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필드 마셜 제1대 애머스트 남작 제프리 애머스트(Jeffery Amherst, 1717년 1월 29일 ~ 1797년 8월 3일)는 영국 육군의 장교이자 영국군 총사령관이었다. 그는 7년 전쟁 중 누벨프랑스 영토를 정복하는 영국의 성공적인 작전을 설계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의 지휘 아래 영국군은 루이스버그, 퀘벡 시티, 몬트리올 등의 주요 도시와 여러 주요 요새를 함락시켰다. 그는 또한 나중에 캐나다가 된 영토의 초대 영국인 총독이기도 했다. 캐나다와 미국에는 그의 이름을 딴 수많은 장소와 거리가 존재한다.
그러나 애머스트의 유산은 폰티액 전쟁 중 반란을 일으킨 북미 원주민 부족들에게 천연두를 퍼뜨리려는 의도를 드러냈다는 점에서 논란이 되고 있다. 이러한 행동은 그의 유산을 재고하게 만들었다. 2019년 몬트리올 시는 그의 이름을 딴 거리를 모호크어로 "형제애와 평화를 상징하는" 아타테켄 거리(Rue Atateken)로 변경하며 그의 부정적인 유산을 단절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2. 생애 초기 및 군 경력 시작
제프리 애머스트는 영국 켄트 주 세븐오크스에서 태어나 영국 육군에 입대하여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등에서 쌓은 초기 군사 경험을 통해 진급하며 군 경력을 시작했다.
2.1. 어린 시절과 교육
제프리 애머스트는 1717년 1월 29일 켄트 출신의 변호사 제프리 애머스트(1750년 사망)와 엘리자베스 애머스트(혼전 성씨: 케릴)의 아들로 세븐오크스에서 태어났다. 어린 나이에 그는 도싯 공작 라이어널 새크빌의 시동(page)이 되었다.
2.2. 초기 군 복무
애머스트는 1735년 그레나디어 근위대의 엔사인으로 입대했다. 그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 참전하여 존 라이고니어 장군의 보좌관이 되었고, 1743년 6월 데팅겐 전투, 1745년 5월 퐁트누아 전투에 참가했다. 1745년 12월 25일 중령으로 진급했으며, 1746년 10월 로쿠 전투에서도 참전했다. 이후 영국군 사령관인 컴벌랜드 공작 윌리엄 왕자의 보좌관이 되어 1747년 7월 라우펠트 전투에서도 활동했다.
3. 7년 전쟁과 북미 정복
애머스트는 7년 전쟁, 특히 북미에서의 프렌치 인디언 전쟁에서 영국군의 주요 지휘관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프랑스의 북미 지배를 종식시키는 데 기여했다.
3.1. 독일 전선
1756년 2월, 애머스트는 하노버 방어를 위해 소집된 헤센군에 행정관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영국 본토에 대한 프랑스의 침공이 임박한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4월에 애머스트는 수천 명의 독일군을 남부 영국으로 수송하여 영국 방어를 강화하도록 지시받았다. 그는 1756년 6월 12일 제15 보병연대의 대령이 되었다. 1757년에는 영국에 대한 즉각적인 위협이 사라지자 병력은 다시 하노버로 이동하여 컴벌랜드 공작 휘하의 증강군에 합류했고, 애머스트는 1757년 7월 하시텐베크 전투에서 컴벌랜드 휘하의 헤센군과 함께 싸웠다. 이 전투에서의 연합군 패배로 인해 군대는 북해 연안의 슈타데를 향해 북쪽으로 꾸준히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애머스트는 후퇴와 클로스터체벤 협정으로 인해 실망했다. 이 협정으로 하노버는 전쟁에서 철수하기로 합의했다. 그는 자신의 지휘 하에 있는 헤센군을 해산할 준비를 시작했지만, 협정이 파기되고 연합군이 재편성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3.2. 프렌치 인디언 전쟁
애머스트는 7년 전쟁, 특히 미국에서 프렌치 인디언 전쟁으로 알려진 북미 전역에서 명성을 얻었다. 그는 1758년 6월 케이프브레턴섬의 루이스버그에 대한 영국군의 공격을 지휘했다.
