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1.1. 출생 및 가족
이본 페이 굴라공 콜리는 1951년 7월 31일 뉴사우스웨일스주 그리피스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호주 원주민인 위라드주리족 가족의 8남매 중 셋째였다. 그녀의 아버지 케니 굴라공은 양털깎이였고, 어머니 멜린다 굴라공은 가정주부였다. 그녀는 배럴렌이라는 작은 시골 마을에서 성장했다. 이본 굴라공은 1975년 6월 19일 영국의 아마추어 테니스 선수 로저 콜리(Roger Cawley영어)와 결혼하면서 이본 굴라공 콜리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1.2. 어린 시절과 교육
굴라공이 성장하던 시기, 호주에서는 스토른 제너레이션의 영향으로 원주민들이 광범위한 불이익과 편견을 겪었다. 그녀는 "복지 담당관이 당신을 데려갈 것이니 숨는 것이 좋다"는 어머니의 말을 듣고 침대 밑에 숨어야 했던 경험을 회상하며, 이러한 정책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굴라공은 어린 시절부터 배럴렌에서 테니스를 칠 수 있었다. 지역 주민인 빌 커츠먼(Bill Kurtzman영어)은 그녀가 지역 테니스 코트 울타리 너머로 경기를 엿보는 모습을 보고 그녀를 안으로 들어오게 하여 테니스를 가르쳐 주었다. 1965년, 시드니의 테니스 학교 소유주인 빅 에드워즈(Vic Edwards영어)는 두 명의 조수로부터 굴라공에 대한 정보를 듣고 배럴렌으로 직접 찾아갔다. 그는 어린 굴라공의 잠재력을 즉시 알아보았고, 그녀의 부모를 설득하여 그녀가 시드니로 이주하도록 했다. 시드니에서 굴라공은 윌러비 여자 고등학교(Willoughby Girls High School영어)에 다니며 1968년에 학교 수료증을 받았다. 그녀는 키가 1.68 m였고, 오른손잡이(한손 백핸드) 선수였다. 이와 동시에 그녀는 에드워즈의 가족과 함께 살았고, 에드워즈는 그녀의 법적 후견인이자 코치, 그리고 매니저가 되었다.
2. 테니스 경력
이본 굴라공 콜리는 선수로서의 활동 전반에 걸쳐 뛰어난 성과를 보였으며, 특히 그랜드 슬램 대회에서 강한 면모를 보였다.
2.1. 데뷔 및 초기 경력

19세의 나이에 굴라공은 프랑스 오픈 단식 타이틀과 호주 오픈 복식 챔피언십(마거릿 코트와 함께)을 획득하며 화려하게 데뷔했다. 그녀는 1971년 윔블던 여자 단식 토너먼트에서 우승하며 세계적인 선수로 발돋움했다. 1970년대에 굴라공 콜리는 총 17번의 그랜드 슬램 단식 결승에 진출했는데, 이는 남녀 선수를 통틀어 해당 시기 최다 기록이다. 1971년 1월 첫 그랜드 슬램 단식 결승 진출부터 1977년 12월 마지막 그랜드 슬램 타이틀 획득까지, 그녀는 21번의 그랜드 슬램 대회에 출전했다. 결승 진출 전 패배는 단 4번으로, 1972년 US 오픈 3라운드, 1974년 윔블던 8강, 그리고 1973년 프랑스 오픈과 윔블던 준결승에서였다. 1970년 호주 오픈 8강과 1970년 윔블던 2라운드에서 패배하며 1970년대 초반을 시작했지만, 1971년, 1975년, 1976년, 1977년에는 출전한 모든 그랜드 슬램 챔피언십에서 결승에 진출하는 기염을 토했다.
2.2. 주요 업적 및 그랜드 슬램
굴라공은 선수 경력 동안 총 7개의 그랜드 슬램 단식 타이틀을 획득했으며, 18번의 그랜드 슬램 단식 결승에 진출했다. 그녀는 US 오픈에서는 단 한 번도 우승하지 못했는데, 1973년부터 1976년까지 4회 연속 단식 결승에 진출했으나 모두 패배하여 US 챔피언십 역사상 4회 연속 결승에서 패배한 유일한 선수가 되었다.
