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 William Carey영어, 1761년 8월 17일 - 1834년 6월 9일)는 영국의 침례교 선교사, 목사이자 번역가, 사회 개혁가, 그리고 문화 인류학자이다. 그는 세람푸르 대학교와 인도 최초의 학위 수여 기관인 세람푸르 칼리지를 설립했으며, 세람푸르 선교 출판사를 공동 설립했다. 그는 "현대 선교의 아버지"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특히 인도 사회의 교육, 사회 개혁, 문화 이해 증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의 활동은 사티와 영아 살해 같은 잔혹한 관습을 폐지하고, 여성과 소외된 계층의 인권을 옹호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캐리는 여러 인도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고 문법서와 사전을 편찬하여 인도 언어학 발전에 기여했으며, 식물학에도 깊은 관심을 보여 인도 농업 개선에도 힘썼다. 그의 선교 활동은 단순한 종교 전파를 넘어 인도 사회 전반에 걸쳐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왔다는 평가를 받는다.
2. 초기 생애 및 배경
윌리엄 캐리는 영국 노샘프턴셔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언어와 자연 과학에 대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그의 종교적 회심은 훗날 그의 삶을 선교에 바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2.1. 출생과 가족
윌리엄 캐리는 1761년 8월 17일, 노샘프턴셔 폴러스퓨리 교구의 퓨리 엔드 마을에서 에드먼드와 엘리자베스 캐리 부부의 다섯 자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직조공이었다. 1781년, 캐리는 피딩턴의 세인트 존 더 뱁티스트 교회에서 고용주의 처제인 도로시 플래킷과 결혼했다. 윌리엄과는 달리 도로시는 글을 몰랐으며, 결혼 등록부에는 서명 대신 서투른 십자가 표시가 남아있다. 윌리엄과 도로시 캐리 사이에는 다섯 아들과 두 딸을 포함해 일곱 명의 자녀가 있었으나, 두 딸은 유아기에 사망했고 아들 피터도 다섯 살에 사망했다.
2.2. 어린 시절과 교육
캐리는 영국 성공회에서 자랐으며, 그가 여섯 살 때 아버지는 교구 서기 겸 마을 학교 교장이 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호기심이 많았고, 특히 식물학을 비롯한 자연 과학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언어에 대한 타고난 재능이 있어 스스로 라틴어를 독학했다. 14세에 캐리는 인근 피딩턴 마을의 구두장이에게 도제로 들어갔다. 그의 스승인 클라크 니콜스는 성공회 신자였으나, 다른 도제인 존 워는 비국교도였다. 워의 영향을 받아 캐리는 성공회를 떠나 인근 해클턴의 작은 회중 교회에 합류했다. 니콜스의 도제로 일하는 동안 그는 고전 교육을 받은 지역 직조공 토머스 존스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 고대 그리스어를 배웠다. 니콜스가 1779년에 사망하자 캐리는 지역 구두장이인 토머스 올드의 밑에서 일하게 되었다. 올드 또한 곧 사망하자 캐리는 그의 사업을 물려받았고, 이 시기에 그는 구두를 만들면서 틈틈이 히브리어, 이탈리아어, 네덜란드어, 프랑스어를 독학했다. 캐리는 자신의 미천한 출신을 인정하며 자신을 "구두 수선공"이라고 불렀다.
2.3. 종교적 회심과 초기 활동
1779년 2월 10일, 윌리엄 캐리는 19세의 나이에 한 기도 모임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며 기독교로 회심했다. 이후 그는 침례교에 귀의하여 1783년 10월 5일, 존 라일랜드 목사에게 침례를 받았다. 그는 새로 결성된 지역 침례교 협회에 참여하여 존 라일랜드, 존 서트클리프, 앤드루 풀러와 같은 인물들과 교류하며 깊은 우정을 쌓았다. 이들은 캐리를 격주 일요일마다 인근 얼스 바턴 마을 교회에서 설교하도록 초청했다. 1785년, 캐리는 몰튼 마을의 학교 교사로 임명되었고, 지역 침례교회의 목사로도 봉사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목사의 삶에 대한 기록》과 탐험가 제임스 쿡의 일지를 읽으며 전 세계에 복음을 전파하는 것에 대한 열정을 키웠다. 특히 존 엘리엇과 데이비드 브레이너드는 캐리의 "성인화된 영웅"이자 "선교 열정을 불어넣은 인물"이 되었다. 1789년, 캐리는 레스터의 하비 레인 침례교회의 전임 목사가 되었다.
