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식별
제10대 판첸 라마는 1938년 2월 19일, 당시 중화민국 칭하이성 쉰화 사라르족 자치현의 비도(Bido) 지역(현재의 암도)에서 곤포 체텐(Gönpo Cêdän)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곤포 체텐과 소남 드롤마였다. 1937년 제9대 판첸 라마 투프텐 최키 니마가 사망한 후, 제10대 판첸 라마를 찾기 위한 두 개의 수색이 동시에 진행되었다. 라싸의 티베트 정부는 시캉성 출신의 소년을 지지했고, 반면 제9대 판첸 라마의 측근들은 곤포 체텐을 선택하며 갈등이 발생했다.
중화민국 정부는 국공 내전에 휘말려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949년 6월 3일 곤포 체텐에 대한 지지를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중화민국은 곤포 체텐을 활용하여 중국 서남부에 광범위한 반공산주의 세력을 구축하고자 했다. 국민당은 판첸 라마의 도움을 받아 세 개의 티베트 캄파 사단을 조직하여 공산당에 대항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1949년 6월 11일, 티베트식 나이로 12세가 된 곤포 체텐은 암도의 주요 겔룩파 사찰인 쿰붐 사원에서 제10대 판첸 라마로 즉위하며 로브상 틴레이 륜둡 최키 걀첸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이 즉위식에는 몽골 티베트 위원회 위원장 관지위(Guan Jiyu)와 국민당 칭하이성 성장 마부팡이 참석했다. 라싸 정부가 판첸 라마가 전통적으로 통제하던 영토를 곤포 체텐에게 인정하지 않자, 그는 1949년 9월 마부팡에게 티베트에 대항하는 군대를 이끌어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마부팡은 공산당의 승리가 임박하자 판첸 라마에게 국민당 정부와 함께 타이완으로 갈 것을 설득했지만, 판첸 라마는 대신 중화인민공화국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다. 당시 달라이 라마의 섭정 정부는 1947년 티베트 내전을 겪는 등 불안정했으며, 국민당은 이를 이용하여 라싸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다. 달라이 라마는 그들이 1952년에 만난 후 판첸 라마 최키 걀첸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2.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관계
판첸 라마는 중국의 티베트 주권 주장을 지지하고 중국의 티베트 개혁 정책을 지지한 것으로 알려졌다. 라디오 베이징은 티베트가 중국으로 "해방"되어야 한다는 그의 종교 지도자의 발언을 방송하여 라싸 정부가 중화인민공화국과 협상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판첸 라마는 중국 공산당이 티베트를 중화인민공화국에 통합함으로써 티베트의 사회 개혁과 정치적 안정을 강화하려는 구상을 지지했다. 당시 티베트는 정치적 불안정과 다양한 사회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1951년 쿰붐 사원에서 칼라차크라 입문식을 주관했으며, 같은 해 티베트 대표단이 티베트의 평화적 해방을 위한 17개조 협의에 서명하고 달라이 라마에게 협정 이행을 전보로 알릴 때 베이징으로 초청되었다. 그는 1952년 제14대 달라이 라마와 만나면서 그의 지위를 인정받았다.

1954년 9월, 달라이 라마와 판첸 라마는 베이징으로 가서 제1차 전국인민대표대회에 참석하여 마오쩌둥 등 중국 지도자들을 만났다. 판첸 라마는 곧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54년 12월에는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부주석이 되었다. 1956년에는 달라이 라마와 함께 인도로 성지순례를 떠났다. 1959년 달라이 라마가 인도로 망명하자, 판첸 라마는 공개적으로 중국 정부를 지지했으며, 중국 정부는 그를 라싸로 데려와 티베트 자치구 준비위원회 주임으로 임명했다.
2.1. 정치적 직책 및 활동
판첸 라마는 중화인민공화국 정부 하에서 여러 중요한 정치적 직책을 맡았다. 그는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위원,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부주석, 그리고 티베트 자치구 준비위원회 주임 등 고위직을 역임했다. 이러한 직책들은 그가 중국 정부의 티베트 정책에 깊이 관여하게 만들었으며, 동시에 티베트 불교의 최고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복잡한 입장에 놓이게 했다. 그는 저우언라이 총리와도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으며, 당시 중국 공산당 티베트 자치구 위원회 서기였던 후진타오와도 친분을 쌓았다고 전해진다.
