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움베르토 아녤리(Umberto Agnelli움베르토 아녤리이탈리아어, 1934년 11월 1일 ~ 2004년 5월 27일)는 스위스 로잔에서 태어난 이탈리아의 저명한 기업인이자 정치인이다. 그는 아녤리 가문의 일원으로, 에두아르도 아녤리와 비르지니아 부르봉 델 몬테의 셋째 아들이자 막내이며, 잔니 아녤리의 동생이다.
아녤리는 1970년부터 1976년까지 이탈리아 자동차 제조업체 피아트의 최고 경영자(CEO)를 역임했으며, 형 잔니 아녤리 사망 후 2003년부터 2004년 사망 시까지 피아트 그룹의 회장을 잠시 맡았다. 또한 그는 오랫동안 피아트 및 아녤리 가문과 연관되어 온 축구팀 유벤투스 FC의 회장과 명예 회장을 지냈으며, 한때 이탈리아 축구 연맹의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정치적으로는 기독교민주당 소속으로 1976년부터 1979년까지 이탈리아 상원의원을 지냈다. 2015년에는 사후 이탈리아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그의 삶은 산업, 정치, 스포츠 분야에 걸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피아트의 사업 다각화와 유벤투스의 현대화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2. 초기 생애
움베르토 아녤리는 어린 시절부터 학업에 이르기까지 여러 비극과 함께 성장했으며, 이는 그의 삶과 경력에 큰 영향을 미쳤다.
2.1. 어린 시절과 교육
아녤리는 1934년 11월 1일 스위스 로잔에서 일곱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인 에두아르도 아녤리와 비르지니아 부르봉 델 몬테는 각각 그가 1살 때 비행기 사고로, 그리고 그가 11살이던 1945년 자동차 사고로 비극적으로 사망했다. 부모의 이른 죽음 이후, 그는 형 잔니 아녤리의 보살핌 아래 성장했다. 학업적으로는 카타니아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하여 졸업했다.
2.2. 초기 활동
그는 형 잔니 아녤리와 피아트의 공동 설립자인 할아버지 조반니 아녤리와 마찬가지로 피네롤로 기병대 응용 학교에서 군 복무를 수행하며 사회 활동의 첫발을 내디뎠다. 이러한 경험은 그의 후속 경력의 기반이 되었다.
3. 경력
움베르토 아녤리는 피아트 그룹에서 다양한 핵심 직책을 수행하며 기업 경영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국제적인 활동과 상당한 재정적 지위를 가졌다.

3.1. 피아트 그룹에서의 역할
아녤리는 1965년부터 1980년까지 피아트 프랑스의 회장을 지냈고, 1970년부터 1976년까지는 피아트의 최고 경영자(CEO)를 역임했다. 이후 1976년부터 1993년까지 피아트의 부회장직을 맡았으며, 1980년부터 1990년까지는 피아트 오토의 회장을 지냈다. 1993년부터 2004년까지는 국제 자문 위원회(International Advisory Board)의 일원이었다.
그는 피아트의 고위 경영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형 잔니 아녤리가 오랫동안 회사의 리더십을 맡았기 때문에 스스로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데는 제약을 받았다. 그는 종종 재정적 권력 게임으로 인해 뒷전으로 밀려나기도 했지만, 2003년 형이 사망할 때까지 가족 기업 경영에서 형을 오랫동안 지지했다. 피아트의 경영 방식은 진보적이고 가부장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1980년대부터 1990년대에 걸쳐 회사가 어려움을 겪을 때, 아녤리는 피아트의 사업 다각화를 주도했다. 피아트 그룹은 자동차 사업 외에도 여러 이탈리아 신문사와 출판사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는 회사의 재무 상태, 시장 점유율, 주식 가치가 모두 하락하며 최악의 재정 위기를 겪던 피아트의 재건을 추진하던 중 2004년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2003년부터 2004년까지 피아트 그룹의 회장직을 맡은 그는 과거와 달리 모든 피아트 자원을 자동차 부문에 집중하고, 주세페 모르키오(Giuseppe Morchio)와 같은 외부 경영자에게 회사 리더십을 맡기는 전략 변화를 단행했다.
