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프로 데뷔
버뎃은 1926년 11월 22일 웨스트버지니아주 니트로에서 태어났다. 그는 1947년 뉴욕 양키스와 계약을 맺고 프로 경력을 시작했다. 1950년 9월, 그는 양키스 소속으로 두 차례 구원 등판하며 메이저 리그에 데뷔했다. 이후 1951년 8월, 4차례 시즌 20승을 달성한 투수 조니 세인과의 트레이드를 통해 보스턴 브레이브스로 이적하게 된다.
2. 메이저 리그 경력
메이저 리그 경력 동안 루이스 버뎃은 보스턴/밀워키 브레이브스에서 전성기를 보내며 괄목할 만한 기록을 세웠고, 이후 여러 팀을 거쳐 선수 생활을 마쳤다.
2.1. 보스턴/밀워키 브레이브스 시대
브레이브스 이적 후 버뎃은 좌완 워렌 스판과 우완 밥 불과 함께 메이저 리그에서 손꼽히는 선발 로테이션을 구축했다. 그는 1953년부터 1961년 사이에 8시즌 동안 15승 이상을 기록하며 꾸준한 활약을 보였다. 1956년에는 내셔널 리그 투수 중 평균자책점 2.70으로 1위에 올랐다.
1957년 월드시리즈에서 밀워키 브레이브스는 뉴욕 양키스를 상대로 우승을 차지했다. 버뎃은 이 시리즈에서 3번의 완투승을 거두며 37년 만에 이 기록을 달성한 투수가 되었고, 1905년 크리스티 매튜슨 이후 처음으로 2번의 완봉승(5차전과 7차전)을 기록했다. 특히 1차전과 4차전 선발이었던 워렌 스판이 독감에 걸리자, 버뎃은 이틀 휴식 후 7차전에 선발 등판하여 팀의 우승을 결정지었다. 이 활약으로 그는 월드시리즈 최우수 선수상을 수상하며 브레이브스의 43년 만의 우승이자 밀워키 역사상 유일한 월드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그러나 1958년 월드시리즈에서는 다시 양키스를 만났고, 버뎃은 3번의 선발 등판 중 2번 패배했다. 특히 7차전에서는 또다시 이틀 휴식 후 등판했는데, 이 결정에 대해 프레드 해니 감독은 광범위한 비판을 받았다. 결국 버뎃은 7차전에서 양키스에게 무너지며 팀은 양키스의 18번째 우승을 허용했다.
버뎃은 1958년 20승을 기록했으며, 1959년에는 워렌 스판과 함께 내셔널 리그 공동 1위인 21승을 달성했다. 또한 1956년과 1960년에 각각 19승, 1961년에 18승, 1957년에 17승을 기록하는 등 꾸준히 다승을 올렸다.
2.2. 주요 경기 및 기록
1959년 5월 26일, 버뎃은 피츠버그 파이리츠의 하비 해딕스가 12회까지 퍼펙트 게임을 이어가다 13회에 실점하여 패배한 경기에서 선발 투수로 맞붙었다. 이 경기에서 버뎃은 12개의 안타를 허용했음에도 불구하고 1대0 완봉승을 거두는 진기한 기록을 세웠다. 경기가 끝난 후 그는 "나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투수이다. 야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투구도 나를 이길 만큼 충분하지 않았으니, 나는 가장 위대해야 한다!"는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이듬해인 1960년 8월 18일, 버뎃은 밀워키 카운티 스타디움에서 열린 필라델피아 필리스와의 경기에서 델 크랜달과 배터리를 이뤄 노히트 노런을 달성했다. 그는 1대0으로 승리하며 최소 타자 수(27명)만을 상대했다. 5회에 몸에 맞는 공으로 출루했던 토니 곤잘레스는 곧바로 병살타로 아웃되며 유일한 출루를 기록했다. 버뎃은 8회에 직접 2루타를 치고 빌 브루턴의 2루타로 홈을 밟아 이 경기의 유일한 득점을 올리며 승리에 기여했다. 노히트 노런 달성 5일 후에는 3경기 연속 완봉승을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2.3. 선수 경력 후반
1963년, 버뎃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로 트레이드되어 1964년까지 뛰었다. 이후 1964년에는 시카고 컵스로, 1965년에는 필라델피아 필리스로 이적하며 여러 팀을 거쳤다. 1966년에는 캘리포니아 에인절스와 계약하여 1967년 은퇴할 때까지 팀의 구원 투수로만 등판했다.
