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오티스 레이 레딩 주니어(Otis Ray Redding Jr.영어, 1941년 9월 9일 ~ 1967년 12월 10일)는 미국의 싱어송라이터로, 소울 음악과 리듬 앤 블루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싱어송라이터 중 한 명이자 중요한 예술가로 평가받는다. '소울의 왕'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레딩의 노래 스타일은 장르에 앞서 존재했던 가스펠 음악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그의 보컬 스타일은 1960년대의 많은 다른 소울 아티스트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레딩은 조지아주 도슨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메이컨으로 이주했다. 15세에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리틀 리처드의 백 밴드인 디 업세터스와 함께 일하며 메이컨의 유서 깊은 더글러스 극장에서 열린 탤런트 쇼에 출연했다. 1958년, 레딩은 조니 젠킨스의 밴드 파인트퍼스에 합류하여 가수 겸 운전사로 남부 주들을 순회했다. 스택스 레코드 녹음 세션에 예정에 없던 출연을 통해 계약을 맺고 1962년 첫 히트 싱글인 "These Arms of Mine"을 발표했다.
스택스는 2년 후 레딩의 데뷔 앨범 Pain in My Heart를 발매했다. 초기에는 주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었지만, 레딩은 점차 더 넓은 미국 팝 음악 청중에게 다가갔다. 그는 자신의 밴드와 함께 처음에는 미국 남부의 작은 공연장에서 연주했고, 나중에는 로스앤젤레스의 인기 나이트클럽인 위스키 어 고 고에서 공연했으며, 런던, 파리 등 유럽 주요 도시를 순회했다. 1967년에는 몽테레이 팝 페스티벌에서 공연하며 대중적 인지도를 크게 높였고, 음악을 통해 인종 간의 장벽을 허무는 데 기여했다.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기 직전, 레딩은 스티브 크로퍼와 함께 "(Sittin' On) The Dock of the Bay"를 작곡하고 녹음했다. 1968년 1월에 발매된 이 노래는 빌보드 핫 100과 R&B 차트에서 사후에 처음으로 1위를 차지한 곡이 되었다. 앨범 The Dock of the Bay는 영국 음반 차트에서 사후에 1위를 차지한 최초의 앨범이었다. 레딩의 때 이른 죽음은 스택스 레코드에 큰 타격을 주었으며, 이미 파산 직전이었던 레이블은 애틀랜틱 레코드의 애트코 레코드 부서가 그의 전체 음악 카탈로그에 대한 권리를 소유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레딩은 사후에 수많은 찬사를 받았는데, 여기에는 2개의 그래미상, 그래미 평생 공로상, 그리고 로큰롤 명예의 전당, 블랙 뮤직 & 엔터테인먼트 명예의 전당, 작곡가 명예의 전당 헌액이 포함된다. "(Sittin' On) The Dock of the Bay" 외에도 그의 가장 잘 알려진 노래로는 그가 직접 작곡한 "Respect"(1965)와 "Try a Little Tenderness"(1966)의 그의 버전이 있다.
2. 생애
오티스 레딩의 생애와 초기 음악적 여정, 그리고 주요 성장 배경을 다룹니다.
2.1. 어린 시절과 교육
오티스 레딩은 1941년 9월 9일 조지아주 도슨에서 오티스 레딩 시니어와 패니 로즈먼의 여섯 자녀 중 넷째이자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레딩 시니어는 소작농이었고 나중에는 메이컨 근처의 로빈스 공군 기지에서 일했으며, 가끔 지역 교회에서 설교를 했다. 레딩이 세 살 때, 그의 가족은 메이컨의 주로 아프리카계 미국인 공공 주택 단지인 틴달 하이츠로 이사했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바인빌 침례교회 합창단에서 노래를 불렀고, 기타와 피아노를 배웠다. 10세부터는 드럼과 노래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볼라드-허드슨 고등학교에서는 학교 밴드에서 노래를 불렀다. 매주 일요일 메이컨 라디오 방송국 WIBB에서 가스펠 노래를 부르며 6 USD를 벌었고, 15주 연속으로 십대 탤런트 쇼에서 5 USD 상금을 받았다. 그의 열정은 노래였으며, 그는 종종 리틀 리처드와 샘 쿡을 자신의 음악적 영향으로 언급했다. 레딩은 리틀 리처드가 없었다면 자신이 "여기 없을 것"이라며, "리처드 때문에 음악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는 나의 영감이다. 나는 리틀 리처드처럼 노래하곤 했다. 그의 로큰롤 스타일... 나의 현재 음악에는 그의 많은 부분이 담겨 있다"고 말했다.
15세에 레딩은 가족의 재정 지원을 돕기 위해 학교를 중퇴했다. 그의 아버지는 결핵에 걸려 자주 입원했고, 어머니가 가족의 주 수입원이 되었다. 그는 우물 파는 사람, 주유소 직원으로 일했으며, 가끔 음악가로도 활동했다. 메이컨에서 지역적으로 잘 알려진 음악가이자 레딩에게 영감을 준 또 다른 인물인 피아니스트 글래디스 윌리엄스는 힐뷰 스프링스 소셜 클럽에서 자주 공연했고, 레딩은 가끔 그곳에서 그녀의 밴드와 함께 피아노를 연주했다. 윌리엄스는 일요일 탤런트 쇼를 주최했는데, 레딩은 두 친구인 가수 리틀 윌리 존스와 에디 로스와 함께 참석했다.
레딩의 돌파구는 1958년 디스크 자키 햄프 스웨인의 "더 틴에이지 파티"에서 찾아왔다. 이 파티는 지역 록시 및 더글러스 극장에서 열린 탤런트 경연 대회였다. 지역에서 저명한 기타리스트 조니 젠킨스가 관객으로 참석했고, 레딩의 백 밴드의 음악적 기술이 부족하다고 판단하여 그에게 반주를 제안했다. 레딩은 리틀 리처드의 "히비 지비스"를 불렀다. 이 조합 덕분에 레딩은 스웨인의 탤런트 경연 대회에서 15주 연속 우승을 차지했고, 상금은 5 USD였다. 젠킨스는 나중에 리드 기타리스트로 활동하며 레딩과 여러 차례 공연했다. 레딩은 곧 조니 젠킨스가 포함된 팻 티 케이크 앤 더 마이티 팬서스의 리드 보컬로 윌리 존스를 대신해달라는 초청을 받았다. 이후 리틀 리처드가 로큰롤을 버리고 가스펠 음악으로 전향하자 레딩은 디 업세터스에 고용되었다. 레딩은 공연당 약 25 USD를 받으며 좋은 보수를 받았지만, 오래 머물지는 않았다. 1960년 중반, 오티스는 아내 젤마와 자녀들이 조지아주 메이컨에 머무는 동안 여동생 데보라와 함께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레딩은 제임스 맥이친이 작곡한 "터프 이너프", 맥이친과 함께 작곡한 "쉬즈 올 라이트", 그리고 그가 단독으로 작곡한 "아임 게틴 힙"과 "감마 람마"(1961년 "샤우트 바말라마"라는 제목의 싱글로 녹음) 등 첫 곡들을 녹음했다.
