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장손무기(長孫無忌중국어, 594년 ~ 659년)는 중국 당나라 초기의 저명한 정치가이자 재상으로, 자는 보기(輔機보기중국어)이며, 사후에는 조공(趙公)으로 불렸다. 그는 이세민의 황후인 장손황후의 오빠이자 이치의 외삼촌으로, 당 황실의 외척으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장손무기는 이연의 통치 시기부터 이세민의 핵심 참모로 활동하며 현무문의 변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여 이세민이 황위에 오르는 데 기여했다.
태종 시대에는 재상으로서 법률 개혁(정관율)에 크게 공헌하고, 능연각 이십사 공신 중 첫 번째로 기록될 만큼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다. 특히 태종의 후계자 선정 과정에서 이치를 지지하며 그의 즉위를 도왔다. 고종 즉위 후에는 최고 고문이자 실질적인 섭정으로서 초기 정국을 안정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나, 점차 권력을 남용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특히 측천무후의 황후 책봉에 반대하면서 그녀의 세력과 갈등을 겪게 되었고, 결국 659년 허경종의 모함으로 유배된 후 자결을 강요받아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그의 죽음은 당 초기 정치사에 큰 파장을 일으켰으며, 사후에 명예가 회복되었다.
2. 초기 생애 및 가문 배경
장손무기는 594년에 태어났으며, 그의 여동생이자 훗날의 장손황후는 601년에 태어났으므로, 그는 여동생보다 나이가 많았다. 그는 하남성 낙양 출신으로, 명망 높은 하남 장손씨 가문의 일원이었다.
2.1. 조상과 가문
장손씨 가문은 선비족의 북위 황실 혈통인 탁발씨에서 유래했다. 그들의 조상은 태무제의 17대 조상인 탁발쾌립(拓拔儈立중국어)의 셋째 아들로, 원래 성씨는 발발씨(拔拔중국어)였다. 496년 효문제의 한화 정책에 따라 성씨를 장손씨로 바꾸었다. 북위 시대 내내 장손 가문은 관롱 집단 내에서도 귀족 중의 귀족으로 여겨지는 매우 자랑스러운 세가였다. 그의 할아버지 장손훼(長孫毀중국어)는 북주 시대에 개부의동삼사(開부儀同三司)를 지냈다.
장손무기의 아버지 장손성(長孫晟중국어)은 수나라의 우효위장군(右驍衛將軍)을 지낸 인물로, 수 문제를 도와 북방의 이민족들을 물리치는 데 공헌했다. 그의 어머니는 장손성의 아내 고씨(高氏)로, 관리 고경덕(高敬德)의 딸이었으며, 북제 황족의 후예였다. 장손무기에게는 최소 세 명의 이복형이 있었다. 장손성의 장남인 장손행포(長孫行布중국어)는 604년 수 양제의 동생 양량의 반란을 진압하다 전사했다. 다른 형제로는 장손항안(長孫恆安중국어)과 장손안업(長孫安業중국어)이 있었다. 장손무기와 장손황후는 고씨 부인 소생이었으나, 장손안업은 다른 어머니 소생이었다.
609년 아버지 장손성이 사망하자, 이복형 장손안업은 어린 장손무기와 그의 여동생, 그리고 계모 고씨 부인을 집에서 내쫓았다. 이들은 고씨 부인의 오빠이자 장손무기의 외삼촌인 고사렴의 집으로 돌아가 고사렴의 보살핌 아래 성장했다.
2.2. 어린 시절과 교육
장손무기는 어릴 적부터 학문에 정진하고 책 읽기를 좋아했으며, 총명하고 지략이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그는 문장과 역사에 모두 능통했다.
2.3. 이세민과의 관계
그의 여동생이 훗날 이세민과 혼인하면서, 장손무기는 이세민과 막역한 사이가 되었다. 617년 이연이 수 양제의 폭정에 맞서 태원에서 거병하고 수도 장안을 공격하자, 장손무기는 이연의 주요 장군으로 활약하던 이세민을 찾아가 그의 막료로 합류했다. 이후 그는 이세민을 따라 여러 전역에 참전하며 깊은 신뢰를 쌓았다.
