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자말 압둘라티프(Jamaal Abdul-Lateef자말 압둘라티프영어, 1953년 5월 2일 출생), 본명은 잭슨 키스 윌키스(Jackson Keith Wilkes잭슨 키스 윌키스영어)로 더 잘 알려진 자말 윌키스(Jamaal Wilkes자말 윌키스영어)는 미국의 전 농구 선수로, NBA에서 스몰 포워드로 활약했다. 그는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와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에서 총 4번의 NBA 챔피언십 우승을 차지했으며, 3차례 NBA 올스타에 선정되었다. '실크'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던 그는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윌키스는 UCLA 브루인스에서 대학 농구를 했으며, 존 우든 감독의 지도 아래 두 차례 NCAA 챔피언십에서 우승하며 두 번의 컨센서스 퍼스트 팀 올 아메리칸에 선정되었다. 1974년 NBA 드래프트 1라운드에서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에 지명된 그는 첫 시즌에 NBA 올해의 신인상을 수상하며 팀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이후 레이커스 소속으로 '쇼타임' 시대를 열며 세 번의 NBA 챔피언십 우승을 더 추가했다. 그의 등번호 52번은 UCLA와 레이커스 양쪽에서 영구 결번되었다. 윌키스는 1975년 이슬람교로 개종하면서 법적으로 자말 압둘라티프로 이름을 변경했지만, 대중적 인식을 위해 계속해서 본명인 윌키스를 사용했다.
2. 초기 생애 및 배경
자말 윌키스는 어린 시절부터 농구에 대한 재능을 보였으며, 가족의 영향과 교육적 배경 속에서 성장했다.
2.1. 출생 및 가족
잭슨 키스 윌키스는 1953년 5월 2일 캘리포니아주 버클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침례교 목사인 L. 리앤더 윌키스와 델마(벤슨) 윌키스 부부의 다섯 자녀 중 한 명이었다. 그가 태어날 당시 부모에게는 두 명의 딸이 있었으며, 그의 형은 그가 태어나기 전인 13개월 때 영아 돌연사로 사망했다. 이 비극은 오클랜드 해군 기지에서 일하던 아버지 리앤더가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된 계기가 되었다.
윌키스는 '재키'라는 별명을 좋아하지 않아 '키스'로 불리기를 원했다. 그의 가족은 잠시 아칸소주 파인 블러프와 오하이오주 데이턴에 머물렀다가, 1959년 아버지가 올리벳 침례교회의 목사가 되면서 캘리포니아주 벤투라로 이주하여 성장했다. 그는 워싱턴 초등학교와 카브릴로 중학교를 다녔으며, 5학년을 월반하기도 했다. 그의 누나 나오미는 두 학년을 월반하여 16세에 스탠퍼드 대학교에 입학했으며, 윌키스에게 농구를 가르쳐준 톰보이였다.
2.2. 유년 시절 및 교육
윌키스는 어린 시절부터 농구에 대한 열정을 키웠다. 그는 벤투라 고등학교에서 3학년이던 1969년에 채널 리그에서 두 번째 올리그 선수로 선정되었고, 리그 올해의 선수로 뽑혔다. 그해 여름, 그의 아버지가 산타바바라의 세컨드 침례교회 목사로 부임하면서 가족은 그곳으로 이사했다. 윌키스는 벤투라 고등학교의 학생회장이 될 예정이었고, 부모님은 그가 벤투라에 머물도록 허락했으나, 그는 학년이 시작되기 직전에 가족과 떨어져 있고 싶지 않다고 결정했다. 그의 이사 결정은 논란이 있었지만, 벤투라의 코치 밥 스완슨은 "그가 내 아이였다면 나도 똑같이 했을 것이다. 그는 16살이었고 가족과 함께 있어야 했다"며 그를 지지했다.
2.3. 고등학교 경력
산타바바라 고등학교에서 미래의 NBA 선수인 돈 포드와 함께 활약한 윌키스는 돈스팀을 26연승으로 이끌었으며, 1969-70 시즌 동안 플레이오프 준결승에 진출했다. 윌키스는 헬름스 재단으로부터 CIF 클래스 AAAA 올해의 선수로 선정되었다. 또한 그는 퍼레이드, 스콜라스틱 매거진, 선키스트-코치 앤 애슬리트로부터 고등학교 올 아메리칸으로 선정되었다. 윌키스의 등번호는 벤투라 고등학교와 산타바바라 고등학교 모두에서 영구 결번되었다.
3. 대학 농구 경력
윌키스는 UCLA에서 존 우든 감독의 지도 아래 팀의 핵심 선수로 활약하며 대학 농구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3.1. UCLA 시절
UCLA 입학 첫 해, 윌키스는 신입생 팀에서 경기당 평균 20.0점을 기록하며 팀 내 최고 득점자가 되었다. 당시 신입생 팀은 20승 0패를 기록했으며, 상대 팀을 경기당 평균 39점 가까이 앞섰다. 이 팀에는 그렉 리(17.9점)와 빌 월튼(18.1점, 16리바운드, 68.6% 야투율)도 포함되어 있었다.