2.2. 초기 경력
팻 티 케이크 앤 더 마이티 팬서스의 멤버였던 레딩은 1960년대 초까지 지속된 인종 분리 시대에 아프리카계 미국인 연예인들에게 친화적이었던 공연장들을 잇는 '치틀린 서킷'을 순회하며 미국 남부를 투어했다. 조니 젠킨스는 파인트퍼스의 주요 아티스트가 되기 위해 밴드를 떠났다. 이 무렵 레딩은 훗날 음반사 필 월든 앤 어소시에이츠를 설립할 필 월든을 만났고, 나중에는 소규모 레이블인 컨페더레이트 레코드를 운영하던 바비 스미스를 만났다. 그는 컨페더레이트와 계약하고 자신의 밴드 오티스 앤 더 슈터스와 함께 싱글 "샤우트 바말라마"(재작곡된 "감마 람마")와 "팻 걸"을 녹음했다. 이 무렵 그와 파인트퍼스는 레이크사이드 파크에서 열린 "밴드 배틀" 쇼에 참석했다. 컨페더레이트와 계약한 유일한 솔로 아티스트인 웨인 코크런은 파인트퍼스의 베이시스트가 되었다.
월든이 젠킨스를 위한 음반사를 찾기 시작했을 때, 애틀랜틱 레코드의 대표 조 갈킨이 관심을 보였고 1962년경 그를 테네시주 멤피스의 스택스 레코드 스튜디오로 보냈다. 젠킨스는 운전면허가 없었기 때문에 레딩이 그를 세션 장소까지 태워다 주었다. 부커 티 앤 더 엠지스의 백업을 받은 젠킨스와의 세션은 비생산적이었고 일찍 끝났다. 레딩은 두 곡을 연주할 기회를 얻었다. 첫 번째 곡은 "헤이 헤이 베이비"였는데, 스튜디오 책임자 짐 스튜어트는 리틀 리처드와 너무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 곡은 젠킨스가 기타를, 스티브 크로퍼가 피아노를 연주한 "These Arms of Mine"이었다. 스튜어트는 나중에 레딩의 연주를 칭찬하며 "모두가 집에 갈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조 갈킨은 오티스의 노래를 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발라드에는 뭔가 달랐다. 그는 정말로 자신의 영혼을 쏟아부었다"고 말했다. 스튜어트는 레딩과 계약하고 B-사이드에 "헤이 헤이 베이비"를 수록한 "These Arms of Mine"을 발매했다. 이 싱글은 1962년 10월 볼트 레코드를 통해 발매되었고, 이듬해 3월 차트에 진입했다. 이 곡은 그의 가장 성공적인 노래 중 하나가 되어 80만 장 이상 판매되었다.
3. 주요 활동 및 성과
오티스 레딩의 음악 경력에서 중요한 시기, 업적, 그리고 상징적인 공연 및 작품들을 상세히 다룹니다.
3.1. 스택스 레코드와 초기 성공
"These Arms of Mine"과 1962년에서 1963년 세션에서 녹음된 다른 곡들은 레딩의 데뷔 앨범 Pain in My Heart에 수록되었다. "댓츠 왓 마이 하트 니즈"와 "메리스 리틀 램"은 1963년 6월에 녹음되었다. 후자는 백 보컬과 브라스가 모두 포함된 유일한 레딩의 트랙이었지만, 그의 최악의 판매량을 기록한 싱글이 되었다. 1963년 9월에 녹음된 타이틀곡 "페인 인 마이 하트"는 이르마 토마스의 "룰러 오브 마이 하트"와 비슷하게 들려 저작권 문제를 야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Pain in My Heart는 1964년 3월에 발매되었고, 싱글은 R&B 차트에서 11위, 빌보드 핫 100에서 61위, 앨범은 빌보드 200에서 103위를 기록했다.
1963년 11월, 레딩은 형 로저스와 동료이자 레딩의 어린 시절 친구인 전직 복서 실베스터 허커비와 함께 뉴욕으로 가서 애틀랜틱 레코드를 위한 라이브 앨범 녹음을 위해 아폴로 극장에서 공연했다. 레딩과 그의 밴드는 주당 400 USD를 받았지만, 킹 커티스가 이끄는 하우스 밴드의 악보 비용으로 450 USD를 지불해야 했기 때문에 재정적 어려움을 겪었다. 세 사람은 월든에게 돈을 요청했다. 허커비가 "낡고 허름한" 테레사 호텔에서 생활했던 상황에 대한 묘사는 피터 구랄닉의 1999년 저서 스위트 소울 뮤직에 인용되어 있다. 그는 무하마드 알리와 다른 유명인들을 만났다고 언급했다. 레딩이 아폴로 극장에서 공연할 때 헤드라이너였던 벤 E. 킹은 레딩의 재정 상황을 알고 그에게 100 USD를 주었다. 그 결과로 나온 앨범에는 킹, 더 코스터스, 도리스 트로이, 루퍼스 토마스, 더 팔콘스, 그리고 레딩이 참여했다. 이 무렵 월든과 로저스는 군대에 징집되었고, 월든의 남동생 앨런은 레딩의 투어에 합류했으며, 얼 "스피도" 심스는 로저스를 대신하여 레딩의 로드 매니저가 되었다.