중국 공산당과 정부는 판첸 라마 10세를 후대하며, 망명한 달라이 라마 14세에 대항하는 친중국 티베트 민족 지도자로 육성하려 했다. 이 때문에 망명 티베트인 사회에서는 그를 중국 공산당의 꼭두각시로 여기는 시각도 존재했다.
2.2. 티베트 정책에 대한 입장
판첸 라마는 초기에 중국의 티베트 정책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그는 티베트의 사회 개혁과 정치적 안정을 위해 중국과의 통합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지지했다. 그러나 티베트 내에서 중국 정부의 정책이 실행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인권 침해와 종교 탄압을 직접 목격하면서 그의 입장은 점차 복잡해지고 비판적으로 변모했다. 그는 중국 정부의 티베트 정책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는 동시에, 티베트인들의 고통과 문화적 파괴에 깊은 우려를 표명하며 점차 중국의 과도한 통치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3. 중국 정책 비판 및 박해
판첸 라마는 티베트에 대한 중국 정부의 억압적인 정책을 비판하면서 심각한 박해와 탄압을 겪었다. 이는 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자, 티베트 민족의 고난을 대변하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기록된다.
3.1. 7만 자 청원서

1962년 티베트 전역을 순방한 후, 판첸 라마는 저우언라이 총리에게 중화인민공화국의 티베트 내 학대적인 정책과 행동을 규탄하는 장문의 문서를 작성했다. 이 문서는 7만 자 청원서(七万言书치완옌수중국어)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사벨 힐튼에 따르면, 이 문서는 "티베트에서 중국 정책에 대해 작성된 가장 상세하고 정보에 입각한 비판"으로 남아있다.
판첸 라마는 자신이 작성한 청원서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저우언라이를 만났다. 초기 반응은 긍정적이었으나, 1962년 10월 중국 인민공화국 당국은 이 청원서를 비판했다. 마오쩌둥 주석은 이 청원서를 "...반동적인 봉건 영주들이 당에 쏜 독화살"이라고 불렀다. 이 보고서의 내용은 수십 년 동안 중국 지도부의 최고위층 외에는 알려지지 않다가 1996년에 한 부가 발견되었다. 1998년 1월, 제10대 판첸 라마 탄생 60주년을 맞아 티베트 전문가 로버트 바넷이 번역한 영문판 『독화살: 제10대 판첸 라마의 비밀 보고서』(A Poisoned Arrow: The Secret Report of the 10th Panchen Lama)가 출판되었다.
일본 자료에 따르면, 판첸 라마는 1962년 5월 18일 티베트 정부 수반의 지위를 저우언라이 총리에게 양보했다. 중국 공산당 통일전선공작부 부장인 리웨이한(李維漢)은 3개월 동안 판첸 라마의 간언을 받아들여 실행했지만, 같은 해 8월 마오쩌둥은 이를 중단하라고 지시하고 리웨이한이 판첸 라마와 결탁했다고 비판했다. 판첸 라마 또한 자기비판을 명령받았다.
1960년 국제법학자위원회는 티베트에서 집단학살이 있었다는 명확한 증거가 있다고 발표했으며, 7만 자 청원서는 이러한 견해를 뒷받침하는 내용들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저우언라이는 7만 자 청원서의 보고를 받고 "사실이 아니다"라고 답했다. 7만 자 청원서의 제안들은 나중에 1980년 후야오방에 의해 티베트에서 시도되어 개방 정책으로 이어졌다. 이로 인해 티베트는 관광지로 개방되고 칭짱 철도도 건설되었지만, 동시에 독립 운동이나 중국 정부를 비판하는 티베트인들에 대한 엄격한 탄압은 계속되어 국제 사회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7만 자 청원서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정치적 탄압에 대하여: 7만 자 청원서는 8가지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첫째로 1959년 티베트 봉기에 대한 중국 공산당 정부의 과도한 보복성 처벌을 비판했다.
