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1.1. 어린 시절과 교육

앙리 샤를 윌프리드 로리에는 1841년 11월 20일 캐나다 동부(현재의 퀘벡주 세인트린로랑티드) 생린에서 카롤루스 로리에와 마르셀 마르티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프랑스 생클로드에서 캐나다로 이주한 프랑수아 코티노 디트 샹플로리에의 6대손인 프랑스계 캐나다인이었다. 로리에는 정치가 일상적인 대화와 토론의 소재인 가정에서 자랐다. 그의 아버지 카롤루스는 자유주의적인 사상을 가진 교육받은 사람이었으며, 농부이자 측량사 외에도 시장, 치안 판사, 민병대 중위, 학교 이사회 위원 등 높은 평가를 받는 직책을 맡았다.
11세 때 윌프리드는 집을 떠나 스코틀랜드 이민자들이 주로 거주하는 이웃 마을인 뉴 글래스고에서 공부했다. 다음 2년 동안 그는 영어 학습 외에 영국계 캐나다의 사고방식, 언어, 문화에 익숙해졌다. 1854년 로리에는 로마 가톨릭을 굳건히 따르는 기관인 라솜시옹 대학(Collège de L'Assomption)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그는 정치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으며, 학교가 강경한 보수주의 성향임에도 불구하고 자유주의 이념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1.2. 법률 경력 및 정치 입문
1861년 9월 로리에는 맥길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그는 훗날 그의 아내가 될 조 라퐁텐을 만났다. 로리에는 또한 남은 평생 동안 그를 괴롭힐 만성 기관지염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맥길 대학교에서 로리에는 캐나다 동부 선거에 출마했던 중도좌파 정당인 Parti rouge루즈당프랑스어에 가입했다. 1864년 로리에는 맥길 대학교를 졸업했다.
로리에는 계속해서 루즈당에서 활동했으며, 1864년 5월부터 1866년 가을까지 루즈당과 연관된 문학회인 Institut canadien de Montréal몽레알 캐나다 연구소프랑스어의 부회장을 역임했다. 1864년 8월, 로리에는 온건파와 급진파로 구성된 반연방주의 단체인 로어 캐나다 자유주의자 연합에 가입했다. 이 단체는 연방이 중앙 정부에 너무 많은 권한을 부여하고, 프랑스계 캐나다인에 대한 차별로 이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로리에는 이후 몬트리올에서 변호사로 활동했지만, 초기에는 어려움을 겪었다. 1864년 10월 27일 첫 사무실을 열었지만 한 달 만에 문을 닫았다. 두 번째 사무실도 고객 부족으로 3개월 만에 폐쇄했다. 1865년 3월, 거의 파산 상태에 이른 로리에는 강력한 반연방주의자 변호사이자 언론인인 메데리크 랑크토와 파트너십을 맺고 세 번째 법률 회사를 설립했다. 두 사람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지만, 1866년 말 로리에는 동료 루즈당원인 앙투안에메 도리옹의 초청으로 사망한 형제의 뒤를 이어 신문 Le Défricheur프랑스어의 편집장 겸 운영자가 되었다.
로리에는 빅토리아빌로 이주하여 1867년 1월 1일부터 신문을 집필하고 운영하기 시작했다. 로리에는 이를 통해 자신의 강력한 반연방주의적 견해를 표명할 기회로 삼았다. 한 번은 "연방은 더럼 경이 계획한 '영어화'의 두 번째 단계이다... 우리는 영국계 다수에게 넘겨지고 있다... [우리는] 남아있는 모든 영향력을 사용하여 자유롭고 독립적인 정부를 요구하고 획득해야 한다"라고 썼다. 3월 21일, 르 데프리쇠르는 재정 문제와 지역 성직자들의 반대로 인해 폐간될 수밖에 없었다. 7월 1일, 연방이 공식적으로 선포되고 인정되면서 로리에에게는 패배로 기록되었다.
로리에는 빅토리아빌에 머물기로 결정했다. 그는 인구 730명의 마을에서 서서히 유명해졌고, 정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시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또한 그는 30년간 네 명의 다른 파트너를 거느리며 법률 사무소를 운영했다. 그는 돈을 벌었지만 부유하다고 여겨질 만큼은 아니었다. 빅토리아빌에 머무는 동안 로리에는 급진적인 자유주의자보다는 온건한 자유주의자로 자신을 규정하고 연방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1869년 빅토리아빌에 거주하는 동안 로리에는 아서바스카빌 보병 중대에서 소위로 임명되었다. 그는 1870년 중위로 진급했으며, 5월부터 6월까지 제2차 페니언 습격 당시 생티아생트에서 현역 복무했다. 그는 1878년까지 이 중대에서 복무했으며, 1899년에는 1870년 복무에 대한 캐나다 일반 복무 훈장을 받았다.
2. 연방 정치 활동
2.1. 하원 의원으로서의 활동

1871년 퀘벡 자유당 소속으로 드럼몬드-아서바스카 선거구에서 퀘벡 주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지만, 자유당은 전체적으로 참패했다. 지방 선거구에서 승리하기 위해 로리에는 교육, 농업, 식민지 개척에 대한 자금 지원 확대를 공약으로 내세웠다. 지방 정치인으로서 그의 경력은 주목할 만하지 않았으며, 주의회에서 연설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로리에는 자유당 소속으로 연방 정치에 진출하기 위해 지방 의원직을 사임했다. 그는 1874년 1월 22일 선거에서 드럼몬드-아서바스카 선거구를 대표하여 하원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이 선거에서 알렉산더 매켄지가 이끄는 자유당은 존 A. 맥도널드 총리가 이끄는 보수당이 시작한 태평양 스캔들로 인해 큰 승리를 거두었다. 로리에는 보수당의 부패를 비난하는 간단한 선거 운동을 펼쳤다.