3.2. "미스터 피티풀"과 "오티스 블루"
레딩의 첫 앨범에 수록된 "시큐리티" 이후 대부분의 곡들은 느린 템포였다. 이에 따라 디스크 자키 A. C. 무하 윌리엄스는 그를 "미스터 피티풀"이라고 불렀고, 이어서 크로퍼와 레딩은 동명의 곡을 작곡했다. 이 곡과 빌보드 핫 100 차트 100위권 안에 들었던 싱글 "체인드 앤 바운드", "컴 투 미", "댓츠 하우 스트롱 마이 러브 이즈"는 1965년 3월에 발매된 레딩의 두 번째 스튜디오 앨범 The Great Otis Redding Sings Soul Ballads에 수록되었다. 젠킨스는 갈킨, 월든, 크로퍼가 자신의 연주 스타일을 표절할까 봐 두려워 밴드에서 독립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고, 그래서 크로퍼가 레딩의 리드 기타리스트가 되었다.
1965년경, 레딩은 전 더 임프레션스의 리드 싱어였던 제리 버틀러와 함께 "I've Been Loving You Too Long"을 공동 작곡했다. 그해 여름, 레딩과 스튜디오 팀은 그의 다음 앨범을 위한 새로운 곡들을 편곡했다. 11곡 중 10곡은 7월 9일과 10일 멤피스에서 24시간 동안 녹음되었다. "Ole Man Trouble"과 "Respect" 두 곡은 이전에 Otis Blue 세션 동안 완성되었다. "Respect"와 "I've Been Loving You"는 나중에 스테레오로 재녹음되었다. Otis Blue: Otis Redding Sings Soul이라는 제목의 앨범은 1965년 9월에 발매되었다. Otis Blue에는 레딩이 1965년에 커버한 사랑받는 "A Change Is Gonna Come"도 포함되어 있다.
3.3. 위스키 어 고 고와 유럽 투어
레딩의 성공으로 그는 조지아주에 300 km2 규모의 목장을 구입할 수 있었고, 그는 이 목장을 "빅 오 랜치"라고 불렀다. 스택스 레코드도 잘 되고 있었다. 월든은 퍼시 슬레지, 조니 테일러, 클래런스 카터, 에디 플로이드 등 더 많은 음악가와 계약했으며, 레딩과 함께 두 개의 제작 회사를 설립했다. "조티스 레코드"(조 갈킨과 오티스에서 따옴)는 아서 콘리의 두 곡과 빌리 영과 로레타 윌리엄스의 각 한 곡을 발매했다. 다른 하나는 레드월 뮤직(레딩과 월든에서 따옴)으로, 설립 직후 문을 닫았다.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여전히 팬의 대다수를 차지했기 때문에, 레딩은 로스앤젤레스 선셋 스트립의 위스키 어 고 고에서 공연하기로 결정했다. 레딩은 미국 서부에서 록 관객을 위해 공연한 최초의 소울 아티스트 중 한 명이었다. 그의 공연은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의 긍정적인 보도를 포함하여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았고, 그는 주류 대중문화에 침투했다. 밥 딜런은 이 공연에 참석하여 레딩에게 자신의 노래 "Just Like a Woman"의 수정된 버전을 제공했다.
1966년 말, 레딩은 스택스 스튜디오로 돌아와 1932년 지미 캠벨과 레그 코넬리, 해리 M. 우즈가 작곡한 "Try a Little Tenderness"를 포함한 여러 트랙을 녹음했다. 이 노래는 이전에 빙 크로스비와 프랭크 시나트라가 녹음했으며, 출판사들은 레딩이 "흑인 관점"으로 이 노래를 녹음하는 것을 막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오늘날 종종 그의 시그니처 송으로 여겨지는 이 곡에 대해 짐 스튜어트는 "오티스와 그가 어떤 사람인지 정말로 요약하는 노래, 하나의 공연이 있다면, 그것은 'Try a Little Tenderness'이다. 그 하나의 공연은 너무 특별하고 독특해서 그가 누구인지를 표현한다"고 평가했다. 이 버전에서 레딩은 부커 티 앤 더 엠지스의 백업을 받았고, 스태프 프로듀서 아이작 헤이스가 편곡을 담당했다. "Try a Little Tenderness"는 레딩의 다음 앨범인 Complete & Unbelievable: The Otis Redding Dictionary of Soul에 수록되었다. 이 노래와 앨범은 비평적,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었으며, 전자는 빌보드 핫 100 차트에서 25위, R&B 차트에서 4위를 기록했다.
1966년 봄은 스택스가 아티스트들을 위한 콘서트를 처음으로 예약한 시기였다. 그룹의 대다수는 3월 13일 런던에 도착했지만, 레딩은 며칠 전 이몬 앤드루스 쇼와 같은 인터뷰를 위해 먼저 비행기로 도착했다. 팀이 런던에 도착했을 때, 비틀즈는 그들을 태우러 리무진을 보냈다. 에이전트 빌 그레이엄은 레딩이 1966년 말 필모어 오디토리움에서 공연할 것을 제안했다. 이 공연은 상업적으로나 비평적으로 성공적이었으며, 레딩은 하룻밤에 약 800 USD에서 1000 USD를 벌었다. 그레이엄은 나중에 "그것은 내 평생 최고의 공연이었다"고 말했다. 레딩은 6개월 후 유럽 투어를 시작했다.
1967년 3월, 스택스는 레딩과 칼라 토마스의 듀엣 앨범인 King & Queen을 발매했으며, 이 앨범은 골드 레코드 인증을 받았다. 짐 스튜어트는 "[레딩의] 거친 느낌과 [토마스의] 세련됨이 잘 어울릴 것"이라고 예상하며 듀엣 앨범을 제작할 아이디어를 냈다. 이 앨범은 1967년 1월에 녹음되었는데, 당시 토마스는 하워드 대학교에서 영어 석사 학위를 취득 중이었다. 10곡 중 6곡은 공동 세션 중에 녹음되었고, 나머지는 레딩의 콘서트 일정 때문에 며칠 후 오버더빙되었다. 앨범에서 세 개의 싱글이 발매되었는데, 4월에 "Tramp"가 발매되었고, 이어서 "Knock on Wood"와 "Lovey Dovey"가 발매되었다. 이 세 곡 모두 R&B와 팝 차트에서 최소 60위권 안에 들었다. 앨범은 빌보드 팝 차트에서 5위, R&B 차트에서 36위를 기록했다.
