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제임스에타 호킨스(Jamesetta Hawkins제임스에타 호킨스영어, 1938년 1월 25일 ~ 2012년 1월 20일)는 에타 제임스(Etta James에타 제임스영어)라는 예명으로 활동한 미국의 저명한 가수이자 작곡가이다. 1954년 음악 경력을 시작한 이래 가스펠, 블루스, 재즈, R&B, 로큰롤, 솔 등 다채로운 장르를 넘나들며 활동했다. 그녀는 "더 월플라워"(1957), "At Last"(1960), "Something's Got a Hold on Me"(1962), "텔 마마", "I'd Rather Go Blind"(이상 1977) 등의 히트곡으로 큰 명성을 얻었다.
에타 제임스의 깊고 구수한 목소리는 R&B와 로큰롤 사이의 간극을 좁히는 다리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녀는 평생 동안 6개의 그래미상과 17개의 블루스 음악상을 수상했으며, 1993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 1999년 그래미 명예의 전당, 2001년 블루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2003년에는 그래미 평생공로상을 수상하며 그 업적을 인정받았다. 롤링 스톤지는 그녀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가수 100인' 중 22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 100인' 중 62위로 선정했다. 빌보드 또한 2015년 '역사상 가장 위대한 R&B 아티스트 35인'에 그녀를 포함하며, "대담하고 타협 없는 보컬로 블루스, R&B/솔부터 로큰롤, 재즈, 가스펠에 이르기까지 모든 장르를 화려하게 소화했다"고 극찬했다. 로큰롤 명예의 전당은 그녀를 "20세기 최고의 목소리 중 하나"이자 "영원한 블루스의 여인"으로 칭송했다.
그녀의 개인적인 삶은 헤로인 중독, 폭력, 투옥 등 여러 고난으로 점철되었으나, 1980년대 후반 앨범 《세븐 이어 이치》를 통해 성공적으로 재기했다. 말년에는 알츠하이머병과 백혈병 진단을 받으며 투병 생활을 이어가다 2012년 1월 20일, 7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 초기 생애 및 경력 시작
에타 제임스는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보컬 능력을 보였으며, 이후 조니 오티스와의 만남을 통해 본격적인 음악 경력을 시작하며 초기 성공을 거두었다.
2.1. 유년기 및 음악 교육
제임스에타 호킨스는 1938년 1월 25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서 당시 14세였던 어머니 도로시 호킨스에게서 태어났다. 친아버지에 대한 정보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녀는 자신이 당구 선수 루돌프 "미네소타 패츠" 원더론의 딸이라고 추측했으며, 1987년에 그를 잠시 만난 적도 있다. 그녀의 어머니는 와츠의 아파트에서 자주 부재했으며, 에타는 주로 여러 위탁 부모와 함께 지냈는데, 그중에서도 "사지(Sarge)"와 "마마 루(Mama Lu)"가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에타는 자신의 어머니를 "미스터리 레이디(Mystery Lady)"라고 불렀다.
어린 시절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보살핌 속에서 침례교회에 정기적으로 출석했던 에타 제임스는 5세 때부터 사우스 로스앤젤레스의 세인트 폴 침례교회 합창단 음악 감독이었던 제임스 얼 하인스에게 전문적인 보컬 훈련을 받았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합창단 솔로이스트로 활약하며 지역 라디오 방송국에서 공연하기도 했다. 하인스는 그녀의 목소리가 뱃속에서 나오도록 하기 위해 노래를 부를 때 종종 가슴을 때렸다고 한다. 위탁 아버지인 사지 또한 학대적이었는데, 술에 취한 채 집에서 포커 게임을 하던 중 이른 아침에 에타를 깨워 친구들 앞에서 억지로 노래를 부르게 했다. 이러한 굴욕적인 환경에서 노래를 강요당한 트라우마는 그녀의 경력 전반에 걸쳐 즉흥적으로 노래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만들었다.
1950년 마마 루가 사망하자, 에타의 친어머니는 그녀를 샌프란시스코의 필모어 지구로 데려갔다. 2년 안에 그녀는 두왑을 듣기 시작했고, 크리올레츠(Creolettes크리올레츠영어)라는 걸 그룹을 결성하게 되었다.
2.2. 첫 레코딩 및 초기 성공
14세가 되던 해, 에타 제임스는 음악가 조니 오티스를 만났다. 그들이 어떻게 만났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다양하다. 오티스의 말에 따르면, 에타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자신의 공연 후 호텔로 찾아와 오디션을 설득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이야기는 오티스가 로스앤젤레스 나이트클럽에서 크리올레츠의 공연을 보고 행크 발라드의 "Work with Me, Annie"에 대한 "답가"를 녹음하도록 요청했다는 것이다.
