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및 배경
정약용은 조선 후기의 혼란 속에서 태어나 성장했으며, 그의 가문과 교육은 훗날 그의 사상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1. 출생과 성장 환경
정약용은 1762년 6월 28일(음력 5월 16일) 경기도 광주부 초부면 마현(현재의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94)에서 태어났다. 그의 생가가 위치한 두물머리는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류하는 지점으로, 정약용은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가 태어난 해는 사도세자가 영조의 노여움을 사 뒤주에 갇혀 죽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한 해이기도 하다. 부친 정재원은 이 사건으로 인해 벼슬을 내려놓고 낙향했으며, 같은 해 6월에 태어난 정약용에게 '귀농(歸農)'이라는 아호를 지어주며 벼슬을 탐하지 않고 농촌에 귀의하라는 의미를 담았다.
정약용은 4남 2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 정재원은 첫 부인 의령 남씨와의 사이에 맏아들 정약현을 두었고, 둘째 부인인 해남 윤씨 윤소온과의 사이에 정약전, 정약종, 그리고 정약용 세 아들과 딸 한 명을 두었다. 정약용은 네 살에 천자문을 배우고, 일곱 살 때 '바다'라는 시를 지을 정도로 총명했다. 열 살 이전에 지은 시들을 모아 『삼미자집』이라는 책을 냈다고 전해지나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 '삼미(三眉)'라는 별명은 어릴 적 천연두를 앓은 후 생긴 흉터 때문에 눈썹이 셋으로 나뉘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아홉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맏형수 경주 정씨와 계모 김씨의 보살핌 속에서 자랐다.
1.2. 가문의 내력
정약용의 본관은 압해(押海)였으나, 조선시대에는 나주목에 속해 있었기에 나주 정씨로도 불렸다. 그의 조상들은 고려 말 황해도 배천에 살다가 조선 개국 후 서울로 이주했다. 11대 조부 정자급이 승문원 교리를 지낸 이래 8대에 걸쳐 벼슬을 지냈으며, 특히 홍문관 부제학을 지낸 정수강, 병조 판서 정옥형, 의정부 좌찬성 정응두, 대사헌 정윤복, 강원도 관찰사 정호선, 홍문관 교리 정언벽, 병조 참의 정시윤 등이 있었다. 정약용은 이처럼 8대에 걸쳐 홍문관 명부에 이름을 올린 학문 명가임을 자랑스럽게 여겨 '팔대옥당(八代玉堂)'이라 칭했다.
그러나 1694년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하고 남인이 몰락하자, 5대조 정시윤은 당쟁을 피해 경기도 광주 마현으로 옮겨 살았다. 이로 인해 고조부 정도태, 증조부 정항신, 조부 정지해에 이르러서는 벼슬에 오르지 못하는 등 가문의 관직 진출이 단절되기도 했다. 부친 정재원은 1762년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대과에는 응시하지 않는 등 출세에 큰 욕심이 없었다. 그는 사돈인 채제공의 여러 차례 권유에도 불구하고 벼슬길을 마다했으나, 뒤늦게 생활고로 인해 음관으로 벼슬길에 나아가 호조좌랑, 울산부사, 진주목사(정3품) 등을 지냈다.
1.3. 교육 및 학문적 영향
정약용은 특별한 스승 없이 부친 정재원의 임지를 따라다니며 학문을 배웠다. 맏형 정약현은 성호 이익의 학맥을 잇는 권철신에게 사사했으나, 정약용은 부친의 가르침 외에 독학으로 학문을 닦았다. 이가환과 이승훈과의 교류를 통해 성호 이익의 학문을 접하게 되었으며, 직접 가르침을 받지는 않았으나 그의 유작을 통해 사숙(私淑)하며 실학 사상의 토대를 다졌다. 이익은 근기학파의 중심 인물이었고, 정약용이 어린 시절부터 이 학파의 개혁 이론에 접한 것은 훗날 그의 사상이 성숙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1776년 정약용은 무관 홍화보의 딸인 풍산 홍씨와 혼인했으며, 결혼 후 서울을 자주 오가며 성호 이익의 학문을 접할 수 있었다. 같은 해 부친이 다시 벼슬길에 올라 호조 좌랑이 되면서 서울에 거처를 마련했다. 1776년 4월 10일(음력 2월 22일)에는 승지로 명성이 높은 이가환과 매부 이승훈을 만났다. 이가환은 이승훈의 외삼촌이자 성호 이익의 종손으로, 당시 이익의 학풍을 계승하는 중심 인물이었다. 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정약용은 이익의 유서를 공부하게 되었고, 이는 그가 훗날 근기학파의 실학적 이론을 완성하는 인물로 평가받는 계기가 되었다.
1777년(15세)에는 화순 현감이 된 아버지를 따라 화순현 북쪽 동림사에서 형 정약전과 함께 서책 학습에 매진했다. 1780년(18세)에는 부친이 경상도 예천군수로 부임하자 예천에서 살았다. 1782년 서울에 정착한 후 과거 공부에 전념하여 1783년 세자 책봉 경축 증광시에 합격하고 회시로 생원이 되었다. 22세에는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갔으며, 매달 치르는 시험과 열흘마다 치르는 순시(旬試)에서 매번 높은 성적으로 뽑혀 책과 종이, 붓을 상으로 하사받으며 정조의 총애를 받기 시작했다.


2. 관직 생활 및 정치 활동
정약용은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관직에 진출하여 다양한 개혁 활동에 참여했으나, 정치적 모함과 천주교 관련 사건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2.1. 과거 급제와 관직 진출
1789년(정조 13년), 27세 되던 해에 대과에 급제하며 관직에 진출했다. 그는 규장각에서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학문에 정진했고, 한강에 배와 뗏목을 잇대어 매고 그 위에 널빤지를 깔아 배다리를 만드는 등 실용적인 재능을 보이기도 했다. 1791년 신해박해 당시 공서파의 모함으로 인해 서산 해미에 유배되었으나, 정조의 배려로 11일 만에 풀려났다. 이후 사간원과 홍문관의 요직을 역임하며 승승장구했다.
2.2. 정조와의 관계 및 왕실 봉사
정약용과 정조의 관계는 매우 돈독했다. 정조는 1784년 정약용의 답변에 깊은 인상을 받은 이후 그를 신뢰하기 시작했다. 채제공이 1788년 영의정에 임명된 후, 1789년 정약용은 대과에서 수석을 차지하며 규장각에 발탁되었고, 이는 남인 세력의 부상과 함께 노론 벽파의 경계를 샀다.