레딩은 파리 올림피아에서 공연하기 위해 유럽으로 돌아갔다. 라이브 앨범 Otis Redding: Live in Europe은 3개월 후 발매되었으며, 이 공연과 런던, 스웨덴 스톡홀름에서의 다른 라이브 공연이 수록되었다. 레딩과 월든이 스택스/볼트 레코드 대신 애트코/애틀랜틱 레코드와 직접 계약한 그의 제자 콘리(Conley)를, 루퍼스 토마스나 윌리엄 벨과 같은 더 유명한 스택스/볼트 아티스트들 대신 투어에 데려가기로 한 그의 결정은 부정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3.4. 몽테레이 팝 페스티벌
1967년, 레딩은 영향력 있는 몽테레이 팝 페스티벌에서 토요일 밤, 즉 페스티벌 둘째 날의 마지막 공연자로 무대에 섰다. 그는 프로모터 제리 웩슬러의 노력으로 초청되었다. 그 시점까지 레딩은 여전히 주로 흑인 관객을 위해 공연하고 있었다. 당시 그는 "주류 백인 미국 시장에서 상업적으로 성공할 수 있는 아티스트로 간주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날 밤 가장 열정적인 공연 중 하나를 선보이고 관객을 가장 많이 참여시킨 아티스트가 된 후, "몽테레이 팝에서의 그의 공연은 지역적 명성에서 전국적 명성으로의 자연스러운 진전이었으며,... 오티스 레딩 경력의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
그의 공연에는 자신의 노래 "Respect"와 롤링 스톤스의 "Satisfaction" 버전이 포함되었다。 레딩과 그의 백 밴드(부커 티 앤 더 엠지스와 더 마-키스 혼 섹션)는 샘 쿡의 "Shake"로 시작했고, 이어서 즉흥 연설을 통해 관객들에게 그들이 "사랑하는 군중"인지 묻고 큰 콜 앤드 리스폰스를 유도했다. 이어서 발라드 "I've Been Loving You"가 이어졌다. 마지막 곡은 추가 코러스가 포함된 "Try a Little Tenderness"였다. 레딩은 "가야 해요, 여러분, 가고 싶지 않아요"라고 말하며 그의 마지막 주요 콘서트 무대를 떠났다. 부커 티 존스에 따르면, "우리는 오티스와 엠지스가 최고의 공연 중 하나를 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그 공연에 포함되었다는 것 또한 일종의 현상이었다... 그들은 우리를 받아들였고, 그것이 오티스를 정말 감동시켰다. 그는 포함된 것을 기뻐했고, 그것은 그에게 새로운 관객을 가져다주었다. 몽테레이에서 크게 확장되었다." 스위트 소울 뮤직에 따르면, 브라이언 존스와 지미 헨드릭스와 같은 음악가들은 그의 공연에 매료되었다. 로버트 크리스트가우는 에스콰이어에 "사랑하는 군중은 천국으로 마음을 소리쳤다"고 썼다.
몽테레이 이전에 레딩은 콘리와 함께 녹음하고 싶었지만 스택스는 반대했다. 둘은 멤피스에서 메이컨으로 옮겨 계속 작곡했다. 그 결과는 "Sweet Soul Music"(쿡의 "예 맨"에 기반)이었으며, 빌보드 핫 100에서 2위를 기록했다. 그 무렵 레딩은 후두에 폴립이 생겨 차와 레몬 또는 꿀로 치료하려 했다. 그는 1967년 9월 뉴욕의 마운트 시나이 병원에 입원하여 수술을 받았다.
3.5. "(Sittin' On) The Dock of the Bay"
1967년 12월 초, 레딩은 다시 스택스에서 녹음했다. 새로운 노래 중 하나는 크로퍼와 함께 작곡한 "(Sittin' On) The Dock of the Bay"였다. 레딩은 비틀즈의 앨범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에서 영감을 받아 레이블의 바람과는 달리 비슷한 사운드를 만들려고 했다. 그의 아내 젤마는 그 비정형적인 멜로디를 싫어했다. 스택스 팀원들도 새로운 사운드에 불만을 품었다. 스튜어트는 그것이 R&B가 아니라고 생각했고, 베이시스트 도널드 "덕" 던은 스택스의 명성을 해칠까 봐 우려했다. 그러나 레딩은 자신의 음악 스타일을 확장하고 싶었고, 이 곡이 자신의 최고의 노래이며 차트 1위를 차지할 것이라고 정확히 믿었다. 그는 마지막 부분에서 휘파람을 불었는데, 크로퍼의 "페이드아웃 랩"을 잊었거나 의도적으로 재해석한 것이었다.
"(Sittin' On) The Dock of the Bay"는 1968년 1월에 발매되었다. 이 곡은 레딩의 유일한 빌보드 핫 100 1위 싱글이 되었고, 미국 차트 역사상 최초의 사후 1위 싱글이 되었다. 이 곡은 전 세계적으로 약 4백만 장이 판매되었고, 8백만 회 이상 라디오에서 재생되었다. 앨범 The Dock of the Bay는 영국 음반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한 최초의 사후 앨범이었다.
4. 음악 스타일과 작곡
오티스 레딩의 독특한 음악적 특징, 보컬 스타일, 작곡 방식 및 그의 음악적 뿌리에 대해 분석합니다.
4.1. 보컬 스타일과 영향
초기에 레딩은 자신의 롤 모델인 리틀 리처드의 록과 소울 스타일을 모방했다. 레딩은 또한 샘 쿡과 같은 소울 음악가들, 특히 라이브 앨범 Sam Cooke at the Copa의 영향을 받았으며, 나중에는 다른 인기 장르를 탐구했다. 그는 비틀즈와 밥 딜런의 녹음을 연구했다. 그의 노래 "Hard to Handle"에는 로큰롤 요소와 에릭 클랩튼 및 지미 헨드릭스의 영향이 담겨 있다. 레딩의 대부분의 노래는 서던 소울과 멤피스 소울로 분류되었다.