오티스는 크리올레츠를 지도하여 모던 레코드와 계약을 맺도록 도왔고, 그룹은 이름을 '피치스(Peaches피치스영어)'로 변경했다. 이때 오티스는 에타에게 본명인 제임스에타를 뒤집어 '에타 제임스'라는 예명을 지어주었다. 1954년, 제임스는 "더 월플라워"라는 곡을 공동 작곡하고 녹음했는데, 이 곡은 원래 "Roll with Me, Henry"였으나 당시 성적인 내용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검열을 피하기 위해 제목이 변경되었다. 1955년 2월, 이 곡은 핫 리듬 & 블루스 트랙 차트에서 1위에 올랐다. 이 성공으로 피치스는 리틀 리처드의 전국 투어 오프닝 무대에 설 수 있었다.
제임스가 리틀 리처드와 투어 중이던 때, 팝 가수 조지아 깁스가 그녀의 곡을 커버하여 "댄스 위드 미, 헨리(Dance With Me, Henry댄스 위드 미, 헨리영어)"라는 제목으로 발매했고, 이 곡은 크로스오버 히트곡이 되어 빌보드 핫 100에서 1위를 차지했다. 이로 인해 에타는 분노를 표출했다.
피치스를 떠난 후, 제임스는 "굿 록킨 대디(Good Rockin' Daddy굿 록킨 대디영어)"로 또 다른 R&B 히트곡을 냈지만, 후속곡으로는 고전했다. 1960년 모던 레코드와의 계약 갱신 시점에 그녀는 체스 레코드와 계약을 맺었고, 이곳에서 레이블의 초기 스타 중 한 명이 되었다. 이 무렵, 그녀는 두왑 그룹 더 문글로우즈의 창립자이자 가수인 하비 푸쿠아와 연인 관계가 되었다.
음악가 바비 머레이는 20년 넘게 에타 제임스와 함께 투어했다. 그는 제임스가 15세에 첫 히트 싱글을 냈고, 16세에 B.B. 킹과 사귀었다고 기록했다. 제임스는 B.B. 킹의 히트 싱글 "스위트 식스틴(Sweet Sixteen스위트 식스틴영어)"이 자신에 관한 것이라고 믿었다. 1955년 초, 그녀와 당시 19세의 신인 가수 엘비스 프레슬리는 선 스튜디오에서 녹음하며 B.B. 킹의 열렬한 팬이었는데, 멤피스 외곽의 큰 클럽에서 함께 공연했다. 그녀의 자서전에서 그녀는 어린 프레슬리의 예의 바름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언급했다. 또한 몇 년 후, 프레슬리가 그녀의 친한 친구 재키 윌슨을 열악한 요양원에서 더 나은 시설로 옮기고 모든 비용을 지불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회상했다. 프레슬리는 1년 후에 사망했지만, 윌슨은 프레슬리가 찾아준 요양원에서 10년을 더 살았다.
3. 주요 활동 시기
에타 제임스의 음악적 경력은 1960년대 체스 레코드와 계약하며 전성기를 맞았고, 이후 약물 중독 등 개인적인 고난을 겪으면서도 꾸준히 재기하며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3.1. 체스 레코드 시대 (1960-1978)

체스 레코드와 계약 후, 에타 제임스가 하비 푸쿠아와 함께 발매한 첫 히트 싱글은 "이프 아이 캔트 해브 유(If I Can't Have You이프 아이 캔트 해브 유영어)"와 "스푼풀(Spoonful스푼풀영어)"이었다. 그녀의 첫 솔로 히트곡은 두왑 스타일의 R&B 곡인 "All I Could Do Was Cry"로, R&B 차트에서 2위를 차지했다. 체스 레코드의 공동 설립자 레너드 체스는 제임스를 팝 차트로도 진출할 수 있는 클래식 발라드 스타일의 가수로 보았고, 곧 그녀의 음악에 바이올린과 다른 현악기를 추가했다. 제임스가 녹음한 첫 현악 발라드는 1960년 5월에 녹음된 "마이 디어리스트 달링(My Dearest Darling마이 디어리스트 달링영어)"으로, R&B 차트 톱 5에 올랐다. 제임스는 또한 같은 레이블 소속이었던 척 베리의 "Back in the U.S.A."에서 백 보컬을 불렀다.