윌키스의 '실크'라는 별명은 UCLA에서 시작되었다. 어느 날, 폴리 파빌리온에서 신입생들의 연습을 지켜보던 UCLA 밴드 멤버 올리버 트리그는 윌키스의 움직임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그는 팀원들에게 윌키스의 움직임이 "실크처럼 부드럽다(smooth as silk)"고 극찬했고, 이후 팀원들은 윌키스를 '실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윌키스의 2학년 시즌인 1971-72년, 브루인스 방송인 딕 엔버그가 팀원들이 그를 '실크'라고 부르는 것을 듣고 방송에서 이 별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3.2. NCAA 우승 및 주요 성과
UCLA 농구팀은 윌키스의 2학년 시즌을 앞두고 5회 연속 전국 챔피언십 우승과 지난 시즌 마지막 15경기 승리 기록을 이어가고 있었다. 당시 팀은 시드니 윅스, 커티스 로, 스티브 패터슨 등 3회 연속 NCAA 우승을 이끈 선수들이 떠난 상태였다. 윌키스는 동료 2학년인 월튼, 리와 함께 주전 라인업에 합류했으며, 유일한 기존 주전인 헨리 비비와 래리 파머와 함께 뛰었다. 브루인스 팀은 시즌 첫 7경기에서 100점 이상을 기록하며 완벽한 30승 0패 시즌을 달성했고, 경기당 평균 30.3점 차이로 상대를 압도했다. 윌키스는 경기당 평균 8.2리바운드를 기록하며 대학 경력 최고 기록을 세웠고, 올-퍼시픽-8 세컨드 팀에 선정되었다.
1972년 NCAA 챔피언십 결승전에서 UCLA는 플로리다 스테이트를 81-76으로 꺾고 우승했다. 윌키스는 16번의 슈팅 중 11번을 성공시키며 시즌 최고인 23점을 기록했고, 10리바운드를 추가했다. 월튼은 24점 20리바운드로 두 번의 파이널 포 최우수 선수 중 첫 번째를 차지했다. 두 선수 모두 올 토너먼트 팀에 선정되었다.
1972-73 시즌, 윌키스는 평균 14.8점을 기록하며 컨센서스 퍼스트 팀 올 아메리칸에 선정되었고, UCLA는 다시 한번 30승 0패를 기록했다. 1973년 1월 27일, 그들은 노터데임을 꺾고 61연승을 달성하며 샌프란시스코의 기록을 경신했다. 브루인스는 챔피언십 결승전에서 멤피스 스테이트를 상대로 월튼이 22번의 슈팅 중 21번을 성공시키며 44점을 기록하는 활약에 힘입어 우승했다. 윌키스는 16점과 7리바운드를 기록하며 팀에서 유일하게 두 자릿수 득점을 기록한 선수였다.
UCLA는 1973-74 시즌을 75연승으로 시작했으며, 이 기록을 88연승까지 늘렸으나, 노터데임에게 71-70으로 패배하며 연승 행진을 마감했다. 브루인스는 1974년 NCAA 토너먼트 준결승에 진출했으나, 노스캐롤라이나 주립에게 연장전 끝에 80-77로 패배했다. 윌키스는 시니어 시즌에 경기당 평균 16.7점을 기록하며 대학 경력 최고 기록을 세웠고, 올 아메리칸 퍼스트 팀에 만장일치로 선정되었다. 또한 그는 2년 연속 올-퍼시픽-8 퍼스트 팀에 만장일치로 선정되었다.
3년 동안 윌키스가 속한 팀은 86승 4패의 기록을 세웠으며, 4패는 모두 그의 시니어 시즌에 발생했다. 그는 브루인스에서 가장 꾸준한 선수 중 한 명으로, 경기당 평균 15.0점, 7.4리바운드, 51.4%의 야투율을 기록했다. 윌키스는 3회 연속 퍼스트 팀 아카데믹 올-아메리칸(1972-1974)에 선정되었으며, 1974년 UCLA에서 경제학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4. NBA 경력
자말 윌키스는 NBA에서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와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에서 활약하며 총 4번의 챔피언십 우승을 차지했다.
4.1.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시절
윌키스는 1974년 NBA 드래프트에서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에 전체 11순위로 지명되었다. 드래프트 이후 그는 영화 "콘브레드, 얼 앤 미"를 촬영하느라 훈련을 소홀히 했다. 신인 캠프에 몸이 좋지 않은 상태로 도착한 그는 준비되지 않은 자신에게 실망했고, 곧바로 체육관과 무술 수업을 통해 몸 상태를 개선했다.