2.2.1. 단식 경력
굴라공은 프랑스 오픈에서 1971년 우승을 차지했고, 윔블던에서는 1971년과 1980년에 두 차례 우승했다. 특히 1980년 윔블던 우승은 그녀가 어머니로서 달성한 것으로, 66년 만에 어머니로서 윔블던 타이틀을 획득한 최초의 선수가 되었다. 호주 오픈에서는 1974년, 1975년, 1976년, 1977년 12월 대회에서 총 4회 우승하며 강한 면모를 보였다. 그녀는 호주 오픈에서 7회 연속 결승에 진출했으며, 이 중 3회 연속 우승을 기록하기도 했다.
굴라공은 1976년 2주 동안 세계 랭킹 1위에 올랐으나, 당시에는 불완전한 데이터로 인해 순위가 제대로 보고되지 않았다. 이는 31년이 지난 2007년 12월에야 발견되어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그녀는 세계 랭킹 1위를 차지한 두 번째 여성이었지만, 공식적으로 인정받았을 때는 16번째 선수가 되었다.
2.2.2. 복식 및 혼합 복식 경력

굴라공은 단식 외에도 복식과 혼합 복식에서 뛰어난 성과를 거두었다. 그녀는 총 46개의 복식 타이틀을 획득했으며, 그랜드 슬램 복식에서 7개의 메이저 타이틀을 차지했다. 호주 오픈 여자 복식에서 5회(1971, 1974, 1975, 1976, 1977년 12월 대회) 우승했으며, 프랑스 오픈 여자 복식에서도 한 차례 우승했다. 또한, 프랑스 오픈 혼합 복식에서도 1972년 우승을 기록했다. 1974년에는 월드 팀 테니스 리그의 피츠버그 트라이앵글스 팀 동료였던 페기 미셸과 짝을 이뤄 윔블던 여자 복식 타이틀을 획득했다. 1977년 12월 호주 오픈 여자 복식에서는 결승전이 우천으로 취소되어 헬렌 구얼레이와 공동 우승을 차지했다.
2.2.3. 페더레이션 컵 참가
굴라공은 페더레이션 컵에서 호주 국가대표로 세 차례 출전하여 1971년, 1973년, 1974년에 우승을 차지했다. 또한, 3년 연속 페더레이션 컵 팀의 주장을 맡기도 했다.
2.3. 주요 라이벌
굴라공은 선수 경력 동안 크리스 에버트와 마르티나 나브라틸로바 등 당대 최고의 선수들과 치열한 라이벌 관계를 형성했다. 1976년 WTA 챔피언십에서 우승한 후, 그녀는 윔블던과 US 오픈 결승에서 크리스 에버트에게 패배했다. 첫 임신 전에는 나브라틸로바와의 상대 전적에서 11승 4패로 앞섰으나, 딸 출산 후에는 12경기 중 11경기를 패배하여 최종적으로 12승 15패로 열세에 놓였다. 1978년 3월 버지니아 슬림스 오브 보스턴 대회에서는 나브라틸로바와 에버트를 연달아 꺾고 우승했는데, 이는 그녀가 출산 후 나브라틸로바를 상대로 거둔 유일한 승리이자 에버트를 상대로 거둔 두 번의 승리 중 하나였다.
2.4. 경력 통계 및 기록
굴라공의 통산 승률은 81.0%(704승 165패)이다. 그랜드 슬램 단식 대회에서의 승률은 82.1%(133승 29패)를 기록했다. 각 그랜드 슬램 대회별 승률은 프랑스 오픈 84.2%(16승 3패), 윔블던 83.3%(50승 10패), US 오픈 81.3%(26승 6패), 호주 오픈 80.4%(41승 10패)이다.
그녀의 주요 기록은 다음과 같다.
- 호주 오픈: 1971년부터 1976년까지 6회 연속 결승 진출 (마르티나 힝기스와 동률).