1960년 말에 발매된 그녀의 데뷔 앨범 《At Last!》는 재즈 표준곡, 블루스, 두왑, R&B 등 다양한 음악 선곡으로 주목받았다. 이 앨범에는 훗날 클래식이 된 "I Just Want to Make Love to You"와 "A Sunday Kind of Love"가 포함되었다. 1961년 초, 제임스는 그녀의 대표곡이 될 "At Last"를 발매했는데, 글렌 밀러의 곡을 리메이크한 것으로 R&B 차트 2위, 빌보드 핫 100 차트 47위를 기록했다. 이 곡은 예상만큼 큰 상업적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그녀의 버전이 가장 잘 알려진 곡이 되었다. 제임스는 이어서 현악기가 포함된 "트러스트 인 미(Trust in Me트러스트 인 미영어)"를 발매했다. 같은 해(1960), 제임스는 두 번째 스튜디오 앨범인 《더 세컨드 타임 어라운드》를 발매했다. 이 앨범은 첫 앨범과 같은 방향으로 재즈와 팝 표준곡을 커버했으며, 많은 곡에 현악기가 사용되었다. 이 앨범에서는 "풀 댓 아이 앰(Fool That I Am풀 댓 아이 앰영어)"과 "돈트 크라이 베이비(Don't Cry Baby돈트 크라이 베이비영어)" 두 개의 히트 싱글이 나왔다.
이듬해부터 제임스는 음악에 가스펠 요소를 추가하기 시작했으며, "Something's Got a Hold on Me"를 발매하여 R&B 차트 4위, 팝 톱 40 히트를 기록했다. 이 성공은 곧이어 "스톱 더 웨딩(Stop the Wedding스톱 더 웨딩영어)"으로 이어졌는데, 이 곡은 R&B 차트 6위에 올랐고 역시 가스펠 요소가 포함되어 있었다. 1963년, 그녀는 "푸시 오버(Pushover푸시 오버영어)"로 또 다른 큰 히트를 기록했으며, 테네시주 내슈빌의 뉴 에라 클럽에서 녹음된 라이브 앨범 《Etta James Rocks the House》를 발매했다. 몇 년간 사소한 히트곡들을 내다가 1965년 이후 제임스의 경력은 침체기를 겪기 시작했다.
고립 기간을 거쳐 1967년 녹음 활동을 재개한 그녀는 앨라배마주 머슬 숄스의 전설적인 FAME 스튜디오에서의 녹음 덕분에 더욱 강렬한 R&B 곡들로 다시 부상했다. 이 세션에서 클래런스 카터가 공동 작곡한 그녀의 컴백 히트곡 "텔 마마"가 탄생했는데, 이 곡은 R&B 차트 10위, 팝 차트 23위에 올랐다. 같은 해에 발매된 동명 앨범에는 오티스 레딩의 "시큐리티(Security시큐리티영어)"에 대한 그녀의 해석도 포함되어 있었다. "텔 마마"의 B-사이드였던 "I'd Rather Go Blind"는 블루스 클래식이 되었고 많은 다른 아티스트들이 녹음했다. 그녀의 자서전 《분노하여 살아남다(Rage to Survive분노하여 살아남다영어)》에서 그녀는 친구 엘링턴 "푸기" 조던이 감옥에 있을 때 그를 방문했을 때 이 곡의 윤곽을 들었다고 썼다. 그녀의 설명에 따르면, 그녀는 조던과 함께 곡의 나머지를 썼지만 세금상의 이유로 당시 파트너였던 빌리 포스터에게 작곡 크레딧을 주었다.
이러한 성공 이후, 제임스는 콘서트 출연 요청이 쇄도하는 인기 가수가 되었지만, 1960년대 초중반의 전성기만큼의 성공은 다시는 거두지 못했다. 그녀의 음반들은 1970년대 초까지 R&B 톱 40에 계속 차트인했으며, "루저스 위퍼스(Losers Weepers루저스 위퍼스영어)"(1970)와 "아이 파운드 어 러브(I Found a Love아이 파운드 어 러브영어)"(1972)와 같은 싱글이 있었다. 제임스는 계속 체스 레코드에서 녹음했지만, 1969년 음반사 경영자 레너드 체스의 사망에 큰 충격을 받았다. 제임스는 1973년에 자신의 이름을 딴 앨범을 발매하며 록과 펑크 장르에 도전했는데, 스테판울프와 재니스 조플린과 작업했던 유명 록 프로듀서 가브리엘 메클러가 제작을 맡았다. 조플린은 제임스를 존경했고 콘서트에서 "텔 마마"를 커버하기도 했다. 제임스의 1973년 앨범은 다양한 음악 스타일을 선보였으며 그래미상 후보에 올랐다. 그러나 이 앨범은 큰 히트곡을 내지 못했고, 1974년의 후속 앨범 《컴 어 리틀 클로저》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1973년의 《에타 제임스》 앨범처럼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았다.