그의 특징은 거친 목소리와 강한 감정을 전달하는 능력이었다. 올뮤직의 리치 언터버거는 그의 "쉰 목소리, 거친 보컬, 브라스 편곡, 파티 음악과 애절한 발라드 모두에 대한 감정적인 접근"을 언급했다. 록 앤 롤: 개론이라는 책에서 작가 마이클 캠벨과 제임스 브로디는 "레딩의 노래는 열렬한 흑인 설교자를 연상시킨다. 특히 업템포 곡에서 그의 노래는 열정적인 연설 이상이지만 정확한 음정으로 노래하는 것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제안했다. 이 책에 따르면, "레딩은 열정적인 웅변과 전통적인 노래 사이의 거친 중간 지점을 찾는다. 그의 전달은 감정으로 넘쳐흐른다"고 그의 노래 "I Can't Turn You Loose"에서 설명했다. 부커 티 존스는 레딩의 노래를 활기차고 감정적이라고 묘사했지만, 그의 음역은 낮거나 높은 음에 도달하지 못하여 제한적이라고 말했다. 피터 버클리는 더 러프 가이드 투 록에서 그의 "샘 쿡의 프레이징과 더 강력한 전달력을 결합한 거친 목소리"를 묘사했으며, 나중에는 그가 "지옥에 갈 각오를 한 설교자처럼 증언하거나, 부드러운 연인처럼 나직이 노래하거나, 블루지한 야유로 거칠고 더럽게 표현할 수 있었다"고 제안했다.
레딩은 그의 어색한 무대 매너에 대해 루퍼스 토마스로부터 조언을 받았다. 제리 웩슬러는 레딩이 "움직이는 법을 몰랐다"고 말하며, 비록 레딩이 강렬한 메시지로 관객들에게 잘 받아들여졌지만, 그는 가만히 서서 상체만 움직였다고 언급했다. 구랄닉은 스위트 소울 뮤직에서 레딩의 고통스러운 취약성이 관객에게는 매력적이었지만, 그의 친구와 동료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고 묘사했다. 그의 초기 수줍음은 잘 알려져 있었다.
4.2. 작곡 과정과 특징
초기 경력에서 레딩은 주로 리처드, 쿡, 솔로몬 버크와 같은 인기 아티스트들의 곡을 커버했다. 1960년대 중반경, 레딩은 자신만의 곡을 쓰기 시작했는데, 항상 자신의 값싼 빨간 어쿠스틱 기타를 가지고 다녔으며, 때로는 스택스 멤버들에게 자신의 가사에 대한 의견을 묻기도 했다. 그는 종종 심스, 로저스, 허커비, 필 월든, 크로퍼와 같은 다른 음악가들과 가사를 공동 작업했다. 목 수술에서 회복하는 동안, 레딩은 2주 만에 약 30곡을 작곡했다. 레딩은 자신의 모든 곡에 대한 유일한 저작권 소유자였다.
"(Sittin' On) The Dock of the Bay"에서 그는 익숙한 낭만적인 주제를 버리고 "슬프고 애절한 내면의 성찰"을 담았으며, 이는 "크로퍼의 잊을 수 없는 하강하는 기타 리프"로 증폭되었다. 작곡가 명예의 전당 웹사이트는 이 노래가 "일종의 우울하고 어두운 절망의 목소리였다('살아갈 이유가 없어/아무것도 내게 오지 않을 것 같아')"고 언급했지만, "그의 음악은 전반적으로 환희와 기쁨으로 가득했다"고 덧붙였다. 1993년 박스 세트의 라이너 노트를 쓴 저널리스트 루스 로빈슨에 따르면, "소울을 인간 음악 표현의 어두운 면인 블루스와 동일시하는 것은 현재 수정주의적 이론이다. '고난이 나를 붙잡고 있다'는 음악의 불꽃을 부채질하는 자가 그 형태의 아버지일지라도, 매주 일요일 아침 교회에서 발견되는 영광스러운 환희가 그 어머니이다." 작곡가 명예의 전당 웹사이트는 "영광스러운 환희는 오티스 레딩의 작곡 및 노래 스타일을 정확히 묘사하는 말이었다"고 덧붙인다. 부커 티 존스는 레딩을 레너드 번스타인에 비유하며 "그는 같은 유형의 사람이었다. 그는 리더였다. 그는 그저 팔과 몸, 손가락으로 이끌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레딩은 짧고 단순한 가사를 선호했다. 딜런의 "Just Like a Woman"을 커버할 의향이 있느냐는 질문에 그는 가사에 "너무 많은 텍스트"가 포함되어 있다고 답했다. 또한 그는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기본적으로 저는 단순함을 유지하는 모든 음악을 좋아하며, 이것이 '소울 음악'을 성공시키는 공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음악 형태든 복잡해지거나 난해해지면 일반 청취자의 귀를 잃게 됩니다. 단순한 블루스 곡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 건축, 예술, 음악을 막론하고 단순함에는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레딩은 또한 자신의 (때로는 어려운) 녹음의 혼 편곡을 직접 했으며, 연주자들에게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흥얼거려 보여주었다. "Fa-Fa-Fa-Fa-Fa (Sad Song)"의 녹음은 혼 섹션과 함께 흥얼거리는 그의 습관을 포착하고 있다.
5. 개인사
오티스 레딩의 개인적인 삶, 가족 관계, 재산 및 자선 활동에 대해 다룹니다.
5.1. 결혼과 자녀
18세에 레딩은 "더 틴에이지 파티"에서 17세의 젤마 애트우드를 만났다. 약 1년 후인 1960년 여름, 그녀는 그들의 아들 덱스터를 낳았고, 1961년 8월 레딩과 결혼했다. 1960년 중반, 오티스는 여동생 데보라와 함께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했고, 젤마와 아이들은 조지아주 메이컨에 머물렀다.
레딩과 그의 아내에게는 덱스터, 데메트리아, 칼라, 그리고 오티스 3세(1964년 12월 17일 ~ 2023년 4월 18일) 등 네 명의 자녀가 있었다. 오티스 3세, 덱스터, 그리고 사촌 마크 로켓은 나중에 젤마가 매니저를 맡은 밴드 더 레딩스를 결성했다. 젤마는 또한 청소 서비스 회사인 메이즈 오버 메이컨, 여러 나이트클럽, 그리고 에이전시를 운영하거나 그곳에서 일했다.
