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월터 이먼스 알스턴(Walter Emmons Alston, Walter Emmons Alston월터 에먼스 앨스턴영어)은 1911년 12월 1일 오하이오주 베니스에서 태어나 1984년 10월 1일 사망한 미국의 야구 선수이자 감독이다. "스모키"(Smokey)라는 별명으로 잘 알려진 그는 1954년부터 1976년까지 23시즌 동안 브루클린 다저스와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의 감독을 맡았으며, 매년 1년짜리 계약을 갱신하는 독특한 방식으로 팀을 이끌었다.
알스턴은 차분하고 과묵한 성격으로 "조용한 남자"(the Quiet Man더 콰이어트 맨영어)라고 불리기도 했다. 선수 시절에는 메이저 리그에서 단 한 경기 출장에 그쳤지만, 마이너 리그에서 선수 겸 감독으로 활동하며 지도력을 키웠다. 특히 1946년에는 근대 야구에서 최초로 인종 통합을 이룬 프로 팀인 내슈아 다저스의 선수 겸 감독을 맡아 돈 뉴콤브와 로이 캄파넬라 같은 흑인 선수들을 지도했다.
메이저 리그 감독으로서 그는 다저스를 7번의 내셔널 리그 페넌트 우승과 4번의 월드 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다. 특히 1955년에는 브루클린 다저스 역사상 유일한 월드 시리즈 우승을 달성했다. 그는 총 2,063승(정규 시즌 2,040승, 포스트시즌 23승)을 기록하며 은퇴했으며, 6번의 '올해의 감독' 상을 수상했다. 또한 내셔널 리그 올스타 팀을 9번 감독하여 7번의 승리를 거두었다.
그의 등번호 24번은 1977년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의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었고, 1983년에는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하지만 그해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한 달간 입원했으며, 명예의 전당 헌액식에는 손자가 대리 참석했다. 그는 완전히 회복하지 못하고 1984년 10월 1일 7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알스턴은 여성 스포츠 기자들의 라커룸 출입 장벽을 허무는 데 기여하는 등 야구계 전반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는다.
2. 초기 생애
알스턴은 오하이오주 시골 지역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대부분을 농장에서 보냈다. 그의 별명 "스모키"는 고등학교 시절 투수로서 던진 빠른 패스트볼 때문에 붙여졌다.
2.1. 어린 시절과 교육
월터 이먼스 알스턴은 1911년 12월 1일 오하이오주 베니스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대부분을 오하이오주 모닝선의 한 농장에서 보냈으며, 십대 시절 가족과 함께 대어타운으로 이사했다. 그는 대어타운의 밀포드 타운십 고등학교에 다녔고, 고등학교 시절 투수로서 빠른 패스트볼 때문에 "스모키"라는 별명을 얻었다.
1929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오랜 여자친구였던 렐라 본 알렉산더와 결혼했다. 1935년에는 마이애미 대학교에서 산업 미술 및 체육 학위를 받고 졸업했다. 그는 대학 시절 재정적 어려움을 겪었으며, 당구를 쳐서 학비를 벌었다고 회고했다. 마이애미 대학교에서 야구와 농구 선수로 3년 동안 활약하며 학교의 상징적인 선수로 인정받았다.
2.2. 선수 경력
알스턴은 1935년 그린우드 치프스, 1936년 헌팅턴 레드버즈에서 내야수로 마이너 리그 경력을 시작했다. 1936년 헌팅턴 팀에서는 120경기에서 35개의 홈런을 기록했다. 그의 유일한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경기는 1936년 9월 27일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소속으로 조니 마이즈 대신 1루수로 출전한 것이었다. 그는 이 경기에서 한 번의 타석에 들어섰으나 삼진으로 물러났고, 2번의 수비 기회에서 1개의 실책을 기록했다. 그는 훗날 자신의 메이저 리그 선수 경력을 "1936년 카디널스에서 타석에 들어섰는데, 론 워니키가 나를 삼진시켰다. 그게 전부다."라고 간략하게 설명했다.