1975년, 제임스는 로스앤젤레스의 슈버트 극장에서 코미디언 리처드 프라이어의 오프닝 무대를 장식했다. 제임스는 체스 레코드(현재 올 플래티넘 레코드 소유)에서 계속 녹음하여 1976년에 앨범 《Etta Is Betta Than Evvah!》를 하나 더 발매했다. 1978년에 워너 브라더스를 위해 제리 웩슬러가 프로듀싱한 그녀의 앨범 《딥 인 더 나이트》는 그녀의 레퍼토리에 더 많은 록 기반 음악을 통합했다. 같은 해, 제임스는 롤링 스톤스의 오프닝 공연을 맡았고 몽트뢰 재즈 페스티벌에서도 공연했다. 그러나 이 짧은 성공 이후, 그녀는 체스 레코드를 떠났고 약물 중독과 알코올 중독으로 고통받으며 10년 동안 음반을 녹음하지 않았다.
3.2. 후기 활동 및 재기 (1978-2011)

녹음 활동을 중단한 동안에도 에타 제임스는 1980년대 초중반에 가끔씩 공연을 계속했는데, 1982년 12월 그레이트풀 데드 콘서트에서 두 차례 게스트로 출연했고, 뉴저지에서 열린 존 메이올의 블루스브레이커스 1982년 재결합 공연에도 게스트로 참여했다. 1984년, 그녀는 데이비드 울퍼에게 연락하여 1984년 하계 올림픽 개막식에서 공연할 수 있는지 물었고, 그곳에서 "When the Saints Go Marching In"을 불렀다. 1987년에는 다큐멘터리 영화 《헤일! 헤일! 로큰롤》에서 척 베리와 함께 "로큰롤 음악"을 공연했다.
1989년, 그녀는 아일랜드 레코드와 계약하여 《세븐 이어 이치》와 《Stickin' to My Guns》 앨범을 발매했는데, 두 앨범 모두 배리 베켓이 프로듀싱했으며 FAME 스튜디오에서 녹음되었다. 또한 1989년, 제임스는 조 월시와 앨버트 콜린스와 함께 로스앤젤레스의 윌턴 극장에서 열린 콘서트에서 영화 《재즈 비전스: 점프 더 블루스 어웨이(Jazzvisions: Jump the Blues Away재즈 비전스: 점프 더 블루스 어웨이영어)》를 촬영했다. 백 밴드 멤버 중 다수는 로스앤젤레스의 최고 실력파 연주자들로, 릭 로사스(베이스), 마이클 휴이(드럼), 에드 샌포드(해먼드 B3 오르간), 킵 노블(피아노), 그리고 제임스의 오랜 기타리스트 조시 스클레어가 있었다.
제임스는 랩 가수 데프 제프와 함께 제임스의 재즈 보컬과 힙합을 혼합한 곡 "드롭핀 라임스 온 드럼스(Droppin' Rhymes on Drums드롭핀 라임스 온 드럼스영어)"에 참여했다. 1992년, 그녀는 제리 웩슬러가 일렉트라 레코드를 위해 프로듀싱한 앨범 《더 라이트 타임》을 녹음했다. 그녀는 1993년에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1993년, 제임스는 프라이빗 뮤직 레코드와 계약하고 빌리 홀리데이 헌정 앨범인 《미스터리 레이디: 송스 오브 빌리 홀리데이》를 녹음했다. 이 앨범은 제임스의 음악에 더 많은 재즈 요소를 통합하는 추세를 만들었다. 이 앨범으로 제임스는 1994년 최우수 재즈 보컬 퍼포먼스 여성 부문에서 첫 그래미상을 수상했다. 1995년에는 데이비드 리츠와 공동 집필한 그녀의 자서전 《분노하여 살아남다(Rage to Survive분노하여 살아남다영어)》가 출판되었다. 또한 1995년에는 앨범 《타임 애프터 타임(Time After Time타임 애프터 타임영어)》을 녹음했다. 크리스마스 앨범인 《12 송스 오브 크리스마스》는 1998년에 발매되었다.
1990년대 중반에 이르러, 제임스의 초기 음악들은 고전으로 여겨지며 광고에 사용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아이 저스트 워너 메이크 러브 투 유"의 일부가 영국의 다이어트 콜라 광고 캠페인에 사용된 후, 이 곡은 1996년 영국 차트 톱 텐에 다시 진입했다.
1998년 《Life, Love & the Blues》 앨범 발매와 함께, 제임스는 자신의 아들 돈토와 사메토를 각각 드럼과 베이스 연주자로 백 밴드에 합류시켰다. 그들은 그녀의 투어 밴드의 일원이었다. 그녀는 계속해서 프라이빗 뮤직에서 녹음했는데, 2000년에는 그녀의 R&B 뿌리로 돌아간 블루스 앨범 《Matriarch of the Blues》를 발매했다.
2001년, 그녀는 블루스 명예의 전당과 로커빌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는데, 후자는 로큰롤과 로커빌리의 발전에 기여한 공로 때문이었다. 2003년, 그녀는 그래미 평생공로상을 수상했다. 2004년 발매작 《블루 가데니아(Blue Gardenia블루 가데니아영어)》에서는 재즈 스타일로 회귀했다. 2005년에 발매된 프라이빗 뮤직에서의 마지막 앨범 《레츠 롤》은 최우수 컨템포러리 블루스 앨범 부문에서 그래미상을 수상했다.
