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이중섭(이중섭한국어, 1916년 4월 10일 ~ 1956년 9월 6일)은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 시대를 살았던 서양화가로, 호는 대향(大鄕)이다. 그는 소, 닭, 어린이, 가족 등을 주요 소재로 삼아 향토적이고 동화적이며 자전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했다. 특히 담뱃갑 은박지에 그림을 그린 은지화와 가족에게 보낸 편지화는 그의 독창적인 예술 정신과 가족에 대한 깊은 사랑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업 방식이다. 한국 전쟁으로 인한 피난과 가족과의 이별 등 비극적인 삶의 고통 속에서도 예술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았으며, 이러한 그의 삶과 작품은 한국인의 정서에 깊이 각인되어 사후 '국민 화가'로 추앙받게 되었다. 이중섭은 한국 근현대 미술사에 서양화의 새로운 길을 제시하고 전통적 미학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며 독보적인 위치를 확립한 중요한 예술가로 평가받고 있다.
2. 생애
이중섭은 비극적인 시대 상황 속에서 짧지만 강렬한 삶을 살며 한국 미술사에 지대한 영향을 남겼다. 그의 생애는 어린 시절의 풍요로움과 예술적 재능의 발견, 일본 유학을 통한 예술적 성장, 그리고 한국 전쟁 이후의 피난과 가족과의 이별로 인한 고통 속에서도 창작을 멈추지 않았던 예술혼으로 요약된다.
2.1. 어린 시절과 가족 배경
이중섭은 1916년 4월 10일, 현재의 북한 평안남도 평원군에서 유복한 가정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광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그보다 열두 살 위인 형은 당시 원산에서 가장 큰 백화점을 운영할 정도로 부유했다. 1918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형이 가장 역할을 맡았다. 이후 가족은 그의 외가가 있는 평양으로 거처를 옮겼고, 이중섭은 평양 내에서 손꼽히는 부자였던 외조부 덕분에 유년 시절 내내 경제적인 어려움 없이 편안하게 성장했다. 그는 평양 종로보통학교에 다니던 중, 학교 근처 평양도립박물관에서 고구려 고분 벽화의 복제본을 접하며 예술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웅장한 스케일과 생생한 벽화는 어린 이중섭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2.2. 교육
1930년, 이중섭은 평안북도 정주에 위치한 오산학교에 입학하며 본격적으로 미술 공부를 시작했다. 오산학교는 일본 식민주의에 저항하여 차세대 민족 지도자를 양성하려는 한국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이 독립적으로 설립한 학교였다. 학생 운동가들이 자주 반식민주의 사회주의 시위를 주도하던 학교 분위기 속에서, 이중섭은 자신의 다양한 예술적 재능을 인정받았고, 미국에서 서양화를 공부하고 돌아온 미술 교사 임용련으로부터 큰 영감을 받아 서양화를 배우게 되었다. 그는 오산학교 시절 민족 교육의 영향을 크게 받아, 일본에서 개최되는 미술전에 황소를 주제로 한 작품을 출품하기도 했다. 당시 황소는 일본인들 사이에서 한국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동물로 여겨져 일본 당국이 소와 관련된 표현을 억압하는 분위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중섭은 이러한 분위기를 비웃듯이 강렬한 눈빛을 가진 황소를 손바닥만 한 작은 크기로 그려냈다. 이 작품을 본 일본의 한 기자는 이중섭의 천재성을 바로 알아보고 감탄했다고 전해진다. 특히 이 작품의 낙관에 '중섭'이 아닌 '둥섭'이라고 쓴 일화는 당시 친일파 문학가가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게재한 친일 사설에 분노하여 본인의 이름에 쓰인 '중(仲)' 자의 발음조차 부끄럽게 여겼던 그의 민족의식을 보여준다.