- 호주 오픈: 1975년부터 1977년까지 3회 우승 (스테피 그라프와 동률).
- 호주 오픈: 1974년부터 1976년까지 3회 연속 타이틀 획득 (마거릿 코트, 스테피 그라프, 모니카 셀레스, 마르티나 힝기스와 동률).
- 프랑스 오픈: 1971년 첫 출전에서 타이틀 획득 (오픈 시대 단독 기록).
- 윔블던: 1980년 어머니로서 우승 (도로시아 램버트 챔버스와 동률).
- 윔블던: 1980년 대회에서 톱 10 시드 선수 4명(하나 만들리코바 9위, 웬디 턴불 6위, 트레이시 오스틴 2위, 크리스 에버트 3위)을 꺾고 우승한 유일한 단식 챔피언 (단독 기록).
- US 오픈: 1973년부터 1976년까지 4회 연속 준우승 (단독 기록).
3. 개인 생활
3.1. 결혼 및 가족
굴라공은 1971년 전직 영국 주니어 테니스 선수 로저 콜리(Roger Cawley영어)를 만났다. 1975년 6월 19일 로저 콜리와 결혼한 후, 그녀는 플로리다주 네이플스에 정착했다. 그녀의 딸 켈리(Kelly영어)는 1977년에 태어났고, 아들 모건 키에마 콜리(Morgan Kiema Cawley영어)는 1981년에 태어났다. 딸 켈리는 현재 그녀의 테니스 캠프 운영을 돕고 있으며, 아들 모건은 내셔널 사커 리그 선수였다. 굴라공은 내셔널 럭비 리그 선수인 라트렐 미첼의 외할머니이기도 하다. 굴라공의 오빠 이안(Ian영어)은 아마추어 테니스 선수였으며, 1982년 윔블던 혼합 복식에서 이본과 짝을 이뤄 경기에 출전하기도 했다. 2015년 기준으로 이안 굴라공은 빅토리아주 라러 테니스 클럽의 회장이자 코치로 활동했다.
3.2. 관계 및 배경
빅 에드워즈가 굴라공의 코치가 되면서 그녀는 에드워즈와 그의 가족과 함께 살았다. 에드워즈는 그녀의 코치이자 매니저일 뿐만 아니라 법적 후견인이 되었다. 굴라공은 나중에 에드워즈가 자신에게 성적인 접근을 시도했다고 밝혔다. 1971년 로저 콜리를 만나면서 에드워즈와의 관계는 악화되었지만, 그녀는 1975년 6월 19일 콜리와 결혼하기 전까지 법적으로 에드워즈에게 묶여 있었고, 에드워즈는 그녀의 경력과 재정의 모든 측면을 통제했다. 결혼 후 굴라공은 에드워즈와의 모든 연락을 끊었지만, 그는 1975년 윔블던 대회까지 그녀의 공식 코치로 남아 있었다. 대회 기간 동안 에드워즈는 그녀의 경기에서 로저 콜리와 반대편 선수석에 앉아 있었고, 그와 굴라공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는 사이가 되었다. 결혼 후 로저 콜리가 그녀의 코치, 히팅 파트너, 매니저가 되었다.
1974년에는 굴라공의 아버지 켄이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다. 이 사고는 에드워즈가 가족의 새 차량 구매를 위해 그녀의 돈을 내주기를 거부한 직후에 발생했다. 그녀의 어머니 멜린다는 1991년에 사망했다.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처음으로 많은 호주 원주민 친척들을 만난 것에 흥미를 느낀 콜리 부부는 퀸즐랜드주 누사 헤즈에 집을 구입하고 두 자녀와 함께 그곳에 정착했다.