2004년, 롤링 스톤지는 그녀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 100인' 중 62위로 선정했다.
제임스는 1977년, 1989년, 1990년, 1993년 몽트뢰 재즈 페스티벌과 같은 세계 최고의 재즈 페스티벌에서 공연했다. 그녀는 전설적인 몬테레이 재즈 페스티벌에서 9번, 샌프란시스코 재즈 페스티벌에서 5번 공연했다. 1990년, 1997년, 2004년, 2007년 플레이보이 재즈 페스티벌에서도 공연했다. 그녀는 1978년, 1982년, 1989년, 1990년, 1991년, 1993년 노스 씨 재즈 페스티벌에서 6번 공연했다. 2006년과 2009년에는 뉴올리언스 재즈 & 헤리티지 페스티벌에서도 공연했다. 또한 미국 전역의 무료 여름 예술 축제에서도 자주 공연했다.

2008년, 제임스는 영화 《캐딜락 레코드》에서 가수 비욘세가 연기했다. 이 영화는 18년 동안 제임스의 레이블이었던 체스 레코드의 가상 이야기로, 레이블 설립자이자 프로듀서인 레너드 체스가 제임스 외 다른 아티스트들의 경력을 어떻게 도왔는지를 다룬다. 영화에는 비욘세가 부른 "앳 라스트"가 포함되었다. 비욘세는 버락 오바마의 취임식 무도회에서 이 노래를 공연하도록 초청받았다. 몇 주 후 제임스는 비욘세가 "내 노래를 부른다"며 공개적으로 불만을 표출했으나, 나중에 자신의 비판적인 발언이 농담으로 받아들여지기를 의도한 것이며, 오바마 취임식에서 직접 노래를 부르도록 초대받지 못한 개인적인 상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후 알츠하이머병과 "약물로 인한 치매"가 그녀의 비욘세 놀스에 대한 부정적인 발언에 기여했다고 보도되었다.
2009년 4월, 71세의 나이로 제임스는 프로그램 《댄싱 위드 더 스타》에서 "앳 라스트"를 공연하며 마지막 TV 출연을 했다. 2009년 5월, 그녀는 블루스 재단으로부터 '올해의 솔/블루스 여성 아티스트상'을 수상했는데, 이는 그녀가 이 상을 아홉 번째로 받은 것이었다. 그녀는 계속 투어를 이어갔지만, 2010년에는 건강 악화로 인해 콘서트 일정을 취소해야 했다. 이때 그녀는 이미 치매와 백혈병을 앓고 있었다. 2011년 11월, 제임스는 마지막 앨범 《더 드리머》를 발매하며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았다. 그녀는 앨범 발매와 동시에 은퇴를 선언했다.
2011년 스웨덴 DJ 아비치가 그녀의 1962년 곡 "섬싱스 갓 어 홀드 온 미"를 샘플링한 곡 "레벨스"로 상당한 차트 성공을 거두면서 제임스의 지속적인 영향력이 확인되었다. 같은 샘플이 2011년 이스트 코스트 래퍼 플로 라이다의 히트 싱글 "굿 필링"에도 사용되었다. 두 아티스트 모두 제임스의 사망에 조의를 표했다. 이러한 21세기적 재해석 이후 제임스의 원곡 또한 다시 차트에 올랐다.
4. 음악 스타일 및 영향
에타 제임스는 콘트랄토 음역대의 보컬을 소유했다. 그녀의 음악 스타일은 경력 과정에서 변화를 거쳤다. 1950년대 중반, 녹음 경력 초기에 제임스는 R&B 및 두왑 가수로 마케팅되었다. 1960년 체스 레코드와 계약한 후, 제임스는 데뷔 앨범 《앳 라스트!》에서 재즈 및 팝 음악 표준곡을 커버하며 전통 팝 스타일의 가수로 돌파구를 마련했다. 이후 제임스의 목소리가 깊고 거칠어지면서, 말년에는 음악 스타일이 솔과 재즈 장르로 옮겨갔다.
제임스는 한때 미국 음악사에서 가장 간과된 블루스 및 R&B 음악가 중 한 명으로 여겨졌다. 1990년대 초반에 그래미상과 블루스 재단으로부터 주요 업계 상을 받기 시작하면서야 비로소 폭넓은 인정을 받았다. 최근 몇 년 동안, 그녀는 리듬 앤 블루스와 로큰롤 사이의 간극을 좁히는 데 기여한 개척자로 칭송받으며 미국 음악사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제임스는 수많은 음악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는데, 특히 다이애나 로스, 크리스티나 아길레라, 재니스 조플린, 브랜디, 보니 레이트, 쉬미키아 코플랜드, 베스 하트, 파라모어의 헤일리 윌리엄스, 샤인다운의 브렌트 스미스 등이 있다. 또한 영국 아티스트 중에는 롤링 스톤스, 엘키 브룩스, 팔로마 페이스, 조스 스톤, 리타 오라, 에이미 와인하우스, 아델, 그리고 벨기에 가수 다니 클라인 등이 그녀의 영향을 받았다.