정약용은 정조의 명을 받아 수원 화성 건설에 참여하여 그의 실용적인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1792년, 정조는 정약용이 설계한 배다리에 감명받아 그에게 화성 성벽 건설을 설계하고 감독하도록 명했다. 정약용은 유럽, 중국, 일본의 문헌을 참고하여 거중기와 같은 혁신적인 기술과 구조를 고안하여 공사 기간을 단축하고 막대한 비용을 절감했다. 그는 이 공사를 통해 4만 꿰미의 비용을 절약했다고 전해진다.

1794년 여러 차례 승진한 후, 정약용은 경기도 암행어사로 임명되어 부패 보고를 조사하는 등 왕실의 비밀 특사 역할을 수행했다. 1795년에는 사도세자 탄생 60주년을 맞아 정조가 사도세자에게 새로운 존호를 결정하는 중요한 임무를 도왔다. 이 과정에서 정약용은 정조의 뜻을 적극 지지하며 왕의 깊은 신뢰를 얻었으나, 노론 세력의 견제를 받아 잠시 조정에서 물러나 금정찰방으로 좌천되기도 했다.
2.3. 행정 및 지방 관리 경험
정약용은 지방 행정 경험을 통해 백성에 대한 애민 사상을 더욱 깊이 다졌다. 1795년 금정찰방으로 좌천된 후, 그는 그곳의 천주교 신자들에게 조상 제사를 지내도록 설득하는 등 천주교 배척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는 그가 천주교 교리 중 유교적 전통을 부정하는 측면을 비판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1796년 서울로 돌아와 다시 승진했으나, 서인들의 지속적인 모함으로 인해 황해도 곡산 부사로 자청하여 부임했다.
곡산 부사로 부임하기 전, 이계심의 난이라는 농업 노동자의 조세 저항 운동이 일어났다. 정약용은 생존권을 위협하는 조항 10여 조를 들고 직접 찾아온 이계심을 처벌하지 않고, 오히려 관리의 부패에 항의하는 자들에게는 천금을 주어야 한다고 말하며 그의 용기를 격려했다. 이는 정약용이 민중을 국가의 권위와 법으로 억누르기보다, 그들의 항의를 귀담아듣고 애민 정신으로 백성을 보살피는 목민관의 자세를 지녔음을 보여준다. 그는 1799년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었으나, 곧 탄핵을 받아 〈자명소(自明疏)〉를 올리고 사퇴했다.
3. 천주교와의 관계 및 박해
정약용은 학문적 호기심으로 천주교를 접했으나, 이는 훗날 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박해의 빌미가 되었다.
3.1. 천주학 입문 및 초기 교류
정약용은 1776년 이가환, 이승훈과의 만남을 통해 성호 이익의 학문에 연을 맺었다. 자연스럽게 남인 소장파 학인들과 교류하게 되었고, 이들이 천주학과 서양 학문을 연구하는 데 깊이 관여하면서 정약용도 이를 접하게 되었다. 권철신이 주도하여 1777년과 1779년 경기도 양주의 주어사와 천진암을 오가며 서학 교리 강습회를 열었는데, 정약용은 이벽, 정약전, 권일신, 이가환, 이기양, 이승훈 등과 함께 이 모임에 참여했다. 이 시기에 학문적 호기심으로 서양 학문과 함께 천주학을 접하게 되었다.
1784년 4월, 정약용은 큰형수 제사에 참여했다가 귀경하면서 큰형 정약현의 처남 이벽으로부터 천주교 교리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천지창조의 기원, 영혼과 육신, 생사의 이치에 관한 이벽의 설명에 깊이 매료되어 천주교 관련 서적을 탐독하며 심취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천주교와의 인연은 훗날 그에게 많은 고초를 안기는 악연이 되었다. 그는 20대 초반에 서학에 매혹되었으나, 이후 제사 폐지 주장과 부딪혀 천주학에 손을 끊었다고 고백했음에도 불구하고 천주교 관련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오해를 받았다.
3.2. 박해 사건과 그 영향
정약용은 1784년 이벽에게서 세례를 받은 후 천주교인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귀국한 이승훈이 서울 명동의 역관 김범우의 집에서 신앙 모임인 '명례방 공동체'를 운영했는데, 정약용도 이 모임에 참석했다. 그러던 중 1785년 초 이 비밀 모임이 포졸들에게 발각되어 형조에 끌려가는 명례방 사건이 발생했다. 다행히 중인 신분인 역관 김범우만 투옥되고 정약용을 비롯한 양반 출신들은 모두 석방되었다. 그러나 김범우는 유배지에서 사망하고, 이벽은 부친과의 갈등 끝에 식음을 전폐하다 사망했다. 이승훈은 가문의 압박으로 배교했으며, 모임의 주축이었던 양반 출신들이 떠나자 '명례방 공동체'는 와해되었다. 이때 정약용도 일시적으로 배교했으나, 훗날 천주교인들과 은밀하게 교제를 재개했다.
1787년(정조 11년) 10월경, 정약용은 이승훈, 강이원 등과 함께 반촌의 김석태 집에서 은밀히 천주교 서적을 연구하고 토론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홍낙안 등 척사유생들의 상소가 잇따랐다. 당사자들에게 직접적인 처벌은 내려지지 않았으나, 천주학 도서의 도입과 유포가 문제되어 조정에서 그 폐해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당시 조선에는 한글로 번역된 천주교 서적이 목판으로 간행되어 저렴한 가격에 팔리고 있었고, 충청도 산골 마을에까지 보급되어 있었다. 1788년 8월 이경명이 서학 엄벌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자 정조는 천주교를 사교(邪敎)로 규정하고 금령을 내렸으며, 전국에 천주교 관련 서학 서적을 색출하고 소각하는 조처를 내렸다. 반회 사건 직후 부친 정재원은 자식들에게 천주학을 멀리하라고 명했고, 정약용과 정약전은 이를 따랐으나 정약종은 천주학에 대한 열정을 버리지 못했다.
1791년, 전라도 진산에서 윤지충이 모친상을 천주교식으로 치르고 제사를 폐함으로 인해 사회적으로 큰 충격을 준 진산 사건이 발생했다. 윤지충은 정약용의 외가 쪽 친척이었기에 정약용의 집안도 큰 충격에 휩싸였다. 조상 제사 거부는 유학의 핵심인 '효'를 부정하는 일로, 이는 곧 나라의 어버이인 왕에 대한 '충'을 부정하는 행위로 간주되어 유교 이념으로 지탱되던 조선의 지배 체제 자체를 부정하고 도전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윤지충과 그의 행위에 동조한 외사촌 권상연은 참수당했고, 평택 현감으로 있던 정약용의 매부 이승훈은 삭탈관직 당했다.