3. 투구 스타일 및 특징
버뎃은 투구 전에 끊임없이 몸을 긁거나 유니폼을 만지작거리는 등 매우 산만한 투구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전 감독 프레드 해니는 그에 대해 "버뎃은 커피를 신경질 나게 할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손가락을 입술로 가져가거나 이마의 땀을 닦는 동작을 자주 반복했기 때문에 당시 금지되었던 스핏볼을 던진다는 소문에 휩싸였다. 1957년 시즌 2번째 경기 후, 당시 신시내티 레즈의 감독인 버디 테베츠는 버뎃을 "속임수 쓰는 스핏볼러"라고 비난했고, 이에 레즈의 단장 게이브 폴은 내셔널 리그에 공식 항의를 제기했다. 당시 내셔널 리그 회장 워렌 자일스는 투수가 공에 습기를 옮기지 않는 한 손을 적시는 것은 문제가 없다고 해명하며, "심판이나 그 누구도 버뎃이 스핏볼을 사용한다는 증거를 제시하지 않는 한,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밝혔다. 버뎃 자신은 이에 대해 "그것(스핏볼)은 내가 가진 최고의 구종이지만, 나는 그것을 던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스핏볼에 대한 소문은 계속 이어졌다. 돈 호크는 "스핏볼에서 물이 튀는 것을 단 한 번 보았는데, 그 공을 던진 사람이 바로 버뎃이었다"고 증언했다. 1967년 스포팅 뉴스는 "아마도 버뎃만큼 스핏볼에 대해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투수는 없을 것이다"라고 썼다. 뉴욕 타임스의 스포츠 기자 레드 스미스는 "버뎃에게는 승리, 패배, 그리고 상대 습도라는 3가지 투구 통계가 있어야 한다"고 비꼬기도 했다. 버뎃 자신도 이러한 평판을 언급하며 "그들이 공의 마른 쪽을 치기 시작해서" 은퇴했다고 농담을 던졌다.
4. 통산 기록
버뎃은 18년간의 선수 생활 동안 총 3067.1이닝을 소화하며 203승 144패, 1,074 탈삼진, 3.66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그는 158번의 완투와 33번의 완봉승을 달성했다.
그는 2번의 올스타전 (1957년, 1959년)에 출전하여 총 7이닝 동안 단 1실점만을 허용했다. 1956년에는 2.70의 평균자책점으로 내셔널 리그 투수 중 가장 낮은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또한 2차례 20승을 달성했으며, 2차례 내셔널 리그의 완봉승 선두를 기록했다(1956년, 1959년). 그는 승리, 평균자책점, 투구 이닝, 완투 부문에서 각각 한 번씩 내셔널 리그 1위에 올랐다. 브레이브스 구단 역사에서 그의 승리, 등판 경기 수, 투구 이닝 기록은 워렌 스판과 키드 니콜스에 이어 세 번째이다.
1958년 8월, 버뎃은 7승 1패, 평균자책점 1.89, 38 탈삼진의 뛰어난 성적을 기록하며 내셔널 리그 이달의 선수로 선정되었다. 그 전달에는 팀 동료인 투수 조이 제이가 이 상을 수상했다. 타자로서 버뎃은 통산 0.183의 타율(1,011타수 185안타), 75타점, 12홈런을 기록했다. 그의 첫 두 홈런은 1957년 한 경기에서 나왔으며, 이후에도 2개의 홈런을 친 경기가 두 차례 더 있었다. 그는 또한 1958년 월드시리즈 2차전에서 홈런을 쳤는데, 이는 1940년 버키 월터스 이후 처음으로 월드시리즈에서 홈런을 기록한 투수였다.