3. 고조 시대의 활동
장손무기는 이연의 거병에 합류하여 군사적, 정치적 공헌을 시작했으며, 특히 현무문의 변에서 이세민의 황위 등극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3.1. 초기 군사 및 정치 경력
617년 겨울, 이연은 장안을 함락하고 양유를 황제로 옹립한 뒤 섭정으로서 실권을 장악했다. 618년 봄, 양제가 강도(江都, 현 양저우)에서 우문회급의 쿠데타로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이연은 양유에게 황위를 양위받아 당나라를 건국하고 스스로 고조가 되었다.
이세민은 진왕으로 봉해진 후, 당나라의 중국 통일 전쟁을 이끄는 주요 장군이 되었다. 이 통일 전쟁은 623년, 당나라의 마지막 주요 경쟁자였던 유흑달이 이세민의 형인 황태자 이건성에게 붙잡혀 살해되면서 대부분 완료되었다. 장손무기는 이세민의 전역에 기여한 공로로 상당현공(上黨縣公)에 봉해졌다.
3.2. 현무문의 변
623년 무렵, 이세민은 황태자 이건성과 첨예한 대립 관계에 놓이게 되었고, 이건성은 동생인 제왕(齊王) 이원길의 지지를 받았다. 이후 몇 년간 이들의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다. 626년, 이건성과 이원길은 이세민이 자신들에게 대항할 것을 우려하여, 이세민의 참모인 방현령과 두여회, 그리고 무장 울지경덕을 거짓으로 모함하여 이세민의 막료에서 축출했다. 이때 이세민의 최측근 중에는 장손무기만이 남아있었다고 한다. 장손무기는 그의 외삼촌 고사렴, 후군집, 그리고 울지경덕과 함께 이건성과 이원길에 대한 선제공격을 주장하며 이세민에게 행동을 촉구했다.
처음에는 이세민이 망설였으나, 이건성이 돌궐과의 전투를 명분으로 이원길을 북정(北征)에 추천하고, 이세민의 휘하 정예 병력을 이원길에게 넘기려 하면서, 곤명지에서 이세민을 제거하려는 음모가 드러나자 이세민은 결단을 내렸다. 이세민은 장손무기에게 비밀리에 방현령과 두여회를 불러들이도록 지시했다.
결국 626년 6월, 이세민은 장손무기, 울지경덕, 후군집, 장공근, 유사립, 공손무달, 독고언운, 두군작, 정인태, 이맹상 등과 함께 현무문에 매복하여 이건성과 이원길을 살해했다. 이 사건 직후, 이세민은 고조에게 자신을 황태자로 책봉할 것을 사실상 강요했다. 장손무기는 이 공로로 태자좌서자(太子左庶子)로 승진했으며, 민관을 관장하는 상서복야(尙書僕射)에 임명되었다. 두 달 후, 고조는 이세민에게 황위를 양위했고, 이세민은 태종으로 즉위했다.
4. 태종 시대의 활동
태종의 즉위 후 장손무기는 최고 공신이자 재상으로서 당나라의 법률 및 행정 체계를 정비하는 데 기여했으며, 후계 구도에서 이치를 지지하고 고구려 원정에도 참여하는 등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4.1. 주요 참모이자 재상
626년 말, 태종은 장군과 관리들의 공헌도를 평가하여 봉지를 하사했는데, 장손무기, 방현령, 두여회, 울지경덕, 후군집 다섯 명을 최고 등급의 공신으로 선정했다. 장손무기는 제국공(齊國公)에 봉해졌다. 그는 태종의 승리에 크게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가까운 친척이었기 때문에, 태종은 그를 특히 아껴 자주 궁궐에 드나들 수 있도록 허락했다.
627년 봄, 이건성의 동료였던 이의가 빈주(豳州, 현 함양)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태종은 장손무기를 보내 이의를 진압하게 했다. 그러나 장손무기가 도착하기 전에 이의는 이미 부하들에게 패배하여 도주 중 살해되었다. 627년 가을, 태종은 장손황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장손무기를 상서복야(尙書僕射)로 임명했다. 황후는 장손씨 가문이 지나치게 영예를 얻어 공격의 대상이 될 것을 우려했으나, 태종은 이를 무시했다. 상서복야는 중요한 행정부의 수장 중 하나로, 당시 재상직으로 여겨졌다.
