 처한 처남 리치먼드 공작을 캐나다 총독으로 임명하고, 사위인 프레더릭 폰손비 소장을 몰타 총독으로 파견했다. 또한 친구인 보퍼트 공작의 아들인 찰스 서머싯 경을 케이프 식민지 총독으로 임명했다.
한편, 배서스트는 노예제 폐지론자는 아니었지만, 윌리엄 윌버포스의 친구였으며, 카리브해 식민지 총독들에게 노예들의 생활 조건을 개선하도록 강력히 압박했다. 그의 이러한 공식적인 입장은 노예제 폐지 운동 기간 동안 자주 언급되었으며, 이 문제에 관해서는 인도주의적인 정신에 따라 행동한 것으로 보인다. 이스트케이프주의 배서스트 마을은 알바니 정착민들에 대한 인도주의적 제스처와 과도하게 징벌적이었던 찰스 서머싯 경에 대한 의회의 비난을 기념하여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현재 감비아의 수도인 반줄도 원래는 배서스트 백작의 이름을 따서 배서스트라고 불렸다.
배서스트는 유능한 차관 헨리 골번과 함께 부서를 재편하고 새로운 사무 절차와 함께 청서를 처음으로 도입했다. 골번의 후임 차관인 로버트 윌못 호튼은 배서스트의 실용적인 상식과 신중함을 높이 평가했다. 배서스트는 사교적이고 유머러스하며 업무를 위임할 줄 아는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토리당 분열을 막기 위해 1801년 2월 희망봉 식민지를 반환하기로 한 피트의 결정을 지지했으며, 1793년 외국인법 유지를 찬성하고 외국인이 여권을 소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1802년 아미앵 조약을 피트의 선례를 따라 수용했다.
1817년, 그는 호주에 조사 위원회를 파견하여 식민지의 징역형 운송 및 죄수 처우를 조사하도록 지시했다. 존 비그는 세 차례의 보고서를 통해 더 많은 정착민을 식민지로 보내야 하며, 따라서 징역형 운송을 계속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배서스트는 식민지의 사법 행정과 토지 분배에 대한 변경을 명령했다. 그는 1817년 가터 훈장을 수여받았으며, 여러 수익성 있는 명예직을 보유했다. 1800년 이후 임금 하락과 경제 불황은 상무부 장관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는 "문명 시대 역사상 유례없는 비참한 상황을 보며, 어떻게 그런 상황에서 생존을 유지할 수 있었는지, 그리고 자선적 지원을 제공하는 것이 불가능했는지 자연스럽게 의문을 제기했다"고 언급했다. 증가하는 실업률은 배서스트의 상원 성명에 실제적인 위기감을 불러일으켰다. 거리에서 구걸하는 노동자들에 대한 비난의 상당 부분은 보호주의 때문이었으며, 브루엄 경은 1817년 3월 13일 "이 나라의 전체 상업 정책에 대한 완전하고 아낌없는 검토"를 요구했다. 또한 1817년, 그는 나폴레옹이 세인트헬레나로 유배된 조건에 대해 상원에서 중요한 연설을 통해 전 황제가 겪고 있는 고난을 명확히 밝혔다.
4.3. 주요 정치적 결정
배서스트는 로마 가톨릭교도의 장애 제거를 지지했지만, 그것이 헌법을 개선할 것이라고 믿지 않았기 때문에 반대 투표를 했다. 그는 그러나 1832년 선거법 개정안에 대한 강력한 반대자였다. 그는 1830년 공직에서 물러나며 정치 경력을 마감했다.
5. 개인 생활
헨리 배서스트의 개인적인 삶은 그의 결혼과 가족 관계, 그리고 당대의 예술 작품을 통해 묘사된 그의 모습을 통해 엿볼 수 있다.
5.1. 결혼 및 자녀
배서스트 경은 1789년 4월 조지 레녹스 경의 딸인 레이디 조지아나 레녹스와 결혼했다. 그녀는 1841년 1월, 7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배서스트는 1834년 7월에 72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그의 장남 헨리 조지가 백작위를 계승했다.
부부는 슬하에 헨리 조지(Henry George, 1790년 ~ 1866년), 윌리엄 레녹스(William Lennox, 1791년 ~ 1878년), 루이자 조지아나(Louisa Georgina, 1792년 ~ 1874년), 피터 조지 앨런(Peter George Allen, 1794년 ~ 1796년), 시모어 토머스(Seymour Thomas, 1795년 ~ 1834년), 에밀리 샬럿(Emily Charlotte, 1798년 ~ 1877년), 찰스(Charles, 1802년 ~ 1842년) 등 네 아들과 두 딸을 두었다.
5.2. 초상화 및 묘사
토머스 로렌스 경은 배서스트가 그의 스튜디오에서 초상화를 그릴 당시 궁정 화가였다. 이후 1810년 런던에서 토머스 필립스와 헨리 마이어가 에칭 작업을 진행했다. 이 중 한 작품은 호주 캔버라의 호주 국립 초상화 갤러리에서 소장하고 있다.
런던 식민지청 외벽에는 배서스트의 조각상이 있다. 그는 또한 남아프리카 공화국 텔레비전 시리즈 샤카 줄루에서 크리스토퍼 리에 의해 연기되었다. 사회 일기 작가 마리아 에지워스는 그를 "구식 개"이자 "형식주의자"라고 묘사하며 "그 부류의 사람"이라고 생각했다고 언급했다.
6. 유산 및 기념
헨리 배서스트의 이름은 그가 기여했던 식민지 지역을 중심으로 여러 지명에 남아 그의 유산을 기리고 있다.
6.1. 명명된 장소
배서스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장소들은 다음과 같다.
- 배서스트군, 호주 뉴사우스웨일스주
- 배서스트, 호주 뉴사우스웨일스주의 지역 도시
- 배서스트섬, 호주 노던 준주의 티위 제도 일부
- 배서스트섬, 캐나다 누나부트 준주의 섬
- 배서스트 스트리트, 캐나다 토론토의 거리
- 배서스트, 캐나다 뉴브런즈윅주의 도시
- 배서스트, 남아프리카 공화국 이스트케이프주의 마을
- 반줄, 감비아의 수도 (이전 명칭: 배서스트)
7. 관련 항목
- 윌리엄 피트 (소피트)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 반도 전쟁
- 1812년 전쟁
- 노예 제도 폐지 운동
- 가톨릭 해방령
- 1832년 선거법 개정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