- "얼마나 많은 사람이 체포되었는지 알 길이 없다. 각 지역에서 각각 1만 명 이상이 체포되었다. 선인이든 악인이든, 무죄든 유죄든 모두 체포되었다. 이는 세계 어느 곳에도 존재하는 어떤 법 제도에도 합치하지 않는다. 지역에 따라서는 남성의 대다수가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기 때문에, 대부분의 일이 여성, 노인, 그리고 아이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 이 외에도 연대 책임을 묻는 처벌로 인해 친척이 봉기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처형된 자들이 있으며, 정치범들은 수감된 후 의도적으로 가혹한 환경에 놓여 사망하고, 부자연스러운 죽음이 극도로 많다고 보고했다.
- 기근에 대하여: 중국 전역에서 5천만 명의 아사자를 냈다고 알려진 악명 높은 대약진 운동은 티베트에서도 시행되었으며, 티베트 동부에서는 집단 농장(인민공사)이 설립되었으나 아사자가 속출했다. 판첸 라마는 저우언라이 총리에게 이를 개선할 것을 요구했다.
- "티베트의 많은 지역에서 민중들이 굶어 죽고 있다. 지역에 따라서는 민중이 전멸한 곳도 있으며, 사망률은 끔찍하게 높다. 과거 티베트는 어둡고 야만적인 봉건 사회였다. 그러나 이러한 식량 부족을 경험한 적은 없었다. 특히 불교가 퍼진 이후에는 더욱 그러했다. 티베트 지역의 민중은 극심한 가난 속에 살고 있으며, 노인이든 젊은이든 대부분이 아사 직전이다. 혹은 매우 쇠약해져 질병에 저항하지 못하고 죽고 있다."
- 또한, 공공 식당에서 식사가 의무화되었을 때, 티베트 민중은 하루에 180 g의 풀, 나뭇잎, 나무껍질 등이 섞인 밀가루만 배급받았으며, 판첸 라마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 "이 끔찍한 배급은 생명을 유지하기에 충분하지 않아, 민중들은 기아의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티베트 역사상 이런 일은 일어난 적이 없다. 민중들은 꿈속에서도 이런 끔찍한 기아를 상상할 수 없었다. 지역에 따라서는 한 명이 감기에 걸리면 그것이 수백 명에게 전염되어 다수의 사람이 죽어가고 있다."
- "티베트에서는 1959년부터 1961년까지 2년 동안 목축과 농업이 거의 완전히 중단되었다. 유목민은 먹을 곡물이 없었고, 농민은 먹을 고기도 버터도 소금도 없었다. 어떤 식량이나 재료도 운송이 금지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민중은 외출이 금지되었고, 휴대용 짬빠 주머니도 몰수되어 많은 사람들이 이에 저항하여 곳곳에서 항쟁이 일어났다."
- 캄 지역에서는 1965년까지 기근이 계속되었고, 판첸 라마가 비판했던 참상이 지속되었다. 1989년 중국 사회과학원이 실시한 조사에서는 기근으로 사망한 수가 1천5백만 명으로 추정되었으며, 인구 통계학자 주디스 배니스터는 3천만 명으로 추산했다. 1980년대 베이징 경제 제도 연구소의 보고서에 따르면, 판첸 라마의 고향인 칭하이성에서는 인구의 45%에 해당하는 90만 명이 사망했으며, 쓰촨성에서는 9백만 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기근을 연구한 제스퍼 베커는 "중국의 어떤 민족도 이 기근으로 인해 티베트인만큼 가혹한 고난에 직면한 사람들은 없다"고 언급했다.
- 이 대약진 운동에 대해 1959년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주석 마오쩌둥은 실패를 인정하고 중화인민공화국 주석직을 사임했으며, 1962년 1월 중앙공작회의(7천인 대회)에서 류사오치 국가주석은 "삼분의 천재, 칠분의 인재"라고 언급하며 대약진을 비판했고, 마오쩌둥은 생애 단 한 번의 자기비판을 했다.
- 민족 절멸에 대하여: 판첸 라마는 티베트인 스스로가 민족으로서의 티베트인을 소멸시킬 수도 있다고 언급하며, 티베트 민족의 소멸을 우려했다.
