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장마리 파프(Jean-Marie Pfaff프랑스어, 1953년 12월 4일 ~ )는 벨기에 레베커 출신의 전 프로 축구 선수로, 주로 골키퍼로 활약했다. 그는 선수 경력의 대부분을 베베런과 바이에른 뮌헨에서 보냈다. 파프는 벨기에 국가대표팀에서 64번의 경기에 출전했으며, 1982년 FIFA 월드컵과 1986년 FIFA 월드컵에 참가했다. 특히 1986년 FIFA 월드컵에서는 대회 최고의 골키퍼로 선정되었고, 1987년에는 IFFHS 선정 '세계 최고 골키퍼' 상을 처음으로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2004년 3월에는 펠레가 선정한 '현존하는 위대한 축구 선수 125인'인 FIFA 100에 포함되기도 했다. 그는 뛰어난 반사 신경과 아크로바틱한 선방 능력으로 유명했으며, 경기장 안팎에서 보여준 외향적이고 카리스마 넘치는 성격 덕분에 1986년 월드컵에서는 멕시코 팬들로부터 '엘 심파티코(El Simpático엘 심파티코스페인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2. 어린 시절
장마리 파프는 벨기에 동플란데런주 레베커에서 태어났다. 그는 6남 6녀의 12명 대가족에서 성장했다. 그의 아버지는 천과 카펫을 방문 판매하는 일을 했으며, 파프 가족은 레베커에 있는 캐러밴에서 생활했다. 여름에는 온 가족이 아버지의 판매를 돕는 것이 의무였다.
거리에서 축구를 하며 그의 골키퍼로서의 재능은 빠르게 주목받았다. 파프는 형들인 루이와 장-밥티스트 파프가 뛰고 있던 SC 에인트라흐트 알스트의 유소년 팀에 합류했다. 1965년, 루이와 장-밥티스트가 KSK 베베런으로 이적하면서, 어린 동생들인 장마리와 툰 역시 바슬란트의 그 클럽으로 팀을 옮기게 되었다. 장마리 파프가 겨우 12살 때, 그의 아버지는 암으로 사망했으며, 이는 가족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3. 클럽 경력
장마리 파프는 1970년대 초 KSK 베베런에서 프로 경력을 시작하여 벨기에 리그의 주축 골키퍼로 성장했으며, 독일의 명문 클럽인 FC 바이에른 뮌헨으로 이적하여 국제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3.1. KSK 베베런
파프는 1971-72 시즌 막바지에 18세의 나이로 KSK 베베런 1군 팀에서 벨기에 1부 리그 데뷔전을 치렀다. 당시 클럽은 이미 2부 리그로 강등이 확정된 상태였다. 다음 시즌, 파프는 주전 골키퍼로 자리매김했으며, 베베런은 2부 리그에서 우승하며 즉시 1부 리그로 복귀했다.
1973-74 시즌 후반기에는 아르망 주리옹 감독에 의해 벤치로 밀려났지만, 위르뱅 브람스 감독 체제하의 1974-75 시즌부터는 다시 주전 골키퍼가 되었다.
1977-78 시즌 동안 파프는 SK 베베런과 함께 벨기에 정상권에 도달했다. 팀은 리그에서 아쉽게도 유럽 진출권(5위)을 놓쳤지만, 벨기에 컵 결승에 처음으로 진출하는 데 성공했다. 파프의 결정적인 선방에 힘입어 샤를루아를 2대0으로 꺾고 우승하며 다음 시즌 유럽 대회 출전권을 획득했다。 1978년, 장마리 파프는 골키퍼에게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 벨기에 골든슈를 수상했다.
베베런은 1978-79 시즌에 정점을 찍었다. 클럽은 창단 이래 처음으로 리그 우승을 차지했으며, 파프는 시즌 절반에 해당하는 17경기에서 무실점을 기록했다. 유러피언컵 위너스컵에서는 파프의 뛰어난 활약에 힘입어 8강에서 인테르 밀란을 놀랍게도 탈락시켰다. 준결승에서는 바르셀로나에 두 차례 1대0 패배를 당하며 탈락했는데, 이 두 골은 파프가 이 대회에서 처음으로 실점한 골이었고, 모두 페널티킥이었다.