메이저 리그에 잠시 출전한 후 알스턴은 마이너 리그로 돌아갔다. 1937년 시즌은 휴스턴 버펄로스와 로체스터 레드윙스에서 뛰며 합산 타율 .229를 기록했다. 1938년에는 포츠머스 레드버즈에서 뛰며 타율 .311, 28홈런을 기록했고, 포츠머스는 구단 역사상 유일한 미들 애틀랜틱 리그 챔피언십을 우승했다. 1940년 포츠머스로 돌아와 28홈런을 치고 시즌 일부를 선수 겸 감독으로 활동했다. 이후 2시즌 동안 스프링필드 카디널스의 선수 겸 감독을 맡았고, 1942년에는 투수로 7경기에 등판하기도 했다. 1943년에는 1루수와 3루수로 로체스터에 복귀했고, 1944년과 1945년에는 트렌턴 패커스에서 선수 겸 감독을 지냈다. 트렌턴 패커스는 브루클린 다저스의 마이너 리그 팜 클럽이었는데, 알스턴은 세인트루이스에서 그를 선수로 영입했던 구단주 브랜치 리키에 의해 트렌턴의 감독직을 제안받았다.
트렌턴에서의 두 시즌 후, 알스턴은 20세기 미국에 기반을 둔 최초의 인종 통합 야구팀인 클래스 B 뉴잉글랜드 리그의 내슈아 다저스에서 선수 겸 감독을 맡았다. 알스턴은 흑인 다저스 유망주인 돈 뉴콤브와 로이 캄파넬라를 지도했으며, 1946년 내슈아를 뉴잉글랜드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다. 알스턴은 훗날 인종 문제에 대해 크게 고려하지 않았고, 그저 그들이 팀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 생각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다음 시즌 푸에블로 다저스를 웨스턴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다. 이 두 경기가 그의 마지막 프로 선수 출전이었다. 13시즌의 마이너 리그 선수 경력 동안 알스턴은 타율 .295, 176홈런을 기록했다. 그러나 1945년까지 마이너 리그 최고 등급이었던 클래스 AA에서는 535타석에서 타율 .239에 그쳤다.
3. 감독 경력
알스턴의 감독 경력은 마이너 리그에서 시작하여 메이저 리그의 전설적인 감독으로 이어졌다.
3.1. 마이너 리그 감독
1948년 알스턴은 다저스의 클래스 AAA 제휴 팀인 세인트폴 세인츠를 86승 68패의 기록으로 이끌었다. 팀은 앨 로페스가 감독한 인디애나폴리스 인디언스에 14경기 뒤진 3위를 기록했다. 그해 알스턴은 로이 캄파넬라를 다시 지도했는데, 캄파넬라는 아메리칸 어소시에이션에서 인종 통합을 이뤘다. 언론은 캄파넬라를 기용하는 알스턴을 비판하며, 포수가 단순히 리그의 인종 통합을 위해 그곳에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캄파넬라는 35경기에서 13개의 홈런을 쳤고, 그가 다저스로 콜업되자 팬들은 실망했다. 1949년 세인츠는 93승 60패로 시즌을 마쳤고, 4명의 선수가 90개 이상의 타점을 기록했다. 팀은 인디애나폴리스에 0.5경기 앞서 1위를 차지했다. 야구 비시즌 동안 알스턴은 대어타운에서 교사로 일했다.
1950년부터 1953년까지 알스턴은 다저스의 또 다른 AAA 제휴 팀인 인터내셔널 리그의 몬트리올 로열스를 감독했다. 알스턴이 재임한 각 시즌 동안 팀은 86승에서 95승 사이를 기록했다. 1951년과 1952년 몬트리올 로열스는 인터내셔널 리그 페넌트를 우승했다. 1951년과 1953년 몬트리올은 거버너스 컵 플레이오프 토너먼트에서 우승했다. 알스턴은 수년 후인 2010년 인터내셔널 리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3.2. 브루클린 다저스 시절
알스턴은 1954년 시즌을 앞두고 브루클린 다저스의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그의 전임자인 척 드레슨은 2년 또는 3년 계약을 요구했으나 구단이 이를 거부하자 다저스를 떠났다. 드레슨은 3년 동안 두 번의 페넌트 우승을 차지했고 세 번째 우승에 근접했었다.
다저스 경영진 버찌 바바시는 알스턴이 브루클린 감독으로 고용되는 것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알스턴을 브루클린으로 데려온 것은 바바시의 팀 역사상 가장 큰 공헌으로 평가된다. 알스턴은 메이저 리그 수준에서는 무명이었고, 뉴욕 데일리 뉴스는 그의 고용 소식을 "월터 누구?"라는 헤드라인으로 보도했다.