특히, 그녀의 노래 "Something's Got a Hold on Me"는 여러 방식으로 인정받았다. 브뤼셀의 음악 그룹 바야 콘 디오스는 1990년 앨범 《나이트 아울스(Night Owls나이트 아울스영어)》에서 이 곡을 커버했다. 크리스티나 아길레라가 부른 또 다른 버전은 2010년 영화 《버레스크》에 삽입되었다. 프리티 라이츠는 "파이널리 무빙(Finally Moving파이널리 무빙영어)"에서 이 곡을 샘플링했고, 이어서 아비치의 댄스 히트곡 "레벨스"와 플로 라이다의 싱글 "굿 필링"에서도 다시 샘플링되었다.
영국의 블루스 밴드 치킨 섀크는 에타 제임스의 1967년 싱글 "I'd Rather Go Blind"를 녹음했는데, 크리스틴 맥비가 리드 보컬을 맡아 밴드에게 큰 성공을 가져다주었다. 이 싱글은 1969년 멜로디 메이커 독자 투표에서 크리스틴 맥비가 '최고 여성 가수'로 선정될 만큼 성공적이었다.
5. 개인적인 삶
에타 제임스의 개인적인 삶은 복잡한 가족 관계와 건강 문제, 법적 어려움, 그리고 중독과의 힘든 싸움으로 점철되었다. 이러한 고난은 그녀의 삶과 경력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5.1. 가족 및 관계
에타 제임스는 1969년부터 2012년 사망할 때까지 아티스 밀스와 결혼 생활을 유지했다. 그녀에게는 돈토 제임스와 사메토 제임스라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각기 다른 아버지에게서 태어났다. 두 아들 모두 음악가가 되어 결국 어머니와 함께 전문적으로 공연했으며, 돈토는 1993년 몽트뢰에서 드럼을 연주했고, 사메토는 2003년경 베이스 기타를 연주하는 등 여러 공연과 투어에 참여했다.
5.2. 건강, 법적 문제 및 중독
1960년대 중반에 이르러, 제임스는 헤로인 중독에 시달렸다. 그녀는 자신의 중독을 해결하기 위해 부도 수표를 발행하고, 처방전을 위조하며, 친구들에게서 돈을 훔치기도 했다. 1966년에는 부도 수표 발행으로 체포되었고,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500 USD의 벌금을 내도록 명령받았다. 1969년에는 집행유예 위반으로 10일간 투옥되었다.
제임스는 로스앤젤레스의 타르자나 치료 센터를 포함한 여러 재활 센터를 계속해서 드나들었다. 그녀와 남편 아티스 밀스 모두 헤로인 소지로 체포되었을 때, 남편이 책임을 지고 10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1981년에 출소했다.
1973년, 제임스는 헤로인 소지로 체포되었다. 1974년에는 감옥 대신 약물 치료를 선고받았다. 이 기간 동안 그녀는 메타돈에 중독되었고, 자신의 복용량을 헤로인과 섞어 사용하곤 했다. 그녀는 36세부터 타르자나 정신병원에서 17개월을 보냈으며, 큰 고통을 겪었다. 1995년 자서전 《분노하여 살아남다(Rage to Survive분노하여 살아남다영어)》에서 그녀는 병원에서 보낸 시간이 자신의 삶을 변화시켰다고 말했다. 그러나 치료를 받은 후에도 약물 남용은 계속되었는데, 특히 함께 약물을 사용하는 남자와 관계를 맺은 후 더욱 심해졌다. 2010년에는 진통제 의존증으로 치료를 받았다.
또한 1990년대 이후에는 극심한 비만으로 고통받았다. 직접 걷는 것조차 어려워져 무대에는 전동 카트를 타고 등장하기도 했다. 2003년, 에타는 치료를 위해 위 우회 수술을 받아 90 kg 이상을 감량하는 데 성공했다.