5.2. 재산과 생활
레딩의 음악 활동은 그를 부유하게 만들었다. 여러 광고에 따르면, 그는 약 200벌의 정장과 400켤레의 신발을 가지고 있었고, 콘서트당 주당 약 3.50 만 USD를 벌었다. 그는 "빅 오 랜치"에 약 12.50 만 USD를 지출했다. 오티스 레딩 엔터프라이즈의 소유주로서, 그의 공연, 음악 출판 벤처, 그리고 음반 판매 로열티로 1967년에만 1백만 달러 이상을 벌어들였다. 그해 한 칼럼니스트는 "그는 프랭크 시나트라와 딘 마틴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음반을 팔았다"고 말했다. 오티스 블루 발매 이후, 레딩은 "카탈로그" 아티스트가 되었는데, 이는 그의 앨범이 즉각적인 블록버스터는 아니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꾸준히 판매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레딩은 키가 6 m이고 몸무게가 220 kg인 운동선수 같은 가장이었으며, 미식축구와 사냥을 좋아했다. 그는 자선 활동에 적극적이었다. 그는 흑인 청소년을 지원하는 데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사망 당시 소외 계층 어린이를 위한 여름 캠프를 건설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6. 사망
1967년 비행기 사고로 인한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관련된 사건들을 상세히 서술합니다.
6.1. 비행기 사고
1967년까지 밴드는 레딩의 비치크래프트 모델 18 비행기로 공연장을 이동했다. 12월 9일, 그들은 클리블랜드에서 제작된 업비트 텔레비전 쇼에 출연했다. 그들은 레오스 카지노라는 클럽에서 이틀 밤 동안 세 번의 콘서트를 열었다. 아내와 자녀들과의 통화 후, 레딩의 다음 목적지는 위스콘신주 매디슨이었다. 다음 날인 12월 10일 일요일, 그들은 위스콘신 대학교 매디슨 캠퍼스 근처의 팩토리 나이트클럽에서 공연할 예정이었다.
폭우와 안개가 심한 악천후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경고에도 불구하고 비행기는 이륙했다. 매디슨의 트루악스 필드 목적지에서 6437 m (4 mile) 떨어진 곳에서 조종사 리처드 프레이저는 착륙 허가를 요청하는 무전을 보냈다. 그 직후, 비행기는 모노나호에 추락했다. 사고의 유일한 생존자인 바-케이스 멤버 벤 코리는 사고 직전 잠들어 있었다. 그는 충돌 직전 깨어나 밴드 동료인 팔론 존스가 창밖을 내다보며 "오, 안 돼!"라고 외치는 것을 보았다. 코리는 추락 전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것이 안전벨트를 풀고 있던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 후 차가운 물속에서 떠다니기 위해 좌석 쿠션을 잡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수영을 못했기 때문에 그는 다른 사람들을 구할 수 없었다. 추락 원인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레딩 외에 희생된 다른 이들은 바-케이스 멤버 4명(기타리스트 지미 킹, 테너 색소폰 연주자 팔론 존스, 오르간 연주자 로니 콜드웰, 드러머 칼 커닝햄), 그들의 수행원 매튜 켈리, 그리고 조종사 프레이저였다.
레딩의 시신은 다음 날 호수를 수색했을 때 발견되었다. 가족은 더 많은 사람들이 참석할 수 있도록 장례식을 12월 15일에서 12월 18일로 연기했으며, 장례식은 메이컨의 시립 강당에서 열렸다. 3,000석 규모의 홀을 가득 채우고도 4,500명 이상이 장례식에 참석했다. 레딩은 메이컨 북쪽으로 약 32187 m (20 mile) 떨어진 라운드 오크에 있는 자신의 목장에 안장되었다. 제리 웩슬러가 추도사를 낭독했다. 레딩은 "(Sittin' On) The Dock of the Bay"를 재녹음한 지 불과 사흘 만에 사망했으며, 아내 젤마와 네 자녀(오티스 3세, 덱스터, 데메트리아, 칼라)를 남겼다. 1997년 8월, 매디슨 컨벤션 센터인 모노나 테라스의 호숫가 갑판에 기념 명판이 설치되었다.
7. 사후 활동 및 유산
그의 음악이 후대에 미친 영향, 사후 발매된 음반 및 싱글, 그리고 그가 받은 주요 상과 명예를 총정리합니다.
7.1. 사후 발매 음반 및 싱글
"(Sittin' On) The Dock of the Bay"는 1968년 1월에 발매되었다. 이 곡은 레딩의 유일한 빌보드 핫 100 1위 싱글이 되었고, 미국 차트 역사상 최초의 사후 1위 싱글이 되었다. 이 곡은 전 세계적으로 약 4백만 장이 판매되었고, 8백만 회 이상 라디오에서 재생되었다. 앨범 The Dock of the Bay는 영국 음반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한 최초의 사후 앨범이었다.
레딩 사망 직후, 스택스/볼트 음반의 유통사였던 애틀랜틱 레코드는 워너 브라더스 레코드에 인수되었다. 스택스는 유통 계약을 재협상해야 했고, 애틀랜틱이 실제로 스택스/볼트의 전체 카탈로그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다. 스택스는 자신의 녹음물에 대한 권리를 되찾을 수 없었고 애틀랜틱과의 관계를 단절했다. 애틀랜틱은 또한 미발표된 오티스 레딩 마스터 음원에 대한 권리를 보유했다. 애틀랜틱은 애트코 레코드 레이블로 3개의 스튜디오 앨범(The Immortal Otis Redding(1968), Love Man(1969), Tell the Truth(1970))을 발매할 충분한 자료를 가지고 있었다. 이 LP들에서 "Amen"(1968), "Hard to Handle"(1968), "I've Got Dreams to Remember"(1968), "Love Man"(1969), "Look at That Girl"(1969) 등 여러 성공적인 싱글이 나왔다. 싱글은 또한 애틀랜틱에서 발매된 두 개의 레딩 라이브 앨범에서도 나왔는데, 1966년에 녹음되어 1968년 애트코에서 발매된 In Person at the Whisky a Go Go와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의 라이브 공연이 한 면에, 레딩의 공연이 다른 면에 수록된 리프라이즈 레코드 발매작 Historic Performances Recorded at the Monterey International Pop Festival이 그것이다. 레딩은 1968년에 최소 두 번의 텔레비전 출연이 예정되어 있었다. 하나는 에드 설리번 쇼였고, 다른 하나는 스모더스 브라더스 코미디 아워였다.