1932년, 이중섭은 일본 도쿄의 데이코쿠 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하여 본격적으로 미술을 공부했다. 1936년에는 도쿄의 제국미술원에 진학했으나, 1937년 보다 자유롭고 혁신적인 분위기의 사립 학교인 문화학원으로 옮겨 졸업했다. 문화학원에서 이중섭은 야수주의적 경향과 강렬하고 자유로운 드로잉 스타일을 선보였다. 이 시기에 그는 황소를 자신의 주요 작품 소재로 삼았으며, 한국적 모더니즘을 추구하는 자신을 황소에 비유하기도 했다. 학업 중 이중섭은 선배들과 함께 자유미술가협회(自由美術家協会, Jiyū Bijutsuka Kyōkai일본어)가 주최한 전시에 작품을 출품하여 비평가들의 호평을 받았고, 이를 계기로 협회에 초청되어 참여하게 되었다. 문화학원에서 그는 후배인 야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일본어, 한국명 이남덕) 여사와 깊은 사랑에 빠졌고, 그녀는 훗날 그의 아내가 되었다. 태평양 전쟁의 긴장이 고조되는 상황 속에서도 이중섭은 학교 내에서 비교적 안전하게 자유로운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1941년 문화학원을 졸업한 그는 도쿄의 전쟁 불안이 커지자 1943년 고향인 원산으로 돌아왔다. 그는 전시 상황에도 불구하고 서울과 평양에서 꾸준히 그림을 그리고 미술 전시회를 열었다.
3. 예술 활동 및 작품 세계
이중섭은 고구려 벽화에서 받은 깊은 영감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화풍을 발전시켰으며, 한국 전쟁이라는 비극적인 시대를 관통하며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구축했다. 그의 작품은 소, 닭, 어린이, 가족 등 향토적이고 동화적인 소재를 통해 한국인의 정서와 민족의식을 담아냈으며, 담뱃갑 은박지에 그린 은지화와 가족에게 보낸 편지화는 그의 창의성과 가족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3.1. 예술적 영향과 발전
이중섭의 예술 세계는 어린 시절 접했던 고구려 고분 벽화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 그의 힘찬 선묘, 깊이 있는 색감, 원형 구도, 그리고 동물들의 상징적인 모티프에서 고구려 벽화의 영향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오산학교 시절, 임용련 선생으로부터 서양화를 배우며 그는 드로잉, 유화, 수채화 등 현대적인 회화 기법에 익숙해졌다. 임용련 선생은 시카고 미술관과 예일 대학교 미술대학에서 서양화를 공부한 인물로, 이중섭은 그에게서 식민지 규제를 피해 작품에 한글로 서명하는 법을 배우기도 했다.
도쿄 유학 시절, 이중섭의 화풍은 야수주의와 표현주의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의 주제는 매우 독특하고 한국적이었다. 그의 작품은 시골 풍경, 가족의 마을과 섬 생활, 전통 한복 등 한국의 일상적인 삶을 자주 묘사했다. 그는 서양화 기법을 한국에 도입하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조르주 루오와 파블로 피카소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이중섭은 평생 많은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대규모 공공 벽화를 그리고자 하는 염원을 가지고 있었으나, 한국 전쟁과 그 여파로 인한 혼란 속에서 그의 꿈은 실현되지 못했다.
3.2. 주요 작품 주제 및 시리즈
이중섭의 작품에는 소, 닭, 어린이, 가족 등이 가장 많이 등장하며, 향토적 요소와 동화적이고 자전적인 요소가 주로 담겨 있다.
- 소
이중섭은 평생에 걸쳐 '소'를 주제로 한 수많은 작품을 창작했으며, 소는 그의 예술 세계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는 존재였다. 소는 한국인의 깊은 뿌리를 상징하며, 자아를 현대적으로 반영하는 대상이었다. 특히 '흰 소'는 한국과 흰옷 입은 한국인을 상징하게 되었다. 학자들은 식민지 일본이 한국적 모티프를 적극적으로 억압하던 시기에 소를 주제로 삼은 것이 특히 대담한 선택이었다고 평가한다. 전쟁 후 그는 자신감과 강한 의지를 담은 소 그림으로 돌아왔다. 1953년 작 황소에서 이중섭은 가족에 대한 깊은 그리움을 표현하기 위해 생생한 색채와 강렬한 붓놀림을 사용하여 재회에 대한 굳건한 희망을 담아냈다. 이중섭은 "소의 큰 눈을 보면 행복을 느낀다"고 말하기도 했다. 대표작으로는 싸우는 소, 흰 소(1954), 움직이는 흰 소, 소와 어린이, 황소(1953), 회색 소(1956) 등이 있다.