그해 말, 태종은 626년 즉위 초 장안까지 깊숙이 침입했던 동돌궐의 힐리가한이 내부 문제에 직면했다는 소식을 듣고, 장손무기와 소우에게 의견을 물었다. 소우는 동돌궐 공격을 주장했으나, 장손무기는 양국 간의 평화 조약을 파기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고, 태종은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장손무기가 재상직에 오르자 많은 관리들이 비판적이었고, 그가 권력을 독점하고 있다는 은밀한 비난이 태종에게 전달되기도 했다. 태종은 공개적으로 장손무기에 대한 신뢰를 표명했지만, 장손무기 자신은 원한의 대상이 될 것을 우려했다. 그는 여러 차례 직접 또는 장손황후를 통해 사임을 제안했고, 628년 봄 태종은 그의 사임을 수락했다. 그러나 태종은 장손무기에게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개부의동삼사중국어)라는 명예직을 부여하고, 여전히 많은 중요한 문제에 대해 그와 상의했다. 633년, 태종은 장손무기에게 더 높은 영예인 사공(司空사공중국어) 직을 수여했다. 이는 삼공 중 하나였다.
637년, 태종은 자신의 친척, 위대한 장군, 그리고 관리들에게 영구적인 영지로 주(州)를 하사하는 계획의 일환으로, 장손무기의 작위를 조국공(趙國公)으로 변경하고 조주(趙州, 현 스자좡)의 자사(刺史) 직을 주어 그의 후손들이 상속받도록 했다. 많은 관리들이 이 계획에 반대했으며, 가장 강력한 반대는 장손무기 자신에게서 나왔다. 그는 또한 그의 며느리이자 태종의 딸인 장락공주(長樂公主)를 통해 반대 의견을 제출하게 했고, 결국 태종은 이 계획을 취소했다. 그러나 장손무기의 작위는 조국공으로 유지되었다. 642년, 태종은 장손무기의 명예직을 사공에서 사도(司徒사도중국어)로 변경했다. 643년, 태종이 당나라 통치에 크게 기여한 24명의 공신을 기리기 위해 능연각에 초상화를 그리도록 명했을 때, 장손무기의 초상화는 첫 번째로 걸렸다.
648년 봄, 태종은 장손무기를 입법부의 대리 수장으로 임명했고, 추가로 그에게 행정부와 시험부의 두 주요 정부 부서도 담당하도록 지시하여, 사실상 장손무기가 모든 정부를 총괄하게 만들었다.
4.2. 법률 개혁 및 공헌
637년, 방현령이 주도하고 장손무기가 보좌한 수나라 형법의 대대적인 개정이 완료되었다. 이 개정된 법률은 500개 조항으로 구성되었고 형벌은 20등급으로 나뉘었다. 또한 법률 시행을 위한 약 1,600개 조항의 규정(정관율)도 작성되었다.
4.3. 주요 칭호와 영예
장손무기는 상당현공, 제국공, 조국공 등의 작위를 받았다. 관직으로는 상서복야, 개부의동삼사, 사공, 사도 등을 역임했다. 특히 643년 능연각 이십사 공신 중 첫 번째로 기록되어 당 태종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음을 보여주었다.
4.4. 후계 구도와 이치 지지
643년 말, 태종과 장손황후의 장남이자 황태자였던 이승건은 동생이자 태종의 총애를 받던 위왕(魏王) 이태와 첨예한 대립 관계에 놓였다. 이승건은 결국 태종을 전복하려는 음모를 꾸민 것이 발각되었고, 후군집과 태종의 사위인 조절(趙節), 두하(杜荷, 두여회의 아들) 등이 이에 가담했다. 태종은 장손무기, 방현령, 소우, 이세적, 그리고 최고 법원 및 정부의 입법 및 시험 부서 담당 관리들에게 조사를 맡겼고, 이들은 이승건이 태종을 전복하려 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승건은 폐위되었고, 그의 공모자들은 처형되었다.