이 작전 이후, 그는 1758년 9월 북미 영국군 총사령관이자 제60 로열 아메리칸 연대의 연대장에 임명되었다. 애머스트는 이어서 샹플랭 호에서 프랑스군에 대항하는 군대를 이끌고 1759년 7월 티콘데로가 요새를 점령했다. 동시에 윌리엄 존슨 경 휘하의 다른 군대는 나이아가라 요새를 점령했고, 제임스 울프는 퀘벡을 포위하여 1759년 9월 점령했다. 애머스트는 1759년 9월 12일부터 버지니아 식민지의 명목상 총독으로 재직했다.
3.2.1. 주요 전투와 승리

1760년 7월부터 애머스트는 오스위고 요새에서 세인트로렌스강을 따라 군대를 이끌었다. 그는 퀘벡에서 온 머리 준장과 일오노아에서 온 해빌랜드 준장과 삼방향 포위 작전으로 합류하여 몬트리올을 함락시켰고, 1760년 9월 8일 북미에서 프랑스 통치를 종식시켰다. 그는 프랑스 지휘관들에게 전쟁 명예를 거부하여 그들을 격분시켰다. 레비 백작은 군기를 넘겨주기보다는 불태우는 것을 선택하여, 프랑스 내에서 나중에 정치적 이득을 위해 보드뢰이유와의 차이점을 부각시켰다.
영국 정착민들은 안도했으며, 추수감사절을 선포했다. 보스턴 신문들은 페늘 홀에서 열린 퍼레이드, 성대한 만찬, 음악, 모닥불, 대포 발사 등으로 축하 행사가 열렸다고 보도했다. 보스턴 최초 교회의 토머스 폭스크로프트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위대한 일들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뻐합니다... 오랫동안 '카르타고는 파괴되어야 한다', 즉 캐나다는 정복되어야만 우리가 이 지역에서 지속적인 평화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의견이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임하신 하나님의 선한 손길을 통해 우리는 그 성취의 행복한 날을 봅니다. 우리는 폐하의 승리한 군대가 적의 높은 곳을 짓밟고, 그들의 마지막 요새가 넘겨지고, 온 나라가 용맹하고 평온하며 성공적인 애머스트 장군을 통해 영국 국왕에게 항복하는 것을 봅니다."
이 승리를 인정하여 애머스트는 1760년 9월 영국령 북아메리카의 총독으로 임명되었고, 1760년 11월 29일 소장으로 진급했다. 그는 1761년 4월 11일 바스 훈장 기사 작위를 받았다.
뉴욕에 주둔하던 애머스트는 로버트 멍크턴과 윌리엄 해빌랜드 휘하의 병력을 서인도 제도의 영국 원정대에 파견하여 1761년 도미니카, 1762년 마르티니크와 쿠바를 영국이 점령하는 데 기여했다.
4. 식민지 행정 및 전후 관리
프렌치 인디언 전쟁 승리 후 북아메리카 식민지 총독으로서 애머스트는 중요한 행정적 역할을 수행했다.
4.1. 버지니아 식민지 총독
애머스트는 1759년 9월 12일부터 1768년까지 버지니아 식민지의 명목상 영국 국왕 직할 총독으로 재직했지만, 실제 행정은 프랜시스 포키에가 총독 대행으로서 계속 수행했다.
4.2. 영국령 북미 총독
1760년 9월, 애머스트는 영국령 북아메리카의 초대 총독으로 임명되었으며, 이 직무는 1763년까지 이어졌다. 이는 현재 캐나다 총독의 전신 격이다. 그는 이 기간 동안 전후 식민지 관리와 정책 수립에 관여했다.
5. 폰티액 전쟁과 논란

1763년 초, 오하이오 계곡과 오대호 지역의 많은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들이 폰티액의 이름을 딴 폰티액 전쟁으로 알려진 봉기를 일으켰다. 이 전쟁은 프랑스와 영국 사이의 평화가 공식적으로 선언된 1763년 2월까지, 영국이 북미 영토를 확장하며 원주민들의 반감을 산 것이 주요 배경이었다.
5.1. 배경 및 원주민 정책
1753년 프랑스가 처음 영토를 침공했을 때부터 1763년 2월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평화가 공식적으로 선언될 때까지, 여섯 부족과 그들의 속주 부족들은 프랑스와 영국 모두 애팔래치아 산맥 동쪽에 머물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영국이 오하이오와 앨러게니 계곡에서 철수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자, 델라웨어족, 쇼니족, 세네카족, 민고족, 모히칸족, 마이애미족, 오타와족, 와이언도트족 등 영국군의 전후 지역 점령에 반대하는 느슨한 원주민 부족 연합이 영국군을 그들의 영토에서 몰아내기 위해 뭉쳤다. 이 시기 애머스트의 원주민 정책은 원주민의 권리와 문화를 경시하고 영국 식민지 확장을 우선시하여 심각한 문제를 야기했다.