3.2. 기타 경영 및 국제 활동
아녤리는 피아트 그룹 내에서의 역할 외에도 국제적인 경영 활동에 참여했다. 그는 빌더버그 그룹의 운영 위원회(Steering Committee) 위원으로 활동하며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영향력을 행사했다.
3.3. 재정적 지위
아녤리의 재정적 규모는 상당했다. 2003년 포브스가 선정한 세계 부호 순위에서 그는 약 15.00 억 USD의 순자산으로 278위에 올랐다. 사망 당시인 2004년에는 순자산이 약 55.00 억 USD로 추정되어 세계에서 68번째로 부유한 인물로 기록되었다.
4. 유벤투스 FC에서의 활동
움베르토 아녤리는 유벤투스 FC의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클럽의 성공과 현대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4.1. 회장 및 명예 회장직
1955년, 그는 형 잔니 아녤리를 포함한 이사회에 의해 유벤투스 회장으로 선출되면서, 유벤투스 역사상 최연소로 최고 경영자 자리에 올랐다. 그는 1956년부터 1961년까지 회장직을 수행했으며, 이후 1970년부터 2004년 사망 시까지 명예 회장직을 맡았다. 그의 아들 안드레아 아녤리는 2010년 유벤투스 회장에 취임하며 아버지의 뒤를 이었다.
4.2. 클럽 운영과 성과
아녤리의 회장 재임 기간은 유벤투스가 이탈리아 축구에서 가장 성공적인 클럽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존 찰스와 오마르 시보리와 같은 중요한 선수들을 영입하여, 1958년부터 1961년까지 3번의 세리에 A 우승과 2번의 연속적인 코파 이탈리아 우승을 달성하는 데 기여했다.
그는 또한 클럽을 중요한 투자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현대적인 상장 기업으로 전환시켰다. 1962년 회장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유벤투스와의 인연을 계속 이어갔으며, 1994년에는 형의 뒤를 이어 명예 회장으로서 클럽에 더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1994년부터 2004년까지의 10년간, 유벤투스는 5번의 세리에 A 우승, 1번의 코파 이탈리아, 4번의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 1번의 인터콘티넨탈컵, 1번의 UEFA 챔피언스리그, 1번의 UEFA 인터토토컵, 1번의 UEFA 슈퍼컵을 포함하여 총 19개의 트로피를 획득했다.
1999년 유벤투스는 UEFA 인터토토컵 우승으로 5대 UEFA 대회 우승 기록을 모두 달성하며 자체 기록을 경신했다. 다음 해에는 FIFA 선정 20세기 최고의 클럽 7위에 올랐고, 2009년에는 국제 축구 역사 통계 연맹이 선정한 20세기 유럽 최고 클럽 순위에서 이탈리아 클럽 중 가장 높은 2위를 차지했다. 2000년대 초반에는 유럽에서 세 번째로 높은 2.00 억 EUR 이상의 수익을 기록했다.
아녤리가 사망하기 전인 2004년, 그는 파비오 카펠로를 유벤투스 감독으로 영입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의 사망 당시 유벤투스는 2001-02 시즌 세리에 A에서 26번째 스쿠데토를 획득했으며, 2003년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 진출하여 7년 만에 4번째 챔피언스리그 결승 진출(그중 3번은 연속 진출)을 기록했다. 특히 1997년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와의 결승전과 1998년 레알 마드리드 CF와의 결승전은 논란의 여지 속에 패배했다. 축구 평론가 풀비오 비앙키(Fulvio Bianchi)는 2000년대 초반의 유벤투스가 "이후의 모든 팀보다 강했으며, 2.50 억 EUR의 수익과 100개의 스폰서를 보유하며 유럽 최고 수준이었다"고 평가했다.
5. 정치 경력
움베르토 아녤리는 이탈리아 정치계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아녤리 가문의 정치적 지향점을 대변했다.

