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군 경력
펜코프스키는 러시아 내전 중 그의 아버지가 백군 장교로 싸우다 사망했을 때 아기였다.
1.1. 유년 시절 및 교육
북캅카스에서 성장한 펜코프스키는 1939년 키이우 포병 군사 아카데미를 소위 계급으로 졸업했다. 1945년부터 1948년까지 프룬제 군사 아카데미에서 공부한 후 참모 장교로 근무했다.
1.2. 군 복무
겨울 전쟁과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후 중령 계급에 도달했다. 1944년에는 소련군 포병 사령관이자 제1 우크라이나 전선 사령관인 육군원수 세르게이 바렌초프의 본부에 배속되었고, 바렌초프는 그의 후원자가 되었다. 펜코프스키는 1944년 바렌초프와 거의 동시에 부상을 입었고, 바렌초프는 그를 연락 장교로 임명했다. 1945년, 펜코프스키는 드미트리 가파노비치 중장의 십대 딸과 결혼하여 또 다른 고위급 후원자를 얻었다.
2. GRU 경력 및 재배치
펜코프스키는 1953년 GRU 장교로 입대했다. 1955년 튀르키예 앙카라의 군사무관으로 임명되었으나, 상관과 다른 GRU 요원들의 규정 위반을 보고한 후 소환되어 부서 내에서 인기가 없어졌다. 다시 바렌초프의 후원을 받아 제르진스키 군사 아카데미에서 9개월간 로켓 포병을 공부했다. 그는 인도의 군사무관으로 선정되었으나, KGB가 그의 아버지의 사망 이력을 파악하여 정직 및 조사를 받았고, 1960년 11월 국가과학기술위원회에 배정되었다. 이후 그는 소련 과학 연구 위원회에서 근무했다.
3. 서방 정보기관과의 접촉
펜코프스키는 1960년 7월 모스크바의 볼쇼이 모스크보레츠키 다리에서 미국 학생들에게 접근하여 미국을 위해 스파이 활동을 하겠다는 제안이 담긴 소포를 건넸다. 그는 이를 미국 대사관의 정보 요원에게 전달해 달라고 요청했다. CIA는 그에게 연락하는 것을 지연시켰다. 모스크바 주재 미국 대사관이 국제적 사건을 우려하여 협조를 거부하자, CIA는 MI6에 도움을 요청했다.
철의 장막 뒤 국가들에 산업 장비를 판매하는 영국인 사업가 그레빌 윈은 MI6에 의해 펜코프스키와 소통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레빌 윈의 자전적 기록에 따르면, 그는 펜코프스키와 연락하는 임무를 위해 MI6에 의해 수년간 신중하게 훈련받았다. 펜코프스키와 두 명의 미국 정보 요원, 두 명의 영국 정보 요원 간의 첫 만남은 1961년 4월 펜코프스키의 런던 방문 중에 이루어졌다.
4. 스파이 활동 및 제공 정보
펜코프스키는 이후 18개월 동안 CIA-MI6 팀에게 엄청난 양의 정보를 제공했다.
4.1. 주요 정보 공개
펜코프스키가 제공한 정보에는 소련의 핵무기 규모가 니키타 흐루쇼프가 주장하거나 CIA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작았다는 문서와 소련이 아직 많은 수의 ICBM을 생산할 능력이 없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미사일의 연료 시스템과 유도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는 정보도 제공했다. 이 정보는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쿠바에서 소련 미사일을 철수시키기 위해 니키타 흐루쇼프와 협상하는 데 매우 귀중한 역할을 했다.
펜코프스키는 쿠바에 배치된 핵 로켓 발사 기지의 계획과 설명을 서방에 제공했다. 이 정보 덕분에 서방은 미국 U-2 정찰기가 제공한 저해상도 사진만으로도 미사일 기지를 식별할 수 있었다. 펜코프스키가 제공한 문서는 소련이 해당 지역에서 전쟁을 준비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이는 존 F. 케네디가 쿠바 작전을 감행할 용기를 주었다.
5. 정보 평가 및 논란
펜코프스키의 정보 제공자로서의 진정성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존재한다.
