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1.1. 출생과 가족
장 가뱅은 1904년 5월 17일 프랑스 파리 9구 로슈슈아르 대로 23번지에서 장 알렉시스 몽코르제(Jean-Alexis Moncorgé프랑스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페르디낭 몽코르제는 카페 주인이자 카바레 연예인이었으며, '가뱅'이라는 예명을 사용했다. 어머니 마들렌 프티는 가수였다. 그는 파리에서 북쪽으로 약 35 km 떨어진 발두아즈주 메리엘 마을에서 자랐다.
1.2. 어린 시절과 교육
가뱅은 클리냥쿠르 거리 초등학교에서 초등 교육을 마쳤고, 이후 리세 장송 드 사이에 진학했지만 일찍 학업을 중단했다. 그는 파리 전력 배급 회사의 사무실 심부름꾼, 드랑시 자동차 부품 창고의 창고지기 등 다양한 잡일을 하며 19세까지 노동자로 일했다.
1.3. 초기 직업과 연예계 입문
1922년, 18세의 나이에 가뱅은 폴리 베르제르 극장의 단역으로 연예계에 발을 들였다. 군 복무를 마친 후, 그는 "장 가뱅"이라는 예명으로 파리의 뮤직홀과 오페레타에서 활동하며 당시 유행하던 모리스 슈발리에의 노래 스타일을 모방했다. 그는 가비 바세와 함께 브라질로 순회공연을 떠났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파리로 돌아와 물랭 루주에서 일했다. 1928년 봄, 가수 겸 배우 미스탱게트의 극단에 합류하여 연극 '파리 키 투르네'에서 웨이터 역을 맡았고, 이후 오페레타 '플로시'와 '왕 파우솔의 모험'에서 연인 역을 연기하며 점차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그는 '플로시'의 공동 출연자였던 재클린 프란셀과 관계를 맺으며 가비 바세와 이혼했다.
1930년, 가뱅은 무성 단편 영화 '릴레트의 유산'과 '조련사를 찾습니다'에 출연하며 영화계에 데뷔했다. 같은 해, 그는 전 부인 가비 바세와 함께 한스 슈타인호프와 르네 푸졸이 감독한 프랑스 최초의 유성 영화 중 하나인 '각자의 행운'에 출연하며 유성 영화로 전환했다. 이후 4년간 '메피스토', '파리 베갱', '이 모든 것은 사랑의 가치가 없다', '글로리아', '비행대대의 즐거움', '아름다운 선원'(그의 첫 주연급 역할), '터널', '잘 가라 아름다운 날들' 등 10여 편의 영화에서 조연으로 출연했다.
2. 군 복무
가뱅은 프랑스 해병대에서 군 복무를 마쳤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인 1939년 9월 3일, 그는 해군에 동원되어 셰르부르에 주둔했다. 1943년 4월, 그는 샤를 드골 장군이 이끄는 자유 프랑스군에 자원 입대하여 연합군과 함께 북아프리카에서 싸웠다. 그는 군용 유조선 '엘로른'을 타고 카사블랑카로 대서양을 횡단했으며, 필리프 르클레르 드 오트클로크 장군의 제2기갑사단 소속 해병 기갑 여단 2중대에서 '수플뢰르 2호' 장갑차의 차장으로 복무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가뱅은 파리를 해방시킨 제2기갑사단과 함께 복무했다. 1945년 봄에는 라로셸의 독일 요새 해방 작전과 나치 독일에 대한 연합군의 점령 작전에 참여했다. 전쟁 후 그는 군사 훈장과 1939-1945 전쟁십자훈장을 수훈했다. 1945년 7월, 41세의 나이로 전역할 당시 그의 머리는 이미 희끗희끗했다.
3. 연기 경력
3.1. 스타덤으로의 도약
가뱅은 1934년 쥘리앙 뒤비비에 감독의 영화 《마리아 샤프들렌》에서 비로소 진정한 인정을 받았다. 이후 그는 1935년 뒤비비에 감독의 《골고다》에서 폰티우스 필라투스 역을 맡았고, 1935년 영화 《라 반데라》에서 로맨틱한 영웅으로 출연하며 주요 스타로 자리매김했다. 이 영화는 그의 첫 성공작으로 기록된다. 1936년에는 《아름다운 팀》에서 '강변을 거닐 때'라는 노래를 불렀다.