- "어떤 민족의 언어와 의복, 또한 습관을 없애버린다면, 그 민족은 소멸하고 다른 민족으로 변화할 것이다. 티베트인이 다른 민족으로 변화하지 않을 것이라고 어떻게 우리가 보장할 수 있겠는가."
- 종교 탄압에 대하여: 중국 공산당은 유물사관에 따라 종교를 아편 또는 전 시대의 유물로 간주하여 근절하려 했고, 중국 국내의 사원 등도 파괴했다. 티베트에서도 각종 사원이 이미 문화대혁명 이전에 파괴되었음을 판첸 라마는 기록했다.
- "과거 2,500개의 승원이 존재했지만, 지금은 70개의 승원만이 남아있고, 93%의 승려와 비구니가 추방되었다. 공산당 간부들은 소수의 사람들을 이용하여 종교를 비난하고, 그것이 티베트 대중의 의견이라는 잘못된 견해를 유도하여, 종교를 말살할 시기가 도래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 때문에 각성을 낳는 부처의 가르침은 티베트 전역에서 번성했지만, 이제 우리 눈앞에서 티베트의 대지에서 지워지려 하고 있다. 나를 포함한 90%의 티베트인은 이를 결코 견딜 수 없다."
3.2. 투쟁 집회 및 투옥

1964년 라싸에서 열린 대기도회(몬람 체모)에서 특히 상징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달라이 라마를 비판하라는 중국 공산당의 명령을 받고 연단에 선 그는 대중 앞에서 "달라이 라마 법왕은 티베트의 진정한 지도자이며, 법왕은 반드시 티베트로 복귀하실 것이다. 달라이 라마 법왕 만세!"라고 연설했다. 이러한 행동으로 인해 판첸 라마 10세는 공산당의 격노를 샀고, 자기비판을 강요받게 되었다.
이후 그는 정치국 회의에서 공개적으로 모욕을 당하고, 모든 권한 있는 직책에서 해임되었으며, '티베트 인민의 적'으로 선포되었다. 그의 꿈 일기까지 압수되어 그에게 불리하게 사용되었다. 당시 26세였던 그는 투옥되었다. 문화대혁명이 시작되면서 판첸 라마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중국의 반체제 인사이자 전 홍위병이었던 웨이징성은 1979년 3월 다른 익명의 저자가 쓴 편지를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하여 제10대 판첸 라마가 수감되었던 친청 교도소의 열악한 환경을 고발했다. 그는 1977년 10월에 석방되었으나, 1982년까지 베이징에서 가택 연금 상태에 놓였다.
4. 후반기 생애 및 복권
판첸 라마는 투옥 생활 이후 석방되어 정치적 지위를 회복하고 공적 활동을 재개하며 티베트에서의 활동을 이어갔다.
4.1. 석방 및 정치적 복권
1977년 10월 석방되었으나, 1982년까지 베이징에서 가택 연금 상태에 있었다. 1980년에는 전국인민대표대회 부위원장 등 여러 정치적 직책을 부여받았고, 1982년에는 완전히 정치적 복권되었다. 이러한 고난 속에서도 그는 티베트 불교 보호에 힘썼고, 문화대혁명으로 황폐해진 시가체의 타시룬포 사원을 복원했다. 이러한 그의 성실함과 수완은 티베트인 사회에서 높이 평가되었고, 그를 중국 공산당의 꼭두각시로 보는 시각은 점차 사라졌다.
4.2. 결혼 및 가족
1978년, 그는 수계한 승려로서의 서원을 포기하고 가정을 이루기 위해 중국을 여행하며 아내를 찾기 시작했다. 그는 한국 전쟁에서 인민해방군을 지휘했던 둥치우 장군의 외손녀인 리제(Li Jie)와 교제했다. 그녀는 시안의 제4군의대학에서 의대생이었다. 당시 판첸 라마는 돈이 없었고 당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었지만, 덩샤오핑의 아내와 저우언라이의 미망인은 티베트 라마와 한족 여성의 결혼이 가지는 상징적 가치를 중요하게 여겼다. 그들은 직접 개입하여 1979년 인민대회당에서 성대한 결혼식을 올리도록 주선했다.