3. 선교 소명과 영국에서의 활동
윌리엄 캐리는 신학적 영감을 통해 해외 선교에 대한 깊은 열정을 품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선교적 비전을 담은 기념비적인 저서를 통해 기독교인들의 선교 의무를 역설했으며, 이는 현대 선교 운동의 효시가 된 침례교 선교회 설립으로 이어졌다.
3.1. 신학적 영향과 선교 열정
캐리의 선교 열정은 조나단 에드워즈의 저술과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일지, 그리고 탐험가 제임스 쿡의 항해 일지를 읽으면서 깊어졌다. 특히 브레이너드의 삶은 그에게 아메리카 원주민 선교에 대한 영감을 주었다. 1781년 그의 친구 앤드루 풀러가 쓴 《모든 사람을 위한 복음》이라는 소책자는 당시 침례교회 내에 만연했던 극단적인 칼뱅주의적 예정론에 반박하며 모든 사람이 복음에 응답할 수 있다는 입장을 제시했다. 1786년 목회자 회의에서 캐리가 "전 세계에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모든 기독교인의 의무인가?"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존 라일랜드 목사의 아버지는 "젊은이, 앉으시오. 하나님이 이교도를 회심시키실 뜻이 있다면, 당신이나 나 같은 사람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 하실 것이오"라고 말하며 선교 노력에 대한 강한 저항을 드러냈다. 그러나 캐리는 이러한 반대에 굴하지 않고 선교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발전시켜 나갔다.
3.2. "기독교인의 의무에 관한 연구"
1792년, 캐리는 선교에 대한 그의 기념비적인 선언문인 《이교도 개종을 위한 수단을 사용하는 기독교인의 의무에 대한 연구》(An Enquiry into the Obligations of Christians to use Means for the Conversion of the Heathens)를 출판했다. 이 짧은 책은 다섯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부분은 선교 활동의 신학적 정당성을 주장하며, 예수의 명령(마태복음 28:18-20)이 모든 기독교인에게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두 번째 부분은 초기 교회부터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와 존 웨슬리에 이르는 선교 활동의 역사를 개괄한다. 세 번째 부분은 26페이지에 걸쳐 전 세계 각국의 면적, 인구, 종교 통계를 담은 표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는 캐리가 학교 교사 시절 수집한 자료들이다. 네 번째 부분은 언어 학습의 어려움이나 생명의 위험과 같은 선교사 파송에 대한 반대 의견에 답한다.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 부분은 침례교단 내에 선교회 설립을 촉구하고, 이를 지원할 수 있는 실제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캐리의 이 선구적인 소책자는 기독교인의 의무, 가용 자원의 현명한 사용, 그리고 정확한 정보라는 그의 선교 기본 원칙을 제시했다.
캐리는 훗날 이사야서 54장 2-3절을 본문으로 삼아 선교를 옹호하는 설교(불멸의 설교)를 했다. 이 설교에서 그는 자신의 가장 유명한 명언인 "하나님께로부터 위대한 것을 기대하라.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것을 시도하라"를 반복적으로 사용했다.
3.3. 침례교 선교회 설립
캐리는 선교 노력에 대한 저항을 마침내 극복했다. 1792년 10월, 이교도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특정 침례교회 협회(Particular Baptist Society for the Propagation of the Gospel Amongst the Heathen)가 설립되었다. 이 단체는 훗날 BMS 월드 미션으로 알려진 침례교 선교회(Baptist Missionary Society)가 되었다. 윌리엄 캐리, 앤드루 풀러, 존 라일랜드, 존 서트클리프가 창립 회원으로 참여했다. 이들은 기금 모금과 선교 활동 방향 결정 등 실제적인 문제에 집중했다. 당시 콜카타에 있다가 기금 모금을 위해 영국에 와 있던 의료 선교사 존 토머스 박사를 지원하고, 캐리가 그와 함께 인도로 가기로 합의했다.