그동안 정조는 천주교를 일시적인 종교 현상으로 이해하여 묵인하는 온건한 정책을 펼쳤었다. 그러나 이번 사건에서는 극형을 명하고 홍문관에 소장되어 있던 서양 서적을 소각하여 불온한 서양 사상의 전파를 차단하는 단호한 조치를 취했다. 서인들은 윤지충이 남인이었던 관계로 이 사건을 정쟁화하며 증폭시켰고, 남인들조차 공서파와 신서파로 분열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정약용은 천주교와 관계를 완전히 청산했다고 밝혔으나, 윤지충과 친척이었던 관계로 서인들로부터 지속적인 공격을 받았다. 둘째 형 정약전도 이번 사건 직후 배교했으나, 셋째 형 정약종은 반회 사건과 신해박해로 전국이 소란스러웠는데도 불구하고 천주교에 대한 열정이 변함없어 교리에 따라 제사 참여를 거부하며 가족과 갈등하다가 처자식을 데리고 한강 건너 양근의 분원으로 이사 가기도 했다.
1795년 6월, 포도청이 밀입국 후 은밀히 활동하던 중국인 선교사 주문모를 체포하는 데 실패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관련자들이 체포되어 선교사의 도피처를 추궁받았으나, 이들은 끝까지 함구하며 모진 고문 끝에 옥사했다. 사건은 조용히 지나가는 듯했으나, 두 달 뒤 대사헌 권유가 포도대장의 경솔함과 사건 은폐 의혹을 제기하며 상소를 올리자 조정이 다시 시끄러워졌다. 부사과 박장설이 이승훈, 이가환, 정약용이 주문모 도주 사건에 연루되었다고 의혹을 제기하자 이들을 성토하는 상소가 연이어 올라왔다. 노론 벽파의 공세가 빗발치자 정조는 결국 1795년 7월 25일 이승훈을 예산으로 유배 보내고, 이가환은 충주 목사로, 정약용은 충청남도 홍주 금정찰방으로 좌천시켰다. 당시 충청 지역에 천주교 교세가 크게 성장하고 있던 터라, 정조는 이들을 이 지역으로 보내 교세 확산을 막음으로써 천주교에 심취했던 과오를 속죄하고 지방 좌천을 통해 노론 공격의 예봉도 차단하려 했다. 정약용은 무려 7품계나 떨어지며 체면을 구겼으나, 금정에서 교세 저지를 위해 펼친 노력은 실효를 거두었고 충청 지역 천주교계의 거물인 이존창을 체포하는 공도 세웠다.
1800년 여름, 정조가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어린 순조의 섭정을 맡은 정순왕후가 1801년 음력 1월 10일 천주교 탄압령을 내리며 남인에 대한 숙청 작업을 시작했다. 정순왕후는 과거 사도세자 제거에 앞장섰던 전력이 있어 정조의 즉위를 반대했었고, 정조 즉위 후 오라비 김귀주가 귀양지에서 사망하는 등 정조와는 원수지간이었다. 정순왕후의 목표는 정조 때 성장한 남인을 몰아내고 재기하지 못하도록 박멸하는 것이었다. 남인들이 서학에 관심을 두고 천주교에 가까운 자가 많았으니, 이는 좋은 명분이 되었다.
노론 벽파의 최우선 목표는 정조의 총애를 받던 이가환, 권철신, 정약용 세 사람을 제거하는 데 있었다. 이가환과 권철신은 남인을 이끌고 있었고, 정약용은 남인을 이끌 차세대 젊은 주자였기 때문이다. 특히 이가환은 경신환국 때부터 이어진 노론 벽파와의 악연 때문에 반드시 죽여야 할 인물로 여겨졌다. 이가환과 권철신은 모진 고문 끝에 옥사했다.
정약용은 1801년 2월 8일 전격적으로 체포되어 옥에 갇혔다. 국문장에서 그는 단지 학문적 관심으로 천주교를 접했을 뿐이며, 이미 1791년 신해박해 이후 천주교와 결별했다고 자신을 변호했다. 그는 1797년 천주교도로 오해받자 『자명소』를 써서 반박했고, 1799년에는 『책사방략』을 저술하여 배교를 분명히 한 적이 있었다. 또한 '동부승지 사직 상소'에서도 배교했음을 밝힌 바 있었다. 이번 국문 중에도 적극적으로 자신을 변론하며 천주교 지도자인 권철신, 황사영 등을 고발하기도 했다. 심지어 천주교 신도를 색출하려면 믿음이 약한 노비나 학동을 신문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으나, 자신의 구명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자 체념했다.
조선인 최초로 세례를 받은 후 천주교 선교 활동을 주도했던 이승훈은 정약용의 매형이었고, 천주교 교리 연구회장인 정약종은 셋째 형이며, 지난번 진산 사건(1791년)을 일으킨 윤지충은 외사촌 형이었기에 정약용은 궁지에 몰려 있었다. 그러나 잡혀온 여러 신자들의 국문이 거듭될수록 정약용의 배교가 명백한 사실임을 증명하는 증거들이 쏟아져 나왔다. 분명한 물증들로 인해 정약용과 정약전은 구속된 지 18일 만에 유배로 감형된 후 석방되었다.
황사영 백서 사건은 정약용의 추가 유배를 확정 지었다. 정약용의 누이동생과 결혼한 황사영은 1801년의 박해 상황을 상세히 기록한 편지(비단에 쓴 백서)를 북경 주교에게 보내, 서양 국가들이 조선에 군함과 병력을 보내 조선 정부를 전복하고 조선을 천주교가 허용되는 중국에 종속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이 편지를 운반하던 사람이 잡히면서 그 내용이 공개되었고, 이는 천주교 박해를 더욱 심화시켰다. 정약용과 그의 동생 정약전이 천주교 신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하지 않았다면 그들 역시 처형되었을 것이다. 대신 그들은 함께 유배되었고, 나주에서 헤어져 정약전은 흑산도로, 정약용은 강진으로 향했다.
4. 유배 생활과 학문 심화
정약용은 18년간의 유배 생활 동안 고난을 겪으면서도 학문적 성취를 이루고 방대한 저술 활동을 펼쳤다.