하원 의원(MP)으로서 로리에의 첫 임무는 하원에서 연설을 통해 명성을 쌓는 것이었다. 그는 1877년 6월 26일 약 2,000명의 사람들 앞에서 정치적 자유주의에 대한 연설을 하면서 상당한 주목을 받았다. 그는 "자유 가톨릭주의는 정치적 자유주의가 아니며" 자유당은 "위험한 경향을 지닌 왜곡된 교리를 가진 사람들의 당이 아니며, 혁명을 향해 의도적으로 나아가는 당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자유당의 정책은 [우리의] 제도를 보호하고, 방어하며, 확산시키고, 이러한 제도의 영향 아래에서 국가의 잠재적 자원을 개발하는 것이다. 이것이 자유당의 정책이며, 다른 정책은 없다"고 말했다. 이 연설은 로리에가 자유당 퀘벡 지부의 지도자가 되는 데 도움을 주었다.
1877년 10월부터 1878년 10월까지 로리에는 매켄지 총리의 내각에서 내국세입부 장관으로 잠시 재직했다. 그러나 그의 임명으로 1877년 10월 27일 재보궐 선거가 치러졌다. 이 재보궐 선거에서 그는 드럼몬드-아서바스카 의석을 잃었다. 11월 11일, 그는 퀘벡 동부 의석에 출마하여 간신히 당선되었다. 1877년 11월 11일부터 1919년 2월 17일 사망할 때까지 로리에의 의석은 퀘벡 동부였다. 로리에는 1878년 연방 선거에서 퀘벡 동부에서 재선에 성공했지만, 자유당은 1873년 공황에 대한 잘못된 처리로 인해 참패했다. 맥도널드는 총리로 복귀했다.
로리에는 매켄지에게 경제 문제 처리 방식 등을 이유로 당 대표직 사임을 요구했다. 매켄지는 1880년 자유당 대표직에서 사임했고, 에드워드 블레이크가 그 뒤를 이었다. 로리에는 다른 이들과 함께 자유당을 홍보하기 위해 퀘벡 신문 레렉퇴르(L'Électeur)를 창간했다. 자유당은 다시 야당이 되었고, 로리에는 이 지위를 활용하여 자유방임 경제와 지방 자치권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자유당은 1882년 선거에서 두 번째 연속 패배를 겪었으며, 맥도널드는 네 번째 임기를 얻었다. 로리에는 보수당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는 연설을 계속했지만, 1885년 루이 리엘 처형에 반대하는 연설 전까지는 주목할 만한 것이 없었다. 맥도널드 정부는 북서부 반란을 이끈 리엘에게 사면을 거부했다.
2.2. 자유당 당수

에드워드 블레이크는 1882년과 1887년 연속 패배를 겪은 후 자유당 대표직에서 사임했다. 블레이크는 로리에에게 당 대표 경선에 출마할 것을 촉구했다. 처음에는 로리에가 그렇게 강력한 직책을 맡는 것을 꺼려했지만, 나중에는 수락했다. 13년 반 만에 로리에는 이미 명성을 확립했다. 그는 이제 자유당 퀘벡 지부를 이끌고 프랑스계 캐나다인의 권리를 옹호하며 뛰어난 연설가이자 격렬한 의회 연설가로 알려진 저명한 정치인이었다. 다음 9년 동안 로리에는 퀘벡과 캐나다 다른 지역에서 개인적인 추종자들을 통해 당의 힘을 점진적으로 키워나갔다.
1891년 연방 선거에서 로리에는 보수당 총리 존 A. 맥도널드와 맞섰다. 로리에는 미국과의 상호주의, 즉 자유 무역을 지지하는 선거 운동을 펼쳤지만, 맥도널드는 상호주의가 미국의 캐나다 합병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주장하며 이에 반대했다. 3월 5일 선거 당일, 자유당은 10석을 추가로 얻었다. 자유당은 또한 1874년 선거 이후 처음으로 퀘벡에서 과반수 의석을 얻었다. 맥도널드 총리는 네 번째 연속 연방 선거 승리를 거두었다. 다음 날, 블레이크는 자유당의 무역 정책을 비난했다.
로리에는 패배 후 얼마 동안 실망감을 느꼈다. 그는 여러 차례 대표직 사임을 제안했지만, 다른 자유당원들의 설득으로 사임하지 않았다. 1893년이 되어서야 로리에는 다시 용기를 얻었다. 1893년 6월 20일과 21일, 로리에는 오타와에서 자유당 전당 대회를 소집했다. 전당 대회는 무제한 상호주의가 캐나다의 천연자원 개발을 목표로 하며, 관세 유지는 수입 증대를 목표로 한다는 점을 확립했다. 로리에는 이어서 전당 대회 결과를 홍보하기 위해 일련의 연설 순회에 나섰다. 로리에는 1894년 9월과 10월 캐나다 서부를 방문하여 보수당의 국민 정책을 완화하고, 미국 시장을 개방하며, 이민을 늘리겠다고 약속했다.
맥도널드는 1891년 선거에서 로리에를 물리친 지 불과 3개월 만에 사망했다. 맥도널드 사망 후 보수당은 4명의 단기 재임 지도자들과 함께 혼란기를 겪었다. 맥도널드 이후 네 번째 총리인 찰스 터퍼는 1890년 지방 정부가 가톨릭 학교에 대한 자금 지원을 중단하면서 발생한 매니토바 학교 문제에 대한 타협안을 제시하려다 리더십 위기를 겪고 사임한 매켄지 보웰의 뒤를 이어 1896년 5월 총리가 되었다. 터퍼는 1896년 연방 선거에서 로리에와 맞섰으며, 학교 분쟁이 주요 쟁점이었다. 터퍼가 가톨릭 학교에 대한 자금 지원을 재개하기 위해 지방 법률을 무효화하는 것을 지지한 반면, 로리에는 이 문제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모호하게 밝히며 먼저 문제 조사를 제안하고 화해를 모색했는데, 이를 그는 "햇살 가득한 길"(sunny ways)이라고 불렀다. 6월 23일, 로리에는 득표율에서는 뒤졌지만, 퀘벡에서의 압도적인 승리 덕분에 22년 만에 자유당을 첫 승리로 이끌었다.
3. 캐나다 총리 (1896-1911)

로리에는 총리 재임 기간 동안 캐나다의 국내 정책과 외교 정책 전반에 걸쳐 중요한 변화를 이끌었다.
