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이스마일 라지 알파루키(1921년 1월 1일 ~ 1986년 5월 27일)는 팔레스타인계 미국인 무슬림 철학자이자 학자로, 이슬람 연구와 종교 간 대화 분야에서 광범위하게 활동했다. 그는 이슬람 사상, 윤리, 유일신론 개념, 종교 간 관계를 탐구하며 100편 이상의 논문과 25권의 저서를 집필했다. 특히 『기독교 윤리: 주요 사상의 역사적 및 체계적 분석』(1967)과 『알타우히드: 사상과 삶에 대한 함의』(1982) 등의 대표작을 남겼다. 그는 카이로의 알아즈하르 대학교에서 수학했으며, 캐나다 몬트리올의 맥길 대학교를 비롯한 북미 지역의 여러 대학에서 가르쳤다. 템플 대학교에서는 종교학 교수로 이슬람 연구 프로그램을 설립하고 이끌었으며, 국제 이슬람 사상 연구소(IIIT)를 공동 설립하기도 했다. 1986년, 알파루키와 그의 아내 로이스 라미야 알파루키는 펜실베이니아 자택에서 비극적으로 살해당했고, 이 사건은 학계와 종교 간 대화 공동체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2. 생애
이스마일 라지 알파루키는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나 유년기에 종교적 교육을 받고 행정직을 맡으며 초기 경력을 시작했다. 이후 학문적 탐구를 위해 미국으로 이주했으며, 이슬람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를 위해 이집트에서 유학했다.
2.1. 유년기 및 교육
알파루키는 1921년 1월 1일 영국 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의 야파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압둘 후다 알파루키'는 이슬람 법관인 카디였다. 알파루키는 어린 시절 집과 지역 모스크에서 초기 종교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그의 아버지는 알파루키의 초기 종교적 및 도덕적 교육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36년에는 프랑스 도미니코회가 운영하는 야파 프레르 대학에 입학하여 학업을 이어갔다. 이후 레바논 베이루트로 이주하여 베이루트 아메리칸 대학교에서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베이루트 아메리칸 대학교 재학 중에는 콘스탄틴 주레익, 나비 아민 파리스, 니콜라 지아데와 같은 아랍 민족주의 운동가와 저명한 기독교 아랍 민족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아 아랍주의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 대학의 학문적 환경에는 기독교 선교 강의와 서구 근대화를 장려하는 강좌가 의무적으로 포함되어 그의 사상 발달에 영향을 미쳤다.
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 이후, 알파루키는 미국으로 건너가 인디애나 대학교에 입학했다. 1949년에는 '이성의 윤리와 삶의 윤리 (칸트와 니체의 윤리)'라는 논문으로 철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이 논문에서 임마누엘 칸트와 프리드리히 니체의 윤리 사상을 탐구했다. 그의 초기 철학 연구는 서구 윤리 체계에 대한 그의 후기 비판과 이슬람 윤리 사상 발전에 기초를 제공했다. 1951년에는 하버드 대학교에서 두 번째 철학 석사 학위를 받았고, 1952년 인디애나 대학교에서 '선을 정당화하기'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의 박사 논문에서 알파루키는 가치가 절대적이며, 감정적 직관을 통해 선험적으로 알려진 자명한 본질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이론을 막스 셸러의 현상학적 접근 방식과 니콜라이 하르트만의 윤리학 연구에 기반을 두었다. 그의 연구는 초월적 기초의 부재가 도덕적 상대주의로 이어진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했고, 이는 그가 자신의 이슬람 유산을 재평가하도록 이끌었다.
미국에 도착한 지 6년 만에 그는 이슬람에 대한 더 심도 있는 연구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1954년부터 1958년까지 이집트의 알아즈하르 대학교에서 수학했다. 미국을 떠날 무렵, 그는 도덕적 의무에 대한 새로운 질문을 발전시켰으며, 자신의 지적 추구를 이슬람 정체성과 통합하고자 노력했다.
2.2. 초기 경력
알파루키는 대학 졸업 후 사회 생활을 시작하며 행정직을 경험했다. 1942년에는 영국 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 정부 산하 예루살렘의 협동조합 등록관으로 임명되었다. 1945년에는 갈릴리 지역의 구청장으로 재직하며 행정 경험을 쌓았다.
3. 학문적 경력
알파루키의 학문적 경력은 북미와 이슬람 세계의 주요 대학을 거치며 이슬람 학문 발전에 기여한 시기였다. 그는 학술 단체 설립과 이슬람 교육 개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58년, 알파루키는 캐나다 맥길 대학교 신학부의 방문 펠로우십 제안을 수락했다. 그는 퀘벡 생로랑에 거주하며, 맥길 대학교의 이슬람 연구소에 설립자 윌프레드 캔트웰 스미스의 초청으로 합류하여 1958년부터 1961년까지 스미스와 함께 가르쳤다. 이 기간 동안 그는 기독교 신학과 유대교를 연구하며 파키스탄 철학자 파즐루르 라흐만과 친분을 맺었다. 라흐만은 스미스의 멘토링 아래 이들 전통에 몰두한 알파루키의 경험이 그의 종교학 및 종교 간 대화에 대한 비교론적 관점을 발전시키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1961년, 파즐루르 라흐만의 도움으로 알파루키는 파키스탄 카라치의 중앙 이슬람 연구소에서 2년간 방문 교수로 재직했다. 라흐만은 이 경험이 알파루키의 이슬람 내 문화 다양성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켰고, 이는 그의 후속 비교 종교 및 초종교 이론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고 언급했다. 1964년, 알파루키는 미국으로 돌아와 시카고 대학교 신학부 방문 교수와 시러큐스 대학교 부교수를 겸임했다.