베베런은 1980년 스탕다르 리에주와의 준결승 2차전에서 파프의 눈부신 활약으로 다시 벨기에 컵 결승에 진출했다. 그러나 결승전에서는 약체인 토르 바터르스헤이에게 1대2로 예상 밖의 패배를 당하며 다음 시즌 유럽컵 출전권을 놓쳤다. 1980-81 시즌은 1981년 3월 11일 벨기에 축구 협회로부터 4개월 출장 정지 처분을 받으며 파프에게 큰 실망을 안겨주었다. 파프는 홈에서 열린 로케런과의 컵 경기 후 부심 티리옹을 무릎으로 가격했다고 알려졌지만, 나중에 TV 영상에서는 무릎 가격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1982년 FIFA 월드컵 이후 28세의 파프는 독일 명문 클럽인 바이에른 뮌헨으로 이적했으며, 이적료는 40.00 만 EUR에 달했다.
3.2. FC 바이에른 뮌헨
뮌헨에서 파프는 새로운 축구 문화를 경험하는 동시에 명문 클럽이 주는 엄청난 압박에 직면했다. 브레멘과의 데뷔전에서 우베 라인더스의 장거리 스로인을 잘못 판단하여 자책골로 연결되는 등 좋지 않은 출발을 보였지만, 파프는 빠르게 팀의 필수적인 존재가 되었다. 제프 마이어의 갑작스러운 은퇴(자동차 사고로 중상을 입음) 이후 3년 만에 바이에른은 마침내 향후 몇 년간 골키퍼 자리를 맡을 후계자를 찾은 것이었다.
그러나 파프의 첫 시즌인 1982-83 시즌에 바이에른은 모든 면에서 부진했다. 10월에는 DFB-포칼 2라운드에서 아인트라흐트 브라운슈바이크에게 일찌감치 탈락했으며, 분데스리가에서는 4위에 그쳤다. 유러피언컵 위너스컵에서는 스코틀랜드의 애버딘 (결국 우승팀)에게 8강에서 너무 강한 모습을 보여 탈락했다. 하지만 시즌 후반기 활약 덕분에 파프는 1983년 7월 주요 축구 잡지인 키커로부터 '월드 클래스 골키퍼'로 선정되었다.
1983-84 시즌에도 바이에른은 다시 4위에 머물렀다. UEFA컵 2라운드에서 PAOK와 두 차례 0대0 무승부를 기록한 후, 승부차기에서 파프가 콘스탄티노스 말리우파스의 슈팅을 막아내고 직접 바이에른의 10번째 페널티킥을 성공시키며 승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 대회는 3라운드에서 토트넘 홋스퍼에게 탈락하며 일찍 막을 내렸다. 1984년 5월 31일, DFB컵 결승전에서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와 무승부를 기록한 뒤 승부차기 끝에 우승을 차지했다. 파프가 노르베르트 링엘스의 슈팅을 막아낸 후 미하엘 루메니게가 결정적인 골을 넣었다.
파프는 1984-85 시즌에 베르더 브레멘에 4점 앞서며 바이에른 뮌헨에서 첫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팀은 로마를 상대로 두 번의 큰 승리를 거두며 컵 위너스컵 준결승에 진출했지만, 잉글랜드의 에버턴에게 탈락했다. 홈에서는 0대0으로 비겼고, 구디슨 파크에서 열린 원정 경기에서는 1대3으로 패배했다. DFB 포칼 결승전에도 다시 진출했지만,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열린 경기는 바이어 위어딩엔에게 1대2로 예상 밖의 패배를 당했다.