3.1. 국내 정책
3.1.1. 매니토바 학교 문제
로리에가 총리로서 취한 첫 조치 중 하나는 1896년 초 찰스 터퍼의 보수당 정부를 무너뜨리는 데 일조했던 매니토바 학교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시행하는 것이었다. 매니토바 주의회는 가톨릭 교육에 대한 공적 자금 지원을 중단하는 법률을 통과시켰다. 가톨릭 학교 지지자들은 새로운 법률이 학교 자금 지원에 관한 조항을 포함하고 있는 1870년 매니토바 법의 조항에 위배된다고 주장했지만, 법원은 이 주장을 기각하고 새로운 법률이 합헌이라고 판결했다.
매니토바의 가톨릭 소수자들은 연방 정부에 지원을 요청했고, 결국 보수당은 매니토바의 법률을 무효화하는 구제 법안을 제안했다. 로리에는 지방 자치권에 근거하여 구제 법안에 반대했고, 의회 통과를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당선 후 로리에는 지방 총리 토머스 그린웨이와 타협안에 도달했다. 로리에-그린웨이 타협안으로 알려진 이 협정은 별도의 가톨릭 학교 재설립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농촌 지역에서는 10명, 도시 지역에서는 25명의 어린이 학부모가 요청할 경우, 매일 수업이 끝난 후 30분 동안 종교 교육(가톨릭 교육)이 이루어지도록 했다. 가톨릭 교사는 도시 지역에서 40명 이상, 농촌 지역에서 25명 이상의 가톨릭 학생이 있는 한 학교에서 고용될 수 있었으며, 프랑스어권 학생이 충분한 한 교사는 프랑스어(또는 기타 소수 언어)로 수업할 수 있었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당시 상황에서 가능한 최선의 해결책으로 여겨졌지만, 일부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은 이것이 개별적으로 이루어졌으며 모든 학교에서 가톨릭 또는 프랑스어 권리를 보호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로리에는 이 문제의 긴장을 완화하려는 자신의 노력을 "햇살 가득한 길"(voies ensoleillées부아 앙솔레예프랑스어)이라고 불렀다.
3.1.2. 철도 건설

로리에 정부는 두 번째 대륙횡단철도인 그랜드 트렁크 퍼시픽 철도 건설 아이디어를 도입하고 시작했다. 첫 번째 대륙횡단철도인 캐나다 태평양 철도는 한계가 있었고 모든 사람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서부에서는 농부들이 생산한 모든 것을 운송할 수 없었고, 동부에서는 온타리오주 북부와 퀘벡주 북부까지 철도가 닿지 않았다. 로리에는 민간 기업이 캐나다 땅에 전적으로 건설하는 대륙횡단 철도 노선을 선호했다.
로리에 정부는 또한 세 번째 철도인 내셔널 트랜스컨티넨탈 철도를 건설했다. 이 철도는 서부 캐나다에 대서양 항구와 직접 연결되는 철도 연결을 제공하고 온타리오주 북부와 퀘벡주 북부를 개발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로리에는 세 철도 간의 경쟁이 캐나다 태평양 철도를 포함한 이들 중 하나가 운임을 인하하도록 강제하여, 철도 간 경쟁에 기여할 서부 화주들을 만족시킬 것이라고 믿었다. 로리에는 처음에 그랜드 트렁크 철도와 캐나다 북부 철도에 내셔널 트랜스컨티넨탈 철도 건설을 제안했지만, 두 회사 간에 이견이 발생하자 로리에 정부는 철도의 일부를 직접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로리에 정부는 곧 그랜드 트렁크 퍼시픽 철도 회사(그랜드 트렁크 철도 회사의 자회사)와 서부 구간(위니펙에서 태평양까지)을 건설하고 정부가 동부 구간(위니펙에서 멍크턴까지)을 건설하기로 합의했다. 완공되면 로리에 정부는 철도를 회사에 운영을 넘겼다. 로리에 정부는 철도 건설에 막대한 비용이 들면서 대중의 비판을 받았다.
정부가 철도 계약업자들과 협상하는 동안 로리에는 캐나다 철도 거물인 휴 라이언과 친밀한 친구가 되었고, 라이언이 1899년 사망할 때까지 우정을 유지했다. 로리에는 라이언 가족에게 공개적으로나 사적으로 애도를 표한 첫 번째 사람이었다.
3.1.3. 영토 확장 및 주 설립
1905년 9월 1일, 로리에는 앨버타 법과 서스캐처원 법을 통해 앨버타와 서스캐처원의 연방 편입을 감독했다. 이들은 노스웨스트 준주에서 만들어진 마지막 두 주이다. 로리에는 하나의 큰 주가 통치하기에는 너무 어렵다고 주장하며 두 개의 주를 만들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은 로리에 정부가 1898년 유콘 준주 법을 제정하여 유콘을 노스웨스트 준주에서 분리한 것에 이은 것이다. 또한 1898년에는 퀘벡 경계 확장법을 통해 퀘벡이 확대되었다.
3.1.4. 이민 정책
로리에 정부는 경제 성장을 위해 이민을 대폭 늘렸다. 1897년에서 1914년 사이에 최소 100만 명의 이민자가 캐나다에 도착했으며, 캐나다 인구는 40% 증가했다. 로리에의 이민 정책은 프레리 지역을 목표로 했는데, 이는 농업 생산량을 늘리고 농업 산업에 이익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브리티시컬럼비아주 유권자들은 캐나다 기준으로 "미개하다"고 간주되는 사람들의 유입에 경각심을 느꼈고, 백인 전용 정책을 채택했다. 철도 회사와 대기업들은 아시아인 고용을 원했지만, 노동조합과 일반 대중은 이에 반대했다. 주요 정당들은 모두 여론에 따랐으며, 로리에는 그 선두에 섰다. 학자들은 로리에가 중국인 인두세 지지에서 나타나듯이 중국과 인도 이민을 제한하는 데 있어 인종주의적 견해에 따라 행동했다고 주장했다. 1900년에 로리에는 중국인 인두세를 100 USD로 인상했다. 1903년에는 이것이 다시 500 USD로 인상되었는데, 일부 중국인들이 500 USD를 지불하자 그는 그 금액을 1000 USD로 인상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이것이 로리에가 인종차별적인 행동을 보인 첫 사례는 아니었으며, 그는 정치인으로서 활동하는 동안 인종차별적인 견해와 행동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1886년 로리에는 하원에서 정부가 적절한 보상을 지급하는 한 캐나다가 "미개한 국가"로부터 토지를 취득하는 것이 도덕적이라고 말했다. 로리에는 또한 일본인의 캐나다 이주를 제한하는 협상을 진행하기도 했다.