4. 인도에서의 선교 활동
윌리엄 캐리는 인도로 향하는 여정에서부터 수많은 난관에 부딪혔다. 그러나 그는 조슈아 마쉬먼, 윌리엄 워드와 함께 '세람푸르 트리오'를 결성하여 세람푸르를 선교의 거점으로 삼고, 교육과 사회 개혁 활동을 통해 인도 사회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의 개인적인 삶은 아내의 정신 질환과 자녀 양육의 어려움 등 고난으로 점철되었지만, 그는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4.1. 인도행과 초기 어려움

1793년 4월, 캐리는 장남 펠릭스, 그리고 토머스와 그의 아내 및 딸과 함께 런던에서 영국 선박을 타고 출항했다. 당시 넷째 아들을 임신 중이었고 집에서 몇 마일 이상 벗어나 본 적이 없었던 도로시 캐리는 처음에는 영국을 떠나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출발 직전 다시 요청하자 언니 키티가 출산을 돕는다는 조건으로 동의했다. 도중에 와이트섬에서 배가 지연되었는데, 이때 선장은 선교사들을 콜카타로 데려갈 경우 영국 동인도 회사의 무역 독점을 위반하여 지휘권을 위태롭게 할 수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선교사들을 두고 항해하기로 결정했고, 이들은 6월까지 지연되었다가 토머스가 통행을 허락할 덴마크인 선장을 찾았다. 그 사이에 출산한 캐리의 아내는 언니와 함께 가는 조건으로 동행하기로 했다. 이들은 11월에 콜카타에 상륙했다.
콜카타에서의 첫 해 동안 선교사들은 스스로 생계를 유지하고 선교 기지를 설립할 장소를 찾았다. 또한 현지인들과 소통하기 위해 벵골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토머스의 친구가 두 개의 인디고 공장을 소유하고 있었고 관리자가 필요했기 때문에 캐리는 가족과 함께 서쪽 미드나포르로 이주했다. 캐리가 인디고 공장을 관리했던 6년 동안 그는 벵골어 신약성경의 첫 개정을 완료했으며, 공동 생활, 재정적 자립, 현지 목회자 양성 등 선교 공동체를 구성할 원칙들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그의 아들 피터가 이질로 사망했고, 이는 다른 스트레스 요인과 함께 도로시가 정신 쇠약에 시달리게 되는 원인이 되었으며, 그녀는 이 병에서 결코 회복되지 못했다.
한편, 선교회는 더 많은 선교사들을 인도로 파송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도착한 사람은 존 파운틴으로, 그는 미드나포르에 도착하여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어서 인쇄공 윌리엄 워드, 학교 교사 조슈아 마쉬먼, 마쉬먼의 학생 중 한 명인 데이비드 브런스던, 그리고 도착 3주 만에 사망한 윌리엄 그랜트가 합류했다. 동인도 회사가 여전히 선교사들에게 적대적이었기 때문에, 이들은 덴마크령 인도의 세람푸르 식민지에 정착했으며, 1800년 1월 10일 캐리도 그곳에 합류했다. 1796년, 캐리는 포르투갈인에게 세례를 베풀며 그의 첫 개종자를 얻었다.
4.2. 세람푸르 트리오와 선교 기지
세람푸르에 정착한 후, 선교회는 모든 가족과 학교를 수용할 수 있을 만큼 큰 집을 구입했는데, 이는 그들의 주요 생계 수단이 되었다. 워드는 캐리가 구한 중고 인쇄기로 인쇄소를 차리고 벵골어 성경 인쇄 작업을 시작했다. 1800년 8월 파운틴이 이질로 사망했다. 그해 말까지 선교회는 첫 번째 개종자인 힌두교도 크리슈나 팔을 얻었다. 이들은 또한 지역 덴마크 정부와 당시 인도 총독이었던 리처드 웰즐리의 호의를 얻었다.
1799년 5월, 윌리엄 워드와 한나 마쉬먼, 조슈아 마쉬먼이 영국에서 도착하여 캐리의 사역에 합류했다. 이 세 남자는 세람푸르 트리오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들은 세람푸르를 선교 거점으로 삼아 선교 기지 네트워크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1801년 브런스던과 토머스가 사망했다.
