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이나시오 코르타바리아 아바라테기(Inaxio Kortabarria Abarrategi이나시오 코르타바리아 아바라테기바스크어, 1950년 7월 31일 ~ )는 스페인 바스크 지방의 중앙 수비수 출신 축구 선수로, 현역 시절 레알 소시에다드에서만 활약한 원클럽맨이자 팀의 주장을 역임하며 1980년대 초 팀의 라리가 2회 우승과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우승을 이끈 핵심 선수였다. 특히 그는 프란시스코 프랑코 사후에도 여전히 불법이었던 이쿠리냐를 공개적으로 선보인 상징적인 행동으로 바스크 지역의 민주화 과정과 지역 정체성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으며, 축구 실력뿐만 아니라 강한 정치적 신념을 지닌 인물로 평가받는다.
2. 초기 생애 및 배경
이나시오 코르타바리아는 1950년 7월 31일, 스페인 바스크주 기푸스코아도의 아라사테-몬드라곤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레알 소시에다드의 카테라에서 성장하며 축구 선수로서의 기량을 갈고닦았다.
3. 클럽 경력
코르타바리아는 현역 생활 내내 레알 소시에다드에서만 활약하며 구단의 상징적인 선수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14시즌 동안 팀의 수비를 책임졌으며, 총 442번의 공식 경기에 출전하여 22골을 기록했다. 이 중 라리가에서는 355경기에 출전하여 16골을 넣었다.
3.1. 초기 경력 및 레알 소시에다드 입단
코르타바리아는 레알 소시에다드의 B팀인 산 세바스티안 CF에서 몇 년간 선수 생활을 한 후, 1970-71 시즌에 1군으로 승격되었다. 그는 1971년 9월 19일 데포르티보 라코루냐와의 경기에서 라리가 데뷔전을 치렀으며, 첫 시즌에는 14경기에 출전하며 팀의 주축 선수로 성장할 가능성을 보였다.
3.2. 레알 소시에다드에서의 주요 활동
데뷔 이후 코르타바리아는 거의 경기에 결장하지 않으며 레알 소시에다드의 핵심 수비수로 자리 잡았다.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팀의 주장으로 활약하며 팀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특히 1979-80 시즌에는 라리가 준우승을 차지하며 당시 최장 무패 기록을 세웠고, 이어진 1980-81 시즌과 1981-82 시즌에는 팀을 2년 연속 라리가 우승으로 이끌었다. 이 두 시즌 동안 그는 각각 30경기와 31경기에 출전했으며, 5골과 개인 통산 최고 기록인 6골을 기록했다.
1980-81 시즌 최종전인 스포르팅 히혼과의 원정 경기에서 코르타바리아는 선제골을 기록하며 팀의 2-2 무승부에 기여했다. 이 무승부 덕분에 레알 소시에다드는 골득실차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제치고 극적으로 리그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다. 만약 이 골이 없었다면 레알 마드리드에게 역전 우승을 허용할 수도 있는 중요한 순간이었다. 또한, 그는 1982년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의 첫 우승을 이끌었으며, 1982-83 시즌 UEFA 챔피언스컵에서는 팀의 준결승 진출에 기여했다. 그는 루이스 아르코나다, 헤수스 마리아 사모라, 로베르토 로페스 우파르테, 헤수스 마리아 사투르스테기, 페리코 알론소 등과 함께 레알 소시에다드 역사상 가장 강력한 세대의 일원으로 평가받는다.
3.3. 선수로서의 특징 및 평가
코르타바리아는 유연한 체격을 가진 중앙 수비수로, 뛰어난 수비 안정감을 자랑했다. 그는 상대 공격수에게 항상 위협적인 존재였으며, 특히 세트피스 상황에서의 공격 가담 능력도 뛰어났다. 그는 레알 소시에다드 역사상 최고의 주장 중 한 명으로 기억되며, 견고한 수비력과 리더십으로 팀의 성공에 크게 기여했다.