5.2. 천연두 담요 사건
폰티액 전쟁 중 가장 악명 높고 잘 문서화된 문제 중 하나는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생물학전 사용과 이를 지지한 애머스트의 역할이었다. 포트 피트 사령관인 헨리 부케 대령은 1763년 6월 원주민 집단이 요새를 포위했을 때 천연두에 감염된 담요를 원주민에게 주도록 명령했다.
포위 공격 중이던 1763년 6월 24일 회담에서 시메온 에퀴예르 대위는 포위군인 델라웨어족 대표들에게 천연두 병원에 노출된 담요 두 장과 손수건을 작은 금속 상자에 넣어 주었는데, 이는 봉기를 끝내기 위해 질병을 원주민에게 퍼뜨리려는 시도였다. 이 계획을 고안한 상인이자 민병대 사령관 윌리엄 트렌트는 북미 영국 식민지 당국에 "천연두를 인디언들에게 옮기기 위한" 목적으로 담요를 주었다는 내용의 청구서를 보냈다. 이 청구서는 당시 북미 총사령관이었던 토머스 게이지가 승인했다. 6월 24일 델라웨어 추장들과의 회담에 대해 트렌트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우리는 그들에게 천연두 병원에서 가져온 담요 두 장과 손수건 한 장을 주었다. 이것이 원하는 효과를 가져오기를 바란다." 군 병원 기록은 담요 두 장과 손수건이 "천연두를 인디언들에게 옮기기 위해 병원에 있던 사람들로부터 가져왔다"고 확인한다. 요새 사령관은 이 품목들에 대해 비용을 지불했으며, "위에 언급된 용도로 사용되었음"을 증명했다. 1763년에서 1764년까지 오하이오 컨트리에서 약 100명의 원주민이 사망하는 천연두 발병이 보고되었지만, 이것이 포트 피트 사건의 결과인지 아니면 바이러스가 이미 델라웨어족들 사이에 존재했는지(매 10년마다 자연적인 발병이 있었음)는 명확하지 않다. 또한 회담에 참석했던 대표들은 나중에 다시 만났을 때 천연두에 걸리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한 달 후, 천연두 담요 사용은 애머스트 자신이 부케에게 보낸 편지에서 논의되었다. 애머스트는 포트 피트 주둔군 사이에 천연두가 발병했다는 소식을 듣고 베낭고 요새, 르뵈프 요새, 프레스크아일 요새를 잃었다는 소식을 접한 후 부케 대령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천연두를 불만을 품은 인디언 부족들에게 퍼뜨릴 방법을 고안할 수는 없을까? 우리는 이 기회에 그들을 약화시키기 위해 모든 계략을 사용해야 한다.
이미 포트 피트 포위 공격을 해제하기 위해 진군 중이던 부케는 며칠 후인 1763년 7월 13일 애머스트에게 보낸 답신에서 다음과 같은 추신으로 이 제안에 동의했다.
추신: 담요를 통해 인디언들을 접종시키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물론 저 자신은 병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하겠습니다. 선량한 사람들을 그들과 맞서게 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므로, 스페인 사람들의 방법, 즉 영국 사냥개로 그들을 사냥하는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레인저와 일부 경기병의 지원을 받는다면 그 해충들을 효과적으로 박멸하거나 제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에 애머스트는 역시 추신으로 다음과 같이 답했다.
추신: 담요를 통해 인디언들을 접종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이 좋습니다. 또한 이 사악한 종족을 근절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다른 모든 방법도 시도하십시오. 개를 이용해 그들을 사냥하는 귀하의 계획이 실현될 수 있다면 매우 기쁘겠지만, 현재로서는 영국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이러한 서신 교환은 애머스트가 원주민 말살에 대한 의지를 명확히 보여주는 증거로 폰티액 전쟁에서의 그의 역할에 대한 비판의 핵심이 된다.