이중섭은 소 외에도 다양한 동물을 통해 한국적 정서와 자신의 내면을 표현했다. 특히 닭은 그의 작품에서 가족과 함께 자주 등장하며, 때로는 투쟁적인 모습으로 예술혼을 드러내기도 했다.


- 은지화
일반적인 미술 재료를 살 돈이 없었던 이중섭은 담뱃갑 은박지에 선 그림을 그리는 혁신적인 기법을 창안했다. 그는 송곳으로 은박지에 선을 새기고, 물감을 바른 뒤 닦아내어 새겨진 선에만 색이 남도록 했다. 평면적인 이미지임에도 불구하고, 깊이 새겨진 선들은 여러 겹의 인상을 주었다. 은박지의 반짝이는 금속성 표면은 미적 효과를 더욱 높였다. 이 독특한 기법은 고려청자나 은을 상감한 금속 공예의 전통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한국 전통에 대한 이중섭의 깊은 경외심을 보여준다. 이중섭은 약 300점의 은지화를 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은지화는 가난과 사회적 역경의 장면부터 서귀포에서의 가장 행복했던 순간들까지 다양하며, 대체로 그가 간절히 그리워했던 가족이 게, 물고기, 꽃과 함께 행복하게 노는 모습을 묘사한다. 은지화는 그가 꿈꾸었던 대형 벽화를 위한 스케치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는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 유형 중 하나로,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세 점, 서귀포 이중섭 미술관에 세 점이 소장되어 있다. 대표작으로는 쌍둥이(1950)와 복숭아밭에서 노는 아이들(1954)이 있다.
- 편지화
가족과 헤어진 시기부터 이중섭은 일본에 있는 아내와 아이들에게 정기적으로 편지를 보냈다. 초기의 편지들은 애정 넘치고 기쁨으로 가득했으며, 곧 재회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으로 충만했다. 많은 편지에는 자유로운 필체와 가족을 위한 즐거운 삽화가 담겨 있었는데, 이는 가족에 대한 그의 깊은 사랑을 반영한다. 그러나 1955년 중반부터 이중섭은 절망에 빠져 가족에게 편지를 거의 보내지 않게 되었고, 아내가 보낸 편지도 읽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약 60통의 편지(총 150여 페이지)가 현재까지 남아 있다. 가족을 그리는 화가(1953-54)와 같은 이 편지들은 이중섭의 일상생활과 예술 사이의 관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기록적 가치를 지니며, 그 자체로 중요한 독립적인 예술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 어린이
이중섭의 작품 주제 중 상당 부분은 어린이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주로 자신의 아이들을 그렸다. 이는 고려 시대 청자에서 발견되는 아이들이 함께 노는 도상과 아기 부처 조각상에서도 영감을 받았다. 첫 아이의 죽음 이후, 이중섭은 아이가 저승에서 다른 아이들과 놀 수 있도록 아이들이 노는 그림을 함께 묻어주었다고 한다. 수년간의 고난, 가난, 유랑, 전쟁에도 불구하고 이중섭은 현실의 혹독함을 비웃는 듯한 그림들을 그렸으며, 가족과 함께 보낸 행복했던 날들의 천진난만하고 동화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대표작으로는 닭과 가족(1954-55), 쌍둥이(1950), 태양과 아이들(1950년대), 복숭아밭에서 노는 아이들(1954), 물고기와 아이들(1950) 등이 있다.
3.3. 한국 전쟁과 피난 생활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원산은 폭격을 받기 시작했다. 대규모 피난 행렬에 동참하여, 이중섭은 그해 12월 아내와 두 아들과 함께 부산으로 피난했다. 이때 그는 어머니와 자신의 초기 작품들을 뒤에 남겨둘 수밖에 없었으며, 이 때문에 1950년 이전에 제작된 그의 작품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이 시기 이중섭의 가족은 극심한 빈곤에 시달렸다. 부산이 다른 피난민들로 과밀화되자, 이중섭은 더 따뜻한 기후를 찾아 가족과 함께 한국의 최남단인 제주도로 이동했다.