4.1. 유배지에서의 삶과 저술
정약용의 유배 생활은 1801년 12월 28일 강진에 도착하면서 시작되었다. 처음 강진에 도착했을 때 그는 돈도 친구도 없이 가난한 과부가 운영하는 허름한 주막의 뒷방에 기거했다. 그는 이 방을 '사의재(四宜齋)'라 부르며 맑은 생각, 단정한 용모, 조용한 말씨, 성실한 행동이라는 네 가지 의무를 다짐했다. 1805년까지 이곳에서 생활하며 만성적인 소화 불량에 시달리는 등 건강이 좋지 않았다.
1805년 정순왕후가 사망하고 어린 순조가 친정을 시작하면서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완화되었다. 이로써 정약용은 강진 지역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게 되었고, 같은 해 봄 백련사의 주지인 혜장 스님을 만나 깊은 교류를 시작했다. 혜장 스님의 도움으로 정약용은 주막을 떠나 고성사 인근의 작은 암자인 보은산방에서 약 1년간 지냈다. 1808년 봄에는 어머니의 먼 친척 소유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는데, 이곳이 바로 오늘날 '다산초당'으로 알려진 곳이다. 강진과 그 너머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위치한 이 소박한 초가집에서 정약용은 남은 10년간의 유배 생활을 보냈다. 이곳의 뒷산은 '다산(茶山)'으로 불렸고, 이는 훗날 그의 가장 잘 알려진 호가 되었다. 다산초당에서 그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천 권이 넘는 장서를 쌓아두고 학문에 정진하며 방대한 저술 활동을 펼쳤다.
정약용은 유배 기간 동안 500여 권의 책을 저술했다고 전해진다. 이는 한 '작품'이 수십 권에 달하는 경우도 있었음을 감안하더라도, 약 14,000쪽에 달하는 방대한 양으로, 주로 유교적 이상에 따라 나라를 올바르게 다스리기 위한 근본적인 개혁 프로그램을 명확히 제시하는 데 집중했다. 유배 초기에는 『주역』 연구에 몰두하여 1805년 『주역사전』을 저술했고, 1809년에는 『시경』에 대한 연구를 이어갔다. 그는 정치, 윤리, 경제, 자연과학, 의학, 음악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저술했다. 유배에서 풀려난 후에는 법률에 관한 『흠흠신서』(1819), 언어학에 관한 『아언각비』(1819), 외교에 관한 『사대고례산보』(1820), 통치술에 관한 『목민심서』, 행정에 관한 『경세유표』(1822) 등 그의 가장 중요한 저서들을 출판했다.
정약용은 1818년 가을 유배에서 풀려나 서울 근교의 고향 집으로 돌아왔다. 정부에 복귀하려는 시도는 붕당정치로 인해 좌절되었다. 그는 '여유당(與猶堂)'을 마지막 호로 삼았는데, 이는 그가 한강 근처에서 조용히 살다가 1836년 60번째 결혼기념일에 사망한 고향 집의 이름이었다. 그의 생애에 대한 주요 자료는 그 자신이 쓴 두 가지 버전의 묘비명인 『자찬묘지명』과 그의 증손자 정규영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기록들을 바탕으로 편찬한 연보 『사암선생연보』이다.
5. 사상과 철학
정약용은 실학 사상을 집대성하며 다양한 분야에서 혁신적인 사상과 철학을 제시했다.
5.1. 실학과 경세론
정약용은 조선 중기 이후의 주자학적 사유를 종합하는 데 주력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한대 이후 오도된 유학을 거부하고 공자, 맹자의 수사학(洙泗學)으로 돌아가 유학의 본질을 파헤쳐 후대에 의해 왜곡되고 날조된 이론을 바로잡으려 했다. 그는 이러한 고전으로의 회귀를 공자의 고향을 흐르는 두 강을 지칭하는 '수사(洙泗)의 학문'이라 불렀다. 그는 당시 학자들이 무익한 어원학적 연구나 철학 이론 자체에만 몰두하는 현실을 개탄하며, 학문이 음악, 예법, 법률과 같은 더 중요한 문제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지적인 주장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주장이기도 했는데, 그는 관직 진출을 위한 과거 시험이 이러한 문제들에 초점을 맞춰 개혁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정약용은 『목민심서』를 비롯한 여러 분야의 저서를 출판했다. 그는 선량한 유교 사상가로서 정부가 빈곤 문제 해결에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를 위해 그는 지방 목민관들이 청렴하고 공정하게 행동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의 대표작인 『경세유표』(원제 『방례초본』)는 국가 경영의 청사진을 제시하는 그의 사상을 담고 있으며, 그는 '예(禮)'의 개념을 자신의 사상적 목표를 나타내는 데 광범위하게 사용했다. 그는 이 개념을 선정의 개념에 집중시켰고, 훗날 그의 고전 연구와 자연과학 저술로 확장시켰다.
5.2. 목민 사상과 통치 철학
정약용의 목민 사상은 지방관의 역할과 백성을 위한 이상적인 통치 이념을 담고 있다. 그는 지방관이 청렴하고 애민 정신을 바탕으로 백성을 다스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의 『목민심서』는 지방 목민관의 치민(治民)에 관한 요령과 귀감이 될 만한 마음가짐과 태도 등을 상세히 저술한 책이다.
그는 제사 의례에 대한 독자적인 이론을 제시하며 덕치와 의로운 통치를 추구하는 사회정치적 관심을 드러냈다. 그는 사람들이 인간의 도리를 일상적으로 실천하도록 동기를 부여하고, 예를 기반으로 하는 조선 후기 전통 사회를 효과적으로 활성화하고자 했다. 『목민심서』에서 정약용은 제사 의례에 초점을 맞춘 의례 실천의 인지 과정을 다음과 같이 공식화했다.
- 의례 대상에 대한 인지는 인지 과정에서 의례 대상에 대한 의도적인 마음의 움직임을 불러일으킨다.
- 마음의 의도성은 의례 과정에서 경건함과 정화를 수반한다. 의례 실천은 성(誠)과 경(敬)을 통해 의미를 가진다.
정약용은 자신의 인지적 공식에 따라 사대부들의 과도한 의례 실천을 규제하고, 민간의 음사(淫祀)를 제한하고자 했다. 그의 관점에서 유교 학자들의 의례 개념은 부적절하거나 비실용적이었고, 민간의 음사는 불경하고 지나치게 열광적이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주희의 '경(敬)' 개념을 '의도적 경건주의'로서의 '신중한 경건함'으로 재정의했다. 주희의 경 개념이 선불교적 정적주의와 같은 신비주의를 포함하는 반면, 정약용의 경 개념은 관조를 통한 적극적인 행동주의에 가깝다.