1937년, 가뱅은 뒤비비에 감독과 다시 협력하여 큰 성공을 거둔 《망향》에 출연했다. 이 영화의 인기는 그에게 국제적인 명성을 안겨주었다. 같은 해, 그는 장 르누아르 감독의 반전 영화 《대탈주》에 출연했는데, 이 영화는 뉴욕시의 한 극장에서 전례 없는 6개월 동안 상영되었다. 이어서 르누아르의 또 다른 주요 작품인 에밀 졸라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필름 누아르 비극 《인간 야수》에 시몬 시몽과 함께 출연했다. 또한 마르셀 카르네 감독의 시적 리얼리즘 고전 중 하나인 《안개 낀 부두》에도 출연했다. 그의 거친 카리스마는 험프리 보가트나 제임스 캐그니와 비견되기도 했다. 1938년에는 모리스 글레이즈 감독의 《산호초》에 출연했고, 1939년에는 카르네 감독의 《새벽》에 출연했다.
3.2. 할리우드 진출과 제2차 세계 대전
1930년대 후반, 가뱅은 할리우드로부터 수많은 출연 제안을 받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는 모두 거절했다. 1940년 독일의 프랑스 점령 이후, 그는 장 르누아르와 쥘리앙 뒤비비에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다. 할리우드에 머무는 동안, 가뱅은 배우 마를레네 디트리히와 1948년까지 이어진 열정적인 연애 관계를 시작했다.
미국에서 출연한 영화들, 즉 아치 메이요 감독의 《문타이드》(1942)와 뒤비비에 감독의 《사기꾼》(1944)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1943년 1월 18일, 그가 미국에 있는 동안 프랑스 엑스 시의 법원은 가뱅에게 전적으로 책임이 있는 것으로 판결하여 두 번째 부인 잔 모셴과의 이혼을 선고했다.
3.3. 전후 경력과 재기
1945년, 마르셀 카르네 감독은 가뱅과 마를레네 디트리히를 주연으로 한 영화 《밤의 문》에 캐스팅했다. 그러나 디트리히는 시나리오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고, 전후 프랑스 관객들에게 자신의 독일어 억양이 좋지 않게 받아들여질 것을 우려하여 프로젝트에서 하차했다. 디트리히가 하차하자 가뱅도 뒤따라 하차했고, 이는 카르네와의 불화로 이어졌다. 그는 자신과 디트리히를 함께 캐스팅할 프랑스 제작자와 감독을 찾았으나, 영화 《마르탱 루마냐크》는 성공하지 못했고 그들의 개인적인 관계도 곧 끝이 났다. 이 영화는 비평가들의 환영을 받지 못했으나, 200만 장 이상의 판매량을 기록하며 상업적으로는 성공했다. 그러나 이 성공은 다음 해의 영화 《미루아르》에서는 재현되지 않았다.

1948년, 가뱅은 르네 클레망 감독의 시적 리얼리즘 영화 《철창 너머》에 출연했는데, 이 영화는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했지만 가뱅에게는 큰 인정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1949년, 그는 앙리 베른슈타인의 연극 '목마름'에서 유일한 정극 무대 역할을 맡았다. 이 연극은 파리에서 6개월간 공연되었고, 가뱅은 "일류 무대 배우"라는 극찬을 받았다. 이러한 인정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후 영화들은 프랑스 박스오피스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고, 다음 5년 동안 계속되는 실패를 겪었다.
가뱅의 경력은 1954년 자크 베케르 감독의 영화 《현금에 손대지 마라》가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으며 국제적으로 큰 수익을 올리기 전까지는 잊힐 위기에 처한 듯 보였다. 이 영화는 프랑스에서만 400만 장 이상 판매되며 진정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이후 마리아 펠릭스와 프랑수아즈 아르눌과 함께 르누아르의 《프렌치 캉캉》에서 다시 작업했다. 가뱅은 1958년, 1959년, 1963년에 걸쳐 조르주 시메농의 탐정 쥘 메그레 역으로 세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3.4. 후기 경력 및 주요 배역
1954년 이후 20년 동안, 가뱅은 거의 50편에 달하는 영화에 더 출연했으며, 대부분 상업적으로나 비평적으로 매우 성공적이었다. 이 중 상당수는 동료 배우 페르낭델과 함께 설립한 제작사 가페르 필름스(Gafer Films)에서 제작되었다. 그의 공동 출연자로는 브리지트 바르도(《불행의 경우》), 알랭 들롱(《시실리안》, 《지하실의 멜로디》, 《암흑가의 두 사람》), 장폴 벨몽도(《겨울의 원숭이》), 루이 드 퓌네스(《문신을 한 남자》) 등 전후 영화계의 주요 인물들이 포함되었다.