곧바로 자신의 조용한 성격으로 알려진 알스턴은 때때로 "조용한 남자"로 불렸다. 알스턴의 성격은 훨씬 더 거침없었던 드레슨과 대조되었다. 스포츠 기자들은 그가 말을 많이 하지 않았기 때문에 처음에는 그에 대해 글을 쓰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또한 경기장 내 결정에 있어서 더 보수적인 모습을 보였는데, 이는 그가 마이너 리그에서 많은 선수들을 지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선수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돈 지머는 자신이 드레슨에게서 더 많은 것을 배웠고 드레슨이 알스턴보다 야구에 대해 더 많이 안다고 말했다. 재키 로빈슨 또한 그의 아내에 따르면 처음에는 알스턴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알스턴은 자신의 접근 방식에 대해 "나는 실수한 선수들을 즉석에서 비판한 적이 없다. 뭔가 화가 나면 항상 하룻밤 자고 나서 맑은 정신으로 상황에 대처하려 했다"고 말했다. 스포츠 기자 짐 머레이는 알스턴이 "빌리 그레이엄을 똑바로 쳐다보면서도 얼굴을 붉히지 않을 수 있고, 파리 레스토랑에서 옥수수 속대를 주문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라고 평했다. 1954년 다저스는 길 호지스와 듀크 스나이더가 각각 40개 이상의 홈런과 130개 이상의 타점을 기록하며 내셔널 리그 2위를 차지했다.
1955년 브루클린 다저스는 강한 출발을 보였지만, AP 통신 기사는 알스턴이 질문에 대해 과묵했으며 10연승을 거둔 감독처럼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브루클린 다저스는 내셔널 리그 페넌트를 우승하고 구단 역사상 유일한 월드 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그들은 9월 8일에 페넌트를 확정했는데, 이는 내셔널 리그 역사상 어떤 팀보다도 이른 시점이었다. 당시 다저스는 92승 46패로 2위 밀워키 브레이브스에 17경기 앞서 있었다. 월드 시리즈에서 알스턴은 정규 시즌 9승 10패로 평범한 기록을 가진 조니 포드리스를 3차전과 7차전에 선발 등판시켰고, 포드리스는 두 경기 모두 승리했다. 포드리스는 시즌 내내 팔 부상으로 고생했었다.
샌디 쿠팩스는 그 우승 시즌 동안 다저스의 투수로 부상했다. 알스턴은 쿠팩스의 초기 경력에서 그를 드물게 기용한 것에 대해 재키 로빈슨과 로이 캄파넬라 등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쿠팩스의 두 번째 메이저 리그 선발 등판에서 그는 2안타 완봉승을 거두며 14명의 타자를 삼진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은 쿠팩스에게 많은 기회를 가져다주지 못했다. 그 시즌 쿠팩스는 주로 구원 등판으로 12경기만 출전했으며, 이후 몇 시즌 동안 알스턴에 의해 드물고 일관성 없이 기용되었다. 수년 후, 쿠팩스의 팀 동료 돈 드라이스데일은 스포츠 기자 로저 칸에게 알스턴의 "잠재된 반유대주의"가 유대인인 쿠팩스가 젊은 투수 시절 기용된 방식에 영향을 미 미쳤을 것이라고 의심한다고 말했다.
1956년 팀은 내셔널 리그 챔피언 자리를 지켰다. 듀크 스나이더가 리그 최다인 43홈런과 최다 볼넷을 기록하며 팀을 강화했다. 1956년 월드 시리즈에서 처음 두 경기를 이겼음에도 불구하고, 다저스는 뉴욕 양키스에게 7차전에서 패했다. 1957년 다저스는 84승 70패로 3위로 떨어졌는데, 이는 브루클린에서의 마지막 시즌이었다.