1968년, 그는 템플 대학교의 종교학 교수로 부임하여 이슬람 연구 프로그램을 설립했고, 1986년 사망할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템플 대학교 재직 중 알파루키는 그의 첫 번째 박사 과정 학생인 존 에스포지토를 비롯한 많은 학생들을 지도했다. 그는 학문적 지도뿐만 아니라, 무슬림 학생 협회(MSA)와 같은 학생 공동체 활동을 지원하는 데에도 적극적이었다. 그의 자택은 종종 학생들이나 학자들이 모여 의견을 교환하는 지적 교류의 장이 되기도 했다. 오스만 바카르에 따르면, 알파루키는 학생들의 학업 등록 절차를 직접 도울 정도로 깊이 관여하며 학생들을 지원하는 데 헌신했다.
1973년, 알파루키는 미국 종교 학회 (AAR) 내에 이슬람 연구 그룹을 설립하고 10년간 의장을 역임했다. 이 이니셔티브는 무슬림 학자들이 다른 종교 전통의 학자들과 특히 비교 종교 및 종교 간 연구 분야에서 대화에 참여할 수 있는 공식적인 플랫폼을 제공했다. 그의 학술 활동 외에도 종교 간 평화 콜로키움 부회장, 시카고 미국 이슬람 대학 총장 등 다양한 리더십 직책을 맡았다.
1977년 3월, 알파루키는 메카에서 열린 제1회 세계 이슬람 교육 회의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 회의에는 무함마드 카말 하산, 사이드 무함마드 나퀴브 알-아타스, 사이드 알리 아쉬라프 등 여러 저명한 학자들이 참여했다. 이 회의는 다카, 이슬라마바드, 쿠알라룸푸르, 캄팔라, 니제르에 이슬람 대학교를 설립하는 기초를 마련했으며, 알파루키는 회의의 논의와 행동 계획 개발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또한 파키스탄의 무함마드 지아울 하크와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모하맛 등 무슬림 세계의 정치 지도자들에게 자문 역할을 수행했다. 지아울 하크 행정부 시절, 알파루키는 1980년 이슬라마바드 국제 이슬람 대학교 설립에 기여했으며, 이는 이슬람 가치를 현대 학문 분야와 통합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말레이시아에서는 마하티르 모하맛 총리에게 자문하여 1983년 말레이시아 국제 이슬람 대학교 (IIUM) 설립을 도왔다. 두 기관 모두 종교적 지식과 세속적 지식을 전체론적 교육 틀 내에서 결합하도록 설립되었다.
1980년, 이스마일 알파루키는 타하 자비르 알랄와니, 압둘 하미드 아부술라이만, 안와르 이브라힘과 함께 국제 이슬람 사상 연구소(IIIT)를 공동 설립했다. 그의 종교 간 대화 참여는 종교 공동체 간의 상호 이해와 협력을 증진시켜 이슬람, 기독교, 유대교 간의 공통점을 강조하는 평화와 존중의 세계적 환경을 조성하는 데 기여했다.
4. 사상과 철학
알파루키의 사상은 아랍주의에서 이슬람주의로의 전환, 윤리적 추론에 대한 비판, 타우히드의 통합적 이해, 초종교 개념, 비교 종교학적 접근, 지식의 이슬람화 비전, 그리고 시온주의에 대한 강력한 비판으로 요약된다. 그는 이슬람 원칙을 현대 학문과 통합하고 종교 간 대화를 통해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데 힘썼다.
4.1. 초기 사상: 아랍주의
알파루키의 초기 지적 초점은 'عروبة우루바아랍어'(아랍주의)였다. 그는 '우루바'가 모든 무슬림을 단일한 신자 공동체인 'أمة움마아랍어'로 통합하는 핵심 정체성과 가치라고 주장했다. 알파루키는 쿠란의 언어인 아랍어가 이슬람 세계관을 완전히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믿었다. 그는 초기에는 '우루바'가 무슬림 정체성과 분리할 수 없는 것으로, 언어적 차원 및 종교적 차원을 모두 포괄한다고 보았다.
알파루키는 또한 타우히드(유일신론)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에서 아랍 종교 의식의 중심 요소임을 강조했다. 그는 이 개념이 아랍 문화와 언어에 뿌리를 둔 이들 종교 간의 공통된 유일신 사상을 강조한다고 보았다. 그는 이슬람과 유일신이 인류에게 주는 아랍 의식의 선물이라고 믿었으며, 이는 현대 시대의 인종 기반 민족주의와 대조되는 입장이었다. 그는 이슬람 문명의 회복이 아랍어를 전 세계 무슬림의 중심적인 통합 문화적 힘으로 활성화하는 데 달려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아랍주의 묘사는 단순히 민족주의를 넘어 이슬람 내 민족적 분열을 가로지르는 이념적 교량 역할을 했다.