1960년대 이후, 그는 노련한 노인 역할을 중심으로 조연으로 활동하기 시작했으며, 《지하실의 멜로디》나 《암흑가의 두 사람》과 같은 영화에서 그의 중후한 연기가 특히 잘 알려져 있다. 이 시기에는 조르주 시메농의 메그레 경감 역을 자신의 대표 배역으로 삼아 시리즈 작품이 제작되기도 했다. 또한 그는 갱스터 영화에 다수 출연하여 만년에는 마피아 보스 역을 훌륭하게 소화했다.
1970년대에도 가뱅은 7편의 영화에 더 출연했는데, 그중에는 피에르 그라니에르-데페르의 《라 호스》, 호세 조반니의 《암흑가의 두 사람》(알랭 들롱과 공동 출연), 그리고 1971년 영화 《고양이》가 있다. 그는 이 영화를 자신의 전후 가장 성공적인 영화로 여겼으며, 1971년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1976년 4월 3일, 가뱅은 제1회 세자르상 시상식의 의장을 맡았다. 2주 후, 그는 장 지로 감독의 영화 《성스러운 해》에 출연했는데, 이 영화는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3.5. 연기 스타일과 대중적 이미지
장 가뱅은 전전(戰前)부터 전후(戰後)에 걸쳐 프랑스 영화를 대표하는 스타로, 깊이 있는 연기와 묵직한 용모로 큰 인기를 누렸다. 그의 거친 카리스마는 대중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는 또한 소탈한 성격으로 동료 배우들에게도 사랑받는 배우였다.
3.6. 제작사 설립
1963년, 장 가뱅은 동료 배우 페르낭델과 함께 영화 제작사 '가페르 필름스'(Gafer Films프랑스어)를 설립했다. 이 회사가 제작한 첫 영화는 가뱅과 페르낭델이 함께 출연한 《볼품없는 나이》였다.
4. 개인사
가뱅은 세 번 결혼하고 세 번 이혼했다. 1925년 마리-루이즈 바세(가비)와 결혼했으나 이혼했다. 1933년 11월 20일 파리 16구 시청에서 잔 모셴과 재혼했으나, 1943년 1월 18일 가뱅에게 전적으로 책임이 있는 것으로 판결되어 이혼했다. 그는 할리우드에서 배우 마를레네 디트리히와 1948년까지 이어진 열정적인 연애 관계로도 유명하다. 1949년 3월 28일, 그는 패션 브랜드 랑방의 패션 모델이었던 크리스티안 푸르니에(1918-2002)와 재혼했다. 그들은 세 자녀, 플로랑스(1949), 발레리(1952), 마티아스(1956)를 두었다.
5. 수상 및 영예
장 가뱅은 프랑스 영화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공로를 인정받아 레지옹 도뇌르 훈장의 '오피시에' 등급을 수훈했다. 또한 그는 군 복무 중 군사 훈장과 1939-1945 전쟁십자훈장을 받았다.
그의 주요 영화제 수상 경력은 다음과 같다.