1974-75 시즌을 앞두고 워리어스가 우승할 것이라고 예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윌키스는 단 8경기 만에 주전으로 발돋움하여 기존의 데렉 디키를 대체했다. 릭 배리와 함께 스몰 포워드로 뛰었지만, 198 cm의 날씬한 윌키스는 파워 포워드로도 활약했다. 그는 경기당 평균 14.2점을 기록하며 배리(30.6점)에 이어 워리어스 내 득점 2위를 차지했고, 경기당 8.2리바운드로 팀 내 리바운드 2위였다. 그는 NBA 올해의 신인상을 수상했다. 배리는 "[윌키스]는 리바운드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매일 밤 폴 사일러스와 스펜서 헤이우드와 맞선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제 역할을 해낸다"고 말했다. 팀 동료 빌 브리지스는 윌키스가 "매우 똑똑하고 기본기가 탄탄하다. 득점하지 못할 때도 기여한다. 그는 이미 완성된 선수다"라고 덧붙였다.
플레이오프에서 윌키스는 경기당 평균 15.0점을 기록했으며, 시카고 불스의 밥 러브와 워싱턴 불리츠의 엘빈 헤이즈를 상대로 한 수비에서 찬사를 받았다. 워리어스는 1975년 NBA 파이널에서 워싱턴을 스윕하며 우승했다. 다음 시즌인 1975-76 시즌, 그는 첫 NBA 올스타 게임에 선정되었다. 그는 다시 한번 워리어스 내 리바운드 2위(8.8개)를 기록했으며, 두 번 연속 NBA 올-디펜시브 세컨드 팀에 선정되는 영광을 안았다。 윌키스의 득점 평균은 정규 시즌 17.8점, 포스트시즌 15.9점으로 향상되었고, 골든스테이트는 서부 컨퍼런스 결승에 진출했지만 7경기 만에 패배했다.
골든스테이트에서 3년 동안 경기당 평균 16.5점과 8.2리바운드를 기록한 후, 윌키스는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와 자유 계약 선수로 계약했다. 윌키스에 따르면, 당시 워리어스 단장이었던 딕 버틀립이 윌키스가 좋은 신인 시즌을 보이면 계약을 재협상하겠다는 약속을 어겼다고 한다. 버틀립은 그러한 합의를 부인했다. 윌키스는 레이커스와 계약하면서 더 적은 돈을 받았다고 알려졌다. 그는 "돈이 전부가 아니다"라며 "환경 변화와 새로운 시작이 필요했다"고 말했다. 그가 자랐고 대학을 다녔던 남부 캘리포니아로 돌아가는 것이 그의 결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베이 에어리어의 일부 스포츠 기자들이 그를 옵션을 행사하고 같은 주 내 태평양 디비전 라이벌 팀과 계약한 '탈영병'으로 묘사한 것에 대해 불쾌해했다.
4.2.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시절

레이커스는 리그 최고인 53승을 기록했지만,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에게 서부 컨퍼런스 결승에서 4-0으로 패배하며 탈락한 상태였다. 윌키스는 레이커스의 감독 제리 웨스트가 탐내던 최고 수준의 포워드였다. 윌키스의 레이커스 경력은 1977-78 시즌에 견고하게 시작되었지만, 손가락 골절과 다른 부상으로 인해 출전이 제한되었고, 시즌 후반기 대부분을 결장하며 51경기에 출전해 평균 12.9점을 기록했다. 익명의 팀 관계자는 그를 꾀병을 부린다고 비난했고, 레이커스 팬들은 그가 과대평가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다음 시즌인 1978-79 시즌에 경기당 평균 18.6점, 50.4%의 야투율을 기록하며 최고의 프로 시즌을 보냈다. 1978년부터 1983년까지 5시즌 동안 그는 카림 압둘-자바에 이어 레이커스의 두 번째 득점원이었다.
윌키스는 1979-80 시즌을 앞두고 자유 계약 선수였고, 새로운 레이커스 구단주 제리 버스는 그와 재계약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레이커스는 에이드리언 댄틀리를 유타 재즈로 트레이드하고, 스펜서 헤이우드를 영입했다. 헤이우드는 윌키스가 팀에 합류한 이후 레이커스의 첫 진정한 파워 포워드였으며, 이로 인해 윌키스는 스몰 포워드로 이동하여 자신보다 12.7 cm 크고 22.7 kg 무거운 선수들을 수비하는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윌키스는 NBA 경력 내내 파워 포워드로 뛰고 있었다. 그는 연봉 60.00 만 USD에 장기 계약을 체결한 것으로 알려졌다. 레이커스는 또한 그해 매직 존슨을 전체 1순위로 지명했다. 잭 맥키니 감독은 시즌 중반 자전거 사고로 부상을 입었고, 팻 라일리 코치가 그를 대신했다. 파워 포워드로 뛰는 부담에서 벗어난 윌키스는 레이커스의 속공에서 꽃을 피웠고, 그 시즌 경기당 평균 20점을 기록하며 53.5%의 야투율을 기록했다. 그는 쇼타임 레이커스가 3번의 NBA 챔피언십(1980, 1982, 1985)을 우승하는 데 기여했다.