이로 인해 즉시 후계 문제가 불거졌다. 이태는 태종이 가장 총애하는 아들이었고, 태종은 거의 즉시 그를 황태자로 책봉하겠다고 약속했으며, 재상 잠문본과 유계도 이에 동의했다. 그러나 장손무기는 이에 동의하지 않고, 대신 태종의 아홉째 아들이자 역시 장손황후 소생인 이치를 황태자로 삼을 것을 추천했다. 장손무기는 이 제안에서 저수량의 지지를 받았다. 또한 태종이 이승건을 직접 심문했을 때, 이승건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면서도 이태의 계략이 자신을 위협하여 반란을 꾀하게 만들었다고 비난했다. 태종은 결국 이치를 황태자로 삼기로 결심했고, 이 결정은 처음에는 장손무기, 방현령, 이세적, 저수량, 그리고 이치 본인에게만 비밀리에 알려졌다. 이후 이승건과 이태는 모두 유배되었다.
그 후 장손무기는 방현령, 소우와 함께 새로운 황태자의 고문이 되었다. 그러나 태종은 이 결정이 올바른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치가 친절하지만 성격이 나약하여 황제로서 적합할지 확신하지 못했다. 그는 장손무기와 함께 다른 아들인 오왕(吳王) 이각(이각은 수 양제의 딸인 양귀비 소생으로, 이치보다 나이가 많고 더 유능하다고 여겨졌다)을 황태자로 삼을 가능성을 논의했다. 장손무기는 이 생각에 강력히 반대했고, 태종은 이를 실행하지 않았다. 장손무기는 또한 이치의 친절함을 자주 칭찬했다. 이후 장손무기와 이각 사이에는 깊은 적대감이 형성되었다.
644년, 태종이 황실 연회에서 주요 관리들의 장단점을 언급했을 때, 장손무기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장손무기는 이해관계의 충돌을 지나치게 걱정한다. 그는 고대 현인들의 지혜를 넘어설 정도로 능숙하고 결단력이 있지만, 전장에서 군대를 지휘하는 것은 그의 강점이 아니다.
4.5. 군사 활동 참여
644년 말, 태종이 고구려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개시했을 때, 그는 장군 이세적과 이도종에게 선봉 부대를 이끌게 했고, 자신은 장손무기, 잠문본, 양사도의 보좌를 받으며 주력 부대를 지휘했다. 645년 여름, 고연수(高延壽중국어 (한자))와 고혜진(高惠真중국어 (한자)) 장군이 지휘하는 고구려 주력 부대와 당군 사이에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다. 태종은 이세적에게 15,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유인 작전을 펼치게 했고, 고구려군이 이세적을 공격하자 장손무기가 11,000명의 병력으로 후방을 공격했다. 이세적과 장손무기, 그리고 태종 자신도 고구려군을 격파하여 항복을 받아냈다.
태종은 이후 고구려의 수도 평양을 직접 공격하는 것을 고려했으나, 이세적은 안시성(安市안시중국어, 현 안산)을 먼저 함락시키지 않으면 안시성주(한국의 민간 전설에서는 양만춘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 이름은 미상)가 당군의 후방을 공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태종은 이에 동의하여 다시 안시성을 포위했다. 그러나 안시성의 지휘관은 유능한 방어자였고, 이세적이 분노하여 성이 함락되면 모든 주민을 학살하겠다고 선언하자 수비병들의 결의는 더욱 강해졌다. 당군이 안시성 포위에 발이 묶이자, 여러 관리들은 안시성을 우회하여 오골(烏骨중국어 (한자), 현 단둥)을 공격한 후 평양으로 향할 것을 제안했다. 장손무기는 안시와 건안(建安중국어, 현 잉커우)을 먼저 함락시키지 않으면 이 전략이 너무 위험하다고 반대했다. 태종은 이에 동의하여 안시성 포위를 계속했지만, 여전히 함락시키지 못했다. 645년 가을, 겨울이 다가오자 태종은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송나라 역사가 호삼성은 자치통감에 대한 주석에서 태종의 지나친 신중함이 승리를 놓치게 했다고 평하며, 간접적으로 평양 직접 공격 전략에 반대한 장손무기를 비난했다. 군대가 철수할 때 장손무기는 군대가 요하를 건널 수 있도록 임시 다리를 건설하는 책임을 맡았다.