3.3.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시절
3.3.1. 초기 로스앤젤레스 시절

팀이 로스앤젤레스로 이전한 첫 시즌인 1958년, 다저스는 71승 83패로 7위에 머물렀다. 그 시즌 동안 알스턴에 대한 비판이 커지기 시작했지만, 그는 1959년 다저스를 월드 챔피언십으로 이끌었다. 1959년 팀의 6명의 선수가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했고, 22세의 돈 드라이스데일은 17승으로 팀 투수진을 이끌었다. 월리 문을 포함한 몇몇 로스앤젤레스 선수들은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에 알스턴을 우유부단하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문은 훗날 알스턴을 선수들에게서 "좋은 성과"를 이끌어낸 훌륭한 감독이라고 묘사했다.
1960년 내셔널 리그 올스타 팀을 감독하면서 알스턴은 밀워키 브레이브스 투수 워런 스판과 루 버뎃을 올스타 명단에서 제외하여 논란을 일으켰다. AP 통신은 이 누락이 당시 밀워키 감독이었던 드레슨에 대한 냉대였을 수 있다고 보도했다. 1960년 다저스는 4위로 시즌을 마쳤다. 이듬해에는 베테랑 듀크 스나이더가 팔 골절로 두 달을 결장한 후 팀은 2위를 기록했다. 1962년 내셔널 리그 페넌트 경쟁에서 다저스가 선두를 놓치자 알스턴과 코치 리오 듀로처가 해고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지만, 팀은 1963년을 위해 두 사람을 모두 유지했다.
다저스는 1963년 월드 시리즈에서 뉴욕 양키스를 4경기 만에 스윕하며 우승했다. 이는 양키스가 월드 시리즈에서 4경기 만에 패배한 첫 사례였다. 알스턴의 투수들은 뛰어난 활약을 펼쳤는데, 샌디 쿠팩스는 두 경기에서 23명의 타자를 삼진시키며 월드 시리즈 MVP를 수상했다. 4경기 동안 알스턴은 선발 투수 3명과 구원 투수 1명, 총 4명의 투수만을 기용했다. 1964년 팀은 80승 82패로 수년 만에 처음으로 패배 시즌을 기록했다. 알스턴은 1964년의 부진을 다음 시즌의 동기 부여로 삼았다. 1965년 시즌 전 스프링 트레이닝에서 그는 팀이 지난 시즌의 어려움을 잊지 않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다저스는 1965년 월드 시리즈에서 미네소타 트윈스와 맞붙었다. 알스턴은 10월 6일 개막전에서 에이스 투수 쿠팩스를 선발로 내세울 수 없었는데, 쿠팩스가 욤 키푸르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신 알스턴은 돈 드라이스데일을 기용했지만, 그는 고전하며 2와 3분의 2이닝 동안 7실점했다. 알스턴이 마운드에 올라 그를 교체하려 하자, 드라이스데일은 "지금쯤 제가 유대인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시겠죠"라고 비꼬았다. 팀은 첫 경기의 패배를 극복하고 7경기 만에 월드 시리즈에서 우승했다. 쿠팩스는 시리즈 동안 3경기에 출전하여 2번의 완봉승을 기록했다.
1960년대 알스턴의 다저스 팀은 드라이스데일과 쿠팩스의 강력한 투구 덕을 톡톡히 봤다. 1966년 두 선수는 스프링 트레이닝에 불참하며 각각 50.00 만 USD에 달하는 3년 계약을 요구했는데, 이는 당시 야구계에서 누구도 받지 못했던 금액이었다. 선수들은 결국 더 적은 금액으로 계약했다. 드라이스데일은 그해 고전했지만, 쿠팩스는 27승을 거뒀다. 다저스는 1966년 월드 시리즈에 진출했지만, 볼티모어 오리올스에게 스윕당했다. 쿠팩스는 아픈 팔을 진찰한 의사들의 권유로 시즌 후 은퇴했고, 드라이스데일은 3년 후에 은퇴했다. 두 선수 모두 메이저 리그 경력 전체를 알스턴 밑에서 뛰었다.
3.3.2. 말년 감독 생활

알스턴은 감독으로서의 마지막 8년 동안 매 시즌 최소 85승 이상을 기록했으며, 그 기간 동안 내셔널 리그 서부 지구에서 6번의 준우승을 차지했다. 1971년 팀은 지구 우승에 매우 근접했다. 1위와 11경기 차이로 뒤처졌던 팀은 시즌 후반에 좋은 성적을 거두며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 1경기 뒤진 채 시즌을 마쳤다. 1973년부터 알스턴의 팀은 스티브 가비, 데이비 로페스, 빌 러셀, 론 세이로 구성된 내야진을 구축했다. 이들은 알스턴의 재임 기간이 끝난 후에도 오랫동안 함께 8년 동안 활약했다.