그의 경력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 중 하나는 1980년 NBA 파이널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와의 6차전이었다. 윌키스는 경력 최고인 37점과 10리바운드를 기록했지만, 부상당한 압둘-자바 대신 센터로 출전하여 42점, 15리바운드, 7어시스트를 기록한 신인 매직 존슨에게 가려졌다. 2011년 존슨은 "자말 윌키스는 믿을 수 없는 경기를 했다. 모두가 나의 42점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그의 37점 활약도 있었다"고 말했다。
윌키스는 1980-81 시즌에 경력 최고의 공격 시즌을 보냈는데, 경기당 평균 22.6점을 기록하며 NBA 전체 11위에 올랐고, 52.6%의 야투율을 기록했으며 1981년 NBA 올스타전에 출전했다. 그러나 레이커스는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휴스턴 로키츠에게 3전 2선승제 시리즈에서 패배했다. 1981-82 시즌 훈련 캠프가 시작되기 직전, 윌키스의 생후 8일 된 딸이 사망했는데, 이는 그에게 두 번째 아기 사망이었다. 그는 시즌을 느리게 시작했고, 1982년 11월 10일 샌안토니오 스퍼스에게 128-102로 패한 경기에서 10번의 슈팅 중 1번만 성공시키는 최악의 경기를 펼쳤다. 그는 농구를 그만둘 것을 심각하게 고려했다. 11월 18일, 존슨은 트레이드를 요구했지만, 버스 구단주는 대신 웨스트헤드를 해고하고 팻 라일리 코치를 감독으로 임명했다. 윌키스는 회복하여 경기당 평균 21.1점을 기록하고 52.5%의 야투율을 기록했으며, 레이커스는 1982년 NBA 파이널에 진출하여 다시 필라델피아를 만났다. 윌키스는 6차전에서 팀 최고인 27점을 기록하며 레이커스가 시리즈를 4-2로 우승하는 데 기여했다. 1982년 윌키스는 레이커스와 장기 계약 연장에 서명했다. 이 계약은 1982년에 체결된 6년, 530.00 만 USD 보장 계약으로, 1990년부터 1997년까지 연간 약 40.00 만 USD의 이연 지급이 포함되어 있었다. 레이커스는 또한 3년 전 트레이드를 통해 얻은 1982년 NBA 드래프트 전체 1순위 지명권으로 제임스 워디를 선택했다. 윌키스는 여전히 전성기였지만, 레이커스는 워디의 포워드 포지션 소화 능력과 커트 램비스의 파워 포워드 백업 잠재력을 높이 평가했다. 윌키스는 1983년에 세 번째 올스타에 선정되었다.
1983-84 시즌, 윌키스는 위장염 바이러스로 인해 정규 시즌 7경기와 플레이오프 첫 7경기를 결장했다. 1984년 2월 말에 처음 3경기를 결장한 후 한 달 동안 경기에 복귀했지만, 다시 4경기를 더 결장했다. 1978-79 시즌 이후 5시즌 동안 그는 410경기 중 단 3경기만 결장했으며, 두 차례 팀 내 출전 시간 1위를 기록했다. 윌키스는 정규 시즌을 평균 17.3점으로 마쳤고, 18차례 팀 내 득점 1위를 기록했지만, 2월 28일 이후로는 감염으로 인해 더 이상 득점 1위를 기록하지 못했다. 지속적인 두통, 복통, 오한으로 그는 처음에는 독감이라고 생각했다. 팀 닥터의 항생제도 효과가 없자 그는 자신의 주치의를 방문했고, 주치의는 그의 상태를 기생충과 연관시켰다. 5월 8일 댈러스 매버릭스와의 플레이오프 경기에서 복귀했을 때, 윌키스는 기아 포럼 관중들로부터 기립 박수를 받았다. 공백기 이후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출전 시간이 제한되었고, 14경기에서 평균 4.5점, 40%의 야투율에 그쳤다. 그는 플레이오프에서 58경기 연속 10점 이상 득점 기록을 가지고 있었다. 한편, 워디는 스몰 포워드에서 빛을 발하며 1984년 NBA 파이널에서 보스턴 셀틱스를 상대로 레이커스의 핵심 선수로 활약했다.
오프시즌 동안 트레이드 루머에 휩싸였던 윌키스는 1984-85 시즌을 워디와 함께 포워드 주전으로 시작했다. 레이커스가 3승 5패로 시즌을 시작한 후, 윌키스는 래리 스프리그스에게 주전 자리를 내주었다. 그의 플레이는 점차 나아져 1985년 1월 29일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와의 경기에서 시즌 최고인 24점을 기록했다. 3일 후인 2월 1일, 포럼에서 뉴욕 닉스와의 경기 도중 닉스의 어니 그런펠트와 충돌하여 왼쪽 무릎 인대가 파열되었고, 윌키스는 정규 시즌 마지막 40경기와 플레이오프 전체를 결장했다. 그는 당시 경력 최저인 42경기 출전과 경기당 평균 8.3점을 기록했지만, 레이커스는 워디를 주축으로 1985년 NBA 파이널에서 셀틱스를 꺾고 우승했다.