4.6. 태종과의 관계
장손무기는 태종의 가장 신뢰받는 조언자 중 한 명이었다. 647년 장손무기의 외삼촌 고사렴이 사망했을 때, 태종은 막 병에서 회복된 상태였음에도 고사렴의 장례식에 참석하려 했다. 그러나 장손무기는 태종의 말 앞에 드러누워 그를 막으며, 최근 병에서 회복된 황제가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간언했다. 태종은 장손무기의 반대 때문에 결국 참석하지 않았다.
647년 여름, 태종은 장손무기를 양주(楊州, 즉 강도)의 도독으로 임명했지만, 실제로 그를 양주로 보내지는 않았다. 647년 가을, 단지충(段志沖중국어)이라는 평민이 태종에게 이치에게 황위를 양위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자, 이치는 태종이 자신이 이 제안의 배후에 있다고 의심할까 봐 걱정했다. 장손무기는 단지충을 처형할 것을 요청했으나, 태종은 동요하지 않고 단지충에게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649년 여름, 태종은 하궁인 취미궁(翠微宮취미궁중국어 (한자))에서 중병에 걸렸다. 그는 장손무기와 저수량을 침상 곁으로 불러 이치를 그들에게 부탁했다. 태종은 곧 사망했으며, 장손무기의 지시에 따라 그의 죽음은 이치가 동반한 관이 장안으로 돌아올 때까지 비밀에 부쳐졌다. 이후 이치는 황위에 올랐다(이후 고종으로 불림).
5. 고종 시대의 활동
고종 즉위 후 장손무기는 최고 고문이자 섭정으로서 초기 정국을 안정시키는 데 기여했으나, 점차 권력을 남용한다는 비판을 받으며 측천무후와의 갈등 속에서 정치적 입지가 약화되었다.
5.1. 최고 고문 및 섭정
고종이 즉위한 후, 그는 장손무기의 명예 칭호를 태위(太尉태위중국어)로 변경했다. 태위 역시 삼공 중 하나였다. 고종은 또한 그에게 세 개 부서(행정부, 입법부, 시험부)를 계속 총괄하도록 명했으나, 장손무기는 행정부에 대한 책임은 사양했다. 고종은 또한 그에게 사실상 재상직인 동중서문하삼품(同中書門下三品동중서문하삼품중국어) 칭호를 부여했다. 고종 통치 초기에, 다른 재상직을 가진 인물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장손무기와 저수량이 정부를 통제했으며, 그들은 태종이 정관의 치(貞觀之治) 기간 동안 확립한 효율적인 통치를 충실히 계승하고 확장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장손무기의 권위와 충성심에 도전하려는 듯, 토번의 왕 송첸감포는 장손무기에게 서한을 보내 "천자가 방금 즉위했다. 만약 관리들 중에 불충한 신하가 있다면, 나는 군대를 이끌고 수도로 가서 그들을 멸할 것이다"라고 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종은 장손무기와 저수량을 크게 신뢰했으며, 650년 이홍태(李弘泰)라는 평민이 장손무기를 역모죄로 고발하자, 고종은 즉시 이홍태의 목을 베었다.
5.2. 법률 편찬
651년, 장손무기가 총괄한 법률의 또 다른 개정이 완료되었고, 이는 고종에 의해 반포되었다. 이 법률은 율소(律疏율소중국어)로 알려져 있다.
