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이건희는 이건희Lee Kun-hee한국어, 1942년 1월 9일 출생하여 2020년 10월 25일 사망한 대한민국의 기업인으로, 삼성의 제2대 총수이자 삼성전자의 회장을 역임했다. 그는 삼성 창업주 이병철의 셋째 아들이다. 이건희는 1987년부터 2008년, 그리고 2010년부터 2020년 사망할 때까지 삼성그룹 회장으로 재직하며 삼성을 반도체, 스마트폰, 전자제품, 조선, 건설 등 다양한 사업 분야를 아우르는 세계 최대의 기업으로 변모시킨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의 리더십 아래 삼성은 스마트폰, 메모리 칩, 가전제품 분야에서 세계 최대 제조업체로 성장했다.
그는 생전 한국 최고 부자로 알려졌으며, 2007년부터 사망 시까지 이 지위를 유지했다. 사망 당시 그의 순자산은 약 210.00 억 USD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건희는 1996년과 2008년 두 차례에 걸쳐 부패 및 조세 포탈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두 번 모두 사면되었다. 2014년, 그는 아들 이재용과 함께 포브스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35위에 오르며 한국인 중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꼽히기도 했다.
2. 초기 생애 및 교육
이건희는 1942년 1월 9일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대구부 중구 인교동에서 삼성그룹의 창업주인 아버지 이병철과 어머니 박두을의 삼남으로 태어났다. 이병철은 이건희의 출생 당시 과일과 건어물을 수출하는 작은 무역회사로 삼성을 시작했다.
2.1. 학업 및 일본 유학
이건희는 1954년 부산교육대학교 부설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957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설중학교, 1960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연세대학교 상학과에 입학했으나 중퇴했다.
아버지 이병철은 이건희에게 "선진국을 보고 배우라"고 지시했고, 이에 따라 이건희는 1953년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3년간 일본 도쿄의 학교에 다녔다. 한국으로 돌아온 후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에 입학했으나, "서울대학교에 입학하지 못하면 일본 대학에 입학하라"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일본 와세다대학교 상학부에 유학하여 1965년 졸업했다. 이건희 본인은 학업에 큰 흥미는 없었으나, 기업 경영은 일본에서 배우고 성장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일본 유학 당시 매우 외로워 영화나 독서에 광적으로 집착했다고 전해진다.
와세다대학교 졸업 후 미국으로 건너가 조지 워싱턴 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MBA) 과정을 수료했다. 그는 2000년 서울대학교 명예 철학박사, 2005년 고려대학교 명예 철학박사, 2010년 와세다대학교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와세다대학교 3호관에 위치한 정치경제학술원 연구도서실은 그의 이름을 따 '이건희 기념 도서실'로 명명되었다.
3. 경력
이건희는 삼성그룹의 부회장직을 거쳐 회장직에 오르기까지 다양한 계열사에서 경력을 쌓았다.
3.1. 삼성그룹 입사 및 경영권 승계
이건희는 1966년 당시 삼성그룹 계열사였던 동양방송에 이사로 입사하며 경영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삼성의 건설 및 무역 회사에서도 근무했다.
삼성그룹 창업주인 아버지 이병철은 1966년 차남 이창희가 연루된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그룹 회장직에서 물러나기도 했다. 이 시기 잠시 장남 이맹희가 그룹 회장을 맡았으나, 경영에 복귀한 이병철은 이맹희가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자신을 밀고했다고 판단하여 이건희를 후계자로 지목했다.
1987년 11월 19일, 아버지 이병철이 사망한 지 약 두 주 뒤인 12월 24일, 이건희는 삼성그룹의 제2대 회장으로 취임하며 경영권을 승계했다. 그는 1987년 11월부터 2008년 4월까지, 그리고 2010년 3월부터 2020년 10월까지 삼성그룹 회장직을 수행했다.