1911년 8월, 로리에는 캐나다 내무부 장관 프랭크 올리버가 권고한 캐나다 추밀원령 제1911-1324호(Order-in-Council P.C. 1911-1324)를 승인했다. 이 명령은 1911년 8월 12일 내각에서 승인되었다. 이 명령은 미국 남부의 분리 정책에서 벗어나려는 흑인 미국인들을 막기 위한 것으로, "흑인 인종은 캐나다의 기후 및 요구 사항에 부적합하다고 간주된다"고 명시했다. 이 명령은 이민 관리들의 노력으로 캐나다로 이주하는 흑인의 수가 이미 줄어들었기 때문에 결코 발동되지 않았다. 이 명령은 로리에가 퇴임하기 전날인 1911년 10월 5일 내각에 의해 취소되었는데, 내무부 장관이 승인 당시 참석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3.1.5. 사회 및 노동 정책

1906년 3월, 로리에 정부는 주님의 날 동맹의 설득에 따라 주님의 날 법(Lord's Day Act)을 도입했다. 이 법은 1907년 3월 1일부터 발효되었다. 이 법은 일요일에 사업 거래가 이루어지는 것을 금지했으며, 일요일의 무역, 노동, 오락, 신문 발행 또한 제한했다. 이 법은 조직 노동자와 프랑스계 캐나다 가톨릭 성직자들의 지지를 받았지만, 제조업 및 운송 부문 종사자들에게는 반대되었다. 또한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은 연방 정부가 지방 문제에 간섭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 법에 반대했다. 퀘벡 정부는 연방 법보다 하루 먼저 발효된 자체적인 주님의 날 법을 통과시켰다.
1907년 로리에 정부는 산업 분쟁 조사법(Industrial Disputes Investigation Act)을 통과시켰는데, 이는 공공시설이나 광산에서 파업하기 전에 고용주와 노동자에게 화해를 의무화했지만, 단체들이 화해 보고서를 수락하는 것을 의무화하지는 않았다.
1908년에는 노후 대비를 장려하기 위한 목적으로 정부로부터 연금을 구매할 수 있는 시스템이 도입되었다.
3.2. 외교 정책 및 제국 관계
3.2.1. 영국과의 관계

1897년 6월 22일, 로리에는 빅토리아 여왕 즉위 60주년을 기념하는 빅토리아 여왕의 다이아몬드 주빌리에 참석했다. 그곳에서 그는 경 작위를 받았으며, 여러 영예, 명예 학위 및 메달을 수여받았다. 로리에는 1902년에 다시 영국을 방문하여 1902년 식민지 회의와 1902년 8월 9일 에드워드 7세 국왕의 대관식에 참여했다. 로리에는 또한 1907년과 1911년 제국 회의에도 참여했다.
1899년, 영국 정부는 제2차 보어 전쟁에 참전할 캐나다 병력을 요청했다. 로리에는 영국계 캐나다의 군사 행동 지원 요구와 프랑스계 캐나다의 강력한 반대 사이에서 갈등했다. 로리에는 결국 영국이 기대했던 캐나다 민병대 대신 의용군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약 7,000명의 캐나다 군인이 이 부대에서 복무했다. 프랑스계 캐나다 민족주의자이자 자유당 하원 의원인 앙리 부라사는 보어 전쟁에 대한 캐나다의 어떠한 형태의 참여에도 특히 목소리를 높여 반대했으며, 1899년 10월 자유당 당원 회의에서 사임했다.
1909년 6월 1일, 로리에 정부는 캐나다가 외교 정책에 대한 더 큰 통제권을 갖도록 외무부를 설립했다.
20세기 초반 영국-독일 해군 군비 경쟁이 격화되었다. 영국 정부는 영국 해군 확장을 돕기 위해 재정 및 물자 자원을 요청했고, 이는 캐나다에서 격렬한 정치적 분열을 촉발했다. 많은 영국계 캐나다인들은 가능한 한 많은 지원을 보내기를 원했고, 많은 프랑스계 캐나다인과 반대자들은 아무것도 보내지 않기를 원했다. 로리에는 타협을 목표로 1910년 해군 서비스법을 추진하여 캐나다 자체 해군을 창설했다. 해군은 처음에 5척의 순양함과 6척의 구축함으로 구성될 예정이었고, 위기 시에는 영국 해군에 종속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아이디어는 영국계와 프랑스계 캐나다 모두에서 반대에 부딪혔고, 특히 퀘벡에서는 부라사가 로리에 반대 세력을 조직하기도 했다.
3.2.2. 대영 제국 내 캐나다의 자치권
로리에는 캐나다의 자치권 확대를 추구했다. 그는 캐나다가 "정치적, 상업적 절대 자유"를 전제로 대영 제국 내에서 지속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식민지가 언젠가는 독립하여 본국에서 벗어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러한 독립을 "우리의 운명의 북극성"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비전은 캐나다의 국가 정체성과 국제적 지위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3.2.3. 알래스카 국경 분쟁
1897년과 1898년에 알래스카-캐나다 국경은 시급한 문제로 부상했다. 클론다이크 골드 러시는 로리에에게 금광에서 항구까지의 전 캐나다 경로를 요구하게 만들었다. 이 지역이 금이 풍부한 매력적인 곳이라는 점은 정확한 국경을 확정하려는 로리에의 야망을 더욱 부추겼다. 로리에는 또한 린 캐널의 소유권과 유콘으로의 해상 접근 통제권을 확립하고자 했다. 로리에는 미국 대통령 윌리엄 매킨리와 공동 영미 위원회를 설치하여 차이점을 연구하고 분쟁을 해결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이 위원회는 실패했으며 1899년 2월 20일에 갑자기 해산되었다.