5.3. 정치적 숙청과 경쟁
652년 말, 방현령의 장남이자 상속자인 방의직(房遺直)과 그의 동생 방의애(房遺愛) 및 방의애의 아내인 태종의 딸 고양공주(高陽公主) 사이에 큰 분쟁이 발생했다. 고양공주는 방의직이 자신을 폭행했다고 고발했고, 방의직은 방의애와 고양공주가 역모를 꾸몄다고 맞고발했다. 고종은 장손무기에게 조사를 명했고, 장손무기는 방의애, 고양공주, 장군 설만철, 그리고 고종의 또 다른 매형인 시령무(柴令武)가 태종의 동생 경왕(荊王) 이원경을 황제로 옹립하려 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방의애는 장손무기가 오랫동안 고종의 황위를 위협하는 존재로 여겨 이각을 죽이려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장손무기가 자신을 살려줄 것이라는 희망으로 이각을 음모에 거짓으로 연루시켰다. 그러나 장손무기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대규모 숙청을 단행했다. 653년 봄, 장손무기는 고종을 설득하여 방의애, 설만철, 시령무를 처형하고, 이원경, 이각, 고양공주, 파릉공주(巴陵公主, 시령무의 아내)에게 자결을 명하는 조서를 내리게 했다.
나아가 장손무기는 재상 우문걸(방의애의 친구), 이도종(장손무기와 저수량과 오랫동안 경쟁 관계에 있었던 인물), 장군 집실사력(執失思力), 설만철의 동생 설만비(薛萬備), 그리고 이각의 어머니 양귀비(楊귀妃)와 양귀비의 어린 아들 이인(李愔)까지 평민으로 강등시키고 유배 보냈다. 이러한 행동에 대해 구당서의 주편자 유후는 장손무기 자신이 결국 거짓 모함을 당한 것이 아마도 업보일 것이라고 비판했다. 실제로 이각은 죽기 전에 장손무기를 저주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장손무기가 황권을 훔치고 충신들을 거짓으로 모함했다. 황실 조상들의 영혼이 지켜보고 있으니, 곧 너의 가문도 도륙될 것이다."
5.4. 측천무후에 대한 반대
654년 무렵, 고종은 무재인에게 깊이 빠져들었다. 무재인은 태종의 후궁이었으므로, 유교적 관점에서 이는 근친상간으로 여겨지는 관계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고종의 총애를 받던 소숙비를 질투했던 왕황후가 소숙비의 총애를 분산시키기 위해 무재인을 후궁으로 들이도록 제안했었다. 그러나 고종의 총애가 무재인에게만 집중되자, 왕황후는 소숙비와 동맹을 맺고 무재인에게 대항하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654년, 무재인의 갓난 딸이 사망한 후(일부 역사가들은 무재인이 왕황후를 모함하기 위해 자신의 딸을 살해했다고 주장하지만, 딸이 실제로 살해되었다는 증거는 없으며 자연사했을 가능성도 있다), 고종은 왕황후를 폐위하고 무재인을 그 자리에 앉힐 것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고종은 고위 관료들의 반대를 두려워했다. 그는 무재인과 함께 장손무기의 저택을 방문하여 장손무기에게 호화로운 선물을 하사하고, 장손무기의 세 아들을 중간급 관리로 임명했다. 이 기회를 이용하여 그는 왕황후를 무재인으로 교체하는 문제에 대해 언급했다. 장손무기는 이해하지 못하는 척하며 무재인을 지지하는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았고, 이후 무재인의 어머니 양씨 부인과 동료 재상 허경종의 로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입장을 고수했다. 그러나 곧 허경종, 이의부(무재인을 공개적으로 지지하여 재상이 된 인물), 그리고 다른 핵심 관리인 최의현(崔義玄), 원공유(袁公瑜) 등이 무재인을 지지하는 동맹을 형성했다.
655년 가을, 황실 회의 후 고종은 장손무기, 이세적(태종의 이름에 사용된 '민' 자와 '세' 자를 피하기 위해 '세' 자를 빼고 이지(李勣)로 개명), 저수량, 우지녕을 궁궐로 소환했다. 저수량은 고종이 왕황후를 무재인으로 교체하려는 자신의 뜻에 동의를 구하기 위해 그들을 회의에 소집하려 한다는 것을 정확히 짐작했다. 이세적은 회의에 참석하기를 거부했다. 장손무기, 저수량, 우지녕이 회의에 참석했을 때, 고종은 실제로 왕황후를 무재인으로 교체할 것을 제안했다. 저수량은 강력히 반대했고, 장손무기와 우지녕은 말은 하지 않았지만 동의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다. 나중에 동료 재상인 한원과 내제도 반대했지만, 고종이 이세적에게 의견을 묻자 이세적은 "이것은 폐하의 집안일입니다. 왜 다른 사람에게 물으십니까?"라고 답했다. 고종은 저수량을 담주(潭州, 현 창사)의 도독직으로 강등시킨 후, 왕황후와 소숙비를 평민으로 폐위하고 무재인을 황후로 책봉했다. (얼마 후, 무재인의 명령으로 전 왕황후와 소숙비는 고문당하고 살해되었다.)