5.3. 논란 이후와 소환
애머스트는 북미에서의 향후 군사 계획에 대해 협의하기 위해 본국으로 소환되었고, 토머스 게이지가 북미 총사령관 대리로 그를 대신했다. 애머스트는 캐나다 정복에 대한 칭찬을 기대했지만, 런던에 도착하자마자 최근의 원주민 반란에 대해 해명할 것을 요구받았다. 그는 자신의 행동을 변호해야 했으며, 윌리엄 존슨 경과 조지 크로간이 그를 해임하고 게이지로 영구 교체하도록 무역위원회에 로비하면서 제기된 불만에 직면했다. 그는 또한 대서양 양쪽에서 군사 부하들로부터 심한 비판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머스트는 1765년 3월 26일 중장으로 진급했고, 1768년 11월에는 제3 보병연대의 대령이 되었다.
1772년 10월 22일, 애머스트는 영국 국왕 직할 포병대 사령관에 임명되었고, 곧 조지 3세의 신임을 얻었다. 조지 3세는 처음에 그 직책이 영국 왕실 구성원에게 돌아가기를 바랐었다. 1772년 11월 6일, 그는 영국 추밀원 의원이 되었다.
6. 영국 내 활동과 말년
북미에서 소환된 후 애머스트는 영국 내에서 군사 및 정치적 역할을 수행했으며, 그의 말년은 프랑스 혁명 전쟁 발발과 함께 군대 관리 능력에 대한 비판에 직면했다.
6.1. 총사령관 재임

애머스트는 1776년 5월 14일, 켄트 주 홀름스데일의 애머스트 남작으로서 영국 귀족에 올랐다. 1778년 3월 24일에는 대장으로 진급했고, 1778년 4월에는 영국군 총사령관이 되어 영국 내각의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1778년, 북미 영국군 사령관 윌리엄 하우가 해임을 요청했을 때, 정부는 애머스트를 후임자로 고려했다. 그러나 그가 반란을 완전히 진압하려면 75,000명의 병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자 정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대신 헨리 클린턴이 하우를 대신하여 미국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사라토가 전투에서의 영국군 패배 이후, 애머스트는 북미에서 제한적인 전쟁을 주장했다. 그는 해안선을 따라 교두보를 유지하고 캐나다, 동플로리다, 서플로리다, 서인도 제도를 방어하는 동시에 해상전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778년 11월 7일 조지 3세와 샬럿 왕비는 켄트 주 몬트리올 파크에 있는 그의 자택을 방문했고, 1779년 4월 24일 제2 기마 척탄병 근위대의 대령 겸 대장이 되었다.
오랫동안 프랑스의 계획은 영국 본토 침공 개념이었다. 성공하면 전쟁을 신속하게 끝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1779년 스페인이 프랑스 편으로 전쟁에 참전하면서, 영국의 국내 병력 부족이 심화되어 침공이 더욱 매력적인 선택지가 되었다. 애머스트는 침공에 대비하여 영국의 육상 방어 체계를 조직했지만, 침공은 결코 현실화되지 않았다.
6.2. 고든 폭동 진압
1780년 6월, 애머스트는 런던에서 발생한 고든 폭동을 진압하는 영국군을 지휘했다. 폭동이 발생하자 애머스트는 런던 주둔 기마 및 보병 근위대 병력을 최선을 다해 배치했지만, 민간 치안 판사들이 폭동 진압을 위한 단호한 조치를 승인하는 것을 꺼려 방해를 받았다.
주변 카운티에서 보병과 민병대가 동원되어 애머스트 휘하 병력은 15,000명 이상으로 늘어났고, 이들 중 다수는 런던 하이드 파크의 텐트에 주둔했다. 계엄령이 선포되어, 폭동법이 먼저 낭독되면 군대가 군중에게 발포할 권한이 주어졌다. 결국 질서는 회복되었지만, 애머스트는 당국이 폭동을 진압하는 데 실패한 것에 대해 개인적으로 우려했다.
고든 폭동 이후 애머스트는 1782년 2월 총사령관직에서 사임해야 했고, 헨리 시모어 콘웨이가 그를 대신했다. 1782년 3월 23일, 그는 제2 기마 근위대의 대장 겸 대령이 되었다.
6.3. 프랑스 혁명 전쟁과 비판
1788년 7월 8일, 그는 제2 근위 기마연대의 대령이 되었고, 1788년 8월 30일에는 애머스트 남작(이번에는 켄트 주 몬트리올의 지정 지역을 포함)으로 다시 서임되었는데, 이는 애머스트에게 자녀가 없었으므로 홀름스데일 남작 작위는 그의 사망으로 소멸될 것이었기 때문에 이 작위가 조카에게 계승될 수 있도록 특별 조항이 포함되었다.