2007년 9월, 레딩의 라이브 공연을 담은 첫 공식 DVD 앤솔로지 Dreams to Remember: The Legacy of Otis Redding이 당시 스택스 카탈로그의 소유주였던 콩코드 뮤직 그룹에 의해 발매되었다. 이 DVD에는 16개의 풀 길이 공연과 그의 삶과 경력을 기록한 40분 분량의 새로운 인터뷰가 담겨 있다. 2010년 5월 18일, 스택스 레코드는 1966년 4월 위스키 어 고 고에서의 세 번의 완전한 세트 녹음을 담은 2CD 앨범을 발매했다. 2016년에는 그가 3일간 머물렀던 공연장에서의 7개 세트 전체가 6CD 박스 세트 Live at the Whisky a Go Go: The Complete Recordings로 발매되었고, 이 앨범은 그래미상 최우수 앨범 노트상을 수상했다.
칼라 토마스는 그들이 그해 12월에 또 다른 듀엣 앨범을 녹음할 계획이었다고 주장했지만, 필 월든은 이를 부인했다. 레딩은 발라드는 업템포로, 그 반대도 마찬가지로, 곡들을 자르고 재편곡하여 다른 템포로 앨범을 녹음할 것을 제안했었다. 또 다른 제안은 전적으로 컨트리 음악 스탠더드 곡들로만 이루어진 앨범을 녹음하는 것이었다. 2011년, 카녜이 웨스트와 제이-지는 그들의 공동 앨범 Watch the Throne에서 "Otis"를 싱글로 발매했다. 레딩은 이 곡에 피처링으로 크레딧되었으며, 카녜이 웨스트가 레딩의 "Try a Little Tenderness" 샘플을 기반으로 이 곡을 제작했다.
7.2. 음악적 영향력
레딩은 "소울의 왕"으로 불렸으며, 이 칭호는 제임스 브라운과 샘 쿡에게도 주어졌다. 그는 이 장르에서 가장 인정받는 아티스트 중 한 명으로 남아 있다. 그의 간결하고 강력한 스타일은 스택스 사운드를 대표했으며, 그는 "스택스의 심장이자 영혼"으로 불렸다. 알 잭슨, 던, 크로퍼와 같은 아티스트들은 그 구조를 확장하는 데 기여했다. 그의 탁 트인 목소리, 트레몰로/비브라토, 광적이고 전율적인 무대 공연, 그리고 진정성 있는 태도는 특히 그의 특징이었으며, 샘 쿡에게서 영향을 받은 "gotta, gotta, gotta"와 같은 간투사도 사용했다. 프로듀서 스튜어트는 "애원하는 듯한 노래"가 스트레스로 인해 유발되었고 레딩의 수줍음으로 인해 더욱 강화되었다고 생각했다.
음악 학자들은 소울과 R&B 외에 레딩이 록 음악에 기여한 바도 주목했으며, 특히 동시대의 윌슨 피켓과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이 연주한 "블랙 록"을 언급했다. 전기 작가 마크 리보스키는 "그의 음악적 팔레트는 가스펠과 블루스의 우주적 합금으로, 흑인과 백인 음악가 모두에 의해 거칠지만 우아한 틀로 다듬어졌으며, 소울과 록을 재구성하고 빅 밴드 이후 미국이 들었던 가장 전염성 있는 토착 음악을 확고히 했다"고 썼다.
많은 장르의 아티스트들이 레딩을 음악적 영향으로 언급했다. 조지 해리슨은 "Respect"가 "Drive My Car"에 영감을 주었다고 말했다. 롤링 스톤스도 레딩을 주요 영향으로 언급했다. 레딩의 영향을 받은 다른 아티스트로는 레드 제플린, 그레이트풀 데드, 레너드 스키너드, 도어스, 그리고 초기 소울 및 R&B 음악가 거의 모두가 포함된다. 예를 들어 알 그린, 에타 제임스, 윌리엄 벨, 아레사 프랭클린, 마빈 게이, 아서 콘리 등이 있다. 재니스 조플린은 그의 밴드 빅 브라더 앤 더 홀딩 컴퍼니의 기타리스트 샘 앤드루에 따르면 그의 노래 스타일에 영향을 받았다. 그녀는 레딩의 노래를 들은 후 "그냥 미끄러지듯 노래하는 대신 노래를 밀어붙이는 법"을 배웠다고 말했다.
비 지스의 배리 깁과 로빈 깁은 레딩이 녹음할 곡 "To Love Somebody"를 작곡했다. 레딩은 이 곡을 좋아했고, 마지막 콘서트에서 돌아오면 "녹음할 것"이라고 배리가 말했다. 그들은 이 곡을 레딩의 추모곡으로 헌정했다.
7.3. 수상 및 명예
레딩 사망 후, 프랑스의 아카데미 뒤 재즈는 그의 이름을 딴 상을 제정했다. '프릭스 오티스 레딩'은 R&B 분야 최고의 음반 발매작에 수여된다. 레딩은 스택스에서 발매된 The Otis Redding Story로 이 상의 첫 수상자가 되었다. 이 상의 후속 수상자로는 아레사 프랭클린, 아이크 앤 티나 터너, 커티스 메이필드 등이 있다. 1968년, 전미 텔레비전 및 라디오 아나운서 협회 (NATRA)는 그를 기리기 위해 오티스 레딩 상을 제정했다.
영국 음악 신문 멜로디 메이커 독자들은 레딩을 1967년 최고의 보컬리스트로 선정했으며, 이는 지난 10년간 1위를 차지했던 엘비스 프레슬리를 제친 것이었다.
레딩은 1969년 제11회 그래미상 시상식에서 "(Sittin' On) The Dock of the Bay"로 사후에 두 개의 그래미상을 수상했다. 로큰롤 명예의 전당은 1989년 레딩을 헌액하며, 그의 이름이 "가스펠과 리듬 앤 블루스의 변형을 통해 미국의 흑인 경험에서 비롯된 펑키하고 세속적인 증언의 형태로 나타난 소울 음악이라는 용어와 동의어"라고 선언했다. 1988년에는 조지아 음악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5년 후인 1993년, 미국 우정청은 그를 기리는 29센트 기념 우표를 발행했다. 레딩은 1994년 작곡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고, 1999년에는 그래미 평생 공로상을 수상했다. 로큰롤 명예의 전당은 그의 세 곡인 "Shake", "(Sittin' On) The Dock of the Bay", "Try a Little Tenderness"를 "록 앤 롤을 형성한 500곡" 목록에 포함시켰다.