5.3. 종교적 소속
에타 제임스는 어머니 도로시를 통해 네이션 오브 이슬람을 접하게 되었다. 도로시는 로스앤젤레스의 네이션 오브 이슬람 제27사원에서 가끔 모임에 참석했고, 그 가르침을 딸에게 전달했다. 그러나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보살핌 아래 제임스는 침례교 신자로 자랐다. 성인이 된 후, 제임스는 친구와 함께 애틀랜타의 네이션 오브 이슬람 사원에 참석하기 시작했으며, 그곳에서 미스터 루이스 X의 설교에서 위안을 찾고 "인종적 자긍심"을 느꼈다. 그녀는 '제임스에타 X'라는 이름을 채택했고 나중에 말콤 X의 할렘 사원에 합류하여 약 10년 동안 회원으로 남았다. 할렘에서 제임스는 젊은 권투 선수 카시우스 클레이와 친구가 되었다. 그녀는 네이션 오브 이슬람의 신념을 엄격하게 따르지는 않았으며, 당시에는 "유행 같은 것"이자 "급진적이고 인기 있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6. 사망

에타 제임스는 MRSA 박테리아에 의한 감염 치료를 위해 2010년 1월 병원에 입원했다. 입원 중 그녀의 아들 돈토는 2008년에 그녀가 알츠하이머병 진단을 받았음을 대중에게 공개했다.
2011년, 제임스는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남편 아티스 밀스는 제임스 재산의 단독 후견인으로 지정되어 그녀의 의료 관리를 감독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녀는 2012년 1월 20일, 73세의 나이로 캘리포니아주 리버사이드에 위치한 리버사이드 커뮤니티 병원에서 사망했다. 그녀의 사망은 1950년대 그녀를 발굴했던 조니 오티스의 사망 사흘 뒤에 발생했다. 그녀가 사망한 지 36일 후에는 그녀의 사이드맨이었던 레드 할로웨이도 사망했다.
그녀의 장례식은 알 샤프턴 목사가 주재했으며, 사망 8일 후 캘리포니아주 가데나의 그레이터 베서니 커뮤니티 교회에서 열렸다. 스티비 원더와 크리스티나 아길레라가 추모 공연을 펼쳤다. 그녀는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카운티의 잉글우드 공원 묘지에 안장되었다.
7. 수상 및 인정
에타 제임스는 1989년 이후, 그녀의 경력 후반에 이르러서야 로큰롤 명예의 전당과 미국 음반 예술 과학 아카데미를 포함한 8개의 다른 기관으로부터 30개 이상의 상과 인정을 받았다.
7.1. 명예의 전당 헌액 및 주요 표창
- 1989년, 새롭게 설립된 리듬 앤 블루스 재단은 "리듬 & 블루스 음악 발전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예술가"에게 수여하는 첫 번째 파이오니어 어워드 수상자 중 한 명으로 제임스를 포함시켰다.
- 이듬해인 1990년, 그녀는 "예술 분야에서 유색인종의 뛰어난 업적과 성과"에 수여되는 NAACP 이미지 어워드를 수상했다. 그녀는 이 상을 "자신이 속한 사람들로부터 받은 것"이라며 소중히 여겼다.
- 1993년, 제임스는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 2001년, 제임스는 로커빌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 2001년, 제임스는 블루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 2003년, 제임스는 헐리우드 볼리바드 7080번지에 위치한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스타를 받았다.
- 2005년, 제임스는 할리우드 록워크에 헌액되었다.
- 2006년, 제임스는 빌보드 R&B 파운더스 어워드(Billboard R&B Founders Award)를 수상했다.
- 2020년, 제임스는 내셔널 리듬 & 블루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7.2. 그래미 어워드
그래미상은 미국 음반 예술 과학 아카데미가 매년 수여하는 상이다. 제임스는 6개의 그래미상을 수상했다. 그녀의 첫 수상은 1995년으로, 빌리 홀리데이의 노래들을 커버한 앨범 《미스터리 레이디》로 최우수 재즈 보컬 퍼포먼스 여성 부문을 수상했다. 그녀의 다른 두 앨범인 《레츠 롤》(2003년, 최우수 컨템포러리 블루스 앨범)과 《Blues to the Bone》(2004년, 최우수 트래디셔널 블루스 앨범) 또한 수상했다. 그녀의 초기 곡 중 두 곡은 "질적 또는 역사적 중요성"을 인정받아 그래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는데, 1999년의 "At Last"와 2008년의 "The Wallflower (Dance with Me, Henry)"가 그것이다. 2003년, 그녀는 그래미 평생공로상을 수상했다.