그러나 알파루키의 아랍 중심적 접근 방식은 일부 학자들로부터 본질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비아랍 무슬림 지식인들을 포함한 비판자들은 아랍어가 이슬람 사상에 유일하게 적합한 언어 구조라는 그의 주장에 반대하며, 역사적으로 비아랍 무슬림의 풍부한 지적 기여가 간과될 위험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럼에도 파키스탄에서의 그의 경험은 이슬람 내 다양한 문화를 접하게 하면서 점차 아랍 중심적 시각에서 벗어나게 했다. 해외 경험, 특히 파키스탄에서의 경험은 그의 시야를 넓혔고, 초기 이슬람을 아랍 중심적으로 보던 시각을 재고하게 만들었다. 다양한 무슬림 사회와의 접촉은 그가 언어나 민족성을 넘어선 더 확장된 무슬림 정체성을 인식하게 했고, 보편적인 영적 가치를 포용하게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러한 확장된 비전은 공유된 영적, 윤리적 차원을 우선시하는 이슬람 통합을 강조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언어적, 문화적 경계를 초월한 초국가적 이슬람 문명에 대한 알파루키의 믿음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4.2. 윤리 및 가치론
알파루키의 철학적 탐구는 칸트 윤리학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포함했으며, 특히 도덕적 보편성에 대한 칸트의 입장을 이슬람 윤리적 틀 내에서 더욱 발전시키고자 했다. 1952년 박사 학위 논문 '선을 정당화하기'에서 알파루키는 선, 가치, 윤리와 관련된 철학적 질문을 탐구하고 서구 윤리 이론에 대해 비판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막스 셸러나 칸트와 같은 철학자들의 저작을 참고하여, 윤리적 추론에서 발생하는 두 가지 주요 오류, 즉 자연주의적 오류와 애매성 오류를 식별했다. 그는 윤리적 개념이 인간의 자연적 욕망과 혼동될 때 자연주의적 오류가 발생한다고 주장했다. 알파루키는 존 스튜어트 밀이 행복을 바람직함과 연관시킨 것을 비판하며, 이러한 관점이 윤리적 가치를 주관적 욕망과 동일시하여 윤리적 상대주의로 이어질 수 있다고 보았다.
알파루키의 애매성 오류 분석은 모호한 기준에 따라 가치가 부여되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그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과 같은 철학자들이 '유용성'과 '가치'와 같은 용어를 명확한 구별 없이 혼동하는 경우가 있다고 주장했다. 알파루키에 따르면, 미덕을 주로 행복의 관점에서 정의하는 것은 윤리적 가치의 진정한 본질을 모호하게 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가치가 경험적 또는 상대적 기준과 독립적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경험적 관찰보다는 감정적 직관을 통해 선험적으로 알려진다고 주장했다.
셸러의 이론을 검토하면서 알파루키는 가치를 분류하고, 내재적 가치와 절대적 가치를 구별했다. 그는 이러한 가치들이 경험적 영향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윤리적 탐구의 기초를 형성한다고 주장했다. 가치론에 대한 알파루키의 틀은 그가 서구 윤리 사상의 한계라고 여겼던 것에 대한 대안을 제공하려는 의도였다. 그의 박사 학위 논문은 이슬람 원칙을 현대 학문 분야에 통합하려는 그의 후기 노력의 토대가 되었으며, 지식의 이슬람화라는 그의 광범위한 개념에 기여했다.
4.3. 이슬람주의로의 전환
미국으로 이주한 후 알파루키의 관점은 크게 변화했다. 템플 대학교에서 무슬림 학생 협회(MSA) 활동에 참여하면서 다양한 배경을 가진 무슬림 학생들을 만났다. 이 경험은 그가 초기의 아랍주의적 강조를 재고하고, 아랍 민족주의 대신 더 넓은 이슬람적 정체성으로 나아가게 했다. 말리크 바드리는 이러한 변화를 "생애 처음으로 알파루키는 아랍주의에 대한 그의 개념을 산산조각 낸 젊은 학생 집단을 만났다. 그는 이슬람이 움마의 진정한 결속력임을 인정해야 했다. 특히 아랍인은 움마 내에서 소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했다. 알파루키 자신도 이러한 변화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나는 팔레스타인인, 아랍인, 무슬림이었다. 이제 나는 팔레스타인 출신의 아랍인이기도 한 무슬림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한 "나는 자문했다: 나는 누구인가? 팔레스타인인, 철학자, 자유주의적 인본주의자인가? 나의 대답은: 나는 무슬림이다"라고 언급했다.
말년에 알파루키는 윤리적 규범을 형성하는 틀로서 이슬람법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절도와 간통에 대한 법적 조치를 훈육을 촉진하고 사회적 해악을 방지하기 위한 억제책으로 보았다. 알파루키는 이러한 법률을 교육에 중점을 둔 더 큰 노력의 일환으로, 윤리적 행동을 함양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육성하는 데 기여한다고 보았다.