4.3. 초기 선교 활동과 개종자

세람푸르 선교회는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설립하여 읽기, 쓰기, 회계 및 기독교를 가르쳤다. 이들은 또한 유럽인 자녀들을 위한 학교를 여러 차례 설립하고, 동인도 회사 직원 등 영국 공무원들에게 벵골어를 가르쳤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선교 비용을 충당할 수 있었다. 성경 번역은 최우선 과제였으며, 30년 동안 이들은 성경 전체를 6개 언어로 번역하고, 성경의 특정 부분은 26개 언어로 번역했다. 세람푸르 트리오의 이러한 노력은 인도에서 기독교가 발전하는 데 매우 중요한 첫걸음이 되었다. 캐리는 가능한 한 넓고 빠르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여러 마을을 방문하고 갠지스강 유역, 오리사, 심지어 미얀마까지 선교 거점을 설립했다. 그의 목표는 가능한 한 빨리 자립적인 인도인 교회를 세우는 것이었다.
4.4. 사회 개혁 활동
캐리는 인도 사회의 잔혹한 관습들을 개선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했다. 그는 특히 사티 (남편이 죽으면 아내가 함께 불에 타는 관습) 폐지 운동에 앞장섰다. 그는 힌두교 학자들과 상의하여 이러한 관습이 힌두교 경전에 근거가 없음을 확인한 후, 총독에게 영아 살해와 사티 관습을 중단하도록 설득하는 데 영향력을 행사했다. 사티는 1829년에 마침내 폐지되었다.
또한, 캐리는 카스트 제도의 폐지를 지지했다. 1802년, 수드라 계급의 크리슈나 팔의 딸이 브라만과 결혼했는데, 이 결혼식은 교회가 카스트 차별을 거부한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보여주는 시위였다. 캐리는 인도 농업 개선에도 관심을 보여 1820년 콜카타 알리포르에 인도 농업 원예 협회를 설립하고, 영국에서 과일나무를 수입하는 등 농업 기술 향상을 위해 노력했다. 그의 이러한 사회 개혁 활동은 소외된 계층과 여성의 인권 증진에 대한 그의 깊은 관심을 보여준다.
4.5. 개인적인 삶과 가정사

인도에서의 선교 활동 중 캐리의 개인적인 삶은 많은 어려움으로 점철되었다. 그의 아내 도로시 캐리는 넷째 아들 피터가 이질로 사망한 충격과 인도 생활의 어려움으로 인해 정신 쇠약을 겪었으며, 결국 회복하지 못했다. 도로시의 정신 질환은 선교 활동에 큰 부담이 되었고, 그녀의 상태는 "가장 고통스러운 흥분 상태에 자주 빠지는 미친 아내가 바로 옆방에 있는 동안" 캐리가 연구와 번역에 몰두해야 하는 상황을 만들었다. 여러 친구와 동료들이 도로시를 정신병원에 입원시키도록 권유했지만, 캐리는 그곳에서 아내가 받을 처우를 우려하여 가족의 품에 두는 책임을 감당했다. 심지어 1795년 10월 5일 영국에 있는 누이들에게 "나는 한동안 생명을 잃을 위험에 처해 있었다. 질투심이 그녀의 마음을 괴롭히는 큰 악이다"라고 편지를 쓰기도 했다.
도로시의 정신 쇠약은 다른 가족 문제로 이어졌다. 1800년에 조슈아 마쉬먼이 캐리의 네 아들(4세, 7세, 12세, 15세)을 처음 만났을 때, 그들은 예의 없고, 규율이 없으며, 교육받지 못한 상태였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마쉬먼은 캐리가 그들을 방치했다고 기록했다. 한나 마쉬먼은 "이 선량한 남자는 아이들이 버릇없어지는 것을 보고 한탄했지만, 너무 온순해서 그들을 바로잡을 수 없었다"고 썼다. 한나와 그녀의 남편, 그리고 윌리엄 워드는 캐리의 아들들을 다시 규율 있는 삶으로 이끌었다. 이들은 캐리가 식물 재배, 선교 활동, 그리고 포트 윌리엄 칼리지에서 강의하기 위해 콜카타를 오가는 동안 아이들에게 규율, 교육, 그리고 공감을 제공했다. 캐리의 아들들이 유용한 인물로 성장한 것은 주로 이 친구들 덕분이었다.