분쟁은 1903년 국제 사법 위원회에 회부되었는데, 이 위원회에는 세 명의 미국 정치인(엘리후 루트, 헨리 캐벗 로지, 조지 터너), 두 명의 캐나다인(앨런 브리스톨 에일스워스와 루이아마블 제테), 그리고 한 명의 영국인(알버스톤 경)이 포함되었다. 1903년 10월 20일, 위원회는 다수결(루트, 로지, 터너, 알버스톤)로 미국 정부의 주장을 지지하는 판결을 내렸다. 캐나다는 포틀랜드 캐널 아래의 두 섬만을 획득했다. 이 결정은 캐나다에서 광범위한 반미 및 반영 감정을 불러일으켰고, 로리에는 한때 이를 부추기기도 했다.
3.2.4. 관세 및 무역 정책
로리에는 미국과의 자유 무역을 지지했지만, 미국 정부가 이 문제에 대한 논의를 거부했기 때문에 이를 추진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캐나다 상품을 제한하는 다른 국가의 상품에 높은 관세를 유지하면서도 캐나다 상품을 허용하는 국가의 관세 수준을 낮추는 방식으로 보수당의 민족주의적이고 보호주의적인 국민 정책을 자유당식으로 구현했다.
1897년 로리에 정부는 캐나다 상품을 최소 캐나다 요금과 동등한 요율로 수입하는 국가에 대해 12.5%의 관세율을 우대적으로 인하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캐나다에 보호 관세를 부과하는 국가에 대한 관세율은 동일하게 유지되었다. 대체로 이 정책은 자유 무역 지지자(우대 인하 때문에)와 자유 무역 반대자(국민 정책의 요소가 남아 있기 때문에) 모두에게 지지를 받았다.
로리에 정부는 1907년에 다시 관세를 개혁했다. 그의 정부는 기존의 영국 우대 세율과 일반 세율(캐나다가 최혜국 협정을 맺지 않은 모든 국가에 적용)과 함께 새로운 중간 세율(협상 세율)을 추가한 "3단계 관세"를 도입했다. 우대 세율과 일반 세율은 변경되지 않았으며, 중간 세율은 일반 세율보다 약간 낮았다.
또한 1907년, 로리에의 캐나다 재무부 장관 윌리엄 스티븐스 필딩과 캐나다 수산해양경비대 장관 루이필리프 브로되르는 일부 상품에 대한 수입 관세를 낮추는 프랑스와의 무역 협정을 협상했다. 1909년 필딩은 영국령 서인도 제도와의 무역 증진을 위한 협정을 협상했다.
3.3. 선거 승리
로리에는 1900년, 1904년, 1908년 캐나다 연방 선거에서 자유당을 세 차례 재선으로 이끌었다. 1900년과 1904년 선거에서는 자유당의 득표율과 의석 점유율이 증가했지만, 1908년 선거에서는 당의 득표율과 의석 점유율이 약간 감소했다。
퀘벡주에서의 정치적 기반 강화는 1800년대 후반부터 로리에에 의해 이루어졌다. 수십 년 동안 퀘벡은 사회적 보수주의와 자유당의 반성직자주의를 불신했던 로마 가톨릭교회의 영향으로 보수당의 강력한 지지 기반이었다. 그러나 영국계 캐나다의 반프랑스, 반가톨릭 성향의 오렌지 단과의 연관성으로 인해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이 보수당으로부터 점점 더 소외되면서 자유당은 유리한 위치를 차지했다. 퀘벡 보수당의 붕괴 이후, 로리에는 프랑스계 캐나다와 캐나다 전역의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서 강력한 지지 기반을 구축했다.
그러나 퀘벡의 가톨릭 사제들은 교구민들에게 자유당에 투표하지 말라고 반복적으로 경고했다。 그들의 슬로건은 "le ciel est bleu, l'enfer est rouge하늘은 파랗고, 지옥은 빨갛다프랑스어"였는데, 이는 보수당과 자유당의 전통적인 색깔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4. 1911년 상호주의 선거와 패배
1911년, 로리에가 미국과의 무역 상호주의를 지지하면서 논란이 일었다. 그의 오랜 재무부 장관인 윌리엄 스티븐스 필딩은 천연 산물의 자유 무역을 허용하는 협정에 도달했다. 이 협정은 또한 관세를 인하할 것이었다. 이는 특히 캐나다 서부의 농업 이익 집단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지만, 자유당의 주요 기반 중 상당 부분을 차지했던 많은 사업가들을 소외시켰다. 보수당은 이 협정을 비난하고, 상호주의가 궁극적으로 영국과의 유대 관계 약화와 미국이 캐나다 경제를 지배하게 될 것이라는 오랜 두려움을 이용했다. 그들은 또한 이 협정이 캐나다의 정체성을 미국에게 빼앗기고 미국의 캐나다 합병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두려움을 가지고 선거 운동을 펼쳤다.
클리퍼드 시프턴을 포함한 하원의 난폭한 반대에 직면한 로리에는 상호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선거를 실시했다. 보수당이 승리했고, 자유당은 의석의 3분의 1 이상을 잃었다. 보수당의 지도자 로버트 레어드 보든이 로리에의 뒤를 이어 총리가 되었다. 15년간의 연속적인 자유당 통치가 끝난 순간이었다.
5. 야당 지도자 및 제1차 세계 대전 (1911-1919)

로리에는 계속해서 자유당 대표직을 유지했다. 1912년 12월, 그는 왕립 해군 지원을 위해 3500.00 만 USD를 할당하는 보수당의 해군 법안에 대한 의사진행 방해와 투쟁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로리에는 이 법안이 캐나다의 자치권을 위협한다고 주장했고, 6개월간의 싸움 끝에 이 법안은 자유당이 장악한 상원에 의해 저지되었다.