제주도 서귀포에서 이중섭 가족은 희망했던 따뜻하고 쾌적한 생활을 찾았다. 가족은 비록 가난했지만 대부분 행복한 1년을 섬에서 함께 보냈다. 이중섭의 그림 길 떠나는 가족(1951)은 황소를 이끄는 아버지와 꽃을 던지며 유토피아를 찾아가는 어머니와 두 아들이 탄 수레를 묘사하고 있다. 어려움 속에서도 이중섭은 주변 풍경에 영감을 받아 스케치하고 그림을 그렸으며, 갈매기, 게, 물고기, 해안, 그리고 성장하는 아이들을 새로운 소재로 삼았다. 이곳에서 이중섭은 아이들을 물고기나 게와 함께 간결하고 추상적인 풍경 속에 묘사하는 더욱 단순화된 선적인 스타일을 발전시켰다. 1951년 말, 섬에서의 재정적 어려움이 가중되어 가족 모두 건강이 악화되었다. 그들은 12월에 부산으로 돌아와 일본인들을 위한 피난민 수용소를 전전했다. 서귀포는 그의 많은 작품에 지리적 중요성과 의미를 부여하는 장소이며, 이중섭은 그곳에서 찾은 보금자리를 분명히 아꼈다. 그는 섬에 머무는 동안 소년, 물고기, 게(1950), 잃어버린 고향의 바다 노래(1951), 태양과 아이들(1950년대), 함께 춤추는 가족(1950년대), 봄날의 아이들(1952-53), 해변의 아이들(1952-53) 등 그의 가장 잘 알려진 작품들을 일부 창작했다.
한국 전쟁이 끝날 무렵부터 1954년 6월까지, 이중섭은 통영에서 강사로 일했다. 전쟁 발발 이후 처음으로 비교적 안정적인 시기를 보낸 이중섭은 통영에서 유명한 황소 연작과 아름다운 통영 풍경을 담은 유화 연작 등 수많은 작품을 열정적으로 제작했다. 이곳에서 그는 생애 첫 개인전을 열었다.
4. 개인 생활과 가족 관계
이중섭의 개인 생활은 가족에 대한 깊은 사랑과 이별의 아픔으로 점철되어 있다. 특히 일본인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한국명 이남덕) 여사와의 결혼, 그리고 전쟁으로 인한 가족과의 강제적인 이별은 그의 삶과 예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중섭은 문화학원 유학 시절 만난 야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일본어, 한국명 이남덕, 1921년 ~ 2022년 8월 13일)와 깊은 사랑에 빠졌고, 1945년 4월 일본의 폭격이 한창이던 시기에 마사코가 원산으로 건너와 다음 달인 5월에 결혼했다. 1946년 첫아들이 태어났으나 디프테리아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 이중섭에게 큰 슬픔을 안겼다. 당시 그는 무명 화가로서 전시회를 준비하고 작품을 만들고 있었다. 그는 이 상실감에서 영감을 받은 그림 하얀 별과 함께 나는 아이를 1947년 한국 독립운동 기념 전시에 출품했다. 1947년에는 첫째 아들 태현이 태어났고, 1949년에는 둘째 아들 태성이 태어났다.
한국 전쟁 이후 극심한 가난에 지쳐 1952년 7월, 마사코는 두 아들과 함께 임시 합의로 일본으로 떠났다. 가족과 동행할 비자를 얻지 못한 이중섭은 깊은 우울감에 빠졌고 가족을 그리워했다. 그는 아내와 아이들에게 그림이 담긴 편지와 엽서를 보내며 재회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표현했다. 이후 그는 공예 교사로 일하며 그림, 잡지 삽화, 책 표지 등을 제작하고 전시에 참여하며 작업을 계속했다. 그러나 이 시기 부산에서 제작된 그의 작품 대부분은 안타깝게도 화재로 소실되었다. 이중섭은 1953년 부두 노동으로 번 돈으로 마련한 선원증을 통해 일본 처가댁을 방문하여 단 5일간 가족과 재회한 것이 마지막 만남이었다. 선원증 소지자는 일본에 오래 체류할 수 없었기에 1주일 만에 한국으로 귀환해야 했다. 그는 다시는 가족을 만나지 못했다. 이중섭의 절친한 친구였던 시인 구상은 이중섭이 일본에 있는 가족과 재회하기 위해 작품을 팔려고 얼마나 고군분투했는지, 그리고 그 희망을 잃는 고통과 고뇌가 어떻게 이중섭의 자기 고문과 정신 질환으로 이어졌는지를 묘사했다. 이중섭은 구상의 어린 아들에게 세발자전거를 선물하는 모습을 그린 시인 구상 가족(1955)을 통해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기도 했다.