도로시 캐리는 1807년에 사망했다. 1년 후인 1808년, 캐리는 재혼했다. 그의 새 아내 샬럿 룸호르(Charlotte Rhumohr)는 덴마크 출신으로, 도로시와는 달리 캐리와 지적으로 동등한 사람이었다. 그들은 13년 동안 결혼 생활을 유지하다가 샬럿이 1821년에 사망했다. 샬럿이 사망한 후, 그의 장남 펠릭스도 사망했다. 1823년, 캐리는 세 번째로 그레이스 휴즈(Grace Hughes)라는 과부와 결혼했다.
1812년, 인도로 향하던 미국 회중 교회 선교사 아도니람 저드슨은 캐리와의 만남을 준비하며 침례에 관한 성경을 연구했다. 그의 연구는 그를 침례교도로 이끌었다. 캐리가 미국 침례교도들에게 저드슨 선교를 지원하도록 촉구하면서 1814년 미국 최초의 침례교 선교 위원회인 '미국 해외 선교를 위한 침례교 교단 총회'가 설립되었는데, 이는 훗날 삼년회로 알려지게 되었다. 오늘날 대부분의 미국 침례교 교단은 이 총회에서 직간접적으로 파생되었다.
선교회 내부에서는 회원 수가 늘어나고, 나이 든 선교사들이 사망하며 경험이 부족한 새로운 선교사들로 대체되면서 내부 불화와 불만이 커졌다. 일부 신임 선교사들은 기존의 공동 생활 방식을 따르려 하지 않았고, 심지어 "별도의 집, 마구간, 하인"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었다. 캐리, 워드, 마쉬먼의 엄격한 직업 윤리에 익숙하지 않았던 신임 선교사들은 선배들, 특히 마쉬먼을 독재적이라고 여겼고, 자신들이 원치 않는 일을 배정한다고 생각했다. 영국 선교회의 총무였던 앤드루 풀러는 1815년에 사망했으며, 그의 후임자인 존 다이어는 선교회를 사업 방식으로 재편하고 영국에서 세람푸르 선교의 모든 세부 사항을 관리하려 했던 관료였다. 이들의 의견 차이는 화해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고, 캐리는 자신이 설립했던 선교회와의 관계를 공식적으로 단절하고 선교 재산을 남겨둔 채 대학 부지로 이사했다. 그는 1834년 사망할 때까지 벵골어 성경을 개정하고 설교하며 학생들을 가르치며 조용한 삶을 살았다. 그가 1834년 6월 9일에 사망한 소파는 현재 옥스퍼드 대학교 침례교 사립 기숙사인 리젠트 파크 칼리지에 보관되어 있다.
5. 학문 및 저술 활동
윌리엄 캐리는 인도에서 선교 활동을 하는 동시에 방대한 학문적 업적을 남겼다. 그는 다양한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고 문법서와 사전을 편찬하여 인도 언어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으며, 인도 최초의 학위 수여 대학인 세람푸르 대학교를 설립하여 고등 교육의 기틀을 마련했다. 또한 식물학에 대한 깊은 관심으로 인도 농업 발전에도 기여했다.
5.1. 성경 번역 및 언어학적 업적
캐리는 벵골어는 물론 다른 많은 인도 방언과 고대 언어인 산스크리트어 연구에 많은 노력과 시간을 할애했다. 그는 포트 윌리엄 칼리지와 협력하여 라마야나를 시작으로 힌두교 고전들을 영어로 번역했다. 이후 그는 성경을 벵골어, 오리야어, 마라티어, 힌디어, 아삼어, 산스크리트어로 번역했으며, 다른 방언과 언어로도 일부를 번역했다. 그가 사망하기 전에는 우르두어, 아랍어, 페르시아어 성경 번역도 완료했다. 캐리는 30년 동안 포트 윌리엄 칼리지에서 벵골어, 산스크리트어, 마라티어 교수로 재직했으며, 1805년에는 최초의 마라티어 문법서를 출판했다. 그는 또한 벵골어와 산스크리트어 문법서를 저술했으며, 산스크리트어 성경 번역을 시작했다. 그의 동료 중 한 명은 마단 모한으로, 그에게 산스크리트어를 가르쳤다. 1808년에는 산스크리트어 신약성경을 출판했으며, 1809년 6월 24일에는 벵골어 성경(구약 및 신약) 번역을 완료했다. 1811년에는 마라티어 신약성경을 출판했고, 1815년에는 펀자브어 신약성경을 출판했다. 1818년에는 산스크리트어 구약성경을 출판했으며, 1820년에는 마라티어 구약성경을 출판했다. 1825년에는 벵골어-영어 사전을 완성했다.