- 1951년: 베네치아 영화제 볼피컵 남우주연상 - 영화 《밤은 나의 왕국》
- 1954년: 베네치아 영화제 볼피컵 남우주연상 - 영화 《파리의 공기》와 《현금에 손대지 마라》
- 1959년: 베를린 국제 영화제 남우주연상 - 영화 《방랑자 아르키메데스》
- 1971년: 베를린 국제 영화제 남우주연상 - 영화 《고양이》
- 1987년: 세자르상 명예상 (사후 추서)
6. 사망
장 가뱅은 1976년 11월 15일, 파리 외곽 뇌이쉬르센에 위치한 아메리칸 병원에서 백혈병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향년 72세. 그의 장례식은 1976년 11월 17일 페르 라셰즈 묘지의 화장터에서 생중계되었다. 그의 유언에 따라,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 대통령의 특별 허가를 받아 1976년 11월 19일 군함 '데트루아야'에 실려 브레스트에서 20 nmi 떨어진 이루아즈해에 유해가 뿌려졌다. 그의 유언은 "제라르 필리프나 에디트 피아프의 무덤에서처럼 사람들이 내 무덤에서 귀찮게 굴지 않도록 땅에 묻히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7. 유산과 영향력
7.1. 프랑스 영화계에서의 위상
장 가뱅은 프랑스 영화사에서 가장 위대한 스타 중 한 명으로 손꼽히며, 전전부터 전후에 걸쳐 프랑스 영화계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인물로 평가받는다.
7.2. 일본 문화계에 미친 영향
장 가뱅은 특히 '식사 연기'에 능한 배우로 알려져 있으며, 일본 문화계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일본의 배우 다카쿠라 켄은 "식사 연기는 가뱅을 보고 배웠다"고 말했으며, 영화 평론가 요도가와 나가하루도 그를 "음식을 잘 먹는 배우"라고 평했다. 다카쿠라 켄은 교토의 단골 카페에 "항상 폐를 끼쳐서"라는 말과 함께 가뱅의 대형 포스터를 선물하기도 했는데, 이 포스터는 지금도 그 가게 카운터에 걸려 있다. 미후네 도시로 또한 가뱅을 존경하는 일본 배우 중 한 명이었으며, 함께 출연할 계획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영화와 미식에 조예가 깊었던 작가 이케나미 쇼타로의 대표작 《검객 장사》와 《오니헤이 한카초》는 가뱅의 작품, 특히 그의 식사 장면 연기에서 강한 영향을 받았다. 가와모토 사부로는 이케나미의 저서 '식탁의 정경'에 실린 가뱅 평을 인용하기도 했다. 다만 이케나미 본인은 오니헤이 역에 가뱅을 대입하는 것을 싫어하며 "오니헤이는 더 잘생긴 남자여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영화 《현금에 손대지 마라》를 다시 감상한 후, 작품과 함께 가뱅의 연기를 극찬했다。 일본의 성우 모리야마 슈이치로는 가뱅의 일본어 더빙을 거의 전담했으며, 그의 더빙 연기는 동료 성우들과 시청자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모리야마 본인에 따르면 "그때까지 (다른 성우가) 녹음해 둔 장 가뱅의 목소리를 전부 제가 다시 녹음한 이후, NHK를 비롯한 모든 민영 방송국에서 제가 담당하게 되었다"고 한다. 미야자키 감독은 자신이 연출한 《붉은 돼지》에서 모리야마에게 주연을 맡기며 연기 지도 시 "장 가뱅의 더빙 같은 연기를 해달라"고 주문했는데, 이는 이 작품의 주인공인 돼지의 모델 중 하나가 가뱅임을 시사한다.
치바 신이치가 준레귤러로 출연했던 특촬 프로그램 《우주형사 갸반》의 주인공과 프로그램 이름은 장 가뱅에서 유래했다. 나카다이 다쓰야 주연의 영화 《길》은 가뱅의 작품 《헤드라이트》를 리메이크한 것으로, 나카다이 또한 가뱅을 경애하며 가뱅 역을 연기했다. 프랑스 태생의 일본 배우 다니 요코는 가뱅과 영화 《그 얼굴을 빌려》에서 함께 출연하기도 했다.
7.3. 기념 사업 및 헌사

- 1981년, 배우 루이 드 퓌네스의 주도로 프랑스 영화계의 젊은 유망 남우에게 수여되는 장 가뱅상이 설립되어 1981년부터 2006년까지 매년 시상되었다. 그러나 2008년 시상식 운영 위원회와 가뱅의 유족 사이에 문제가 발생하여, 이 상은 파트리크 드베르상으로 개명되었다. 이 상은 여배우에게 수여되는 로미 슈나이더상과 제휴 관계에 있었다.