6. 몰락과 죽음
장손무기는 측천무후 세력의 모함으로 유배되어 자결을 강요받으며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으나, 사후에 명예가 회복되었다.
6.1. 고발과 유배
657년 초, 측천무후와 그녀의 동맹 세력의 힘은 매우 커져 자신들에게 반대했던 세력에 대한 강력한 보복을 시작했다. 659년 무렵, 측천무후의 입지는 확고해졌고, 그녀는 장손무기와 우지녕이 자신의 황후 책봉을 묵시적으로 반대했던 것에 대해 원한을 품었다. 이 문제로 장손무기에게 여러 차례 질책을 받았던 허경종 또한 장손무기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다.
허경종은 이후 하급 관리 위계방(韋季方)과 이소(李巢)의 파벌 분쟁 보고서를 조사하던 중, 장손무기가 그들과 함께 역모를 꾸몄다는 거짓 증거를 조작했다. 고종은 장손무기를 직접 심문하려 했으나, 허경종은 장손무기가 오랜 정치 경험으로 인해 빠른 반응에 능하다는 점을 지적하며 이를 만류했다. 659년 여름, 고종은 갑자기 장손무기의 모든 관직과 봉지를 박탈하고, 공식적으로는 그에게 양주 도독 칭호를 주었으나, 실제로는 그를 검주(黔州중국어, 현 충칭 남동부)로 유배 보내 가택 연금시켰다. 장손무기의 아들들도 유배되었다.
6.2. 강요된 자결
659년 가을, 고종은 alleged 음모에 대한 조사를 재개하며 이세적, 허경종, 신모강, 임아상, 노승경에게 조사를 맡겼다. 허경종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원공유(袁공瑜)를 검주로 보냈고, 원공유는 측천무후의 명령에 따라 장손무기에게 자결을 강요했다. 장손무기는 슬픔에 잠겨 마지막 시를 쓴 후 목을 매 자살했다. 그의 모든 재산은 몰수되었다. (같은 보복 조치로 왕황후의 외삼촌 유석 또한 유배지에서 처형되었다. 장손무기, 유석, 한원 가문의 구성원들은 강제 노역에 처해졌고, 장손무기의 여러 친척들도 처형되었다.)
이후 고종 통치 말기인 674년, 고종은 장손무기의 관직을 사후에 복권시키고, 그의 고손자 장손익(長孫翼장손익중국어)이 조국공 작위를 상속받도록 허락했다. 또한 장손무기의 관을 장안으로 돌려보내 태종의 무덤 근처에 안장하도록 했다.
7. 유산과 평가
장손무기는 당나라 초기의 안정과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로 평가되지만, 그의 정치적 행보와 권력 남용에 대한 비판도 존재한다.
7.1. 역사적 평가 및 비판
장손무기는 당나라 초기 정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현무문의 변에서 태종의 즉위를 돕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재상으로서 정관의 치의 안정적인 기반을 다지는 데 공헌했다. 특히 정관율의 편찬에 참여하여 당나라 법률 체계의 기틀을 마련한 것은 그의 중요한 업적 중 하나이다. 그는 또한 수서의 편찬에도 참여하여 학문적 업적을 남겼다. 그는 태종의 가장 신뢰받는 조언자였으며, 능연각 이십사 공신 중 첫 번째로 기록될 만큼 그 공로를 인정받았다.