1985-86 시즌 상반기에 파프는 부상에 시달렸고, 심지어 바이에른에서 주전 자리를 잃었으며 멕시코 월드컵 벨기에 대표팀에 선발되지 못할까 봐 걱정했다. 그러나 그는 강철 같은 의지로 재기를 위해 노력했고, 성급한 비평가들을 모두 납득시켰다. 시즌은 베르더 브레멘과 승점 49점으로 동률이었지만, 한 번 더 승리한 바이에른이 다시 우승을 차지했다. 또한 DFB컵에서도 결승전에서 VfB 슈투트가르트를 5대2로 쉽게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유러피언컵에서는 8강에서 안데를레흐트에게 0대2로 패배하며 일찍 탈락했다. 키커 순위에서 파프는 다시 '인터내셔널 클래스'에서 '월드 클래스'로 올라섰다.
1986-87 시즌에는 바이에른이 함부르크 SV에 6점 앞서며 3회 연속으로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DFB컵은 11월에 포르투나 뒤셀도르프에게 0대3으로 크게 패하며 일찍 끝났다. 유러피언컵에서는 이번에는 안데를레흐트를 두 차례 승리하며 탈락시킬 수 있었다. 베르나베우 경기장에서 열린 2차전에서 레알 마드리드 역시 1차전의 1대4 대패를 만회하지 못했다. 결승전은 1987년 5월 27일 프라터슈타디온에서 열렸는데, 바이에른은 여러 핵심 선수들이 출장 정지와 부상으로 빠진 상태에서 포르투에게 패배했다. 바이에른과 벨기에 국가대표팀에서 보여준 1986년 월드컵에서의 활약으로, 파프는 1987년 IFFHS로부터 첫 '세계 최고 골키퍼' 트로피를 수상했다.
바이에른은 1987-88 시즌에 베르더 브레멘에게 우승을 내주며 2위를 기록했다. DFB컵과 유러피언컵 모두 8강에서 탈락했다(각각 함부르크 SV와 레알 마드리드에게).
3.3. 말년 경력
35세가 된 파프는 고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하고 리르서 SK와 계약했다. 바이에른과 같은 클럽과의 엄청난 수준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리르서는 1988-89 시즌에 리그 중위권인 10위로 시즌을 마쳤다. 벨기에에서 한 시즌을 보낸 후, 그는 옛 스승인 위르뱅 브람스의 요청을 받아들여 튀르키예의 트라브존스포르에 합류했다.
트라브존스포르에서 파프는 진정한 국민적 영웅처럼 환영받았다. 팀은 1989-90 시즌에 3위를 기록했으며, 베식타시에게 튀르키예 컵 결승에서 패한 후 컵 위너스컵 출전권을 획득할 수 있었다. 이 튀르키예 컵 결승전은 파프의 마지막 프로 경기가 되었고, 그는 1990년에 18년간의 골키퍼 경력을 마무리하기로 결정했다。 부상 문제가 계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36세에 은퇴한 것을 나중에 후회했다고 한다.
4. 국가대표팀 경력
장마리 파프는 벨기에 국가대표팀의 상징적인 골키퍼로, 팀의 주요 국제 대회 성공에 크게 기여했다.
4.1. 초기 국가대표팀 출전
1976년, 벨기에의 새로운 감독 기 티스는 붉은 악마의 1976년 유럽 선수권 대회 대표팀을 젊은 선수들로 개편하기로 결정했다. 파프는 윌리 웰렌스, 르네 베르헤이언, 미셸 랭캥과 같은 다른 젊은 유망주들과 함께 발탁되었다. 베베런 골키퍼의 데뷔전은 기억에 남을 만했다. 파프는 유로 1976 8강전에서 요한 크라위프가 이끄는 네덜란드를 상대로 데뷔전을 치렀다.

