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유시쿤(游錫堃Yóu Xíkūn중국어 (한자))은 1948년 4월 25일에 태어난 중화민국(대만)의 저명한 정치인이다. 그는 민주진보당(DPP)의 창립 멤버 중 한 명이며, 대만 독립에 대한 강력한 지지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유시쿤은 행정원장과 입법원장 등 대만 중앙 정부의 여러 고위직을 역임하며 대만 민주주의 발전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의 정치 경력은 대만성 의회 의원을 시작으로, 이란현장 재임 기간 동안 환경 보호와 관광 진흥에 기여했다. 이후 천수이볜 총통 재임 시절 행정원장을 역임하며 평화 국민투표와 대규모 군사 구매 패키지를 추진하는 등 주요 정책들을 이끌었다. 2006년부터 2007년까지 민주진보당 주석을 지냈고, 2020년에는 제12대 입법원장으로 선출되어 2024년까지 재임했다. 그는 민주진보당의 '사천왕' 중 한 명으로 평가받으며, 대만의 국가 정체성 확립에 기여한 인물로도 인식된다.
2. 생애 초반과 교육
유시쿤의 유년기와 교육 과정은 그의 성장 배경과 학업에 대한 끈기를 보여준다.
2.1. 유년기와 가족 배경
유시쿤은 1948년 4월 25일 이란현둥산향 타이허촌(太和村)의 가난한 소작농 가정에서 태어났다. 13세 때 태풍 파멜라로 인해 집이 홍수에 파괴되었고, 같은 해에 그의 아버지가 결핵으로 사망하는 비극을 겪었다. 이로 인해 그는 국립이란고급중학 재학 중 학업을 중단하고 가족 농장에서 전업으로 일해야 했다.
2.2. 교육 과정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유시쿤은 학업에 대한 열정을 이어갔다. 19세에 야간 학교인 뤄둥 상업직업고등학교(Lotung Commercial and Vocational High School)에 입학하며 학업을 재개했다. 이후 타이베이로 옮겨 시후 상업공업고등학교(Hsihu Commercial and Industrial High School) 야간 과정에 등록했다. 그는 즈리 과기대학(Chihlee Institute of Technology)에서 국제 상업을, 국립중흥대학에서 행정학을 공부했다. 1985년, 37세의 나이로 둥하이대학에서 정치학 학사 학위를 취득하며 학업을 마무리했다. 또한, 1966년부터 1975년까지 중국청년당 당원으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1998년부터 2001년까지 국립타이베이예술대학 교수를 역임하기도 했다.
3. 정치 활동
유시쿤은 초기 정치 활동부터 중앙 정부의 고위직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경험을 쌓으며 대만 정치에 깊이 관여해왔다.

3.1. 정치 입문과 초기 활동
1981년, 유시쿤은 이란현에서 대만성 의회 의원으로 당선되며 본격적인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쑤전창, 셰싼성(謝三升)과 함께 이른바 '철의 삼각편대'(iron triangle)를 구성하며 성의회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 세 명은 성의회 의원직을 사임한 유일한 인물들이기도 하다.
1983년부터 1984년까지는 당외운동(黨外運動)의 사무총장을 지냈고, 1986년에는 당외 전국 선거 후원 위원회 소집인이 되었다. 그는 1986년에 창립된 민주진보당의 핵심 창립 멤버 중 한 명으로, 1984년부터 1986년까지 중앙위원회 위원을, 1986년부터 1990년까지 중앙상무위원회 위원을 역임했다. 1998년에는 당시 천수이볜타이베이 시장에 의해 타이베이 대중첩운공사 이사장으로 임명되었고, 1999년에는 민주진보당 사무총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2000년 총통 선거에서는 민주진보당 선거 캠페인의 수석 대변인을 맡아 천수이볜의 당선에 기여했다.
3.2. 이란현장 재임
1989년, 유시쿤은 이란현 현장에 당선되어 1997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재임했다. 현장 재임 기간 동안 그는 '환경 보호 현'(環保立縣), '관광 현'(觀光立縣), '정보화 추진 현'(資訊立縣), '문화 현'(文化立縣)을 4대 주요 행정 목표로 설정하고 이들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특히 환경 보호와 관광 진흥에 힘써 이란현의 발전을 이끌었다. 1994년부터 1996년까지는 행정원 교육 개혁 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며 교육 분야에도 기여했다.