윌키스의 다리는 위축되었고, 그는 다시 걷는 법을 배워야 했다. 서던 캘리포니아 섬머 프로 리그에서 뛰고 무릎 재활을 마친 후, 레이커스는 1985년 8월 28일 그를 방출했으며, 그의 보장 계약에는 3년과 240.00 만 USD가 남아 있었다. 팀은 이 조치를 NBA 샐러리캡 때문이라고 설명하며, 그가 다른 팀과 자유롭게 협상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레이커스가 A. C. 그린을 드래프트한 후 윌키스는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다.
4.3. 로스앤젤레스 클리퍼스 시절
1985년 9월 27일, 윌키스는 로스앤젤레스 클리퍼스와 리그 최저 연봉인 7.00 만 USD에 계약했다. 그러나 그는 발목 염좌로 인해 시즌 중 거의 한 달 동안 결장했다. 12월 24일, 윌키스는 클리퍼스에 대한 자신의 기여 부족을 언급하며 12년간의 선수 생활을 마감하고 은퇴를 발표하여 클리퍼스를 충격에 빠뜨렸다. 그는 경기당 평균 5.8점, 15분 출전을 기록하고 있었다. 2015년 그는 클리퍼스가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팀이 패배하는 문화를 가지고 있음을 깨닫고 "은퇴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는 그의 프로 경력에서 첫 패배하는 팀이었고, 그가 3학년 때 농구를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패배 기록을 가진 팀이었다. 그의 프로 팀들은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한 적이 없었다. NBA에서의 성공 이후 그는 유럽에서 계속 뛰는 것을 배제했다. 윌키스는 "나는 절뚝거리지 않고 길을 걸을 수 있었다. 계속 뛰는 것보다 은퇴할 이유가 더 많았다"고 말했다.
5. 선수로서의 특징
자말 윌키스는 '실크'라는 별명처럼 부드럽고 효율적인 플레이 스타일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독특한 슈팅 폼과 기술, 그리고 경기 내에서의 정신적인 측면은 그를 특별한 선수로 만들었다.
5.1. 플레이 스타일 및 별명
윌키스는 부드러운 움직임 때문에 '실크'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슬램덩크를 거의 하지 않았고, UCLA의 존 우든 감독이 강조했던 백보드를 이용한 레이업을 선호했다. 윌키스는 "나는 흥미롭거나 화려해서 티켓을 팔지는 못하겠지만, 사람들이 좋은 농구를 좋아한다면 나를 보고 싶어 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공을 손에 쥐고 있지 않아도 잘 플레이했다. 그는 외곽에서 슈팅 위협이 되었고, 안쪽으로 돌파할 수도 있었다. 윌키스는 턴오버를 거의 하지 않았다. 하프 코트 오펜스에서 그는 골대 아래에서 자유롭게 움직여 정확한 패스를 받아 레이업으로 연결하는 능력이 있었다. 그의 대부분의 득점은 미드레인지 점프 슛에서 나왔다.
5.2. 슈팅 폼과 기술
윌키스는 정통적이지는 않지만 신뢰할 수 있는 점프 슛을 가지고 있었는데, 귀 뒤에서 머리 위로 공을 부드럽게 코르크스크루처럼 돌리는 동작으로 공을 던졌고, 이는 마치 새총 같았다. 그가 슛을 할 때 발은 거의 바닥을 떠나지 않고 거의 발끝으로만 움직였다. 그는 어릴 적 놀이터에서 더 크고 강한 상대들과 경쟁하기 위해 이 슛을 개발했으며, 공이 블록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공을 늦게 놓았다. 우든 감독은 그러한 폼을 권장하지 않았겠지만, 윌키스가 꾸준히 슛을 성공시켰기 때문에 그대로 두었다고 말했다. 릭 배리는 윌키스의 슈팅 폼을 "내가 본 것 중 가장 추악했다. 내가 분석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래, 그 미친 오른팔꿈치가 밖으로 튀어나왔지만, 공을 놓기 전에 곧바로 골대로 돌아왔다. 연습에서는 그가 나를 상대로 얼마나 쉽게 득점했는지 말도 안 될 정도였다"고 말했다. 레이커스 팀 동료 놈 닉슨은 "그 슛은 너무 추악해서 사람들이 '저 슛은 못 넣을 거야'라고 말했지만, 그는 항상 놀라움을 주었다"고 말했다.
많은 사람들은 날씬한 윌키스가 NBA의 신체적 요구를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노틸러스 장비로 훈련했다. 그는 근육질은 아니었지만, 우든 감독은 그가 강했고 대학 시절에는 한 번도 부상을 입지 않았다고 말했다. 윌키스는 코트에서 말을 많이 하지 않았고 감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았다. 우든 감독에 따르면, 그는 수동적이지 않았고 싸우거나 과장된 행동 없이 경쟁할 수 있었다. 파울을 불렸을 때, 윌키스는 검지 손가락을 들어 올리고 판정을 인정했는데, 이는 심판들이 불평하지 않는 선수들을 높이 평가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윌키스는 경력 내내 스타 팀 동료들에게 가려졌지만, 개인적인 영광보다는 승리를 우선시했다. 그는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누가 최고의 선수였는지 논쟁할 수는 있지만, 누가 이기고 졌는지는 논쟁할 수 없다는 것을 배웠다"고 말했다. 윌키스에 따르면, 그는 1979년 레이커스와 재계약할 때 자신이 간과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NBA 챔피언십에서 우승할 기회를 선택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인정을 받는 것을 즐겼다. 자신이 무시당한다고 느낀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그는 "무시당했다는 말은 좀 강할 수 있지만, 내가 민감하게 생각했던 부분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생활 방식을 즐겼다. 그것이 트레이드오프였다"고 답했다. 윌키스는 팀 동료, 코치, 구단주들에게 가치를 인정받았다고 느꼈다. 그는 "농구 은퇴 후에는 좀 더 불쾌했을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6. 개인 생활 및 신념
자말 윌키스는 선수 생활 중과 이후의 개인적인 삶에서 종교적 신념의 변화, 가족과의 관계, 그리고 사회적 경험을 통해 다양한 비극과 도전에 직면했다.