4. 투어 이후 활동 및 사회 공헌
4.1. 은퇴 후 활동
1983년 프로 테니스에서 은퇴한 후에도 굴라공은 다양한 활동을 이어갔다. 그녀는 선수 경력 동안 총 139.90 만 USD의 상금을 획득했다. 그녀는 시니어 초청 대회에 참가했으며, 1990년 윔블던에서 동포 케리 멜빌 리드와 함께 첫 여자 시니어 초청 복식에 출전했다. 선수 시절부터 굴라공은 많은 제품을 홍보하고 수많은 텔레비전 및 인쇄 광고에 출연했으며, 경쟁적인 경기에서 은퇴한 후에도 이러한 활동을 확장했다. 그녀의 광고 중에는 남편 로저와 함께 출연한 KFC, 게리톨, 시어스 등이 있으며, 시어스에서는 그녀의 자체 스포츠 의류 브랜드 '고 굴라공'(Go Goolagong영어)을 홍보하기도 했다. 그녀는 호주로 돌아오기 전 사우스캐롤라이나주 힐튼 헤드 라켓 클럽에서 순회 프로 선수로 잠시 활동했다. 1985년 5월에는 ITF가 주최한 호주 실내 챔피언십에 초청받아 잠시 경쟁적인 경기에 복귀했으나, 유일한 경기에서 다른 호주 베테랑 선수에게 패배했다.
4.2. 스포츠 행정 및 홍보대사
굴라공은 1995년부터 1997년까지 호주 스포츠 위원회 이사회 위원으로 활동했으며, 1997년부터는 호주 원주민 및 토레스 해협 섬 주민 커뮤니티의 스포츠 홍보대사 직책을 맡고 있다. 2002년에는 호주 페더레이션 컵 팀의 주장을 역임했다. 2003년에는 국제 올림픽 위원회의 2003년 "여성과 스포츠 트로피" 오세아니아 지역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4.3. 원주민 청소년 지원
굴라공은 매년 "굴라공 국립 개발 캠프"(Goolagong National Development Camp영어)를 운영하며, 원주민 어린이들이 경쟁적인 테니스를 통해 학교에 계속 다니도록 장려하고 있다. 2023년 10월 10일, 굴라공은 2023년 호주 원주민 목소리 국민투표에서 찬성표를 지지하는 공개 서한에 서명한 25명의 올해의 호주인 중 한 명이었다.
5. 수상 및 인정
5.1. 국가 훈장 및 표창
굴라공은 1971년 올해의 호주인으로 선정되었다. 그녀는 1972년 대영 제국 훈장 5등급(MBE)을 수훈했고, 1982년에는 오스트레일리아 훈장 오피서(AO)로 임명되었다. 2018년에는 "국가 및 국제적 수준의 선수로서 테니스에 대한 탁월한 공헌, 스포츠 참여를 통한 젊은 원주민의 건강, 교육 및 복지 증진을 위한 홍보대사, 지지자 및 옹호자, 그리고 롤 모델로서의 역할"을 인정받아 오스트레일리아 훈장 컴패니언(AC)으로 승격되었다.
5.2. 스포츠계 명예
1985년 그녀는 호주 스포츠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1988년에는 국제 테니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고, 1989년에는 원주민 스포츠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5.3. 기타 명예 및 상


굴라공은 1978년과 1980년에 WTA 스포츠맨십 상을 수상했다. 브리즈번 국제 여자 챔피언에게 수여되는 이본 굴라공 콜리 트로피는 그녀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1993년에는 시드니의 리버캣 페리 중 하나가 그녀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호주 국립 박물관은 이본 굴라공 콜리 기념품 컬렉션을 소장하고 있다. 여기에는 그녀의 1971년과 1980년 윔블던 단식 트로피, 1974년 복식 우승 트로피, 그리고 이 대회에서 사용된 두 개의 라켓이 포함된다. 박물관 컬렉션에는 또한 서명된 워밍업 재킷과 1970년대 초 테드 틴링이 디자인한 볼레로 스타일 상의가 있는 드레스도 포함되어 있다.
2001년, 굴라공은 테니스 선수로서의 업적을 인정받아 빅토리아주 여성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굴라공의 고향인 배럴렌의 이본 굴라공 공원에는 굴라공이 사용했던 테니스 라켓의 13.8 m 길이 복제품이 세워졌다. 굴라공은 2009년 10월 3일 배럴렌 100주년 기념 행사에서 이 나무 던롭 라켓의 정확한 축소 모형을 공개했다.