캐리가 설립한 세람푸르 선교 출판사는 "인도인들의 불규칙하고 소외된 언어를 위해 값비싼 활자를 주조하는 것이 충분히 중요하다고 일관되게 생각한 유일한 인쇄소"로 평가받는다. 캐리와 그의 팀은 초등학생, 대학생, 일반 대중을 위한 교과서, 사전, 고전 문학 및 기타 출판물을 제작했으며, 후대 출판물의 모델이 된 최초의 체계적인 산스크리트어 문법서도 포함된다.
5.2. 저술 및 출판물
캐리는 성경 번역 외에도 다양한 저술 및 출판 활동을 펼쳤다.
- 《이교도 개종을 위한 수단을 사용하는 기독교인의 의무에 대한 연구》(An Enquiry into the Obligations of Christians to Use Means for the Conversion of the Heathens, 1792): 특정 침례교인들에게 해외 선교에 참여할 것을 촉구하는 선언문이다.
- 《벵골어 습득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대화》(Dialogues Intended to Facilitate the Acquiring of the Bengalee Language, 1818): 벵골어 학습을 돕기 위한 책이다.
- 《세람푸르 서한》(Serampore Letters, 1892): 1800년부터 1816년까지 캐리와 존 윌리엄스 등 다른 인물들 간의 미출판 서신 모음이다.
- 《벵골 식물 목록》(Hortus Bengalensis, 1814): 캐리가 편집하고 출판한 책이다.
- 《인도 식물》(Flora Indica, 1832): 캐리가 편집하고 출판한 책이다.
- 《윌리엄 캐리의 일지와 선별된 서신》(The Journal and Selected Letters of William Carey): 선교의 가치, 선교 전략, 선교 지원에 대한 글을 포함한다.
1812년 3월 11일, 인쇄소에 화재가 발생하여 1.00 만 GBP의 피해를 입고 많은 원고가 소실되었다. 손실된 원고 중에는 캐리의 산스크리트 문학 번역본과 산스크리트어 및 관련 언어의 다국어 사전 등 대체 불가능한 자료들이 많았는데, 이는 완성되었다면 언어학 분야의 기념비적인 업적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쇄기 자체와 활자는 보존되었고, 선교회는 6개월 만에 인쇄 작업을 재개할 수 있었다. 캐리의 생애 동안 선교회는 성경 전체 또는 일부를 44개 언어와 방언으로 인쇄하고 배포했다.
5.3. 세람푸르 대학교 설립
1818년, 세람푸르 선교회는 성장하는 교회를 위해 현지 목회자를 양성하고, 카스트나 국적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에게 예술 및 과학 교육을 제공하기 위해 세람푸르 칼리지를 설립했다. 1827년, 덴마크의 프레데리크 6세 국왕은 이 대학에 왕실 헌장을 부여하여 아시아 최초의 학위 수여 기관으로 만들었다. 1826년, 인도 정부는 캐리의 교육 활동에 대한 '지원금 규정'을 승인했다.
5.4. 식물학에 대한 관심
캐리는 식물학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으며, 1820년 콜카타 알리포르에 인도 농업 원예 협회를 설립했다. 윌리엄 록스버그가 휴가를 떠났을 때, 캐리는 콜카타 식물원을 관리하는 임무를 맡기도 했다. 식물 속명인 Careya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그는 1823년에 런던 린네 학회의 회원이 되어 식물학자로서도 활발히 활동했다.
6. 사상과 신학
윌리엄 캐리의 신학적 관점은 그의 선교 활동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그의 후천년설적 종말론은 전 세계적인 복음 전파에 대한 그의 열정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6.1. 후천년설적 종말론
캐리는 칼뱅주의자이자 후천년설 신봉자였다. 그의 후천년설적 종말론은 그의 주요 선교 선언문인 《이교도 개종을 위한 수단을 사용하는 기독교인의 의무에 대한 연구》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신학적 관점은 그가 전 세계적인 복음 전파를 통해 영광스러운 복음의 황금기가 도래할 것이라고 믿게 했으며, 이는 초기 선교 운동에 참여한 모든 이들을 움직인 원동력이 되었다. 그의 종말론적 관점은 선교 열정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캐리의 첫 번째 아내에 대한 제임스 벡의 전기에서는 그의 개인적인 낙관주의가 언급되지만, 후천년설 신학에서 파생된 세계 선교에 대한 그의 낙관적인 관점은 다루지 않는다.