5.1. 상원의원으로서의 활동
1970년대, 아녤리는 기독교민주당(DC) 소속으로 상원의원에 선출되었다. 이는 잔니 아녤리가 이탈리아 공화당 소속으로 1976년 총선에 출마할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약 100만 표의 손실을 초래할 수 있었던 상황에서, 기독교민주당이 움베르토 아녤리를 상원의원 후보로 확보하며 정치적 승리를 거둔 결과였다. 그는 1979년까지 상원의원직을 유지했다. 그는 자신의 역할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로마에서 기독교민주당 상원의원 회의를 개최하여 당의 쇄신을 논의했으나, 이로 인해 견책을 받기도 했다.
5.2. 정치적 성향 및 소속
아녤리 가문은 비이념적이고 중도적인 정치 세력의 창설을 지향했으며, 대서양주의와 친유럽주의 성향을 가졌다. 이들은 좌파와는 대조적으로, 그리고 포퓰리스트, 민족주의적, 파시스트 우파에 반대하며 현대적이고 국제주의적인 자본주의를 추구했다. 움베르토 아녤리는 이러한 가문의 정치적 입장을 대변하며 기독교민주당 소속으로 활동했다。
6. 개인사 및 사망
움베르토 아녤리의 삶은 유년기부터 말년에 이르기까지 유난히 많은 비극과 상실로 점철되었다.
6.1. 가족 관계 및 비극
그의 아버지 에두아르도 아녤리는 그가 1살 때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어머니 비르지니아 부르봉 델 몬테 역시 그가 11살이던 1945년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2000년에는 그의 조카 에두아르도 아녤리가 자살하는 비극을 겪었다. 또한 그의 아들 조반니 알베르토 아녤리는 1997년 33세의 나이로 암으로 사망하여 또 다른 큰 슬픔을 안겼다.
6.2. 결혼 및 자녀
1959년, 아녤리는 형 잔니 아녤리의 처형인 마렐라 아녤리의 사촌이자 유명 기업가 가문 피아지오의 상속녀인 Donna Antonella Bechi Piaggio돈나 안토넬라 베치 피아지오이탈리아어와 결혼했다. 그들은 세 아들을 두었으나, 첫 쌍둥이 아들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망했다. 셋째 아들인 조반니 알베르토 아녤리는 성장하여 어머니 가문의 기업인 피아지오의 수장이 되었고, 피아트의 후계자로 지목되었으나 1997년 33세의 나이로 암으로 사망했다.
첫 번째 결혼이 이혼으로 끝난 후, 아녤리는 1974년 Donna Allegra Caracciolo di Castagneto돈나 알레그라 카라치올로 디 카스타녜토이탈리아어와 재혼했다. 그녀는 아녤리의 형수인 마렐라 카라치올로 디 카스타녜토의 사촌으로, 나폴리 왕국 시대부터 이어져 온 카스타녜토 공작과 멜리토 공작의 작위를 가진 유서 깊은 귀족 가문 출신이다. 두 번째 결혼에서 그는 안드레아 아녤리(1975년생)와 안나(1977년생) 두 자녀를 두었다. 그의 아들 안드레아 아녤리는 2010년 유벤투스 회장이 되면서 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랐다.
6.3. 사망
아녤리는 폐암으로 투병했으며, 그의 건강 상태는 사망 한 달 전 파이낸셜 타임스의 보도를 통해 대중에 알려졌다. 그는 2004년 5월 27일 69세의 나이로 베나리아 레알레 지역의 라 만드리아 지역 공원 내에 위치한 라 만드리아 저택에서 아내와 두 자녀의 보살핌을 받으며 마지막 날들을 보냈다. 그의 사망은 조카인 에곤 폰 퓌르스텐베르크 공작의 사망 15일 전이었다. 그의 마지막 공식 석상은 4월 26일 토리노 대학교에서 그의 아내가 수의학 명예 학위를 수여받던 자리였다. 건강 악화로 인해 그는 5월 11일 피아트 주주총회에 참석하지 못했다.
7. 평가 및 영향
움베르토 아녤리는 스포츠계와 경제 경영 분야에서 중요한 유산을 남겼으며, 그의 부재는 이후 유벤투스 FC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는다.