1974년 다저스는 내셔널 리그 페넌트를 우승하고, 2년 연속 우승팀인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와 월드 시리즈에서 맞붙었다. 알스턴은 그 시즌에 마이크 마셜을 기록적인 106경기에 클로저로 기용했으며, 마셜은 사이 영 상을 수상했다. 알스턴은 마셜을 선발 투수로 기용하는 것을 고려하면서 언론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마셜은 결국 시리즈 5경기 모두에 출전하여 9이닝 동안 1실점했지만, 선발 등판하지는 않았다. 다저스는 4대 1로 패하며 애슬레틱스의 3연패를 허용했다. 1975년과 1976년 다저스는 각각 88승과 92승을 기록했지만, 두 시즌 모두 신시내티 레즈에 크게 뒤처졌다.
1970년대 중반 다저스 선수단 내부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구단 홍보팀이 스티브 가비를 집중적으로 홍보하자, 일부 팀 동료들은 그가 광고 기회를 너무 열심히 잡으려 한다고 생각하며 불만을 품었다. 1976년 6월 중순 샌 버나디노 선-텔레그램 기사에서 론 세이, 데이비 로페스 및 또 다른 익명의 선수가 가비를 비판했고, 이에 알스턴은 팀 미팅을 소집했다. 이 미팅에서 가비는 "누구든 저에 대해 할 말이 있다면, 지금 여기서 제 얼굴에 대고 말해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투수 토미 존은 이때부터 알스턴이 팀에 대한 통제력을 잃기 시작했다고 생각했다.
1976년 7월 17일, 그는 메이저 리그 역사상 5번째로 2,000승을 달성한 감독이 되었다. 1976년 9월, 알스턴은 시즌 종료 후 은퇴하겠다고 발표했다. 기자회견에서 그는 "나는 41년 동안 야구계에 있었고, 야구는 나에게 정말 좋았다. 오늘은 정말 큰 날이다. 생애 처음으로 골프에서 버디 3개를 잡았고, 이제 감독직에서 물러난다고 발표한다. 오늘 오후 피터 오말리에게 다른 사람에게 팀을 맡길 기회를 주라고 말했다"고 밝혔다. 토미 라소다가 그의 후임으로 지명되자, 알스턴은 라소다에게 시즌 마지막 4경기의 감독직을 넘겨달라고 요청했다. 알스턴은 총 2,063승(정규 시즌 2,040승, 포스트시즌 23승)을 기록하고 은퇴했다. 그는 6번이나 내셔널 리그 '올해의 감독'으로 선정되었다. 또한 내셔널 리그 올스타팀을 9번이나 지휘하여 이 중 7번의 경기에서 승리했다. 다년 계약이 늘어나던 시기에도 알스턴의 감독 경력은 23번의 1년 계약으로 이루어졌다. 그는 그 기간 동안 7번의 내셔널 리그 페넌트 우승을 차지했다.
스포츠 기자 레너드 코펫은 알스턴의 다저스 내 역할을 설명하며, 월터 오말리는 항상 "사장"으로 여겨졌고 알스턴은 경기장 내 팀 관리에 집중했다고 지적했다. 코펫은 알스턴의 충성심과 차분한 성격이 팀의 안정성에 기여했다고 말했다. 오말리는 한때 알스턴에 대해 "그는 짜증나게 하지 않는다. 당신을 짜증나게 하지 않는 감독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는가?"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4. 감독 통계
알스턴의 메이저 리그 감독 통계는 다음과 같다.