5.3. 토지 제도 및 경제 사상
토지 개혁은 실학 개혁가들에게 중요한 문제였으며, 정약용은 유형원의 토지 개혁 제안을 발전시켰다. 그는 중앙 국가 소유보다는 '촌락 토지 제도'를 제안했는데, 이는 촌락이 토지를 공동으로 소유하고 전체적으로 경작하며, 토지 생산물은 기여한 노동량에 따라 분배하는 방식이었다.
정약용은 중농주의 실학자로서 토지의 무상 분배, 공동 노동-공동 분배를 통해 토지 불평등을 개선하고자 하는 사회주의적 토지 정책인 여전론과 정전론을 상상하며 조선 실학을 집대성했다.
- 정전론: 토지를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나누어 총 9구역의 땅을 만들고, 이 중 8구역은 8명의 농민에게 나누어주어 농사를 짓도록 하며, 나머지 1구역은 공동 노동을 하여 국가 공동체의 복리를 위한 비용인 세금을 내도록 하자는 것이다.
- 여전론: 여(閭)를 단위로 농민들이 공동 노동하고 공동 분배하는 사회주의적 토지 정책이다. 이는 농민들이 공동으로 노동하고, 농업 노동자가 일한 만큼 나누어주는 토지 불평등 해소 정책으로, 현재 북한과 같은 토지 정책과는 다르다. 정약용 선생이 자신의 사회주의 사상을 실천하기 위한 점진적인 방법으로 1819년 전라도 강진군 유배지에서 구상한 것이 정전론이다.
정약용은 평등하고 청렴한 경제(공렴, 公廉)를 통해 불평등하고 부패한 경제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부자의 것을 덜어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손부익빈(損富益貧)으로써 소득 불평등을 해소하고자 했다. 또한 사회경제적 약자들을 4대 궁인(홀아비, 과부, 고아, 독거노인), 노약자, 어린이, 초상을 당한 사람, 질병을 앓는 환자, 재난 피해자 등으로 분류하여 사회와 국가가 애민 사상으로 이들을 배려함으로써 조선이 복지 국가가 되기를 바랐다.
5.4. 예론과 제사 문화
정약용의 예론은 그의 통치 철학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는 『경세유표』의 원제목이 『방례초본(邦禮草本)』이었을 만큼 예(禮)를 국가 경영의 중요한 요소로 보았다. 그는 예가 단순한 형식적 의례가 아니라,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백성을 교화하며 선정을 구현하는 핵심적인 수단이라고 보았다.
특히 제사 문화에 대해 그는 당시 지배적이었던 주자학의 해석을 비판하며, 지나치게 번잡하거나 미신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본질적인 경건함과 정성을 강조했다. 그는 제사가 조상에 대한 진정한 공경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어야 하며, 사회적 위계와 덕목을 확립하는 데 기여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는 당시 천주교의 제사 거부 문제와도 맞물려 그의 사상적 입장을 더욱 분명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5.5. 과학 기술 및 실용 학문
정약용은 과학 기술과 실용 학문 분야에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그는 수원 화성 건축 당시 기중가설(起重架說)에 따른 활차녹로(滑車轆轤, 도르래)를 만들고 이를 이용해 거중기를 고안하여 공사 효율을 획기적으로 높였다.
의학 분야에서는 어린 시절 자신이 앓았던 천연두를 치료한 명의 이헌길의 『마진기방』을 바탕으로 한층 발전된 홍역 치료서 『마과회통』을 집필했다. 이 책은 현대 의학이 도입되기 전까지 수많은 조선인의 생명을 구하는 데 기여했으며, 정약용은 이헌길의 생애를 다룬 『몽수전』을 집필하기도 했다. 이처럼 그는 건축, 의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실용적인 학문에 깊은 관심을 보이며 실제적인 문제 해결에 기여하고자 했다. 그의 문집인 『여유당전서』에는 이러한 실용 학문에 대한 그의 깊은 통찰이 담겨 있다.
6. 개인적인 삶과 가족
정약용의 개인적인 삶은 유배와 박해로 인한 고난 속에서도 가족에 대한 깊은 사랑과 학문적 열정을 잃지 않은 모습으로 특징지어진다.
6.1. 결혼과 자녀
정약용은 1776년 2월 22일 무관 홍화보의 딸인 풍산 홍씨와 혼인했다. 장인 홍화보는 몸은 마르고 키는 작았으나 용맹스러운 무신으로 호탕한 성품에 병법에 밝았다고 전해진다. 그는 1771년 황해도 장연부사로 있으면서 병영을 설치하여 청나라 해적선 퇴치에 공을 세웠고, 1775년에는 무인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승지에 제수되었으며, 1780년에는 영남우도 병마절도사를 지내기도 했다. 이러한 장인의 영향은 정약용이 『아방비어고』 등 병서를 저술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정약용과 풍산 홍씨는 10번의 잉태를 통해 6남 3녀를 두었으나, 첫 잉태 시 유산하고 4남 2녀가 요절했다. 요절한 자녀들은 대부분 천연두로 사망했다. 특히 1801년 신유박해로 강진에 유배되었을 때 어린 아들 농아(農兒, 아명 농장)가 병으로 죽는 비극을 겪었다. 정약용은 강진이 바다와 마주하는 지역이었기에 아들에게 소라 껍질을 보내며 소통했는데, 아들의 임종을 지키지 못하고 떠나보낸 일에 매우 마음 아파했다. 아들이 죽음을 전해 들은 날은 공교롭게도 농아의 생일이었다. 그는 아들의 묘지명을 직접 지어 농아 엄마에게 들은 이야기, 붕당정치를 벗어나 농사를 지으며 소박하게 살라고 '농아'라는 이름을 지어준 이야기, 소라 껍질을 보낸 이야기 등을 담았다. 또한 아들 정학연, 정학유에게 편지를 보내 이전에 죽은 아들들은 임종이라도 지켰지만, 농아는 그렇지 못해 마음이 아프며, 아내가 마음 아파할 테니 잘 돌볼 것을 부탁했다.
6.2. 후손 및 가계의 지속
정약용이 유배되었을 때 그의 직계 자손들은 다시 과거 시험을 보거나 관직에 진출할 수 없는 '폐족(廢族)'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손자 시대에 이르러 직계 자손들이 과거에 급제하거나 관직에 나아가 폐족 신세를 면할 수 있었다. 진사에 합격하고 단양군수를 역임한 손자 정대림, 참봉을 거쳐 삼척부사를 지낸 손자 정대무, 문과 과거에 급제하고 비서원승을 지낸 증손자 정문섭 등이 대표적이다.