5.1. "쳄프 사건"과 방첩 분석
전 영국 MI5 장교인 피터 라이트는 펜코프스키가 이중 첩자 또는 가짜 망명자였다고 주장했다. 라이트는 이고르 구젠코와 다른 초기 망명자들과 달리 펜코프스키가 서방에 있는 소련 요원의 이름을 전혀 밝히지 않고, 이미 알려진 조직적 세부 정보만 제공했다고 지적했다. 제공된 문서 중 일부는 원본이었는데, 라이트는 이를 출처에서 쉽게 가져올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라이트는 냉전 기간 동안 영국 정보기관 지도부의 리더십에 대해 비판적이었으며, 그의 저서 『스파이캐처』에서 자신의 가설이 사실이며 소련이 이러한 마비를 인지하고 펜코프스키를 심어놓았다고 시사했다.
전 KGB 소장 올레그 칼루긴은 서방에 대한 자신의 정보 활동 경력에 대한 회고록에서 펜코프스키를 언급하지 않았다. 반면 KGB 망명자 블라디미르 N. 사하로프는 펜코프스키가 진정한 정보원이라고 믿으며, 펜코프스키 사건과 유리 노센코의 망명으로 인해 KGB 재편성이 진행되었고, 당이 KGB의 성과에 만족하지 않아 많은 KGB 고위직이 해고되었다고 언급했다. 전반적인 의견은 펜코프스키가 진정한 정보원이라는 쪽에 무게가 실리지만, 이러한 논쟁은 모든 정보기관이 적국에서 제공되는 정보의 진위 여부를 판단하는 데 직면하는 어려움을 보여준다.
러시아 대외정보국(SVR) 국장 미하일 프라드코프는 미국 국방장관 리언 패네타와의 회담에서 펜코프스키를 러시아의 가장 큰 정보 실패 사례로 꼽았다.
전직 CIA 고위 방첩 장교 테넌트 H. 배글리는 2007년 저서 『스파이 전쟁: 첩자, 미스터리, 그리고 치명적인 게임』에서 펜코프스키의 반역 행위가 1961년 4월 CIA와 MI6에 의해 포섭된 지 2주 만에 KGB에 의해 감지되었다고 주장했다. 배글리는 KGB가 이를 감지한 후 펜코프스키가 16개월 동안 미국과 영국을 위해 계속 스파이 활동을 하도록 허용했으며, 이는 서방 정보기관 내부의 누가 그를 배신했는지 드러내지 않으면서 그를 체포하고 기소할 시나리오를 만들기 위함이었다고 말했다. 배글리는 그레빌 윈과 펜코프스키가 러시아에서 체포되어 수감되었을 때, 윈이 포섭된 지 2주 후 모스크바 식당에서 펜코프스키와 나눈 대화 녹음본을 제시받았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이러한 결론을 내렸다. 이 녹음에서 윈은 펜코프스키에게 "쳄프는 어때?"라고 물었다. 윈이 KGB 심문관으로부터 "쳄프"(Zepp)가 누구인지 질문받았을 때, 그는 "쳄프"가 펜코프스키와 윈이 펜코프스키가 포섭될 때 만났던 런던 바걸 스테파니의 별명이었다고 회상했다. 배글리는 자신의 책에서 그와 조지 키세발터가 1962년 6월 KGB 망명자 유리 노센코를 심문할 때, 노센코가 KGB의 비밀 녹음 장치에 대해 자랑하면서 "쳄프"(Zepp)가 누구인지 물었고, 이는 KGB가 알지 못했던 인도네시아 군사무관의 이름이며, 그의 대화가 모스크바 식당에서 미국 군사무관 레오 둘라키와 비밀리에 녹음되었다고 자발적으로 말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노센코가 배글리와 키세발터에게 이러한 질문을 한 사실은 배글리가 노센코가 거짓 망명자라고 결론 내린 이유 중 하나였으며, 또한 CIA나 영국 정보기관 내부에 있는 "첩자"가 펜코프스키가 포섭된 직후 그를 배신했음을 깨닫게 했다.
6.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의 역할
소련 지도부는 미국 워싱턴 D.C.가 쿠바 미사일 기지를 너무 늦게 발견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믿고 핵미사일 배치를 시작했다. 펜코프스키는 쿠바에 있는 핵 로켓 발사 기지의 계획과 설명을 서방에 제공했다. 이 정보 덕분에 서방은 미국 U-2 정찰기가 제공한 저해상도 사진만으로도 미사일 기지를 식별할 수 있었다. 펜코프스키가 제공한 문서는 소련이 해당 지역에서 전쟁을 준비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이는 존 F. 케네디가 쿠바 작전을 감행할 용기를 주었다.