그는 최선을 다해 요한 네스컨스를 위협하여 페널티킥을 실축하게 만들었다. 붉은 악마는 로저 판 훌의 골로 리드를 잡았지만, 조니 렙의 동점골과 크라위프의 멋진 로빙 슛으로 벨기에는 결국 1대2로 패배했다. 파프는 경기장을 떠나면서 웃으며 상대팀 선수들에게 축하를 건넸다. 그는 나중에 "아무도 저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크라위프가 아름다운 골을 넣었고 제 스포츠맨십이 그에게 칭찬을 해줄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습니다"라고 설명했다.
파프는 1980년 이탈리아 유럽 선수권 대회에서 국가대표팀의 핵심 선수였다. 그의 선방 덕분에 벨기에는 서독과의 결승전에 진출했지만, 1대2로 패배했다. 하지만 벨기에는 파프를 스타 플레이어로 앞세운 신흥 국가대표팀 중 하나였다.
4.2. FIFA 월드컵 출전
1982년 스페인 월드컵은 많은 기대를 모았다. 벨기에는 아르헨티나와의 대회 개막전에서 승리했다. 파프는 높은 수준의 경기를 펼쳤지만, 그의 스페인 모험은 예상보다 짧았다. 헝가리와의 3차전에서 에리크 헤러츠와 충돌하여 두 선수 모두 부상으로 교체되어 귀국해야 했다. 두 스타 선수 없이 벨기에는 2차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 파프는 나중에 "에리크와 내가 부상당하지 않았다면 벨기에는 결승에 진출해서 우승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브라질도 이탈리아도 두렵지 않았을 겁니다"라고 언급했다.
파프는 1984년 유럽 선수권 대회에서도 벨기에 골문을 지켰는데, 이 대회에서 붉은 악마는 프랑스와 덴마크에 이어 A조 3위를 기록하며 조별리그를 통과하지 못했다. 2년 후, 벨기에는 멕시코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다. 이 월드컵은 벨기에 골키퍼 경력의 하이라이트였으며, 그는 대스타 중 한 명이 되었다. 이전에 파프는 심각한 부상을 입었고 안데를레흐트의 야키 뮈나롱과 주전 경쟁을 하고 있었다. 기 티스 감독은 그에게 "바이에른에서 다시 주전 선수가 되면 멕시코에 갈 것이다"라고 약속했다.
벨기에는 월드컵의 이변 팀이었다. 멕시코 축구 팬들에게 '엘 심파티코(El Simpático엘 심파티코스페인어)'라고 불린 파프는 소련과의 16강전에서 특히 뛰어난 선방을 보여주며 높은 수준의 경기를 펼쳤고, 팀과 함께 준결승에 진출했다. 벨기에는 디에고 마라도나가 이끄는 아르헨티나에게 두 골을 내주며 붉은 악마의 꿈을 끝냈다. 파프는 경기 전 팀의 분위기가 1980년 유럽 선수권 대회 결승전과 비슷했다며, 아르헨티나에 대한 존경심 때문에 승산이 없다고 확신했다고 말했다. 그는 "마라도나가 우리 수비 전체를 드리블하는 것을 보면, 루도 쿠크 같은 선수가 있었다면 디에고가 그런 위업을 달성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덧붙였다.
벨기에는 미셸 플라티니의 프랑스에게 2대4로 패하며 4위를 기록했다. 귀국 후 팀은 브뤼셀 그랑플라스에서 1만 명의 팬들에게 환영받았다.
4.3. 국가대표팀 은퇴
파프의 국가대표팀 모험은 33세가 되던 1987년에 끝났다. 그는 1987년 9월 23일 불가리아와의 경기가 마지막 국제 경기였다. 이후 그의 자리는 미셸 프뢰돔이 이어받았다.