- 1992년, 가뱅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발두아즈주 메리엘 코뮌에 장 가뱅 박물관이 설립되었다. 이 박물관은 그의 일대기와 영화 관련 기념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박물관 입구에 설치된 가뱅의 흉상은 장 마레가 조각한 것이다.
- 2008년 5월 16일, 당시 파리 18구 구청장이었던 다니엘 바양과 가뱅의 자녀들이 몽마르트르 기슭의 퀴스틴 거리와 랑베르 거리 모퉁이에 '장 가뱅 광장'을 개장했다.
- 몽주네브르의 '시네마 장 가뱅'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몽주네브르는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된 스키 리조트로, 가뱅과 장폴 사르트르를 비롯한 프랑스 예술가 및 지식인들의 인기 휴가지였다.
- 가뱅은 오른주의 본푸아와 물랭라마르슈에 토지를 매입했으며, 물랭라마르슈에는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고, 그가 만든 경마장인 '이포드롬 장 가뱅'도 여전히 그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 2011년에는 스위스 포랑트뤼 시에도 '장 가뱅 광장'이 개장되었다.
8. 주요 출연작 목록
장 가뱅은 총 95편의 영화에 출연했으며, 브리지트 바르도, 알랭 들롱, 장폴 벨몽도, 루이 드 퓌네스 등 유명 배우들과 함께 작업했다. 그의 영화 중 일부는 엄청난 흥행을 기록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레 미제라블》은 994만 장을, 《나폴레옹》은 541만 장을, 《파리 횡단》은 489만 장을, 《시실리안》은 482만 장을 판매했다.
공개 연도 | 원제 | ||
---|---|---|---|
1930 | Chacun sa chance | 각자의 행운 | |
1930 | Méphisto | 메피스토 | |
1930 | Ohé! les valises | 오! 가방들 | |
1930 | On demande un dompteur | 조련사를 찾습니다 | |
1931 | Paris Béguin | 파리 베갱 | 밥 |
1932 | Les Gaietés de l'escadron | 비행대대의 즐거움 | 프리코 |
1933 | Du haut en bas | 위에서 아래로 | 샤를 |
1933 | Le tunnel | 터널 | 맥 알란 |
1934 | Maria Chapdelaine | 마리아 샤프들렌 | 프랑수아 파라디 |
1934 | Zouzou | 주주 | 장 |
1935 | Golgotha | 골고다 | 폰티우스 필라투스 |
1935 | La Bandera | 라 반데라 | 피에르 질레트 |
1936 | La belle équipe | 아름다운 팀 | 장 |
1936 | Les Bas-fonds | 밑바닥 | 바스카 페펠 |
1937 | Gueule d'amour | 사랑의 입 | 뤼시앵 부라슈 |
1937 | La grande illusion | 대탈주 | 마레샬 중위 |
1937 | Le Messager | 메신저 | |
1937 | Pépé le Moko | 망향 | 페페 |
1938 | La bête humaine | 인간 야수 | 자크 랑티에 |
1938 | Le Quai des brumes | 안개 낀 부두 | 장 |
1938 | Le Récif de corail | 산호초 | 트로트 레나르트 |
1939 | Le jour se lève | 새벽 | 프랑수아 |
1941 | Remorques | 폭풍우 | 앙드레 로랑 선장 |
1942 | Moontide | 문타이드 | 보보 |
1944 | The Impostor | 사기꾼 | 클레망 |
1946 | Martin Roumagnac | 마르탱 루마냐크 | 마르탱 루마냐크 |
1947 | Miroir | 거울 | 뤼사크 |
1949 | Au-delà des grilles | 철창 너머 | 피에르 아리뇽 |
1950 | La Marie du port | 항구의 마리 | 앙리 샤틀라르 |
1950 | Pour l'amour du ciel | 하늘의 사랑을 위하여 | 카를로 바키 |
1951 | La nuit est mon royaume | 밤은 나의 왕국 | 레몽 팽사르 |
1952 | La Minute de vérité | 진실의 순간 | 피에르 리샤르 |
1952 | La Vérité sur Bébé Donge | 베베 동주에 대한 진실 | 프랑수아 동주 |