7. 유산과 평가
윌리엄 캐리는 "현대 선교의 아버지"로서 전 세계 기독교 선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활동은 인도 사회와 문화에 교육, 사회 개혁, 문화적 이해 증진 등 다방면에서 긍정적인 기여를 했으며, 그의 이름을 딴 수많은 기념 사업과 기관들이 그의 유산을 기리고 있다.
7.1. "현대 선교의 아버지"로서의 위상
캐리는 41년 동안 한 번도 휴가를 가지 않고 인도에서 사역했다. 비록 수백만 명의 인구 중 약 700명의 개종자를 얻는 데 그쳤지만, 그는 성경 번역, 교육, 사회 개혁 분야에서 인상적인 토대를 마련했다. 그는 "현대 선교의 아버지"이자 "인도 최초의 문화 인류학자"로 불린다. 그의 가르침, 번역, 저술 및 출판물, 교육 기관 설립, 그리고 사회 개혁에 대한 영향력은 "인도 문화가 하향세에서 상승세로 전환되는 전환점"을 만들었다고 평가된다. 비샬 망갈와디는 캐리가 "인도를 착취해야 할 외국이 아니라, 사랑하고 구원해야 할 하늘 아버지의 땅으로 보았다"고 평가하며, "신비주의가 가르치듯이 지성을 죽이는 대신 지성을 개발하고, 자연을 두려워하거나 달래거나 숭배하는 대신 이해하고 통제하며, 환상으로 여기며 멀리하는 대신 문학과 문화를 즐기는 것을 강조했다"고 덧붙였다. 캐리의 변화에 대한 열정적인 주장은 침례교 선교회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7.2. 인도 사회와 문화에 미친 영향
캐리는 인도 사회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특정 사회 계층의 자녀들만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당시 인도에서, 여학생 교육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시기에 여학생들을 포함한 공립학교 시스템을 시작했다. 그는 성경을 교과서로 사용하여 아이들이 읽기를 배우는 주일 학교를 설립했다. 1794년에는 자신의 비용으로 인도 최초의 초등학교로 여겨지는 학교를 열었다. 캐리의 노력은 훗날 기독교 현지어 교육 협회로 발전하여 인도 전역에 영어 교육을 제공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캐리의 인도 활동에 대한 보고서는 그의 배경, 개인적인 요인, 그리고 종교적 신념에 의해 영향을 받았으며, 복음주의적이고 식민주의적 이데올로기가 반영되어 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역사가들은 그의 보고서에서 인도가 묘사된 방식을 이러한 맥락에서 신중하게 검토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캐리와 그의 동료 윌리엄 워드의 논쟁적인 기록과 관찰은 극심한 빈곤과 전염병에 시달리던 공동체에서 이루어졌으며, 그들의 선교 목표에 비추어 인도 문화와 힌두교에 대한 시각을 형성했다. 이 보고서들은 외국 선교 활동에 대한 확신을 표명한 이들에 의해 작성되었으며, 인도 주민뿐만 아니라 유럽 관리들과 경쟁하는 기독교 단체들로부터도 반감을 샀던 외국인들의 경험을 묘사한다. 그들의 문화와 힌두교에 대한 설명은 물리적, 정치적, 영적으로 설교하기 어려웠던 벵골에서 형성되었다. 브라이언 K. 페닝턴은 캐리와 그의 동료들이 보고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 "자신들의 건강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에 시달리고, 생명이나 이성을 잃은 동료들을 끊임없이 상기하며, 자신들의 사회적 위치에 대해 불확실하고, 무관심에서부터 즐거움, 적대감에 이르는 다양한 반응을 보이는 군중에게 설교하면서,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어두운 의구심을 표현했다. 이는 분명히 그들의 얼룩진 유산의 일부이다: 피에 굶주리고 악마를 섬기는 광기 어린 힌두교를 날조한 것이다."