3.2. 신경영 선언과 혁신

이건희는 1993년 삼성이 저품질 제품을 대량 생산하는 데만 집중하고 품질 경쟁에 대비하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199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임원들을 소집하여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모두 바꾸라'는 유명한 신경영 선언을 했다. 이는 당시 소니 등 경쟁사들과의 품질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한 혁신 드라이브였다. 이건희는 심지어 판매 부진을 감수하더라도 품질 우선주의로 전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995년에는 품질 불량 휴대폰 15만 대를 직접 소각하는 퍼포먼스를 통해 품질 혁신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기도 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삼성은 2006년 소니를 제치고 세계 최대 TV 제조업체로 부상했다.
3.3. 글로벌 기업으로의 성장
이건희의 리더십 아래 삼성은 세계적인 전자 및 기술 기업으로 도약했다. 1993년 29.00 조 KRW에 불과했던 삼성그룹의 매출은 2013년 380.00 조 KRW로 약 13배 이상 증가했다. D램 하나뿐이던 시장점유율 1위 제품은 20개로 늘어났다. 그의 사망 당시 삼성은 3000.00 억 USD의 가치를 지닌 기업으로 성장했으며, 스마트폰, TV, 메모리 칩 분야에서 세계 최대 제조업체로 자리매김했다. 2012년 기준 삼성의 매출은 한국 GDP의 약 20%를 차지할 정도로 국가 경제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쳤다.
3.4. 경영 복귀와 이후 활동
2008년 삼성 비자금 사건으로 인해 조세 포탈 혐의 등으로 기소되면서 이건희는 삼성전자 회장직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2010년 3월 24일, 그는 삼성전자 회장으로 경영 일선에 복귀했다. 그는 2014년까지 이 자리에서 활동했으나, 2014년 5월 심장마비로 쓰러져 의식불명 상태에 빠지면서 아들 이재용이 삼성그룹의 사실상 리더가 되어 경영을 승계했다.
4. 경영 철학 및 리더십
이건희는 위기 경영과 품질 중시를 강조하는 것으로 유명하며, 그의 경영 철학은 여러 상징적인 발언에 담겨 있다.
4.1. 주요 발언과 경영 원칙
그는 1993년 6월 17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라"는 신경영 선언을 통해 삼성의 근본적인 변화를 촉구했다. 이는 품질 불량 제품을 소각하는 등 강력한 실천으로 이어졌다.
이건희는 인재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2003년 6월 5일 "천재 한 사람이 10만 명을 먹여살린다"고 발언하며 인재 경영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또한 그는 2013년 10월 28일 신경영 20주년 만찬에서 "앞으로 우리는 자만하지 말고 위기의식으로 재무장해야 한다"고 말하는 등 끊임없이 위기를 강조했다. 2010년 3월 경영 복귀 당시에도 "삼성전자의 앞날을 예측할 수 없으며, 앞으로 10년 이내에 삼성전자를 대표하는 대부분의 제품이 사라질 것이므로 다시 새롭게 출발해야 한다"고 밝히며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혁신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건희는 메기에 대해 자주 언급하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메기론'은 미꾸라지가 있는 물 속에 메기를 풀어놓으면 미꾸라지들이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더 열심히 헤엄치기 때문에 오히려 건강해진다는 비유이다. 이 '메기론'은 영국의 역사학자 아널드 J. 토인비의 '청어 이야기'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토인비는 청어를 운반하는 수조에 천적인 메기를 함께 넣어 청어들이 생존을 위해 계속 움직이도록 유도하여 싱싱함을 유지했다는 일화를 소개했다. 이건희는 이 비유를 통해 경쟁을 통한 조직의 활력 유지와 혁신을 강조했다.
그는 또한 "반드시 1명당 1대의 무선 단말기를 가지는 시대가 온다"고 예측하며 휴대폰 품질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1995년 애니콜 15만 대를 불태우면서까지 휴대폰 품질 향상을 중요시했고, 이는 이후 삼성전자가 글로벌 스마트폰 시장에서 선두를 유지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5. 개인 생활
이건희는 1967년 홍라희 여사와 결혼하여 사망할 때까지 부부 관계를 유지했다. 홍라희는 제9대 법무부 장관과 제19대 내무부 장관을 지낸 홍진기의 딸이다. 이건희와 홍라희 사이에는 1남 3녀의 자녀가 있다. 장남은 이재용 (1968년생), 장녀는 이부진 (1970년생), 차녀는 이서현 (1973년생), 삼녀는 이윤형 (1979년생)이다. 이윤형은 2005년 사망했다.