5. 플레이 스타일 및 특징
장마리 파프는 견고한 체격에도 불구하고 빠른 반사 신경을 가지고 있었으며, 화려한 플레이 스타일과 곡예적인 선방 능력으로 유명하여 효과적인 슈팅 방어자로 평가받았다. 또한 그의 외향적이고 솔직한 성격, 활기차고 기이한 개성, 그리고 강력하고 카리스마 있는 리더십 자질로도 잘 알려져 있었다. 이러한 특성들과 그의 자신감, 페어플레이 정신, 프로페셔널리즘은 그를 수비 조직의 탁월한 리더이자 팬들에게 인기 있는 인물로 만들었다. 특히 경기장에서의 유쾌한 태도와 유머러스한 행동 덕분에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는 '엘 심파티코(El Simpático엘 심파티코스페인어)'("친절한 남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또한 골문에서 빠르게 뛰쳐나와 공을 처리하는 능력도 뛰어났다. 키가 가장 큰 골키퍼는 아니었지만, 그의 큰 손은 공을 잡을 때 도움이 되어 골문에서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냈다. 또한 페널티킥 선방 능력으로도 명성이 높았다. 골키퍼로서의 능력과 전성기 시절 세계 최고의 골키퍼 중 한 명, 그리고 벨기에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골키퍼 중 한 명이라는 평판에도 불구하고, 그는 때때로 일관성이 부족하고 실수를 저지르는 경향도 있었다.
6. 은퇴 이후
장마리 파프는 축구 선수 은퇴 후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대중적인 삶을 이어갔다.
6.1. 은퇴 경기
축구 경력을 마감하는 의미에서 1991년 베이르스홋 경기장에서 고별 경기가 개최되었다. 이 경기에서는 "1980년대의 벨기에" 팀과 프란츠 베켄바워, 루드 크롤, 미셸 플라티니, 로제 밀라, 알랭 지레스, 쇠렌 레르뷔 등 세계적인 스타들로 구성된 올스타 팀이 맞붙었다. 이 경기는 36개국에 생중계되었다.
6.2. 감독 경력
파프는 은퇴 후 두 차례 짧은 기간 동안 감독직을 맡았다. 첫 번째는 1993년 KSV 소테헴이었고, 몇 년 후인 1998년에는 KV 오스텐더의 감독을 역임했다.
6.3. 기타 활동 및 대중적 삶

2004년 3월, 파프는 펠레가 선정한 '현존하는 최고의 축구 선수 125인'인 FIFA 100에 이름을 올렸다. 2005년에는 유나이티드 솔 에너지라는 회사의 대표로 활동했는데, 이 회사는 2005-06 시즌을 앞두고 동독의 과거 명문 클럽인 BFC 디나모의 스폰서가 되었다. 파프는 BFC 디나모의 일원이 되어 클럽에 새로운 유소년 스포츠 학교 설립을 추진했다. 이 새로운 유소년 스포츠 학교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될 예정이었다. 파프는 스포르트포룸 호헨쇤하우젠을 방문하여 BFC 디나모의 유소년 팀 훈련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스폰서십은 실현되지 못했고, 파프는 2006년 8월 11일 클럽에서 사임하고 회원 자격을 해지했다.

2023년에는 파프를 주제로 한 팝업 박물관이 베베런의 옛 시청에 문을 열었다. 파프는 평생 동안 유니폼, 사진 및 기타 기념품을 포함한 방대한 소장품을 수집해왔다. 수만 명의 방문객을 맞이한 이 프로젝트는 2025년 초에 세 번째로 연장되었다.
파프는 2002년부터 2012년까지 자신과 가족의 일상을 보여주는 리얼리티 쇼 '더 파프스(De Pfaffs더 파프스네덜란드어)'를 통해 벨기에와 네덜란드에서 TV 스타로 활약했다. 그는 1987년 독일 영화 Zärtliche Chaoten체르틀리헤 카오텐독일어에 작은 역할로 출연하기도 했다. 또한 1990년에는 플란데런 시트콤 F.C. 데 캄피오에넌에 게스트로 출연했으며, 1999년에도 다시 이 시리즈에 등장했다. 2008년에는 스튜디오 100이 제작한 어린이 영화 플롭 엔 더 카보테르베이비에 출연했다. 2015년에는 독일 TV 시리즈 슈투름 데어 리베에 게스트로 출연했다. 2024년에는 독일 축구 프로그램 도펠파스 스튜디오에 한 침입자가 파프와 착각되어 들어오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파프는 2017년 바이에른 뮌헨의 '살아있는 전설'으로 선정되었고, 2018년에는 고향인 레베커의 명예 시민이 되었다. 2022년에는 베베런의 명예 시민으로 선정되었으며, 2024년에는 벨기에 프로 리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7. 수상 기록
장마리 파프는 클럽과 국가대표팀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수많은 개인 및 단체상을 수상했다.