2016년 2월, 굴라공과 10명의 다른 호주 테니스 선수들은 오스트레일리아 포스트로부터 2016년 오스트레일리아 포스트 레전드 상 수상자로 선정되어 '호주 단식 테니스 전설'이라는 우표 세트에 등장했다. 2016년 4월, 굴라공은 지역사회에 대한 뛰어난 봉사를 인정받아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 대학교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2018년 6월, 국제 테니스 연맹(ITF)은 그녀의 테니스 공헌을 인정하여 ITF 최고 영예인 필립 샤트리에 상을 수여했다. 굴라공은 일반적으로 여자 테니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6. 유산 및 영향력
이본 굴라공 콜리는 테니스 선수로서의 뛰어난 업적뿐만 아니라, 호주 원주민 커뮤니티에 대한 긍정적인 영향력과 문화적 유산을 통해 광범위한 영향력을 미쳤다.
6.1. 테니스계에 미친 영향
이본 굴라공 콜리는 여자 테니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 중 한 명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그녀의 우아하고 유려한 플레이 스타일은 많은 후배 선수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특히 1980년 윔블던에서 어머니로서 우승한 것은 여성 선수들에게 큰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했다. 그녀는 그랜드 슬램 대회에서 7개의 단식 타이틀을 포함하여 총 14개의 메이저 타이틀을 획득하며 테니스 역사에 깊은 발자취를 남겼다.
6.2. 원주민 커뮤니티에 대한 영향

굴라공 콜리는 호주 원주민으로서 스포츠를 통해 사회적 인식 개선에 크게 기여했다. 그녀는 호주 원주민 및 토레스 해협 섬 주민 커뮤니티의 스포츠 홍보대사로서 활동하며, 원주민 청소년들이 스포츠를 통해 교육과 건강을 증진하도록 적극적으로 독려하고 있다. 그녀가 운영하는 굴라공 국립 개발 캠프는 원주민 어린이들이 테니스를 통해 학교에 계속 다니고 잠재력을 개발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그녀의 성공은 많은 원주민 청소년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었으며, 사회적 장벽을 넘어설 수 있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6.3. 문화적 영향
굴라공 콜리의 삶은 다양한 문화적 형태로 기념되고 있다. 그녀의 삶을 바탕으로 한 연극 『선샤인 슈퍼 걸』(Sunshine Super Girl영어)은 2020년 10월 뉴사우스웨일스주 그리피스에서 초연되었고, 2021년 1월 시드니 페스티벌에서도 공연되었다. 그녀의 고향인 배럴렌의 이본 굴라공 공원에는 그녀가 사용했던 테니스 라켓을 본뜬 거대한 복제품이 세워져 그녀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1993년에는 시드니의 리버캣 페리 중 한 척이 그녀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호주 국립 박물관은 그녀의 윔블던 트로피와 라켓 등 개인 소장품을 전시하고 있으며, 2016년에는 오스트레일리아 포스트가 그녀를 포함한 호주 테니스 전설들을 기리는 우표 세트를 발행하기도 했다.
7. 비판 및 논란
굴라공 콜리의 경력 중 일부는 사회적, 윤리적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1972년, 그녀는 인종 분리 정책이 시행되던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열린 테니스 토너먼트에 참가했다. 당시 남아프리카 공화국 당국은 그녀가 비백인으로서 겪을 차별을 피하기 위해 그녀를 '명예 백인'(honorary white영어)으로 분류했다. 이 조치는 인종 차별 정책의 모순을 보여주는 사례로 비판받았다.
또한, 1980년부터 테니스 오스트레일리아가 굴라공에게 호주 오픈 출전료를 지급하기 시작하자, 웬디 턴불과 같은 다른 선수들이 공개적으로 이 결정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다. 굴라공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이러한 출전료 수락 결정을 옹호했다.
8. 자서전
이본 굴라공 콜리는 자신의 삶과 경험을 담은 자서전 『홈! 이본 굴라공 이야기』(Home! The Evonne Goolagong Story영어)를 1993년에 필 재럿(Phil Jarrett영어)과 함께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