연도 | 팀 | 승 | 패 | 평균자책점 | 경기 | 완투 | 완봉 | 이닝 | 탈삼진 |
---|---|---|---|---|---|---|---|---|---|
1950 | 뉴욕 양키스 | 0 | 0 | 18.00 | 2 | 0 | 0 | 1 | 1 |
1951 | 보스턴 브레이브스 | 3 | 2 | 5.63 | 10 | 0 | 0 | 24 | 7 |
1952 | 보스턴 브레이브스 | 12 | 13 | 3.34 | 37 | 13 | 1 | 232 | 91 |
1953 | 밀워키 브레이브스 | 15 | 5 | 3.20 | 39 | 14 | 1 | 227.2 | 104 |
1954 | 밀워키 브레이브스 | 15 | 10 | 2.73 | 37 | 15 | 3 | 254.2 | 92 |
1955 | 밀워키 브레이브스 | 12 | 10 | 3.47 | 36 | 10 | 1 | 207.2 | 83 |
1956 | 밀워키 브레이브스 | 19 | 10 | 2.70 | 38 | 20 | 6 | 268 | 119 |
1957 | 밀워키 브레이브스 | 17 | 11 | 3.07 | 36 | 16 | 3 | 237.2 | 104 |
1958 | 밀워키 브레이브스 | 20 | 10 | 2.91 | 37 | 19 | 2 | 280.2 | 126 |
1959 | 밀워키 브레이브스 | 21 | 15 | 3.68 | 43 | 23 | 6 | 295 | 148 |
1960 | 밀워키 브레이브스 | 19 | 11 | 3.39 | 39 | 21 | 4 | 278.2 | 128 |
1961 | 밀워키 브레이브스 | 18 | 11 | 3.50 | 38 | 17 | 3 | 265 | 107 |
1962 | 밀워키 브레이브스 | 8 | 10 | 4.73 | 35 | 0 | 0 | 152.1 | 61 |
1963 |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 4 | 6 | 4.96 | 31 | 0 | 0 | 118 | 38 |
1964 |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 3 | 4 | 3.72 | 18 | 0 | 0 | 58 | 16 |
1964 | 시카고 컵스 | 0 | 2 | 1.64 | 10 | 0 | 0 | 22 | 10 |
1965 | 시카고 컵스 | 0 | 0 | 2.16 | 10 | 0 | 0 | 8.1 | 3 |
1965 | 필라델피아 필리스 | 0 | 0 | 3.38 | 3 | 0 | 0 | 2.2 | 0 |
1966 | 캘리포니아 에인절스 | 1 | 3 | 2.84 | 44 | 0 | 0 | 50.2 | 24 |
1967 | 캘리포니아 에인절스 | 0 | 4 | 4.81 | 23 | 0 | 0 | 24.1 | 12 |
5. 개인 생애 및 은퇴 후
버뎃은 1998년 플로리다 스포츠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며 그의 공로를 인정받았다.
1958년, 인기 TV 시리즈인 비버에게 맡기세요의 한 에피소드에서 버뎃이 언급되었다. 극 중 교장이 비버의 부모에게 보낸 편지를 보여주는 몇 장면에서 "루 버뎃이 방금 홈런을 쳤고, 밀워키가 시리즈에서 7대1로 앞서고 있습니다"라는 문구가 잠시 나타난다. 같은 해 버뎃은 A면에는 "Three Strikes and You're Out", B면에는 "Mary Lou"라는 두 곡의 로커빌리 음악을 담은 싱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버뎃의 손자인 놀런 폰태나는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에서 뛰었던 전직 프로 야구 선수이다.
6. 사망
셀바 루이스 버뎃 주니어는 2007년 2월 6일, 80세의 나이로 플로리다주 윈터가든에서 폐암으로 사망했다.
7. 평가 및 영예
루이스 버뎃은 그의 오랜 선수 경력과 뛰어난 업적으로 야구 역사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특히 그의 침착한 제구력과 월드시리즈에서의 압도적인 활약은 그를 밀워키 브레이브스의 상징적인 선수로 만들었다.
그에게 부여된 주요 영예는 다음과 같다.
- 월드시리즈 최우수 선수상: 1957년
- 올스타 선정: 1957년, 1959년
- 사이 영 상 투표 3위: 1958년
- 내셔널 리그 최다 승 투수: 1959년
- 내셔널 리그 최다 선발 등판: 1959년
- 내셔널 리그 최다 완투: 1960년
- 내셔널 리그 최다 완봉승: 1956년, 1959년 (2회)
- 리그 승리 부문 상위 4위 내 진입: 1956년~1958년, 1960년~1961년 (5회)
- 이달의 선수: 1958년 8월
- 베이브 루스상: 1957년
- 플로리다 스포츠 명예의 전당 헌액: 199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