클럽
- KSK 베베런
- 벨기에 2부 리그: 1972-73
- 벨기에 1부 리그: 1978-79
- 벨기에 컵: 1977-78
- 벨기에 슈퍼컵: 1979
- FC 바이에른 뮌헨
- 분데스리가: 1984-85, 1985-86, 1986-87
- DFB-포칼: 1983-84, 1985-86
- DFL-슈퍼컵: 1987-88
- 유러피언컵 준우승: 1986-87
국가대표팀
- 벨기에
- UEFA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 준우승: 1980
- 벨기에 국가 스포츠 공로상: 1980
- FIFA 월드컵 4위: 1986
개인
- 벨기에 골든슈: 1978
- 키커 올해의 골키퍼: 1983
- 키커 독일 축구 랭킹 - 월드 클래스 골키퍼: 1983, 1986
- 발롱도르 후보: 1983, 1986, 1987
- 유럽 올해의 골키퍼: 1983, 1987
- FIFA 월드컵 올스타 팀: 1986
- FIFA 월드컵 골든 글러브: 1986
- FIFA 월드컵 골든볼 (4위): 1986
- 프랑스 풋볼 + 가제타 델로 스포르트 + 게랭 스포르티보 월드컵 팀: 1986
- IFFHS 세계 최고 골키퍼: 1987
- 20세기 벨기에 골든슈 (6위): 1995
- 부트발 인터내셔널 선정 라프 빌렘스의 '세계 50대 스타': 1999
- IFFHS 세기의 골키퍼 (16위): 2000
- IFFHS 유럽 세기의 골키퍼 (10위): 2000
- 플라티나 11 (골든슈 수상자 50년 베스트 팀): 2003
- FIFA 100: 2004
- 골든 풋 레전드상: 2014
- 월드 스포츠 레전드상: 2016
- 바이에른 뮌헨 '살아있는 전설': 2017
- 레베커 명예 시민: 2018
- IFFHS 역대 벨기에 드림팀: 2021
- 베베런 명예 시민: 2022
- 베베런 장마리 파프 박물관: 2023
- 벨기에 프로 리그 명예의 전당: 2024
8. 저서
장마리 파프는 자신의 축구 경력과 삶에 대한 여러 서적을 출판하거나 그에 대한 책이 출판되었다.