로리에는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야당을 이끌었다. 그는 자원병을 보내 전쟁에 참전하는 것을 지지하며, 강렬한 자원병 모집 운동이 충분한 병력을 생산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보든은 처음에는 자원병 제도를 시행했지만, 지원자 수가 줄어들기 시작하자 1917년 여름 징병제를 부과했고, 이는 1917년 징병 위기로 이어졌다. 로리에는 징병제에 대한 영향력 있는 반대자였으며, 이 문제에 대한 그의 입장은 일반적으로 징병제에 반대하는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의 박수를 받았다. 징병제 찬성 자유당원들, 특히 영국계 캐나다인들은 보든과 함께 자유연합주의자로 연합 정부를 구성했다. 로리에는 연합당에 합류하는 것을 거부하고, 대신 징병제에 반대하는 자유당원들로 구성된 "로리에 자유당원"을 만들었다。 로리에는 또한 보든 총리의 보수당과 자유당으로 구성된 연립 정부 제안을 거부하며, 정부에 대한 "진정한" 야당이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자유당이 연합하면 퀘벡이 소외감을 느끼게 될 것이고, 퀘벡이 프랑스계 캐나다 민족주의자 앙리 부라사와 로리에가 "위험한 민족주의"라고 불렀던 부라사의 영향을 크게 받아 캐나다에서 퀘벡이 분리될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1917년 선거에서 로리에 자유당은 주로 프랑스계 캐나다인으로 구성된 소수 정당으로 축소되었다. 로리에는 퀘벡의 65개 의석 중 62개를 휩쓸었는데, 이는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이 징병제 반대에 대한 로리에에게 압도적인 존경과 지지를 보낸 덕분이었다.
징병 위기는 프랑스계 캐나다인과 영국계 캐나다인 사이의 분열을 다시 한번 드러냈다. 대부분의 영국계 캐나다인들은 징병이 영국과의 유대 관계를 강화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징병을 선호한 반면, 대부분의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은 전쟁과 관련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징병에 반대했다. 로리에는 이제 영국계 캐나다인과 영국계 캐나다 자유당원들에게는 "반역자"로,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에게는 "영웅"으로 여겨졌다. 로리에의 제자이자 당 대표 후계자인 윌리엄 라이언 매켄지 킹은 자유당의 영국계와 프랑스계 파벌을 통합하여 1921년 연방 선거에서 보수당에 승리했다.
선거 후에도 로리에는 자유당 대표이자 야당 대표로 남아 있었다. 1918년 11월 11일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그는 자유당을 재건하고 재통합하는 데 노력을 집중했다.
6. 개인 생활

윌프리드 로리에는 1868년 5월 13일 몬트리올에서 조 라퐁텐과 결혼했다. 그녀는 G.N.R. 라퐁텐과 그의 첫 번째 부인인 조 테시에(조 라빈으로 알려짐)의 딸이었다. 로리에의 아내 조는 몬트리올에서 태어나 봉 파스테르 학교와 세인트 빈센트 드 폴의 성심 수녀원에서 교육을 받았다. 부부는 1896년 오타와로 이주할 때까지 아서바스카빌에서 살았다. 그녀는 캐나다 여성 국가 의회 설립 당시 부회장 중 한 명이었고, 빅토리아 간호사단의 명예 부회장이기도 했다. 두 부부는 자녀가 없었다.
1878년부터 약 20년 동안, 조와 결혼한 상태에서 로리에는 기혼 여성인 에밀리 바르트와 "모호한 관계"를 유지했다. 조는 지적인 여성이 아니었지만, 에밀리는 문학과 정치를 윌프리드처럼 좋아했고,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가 그녀와 아들 아르망 라베르뉴를 가졌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조는 그의 죽음까지 그와 함께했다.

7. 사망 및 후계
로리에는 야당 대표로 재직 중이던 1919년 2월 17일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2년 전 치열한 선거에서 패배했지만, 그는 "따뜻한 미소, 세련된 스타일, 그리고 '햇살 가득한 길'"로 전국적으로 사랑받았다. 그의 장례 행렬이 노트르담 공동묘지의 최종 안식처로 향할 때, 5만에서 10만 명의 사람들이 오타와 거리를 가득 메웠다. 그의 유해는 결국 돌로 된 석관에 안치되었고, 연방 내 9개 주를 상징하는 9명의 애도하는 여성 조각상으로 장식되었다. 그의 아내 조 로리에는 1921년 11월 1일 사망했으며 같은 묘지에 안치되었다.
로리에는 그의 전 캐나다 노동부 장관이었던 윌리엄 라이언 매켄지 킹에 의해 자유당 대표직을 영구적으로 승계했다. 매켄지 킹은 로리에의 전 캐나다 재무부 장관이었던 윌리엄 스티븐스 필딩을 간신히 물리쳤다. 조에에 따르면, 필딩이 로리에가 다음 지도자로 선택한 인물이었고, 로리에는 필딩이 당의 단결을 회복할 가장 좋은 기회를 가졌다고 믿었다.
8. 유산 및 평가
8.1. 긍정적 평가
전반적으로 로리에가 영국계 캐나다인과 프랑스계 캐나다인 사이에서 중립을 유지하고 양 민족 그룹 사이에서 중간 지점을 찾으려는 노력은 그를 캐나다 총리 중 상위 3명 안에 드는 인물로 평가받게 했다. 그는 프랑스계 캐나다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매니토바의 가톨릭 학교 공적 자금 지원 금지 철회에 대한 프랑스계 캐나다인의 요구를 전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보어 전쟁에 캐나다 병력을 파견하지 말라는 요구도 전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치른 7번의 선거 모두에서 퀘벡의 대부분 선거구는 그의 자유당에 넘어갔다. 1958년의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예외를 제외하고, 자유당은 1984년까지 퀘벡에서 연방 정치를 계속 지배했다.
역사가 자크 모네는 "그의 충성스러운 지지자들, 특히 그의 성이 다른 많은 캐나다인들에 의해 이름으로 사용되는 퀘벡에서, 로리에는 재임 기간이 캐나다 역사상 행복한 시기였던 카리스마 넘치는 영웅이다. 그는 캐나다가 영국으로부터 가능한 한 독립적이도록 노력하는 동시에 프랑스어권 및 영어권 캐나다인 간의 협력을 위해 평생을 일했다. 그의 개인적인 매력과 위엄, 뛰어난 연설 능력, 그리고 위대한 지적 재능은 모든 캐나다인과 비캐나다인의 존경을 받았다"고 썼다.