3.4. 원클럽맨으로서의 위상
코르타바리아는 1971년 1군 데뷔 이후 1985년 은퇴할 때까지 14시즌 동안 오직 레알 소시에다드에서만 선수 생활을 했다. 이는 그를 구단의 상징적인 원클럽맨으로 만들었다. 1983년경부터는 8살 어린 아구스틴 가하테와 같은 카테라 출신 젊은 수비수들인 알베르토 고리스, 후안 안토니오 라라냐가 등에게 주전 자리를 내주며 출전 기회가 줄어들었다. 그는 35세가 되던 1984-85 시즌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4. 국가대표팀 경력
코르타바리아는 1년이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스페인 국가대표팀에 4차례 차출되어 활약했다. 그의 국가대표팀 데뷔전은 1976년 5월 22일 서독과의 UEFA 유로 1976 예선 경기였으며, 스페인은 이 경기에서 0-2로 패했다. 마지막 국가대표팀 경기는 1977년 3월 27일 알리칸테에서 열린 헝가리와의 친선 경기로, 1-1 무승부로 끝났다. 당시 스페인 최고의 수비수 중 한 명으로 평가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경기 이후 더 이상 국가대표팀에 소집되지 않았다.
이는 그의 바스크인으로서의 강한 정체성과 관련이 깊다. 그는 바스크 독립이라는 정치적 신념을 이유로 스페인 국가대표팀에서 뛰는 것을 명백히 포기한 유일한 바스크인 선수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그의 행동은 스페인인으로서의 "공공심"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동시에 바스크 민족주의에 대한 그의 확고한 의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행위로 평가된다. 그는 또한 바스크 대표팀 소속으로 두 차례 친선 경기에 출전했다.
5. 정치적 입장 및 활동
이나시오 코르타바리아는 축구 선수로서의 뛰어난 기량뿐만 아니라, 바스크 지역의 정치적 정체성을 대변하는 상징적인 행동으로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특히 1976년 12월 5일, 아틀레틱 빌바오와의 바스크 더비 경기를 앞두고 그는 상대 팀의 주장인 호세 앙헬 이리바르와 함께 이쿠리냐를 들고 경기장으로 입장했다. 두 선수는 이 깃발을 경기장 중앙 원에 정중하게 놓았다.
이 사건은 프란시스코 프랑코 총통이 사망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시점에 발생했으며, 당시 이쿠리냐는 여전히 스페인 법률상 불법으로 간주되던 상징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기를 치를 양 팀의 주장이 함께 바스크 민족주의의 상징을 공개적으로 내보인 이 사진은 바스크 지역이 민주화의 중요한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기념비적인 사건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코르타바리아의 이러한 용기 있는 행동은 바스크 지역의 정체성과 자율성에 대한 열망을 대변하며, 민주주의와 지역의 권리를 옹호하는 중요한 상징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6. 주요 수상 경력
- 라리가: 1980-81, 1981-82
-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1982
7. 영향 및 평가
이나시오 코르타바리아는 레알 소시에다드의 황금기를 이끈 핵심 선수이자, 구단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주장 중 한 명으로 기억된다. 그의 안정적인 수비력과 리더십은 팀이 라리가 2회 우승과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우승을 차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그는 단순한 축구 선수를 넘어 바스크 지역의 정치적, 사회적 변화를 상징하는 인물로 평가받는다. 프란시스코 프랑코 사후 이쿠리냐를 공개적으로 선보인 그의 용기 있는 행동은 바스크인들의 정체성과 민주화를 향한 열망을 대변하는 역사적인 순간으로 기록되었다. 이는 그가 축구계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보여준다. 코르타바리아는 바스크 민족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바탕으로 스페인 국가대표팀에서의 기회를 포기하면서까지 자신의 정체성을 지킨 인물로, 바스크 지역 주민들에게 깊은 존경을 받고 있다.
8. 관련 항목
- 레알 소시에다드
- 원클럽맨
- 바스크 국기
- 프란시스코 프랑코
- 호세 앙헬 이리바르
- 바스크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