1952 | Le Plaisir | 쾌락 | 조제프 리베 |
1953 | La vierge du Rhin | 라인강의 처녀 | 자크/마르탱 |
1954 | L'Air de Paris | 파리의 공기 | 빅토르 르 가렉 |
1954 | French Cancan | 프렌치 캉캉 | 앙리 당글라르 |
1954 | Razzia sur la chnouf | 마약 단속 | 앙리 페레 |
1954 | Touchez pas au grisbi | 현금에 손대지 마라 | 막스 |
1955 | Chiens perdus sans collier | 목줄 없는 개들 | 라미 판사 |
1955 | Des gens sans importance | 볼품없는 사람들 | 장 비아르 |
1955 | Gas-oil | 가스 오일 | 장 샤프 |
1955 | Napoléon | 나폴레옹 | 장 란 |
1956 | Crime et Châtiment | 죄와 벌 | 갈레 경감 |
1956 | Le Sang à la tête | 머리 위의 피 | 프랑수아 카르디노 |
1956 | La Traversée de Paris | 파리 횡단 | 그랑질 |
1956 | Voici le temps des assassins | 살의의 순간 | 앙드레 샤틀랭 |
1957 | Le cas du Dr Laurent | 로랑 박사의 경우 | 로랑 박사 |
1957 | Le rouge est mis | 빨간불이 켜졌다 | 루이 베르탱 / 루이 르 블롱 |
1958 | Archimède le clochard | 방랑자 아르키메데스 | 아르키메데스 |
1958 | En cas de malheur | 불행의 경우 | 앙드레 고비요 |
1958 | Le désordre et la nuit | 무질서와 밤 | 조르주 발루아 경감 |
1958 | Les Grandes Familles | 대가족 | 노엘 슈들러 |
1958 | Les Misérables | 레 미제라블 | 장 발장 |
1958 | Maigret tend un piège | 매그레 서장 덫을 놓다 | 메그레 경감 |
1959 | Maigret et l'affaire Saint-Fiacre | 생 피아크르 사건과 메그레 | 메그레 경감 |
1959 | Rue des Prairies | 프레리 거리 | 앙리 느뵈 |
1960 | Le baron de l'écluse | 수문 남작 | 앙투안 남작 |
1960 | Le Président | 대통령 | 에밀 보포르 |
1961 | Le cave se rebiffe | 두목은 반항한다 | 페르디낭 마레샬 |
1962 | Le Gentleman d'Epsom | 엡솜의 신사 | 리샤르 브리앙-샤르메리 |
1962 | Un singe en hiver | 겨울의 원숭이 | 알베르 캉탱 |
1963 | Maigret voit rouge | 메그레 붉은 불을 보다 | 메그레 경감 |
1963 | Mélodie en sous-sol | 지하실의 멜로디 | 샤를 |
1964 | L'Âge ingrat | 볼품없는 나이 | |
1964 | Monsieur | 무슈 | 르네 뒤셴 / 조르주 보댕 |
1965 | Du rififi à Paname | 파나마의 리피피 | 폴 베르제 |
1965 | Le Tonnerre de Dieu | 신의 천둥 | 레앙드르 브라사크 |
1966 | Le Jardinier d'Argenteuil | 아르장퇴유의 정원사 | |
1967 | Le Pacha | 파샤 | 루이 조스 경감 |
1967 | Le Soleil des voyous | 건달들의 태양 | 드니 페랑 |
1968 | Le Tatoué | 문신을 한 남자 | 잉게랑 백작 |
1969 | Le Clan des Siciliens | 시실리안 | 비토리오 마날레제 |
1969 | Sous le signe du taureau | 황소자리의 표시 아래 | |
1970 | La Horse | 라 호스 | 오귀스트 마루아예르 |
1971 | Le Chat | 고양이 | 줄리앙 부앙 |
1971 | Le Drapeau noir flotte sur la marmite | 검은 깃발이 냄비 위에서 펄럭인다 | 빅토르 플루바즈 |
1972 | Le Tueur | 살인자 | 르 겐 경감 |
1973 | Deux hommes dans la ville | 암흑가의 두 사람 | 제르맹 카즈뇌브 |
1973 | L'Affaire Dominici | 도미니치 사건 | 가스통 도미니치 |
1974 | Verdict | 평결 | 르 겐 판사 |
1976 | L'Année sainte | 성스러운 해 | 막스 랑베르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