1983년, 리제는 딸 얄시 판 린친왕모(ཡབ་གཞིས་པན་རིག་འཛིན་དབང་མོ་Yabshi Pan Rinzinwangmo티베트어)를 낳았다. '티베트의 공주'로 알려진 그녀는 620년이 넘는 판첸 라마 또는 달라이 라마의 환생 계보에서 유일하게 알려진 자녀라는 점에서 티베트 불교와 티베트-중국 정치에서 중요한 인물로 여겨진다. 린친왕모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언급을 거부하며, 그의 이른 죽음을 전반적인 건강 악화, 병적인 비만, 만성적인 수면 부족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제10대 판첸 라마의 사망 이후 그의 아내와 딸, 그리고 타시룬포 사원 사이에 2000.00 만 USD에 달하는 그의 자산을 둘러싼 6년간의 분쟁이 발생했다. 그의 결혼은 티베트 불교 겔룩파 승려로서 파계 행위였기에 티베트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 결혼이 중국 공산당이 꼭두각시 지위를 거부한 판첸 라마 10세의 권위를 실추시키기 위해 강요한 것이라는 설도 있고, 유폐 생활의 외로움을 견디지 못한 판첸 라마 10세 자신이 원했다는 설도 있어 자세한 내용은 불분명하다. 저우언라이의 부인 덩잉차오는 판첸 라마 10세의 딸이 티베트인과 한족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했다고 한다.
4.3. 티베트 귀환 및 대중 활동
판첸 라마는 1980년부터 베이징에서 티베트로 여러 차례 여행을 했다. 1980년 동부 티베트를 순방하는 동안, 그는 라룽 가르에서 유명한 닝마파의 스승 켄첸 지그메 푼촉을 방문했다. 1987년에는 베이징에서 켄첸 지그메 푼촉을 다시 만나 보살의 37가지 수행법을 가르쳤고, 라룽 가르를 축복하고 지지하며 '세르타 라룽 응아릭 낭텐 롭링'(གསེར་རྟ་བླ་རུང་ལྔ་རིག་ནང་བསྟན་བློབ་གླིང་gser rta bla rung lnga rig nang bstan blob gling티베트어, 일반적으로 라룽 가르 불교 학원으로 번역됨)이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1988년 판첸 라마의 초청으로 켄첸 지그메 푼촉은 그와 함께 중앙 티베트에서 봉헌 의식에 참여했는데, 이는 포탈라궁, 노르부링카, 네충 사원, 사캬 사원, 타시룬포 사원, 그리고 삼예 사원을 포함한 티베트의 신성한 불교 유적지를 순례하는 기념비적인 여정이 되었다.
또한 1987년 판첸 라마는 티베트인들이 스스로 현대화를 주도하고 참여할 수 있도록 티베트 강옌 개발 공사(Tibet Gang-gyen Development Corporation)라는 사업체를 설립했다. 이 계획에는 1959년 이후 티베트에서 파괴된 신성한 불교 유적지를 재건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갸라 체링 삼드룹(Gyara Tsering Samdrup)이 이 사업에 참여했으나, 1995년 5월 게둔 최키 니마가 제11대 판첸 라마로 인정된 후 체포되었다.
1989년 초, 제10대 판첸 라마는 다시 티베트로 돌아와 1959년 홍위병에 의해 파괴되었던 타시룬포 사원에 있던 역대 판첸 라마들의 무덤에서 수습된 유골을 재매장하고, 이를 보관할 초르텐에 봉헌했다.
1989년 1월 23일, 판첸 라마는 티베트에서 연설을 통해 "해방 이후 분명히 발전이 있었지만, 이 발전을 위해 치러진 대가가 얻은 것보다 더 컸다"고 말했다. 그는 티베트에서의 문화대혁명의 과도한 행위를 비판하고 1980년대의 개혁개방을 칭찬했다. 이는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준비한 연설 원고를 무시한 연설이었다.
5. 사망
1989년 1월 28일, 판첸 라마는 연설 닷새 뒤 시가체에서 5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공식적인 사망 원인은 심장마비로 발표되었지만, 일부 티베트인들은 의혹을 제기하며 그의 죽음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고 의심했다.
