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와 배경
인드르지흐 마티야시 투른은 1567년 인스브루크에서 태어났다. 그의 유년기와 초기 경력은 훗날 그가 보헤미아 반란의 핵심 인물로 성장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1.1. 출생과 가문
인드르지흐 마티야시 투른은 1567년 2월 24일 오스트리아의 인스브루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페르디난트 2세 대공의 비밀 고문이자 린츠 백작이었던 프란츠 나푸스 폰 투른 운트 발자시나(Franz Napus von Thurn und Valsassina프란츠 나푸스 폰 투른 운트 발자시나독일어; 1508년~1586년)이며, 어머니는 카테리나 폰 글라이헨-톤나 백작 부인의 딸인 바르보라 폰 슐리크(Barbora von Schlick바르보라 폰 슐리크독일어 백작 부인; 1547년~1581년)였다. 그의 부모는 모두 프로테스탄트 신자였다. 투른의 가족은 그가 태어난 직후 리프니체 영지를 구매하고 그곳으로 이주했으며, 1574년에는 모라바로 다시 이주했다. 아버지의 사망 후, 그는 가톨릭 신자였던 삼촌 요한 암브로스(Johann Ambros요한 암브로스독일어)의 양육을 받았다.
1.2. 교육과 초기 활동
어린 투른 백작은 합스부르크 제국의 대사관에서 근무하며 이스탄불, 시리아, 이집트,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등 광범위한 경험을 쌓았다. 1592년부터는 오스만 투르크에 맞서는 황제군에서 복무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 시기에 황제군에서 대령과 전쟁 고문관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결혼을 통해 그는 크로아티아 변경 지역을 포함한 여러 곳에서 상당한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황제는 헝가리에서 투르크와의 전투에서 보여준 공로를 인정하여 그에게 보헤미아 중부의 카를슈테인성 총독직을 하사했다. 1605년에는 보헤미아 북동부의 이친 근처에 위치한 벨리시 영지를 매입함으로써, 보헤미아 귀족 계급의 일원(páni, "영주")이 될 수 있었다. 정치적으로 투른은 보헤미아의 프로테스탄트 세력에 합류하여 귀족 의회의 총회장으로 봉사했다.
2. 보헤미아 반란에서의 역할
인드르지흐 마티야시 투른 백작은 보헤미아 귀족들의 종교적 자유와 정치적 권리를 수호하기 위해 일어난 보헤미아 반란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의 행동은 30년 전쟁의 서막을 열었으며, 유럽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2.1. 반란의 배경
1617년,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슈타이어마르크의 페르디난트 대공이 나이가 많고 자녀가 없던 황제 마티아스의 합스부르크 왕위 계승자이자 보헤미아 왕으로 지명되었다. 보헤미아 귀족들은 그에게 이전 황제 루돌프 2세가 보증한 종교의 자유(칙서, Letter of Majesty)를 존중할 것을 요구했다. 투른은 페르디난트에 대한 보헤미아 귀족들의 비판적인 답변서에 서명한 주요 인물 중 한 명이었다.
2.2. 프라하 투척 사건
1617년 보헤미아 왕위를 계승했음에도 불구하고, 페르디난트는 보헤미아 귀족들의 요구를 수용할 의사가 없었다. 더욱이 그의 즉위는 1619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선출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 귀족들이 마침내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킨 것은 1618년에 이르러서였는데, 이는 프라하 왕궁에서 격렬한 사건이 발생한 후였다. 투른 백작은 이 사건의 핵심적인 주도자로서, 성난 군중을 이끌고 페르디난트의 대표인 야로슬라프 보르지타 마르티니체와 빌렘 슬라바타 및 그들의 서기 필리프 파브리키우스를 창문 밖으로 던지는 프라하 투척 사건을 일으켰다. 이 사건은 보헤미아 반란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2.3. 보헤미아군 지휘관으로서의 활동
프라하 투척 사건 이후, 투른은 보헤미아 귀족 의회에 의해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옹호하는 30명의 수호자 중 한 명으로 선출되었다. 1618년 5월 23일 보헤미아 프로테스탄트 인구의 반란이 시작되자, 투른은 보헤미아군의 총사령관직을 맡았다. 그의 지휘 아래 보헤미아군은 여러 차례 전역을 수행했으나, 일부 작전 계획의 결함은 그의 통제를 벗어난 경우도 있었으며, 이는 황제군이 반란을 빠르게 진압하려는 노력을 좌절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그는 페르디난트를 보헤미아 왕위에서 폐위하고, 새로운 보헤미아 왕으로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를 선출하는 과정에 참여했다.