- 뉘머 에인(Nummer Eén네덜란드어) - 마르셀 반 베르겐 저, 1979년, 209페이지 (네덜란드어)
- J.M. 파프 - 더 데르데 디멘시(J.M. Pfaff-De Derde Dimensie네덜란드어) - 테오 바우웬스 저, 1983년, 152페이지 (네덜란드어)
- 더 헬트 판 뮌헌(De Held van Munche네덜란드어)(셀러브리티 코믹) - K. 뤼크스, F. 데포세 저, 1984년, 44페이지 (네덜란드어)
- 다스 토어바르트부흐(Das Torwartbuch독일어) - 장마리 파프, 제프 마이어 공저, 1984년, 222페이지 (독일어)
- 더 파프스(De Pfaffs네덜란드어)(셀러브리티 코믹) - 로널드 그로세이, 샤렐 캄브레 저, 2003년 (네덜란드어)
- 오버레번(Overleven네덜란드어) - 장마리 파프 저, 2007년, 247페이지 (네덜란드어)
- J.M. 파프 - 마인 레벤 - 폼 슈트라센푸스발러 춤 벨트토트후터(J.M. Pfaff-Mein Leben-Vom straßenfußballer zum Welttothuter독일어) - 2021년, 296페이지 (네덜란드어, 독일어)
9. 경력 통계
9.1. 클럽
클럽 | 시즌 | 리그 | 국내 컵 | 리그 컵 | 유럽 대항전 | 합계 | ||||||
---|---|---|---|---|---|---|---|---|---|---|---|---|
디비전 | 출전 | 득점 | 출전 | 득점 | 출전 | 득점 | 출전 | 득점 | 출전 | 득점 | ||
베베런 | 1971-72 | 1부 리그 | 4 | 0 | - | - | - | 4 | 0 | |||
1972-73 | 2부 리그 | 27 | 0 | - | - | - | 27 | 0 | ||||
1973-74 | 1부 리그 | 32 | 0 | 2 | 0 | - | - | 34 | 0 | |||
1974-75 | 36 | 0 | 2 | 0 | - | - | 38 | 0 | ||||
1975-76 | 33 | 0 | 1 | 0 | - | - | 34 | 0 | ||||
1976-77 | 34 | 0 | 2 | 0 | - | - | 36 | 0 | ||||
1977-78 | 34 | 0 | 4 | 0 | - | - | 38 | 0 | ||||
1978-79 | 33 | 0 | 4 | 0 | - | 8 | 0 | 45 | 0 | |||
1979-80 | 22 | 0 | 8 | 0 | 1 | 0 | 2 | 0 | 33 | 0 | ||
1980-81 | 25 | 0 | 4 | 0 | 1 | 0 | - | 30 | 0 | |||
1981-82 | 23 | 0 | 6 | 0 | - | 4 | 0 | 33 | 0 | |||
합계 | 303 | 0 | 33 | 0 | 2 | 0 | 14 | 0 | 352 | 0 | ||
바이에른 뮌헨 | 1982-83 | 분데스리가 | 27 | 0 | 2 | 0 | - | 4 | 0 | 33 | 0 | |
1983-84 | 32 | 0 | 8 | 0 | - | 4 | 0 | 44 | 0 | |||
1984-85 | 14 | 0 | 4 | 0 | - | 6 | 0 | 24 | 0 | |||
1985-86 | 24 | 0 | 5 | 0 | - | 5 | 0 | 34 | 0 | |||
1986-87 | 34 | 0 | 2 | 0 | - | 9 | 0 | 45 | 0 | |||
1987-88 | 25 | 0 | 5 | 0 | - | 5 | 0 | 35 | 0 | |||
합계 | 156 | 0 | 26 | 0 | 0 | 0 | 33 | 0 | 215 | 0 | ||
리르서 | 1988-89 | 1부 리그 | 23 | 0 | - | - | 2 | 0 | 25 | 0 | ||
합계 | 23 | 0 | 0 | 0 | 0 | 0 | 2 | 0 | 25 | 0 | ||
트라브존스포르 | 1989-90 | 쉬페르리그 | 25 | 0 | 4 | 0 | - | 4 | 0 | 33 | 0 | |
합계 | 23 | 0 | 0 | 0 | 0 | 0 | 2 | 0 | 25 | 0 | ||
경력 총합 | 507 | 0 | 63 | 0 | 2 | 0 | 53 | 0 | 625 | 0 |
9.2. 국가대표팀
국가대표팀 | 연도 | 출전 | 득점 |
---|---|---|---|
벨기에 | 1976 | 1 | 0 |
1977 | 4 | 0 | |
1978 | 5 | 0 | |
1979 | 3 | 0 | |
1980 | 8 | 0 | |
1981 | 4 | 0 | |
1982 | 9 | 0 | |
1983 | 4 | 0 | |
1984 | 8 | 0 | |
1985 | 4 | 0 | |
1986 | 10 | 0 | |
1987 | 4 | 0 | |
총합 | 64 |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