북미에서 이슬람의 역할에 대한 탐구에서 알파루키는 초기 정착부터 엘리자 무함마드와 말콤 엑스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 사이의 이슬람 운동에 미친 영향에 이르기까지 아프리카계 무슬림의 역사적 기여와 도전을 강조했다. 이슬람의 윤리적 기초, 움마의 개념, 그리고 무슬림 이민자들의 책임에 대한 그의 통찰은 북미 무슬림 경험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러한 전환은 그의 종교 간 대화 접근 방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알파루키는 무슬림이 아닌 공동체와 의미 있는 상호 작용을 촉진하기 위해서는 통일된 이슬람 정체성이 필수적이라고 믿었다. MSA에서의 그의 참여와 미국에서 다양한 무슬림 배경과의 접촉은 그의 초기 아랍 중심적 견해보다 더 넓고 포괄적인 이슬람 정체성에 대한 그의 헌신을 강화했다.
4.4. 타우히드에 대한 견해
알파루키의 타우히드(유일신론)에 대한 견해는 신비주의와 비의적 수행을 강조한다고 여겨지는 수피즘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포함했다. 그는 수피즘의 신비주의가 이슬람의 합리적 측면에서 벗어난다고 비판했다. 알파루키는 이슬람 원리를 이해하는 데 이성과 논리의 사용을 옹호한 무타질리 신학자들인 알나잠과 알카디 압둘 자바르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또한, 그는 이슬람 가르침과 그리스 철학적 요소를 결합한 순수 형제단('إخوان الصفا이흐완 앗사파아랍어')의 저작에서 가치를 찾았다.
알파루키가 강조한 타우히드는 신학을 넘어 합리적 사고, 윤리, 사회적 책임을 삶의 모든 측면에 통합하는 접근 방식을 포함했다. 그는 타우히드가 "이슬람 문명에 정체성을 부여하고, 모든 구성 요소를 하나로 묶어 우리가 문명이라고 부르는 통합적이고 유기적인 몸을 형성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타우히드 원리가 "신성의 초월성과 유일성에 관한 모든 의심으로부터 종교를 깨끗하게 정화시킨다"고 단언했다.
개념 | 알파루키의 설명 |
---|---|
타우히드 | 이슬람 문명의 정체성을 부여하고, 모든 구성 요소를 통합하여 완전하고 유기적인 공동체를 형성한다. |
세속주의와 물질주의 | 이슬람적 통합과 윤리적 온전성에 대한 도전. 타우히드는 자연 세계를 완전히 세속화하여 과학 발전을 가능하게 하면서도 통일된 윤리적 틀을 유지한다. |
이러한 접근 방식은 세속주의와 물질주의에 대한 그의 시각으로 확장되었는데, 그는 이를 이슬람 통합과 윤리적 온전성에 대한 도전으로 보았다. 알파루키는 이슬람 사회에 대한 이슬람의 비전이 타우히드가 "자연 세계를 완전히 세속화하여 과학 발전을 가능하게 한다"는 통합된 세계관을 요구하며, 이는 자연으로부터 신성한 것을 분리하면서도 통일된 윤리적 틀을 유지한다고 주장했다. 서구 세속 이데올로기에 대한 그의 대응은 타우히드가 세속 이데올로기에서 보이는 영적-물질적 분열과 달리 이성과 신앙이 함께 작동하는 전체론적 틀을 요구한다는 믿음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4.5. 초종교
알파루키는 이성을 바탕으로 한 초종교(meta-religion) 원칙을 확립하여 종교를 서로 비교하는 대신 보편적 기준에 따라 평가하고자 했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다양한 신앙 간의 협력을 위한 공통 기반을 찾는 것을 목표로 했다. 초종교 개념의 핵심은 유일신에 대한 공유된 본질적 믿음이며, 그는 이것이 종교의 다양화 이전에 존재했던 원래의 "순수한 신앙 형태"를 나타낸다고 주장했다. 알파루키가 구상한 초종교는 역사적 종교와는 다르며, 상호 이해와 종교 간 협력의 기초로서 'فطرة피트라아랍어'(자연적 종교)에 뿌리를 둔 보편적 원칙에 초점을 맞춘다.
이러한 틀 안에서 'دين الفطرة딘 알아피트라아랍어'는 신성한 것에 대한 인간의 타고난 경향을 의미하며, 초종교는 특정 종교적 명칭을 초월하는 진리에 대한 내재화된 인식을 제공한다고 제안한다. 이러한 관점은 각 신앙의 교리적 세부 사항을 동일시하지 않으면서도 공유된 영적 기초를 인정하는 형태의 종교 간 이해를 지지한다. 초종교는 종래의 의미에서 종교적 다원주의를 긍정하기보다는, 인간 본성에 내재된 원래의 유일신적 진리를 다양한 정도로 반영하는 것으로 종교들을 본다.
대화를 촉진하기 위해 알파루키는 몇 가지 지침 원칙을 제안했다. 모든 대화는 비판에 열려 있어야 하며, 의사소통은 내적 일관성 및 외적 일관성의 법칙을 준수해야 하고, 대화는 현실과 일치해야 하며 "정경적 형상화"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논의는 신학적 논쟁보다는 윤리적 질문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알파루키의 초종교 개념은 신 또는 궁극적 실재를 "완전히 다른 것"으로 믿는 것을 포함한다. 그는 모든 예언자들이 전파한 보편적인 초종교로서 이슬람이 타우히드 개념을 중심으로 하며, 이는 하나님의 유일성과 초월성, 그리고 세상 속에서 신성한 조화를 반영해야 하는 인류의 의무를 포괄한다고 강조했다.