3.3. 중앙 정부 고위직 재임
2000년 천수이볜 총통의 당선 이후, 유시쿤은 탕페이 행정원장 휘하의 부행정원장으로 임명되며 중앙 정부에 진출했다. 그러나 2000년 7월 발생한 바장시 사건으로 인해 부행정원장직에서 사임하게 된다. 6개월 후인 2000년 10월 6일, 그는 총통부 비서장으로 다시 임명되어 2002년 1월 31일까지 재직했다. 2002년 2월 1일, 그는 행정원장으로 승진하여 2005년 2월 1일까지 재임했다.
행정원장으로서 유시쿤은 2004년 평화 국민투표에 대한 정부의 입장을 옹호하고, NTD6108.00 억 TWD 규모의 대규모 군사 구매 패키지를 추진했다. 2004년 온두라스를 공식 방문했을 때 '대만, 중화민국'(Taiwan, ROC)이라는 명칭을 사용해 작은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후 천수이볜 총통은 '대만'이라는 명칭을 더 선호한다고 밝힌 바 있다. 2004년 9월에는 대만 독립 정체성을 강조하기 위해 공식 문서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국 대륙'이나 '공산 중국' 대신 단순히 '중국'으로 지칭하도록 지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총통부의 전적인 지지를 받지 못했고, 대륙위원회는 내부 문서에만 적용될 것이라고 해명했다. 2004년 입법위원 선거에서 범록연맹이 과반수를 얻지 못하자, 유시쿤과 내각은 총사퇴했으며, 그는 다시 총통부 비서장으로 돌아왔다. 그의 후임 행정원장으로는 셰창팅이 임명되었다.
3.4. 당 대표 활동
2006년 1월 15일, 유시쿤은 54%의 득표율로 민주진보당 주석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2007년 9월 21일 부패 혐의로 기소되면서 주석직에서 사임했다. 그는 2008년 총통 선거의 민주진보당 후보 경선에 셰창팅, 쑤전창, 뤼슈롄과 함께 참여했다. 1차 경선에서 3위를 기록한 후, 그는 선두 후보인 셰창팅이 여론조사를 통한 2차 경선 없이 후보 지명을 받을 수 있도록 다른 후발 주자들과 함께 경선에서 철수했다.
3.5. 입법원 활동
2020년, 유시쿤은 민주진보당 비례대표로 입법원에 당선되었다. 2020년 2월 1일, 그는 라이스바오 입법위원을 누르고 73표를 얻어 제12대 입법원장으로 선출되며 쑤자촨의 뒤를 이었다. 입법원장 재임 중이던 2020년 7월 5일, 타이베이 전통 중의학 국제 포럼에서 그는 '중의학' 명칭을 '대만식'으로 변경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2021년 11월 5일, 그는 "대만 해협 전역에서 적대감을 조장하고 본토를 악의적으로 비방했다"는 이유로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대만사무판공실로부터 제재를 받았다.
2024년 입법위원 선거에서 다시 비례대표로 재선되었으나, 같은 해 2월 1일 입법원장 재선에 실패하자 입법위원직에서도 사임하며 제11대 입법원 활동을 마무리했다.
4. 정치 이념과 입장
유시쿤은 대만 독립에 대한 강력한 지지를 표명하며, 대만의 주권과 독자적인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큰 비중을 두는 정치 이념을 가지고 있다. 그는 '대만, 중화민국'과 같은 명칭 사용을 통해 대만이 중화인민공화국과 별개의 실체임을 강조하며, 대만인의 민족적 자긍심 고취에 힘썼다.
그는 대만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고 민주주의 발전을 추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대만의 국가 정체성에 대한 논의에서 '중국' 대신 '대만'이라는 명칭을 강조하며, 대만과 중화인민공화국 간의 '별개의 대만 정체성'을 부각시키려 했다. 이는 대만 내에서 독자적인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민주진보당의 주류 노선과 일치한다.
5. 주요 논란 및 사건
유시쿤의 정치 경력 동안 몇 가지 주요 논란과 사건들이 발생했으며, 이는 그의 경력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5.1. 바장시 사건
2000년 7월, 바장시(八掌溪)에서 4명의 건설 노동자가 불어난 강물에 고립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지역 정부와 중앙 정부 당국은 누가 구조 헬리콥터를 보낼 것인지 3시간 동안 논쟁을 벌였고, 결국 고립된 노동자들은 익사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대중의 분노가 들끓었고, 탕페이 행정원장을 포함한 고위 공무원들이 사임을 표명했다. 당시 재난 구호 및 예방 위원회 위원장이었던 부행정원장 유시쿤의 사임도 수리되었다. 이 사건은 그의 초기 정부 경력에 큰 타격을 주었다.