미국 음악 잡지 롤링 스톤은 레딩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 100인" 목록에서 21위,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가수 100인" 목록에서 8위에 올렸다. Q 매거진은 레딩을 "가장 위대한 가수 100인" 중 프랭크 시나트라, 프랭클린, 프레슬리 다음으로 4위에 선정했다.
그의 앨범 중 5개(Otis Blue: Otis Redding Sings Soul, Dreams to Remember: The Otis Redding Anthology, The Dock of the Bay, Complete & Unbelievable: The Otis Redding Dictionary of Soul, Live in Europe)가 롤링 스톤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앨범 500선" 목록에 올랐다. 첫 번째 앨범인 Otis Blue는 음악 평론가들의 특별한 찬사를 받았는데, 롤링 스톤 목록에서 74위에 올랐을 뿐만 아니라, NME는 그들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앨범" 목록에서 35위에 올렸다. 음악 평론가 로버트 크리스트가우는 Otis Blue를 "소울의 몇 안 되는 믿을 수 있는 장편 아티스트 중 한 명의 첫 위대한 앨범"이라고 말했으며, 레딩의 "오리지널 LP들은 60년대의 가장 지능적으로 구상된 흑인 앨범 중 하나였다"고 평했다.

2002년, 메이컨시는 시의 게이트웨이 파크에 기념 동상(32.838625°N, 83.621472°W)을 세워 그들의 고향 아들을 기렸다. 이 공원은 오크멀지강을 가로지르는 오티스 레딩 기념교 옆에 위치해 있다. 리듬 앤 블루스 재단은 2006년 레딩을 파이오니어 상 수상자로 선정했다. 빌보드는 같은 해 레딩에게 "오티스 레딩 우수성 상"을 수여했다. 1년 후 그는 캘리포니아의 할리우드 록워크에 헌액되었다.
2007년, 레딩의 미망인은 남편을 기리기 위해 오티스 레딩 재단을 설립했다. 이 재단은 메이컨에서 음악 및 예술 교육 프로그램을 계속 제공하고 있다. 2013년 8월 17일, 그가 마지막 공연을 했던 레오스 카지노가 있던 클리블랜드에서 레딩은 클리블랜드 주립 대학교의 국립 리듬 앤 블루스 음악 명예의 전당의 첫 헌액자로 이름을 올렸다.
8. 디스코그래피
8.1. 정규 스튜디오 앨범
- Pain in My Heart (1964)
- The Great Otis Redding Sings Soul Ballads (1965)
- Otis Blue/Otis Redding Sings Soul (1965)
- The Soul Album (1966)
- Complete & Unbelievable: The Otis Redding Dictionary of Soul (1966)
- King & Queen (칼라 토마스와 함께) (1967)
8.2. 사후 발매 스튜디오 앨범
- The Dock of the Bay (1968)
- The Immortal Otis Redding (1968)
- In Person at the Whisky a Go Go (1968)
- Love Man (1969)
- Tell the Truth (1970)
- Remember Me (1992)
8.3. 싱글
- "Gettin' Hip / Gamma Lama" (Alshire 5082, 1961)
- "These Arms of Mine / Hey Hey Baby" (Volt 103, 1962)
- "That's What My Heart Needs / Mary's Little Lamb" (Volt 109, 1963)
- "Pain in My Heart / Something Is Worrying Me" (Volt 112, 1963)
- "Come to Me / Don't Leave Me This Way" (Volt 116, 1964)
- "Security / I Want to Thank You" (Volt 117, 1964)
- "Chained and Bound / Your One and Only Man" (Volt 121, 1964)
- "Mr. Pitiful / That's How Strong My Love Is" (Volt 124, 1965)
- "I've Been Loving You Too Long (to Stop Now) / I'm Depending on You" (Volt 126, 1965)
- "Respect / Old Man Trouble" (Volt 128, 1965)
- "I Can't Turn You Loose / Just One More Day" (Volt 130, 1965)
- "Satisfaction / Any Ole Way" (Volt 132, 1966)
- "My Lover's Prayer / Don't Mess with Cupid" (Volt 136, 1966)
- "Fa-fa-fa-fa-fa (Sad Song) / Good to Me" (Volt 138, 1966)
- "Try a Little Tenderness / I'm Sick Ya'll" (Volt 141, 1966)
- "Tramp / Tell It Like It Is" (with Carla Thomas) (Stax 216, 1967)
- "I Love You More than Words Can Say / Let Me Come on Home" (Volt 146, 1967)
- "Shake / You Don't Miss Your Water" (Volt 149, 1967)
- "Glory of Love / I'm Coming Home" (Volt 152, 1967)
- "Knock on Wood / Let Me Be Good to You" (with Carla Thomas) (Stax 228, 1967)
- "(Sittin' on) The Dock of the Bay / Sweet Lorene" (Volt 157, 1968)
- "The Happy Song (Dum-dum) / Open the Door" (Volt 163, 1968)
- "Lovey Dovey / New Year's Resolution" (with Carla Thomas) (Stax 244, 1968)
- "Amen / Hard to Handle" (Atco 6592, 1968)
- "I've Got Dreams to Remember / Nobody's Fault but Mine" (Atco 6612, 1968)
- "White Christmas / Merry Christmas Baby" (Atco 6631, 1968)
- "Papa's Got a Brand New Bag / Direct Me" (Atco 6636, 1968)
- "A Lover's Question / You Made a Man out of Me" (Atco 6654, 1969)
- "When Something Is Wrong with My Baby / Ooh Carla, Ooh Otis" (with Carla Thomas) (Atco 6665, 1969)
- "Love Man / Can't Turn You Loose" (Atco 6677, 1969)
- "Free Me / (Your Love Has Lifted Me) Higher and Higher" (Atco 6700, 1969)
- "Look at That Girl / That's a Good Idea" (Atco 6723, 1969)
- "Demonstration / Johnny's Heartbreak" (Atco 6742, 1969)
- "Give Away None of My Love / Snatch a Little Piece" (Atco 6766, 1970)
- "I've Been Loving You too Long (live) / Try a Little Tenderness" (live) (Atco 6802, 1971)
- "My Girl / (same)" (Atco 6907, 19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