6.1. 종교와 이름 변경
윌키스는 정통 이슬람교에 2년 동안 관여한 후 개종했으며, 1974년 신인 시절이 끝날 무렵 이슬람 이름을 선택했다. 그의 부모는 처음에는 충격을 받고 화를 냈다. 그는 1975년 법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자말 압둘라티프(Jamaal Abdul-Lateef자말 압둘라티프영어)로 변경했지만, 대중적 인식을 위해 계속해서 본명인 윌키스를 사용했다.
6.2. 가족 및 개인적 비극
윌키스와 그의 첫 번째 아내는 1977년에 딸을 낳았는데, 이 아이는 심장에 구멍이 있었고 체중이 겨우 1.4 kg에 불과했다. 그녀는 4개월 후에 사망했다. 그 기간 동안 윌키스는 아내와 헤어졌고 이혼 소송을 제기했으며, 2년간의 결혼 생활을 끝냈다. 그는 그해 친자 확인 소송에도 휘말렸지만, 아버지가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다.
윌키스는 1980년에 두 번째 아내와 결혼했다. 그들의 첫째 딸은 1981년에 생후 8일 만에 사망했다. 그들은 이후 두 명의 아들과 한 명의 딸을 더 낳았다. 그의 큰아들 오마르는 버클리 대학교를 졸업했으며, 193 cm의 슈팅 가드로 농구를 했고, 현재는 스포츠 에이전트가 되었다. 그의 작은아들 조던도 버클리를 졸업했으며, 218 cm의 센터로 뛰었다. 그는 2014-15 시즌 전에 레이커스의 농구 운영 스태프에 합류했다. 윌키스의 딸은 UCLA 배구팀에서 뛰었다.
6.3. 인종 차별 경험
1990년 12월, 윌키스는 LAPD 경찰관들에게 정지 명령을 받고 수갑이 채워졌다. 흑인인 그는 경찰관들이 인종 프로파일링을 했다고 비난하며 불만을 제기했다. 윌키스에 따르면, 경찰관들은 그의 차량 번호판이 만료될 예정이라고 말했고, 그가 "아직 만료되지 않았다"고 답하자 15~20분 동안 수갑을 채웠다고 한다. 그는 3개월 후 로드니 킹이 네 명의 경찰관에게 구타당하는 사건이 비디오로 촬영된 후에는 더 이상 이 사건을 추적하지 않았다. 윌키스는 킹 사건이 LAPD의 인종차별적 행동의 명백한 사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1992년 경찰관들이 무죄 판결을 받으면서 로스앤젤레스 카운티에서 폭동이 발생했다.
7. 은퇴 후 활동
자말 윌키스는 선수 은퇴 후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사업가이자 작가, 강연가로 변신했다.
7.1. 사업 및 금융업
농구 선수 생활에서 은퇴한 후, 윌키스는 부동산 분야에서 일했지만, "너무 많은 흥정과 논쟁"이 있었다며 자신을 "사람들과 소통하는 사람"으로 여기고 "사람들이 문제를 해결하도록 돕고 싶다"고 말했다. 이후 그는 금융 서비스업과 동기 부여 강연 분야로 진출했다。 2003년에는 자산 관리를 전문으로 하는 자말 윌키스 금융 자문사를 공동 설립했다.
7.2. 저술 및 강연 활동
그는 2006년 출간된 서적 성공의 불 속에서: 위기 상황에서 최고가 되기 위한 교훈(Success Under Fire: Lessons For Being Your Best In Crunch Time석세스 언더 파이어: 레슨스 포 비잉 유어 베스트 인 크런치 타임영어)의 공동 저자이다. 2015년에는 그의 자서전인 실크처럼 부드럽게: 원조의 회고록(Smooth as Silk: Memoirs of the Original스무스 애즈 실크: 메모아즈 오브 더 오리지널영어)을 공동 집필하여 출간했다.
또한 윌키스는 농구 분야에서도 계속 활동했다. 2000년, 새로운 아메리칸 농구 협회(ABA)의 창립 시즌에 로스앤젤레스 스타즈의 농구 운영 부사장으로 고용되었다. 윌키스의 요청에 따라 존 우든 감독도 스타즈에 컨설턴트로 합류했다.