알파루키는 또한 종교 연구가 외적 또는 기능적 측정치를 통해 그 진리를 입증하는 것보다는 '호모 렐리기오수스'(자연적으로 종교적인 인간)의 상태, 즉 신성한 것에 대한 타고난 인식을 가진 인간의 상태를 이해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게 초종교적 대화는 교리적 차이로 인해 발생한 간극을 메우고 신앙 공동체 간의 상호 이해와 존중을 증진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의 윤리 중심 접근 방식은 신학적 논쟁보다 더 건설적이고 덜 논쟁적인 종교 간 교류를 촉진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4.6. 비교 종교학
알파루키의 비교 종교학 연구는 다양한 신앙 전통 간의 존중하는 교류를 위한 틀을 마련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는 특히 히브리 성경 해석과 관련하여 이슬람과 기독교 간의 철학적 대조와 수렴을 탐구했다. 그는 이슬람 문명의 절정기에는 종교 간 대화가 대중적인 오락이자 지적 교류의 흔한 주제였으며, 이는 그 역사적 선례를 보여준다고 강조했다. 그의 접근 방식은 서로 다른 해석학적 방법과 신학적 틀을 검토하여, 교리적 구분을 존중하면서도 종교 간 대화를 지원할 수 있는 공유된 가치를 식별하는 것이었다. 그는 상호 존중과 윤리적 고려를 바탕으로 시작된 대화의 가치를 믿었으며, "진리로의 개종은 대화의 목표"라고 말하며 솔직한 종교 간 교류에 대한 그의 헌신을 반영했다.

알파루키는 이슬람과 달리 기독교는 법과 경제 같은 사회적 틀을 구축하는 명시적인 기초가 부족하며, 이는 사회적 결속에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
:"기독교 교리에 건전한 사회주의의 기초가 부족하다는 점은 지난 백 년 동안 기독교인들의 마음을 매우 강력하게 혼란스럽게 했다. 도시 중심지, 산업, 통신 수단의 성장은 새로운 종류의 사회적 결속의 필요성을 깨닫게 했다... 그러나 교회가 그 유산의 충실한 수호자였기에, 아무 소용이 없는 역설로만 답할 수밖에 없었다... 교회가 도울 수 있었지만 자제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곡예 같은 최선을 다했지만, 예수의 메시지가 사회주의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피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또한 이러한 이원론적 유산에서 비롯된 서구 윤리의 근본적인 내적 갈등을 다음과 같이 보았다.
:"기독교인이 된 이래로 서구인은 분열된 삶을 살았고 분열된 인격으로 고통받았다. 한편으로는 예수와 그의 윤리적 포기,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주장, 자연 긍정, 그리고 '세속성'을 가진 자연이 그의 충성과 존재를 나누었다. 그는 영적인 것을 물질적인 것보다 강조한 예수의 가르침을 무시하며 삶을 영위했지만, 모든 행동에 예수의 축복을 빌었다."
기독교 신학에 대한 탐구 외에도, 알파루키는 칸트, 셸러, 하르트만과 같은 사상가들을 통해 윤리를 탐구하며 현대 서구 철학과 교류했다. 그의 비교 연구는 또한 윤리적, 형이상학적 질문으로 확장되었으며, 그는 서구 사상과 이슬람 사상 간의 상이한 가치 체계를 강조했다.
종교적 전통을 역사적으로 검토하면서 알파루키는 독특한 신념과 더불어 공유된 원칙을 인정하는 종교 간 대화의 잠재력을 보았다. 알파루키는 서구 윤리가 종종 개인주의를 강조하는 반면, 이슬람 윤리는 공동체 복지와 신성한 책임을 우선시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러한 대조적인 틀이 각 전통의 도덕성, 존재, 목적에 대한 광범위한 견해를 형성한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데미안 하워드와 같은 일부 비판자들은 알파루키의 종교 간 교류 접근 방식이 상호 이해보다는 이슬람적 관점을 더 강조하여 대화의 깊이와 포괄성을 제한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4.7. 지식의 이슬람화
알파루키는 이슬람 원칙을 현대 학문 분야와 통합하는 전체론적 지식 개념을 정립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으며, 이는 종종 신근대주의적 접근 방식으로 묘사된다. 무슬림 사회에서 지식의 세속화에 대해 우려했던 알파루키는 동시대의 도전을 해결하기 위해 이슬람 사상을 재해석하는 전체론적 인식론을 옹호했다. 그는 "움마의 병폐"라고 불리는 것을 논하며, 서구의 도구와 방법론에 대한 의존이 무슬림 국가의 생태적, 사회적 현실과의 단절을 초래하고 종종 필수적인 이슬람 윤리를 간과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알파루키는 무슬림 공동체의 윤리적 틀을 보존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현대 지식 체계 내에 이슬람 가치를 통합하는 것을 강조했다.