현대에 이르러 배우 정해인이 정약용의 직계 6대손으로 알려져 그의 가계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7. 말년과 죽음
정약용은 긴 유배 생활에서 풀려난 후에도 정치적 재기보다는 학문에 전념하며 조용히 말년을 보냈다.
1818년(순조 18년) 음력 5월, 정약용은 18년간의 유배에서 풀려나 승지(承旨)에 올랐으나, 음력 8월 고향으로 돌아왔다. 유배에서 풀려난 후에도 그를 다시 정부 요직에 기용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붕당정치로 인해 번번이 좌절되었다. 그는 고향인 마현리 자택에서 '여유당'이라는 당호를 사용하며 조용히 학문에 몰두했다.
정약용은 혼인 60주년인 회혼일 아침인 1836년 2월 22일(음력 1월 28일) 마현리 자택에서 별세했다. 그가 남긴 마지막 시는 〈회혼시〉였다. 정약용은 죽기 전 자녀들에게 "한양을 벗어나는 순간 기회는 사라지니 무슨 일이 있어도 한양에서 버텨라"고 신신당부했다고 전해진다. 이는 자손들이 정치적 중심지에서 벗어나지 않고 학문과 관직을 통해 가문을 일으키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긴 유언이었다.
그의 사후 1910년(융희 4년) 7월 18일, 대한제국은 그를 정헌대부 규장각 제학으로 추증하고 '문도(文度)'라는 시호를 내렸다.
8. 평가와 영향
정약용은 조선 후기 학문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사상은 오늘날까지도 깊은 통찰을 제공한다.
8.1. 학문적 평가와 업적
정약용은 유형원, 성호 이익을 통해 내려온 실학 사상을 한 몸으로 집대성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성리학, 천문, 지리, 역상(曆象), 산학(算學), 의복(醫卜) 등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저술을 남겼다. 특히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는 그의 '다산학'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사회, 경제, 사상의 총괄 편으로, 정밀하고 박식하며 명확하고 탁월한 견해를 담고 있다.
그는 당시 주자학을 절대시하여 이기설, 예론 등의 논쟁에만 몰두하던 학계의 현실을 개탄하고, 보다 참되고 가치 있는 경세치용의 실학을 건설하기 위해 한대 이후 오도된 유학을 거부하고 공자, 맹자의 수사학(洙泗學)으로 돌아가 유학의 본질을 파헤쳐 후인에 의해 왜곡되고 날조된 이론을 바로잡으려 했다. 그는 천(天)을 유형천(有形天)과 주재천(主宰天), 역리천(易理天)으로 구분하고 주재천에 대한 신앙을 강조했다. 또한 주자의 천리설과 이기설을 부정하고 천명이 도심(道心)에 있다는 입장을 취했다.
인성론(人性論)에서는 인간의 본성이 기호(嗜好)라는 성기호설을 주장하며, 사람에게 도의지성(道義之性)과 금수지성(禽獸之性)의 양성(兩性)이 있음을 밝혀 이들 양자 간의 갈등을 인정했다. 인물성동이논변에서는 한원진의 인물성이(人物性異)를 지지하면서도 기질(氣質)의 성은 같되 본연의 성은 다르다는 새로운 입장을 취하고, 주자학의 기질지성청탁수박설(氣質之性淸濁粹駁設)을 부정했다. 그는 주자의 이기론을 전면 거부하고 공자, 맹자의 양기설(養氣說)을 다시 주장하며 이를 목민 사상과 연결 지었다.
정약용은 역리(易理)의 성립 과정을 합리적, 과학적으로 해명하여 음양 64괘 등을 미신적인 교리로 보는 데 반대했다. 성인(聖人)을 신격화하는 데 반대하고, 인간은 누구나 성(誠)을 다하면 성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공자의 충서(忠恕), 효제(孝悌) 이외에 자(慈)를 강조하여 윗사람의 아랫사람에 대한 의무와 사명을 강조했다. 성정중화론(性情中和論)에 근거하여 예악중화론(禮樂中和論)을 전개하고 원시 유교의 왕도(王道) 사상을 강조했다.
요컨대 정약용은 한나라 이후 유학의 병폐와 타락을 성리, 훈고, 문장, 과거, 술수 등 다섯 가지로 지적하고, 공자에게로 돌아가 보다 합리적이고 건전하며 실제적인 신유학을 건설하여 조선 봉건 사회의 모순을 극복하려 한 주체적이고 혁명적인 사상가였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의 오가와 하루히사 니쇼가쿠샤 대학 교수는 정약용에 대해 "그는 평등주의적 사상 외에도 당시 잃어버렸던 소중한 것을 제공했다. 현대에도 우리가 배우고 되살려야 할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그는 유배 생활의 고통 속에서도 자신의 철학을 형성했다. 나는 그가 오랫동안 현대 학자들에게 흥미로운 인물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평가했다. 중국 칭화 대학의 펑린 교수는 정약용의 의례 연구에 특별한 관심을 보이며, "다산은 의례 연구에 큰 노력을 기울여 전통 문화를 이해하고 인정받게 했다. 그의 의례 연구는 매우 독특하다. 그는 의례 연구의 세 분야를 모두 연구했는데, 이는 중국 학자들 사이에서도 흔치 않은 일이었다. 많은 이들이 평생 연구해도 부분적인 이해만 얻을 수 있지만, 다산은 모든 의례 분야를 연구했고 그의 연구는 참으로 놀랍다. 그는 이미 존재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고자 했다. 이는 다산의 인본주의적 관심을 보여주며 나를 매료시킨다"고 말했다.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대학교 아시아 센터의 돈 베이커 교수는 전환기 지식인으로서의 정약용 역할에 관심을 가지며, "21세기에도 우리는 다산의 정신, 즉 도덕적 실용주의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매우 실용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문제들을 보고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라고 물었다. 그러나 그는 항상 도덕적 가치를 최우선으로 두었다. 우리는 종종 사회에서 물질적 발전을 위한 물질적 발전을 추구한다. 다산은 물질적 발전을 원했지만, 더 도덕적인 사회를 만드는 발전을 원했기에 나는 그것을 도덕적 실용주의라고 부르며, 오늘날에도 그러한 정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언급했다.