8. 유산 및 평가
자말 윌키스는 그의 꾸준함과 팀 기여로 농구계에 깊은 인상을 남겼으며, 그의 플레이 스타일과 정신은 후대 선수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8.1. 주요 수상 및 명예
윌키스는 챔피언십 팀에서 주연은 아니었지만, UCLA에서는 빌 월튼, 골든스테이트에서는 릭 배리, 레이커스에서는 카림 압둘-자바와 매직 존슨이라는 스타들의 그늘 아래에서 뛰어난 조연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득점, 리바운드, 수비 등 팀이 필요한 어떤 분야에서든 탁월하게 기여했다.
그는 대학 경력을 73승 0패로 시작했으며, 이는 UCLA의 88연승 기록을 완성하는 데 기여했다. 그는 3회 올해의 전국 선수인 월튼과 힘을 합쳐 브루인스를 2회 연속 전국 챔피언십 우승으로 이끌며 팀의 기록적인 7연패를 연장했다. 윌키스는 레이커스에서 8시즌을 보내며 최고의 NBA 시즌을 보냈다. 그는 압둘-자바와 존슨과 함께 레이커스의 쇼타임 시대를 열며 1980년대 초반 3번의 NBA 챔피언십 우승을 차지했다. 윌키스는 그들의 유명한 속공에서 레인을 채우며 존슨의 패스를 레이업으로 연결했다. 1979년부터 1983년까지 윌키스는 평균 20점 이상을 기록하고 53%의 야투율을 보였다. 레이커스의 아나운서 칙 헌은 그의 외곽 슈팅 일관성 때문에 그의 점프 슛을 "6.1 m 레이업"이라고 불렀다.
8.2. 긍정적 평가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에 따르면, 윌키스의 '실크'라는 별명은 "스포츠에서 가장 적절한 별명 중 하나"일 수 있다. 그들은 "윌키스의 문제는 홍보적인 관점에서 모든 것을 너무 쉽게 보이게 한다는 점일 수 있다"고 썼다. 레이커스 구단주 제리 버스는 그를 "이타심과 우아함의 희귀한 조합"이라고 부르며, "자말은 경기를 쉽게 보이게 만들었다. 자말이 1980년과 1982년 챔피언십 시즌 동안 평균 20점 이상을 기록했다는 사실을 잊기 쉽다"고 말했다. 레이커스 팀 동료인 제임스 워디와 마이클 쿠퍼는 모두 림 위에서 득점을 마무리하는 선수들이었기에 쇼타임 시대의 상징으로 더 많이 기억되지만, 윌키스는 때때로 잊혀지곤 한다. 우든 감독은 "나는 [윌키스]가 대학이나 프로에서 받아야 할 만큼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한다"며 "그는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항상 꾸준한 경기를 펼쳤다"고 말했다.
8.3. 영향력
윌키스는 1983년 벤투라 카운티 스포츠 명예의 전당에, 2007년에는 Pac-10 남자 농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NBA에서 마지막으로 뛴 지 거의 30년이 지난 2012년, 그는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회원으로 선정되었다. 그는 9월 7일에 공식적으로 헌액되었으며, 전 팀 동료이자 모두 명예의 전당 헌액자인 빌 월튼, 릭 배리, 카림 압둘-자바, 매직 존슨이 그를 소개했다. 12월 28일, 레이커스는 윌키스의 등번호 52번을 영구 결번했으며, 2013년 1월 17일 UCLA도 그의 대학 등번호 52번을 영구 결번했다. 벤투라 고등학교와 산타바바라 고등학교도 그의 등번호를 영구 결번했다.
여러 인터뷰에서, 1985년 뉴욕 포스트와의 인터뷰를 포함하여, 우든 감독은 자신의 이상적인 선수를 묘사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그 선수가 좋은 학생이고, 예의 바르고, 친절하며, 좋은 팀 플레이어이고, 좋은 수비수이자 리바운더이며, 좋은 인사이드 플레이어이자 외곽 슈터이기를 바랄 것이다. 그냥 자말 윌키스를 데려와서 그대로 두는 것이 어떨까."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는 우든 감독의 이러한 칭찬을 "어떤 선수가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영광"이라고 불렀다. 윌키스의 골든스테이트 감독이었던 앨 애틀스는 "우리가 그에게 요구한 것이 무엇이든 간에 - 득점, 수비, 리바운드, 더 큰 포워드를 상대로 뛰는 것 - 그는 해냈고 잘 해냈다"고 말했다.