팀 | 연도 | 정규 시즌 | 포스트시즌 | |||||||
---|---|---|---|---|---|---|---|---|---|---|
경기 | 승리 | 패배 | 승률 | 순위 | 경기 | 승리 | 패배 | 결과 | ||
BKN | 1954 | 154 | 92 | 62 | .597 | NL 2위 | - | - | - | - |
BKN | 1955 | 154 | 98 | 55 | .641 | NL 1위 | 7 | 4 | 3 | 월드 시리즈 우승 (뉴욕 양키스) |
BKN | 1956 | 154 | 93 | 61 | .604 | NL 1위 | 7 | 3 | 4 | 월드 시리즈 패배 (뉴욕 양키스) |
BKN | 1957 | 154 | 84 | 70 | .545 | NL 3위 | - | - | - | - |
LAD | 1958 | 154 | 71 | 83 | .461 | NL 7위 | - | - | - | - |
LAD | 1959 | 156 | 88 | 68 | .564 | NL 1위 | 6 | 4 | 2 | 월드 시리즈 우승 (시카고 화이트삭스) |
LAD | 1960 | 154 | 82 | 72 | .532 | NL 4위 | - | - | - | - |
LAD | 1961 | 154 | 89 | 65 | .578 | NL 2위 | - | - | - | - |
LAD | 1962 | 165 | 102 | 63 | .618 | NL 2위 | - | - | - | - |
LAD | 1963 | 163 | 99 | 63 | .611 | NL 1위 | 4 | 4 | 0 | 월드 시리즈 우승 (뉴욕 양키스) |
LAD | 1964 | 164 | 80 | 82 | .494 | NL 7위 | - | - | - | - |
LAD | 1965 | 162 | 97 | 65 | .599 | NL 1위 | 7 | 4 | 3 | 월드 시리즈 우승 (미네소타 트윈스) |
LAD | 1966 | 162 | 95 | 67 | .586 | NL 1위 | 4 | 0 | 4 | 월드 시리즈 패배 (볼티모어 오리올스) |
LAD | 1967 | 162 | 73 | 89 | .451 | NL 8위 | - | - | - | - |
LAD | 1968 | 162 | 76 | 86 | .469 | NL 8위 | - | - | - | - |
LAD | 1969 | 162 | 85 | 77 | .525 | NL 서부 4위 | - | - | - | - |
LAD | 1970 | 161 | 87 | 74 | .540 | NL 서부 2위 | - | - | - | - |
LAD | 1971 | 162 | 89 | 73 | .549 | NL 서부 2위 | - | - | - | - |
LAD | 1972 | 155 | 85 | 70 | .548 | NL 서부 3위 | - | - | - | - |
LAD | 1973 | 162 | 95 | 66 | .590 | NL 서부 2위 | - | - | - | - |
LAD | 1974 | 162 | 102 | 60 | .630 | NL 서부 1위 | 9 | 4 | 5 | 월드 시리즈 패배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
LAD | 1975 | 162 | 88 | 74 | .543 | NL 서부 2위 | - | - | - | - |
LAD | 1976 | 158 | 90 | 68 | .570 | NL 서부 2위 | 시즌 중 사임 | |||
총계 | 3658 | 2040 | 1613 | .558 | 44 | 23 | 21 |
5. 평가 및 유산
알스턴은 그의 차분하고 일관된 리더십 스타일과 야구계에 미친 긍정적인 영향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그의 감독 방식에 대한 일부 비판과 논란도 존재했다.
5.1. 긍정적 평가
알스턴은 그의 차분하고 과묵한 태도로 "조용한 남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선수들을 즉석에서 비판하지 않고, 문제가 생기면 하룻밤 자고 나서 맑은 정신으로 대처하려 했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팀 내 안정성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전 다저스 선수 듀크 스나이더는 알스턴이 때때로 자신과 마찰을 겪었음을 인정하면서도, 알스턴이 자신이 감독한 각 팀의 특정 강점을 활용하는 데 탁월했다고 말했다.
스포츠 기자 레너드 코펫은 알스턴의 충성심과 차분한 성격이 다저스의 안정성에 기여했다고 언급했다. 구단주 월터 오말리는 알스턴에 대해 "그는 짜증나게 하지 않는다. 당신을 짜증나게 하지 않는 감독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는가?"라고 말하며 그의 성품을 높이 평가했다.
5.2. 비판 및 논란
알스턴의 감독 방식은 초기 선수들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다. 돈 지머는 알스턴보다 전임 감독 척 드레슨에게서 더 많은 것을 배웠고, 드레슨이 야구에 대해 더 많이 안다고 말했다. 재키 로빈슨 또한 그의 아내에 따르면 처음에는 알스턴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샌디 쿠팩스의 초기 기용 방식과 관련하여 논란이 있었다. 쿠팩스는 뛰어난 재능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알스턴에 의해 드물고 일관성 없이 기용되었는데, 이에 대해 로빈슨과 캄파넬라 등은 알스턴을 비판했다. 쿠팩스의 팀 동료 돈 드라이스데일은 알스턴의 "잠재된 반유대주의"가 유대인인 쿠팩스의 젊은 시절 기용 방식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고 의심하기도 했다.