8.2. 사회 및 문화적 영향
정약용은 조선 근대 공학의 기반을 마련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의 사상이 급속도로 붕괴해 가던 조선 사회에 즉시 적용되지는 못했지만, 그는 조선조 학계에 전개된 진보적인 신학풍을 한 몸으로 총괄, 정리하여 집대성한 실학파의 대표 인물이다. 일찍이 위당 정인보는 "선생(다산) 1인에 대한 연구는 곧 조선사의 연구요, 조선 근세사상의 연구요, 조선 심혼(心魂)의 명예(明銳) 내지 전조선 성쇠존망에 대한 연구"라고까지 평하며 그의 학문과 저술에 대한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
정약용은 일본의 이토 진사이, 오규 소라이, 다자이 슌다이와 같은 유학자들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그는 왜구나 임진왜란 등으로 조선에 큰 위협이었던 일본이지만, 이들의 경설을 보면 논의는 불충분하지만 '문(文)'을 갖추고 있어 앞으로는 이전과 같은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다. 또한 일본이 중국 강남에서 직접 양서를 구매하고 과거의 폐해가 없어 문학이 조선을 훨씬 능가한다고까지 언급하며 일본의 학문적 성취를 인정했다.
정약용의 사상은 장자크 루소의 사회 계약론과 유사한 "지도자는 백성이 선택한다"는 주장을 담고 있어 현대적인 민주주의 사상과도 연결된다. 그의 토지 개혁론과 사회경제적 불평등 해소 노력, 복지 국가에 대한 구상은 현대 사회의 문제 해결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8.3. 비판과 논쟁
정약용은 방대한 저술을 남겼으나 대부분을 한문으로 썼으며, 가족과 주고받은 편지도 한문을 사용했다. 국어교육학 박사인 김슬옹은 정약용이 철저히 한글을 외면했음을 지적하며, 사상의 위대함이 표현과 소통의 위대함으로 이어지지 못한 점을 아쉬워했다. 또한 정약용 역시 성리학과 실학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양반 사대부였음을 비판하기도 했다.
20세기 초반까지도 노론계 인사들은 남인에 속하는 정약용에 대한 증오와 적개심을 유지했고 그를 혐오했다. 한국에 서점의 개념이 도입된 1890년대 이후, 자유롭게 책을 사서 읽을 수 있었음에도 그의 저술들을 외면했으며, 윤치호는 노론계 인사들이 그의 책을 읽지도 사지도 않는다고 지적한 바 있다.
9. 기념 및 유산
정약용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다양한 기념 사업과 유적지가 존재한다.
정약용은 '2012년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로 장자크 루소와 헤르만 헤세와 함께 선정되었다. 2012년이 다산 정약용 탄생 250주년이 되는 해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유네스코는 2004년부터 유네스코가 추구하는 이념과 가치가 일치하는 역사적 사건과 인물, 명사의 기념일을 유네스코 연관 기념행사로 선정하여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다. 그의 생가터와 실학박물관 등 정약용 유적지가 남양주시에 잘 조성되어 있어 오늘날에도 그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다.
10. 저서
정약용은 한자가 생긴 이래 가장 많은 책을 저술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저술한 500여 권의 책 중에 이른바 '1표 2서'라 불리는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는 정약용의 주요 저서로 꼽힌다.
10.1. 3대 저서
- 『목민심서』: 백성을 다스리는 지방 목민관(牧民官, 수령)의 치민(治民)에 관한 요령과 감계(鑑戒)가 될 만한 마음가짐과 태도 등을 저술한 책이다.

- 『흠흠신서』: 곡산부사로 재직할 때 실제 수사했던 사건들을 바탕으로 서술한 판결과 형벌 및 치옥(治獄)에 대한 주의와 규범에 관한 책으로 사람의 생명에 관한 일을 가벼이 처리하지 않도록 유의할 점을 적었다.

- 『경세유표』: 관제·군현제와 전제(田制)·부역·공시(貢市)·창저(倉儲)·군제·과거제·해세(海稅)·상세(商稅)·마정(馬政)·선법(船法) 등 국가 경영에 관한 일체의 제도 법규에 대하여 적절하고도 준칙(準則)이 될 만한 것을 논정(論定)한 책이다.

10.2. 기타 저서
-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 정약용이 회갑을 맞던 해 자신이 직접 쓴 자신의 일대기이다.
- 『맹자요의』
- 『춘추고징』
- 『상서고훈』
- 『매씨서평』
- 『주역사전』
- 『역학서언』
- 『대학공의』
- 『대학강의』
- 『중용자잠』
- 『중용강의』
- 『아언각비.이담속찬』
- 『문헌비고간오』
- 『소학주관』
- 『소학기언』
- 『심경밀험』
- 『상례사전』
- 『상례외편』
- 『상의절요』
- 『제례고정』
- 『의례문답』
- 『상례작의』
- 『악서고존』
- 『시경강의』
-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
- 『대동수경』
- 『풍수집의』
- 『마과회통』
- 『삼미자집(三眉子集)』: 정약용이 어릴 때 천연두를 앓았다가 나았는데, 그때 오른쪽 눈썹에 그 자국이 남아 눈썹이 셋으로 나뉘어 삼미(三眉)라 불렸다. 이 『삼미자집』은 정약용이 10세 이전에 지은 글을 모은 문집이다.
- 『아학편(兒學編)』
10.3. 편지 모음
다산 정약용 선생이 1801년부터 1818년까지 장기와 강진에서의 유배길에 올랐을 때에, 두 아들(학유, 학연)에게 보낸 편지, 부인이 결혼할 때에 입은 치마에 써내려간 시(하피첩), 딸에게 보낸 시화집을 창비에서 출판했다.(『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박석무 편역/창비)
10.4. 죽은 아들을 그리워한 글
다산 선생이 1801년 신유박해로 인해 전라남도 강진군으로 유배되었을 때에 아들인 농아가 어린 나이에 병으로 죽었다.
한국방송통신대학교에서 펴낸 『글과 생각』 교과서와 워크북에 실린 다산의 기록에 따르면, 다산은 부인 사이에서 아들과 딸을 두었는데, 성년까지 자라지 못하고 죽은 자녀들도 있었다. 이 책에 구전문학을 전공한 박종성 교수의 해설과 함께 죽은 아들을 그리워하는 글이 실려 있다. 농아는 홍역과 천연두로 죽었는데, 전라남도 강진군이 바다와 마주하는 지역이므로 아들에게 소라껍질을 보내어 소통을 하던 다산으로서는 아들의 임종을 지키지도 못하고 떠나보낸 일이 매우 마음아픈 일이었다. 아들의 죽음을 전해 들은 그날은 공교롭게도 농아의 생일이었다.