캐리는 동료 앵글로-인도인들에게 "식민지 목표와 양립할 수 있는 방식"으로 산스크리트어를 배우고 해석할 것을 권장하며, "그렇게 속고 있는 사람들의 귀를 얻기 위해서는 화자가 그 주제에 대해 우월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믿게 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산스크리트어 지식은 가치가 있다"고 썼다. 인도 역사가 V. 라오에 따르면, 캐리는 인도 문화에 대한 관용, 이해, 존중이 부족했으며, 인도 음악을 "혐오스럽다"고 묘사하고 "하나님께 불명예스러운" 관행을 떠올리게 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태도는 캐리와 그의 동료들이 저술한 문학에도 영향을 미쳤다.
7.3. 기념 사업 및 기관
윌리엄 캐리의 이름을 딴 수많은 교육기관과 단체들이 전 세계에 설립되어 그의 유산을 기리고 있다.
- 윌리엄 캐리 크리스천 스쿨(William Carey Christian School, 호주 시드니)
- 윌리엄 캐리 국제대학교(William Carey International University, 미국 캘리포니아 패서디나, 1876년 설립)
- 캐리 신학 대학(Carey Theological College,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밴쿠버)
- 캐리 침례교 칼리지(Carey Baptist College, 뉴질랜드 오클랜드)
- 캐리 침례교 그래머 스쿨(Carey Baptist Grammar School, 호주 멜버른)
- 캐리 칼리지(Carey College, 스리랑카 콜롬보)
- 윌리엄 캐리 대학교(William Carey University, 미국 미시시피 해티스버그, 1892년 설립)
- 캐리 침례교 칼리지(Carey Baptist College, 호주 퍼스)
- 캐리 미션(Carey Mission, 미국 미시간 서부 변경): 침례교 선교사 아이작 맥코이가 1822년 부족 선교를 위해 설립했다.
- 윌리엄 캐리 아카데미(William Carey Academy, 방글라데시 치타공): 유치원부터 12학년까지 교육한다.
- 윌리엄 캐리 기념 학교(William Carey Memorial School, 인도 세람푸르 후글리): 남녀 공학 영어 중등 학교이다.
- 윌리엄 캐리 국제 학교(William Carey International School, 방글라데시 다카): 2008년 8월 17일에 설립된 영어 중등 학교이다.
- 윌리엄 캐리 대학교(William Carey University, 인도 메갈라야)
- 캐리 침례교회(Carey Baptist Church, 영국 레딩)
8. 사망
윌리엄 캐리는 1834년 6월 9일, 인도 세람푸르에서 7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한 번도 영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인도에서 생을 마감했다.
9. 유물 및 소장품
윌리엄 캐리와 관련된 유물들은 여러 장소에 보존되어 그의 삶과 업적을 증언하고 있다. 캐리가 세례를 받고 소년 시절 다녔던 노샘프턴셔 폴러스퓨리의 세인트 제임스 교회에는 윌리엄 캐리 전시물이 있다. 노샘프턴셔 몰튼의 캐리 침례교회에도 윌리엄 캐리와 관련된 유물 전시와 그가 살았던 인근 오두막집이 보존되어 있다.
캐리가 인도로 떠나기 전 영국에서 마지막으로 봉사했던 레스터의 하비 레인 침례교회는 1921년 화재로 소실되었다. 인근에 있던 캐리의 오두막집은 1915년부터 캐리 기념 박물관으로 사용되었으나, 1968년 새로운 도로 시스템 건설을 위해 철거되었다. 이 박물관의 유물들은 레스터 찰스 스트리트의 센트럴 침례교회로 옮겨져 현재 윌리엄 캐리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옥스퍼드의 앵거스 도서관 및 기록 보관소는 캐리의 서신 중 가장 큰 단일 컬렉션을 소장하고 있으며, 그의 성경과 구두장이 가게 간판 등 수많은 유물들도 보관하고 있다. 윌리엄 캐리는 1807년 미국 브라운 대학교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수여받았으며, 벵골 아시아 학회의 회원이 되었다. 윌리엄 캐리 대학교 해티스버그 캠퍼스의 도넬 홀에 위치한 윌리엄 캐리 생애 및 업적 연구 센터에도 캐리 소유의 편지, 책 등 방대한 역사적 유물 컬렉션이 있다.
10. 관련 항목
- 세람푸르 트리오
- 윌리엄 캐리 국제대학교
- BMS 월드 미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