1970년대 중반에는 다저스 선수단 내부에 균열이 발생하기도 했다. 스티브 가비가 구단 홍보팀에 의해 집중적으로 홍보되자, 일부 팀 동료들은 그가 개인적인 광고 기회를 너무 추구한다고 생각하며 불만을 품었다. 1976년 6월 중순 언론에서 가비에 대한 비판 기사가 나오자 알스턴은 팀 미팅을 소집했지만, 토미 존은 이때부터 알스턴이 팀에 대한 통제력을 잃기 시작했다고 평가했다.
5.3. 영향력
알스턴은 야구계에 여러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는 1946년 내슈아 다저스의 선수 겸 감독으로 활동하며 돈 뉴콤브와 로이 캄파넬라 등 흑인 선수들을 지도했는데, 이는 20세기 미국에 기반을 둔 최초의 인종 통합 야구팀이었다. 알스턴은 인종 문제에 대한 깊은 고민보다는 단순히 팀에 도움이 되는 선수들을 기용한다는 실용적인 관점에서 이들을 지도했다.
또한 알스턴은 여성 스포츠 기자들의 취재 장벽을 허무는 데 기여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1974년 10월 1일, 다저스가 휴스턴 애스트로스를 꺾고 애스트로돔에서 내셔널 리그 서부 지구 우승을 확정 지은 후, 알스턴은 기자회견을 위해 아니타 마티니를 라커룸으로 초청했다. 그녀는 메이저 리그 라커룸에 출입이 허용된 최초의 여성 기자가 되었다.
6. 사후 기념
알스턴은 사망 후에도 야구계와 고향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추모되고 기념되었다.
6.1. 수상 및 명예
다저스는 알스턴이 감독직에서 물러난 이듬해인 1977년 그의 등번호 24번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다. 그는 당시 다저스 역사상 네 번째로 이러한 영예를 안은 인물이었다. 1983년에는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그는 6번의 내셔널 리그 '올해의 감독'으로 선정되었으며, 내셔널 리그 올스타 팀을 9번 지휘하여 이 중 7번의 경기에서 승리했다. 2010년에는 인터내셔널 리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1999년에는 오하이오주 주립 고속도로 177번이 그의 이름을 따 '월터 "스모키" 알스턴 기념 고속도로'로 명명되었다.
6.2. 사망 및 추모

알스턴은 1983년 심근경색을 겪고 한 달간 입원했으며, 명예의 전당 헌액식에는 건강상의 이유로 참석하지 못하고 손자가 대신 참석했다. 그는 완전히 회복하지 못하고 1984년 10월 1일 오하이오주 옥스퍼드의 병원에서 심근경색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향년 72세였다. 장례식장 대변인은 알스턴이 심근경색 이후 계속 투병 중이었다고 밝혔다. 그는 오하이오주 대어타운에 있는 대어타운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알스턴의 사망 소식에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커미셔너 피터 유버로스는 그를 야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감독 중 한 명으로 칭했다. 전 다저스 스타 듀크 스나이더는 알스턴과 때때로 마찰이 있었음을 인정하면서도, 알스턴이 자신이 감독한 각 팀의 특정 강점을 활용하는 데 탁월했다고 말했다. 오랜 기간 다저스 경기 중계를 맡았던 빈 스컬리는 알스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추모했다.
"나는 항상 그가 인디언 영토를 가로지르는 역마차에서 총을 들고 호위할 수 있는 유형의 사람이라고 상상했다. 그는 진정한 사나이였고 키가 2 yd나 되었다. 그는 매우 조용하고, 매우 절제된 사람이었다. 그는 결코 변명하지 않았다. 그는 선수들에게 공을 돌리고 자신은 비난을 감수했다. 그는 너무나 견고하고, 너무나 미국적이었다."
알스턴을 기리는 기념비는 그의 고향인 대어타운의 밀포드 타운십 커뮤니티 공원에 위치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