프랑스 혁명 전쟁이 발발하자, 애머스트는 1793년 1월 총사령관으로 다시 소환되었다. 그러나 그는 군대를 심각한 쇠퇴 상태에 빠뜨렸다는 비판을 받았으며, 이는 저지대 국가에서의 초기 작전 실패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소 피트는 그에 대해 "그의 나이, 그리고 아마도 그의 타고난 성격은 현 시기가 요구하는 활동과 에너지에 거의 적합하지 않다"고 말했다. 호러스 월폴은 그를 "그의 우둔함과 무능함이 상상을 초월하는 통나무"라고 불렀다. "그는 군대에서 수많은 비리가 만연하도록 허용했습니다... 그는 거의 노망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지휘권을 유지했으며, 이는 아무리 비난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애머스트는 1795년 2월에 총사령관 직에서 물러났고, 요크와 올버니 공작 프레더릭 왕자가 그를 대신했다. 1796년 7월 30일 그는 육군 원수 계급으로 진급했다.
6.4. 가족 관계와 사망
애머스트는 1753년 제인 달리슨(1723년 ~ 1765년)과 결혼했다. 그녀가 사망한 후, 그는 1767년 3월 26일 조지 캐리 중장(1712년 ~ 1792년)의 딸인 엘리자베스 캐리(1740년 ~ 1830년)와 재혼했다. 이 두 결혼에서 자녀는 없었다. 그는 몬트리올 파크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은퇴했고, 1797년 8월 3일 사망했다. 그는 세븐오크스의 교구 교회에 묻혔다.


7. 유산과 역사적 평가
제프리 애머스트의 역사적 유산은 그의 군사적 업적과 함께 북미 원주민에 대한 논란적인 정책으로 인해 오늘날까지 다양한 평가와 비판에 직면하고 있다. 그의 이름은 여전히 여러 지명에 남아있지만, 그의 행동이 민주주의, 인권, 사회 발전에 미친 부정적인 영향에 대한 재평가 움직임이 활발히 진행 중이다.
7.1. 그의 이름을 딴 지명 및 기관
여러 장소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 온타리오주 애머스트 섬
- 온타리오주 애머스트버그 (애머스트 고등학교가 위치)
- 매사추세츠주 애머스트 (매사추세츠 대학교 애머스트, 햄프셔 칼리지, 애머스트 칼리지가 위치)
- 뉴햄프셔주 애머스트
- 노바스코샤주 애머스트
- 뉴욕주 애머스트
- 버지니아주 애머스트군
7.2. 논란과 재평가
애머스트가 원주민을 말살하려 했다는 그의 욕망은 현재 그의 유산에 대한 어두운 오점으로 간주되며, 여러 기관, 자치단체 및 단체들은 "애머스트"라는 이름의 사용을 재고하고 있다. 2007년 비버 지의 "캐나다가 아닌 사람들"이라는 기사에서는 애머스트를 캐나다 역사상 저자들이 경멸하는 인물 목록에 포함시켰는데, 이는 그가 "천연두에 감염된 담요를 퍼스트 네이션 사람들에게 배포하는 계획을 지지했기 때문"이었다.