5. 전시 및 평가
이중섭은 생전에는 극심한 가난과 고독 속에서 활동했지만, 사후 그의 작품은 재평가되어 '국민 화가'로서의 확고한 위상을 확립했다. 그의 작품은 한국인의 정서와 정체성을 대변하며 국제적으로도 인정받는 한국 근현대 미술의 중요한 유산이 되었다.
5.1. 주요 전시회
이중섭은 1954년 6월까지 통영에서 강사로 일하며 비교적 안정된 시기를 보냈고, 이곳에서 생애 첫 개인전을 열었다. 1955년 1월, 그는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미도파백화점에서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개인전을 열었다. 이 전시는 그의 작품 40여 점 이상이 전시되고 20점이나 판매되는 높은 성과를 거두었지만, 전쟁 후 어려운 형편을 이유로 작품을 구매한 사람들이 돈 대신 먹을 것으로 주거나 대금 지급을 미루는 바람에 이중섭의 손에 쥐어진 돈은 얼마 되지 않는 수고비에 불과했다. 이로 인해 이중섭은 가족을 책임지지 못한 가장이라는 자괴감에 빠지게 되었다.
이후 구상의 도움으로 4월에는 대구 미국공보원 갤러리에서 또 다른 전시회를 열었으나, 서울에서의 전시보다도 더 좋지 않은 결과를 얻었다. 이중섭은 깊은 우울증에 빠졌고, 가족의 부양자로서뿐만 아니라 예술가로서도 실패했다고 자신을 자책했다.
5.2. 사후 평가 및 명성
1957년 이중섭을 기리는 사후 전시회가 열리면서 그의 작품은 대중의 큰 관심을 받았다. 이중섭은 뉴욕 현대미술관(MoMA)의 영구 소장품으로 작품이 소장된 최초의 한국인 예술가가 되었다. 그는 한국에서 가장 중요한 예술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이중섭은 한국인의 화가로 알려지기를 원했으며, 한국의 전통적 미학을 구현하면서도 독특한 한국적 모더니즘을 표현했다. 그의 작품은 억압적인 폭력, 빈곤, 절망의 시대에 개인의 희망과 염원을 담아낸다. 그의 삶의 이야기는 전쟁이 개인과 가족에게 미치는 파괴적인 영향을 상기시킨다.
이중섭은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급속도로 평가가 높아졌고, 1978년에는 은관문화훈장(2등급)이 추서되면서 한국 현대미술의 '국민적 작가'로서의 평가가 확고히 자리 잡았다. 2012년 4월 10일, 구글은 이중섭의 96번째 생일을 기념하여 그의 상징적인 황소 그림 중 하나를 특징으로 하는 구글 두들을 선보이기도 했다.
6. 죽음
이중섭은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삶의 고난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인해 조현병 증세에 시달렸다. 외로움 속에서 그는 술에 의존하게 되었고, 심한 거식증을 앓게 되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서울, 대구, 통영을 오가며 유랑 생활을 이어갔다. 생애 마지막 해는 여러 병원과 친구들의 집을 전전하며 보냈다. 그는 돌아오지 않는 강 연작을 포함한 문학 잡지 삽화 작업을 계속했다.