2.4. 백산 전투와 망명
1620년 백산 전투에서 투른 백작은 보헤미아군 연대의 지휘관으로 참전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보헤미아군은 재앙적인 패배를 겪었고, 이로 인해 페르디난트 황제는 투른을 포함한 모든 프로테스탄트 귀족(반란의 지도자 포함)과 도시 주민들을 추방했다. 결과적으로 투른은 보헤미아에 있던 모든 영지를 몰수당하고 강제로 망명길에 오르게 되었다.
3. 망명 생활과 말년의 활동
망명 이후에도 인드르지흐 마티야시 투른 백작은 합스부르크 왕가에 맞서 30년 전쟁에 지속적으로 참여하며 군사 및 외교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의 말년은 스웨덴에서의 복무와 에스토니아에서의 은퇴로 특징지어진다.
3.1. 지속적인 군사 및 외교 활동
망명길에 오른 후에도 투른은 외교관이자 군인으로서 합스부르크 왕가에 맞선 30년 전쟁의 전투와 정치 협상에 계속해서 참여했다. 1626년에는 슐레지엔의 일부 병력을 지휘했으며, 이후 스웨덴의 구스타브 아돌프 국왕 휘하의 군대에서 부사령관으로 복무했다. 그의 유일한 아들인 프란츠 베른하르트 폰 투른-발자시나 백작(Franz Bernhard von Thurn-Valsassina프란츠 베른하르트 폰 투른-발자시나독일어; 1592년~1628년)은 스웨덴군 대령으로 복무하며 폴란드 전역에 참전하던 중 병에 걸려 1628년에 사망했다.
3.2. 포로 생활, 은퇴 및 사망
1633년 10월 11일, 투른 백작과 그의 8,000명 병력은 작센의 오드라강 근처 슈타이나우 안 데어 오데르에서 발렌슈타인의 군대와 맞닥뜨려 전투 중 포로로 잡히는 비극을 겪었다. 그러나 그는 곧 포로 생활에서 풀려났고, 가족의 새로운 영지가 있는 페르나우 (현재 에스토니아의 패르누)로 은퇴했다. 투른 백작은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으며, 그의 유해는 탈린의 탈린 성모 마리아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그의 상속자는 프란츠 베른하르트와 마그달레나 폰 하르데크의 아들인 미성년자 손자 하인리히 폰 투른-발자시나 백작(Heinrich von Thurn-Valsassina하인리히 폰 투른-발자시나독일어; 1628년~1656년)이었다.
4. 저서
인드르지흐 마티야시 투른 백작은 『변론서』(Defensionsschrift데펜지온스슈리프트독일어)라는 제목의 유일한 저서를 독일어로 집필했다. 이 책은 1618년 프라하 투척 사건에서 자신이 수행한 역할을 신앙에 대한 의도적이고 의식적인 방어 행위로 정당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책은 스웨덴에서 출판되었다.
5. 역사적 평가
인드르지흐 마티야시 투른 백작의 생애와 활동은 30년 전쟁의 발발과 초기 전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종교적 자유를 위한 투쟁의 중요한 상징으로 남아있다.
5.1. 역사적 의의
투른 백작은 30년 전쟁의 시작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특히 프라하 투척 사건을 주도함으로써 그는 보헤미아 프로테스탄트의 대의를 위한 저항의 불씨를 당겼다. 그의 행동은 단순히 보헤미아 내부의 종교적, 정치적 갈등을 넘어, 유럽 전역을 휩쓴 대규모 전쟁으로 비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종교적 억압에 맞서 귀족의 권리와 프로테스탄트 신앙의 자유를 옹호하려는 확고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5.2. 비판과 논란
투른 백작의 군사적 지휘 능력에 대해서는 일부 비판이 존재한다. 보헤미아군의 총사령관으로서 그가 수행한 전역들은 때때로 "비효율적"이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이는 작전 계획의 일부 결함이나, 그의 통제를 벗어난 상황적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볼 수 있다. 그의 지휘 아래 보헤미아군은 초기에는 황제군의 빠른 진압 시도를 좌절시켰지만, 결국 백산 전투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며 보헤미아의 프로테스탄트 세력이 와해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또한, 그가 프라하 투척 사건을 통해 반란을 개시한 것이 장기적으로 보헤미아에 가져온 재앙적인 결과에 대한 역사적 논쟁도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행동을 종교적 신념의 정당한 방어로 옹호했으며, 망명 이후에도 합스부르크에 대한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