알파루키 경력의 후반부는 '지식의 이슬람화' 개념에 집중되었다. 그는 무슬림 교육 시스템의 세속화와 서구 지배를 보며, 현대 과학 및 학문 분야에 이슬람 가치를 통합하여 궁극적으로 윤리적 온전성에 뿌리를 둔 인식론을 추구하는 비전을 제시했다. 이 개념에는 경제 활동이 이슬람 윤리와 일치하도록 자카트와 이자 금지 같은 경제 원칙을 포함했다. 그의 사상은 결국 국제 이슬람 사상 연구소(IIIT)의 설립으로 이어졌고, 이는 학문 분야 전반에 적용 가능한 이슬람 인식론과 방법론을 창출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알파루키의 방법론은 사회 과학으로 확장되었으며, 그는 서구 세속주의를 비판하면서 이슬람 윤리적 고려를 유지하는 틀을 옹호했다. 그의 목표는 세속적 원칙을 움마의 가치와 일치하는 이슬람 윤리에 기반을 둔 토대로 대체하는 것이었다. 그는 현대 학문 분야를 포함하면서도 이슬람 사상에 확고히 뿌리를 둔 통일된 이슬람 교육 과정을 구상했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이슬람적 관점에서 현대적 도전에 대처할 수 있는 학자들을 배출하는 것을 목표로 했으며, 교육 과정 개발과 교육 시스템 개혁을 위한 실질적인 전략을 모두 강조했다.
그러나 이브라힘 칼린과 같은 일부 학자들은 알파루키의 인문학 집중이 자연 과학을 거의 검토하지 않은 채 남겨두었다고 비판한다. 칼린은 알파루키의 작업을 "방법 또는 방법론('manhaj'와 'manhajiyyah')... 이 현대 과학 논의에 관련된 더 깊은 철학적 문제들을 모호하게 할 수 있는" 한 예시로 묘사한다. 알-파루키의 목표는 서구 지식을 이슬람화하는 것이었지만, 칼린은 그의 초점이 "오직 인문학에만 있었고, 과학적 지식은 거의 손대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칼린은 이러한 누락이 의도치 않은 결과를 초래했다고 주장한다: "첫째, 파루키의 이슬람화 연구는 추종자들에게 지식('ilm')이 사회 학문과 동일시되는 틀을 제공하여 일종의 사회주의로 귀결되었다... 둘째, 현대 과학 지식을 이슬람화 범위에서 제외한 것은 현대 과학 세계관의 세속화 효과에 대한 최소한의 무관심한 태도로 이어졌다."
칼린의 비판은 알파루키의 과학적 지식에 대한 제한적인 참여가 이슬람 지식에 대한 사회학적 해석에 지나치게 집중하는 틀을 만들 위험이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칼린은 자연 과학을 생략함으로써 알파루키의 접근 방식이 현대 과학이 제기하는 철학적, 인식론적 도전에 대처할 준비가 되지 않은 현대 무슬림 지식인들을 남겨둘 수 있는 자연 과학과 인문 과학 사이의 세속적 분열을 무심코 강화한다고 주장한다.
4.8. 시온주의 비판
알파루키는 시온주의에 대한 강력한 비판자였으며, 민족주의적 이데올로기 때문에 시온주의가 유대교와 양립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는 시온주의가 팔레스타인 원주민을 축출하고 그들의 토지, 자원, 가옥을 강탈하려 했기에 근본적으로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를 "무장 폭력에 의한 적나라한 강탈"로 규정하며,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적 폭력을 동반한다고 보았다.
:"그 계획은 팔레스타인 원주민을 비우고 그들의 토지, 농장, 가옥, 모든 동산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시온주의는 무장 폭력에 의한 적나라한 강탈; 남녀노소 민간인에 대한 무자비하고 무차별적인 학살; 인간의 생명과 재산 파괴의 죄를 범했다."
따라서 그는 정의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시온주의의 해체가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
알파루키는 시온주의를 포기한 이스라엘 유대인들에게 대안적인 길을 제시했는데, 그들은 이슬람 체제 내에서 '움마 공동체'로 살아갈 수 있으며, 이슬람적 틀 내에서 랍비 법정이 지원하는 유대법에 따라 신앙을 보존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이러한 관점은 이슬람 통치가 종교적 관행을 침해하지 않으면서 다양한 공동체를 수용할 수 있다는 그의 신념을 강조했다.
:"[이슬람은] 유대인들에게 그들 자신의 랍비 법정을 세우고 그 법정의 모든 집행권을 이슬람 국가의 재량에 맡기도록 요구한다. 이슬람의 법인 샤리아는 모든 유대인에게 랍비 법정이 해석한 유대법의 규범에 복종할 것을 요구하며, 랍비 법정에 대한 불복이나 경멸을 이슬람 법정에 대한 무슬림의 유사한 행동과 마찬가지로 이슬람 국가에 대한 반란으로 간주한다."