1956년 9월 6일, 이중섭은 서울 적십자병원에서 간염으로 40세의 나이로 홀로 세상을 떠났다. 친구들이 수소문하여 이중섭을 찾았을 때, 이미 그의 시신과 밀린 병원비 청구서만이 남아있었다고 한다. 친구들은 그의 시신을 화장하고 유골의 일부를 일본에 있는 마사코에게 보냈다. 그리고 서울 망우리 공원에 그의 묘비를 세웠다.
7. 유산과 영향
이중섭은 한국 근현대 미술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며 한국 미술계와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작품은 단순한 예술적 표현을 넘어, 한국인의 정체성과 민족의식을 담아낸 상징적인 유산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전통 미학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서양화 기법을 한국적으로 정착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의 삶과 예술은 전쟁과 빈곤이라는 시대적 고통 속에서도 예술혼을 불태웠던 한 예술가의 투혼을 보여주며, 이는 오늘날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깊은 감동과 영감을 주고 있다. 그의 작품은 억압적인 폭력, 빈곤, 절망의 시대에 개인의 희망과 염원을 담아내며, 그의 삶의 이야기는 전쟁이 개인과 가족에게 미치는 파괴적인 영향을 상기시킨다.
7.1. 예술 시장에서의 위상과 논란
이중섭의 작품은 한국에서 대표적인 국민 화가로서 수집가들 사이에서 높은 인기를 얻으며 고가에 거래되고 있다. 그러나 2000년대 후반 한국 미술 시장에 '아트 버블'이 일었던 시기에는 대량의 위작이 유통되는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 조사 결과, 미술 시장에 유통되던 이중섭 작품의 약 80%가 위작으로 판명되는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다. 특히 2005년 3월 16일 그의 둘째 아들 이태성(야마모토 야스나리)이 처음 공개하여 경매에 내놓았던 그림 8점 또한 같은 해 10월에 가짜로 밝혀져 한국 미술 시장에 큰 냉각기를 가져오기도 했다.
8. 기념 및 문화적 재현
이중섭 화가의 예술혼과 삶을 기리기 위한 다양한 기념 사업과 문화적 재현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는 그의 예술이 어떻게 기억되고 계승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 이중섭 미술관 및 이중섭 거리
1995년, 이중섭 가족이 1951년에 살았던 제주도 서귀포시의 집을 개조하여 이중섭 미술관이 건립되었다. 미술관은 '이중섭 예술의 거리'(제주올레 6코스의 일부)의 중심에 위치해 있다. 미술관 부지는 언덕 아래의 무성한 덩굴과 식물로 둘러싸인 길에서 시작하여, 이중섭 가족이 서귀포에 도착한 후 살았던 초가집으로 이어진다. 초가집에서 텃밭을 지나 또 다른 길을 따라가면 미술관에 다다른다. 미술관에는 이중섭의 원작 11점, 한 층 전체에 걸친 복제 작품, 그리고 아내에게 보낸 많은 원본 편지가 소장되어 있다. 이중섭의 인기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높아지면서 그의 작품 가치가 급등하여, 미술관이 작품을 소장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미술관 2층에서는 종종 현대 한국 작가들, 특히 제주 출신 작가들의 작품이 전시되기도 한다. 매년 9월에는 이중섭 거리에서 이중섭 예술제가 개최된다.
- 기념 우표 및 음반
2016년 9월 1일에는 이중섭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우표가 발행되었다. 2007년 3월 6일에는 이중섭을 추모하는 헌정 음반인 《그 사내 이중섭》이 발매되었다.
- 희곡 및 연극
한국의 극작가 김의경(1936년 ~ 2016년)이 이중섭을 주인공으로 한 희곡 길 떠나는 가족을 집필했다. 이 작품은 2001년 제8회 베세토 연극제에서 서울시립극단 공연으로 신니가산방에서 상연되었다. 또한 신주쿠 료잔파쿠의 대표인 김수진이 극단 문화좌에 초청되어 각색 및 연출을 맡아 2014년 초연되었으며, 전국 순회공연을 통해 총 100회 이상의 무대에 올랐다. 초연부터 출연한 배우 사사키 아이는 각색에도 참여했다.
9. 관련 항목
- 구본웅
- 그 사내 이중섭
- 흰 소
- 한국의 화가 목록
- 한국 미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