5.1. 가족 관계 및 기타
이건희의 형제자매와 그들의 자녀 중 일부도 주요 한국 기업 그룹의 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의 누나 이인희는 한솔그룹을, 형 이맹희의 아들 이재현은 CJ그룹을, 여동생 이명희는 신세계그룹을 이끌고 있다.
2012년 2월, 이건희의 형 이맹희와 누나 이숙희는 이건희를 상대로 상속 소송을 제기하여, 아버지 이병철이 자신들에게 유증했다고 주장하는 삼성 계열사 주식 약 8.50 억 USD (9135.63 억 KRW)를 요구했다. 법원 심리는 2012년 5월에 시작되었으나, 2014년 2월 6일 한국 법원은 이 사건을 기각했다.
이건희는 독실한 원불교 신자인 아내 홍라희와 함께 2010년부터 2011년까지 미국 뉴욕주 컬럼비아 카운티에 건립 중인 '원달마센터'에 여러 차례에 걸쳐 총 120.00 억 KRW를 기부했다. 이 센터는 원불교 해외 포교를 위한 전진 기지 역할을 담당하며, 대규모 명상 홀, 사무실, 주거 시설 및 게스트하우스 등을 포함한다.
그는 생전 두 명의 스승으로 아버지 이병철과 장인 홍진기를 꼽았다. 그는 선친에게는 현장에서 부딪치며 스스로 익히는 경영의 '무(武)'를, 장인에게는 기업 경영과 관련된 정치, 경제, 법률, 행정 지식을 문답식으로 배우는 경영의 '문(文)'을 배웠다고 언급했다.
6. 법적 문제 및 논란
이건희는 그의 경력 전반에 걸쳐 여러 법적 문제와 논란에 휩싸였으며, 이는 한국 사회와 경제에 큰 영향을 미쳤다.
6.1. 뇌물 공여 및 조세 포탈
1995년 12월 5일, 검찰은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총 250.00 억 KRW의 뇌물을 공여한 혐의로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을 불구속 기소했다. 삼성그룹은 노태우 전 대통령의 재임 중 차세대 전투기 사업, 상용차 사업, 대형 건설 사업, 석유 화학 사업 등 각종 이권 사업에 본격적으로 진출했다.
1996년 8월 26일, 서울지방법원 형사합의30부는 이건희에게 뇌물 공여 혐의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1996년 9월 2일 검찰이 항소를 포기하면서 형이 확정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후 김영삼 정부에 의해 사면되었다.
2018년 10월 5일, 이명박 전 대통령의 부패 재판 과정에서 이건희에 대한 사면이 뇌물과 교환된 것이었음이 드러났으며, 이 전 대통령과 이건희 사이에 추가적인 뇌물 및 정치적 부패가 폭로되었다.
6.2. 삼성 비자금 사건
2008년 1월 14일, 한국 경찰은 삼성이 영향력 있는 검사, 판사, 정치인들에게 뇌물을 제공하기 위한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의혹에 대한 수사 과정에서 이건희의 자택과 사무실을 압수수색했다. 2008년 4월 4일, 이건희는 자신에 대한 의혹을 부인했다. 그러나 4월 11일, 검찰의 2차 심문 후 이건희는 기자들에게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다. 도덕적, 법적 책임을 전적으로 지겠다"고 말했다. 4월 21일, 그는 "저를 포함한 저희는 특별 검사로 인해 국가에 어려움을 초래했습니다. 이에 대해 깊이 사과드리며, 법적, 도덕적으로 모든 책임을 지겠습니다"라고 밝히며 삼성전자 회장직에서 사임했다.