시온주의의 영향에 대해 알파루키는 시온주의가 유대인에게 안보를 제공하기는커녕, 이스라엘에서 삶이 갈등과 외세 의존으로 정의되는 불안정한 존재를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시온주의는 이러한 슬픈 상황에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직접적인 책임이 있다. 그렇다면 시온주의가 유대인에게 안보를 제공하는 데 성공했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시온주의의 심장부인 이스라엘에서조차 유대인들은 무기고 한가운데에 앉아 철조망, 지뢰밭, 온갖 무기로 자신을 둘러싸고 있으며, 조만간 닥쳐올 것이 확실한 맹공격을 막으려 한다. 그들의 존재 자체가 엄격한 스파르타주의이며, 이는 국제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은혜에 가장 큰 부분 기인한다. 따라서 시온주의의 가장 위대한 성과라고 불리는 이스라엘은 사실 시온주의의 가장 큰 실패이다. 시온주의 국가의 존재 자체가 궁극적으로는 국제 정치의 일시적인 변덕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알파루키의 시온주의 비판은 이슬람 세계관 내에서 정의된 정의에 대한 그의 헌신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그는 시온주의가 "팔레스타인인의 정체성을 파괴하고 역사적 신화로 대체하려는 식민주의적 이데올로기"이며, 이는 이슬람적 정의에 어긋난다고 설명했다. 그는 시온주의에 대항하고 팔레스타인 투쟁의 권리를 회복하기 위한 움마의 통합을 촉구했다. 그의 노력은 팔레스타인 투쟁을 억압에 저항하는 이슬람의 도덕적 의무이자 윤리적 의무와 자주 연관시켰다.
5. 개인 생활
알파루키의 개인 생활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많지 않지만, 그는 학문적 동반자이자 예술가인 로이스 라미야 알파루키와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다. 그의 자택은 종종 학생들과 학자들의 지적인 교류의 장이 되기도 했다.
6. 사망
1986년 5월 27일, 이스마일 알파루키와 그의 아내 로이스 라미야 알파루키는 펜실베이니아주 윈코트에 있는 자택에서 요셉 루이스 영(유수프 알리라고도 알려짐)에 의해 살해당했다. 영은 범행을 자백했고,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1996년 교도소에서 자연사했다. 이 공격으로 당시 임신 중이던 그들의 딸 안마르 알-제인도 여러 차례 칼에 찔려 심하게 부상당했지만, 광범위한 치료 끝에 생존했다.
이 사건은 학계와 종교 간 공동체에 깊은 충격을 주었다. 살해 동기에 대해서는 다양한 이론이 제기되었다. 초기에는 실패한 강도 사건으로 여겨지기도 했지만, 이후에는 정치적 동기의 암살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이는 알파루키가 시온주의에 대해 강력히 비판하고 팔레스타인인의 권리를 옹호했던 학문적 활동과 연결되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1986년 8월, '뉴 스트레이츠 타임스'는 이 사건이 시온주의자들의 보복과 연관되어 있을 수 있다는 주장을 보도했다.
2008년 말레이시아 국제 이슬람 대학교에서 열린 컨퍼런스에서 아니스 아흐마드는 알파루키가 "나는 이제 학자이지만, 어떻게 미국에서 순교자가 될 수 있을까?"라고 말하며, 자신의 아버지가 자신에게 위대한 학자가 되고 순교자로 죽게 해달라고 두 가지 기도를 올렸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다고 전했다. 말리크 바드리는 "알라 타알라가 두 가지 기도를 모두 받아들였다"고 회고했다.
7. 유산 및 평가
알파루키는 이슬람 연구, 종교 간 대화, 그리고 이슬람 지식의 통합이라는 분야에서 광범위하고 지속적인 유산을 남겼다. 그의 사상은 현대 이슬람 사상과 교육 시스템에 계속해서 영향을 미치고 있다.
7.1. 학문적 업적
알파루키는 광범위한 저술과 학술 및 종교 간 단체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 이슬람 연구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학술 저널과 잡지에 100편 이상의 논문을 발표했으며, 25권의 영향력 있는 저서를 출판했다. 여기에는 '기독교 윤리: 지배적인 사상의 역사적 및 체계적 분석'(1968), '이스라엘 문제와 이슬람'(1980), 그리고 '알-타우히드: 사상과 삶에 대한 함의'(1982) 등이 포함된다. 이러한 저작들은 윤리, 신학, 종교 간 대화, 이슬람 사상의 현대 학문 분야 통합을 포함한 광범위한 주제를 다루었다.
알파루키는 현상학적 및 종교사적 접근 방식을 사용한 최초의 무슬림 학자였다. 그는 이러한 접근 방식이 이슬람을 인간 종교사의 일부로 이해하고, 무슬림이 현대 종교 연구에 참여하며 종교 간 이해를 구축하는 데 기여한다고 보았다.
1973년, 알파루키는 미국 종교 학회 (AAR) 내에 이슬람 연구 그룹을 설립하고 10년간 의장을 역임했다. 이 이니셔티브는 무슬림 학자들이 다른 종교 전통의 학자들과 특히 비교 종교 및 종교 간 연구 분야에서 대화에 참여할 수 있는 공식적인 플랫폼을 제공했다. 학술 활동 외에도 알파루키는 종교 간 평화 콜로키움 부회장, 시카고 미국 이슬람 대학 총장 등 다양한 리더십 직책을 맡았다.