역사가 노먼 힐머와 스티븐 애지에 따르면, 2011년 117명의 역사가와 전문가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로리에는 존 A. 맥도널드와 매켄지 킹을 제치고 "최고의" 캐나다 총리로 선정되었다. 캐나다 역사학자들의 설문조사에서 로리에는 총리: 캐나다 지도자 순위에 포함된 캐나다 총리 20명 중 3위를 차지했다. 캐나다 전쟁 박물관의 팀 쿡은 "열정적이고 카리스마 넘치며, 두 언어 모두에서 지적인 힘을 가졌던 윌프리드 경은 완전한 인물이었다"고 언급했다.
8.2. 비판 및 논란
로리에 정부의 이민 정책은 경제 성장을 위해 이민을 장려했지만, 동시에 중국인과 인도인 이민자들이 캐나다에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는다. 특히 그는 중국인 입국세를 지지했으며, 1900년에 100 USD였던 이 세금을 1903년에는 500 USD로, 심지어 1000 USD로 인상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이는 특정 인종에 대한 차별적 정책으로, 학자들은 로리에가 인종차별적 견해를 바탕으로 이러한 이민 제한 정책을 시행했다고 주장한다.
또한, 로리에는 "미개한 국가"로부터 토지를 취득하는 것이 도덕적이라고 발언하며 원주민의 토지 권리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그의 정부는 식민지 개척을 장려하여 원주민 공동체에 영향을 미쳤다. 1911년에는 미국 남부의 인종차별을 피해 캐나다로 오려는 흑인 미국인들의 이민을 막기 위해 "흑인 인종은 캐나다의 기후 및 요구 사항에 부적합하다"고 명시한 추밀원령 제1911-1324호의 승인을 지지하기도 했다. 비록 이 명령이 발동되지는 않았지만, 이는 로리에가 인종적 편견에 기반한 정책을 고려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비판받는다. 이러한 정책들은 그의 업적에 대한 긍정적 평가와 함께 캐나다 사회의 인권과 취약 계층에 미친 부정적 영향을 평가하는 중요한 비판점이다.
9. 영향력
로리에는 캐나다 정치, 자유당, 그리고 국가 정체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영국계와 프랑스계 캐나다인 사이의 화합을 평생 동안 추구하며 국민적 통합에 기여했다. 그의 "햇살 가득한 길"이라는 타협의 정신은 이후 캐나다 정치의 중요한 특징이 되었다. 특히, 퀘벡에서의 강력한 지지 기반을 구축하여 자유당이 수십 년간 퀘벡에서 연방 정치를 지배하는 기반을 마련했다.
경제적으로는 "20세기는 캐나다의 세기"라는 슬로건 아래 대규모 이민을 장려하고 대륙횡단철도를 건설함으로써 경제 발전을 이끌었다。 이는 캐나다 서부 개척과 농업 생산량 증대에 기여했다. 외교적으로는 대영 제국 내에서 캐나다의 자치권 확립을 주장하며, 캐나다가 국제 무대에서 독립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기반을 다졌다. 외무부 창설과 캐나다 왕립 해군 창설은 이러한 자치권 확대의 중요한 상징이다.
그의 후계자인 윌리엄 라이언 매켄지 킹은 로리에의 중도적이고 통합적인 리더십 스타일을 계승하여 자유당을 다시 단결시키고 장기 집권의 길을 열었다. 로리에의 리더십은 캐나다의 다문화주의와 연방주의의 발전에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오늘날 캐나다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유산으로 남아 있다.
10. 기념 및 명예
10.1. 국가 사적지

로리에는 세 곳의 캐나다 국립 사적지로 기념된다.
세인트린로랑티드의 윌프리드 로리에 국립 사적지는 퀘벡주 몬트리올에서 북쪽으로 60 km 떨어진 그의 출생지에 위치한다. 이 사적지는 1925년 명판 설치와 1927년 기념비 건립을 통해 그의 출생지를 기념하려는 초기 열망을 반영했으며, 1930년대에는 로리에를 위한 성지를 조성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지정된 출생지가 로리에의 실제 집도 아니었고 원래 위치에 있지도 않았다는 초기 의심과 이후 확인에도 불구하고, 박물관의 개발과 건립은 그를 기리고 그의 초기 삶을 반영하려는 목표를 충족시켰다.
오타와에 있는 로리에의 벽돌 주택은 현재 로리에 애비뉴와 채플 스트리트 모퉁이에 위치한 로리에 하우스 국립 사적지로 알려져 있다. 로리에 부부는 유언으로 이 집을 매켄지 킹 총리에게 남겼고, 그는 다시 사망 시 캐나다에 기증했다. 두 곳 모두 파크스 캐나다에서 국립 공원 시스템의 일부로 관리하고 있다.
퀘벡주 빅토리아빌에 있는 로리에의 1876년 이탈리아 양식 주택은 그가 변호사이자 하원 의원으로 활동했던 기간 동안 살았던 곳으로, 윌프리드 로리에 하우스 국립 사적지로 지정되어 개인 소유로 로리에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2011년 11월, 온타리오주 워털루에 있는 윌프리드 로리에 대학교는 벤치에 앉아 생각에 잠긴 젊은 윌프리드 로리에를 묘사한 동상을 공개했다.
10.2. 기타 명예
로리에는 다음과 같은 명예 칭호를 받았다.
- 1877년 10월 8일 캐나다 국왕 비공개 자문회 회원으로 임명됨으로써 종신 "존경하는 각하" 칭호와 "PC" 후칭을 받았다.
- 1897년 다이아몬드 주빌리 명예에서 대영제국 추밀원의 일원으로 임명되면서 "존경하는 총리 각하" 칭호로 격상되었다.
- 1897년 다이아몬드 주빌리 명예에서 세인트마이클앤드세인트조지 훈장의 대십자 기사(GCMG)로서 "경" 칭호와 "GCMG" 후칭을 받았다.
- 1902년 7월 26일 에드워드 7세 국왕의 대관식을 위해 에든버러를 방문했을 때 에든버러 대학교에서 법학 명예 박사 학위와 에든버러 자유의 도시 명예 훈장을 수여받았다.
- 매년 11월 20일, 그의 생일은 윌프리드 로리에 경의 날로 기념된다.