5.1. 사망 당시 상황 및 관련 의혹
판첸 라마의 죽음을 둘러싸고 티베트인들 사이에서는 많은 소문과 음모론이 퍼졌다. 한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마지막 만남에서 아내에게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는 메시지를 남겼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에서는 그가 사망하기 전에 하늘에 무지개가 나타났다고 전해진다. 달라이 라마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은 그가 자신의 의료진에 의해 독살되었다고 믿는다. 이 이론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판첸 라마가 1월 23일 고위 관리들에게 했던 발언이 인민일보와 차이나 데일리에 실린 것을 근거로 삼는다.
1993년 8월, 그의 시신은 타시룬포 사원으로 옮겨졌고, 그곳에서 백단향으로 만든 관에 안치된 후 특수 제작된 안전 캐비닛에 보관되었다. 최종적으로는 사원의 불탑에 있는 '보물병'에 안치되어 보존되고 있다.
2011년 중국의 반체제 인사 위안훙빙은 당시 티베트 공산당 서기이자 인민해방군 티베트 부대 정치위원이던 후진타오가 제10대 판첸 라마의 죽음을 계획했다고 주장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공식적으로 달라이 라마를 판첸 라마의 장례식에 초청하여 티베트의 종교 공동체와 접촉할 기회를 주려 했으나, 달라이 라마는 장례식에 참석할 수 없었다. 판첸 라마의 장례식은 시가체의 타시룬포 사원을 중심으로 티베트의 모든 사원에서 거행되었다. 그의 유해는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의 승인 하에 역대 판첸 라마들처럼 미라로 보존되어 타시룬포 사원의 영탑전에 안치되었다.
6. 유산 및 평가
판첸 라마 10세는 티베트 불교와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중국 공산당 통치 하에서 복잡한 종교 지도자로서의 유산을 남겼다. 그의 삶은 티베트 민족의 고난과 저항을 상징하는 동시에, 중국 정부와의 타협과 협력이라는 이중적인 측면을 보여준다.
6.1. 티베트 내에서의 평가
티베트인 사회에서 판첸 라마 10세는 초기에는 중국 공산당의 꼭두각시로 여겨지기도 했으나, 점차 그의 진정성과 용기 있는 행동으로 인해 존경받는 인물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7만 자 청원서를 통해 중국의 티베트 정책을 비판하고,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투옥과 박해를 겪으면서도 티베트 불교의 보호와 복원에 힘쓴 점은 티베트인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그는 타시룬포 사원을 복원하고 티베트의 종교 유적지를 순례하는 등 티베트 불교의 명맥을 잇기 위해 노력했으며, 이러한 헌신은 그가 더 이상 중국의 도구가 아닌, 티베트 민족의 진정한 지도자이자 수호자로 인식되는 계기가 되었다.
6.2. 비판적 시각
판첸 라마 10세에 대한 비판적 시각은 주로 그의 복잡한 정치적 위치에서 비롯된다. 그는 중국 공산당의 고위직을 역임하며 일정 부분 중국 정부의 통치를 인정하는 모습을 보였고, 이는 일부 티베트인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특히 한족 여성과의 결혼은 티베트 불교 겔룩파 승려로서의 파계 행위였기에 티베트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그의 권위를 실추시키려는 중국 공산당의 강요에 의한 것이라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국 중국 정부의 티베트 정책에 대한 강력한 비판의 목소리를 냈고, 이로 인해 오랜 기간 투옥과 가택 연금을 겪었다. 그의 7만 자 청원서는 중국의 티베트 지배가 가져온 인권 침해, 기근, 종교 탄압 등을 폭로하며 티베트 문제의 심각성을 국제 사회에 알리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그의 유산은 단순한 꼭두각시나 배신자가 아닌, 극심한 압력 속에서도 티베트 민족과 종교를 지키기 위해 고뇌하고 투쟁했던 복합적인 인물로 평가된다.
7. 관련 항목
- 판첸 라마
- 티베트의 역사 (1950년 이후)
- 제14대 달라이 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