5.2. 부패 혐의와 무죄 선고
2007년 9월 21일, 유시쿤은 뤼슈롄 부총통, 천탕산(陳唐山) 국가안보회의 비서장과 함께 대만 최고검찰청으로부터 별도로 부패 혐의로 기소되었다. 유시쿤은 약 7.00 만 USD 상당의 공금 횡령 및 특별 활동비 남용 혐의를 받았다. 그는 기소 당일 민주진보당 주석직에서 사임했다. 그러나 2012년 7월 2일, 이들 세 명은 모든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5.3. 주요 선거 캠페인
유시쿤은 여러 중요한 선거에 출마하며 자신의 정치적 역량을 시험했다. 2008년 총통 선거의 민주진보당 후보 경선에 참여했으나 3위를 기록한 후 경선에서 철수했다. 이후 2014년 신베이시 시장 선거에 출마했으나, 중국국민당 후보인 주리룬에게 패배했다.
5.4. 양안 관계 및 정체성 문제
유시쿤은 대만의 국가 정체성과 양안 관계에 대해 강한 입장을 보여왔다. 그는 온두라스 공식 방문 시 '대만, 중화민국'(Taiwan, ROC)이라는 명칭을 사용했으며, 2004년 9월에는 '별개의 대만 정체성'을 강조하기 위해 공식 문서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국'으로만 지칭하도록 지시했다. 또한 2020년 7월 5일 타이베이 전통 중의학 국제 포럼에서 '중의학' 명칭을 '대만식'으로 변경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이러한 대만 중심의 정체성 강조 행동과 발언으로 인해, 2021년 11월 5일 그는 "대만 해협 전역에서 적대감을 조장하고 본토를 악의적으로 비방했다"는 이유로 중화인민공화국 대만사무판공실로부터 제재를 받았다.
6. 개인 생활
유시쿤은 1978년 양바오위(楊寶玉)와 결혼하여 두 아들을 두었다. 그의 어머니 황서우주(黃壽珠)는 2002년 12월에 사망했다. 그는 가마란족의 이름을 딴 가마란 저널(噶瑪蘭雜誌Gámǎlán Zázhì중국어 (한자))의 창립자이기도 하다.
7. 평가와 유산
유시쿤은 대만 민주주의 전환기와 발전의 중요한 시기에 여러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민주진보당의 창립 멤버로서 당의 초기 기반을 다지고 대만 독립이라는 중요한 정치적 이념을 옹호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특히 행정원장과 입법원장을 역임하며 대만의 행정과 입법을 이끌었고, 그 과정에서 대만의 국가 정체성을 강화하려는 노력을 꾸준히 기울였다.
그의 이란현장 재임은 환경 보호, 관광, 정보화, 문화 발전을 통해 지역 발전을 이끌었던 성공적인 행정 사례로 기억된다. 바장시 사건과 부패 혐의 기소 등의 논란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국 무죄를 선고받았고 정치적 재기를 통해 입법원장이라는 고위직에 오르는 등 끈질긴 정치적 생명력을 보여주었다. 비록 '사천왕' 중 정치적 기반이 상대적으로 약하다는 평가도 있었으나, 대만 민주화를 위한 그의 헌신과 대만 정체성 확립에 대한 기여는 그의 중요한 유산으로 남을 것이다.
8. 선거 결과
유시쿤이 참여했던 주요 선거 결과는 다음과 같다.
선거명 | 직책명 | 선거구 | 대수 | 정당 | 득표율 | 득표수 | 결과 |
---|---|---|---|---|---|---|---|
1981년 성의원 선거 | 성의원 | 이란현 | 7대 | 무소속(당외) | 24.27% | 41,631표 | |
1985년 성의원 선거 | 성의원 | 이란현 | 8대 | 무소속(당외) | 43.98% | 88,555표 | |
1989년 지방 선거 | 현장 | 이란현 | 11대 | 민주진보당 | 54.48% | 119,037표 | |
1993년 지방 선거 | 현장 | 이란현 | 12대 | 민주진보당 | 57.49% | 116,959표 | |
2008년 입법위원 선거 | 입법위원 | 비례대표 (불분구 및 해외 화교) | 7대 | 민주진보당 | 36.91% | 3,610,106표 | |
2012년 입법위원 선거 | 입법위원 | 비례대표 (불분구 및 해외 화교) | 8대 | 민주진보당 | 34.62% | 4,556,424표 | |
2014년 지방 선거 | 시장 | 신베이시 | 2대 | 민주진보당 | 48.78% | 934,774표 | |
2020년 입법위원 선거 | 입법위원 | 비례대표 (불분구 및 해외 화교) | 10대 | 민주진보당 | 33.98% | 4,811,241표 | |
2024년 입법위원 선거 | 입법위원 | 비례대표 (불분구 및 해외 화교) | 11대 | 민주진보당 | 36.16% | 4,982,062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