2008년 7월 16일, 뉴욕 타임스는 서울중앙지방법원이 이건희에게 금융 비리와 조세 포탈 혐의로 유죄를 선고했다고 보도했다. 검찰은 이건희에게 징역 7년과 3500.00 억 KRW (약 3.12 억 USD)의 벌금을 구형했으나, 법원은 그에게 1100.00 억 KRW (약 9800.00 만 USD)의 벌금과 3년의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그러나 2009년 12월 29일, 이명박 대통령은 이건희가 IOC 위원직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명분으로 그를 사면했다。
6.3. 경영권 승계 및 불법 행위 의혹
2010년 삼성의 전 법률 고문이었던 김용철이 쓴 책 『삼성 생각』에서는 이건희가 부패 혐의가 있다고 주장했다. 특히, 그는 이건희가 삼성 계열사에서 최대 10.00 조 KRW (약 89.00 억 USD)를 횡령하고, 증거를 조작했으며, 아들의 경영권 승계를 보장하기 위해 정부 관료들에게 뇌물을 제공했다고 주장했다.
2018년 2월 8일, 경찰청 특수수사과는 이건희를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조세) 및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횡령) 혐의로 입건했으나, 조사 불능으로 시한부 기소중지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이건희는 삼성그룹 임원 72명 명의의 차명계좌 260개를 개설하여 자금을 관리하면서 2007년부터 2010년까지 양도소득세, 종합소득세 등 약 82.00 억 KRW 상당의 세금을 포탈한 혐의를 받았다. 또한 2008년부터 2014년까지 자신의 일가 주택 공사비를 삼성물산 법인 자금으로 대납받아 약 30.00 억 KRW 상당을 유용한 혐의도 있었다.
6.4. 기타 논란
2016년 7월, 한국의 독립 언론사 '뉴스타파'는 이건희 회장이 2011년부터 2013년까지 자택에서 총 5차례에 걸쳐 불법 성매매를 한 정황이 담긴 몰래카메라 영상을 공개했다. 이 영상은 상대 여성들이 촬영한 것으로, 이건희 회장으로 보이는 남성이 젊은 여성 두 명에게 봉투를 건네는 장면과 함께 한 번에 500.00 만 KRW씩을 줬다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담겨 있었다. 영상에는 몸무게 기준을 초과하면 보수가 50.00 만 KRW 감액된다는 내용 등도 포함되어 한국 사회에서 큰 스캔들이 되었다.
이건희는 김영삼 정부 시절 "우리나라의 정치는 4류, 관료와 행정조직은 3류, 기업은 2류다"라고 발언하여 비판을 받았다. 그는 자신이 존경하는 덩샤오핑 국가주석의 어록을 인용했다고 해명했으나, 덩샤오핑은 정치를 1류, 기업을 4류라고 언급했기에 이건희의 발언은 논란이 되었다.
2004년, 강원도 평창 휘닉스파크에서 록 밴드 체리필터의 공연 도중 이건희가 "시끄럽다"는 이유로 일방적으로 공연을 중단시킨 사건이 발생하여 논란이 되기도 했다.
2012년 스위스의 시민단체 베른 선언과 그린피스 스위스 등이 글로벌 악덕기업을 선정하는 '공공의 눈 상(Public Eye Award)' 투표에서 삼성은 세계 악덕 기업 3위에 지정되었다.
7. 건강 및 사망
7.1. 건강 문제와 투병
이건희는 1990년대 후반 폐암 치료를 받았으며, 2005년에는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의 MD 앤더슨 암센터에서 다시 암 검사를 받았으나 이후 특별한 문제는 발표되지 않았다.