- 로리에는 캐나다 은행에서 발행한 여러 지폐에 등장한다.
- 1935년 시리즈와 1937년 시리즈의 1000 CAD 지폐
- 1972년과 1979년 '캐나다 풍경' 시리즈, 1986년 '캐나다의 새' 시리즈, 2002년 '여정' 시리즈, 2013년 '프런티어' 시리즈의 5 CAD 지폐.
- 로리에는 1927년(두 개)과 1973년에 발행된 최소 3개의 우표에 등장했다.

많은 장소와 랜드마크가 로리에를 기리기 위해 명명되었다. 여기에는 다음이 포함된다.
- 영국령 컬럼비아주 롭슨 산 근처 프리미어 산맥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윌프리드 로리에 산
- 밴쿠버, 영국령 컬럼비아의 윌프리드 로리에 초등학교
- 온타리오주 밀턴의 로리에 애비뉴
- 퀘벡주 샤위니건의 로리에 애비뉴
- 퀘벡주 몽로리에
- 온타리오주 브록빌의 로리에 불레바르와 로리에 힐
- 퀘벡주 몬트리올의 로리에 애비뉴
- 퀘벡주 퀘벡 시티의 로리에 불레바르
- 온타리오주 오타와의 로리에 애비뉴
- 온타리오주 딥 리버의 로리에 애비뉴
- 온타리오주 노스 베이의 로리에 스트리트
- 온타리오주 캐슬먼의 로리에 거리
- 온타리오주 록랜드의 로리에 스트리트
- 앨버타주 에드먼턴의 로리에 하이츠 인근 지역(로리에 드라이브 및 로리에 하이츠 학교 포함)
- 서스캐처원주 새스커툰 컨페더레이션 공원 인근 지역의 로리에 드라이브. 이 지역의 대부분의 거리는 전 캐나다 총리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 로리에-도리옹 지방 선거구(캐나다 정치인 앙투안에메 도리옹과 공유하는 영예)
- 로리에-생트마리 연방 선거구
- 온타리오주 워털루에 위치한 공립 대학인 윌프리드 로리에 대학교(이전에는 워털루 루터교 대학교로 알려짐), 브랜트포드와 밀턴에 캠퍼스가 있다.
- 몬트리올 지하철 역인 로리에역
- CCGS 윌프리드 로리에
- 오타와 시내의 명성 높은 호텔이자 국립 사적지인 샤토 로리에
- 온타리오주 마컴의 윌프리드 로리에 공립 학교
- 퀘벡주의 영어 학교 교육청인 윌프리드 로리에 스쿨 보드; 이 교육청은 퀘벡주의 라발, 로렌티드, 라노디에르 지역을 담당한다.
- 온타리오주 런던의 윌프리드 로리에 고등학교
- 온타리오주 오타와의 윌프리드 로리에 고등학교
- 온타리오주 스카버러의 윌프리드 로리에 대학 연구소
11. 대중문화 속에서의 모습
- 윌프리드 로리에는 4X 비디오 게임 시드 마이어의 문명 VI에서 캐나다 문명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12. 선거 기록
선거명 | 직책명 | 대수 | 정당 | 득표율 | 득표수 | 결과 | 당락 |
---|---|---|---|---|---|---|---|
1874년 선거 | 하원의원 (드럼몬드-아르타바스카 선거구) | 3대 | 캐나다 자유당 | 53.57% | 1,786표 | 1위 | 당선 |
1877년 선거 | 하원의원 (퀘벡 이스트 선거구) | 3대 | 캐나다 자유당 | 54.62% | 1,863표 | 1위 | 당선 |
1878년 선거 | 하원의원 (퀘벡 이스트 선거구) | 4대 | 캐나다 자유당 | 62.49% | 1,946표 | 1위 | 당선 |
1882년 선거 | 하원의원 (퀘벡 이스트 선거구) | 5대 | 캐나다 자유당 | 57.70% | 1,750표 | 1위 | 당선 |
1887년 선거 | 하원의원 (퀘벡 이스트 선거구) | 6대 | 캐나다 자유당 | 79.05% | 2,622표 | 1위 | 당선 |
1891년 선거 | 하원의원 (퀘벡 이스트 선거구) | 7대 | 캐나다 자유당 | 단독후보 | 무투표 | 1위 | 당선 |
1896년 선거 | 하원의원 (퀘벡 이스트 선거구) | 8대 | 캐나다 자유당 | 76.00% | 3,202표 | 1위 | 당선 |
1896년 선거 | 하원의원 (서스캐처원 선거구) | 8대 | 캐나다 자유당 | 46.06% | 988표 | 1위 | 당선 |
1896년 선거 | 하원의원 (퀘벡 이스트 선거구) | 8대 | 캐나다 자유당 | 단독후보 | 무투표 | 1위 | 당선 |
1900년 선거 | 하원의원 (퀘벡 이스트 선거구) | 9대 | 캐나다 자유당 | 81.33% | 3,598표 | 1위 | 당선 |
1904년 선거 | 하원의원 (퀘벡 이스트 선거구) | 10대 | 캐나다 자유당 | 71.35% | 3,524표 | 1위 | 당선 |
1904년 선거 | 하원의원 (라이트 선거구) | 10대 | 캐나다 자유당 | 61.39% | 3,250표 | 1위 | 당선 |
1908년 선거 | 하원의원 (퀘벡 이스트 선거구) | 11대 | 캐나다 자유당 | 70.83% | 3,764표 | 1위 | 당선 |
1908년 선거 | 하원의원 (오타와 선거구) | 11대 | 캐나다 자유당 | 26.53% | 6,584표 | 1위 | 당선 |
1911년 선거 | 하원의원 (퀘벡 이스트 선거구) | 12대 | 캐나다 자유당 | 단독후보 | 무투표 | 1위 | 당선 |
1911년 선거 | 하원의원 (쑬렁쥬 선거구) | 12대 | 캐나다 자유당 | 53.64% | 1,045표 | 1위 | 당선 |
1917년 선거 | 하원의원 (퀘벡 이스트 선거구) | 13대 | 캐나다 자유당 | 92.53% | 6,957표 | 1위 | 당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