그래서 아들의 묘지명을 농아 엄마에게 들은 이야기, 붕당정치를 벗어나 농사를 지으면서 소박하게 살라고 농아라고 이름을 지어준 이야기, 소라(객관적 상관물, 다산과 아드님의 소통을 뜻하는 상징물이다.)를 보낸 이야기(농아는 영리하게도 아빠가 소라껍질을 보낸 뜻을 알고 있어서 무척 반가워하고, 소라껍질이 오지 않으면 서운하게 여겼다고 한다.)를 써서 직접 지었으며, 아들 학유, 학연에게 편지를 보내어 이전에 죽은 아들들은 임종이라도 지켰지만, 농아는 그렇지 못해 마음이 아프며, 엄마가 마음이 아프실 테니 돌볼 것을 부탁했다.
11. 가계
- 조부: 정지해(丁志諧, 1712년 ~ 1756년), 자는 우경(虞卿)
- 조모: 풍산 홍씨(1712년 ~ 1753년), 홍길보(洪吉輔)의 딸
- 아버지: 정재원(丁載遠, 1730년 ~ 1792년), 자는 기백(器伯), 생원, 진주목사 역임
- 전모: 의령 남씨(1729년 ~ 1752년), 남하덕(南夏德)의 딸
- 이복형: 정약현(丁若鉉, 1751년 ~ 1821년): 자는 태현(太玄), 이벽(李檗, 1754~1786)의 누이와 혼인, 3남 6녀를 두었으며 맏딸 정난주(丁蘭珠, 아명 命連, 1773년 ~ 1848년)는 황사영 백서사건을 일으킨 황사영(黃嗣永, 1775년 ~ 1801년)과 결혼하여 아들 황경한(黃景漢)을 둠. 진사
- 생모: 해남 윤씨 윤소온(尹小溫, 1728년 ~ 1770년): 윤덕렬(尹德烈)의 딸, 윤두서의 손녀, 윤선도의 오대손녀
- 큰형: 정약전(丁若銓, 1758년 ~ 1816년): 자는 천전(天全), 물고기 이야기인 『자산어보』를 썼다.
- 작은형: 정약종(丁若鍾, 1760년 ~ 1801년): 자는 양중(養重), 신유박해 때 순교자로 장남 정철상(丁哲祥, ?∼1801년)도 같이 순교. 후처 유소사(柳召史, 세실리아, 1761년 ~ 1839년), 후처 소생 정하상(丁夏祥, 바오로, 1795년 ~ 1839년)과 정정혜(丁情惠, 1796년 ~ 1839년) 역시 기해박해로 순교.
- 본인: 정약용(丁若鏞)
- 부인: 풍산 홍씨(1761년 ~ 1839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를 지낸 홍화보의 딸과 1776년 4월 10일(음력 2월 22일)에 혼인하였다. 10번 잉태하여 첫 잉태 때 유산하고 6남 3녀를 낳았지만 4남 2녀가 요절하였는데 요절한 자녀들은 대부분은 천연두로 사망하였다.
- 장녀: 정씨(1781년 7월 ~ 1781년 7월), 4일 만에 사망
- 장남: 정학연(丁學淵, 1783년 9월 12일 ~ 1859년): 아명은 무장(武䍧) · 무아(武兒), 초명 후상(厚祥), 자는 치수(穉修)
- 손자: 정대림(丁大林, 1807년 5월 28일 ~ 1895년): 진사, 단양군수. 자는 사형(士衡)
- 증손자: 정문섭(丁文燮, 1855년 1월 20일 ~ 1908년 8월 15일): 문과 급제, 비서원승, 생부 정대무(丁大懋)
- 손녀: 정씨, 청풍 김씨 인물 김형묵(金亨默)에게 출가
- 손자: 정대림(丁大林, 1807년 5월 28일 ~ 1895년): 진사, 단양군수. 자는 사형(士衡)
- 차남: 정학유(丁學游, 1786년 7월 29일 ~ 1855년 2월 1일): 아명은 문장(文䍧) · 문아(文兒), 초명은 학상(學祥), 자는 치구(穉求)
- 며느리: 청송 심씨, 심오(沈澳)의 딸, 예조판서 심각(沈瑴)의 증손녀
- 손자: 정대무(丁大懋, 1824년 5월 18일 ~ ?): 참봉, 삼척부사. 자는 자원(子園)
- 손자며느리: 청송 심씨, 심동량(沈東亮)의 딸, 예조판서 심각(沈瑴)의 현손녀
- 손자: 정대번(丁大樊, 1833년 ~ ?), 통리군국사무아문 병무주사
- 손자: 정대초(丁大楚, 1835년 ~ 1904년)
- 손녀: 풍천 임씨, 임우상(任祐常)에게 출가
- 손녀: 해남 강씨, 강은주(姜恩周)에게 출가
- 삼남: 천연두로 사망(1789년 12월 25일 ~ 1791년 4월 2일), 아명은 구장(懼䍧) ·구악(懼岳)
- 차녀: 천연두로 사망(1792년 2월 27일 ~ 1794년 1월 1일), 아명은 효순(孝順) · 호동(好童)
- 삼녀: 정씨 (丁氏 1793년 ~ ?), 친구 윤서유(尹書有, 1764년 ~ 1821년)의 아들 윤창모(尹昌模, 1795년 ~ 1856년)와 1812년 혼인
- 사남: 천연두로 사망(1796년 11월 5일 ~ 1798년 9월 4일), 아명은 삼동(三童)
- 오남: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천연두로 사망(1798년 ~ 1798년)
- 육남: 천연두로 사망(1799년 12월 2일 ~ 1802년 11월 30일), 아명은 농장(農䍧) · 농아(農兒)
- 첩: 남당네, 유배 생활을 함께 한 첩으로 한시 『남당사』의 저자로 추정
- 서녀: 홍임
- 누이: 이승훈에게 출가
- 서모: 김씨 (金氏, 1754년 ~ 1813년): 생모 해남 윤씨 별세 후 정재원의 소실로 들어와 정약용 형제를 양육함.
- 이복 동생: 정약횡(丁若鐄, 1785년 ~ 1829년): 자는 규황(奎黃)
- 이복 누이: 채홍근(蔡弘謹)에게 출가
- 이복 누이: 이중식(李重植)에게 출가
- 숙부: 정재운(丁載運): 할아버지의 아우인 정지열(丁志說)의 양자로 출계
- 숙부: 정재진(丁載進)
12. 관련 항목
- 정약전
- 정약종
- 정조
- 수원 화성
- 거중기
- 실학
- 목민심서
- 경세유표
- 흠흠신서
- 신유박해
- 황사영 백서 사건
- 이벽
- 권철신
- 이승훈
- 윤지충
- 남인
- 노론
- 정순왕후
- 정해인
- 홍국영
- 심환지
- 심각
- 심대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