1977년 3월, 알파루키는 메카에서 열린 제1회 세계 이슬람 교육 회의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 회의에는 무함마드 카말 하산, 사이드 무함마드 나퀴브 알-아타스, 사이드 알리 아쉬라프 등 여러 저명한 학자들이 참여했다. 이 회의는 다카, 이슬라마바드, 쿠알라룸푸르, 캄팔라, 니제르에 이슬람 대학교를 설립하는 기초를 마련했으며, 알파루키는 회의의 논의와 행동 계획 개발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또한 파키스탄의 무함마드 지아울 하크와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모하맛을 포함한 무슬림 세계의 정치 지도자들에게 자문 역할을 수행했다. 지아울 하크 행정부 시절, 알파루키는 1980년 이슬라마바드 국제 이슬람 대학교 설립에 기여했으며, 이는 이슬람 가치를 현대 학문 분야와 통합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말레이시아에서는 마하티르 모하맛 총리에게 자문하여 1983년 말레이시아 국제 이슬람 대학교 (IIUM) 설립을 도왔다. 두 기관 모두 종교적 지식과 세속적 지식을 전체론적 교육 틀 내에서 결합하도록 설립되었다.
1980년, 이스마일 알파루키는 타하 자비르 알랄와니, 압둘 하미드 아부술라이만, 안와르 이브라힘과 함께 국제 이슬람 사상 연구소(IIIT)를 공동 설립했다. 그의 종교 간 대화 참여는 종교 공동체 간의 상호 이해와 협력을 증진시켜 이슬람, 기독교, 유대교 간의 공통점을 강조하는 평화와 존중의 세계적 환경을 조성하는 데 기여했다.
7.2. 영향 및 현대적 의의
알파루키의 '지식의 이슬람화'에 대한 아이디어는 현대 이슬람 사상에 계속해서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말레이시아 국제 이슬람 대학교(IIUM)와 이슬라마바드 국제 이슬람 대학교의 교육 과정 개발에도 반영되고 있다. 현대 학문 분야와 이슬람 원칙을 통합하려는 그의 강조는 신앙과 이성을 조화시키려는 학자들과 교육자들에게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의 작업은 이슬람 사상과 교육에 관한 학술 회의와 학술 출판물에서 자주 인용된다.
알파루키의 종교 간 대화에 대한 기여도 널리 인정받고 있다. 그는 특히 이슬람, 기독교, 유대교와 같은 신앙 전통 간의 공통된 윤리적, 도덕적 기반을 찾는 것을 강조했다. 학자들은 그의 신학적 차이보다 윤리적 원칙에 대한 초점이 종교 공동체 간의 상호 이해와 존중을 증진했다고 평가한다. 그의 틀은 종교적 분열을 넘어 평화와 협력을 증진하려는 전 세계적 노력에 영향을 미쳤다.
알파루키의 영향은 학계를 넘어 실제적 적용으로 확장되었다. 그의 종교학 연구는 관련 학술 프로그램의 창설을 이끌었으며, 특히 말레이시아 국제 이슬람 대학교와 같이 그의 방법론을 채택한 기관에서는 영적 전통과 문명적 중요성을 포괄적으로 이해하려는 의무적인 종교학 강좌를 통해 그의 영향이 나타난다.
또한, '기독교 윤리'와 '아브라함 신앙의 삼자대화'와 같은 알파루키의 학술 저작들은 종교 간 대화 및 비교 종교 연구의 주요 자료로 계속 활용되고 있다. 이러한 저작들은 이슬람 및 서구 학계에서 논의 형성하며, 이들 종교 전통 간의 교차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의 공헌은 사후에도 인정받았으며, 특히 그의 학문과 공동체 건설 노력이 지속적인 영향을 미친 몬트리올과 같은 공동체에서 그러했다.
7.3. 비판 및 논란
알파루키의 '지식의 이슬람화' 개념에 대해 일부 비판이 제기되었다. 이브라힘 칼린은 알파루키의 작업이 주로 인문학에 집중되어 자연 과학 분야를 거의 다루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칼린은 이러한 접근 방식이 이슬람 지식에서 사회학적 해석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현대 과학의 세속화 효과를 간과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알파루키의 '지식의 이슬람화'가 "방법론('manhaj'와 'manhajiyyah')... 이 현대 과학 논의에 관련된 더 깊은 철학적 문제들을 모호하게 할 수 있는" 한 예시로 묘사한다. 알-파루키의 목표는 서구 지식을 이슬람화하는 것이었지만, 칼린은 그의 초점이 "오직 인문학에만 있었고, 과학적 지식은 거의 손대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칼린은 이러한 누락이 의도치 않은 결과를 초래했다고 주장한다: "첫째, 파루키의 이슬람화 연구는 추종자들에게 지식('ilm')이 사회 학문과 동일시되는 틀을 제공하여 일종의 사회주의로 귀결되었다... 둘째, 현대 과학 지식을 이슬람화 범위에서 제외한 것은 현대 과학 세계관의 세속화 효과에 대한 최소한의 무관심한 태도로 이어졌다."
칼린의 비판은 알파루키의 과학적 지식에 대한 제한적인 참여가 이슬람 지식에 대한 사회학적 해석에 지나치게 집중하는 틀을 만들 위험이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칼린은 자연 과학을 생략함으로써 알파루키의 접근 방식이 현대 과학이 제기하는 철학적, 인식론적 도전에 대처할 준비가 되지 않은 현대 무슬림 지식인들을 남겨둘 수 있는 자연 과학과 인문 과학 사이의 세속적 분열을 무심코 강화한다고 주장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