1978년 영국으로 망명한 전 GRU 대위 빅토르 수보로프는 훗날 소련 정보기관에 관한 자신의 저서에서 "역사학자들은 GRU 대령 올레그 펜코프스키의 이름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억할 것이다. 그의 귀중한 정보 덕분에 쿠바 위기는 마지막 세계 대전으로 변질되지 않았다"고 썼다.
펜코프스키의 MI6와의 통신은 NSA 직원으로 KGB를 위해 일하던 소련 스파이 잭 던랩에 의해 KGB에 폭로되었다. KGB 고위 간부들은 펜코프스키가 영국 요원이라는 사실을 1년 이상 알고 있었지만, MI6 내부에 있는 고위급 첩보원을 보호하기 위해 그들의 정보원을 보호했다. 던랩은 그들이 보호해야 할 또 다른 정보원에 불과했다. 그들은 영국 외교관들을 미행하며 펜코프스키에 대한 "발견 사례"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이는 그들의 첩보원들에게 의심을 던지지 않고 그를 체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이 문제에 대한 그들의 신중함은 미사일이 소련이 원했던 것보다 일찍 발견되는 결과를 초래했을 수 있다. 서독 요원이 슈타지 본부에서 "쿠바 상황이 어떻게 되어가는지 궁금하다"는 말을 엿들은 후, 이를 CIA에 전달했다.
펜코프스키는 1962년 10월 22일 체포되었다. 이는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U-2 정찰기 사진이 소련이 쿠바에 중거리 핵미사일을 설치하고 있다는 정보 보고를 확인했다고 밝힌 미국 대중 연설 이전에 이루어졌다. 이로 인해 케네디는 니키타 흐루쇼프가 이미 상황을 완화할 방법을 찾고 있었다는 등의 잠재적으로 중요한 정보 요원의 보고를 받지 못하게 되었고, 이는 이어진 13일간의 대치 기간 동안 긴장을 완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정보는 케네디가 섬 침공을 감행하려는 압력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되었을 수 있으며, 이는 소련이 미국 병력에 대해 9K52 루나-M급 전술 핵무기를 사용할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었다.
7. 체포, 재판 및 처형

1962년 11월 2일, 모스크바에 주재하던 펜코프스키의 서방 담당자들은 그로부터 두 통의 무음 전화와 시각 신호(전화 기둥이나 가로등 기둥에 분필 표시)를 받았는데, 이는 그의 데드 드롭이 채워졌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같은 날 데드 드롭(그로부터 온 편지가 담겨 있었다)을 회수하던 중, 외교관 신분으로 미국 대사관에 주재하던 CIA 요원 리처드 제이콥이 체포되었다. (소련 당국은 펜코프스키가 10일 전인 10월 22일에 체포되었다고 주장했다.)
펜코프스키의 자백으로 그레빌 윈도 부다페스트에서 체포되어 소련으로 송환되었고, 1964년 미국에서 체포된 소련 스파이와 교환되어 귀국했다.
펜코프스키는 재판을 받고 처형되었으나, 그의 죽음 방식에 대해서는 상반된 보고가 있다. 수사를 담당한 KGB 수석 심문관 알렉산드르 자그보즈딘은 펜코프스키가 "아마도 백 번 정도 심문"받았고, 총살 후 화장되었다고 진술했다. 소련 조각가 에른스트 네이즈베스트니는 돈스코이 묘지 화장터 소장으로부터 "펜코프스키가 '불'로 처형되었다", 즉 불에 태워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유사한 묘사는 이후 어니스트 볼크만의 스파이 관련 대중 역사서, 톰 클랜시의 소설 『붉은 토끼』, 그리고 빅토르 수보로프의 저서 『아쿠아리움』에도 포함되었다. 2010년 인터뷰에서 수보로프는 자신이 펜코프스키라고 알려진 한 남자가 철제 들것에 묶여 산 채로 화장터로 밀려 들어가는 장면이 담긴 영화를 보았다고 말했으나, 그 남자가 펜코프스키임을 부인하고 펜코프스키는 총살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레빌 윈은 그의 저서 『오데사의 남자』에서 펜코프스키가 자살했다고 주장했다. 윈은 펜코프스키의 연락책이자 운반책으로 일했으며, 두 사람은 1962년 10월 소련에 의해 체포되었다.