2008년 미크막족 영적 지도자 존 조 사크는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주의 포트 라 조이-포트 애머스트 국립사적지의 이름이 "캐나다의 끔찍한 오점"이라고 불렀으며, "애머스트 장군의 이름을 딴 장소를 갖는 것은 마치 예루살렘에 아돌프 히틀러의 이름을 딴 도시가 있는 것과 같다... 역겹다"고 말했다. 사크는 2016년 1월 29일 캐나다 정부에 보낸 서신에서 자신의 우려를 다시 제기했다. 애머스트를 백인 우월주의 사상에 의해 동기 부여된 인물로 언급한 미크막족 역사가 대니얼 N. 폴 역시 이름 변경을 지지하며, "미래에는 인류에 대한 범죄라고 할 수 있는 행동을 저지른 사람들의 이름을 딴 것은 아무것도 없어야 한다"고 말했다. 2016년 2월, 캐나다 공원관리국 대변인은 공식적인 민원이 접수되면 문제를 검토할 것이라고 밝혔다. "대중으로부터 국립사적지 이름 변경에 대한 공식적인 요청이 있을 경우, 캐나다 공원관리국은 역사 유적지 기념물 위원회에 권고를 구할 것입니다." 사크는 이러한 공식 요청 요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2016년 2월 20일 온라인 청원을 시작했다. 2018년 2월 16일, 해당 유적지는 미크막어 단어를 프랑스어 및 영어 명칭과 함께 추가하여 스크마큰-포트 라 조이-포트 애머스트(Skmaqn-Port-la-Joye-Fort Amherst스마큰-포트 라 조이-포트 애머스트영어)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2009년 몬트리올 시의원 니콜라 몽모렌시는 애머스트 거리를 개명해달라고 공식적으로 요청하며 "아메리카 원주민을 말살하라는 의견을 지지한 남자가 이런 식으로 기념되는 것은 전적으로 용납할 수 없다"고 말했다. 2017년 9월 13일, 몬트리올 시는 그의 이름을 딴 거리를 개명하기로 결정했다. 2019년 6월 21일, 이 거리는 공식적으로 Atateken아타테켄모호크어 거리로 이름이 변경되었는데, 카네사타케 역사가 힐다 니콜라스에 따르면 아타테켄은 모호크어로 "가치를 공유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퀘벡주 가티노의 애머스트 거리도 2023년에 Wìgwàs위그와스오지브와어 거리로 이름이 변경되었는데, 이는 오지브웨어로 자작나무를 의미한다.
2016년 애머스트 칼리지는 학생들의 요청에 따라 "로드 제프리" 마스코트를 폐지했다. 또한 이 대학이 소유한 캠퍼스 호텔인 로드 제프리 여관의 이름도 2019년 초 볼트우드 여관으로 변경했다. 이러한 재평가 움직임은 애머스트의 행동이 인권과 사회 정의에 미친 부정적 영향을 조명하며, 역사적 인물에 대한 현대 사회의 비판적 시각을 반영한다.
7.3. 몬트리올 파크
1760년 몬트리올을 점령한 후, 애머스트는 고향인 세븐오크스에 몬트리올 하우스를 짓고 본거지로 삼았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이 집에서는 매년 애머스트 가문이 리버헤드 마을에 세운 초등학교 졸업생들을 초대하여 여름 소풍을 열었다. 이 초등학교는 오늘날까지 애머스트 가문의 문장을 사용하고 있다. 애머스트 가문의 재산이 기울면서 이 집은 20세기 후반에 철거되었고, 부지는 주택 개발에 사용되었다. 현재는 하나의 오벨리스크와 팔각형의 수위실이 기념물로 남아 있다. 오벨리스크의 비문은 희미해지고 있지만, 캐나다 전역에서의 주요 역할에 대해서는 이름을 명시하지 않고 있다. 이는 과도한 겸손 때문이거나, 아니면 모든 사람이 이미 알고 있으리라는 자만심 때문일 수 있다.
그 비문은 다음과 같이 읽힌다.
1761년 1월 25일, 이 조상의 땅에서 세 형제가 만난 신의 섭리와 행복을 기념하여. 세 형제는 6년간의 영광스러운 전쟁에 참전하여 다양한 기후와 계절, 그리고 전투 속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가장 유능한 정치인에게 헌정합니다. 그의 작전으로 케이프브레턴섬과 캐나다가 정복되었으며, 그 영향으로 영국군은 전례 없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 루이스버그 요새 프랑스 6개 대대와 함께 항복, 1758년 7월 26일
- 뒤켄 요새 함락, 1758년 11월 24일
- 나이아가라 요새 항복, 1759년 7월 25일
- 티콘데로가 요새 함락, 1759년 7월 26일
- 크라운 포인트 함락, 1759년 8월 4일
- 퀘벡 점령, 1759년 9월 18일
- 레비 요새 항복, 1760년 8월 25일
- 일오노아 포기, 1760년 8월 28일
- 몬트리올 항복, 캐나다와 프랑스 10개 대대 무장 해제, 1760년 9월 8일
- 뉴펀들랜드섬 세인트존스 재탈환, 1762년 9월 18일
8. 함께 보기
- 제1대 애머스트 백작 윌리엄 애머스트
- 토머스 게이지
- 헨리 부케
- 폰티액 전쟁
- 프렌치 인디언 전쟁
- 존 라이고니어
- 윌리엄 존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