그러나 그의 정치적 행보에는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고종 시대에 발생한 이각 등 황족 및 공신들에 대한 대규모 숙청에서 장손무기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은 그의 권력 남용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구당서의 주편자 유후는 그의 이러한 행위를 "황권을 훔치고 충신들을 거짓으로 모함했다"고 비판하며, 그의 비극적인 최후가 이러한 행동에 대한 업보일 수 있다고 언급했다. 이각 또한 죽기 전에 장손무기를 저주하며 그의 가문이 멸족될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이는 당시 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반영한다. 그는 측천무후의 황후 책봉을 반대하며 정치적 갈등을 겪었고, 결국 그녀의 세력에 의해 조작된 역모죄로 몰락하게 되었다. 이는 그의 정치적 판단 착오나 권력 다툼에서의 한계를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손무기는 당나라 초기 안정과 발전에 기여한 공신으로서의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그의 법률 편찬 작업은 후대까지 영향을 미쳤으며, 태종과의 돈독한 관계 속에서 당나라의 기틀을 다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7.2. 사후 복권 및 추모
장손무기는 659년 유배지에서 자결을 강요받아 사망했지만, 그의 명예는 사후에 회복되었다. 고종 통치 말기인 674년, 고종은 장손무기의 관직과 작위를 사후에 복권시켰다. 그의 고손자 장손익(長孫翼장손익중국어)은 조국공 작위를 상속받았다. 또한 장손무기의 관은 장안으로 돌아와 태종의 무덤 근처에 안장되어, 태종과의 깊은 관계와 그의 공헌을 기렸다.
8. 가족
장손무기는 여러 아들을 두었으며, 그들 또한 관직에 나아갔다.
- 아들:
- 장손충(長孫沖중국어): 비서감(秘書監)에 이르렀으며, 당 태종의 장녀 장락공주와 혼인하여 부마도위(駙馬都尉)가 되었다.
- 장손환(長孫渙중국어): 홍려소경(鴻臚少卿)에 이르렀고, 상당군공(上黨郡公)에 봉해졌다.
- 장손준(長孫濬중국어): 상주 자사(常州刺史)에 이르렀고, 안강현백(安康縣伯)에 봉해졌다.
- 장손엄(長孫淹중국어): 장수 현령(長水縣令)에 이르렀고, 안성현공(安城縣公)에 봉해졌다.
- 장손온(長孫溫중국어): 상의직장(尙衣直長)에 이르렀다.
- 장손담(長孫澹중국어): 태자세마(太子洗馬)에 이르렀다.
- 장손정(長孫淨중국어): 상의봉어(尙衣奉御)에 이르렀다.
- 장손서(長孫溆중국어): 성주 자사(成州刺史)에 이르렀다.
- 장손잠(長孫湛중국어): 상주 자사(湘州刺史)에 이르렀다.
- 장손진(長孫津중국어): 상의봉어(尙衣奉御)에 이르렀다.
- 장손택(長孫澤중국어): 좌천우위장사(左千牛衛長史)에 이르렀다.
- 장손윤(長孫潤중국어): 태상소경(太常少卿)에 이르렀고, 금성현자(金城縣子)에 봉해졌다.
9. 대중문화 속 장손무기
장손무기는 여러 드라마 작품에서 묘사되었다.
- 《삼국기》(KBS, 1992년~1993년, 배우: 방일수, 김해권)
- 《연개소문》(SBS, 2006년~2007년, 배우: 장항선)
- 《대조영》(KBS, 2006년~2007년, 배우: 안대용)
- 《무미랑전기》(중화TV, 2016년, 배우: 왕회춘)
10. 관련 항목
- 능연각 이십사 공신

능연각 이십사 공신 | |||||||
---|---|---|---|---|---|---|---|
1. 장손무기 | 2. 이효공 | 3. 두여회 | 4. 위징 | 5. 방현령 | 6. 고사렴 | 7. 울지경덕 | 8. 이정 |
9. 소우 | 10. 단지현 | 11. 유홍기 | 12. 굴돌통 | 13. 은개산 | 14. 시소 | 15. 장손순덕 | 16. 장량 |
17. 후군집 | 18. 장공근 | 19. 정지절 | 20. 우세남 | 21. 유정회 | 22. 당검 | 23. 이세적 | 24. 진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