연도 | 곡/앨범 | 부문 | 비고 |
---|---|---|---|
1961 | All I Could Do Was Cry | 최우수 리듬 & 블루스 퍼포먼스 | |
1962 | Fool That I Am | 최우수 리듬 & 블루스 퍼포먼스 | |
1968 | Tell Mama | 최우수 R&B 솔로 보컬 퍼포먼스 (여성) | |
1969 | Security | ||
1974 | Etta James | ||
1975 | St. Louis Blues | ||
1989 | Seven Year Itch | 최우수 컨템포러리 블루스 녹음 | |
1991 | Stickin' to My Guns | ||
1993 | The Right Time | ||
1995 | Mystery Lady: Songs of Billie Holiday | 최우수 재즈 보컬 퍼포먼스 | |
1999 | At Last | 그래미 명예의 전당 | 헌액 |
Life, Love & the Blues | 최우수 컨템포러리 블루스 앨범 | ||
2000 | 하트 오브 어 우먼 | 최우수 재즈 보컬 퍼포먼스 | |
2002 | Matriarch of the Blues | 최우수 컨템포러리 블루스 앨범 | |
2003 | Etta James | 그래미 평생공로상 | 헌액 |
2004 | Let's Roll | 최우수 컨템포러리 블루스 앨범 | |
2005 | Blues to the Bone | 최우수 트래디셔널 블루스 앨범 | |
2008 | The Wallflower | 그래미 명예의 전당 | 헌액 |
7.3. 블루스 뮤직 어워드
블루스 음악과 그 유산을 육성하기 위해 테네시주 멤피스에 설립된 비영리 단체인 블루스 재단의 회원들은 1980년 설립 이후 거의 매년 제임스를 블루스 음악상 후보로 지명했다. 그녀는 1989년 이래 14차례에 걸쳐 '올해의 블루스 여성 아티스트상'을 수상했으며, 1999년부터 2007년까지는 연속으로 이 상을 받았다. 그녀의 앨범 《라이프, 러브, & 더 블루스(Life, Love, & the Blues라이프, 러브, & 더 블루스영어)》(1999), 《버닝 다운 더 하우스(Burnin' Down the House버닝 다운 더 하우스영어)》(2003), 《레츠 롤(Let's Roll영어)》(2004)은 '올해의 솔/블루스 앨범'을 수상했으며, 2001년에는 블루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8. 음반 목록
에타 제임스는 1960년대 초부터 2011년까지 왕성한 활동을 펼치며 총 30장의 스튜디오 앨범과 50장 이상의 싱글을 발표했다. 그녀의 앨범 중 어느 것도 빌보드 200 톱 텐에 진입하지 못했고, 싱글 또한 빌보드 핫 100 톱 텐에 오르지 못했지만, "앳 라스트"와 같은 곡들은 대중에게 깊이 각인된 대표작이 되었다.
연도 | 앨범 제목 및 정보 | 최고 차트 순위 | |||
---|---|---|---|---|---|
미국 | R&B 미국 | 블루스 미국 | 재즈 미국 | ||
1961 | At Last!
| 68 | - | - | - | |
더 세컨드 타임 어라운드
| - | - | - | - | ||
1962 | 에타 제임스
| - | - | - | - | |
Etta James Sings for Lovers
| - | - | - | - | ||
1963 | Etta James Top Ten
| 117 | - | - | - | |
1965 | 더 퀸 오브 솔
| - | - | - | - | |
1966 | 콜 마이 네임
| - | - | - | - | |
1968 | Tell Mama
| 82 | 21 | - | - | |
1970 | Etta James Sings Funk
| - | - | - | - | |
1971 | Losers Weepers
| - | - | - | - | |
1973 | 에타 제임스
| 154 | 41 | - | - | |
1974 | 컴 어 리틀 클로저
| - | 47 | - | - | |
1976 | Etta Is Betta Than Evvah!
| - | - | - | - | |
1978 | Deep in the Night
| - | - | - | - | |
1980 | 체인지스
| - | - | - | - | |
1989 | 세븐 이어 이치
| - | - | - | - | |
1990 | Stickin' to My Guns
| - | - | - | - | |
1992 | 더 라이트 타임
| - | - | - | - | |
1994 | Mystery Lady: Songs of Billie Holiday
| - | - | - | 2 | |
1995 | 타임 애프터 타임
| - | - | - | 5 | |
1997 | Love's Been Rough on Me
| - | - | 6 | - | |
1998 | Life, Love & the Blues
| - | - | 3 | - | |
1998 | 12 송스 오브 크리스마스
| - | - | 5 | - | |
1999 | 하트 오브 어 우먼
| - | - | 4 | - | |
2000 | Matriarch of the Blues
| - | - | 2 | - | |
2001 | 블루 가데니아
| - | - | - | 1 | |
2003 | 레츠 롤
| - | - | 1 | - | |
2004 | Blues to the Bone
| - | - | 4 | - | |
2006 | 올 더 웨이
| - | - | - | - | |
2011 | 더 드리머
| - | 41 | 2 | - | |
"-"는 차트에 진입하지 못한 앨범을 나타낸다. | |||||
9. 저서
- 《분노하여 살아남다: 에타 제임스 이야기》 (2003년) - 데이비드 리츠와 에타 제임스 공동 집필
- 《아메리칸 레전드: 에타 제임스의 삶》 (2014년) - 찰스 리버 에디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