2014년 5월 10일 밤, 이건희는 서울 한남동 자택에서 호흡 곤란과 심장마비 증세로 쓰러져 자택 근처의 순천향대학교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응급실 도착 직후 심근경색으로 심장이 멎었으나 즉시 심폐소생술이 실시되어 호흡과 심장 박동은 회복되었지만 의식은 깨어나지 못했다. 이후 삼성서울병원으로 옮겨져 스텐트 삽입술과 보조기구 부착, 저체온 치료를 받았으나 의식불명 상태가 지속되었다. 그는 약 6년 5개월 동안 삼성서울병원 특별실에 입원하여 장기 투병 생활을 했다. 의식불명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접촉이나 소리에는 반응을 보였기 때문에 병실에서 영화나 음악을 틀어주는 자극 요법을 시행하거나, 병원 직원이 휠체어에 태워 산책을 시키는 등의 보도가 있었다.
7.2. 사망 및 장례
이건희는 2020년 10월 25일 새벽 4시경, 삼성서울병원에서 향년 78세(한국 나이 79세)로 사망했다. 그의 장례는 유가족의 뜻에 따라 50인 미만의 가족장으로 조용히 치러졌다.
8. 유산 및 평가
8.1. 업적 및 긍정적 평가
이건희는 삼성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시킨 핵심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의 리더십 아래 삼성은 반도체, 스마트폰, TV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세계 시장을 선도하며 한국 경제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는 2007년부터 사망 시까지 한국 최고 부자의 자리를 지켰으며, 그의 경영 철학은 여전히 많은 기업인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8.2. 비판 및 논란에 대한 평가
이건희는 그의 업적에도 불구하고 여러 비판과 논란에 직면했다. 뇌물 공여, 조세 포탈, 비자금 조성, 불법 경영권 승계 의혹 등은 그의 도덕성과 기업 경영 투명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특히 전직 대통령에 대한 뇌물 공여와 사면 과정에서의 특혜 의혹은 한국 사회의 정경유착 문제와 관련하여 지속적으로 비판받았다. 성매매 의혹 영상 유출 사건은 그의 개인적인 윤리 문제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러한 논란들은 그의 경영 성과와 별개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지배구조의 투명성에 대한 중요한 질문을 남겼다.
8.3. 사회 및 경제적 영향
이건희의 사망은 한국 사회와 경제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사망 직전 약 23.71 조 KRW (198.00 억 USD)의 재산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그의 유산은 한국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상속세 문제를 야기했다. 이건희의 상속인들은 약 12.00 조 KRW (107.80 억 USD)에 달하는 상속세를 납부해야 할 것으로 예상되었는데, 이는 OECD 국가 중 일본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50%의 상속세율(30.00 억 USD 초과 유산에 대해)이 적용된 결과이다. 이 막대한 상속세는 삼성그룹 내 가족 지분 희석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8.4. 미술품 컬렉션 및 사후 처리
이건희는 생전에 방대한 미술품 컬렉션을 소장하고 있었다. 그의 유족들은 2021년 봄, 이건희 회장의 수십억 달러에 달하는 23,000점 이상의 미술품 컬렉션을 한국의 공공 기관에 기증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발표와는 별개로, 황희 당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이건희 컬렉션 전용 신규 미술관 건립 계획을 발표하기도 했다.
9. 수상 및 영예
이건희는 생전에 다양한 상훈과 명예로운 칭호를 받았다.
- 1984년: 대한민국 체육훈장 맹호장
- 1986년: 대한민국 체육훈장 청룡장
- 1991년: IOC 올림픽훈장
- 1993년: 한국경영학회 제정 경영자 대상
- 1993년: 문화부 장관 감사패
- 1994년: 한국무역학회 무역인대상
- 1996년: 한국능률협회 선정 '최고의 경영자상'
- 1996년: IOC 위원 (2008년 8월까지, 이후 2010년 2월부터 2017년 8월까지 재임)
- 2000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 2000년: 서울대학교 명예 철학박사
- 2002년: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 감사패
- 2004년: 홍콩 디자인경영자상 초대 수상
- 2004년: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코망되르(3등급) 훈장
- 2005년: 대한올림픽위원회 명예위원장
- 2005년: 고려대학교 명예 철학박사
- 2006년: 밴플리트 상
- 2010년: 와세다대학교 명예 법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