8. 파장 및 영향
소련 대중은 펜코프스키의 체포 소식을 7주 이상 지난 후에야 들었다. 당시 『프라우다』는 윈과 (미국 외교관 리처드 제이콥) 제이콥을 그의 연락책으로 지명했지만, 다른 누구도 언급하지 않았다.
8.1. 소련 지도부에 미친 영향
1963년 5월, 그의 재판 후 『이즈베스티야』는 당시 포병 총원수 및 로켓군 총사령관이자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후보 위원이었던 바렌초프가 소장으로 강등되었다고 보도했다. 6월에는 '정치적 경계심을 해이하게 했다'는 이유로 중앙위원회에서 축출되었다. 다른 세 명의 장교도 징계를 받았다. 이반 세로프 GRU 국장도 같은 시기에 해임되었다. 그는 펜코프스키와 친분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는 그의 몰락의 원인이 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8.2. 역사적 평가 및 인정
서방 정보기관과 역사가들은 펜코프스키를 냉전 첩보전에서 중요한 자산으로 인정하며, 그가 냉전의 흐름을 바꾸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한다. 러시아 대외정보국(SVR) 국장 미하일 프라드코프는 펜코프스키를 러시아의 가장 큰 정보 실패 사례로 꼽았다.
9. 대중문화에서의 묘사
펜코프스키는 다양한 문학, 영화, 텔레비전 작품에서 묘사되며 그의 문화적 영향력을 반영한다.
- 텔레비전**:
- 1985년 BBC 텔레비전 텔레비전 시리즈 『윈과 펜코프스키』에서 크리스토퍼 로지키가 펜코프스키를 연기했다.
- 2007년 BBC 텔레비전 다큐드라마 『핵 비밀』의 1화 "모스크바에서 온 스파이"의 주제가 되었다. 이 에피소드에서는 마크 보나르가 펜코프스키를 연기했으며, 펜코프스키가 기밀 정보를 촬영하고 모스크바에 주재하던 영국 MI6 요원 재닛 치솜을 만나는 KGB의 비밀 촬영 영상이 방영되었다. 이 프로그램은 2007년 1월 15일에 방영되었다.
- 문학**:
- 톰 클랜시의 잭 라이언 스파이 소설 네 편, 『붉은 10월호』(1984), 『크렘린의 추기경』(1988), 『곰과 용』(2000), 『붉은 토끼』(2002)에서 펜코프스키가 언급된다. 잭 라이언 세계관에서 그는 미하일 필리토프 대령을 CIA 요원(코드명 카디널)으로 포섭하고, 서방의 소련 내 최고 스파이로서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하기 위해 필리토프에게 자신을 배신하라고 종용했다고 묘사된다. "산 채로 화장되었다"는 가설은 여러 클랜시 소설에 등장하지만, 클랜시는 처형된 스파이가 펜코프스키라고 명확히 밝히지는 않았다.
- 펜코프스키의 운명은 넬슨 드밀의 스파이 소설 『더 참 스쿨』(1988)에서도 언급된다.
- 펜코프스키 자신의 저서인 『펜코프스키 페이퍼스』(1965)는 CIA의 의뢰로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76년 미국 상원 위원회는 이 책이 '실제 사건 자료를 바탕으로 기관의 자산에 의해 준비되고 작성되었다'고 밝혔으나, 저자 프랭크 깁니는 CIA가 제공된 자료를 위조했다는 사실을 부인했고, 로버트 콘퀘스트도 같은 의견이었다. 반면 다른 이들은 이 책을 선전물로 일축하며 역사적 가치가 없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 영화**:
- 2014년 폴란드 스릴러 영화 『잭 스트롱』(또 다른 냉전 스파이 리샤르트 쿠클린스키에 관한 영화)에서 에두아르트 베즈로드니가 펜코프스키를 연기했다. 그의 처형 장면은 영화의 오프닝 장면으로 사용되었다.
- 2020년 영국 영화 『더 쿠리어』에서 메랍 니니제가 펜코프스키를 연기했으며, 이 영화에서는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그레빌 윈을 연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