9. 통계
9.1. 정규 시즌
연도 | 팀 | 경기 수 | 선발 출전 | 경기당 출전 시간 | 야투율 | 3점슛 성공률 | 자유투 성공률 | 경기당 리바운드 | 경기당 어시스트 | 경기당 스틸 | 경기당 블록 | 경기당 득점 |
---|---|---|---|---|---|---|---|---|---|---|---|---|
1974-75 | 골든스테이트 | 82 | - | 30.7 | .442 | - | .734 | 8.2 | 2.2 | 1.3 | .3 | 14.2 |
1975-76 | 골든스테이트 | 82 | 82 | 33.1 | .463 | - | .772 | 8.8 | 2.0 | 1.2 | .4 | 17.8 |
1976-77 | 골든스테이트 | 76 | - | 33.9 | .478 | - | .797 | 7.6 | 2.8 | 1.7 | .2 | 17.7 |
1977-78 | L.A. 레이커스 | 51 | - | 29.2 | .440 | - | .716 | 7.5 | 3.6 | 1.5 | .4 | 12.9 |
1978-79 | L.A. 레이커스 | 82 | 82 | 35.5 | .504 | - | .751 | 7.4 | 2.8 | 1.6 | .3 | 18.6 |
1979-80 | L.A. 레이커스 | 82 | 82 | 37.9 | .535 | .176 | .808 | 6.4 | 3.0 | 1.6 | .3 | 20.0 |
1980-81 | L.A. 레이커스 | 81 | - | 37.4 | .526 | .077 | .758 | 5.4 | 2.9 | 1.5 | .4 | 22.6 |
1981-82 | L.A. 레이커스 | 82 | 82 | 35.4 | .525 | .000 | .732 | 4.8 | 1.7 | 1.1 | .3 | 21.1 |
1982-83 | L.A. 레이커스 | 80 | 80 | 31.9 | .530 | .000 | .757 | 4.3 | 2.3 | .8 | .2 | 19.6 |
1983-84 | L.A. 레이커스 | 75 | 74 | 33.4 | .514 | .250 | .743 | 4.5 | 2.9 | 1.0 | .5 | 17.3 |
1984-85 | L.A. 레이커스 | 42 | 8 | 18.1 | .488 | .000 | .773 | 2.2 | 1.0 | .5 | .1 | 8.3 |
1985-86 | L.A. 클리퍼스 | 13 | 1 | 15.0 | .400 | .333 | .815 | 2.2 | 1.2 | .5 | .2 | 5.8 |
커리어 | 828 | 245 | 32.9 | .499 | .135 | .759 | 6.2 | 2.5 | 1.3 | .3 | 17.7 | |
올스타 | 3 | 0 | 18.0 | .481 | - | 1.000 | 4.7 | 2.3 | 1.3 | .0 | 11.0 |
9.2. 플레이오프
연도 | 팀 | 경기 수 | 선발 출전 | 경기당 출전 시간 | 야투율 | 3점슛 성공률 | 자유투 성공률 | 경기당 리바운드 | 경기당 어시스트 | 경기당 스틸 | 경기당 블록 | 경기당 득점 |
---|---|---|---|---|---|---|---|---|---|---|---|---|
1975 | 골든스테이트 | 17 | - | 29.6 | .446 | - | .702 | 7.0 | 1.6 | 1.5 | .8 | 15.0 |
1976 | 골든스테이트 | 13 | - | 34.6 | .430 | - | .778 | 7.9 | 2.2 | .9 | .6 | 15.9 |
1977 | 골든스테이트 | 10 | - | 34.6 | .429 | - | .821 | 8.0 | 1.6 | 1.6 | .6 | 15.5 |
1978 | L.A. 레이커스 | 3 | - | 36.0 | .469 | - | .545 | 8.7 | 2.7 | 1.0 | .3 | 12.0 |
1979 | L.A. 레이커스 | 8 | - | 38.4 | .477 | - | .676 | 8.5 | 2.0 | 1.9 | .3 | 18.4 |
1980 | L.A. 레이커스 | 16 | - | 40.8 | .476 | .000 | .815 | 8.0 | 3.0 | 1.5 | .3 | 20.3 |
1981 | L.A. 레이커스 | 3 | - | 37.7 | .438 | .000 | .667 | 2.7 | 1.3 | .3 | .3 | 18.0 |
1982 | L.A. 레이커스 | 14 | - | 38.2 | .502 | .000 | .776 | 5.0 | 2.6 | 1.1 | .2 | 20.0 |
1983 | L.A. 레이커스 | 15 | - | 39.3 | .498 | .000 | .614 | 6.0 | 3.4 | 1.3 | .7 | 19.9 |
1984 | L.A. 레이커스 | 14 | - | 14.0 | .400 | .000 | .636 | 1.9 | .6 | .3 | .1 | 4.5 |
커리어 | 113 | - | 33.6 | .465 | .000 | .727 | 6.4 | 2.2 | 1.2 | .5 | 16.1 |
10. 저서
자말 윌키스가 직접 저술하거나 공동 저술한 책은 다음과 같다.
- 피트 넬슨, 자말 윌키스, 게일 샤퍼-고든 공저, 성공의 불 속에서: 위기 상황에서 최고가 되기 위한 교훈(Success Under Fire: Lessons for Being Your Best In Crunch Time영어), 발레오 프레스, 2006년.
- 자말 윌키스, 에드워드 레이놀즈 주니어 데이비스 공저, 실크처럼 부드럽게: 원조의 회고록(Smooth as Silk: Memoirs of The Original영어), 88 스트레이트 엔터프라이즈, 201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