7.1. 스포츠계에서의 평가
그는 유벤투스에서 이룬 스포츠적 성공을 인정받아 2015년 이탈리아 축구 연맹(FIGC)과 코베르치아노 축구 박물관 재단에 의해 사후 이탈리아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이는 그의 리더십 아래 유벤투스가 이룬 뛰어난 업적을 기리는 것이었다.
7.2. 경제 및 경영에서의 유산
아녤리는 피아트의 사업 다각화를 주도한 인물로 평가된다. 특히 회사가 어려움을 겪던 시기에 그의 경영 방식은 진보적이고 가부장적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피아트의 재정적 위기를 극복하고 회사를 재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피아트 그룹의 사업 포트폴리오를 확장하고 현대화하는 데 기여하며 이탈리아 경제에 큰 영향을 미쳤다.
7.3. 칼치오폴리 사건과의 연관성
아녤리가 사망한 지 3년 후, 유벤투스 FC는 논란의 여지가 많은 칼치오폴리(Calciopoli칼치오폴리이탈리아어) 사건에 휘말려 역사상 처음으로 세리에 B로 강등되었다. 비록 클럽 자체는 무죄 판결을 받고 리그 결과도 정규적인 것으로 판명되었으나, 강등은 피할 수 없었다. 그의 아들 안드레아 아녤리는 2010년대에 클럽을 재건하는 데 힘썼다.
일부 관측통들은 칼치오폴리 사건과 그 여파가 움베르토 아녤리와 잔니 아녤리의 사망 이후 유벤투스 내부 및 구단주들 사이의 분쟁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프란초 그란데 스티븐스와 잔루이지 가베티가 움베르토의 조카인 존 엘칸을 회장으로 선호하며 루치아노 모지, 안토니오 지라우도, 로베르토 베테가 등 당시 클럽 지분이 증가했던 인물들을 제거하려 했다고 본다. 비판론자들은 이들이 FIFA의 국제 경기 출전 정지 위협 이후, 클럽의 변호사인 카를로 자코네(Carlo Zaccone)가 세리에 B 강등 및 승점 삭감에 동의하고, 루카 코르데로 디 몬테제몰로가 라치오 지역 행정 법원에 제기한 항소를 철회하게 함으로써 유벤투스를 파멸로 이끌었다고 주장한다. 이 항소는 클럽의 명예를 회복하고 강등을 피할 수 있었을 가능성이 있었다고 한다.
전 이탈리아 축구 연맹 회장 프랑코 카라로는 만약 아녤리가 살아있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것이며, 클럽과 경영진이 제대로 방어되어 강등을 피하고 훨씬 일찍 명예를 회복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모지(Moggi)는 칼치오폴리가 "변호사 아녤리(l'Avvocato라보카토이탈리아어 아녤리)와 박사 움베르토(il Dottor일 도토르이탈리아어 움베르토)가 사망했기 때문에" 발생했으며, 두 아녤리 형제가 죽지 않았다면 "이러한 소극(farce)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관측통들에 따르면, 아녤리 형제의 사망 이후 유벤투스는 약해졌고, 모지는 이것이 "우리를 고아로 만들고 약하게 만들었으며, 유벤투스를 공격하고 조작하여 파괴하기 쉬웠다"고 언급했다. 비판론자들은 유벤투스가 아녤리 체제에서 너무 많이 이겼기 때문에 미움을 샀다고 주장한다. 당시 CONI 회장 잔니 페트루치는 "너무 많이 이기는 팀은 해당 스포츠에 해롭다"고 말하기도 했다.
8. 수상 및 영예
움베르토 아녤리는 그의 생애 동안 다음과 같은 주요 훈장과 영예를 받았다.
레지옹 도뇌르 훈장 슈발리에 (1967년 12월 27일)
레지옹 도뇌르 훈장 오피시에 (1969년)
이탈리아 공화국 공로 훈장 대십자 기사 (1972년 6월 2일)
서보장 대십자 기사 (1996년)
9. 관련 항목
- 아녤리 가문
- 잔니 아녤리
- 조반니 아녤리
- 안드레아 아녤리
- 피아트
- 유벤투스 FC
- 피아지오
- 빌더버그 그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