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오트마어 쿠어트 헤어만 발터(Ottmar Kurt Herrmann Walter오트마어 쿠어트 헤어만 발터독일어; 1924년 3월 6일 ~ 2013년 6월 16일)는 독일의 전 축구 선수로, 현역 시절 주로 공격수로 활약했다. 그는 친형 프리츠 발터와 함께 1. FC 카이저슬라우테른에서 뛰었으며, 특히 1954년 FIFA 월드컵에서 서독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 출전하여 독일의 사상 첫 월드컵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클럽 경력에서는 1. FC 카이저슬라우테른에서 321번의 리그 및 컵 경기에서 336골을 기록하며 역대 최다 득점 기록을 세웠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입은 심각한 무릎 부상으로 인해 일찍이 선수 생활을 마감해야 했으나, 은퇴 후에도 카이저슬라우테른 시에서 공무를 수행하는 등 사회 활동을 이어갔다. 그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2004년에는 독일 연방 공로 훈장을 수훈했으며, 프리츠 발터 슈타디온의 북쪽 스탠드 입구가 '오트마어 발터 문'으로 명명되었다.
2. 생애
2.1. 출생 및 가족 배경
오트마어 발터는 1924년 3월 6일 카이저슬라우테른에서 태어났다. 그는 유명한 축구 선수이자 친형인 프리츠 발터와 또 다른 형인 루트비히 발터를 두었다. 발터 삼형제는 모두 고향의 축구 클럽인 1. FC 카이저슬라우테른에 입단하여 함께 활약했다.
2.2. 초기 경력
오트마어 발터는 1942년 18세의 나이로 1. FC 카이저슬라우테른 1군에 데뷔했으며, 당시 SV 발트호프 만하임과의 경기에서 7대 1로 크게 이긴 경기에서 최우측 공격수로 출전했다. 데뷔 후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전쟁해군에 징집되어 킬로 발령받았고, 이 기간 동안 홀슈타인 킬에서도 잠시 선수로 뛰었다.
3. 축구 경력
3.1. 클럽 경력
오트마어 발터는 1941년부터 1956년까지 1. FC 카이저슬라우테른에서 활약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321번의 리그 및 컵 경기에 출전하여 336골을 기록하며 구단 역사상 최다 득점 기록을 세웠다. 1940년대 후반에는 1. FC 카이저슬라우테른의 중앙 공격수로 자리매김했다.
3.2. 국가대표팀 경력
오트마어 발터는 1950년부터 1956년까지 서독 국가대표팀에서 활약했다. 그는 총 20번 또는 21번의 국제 A매치에 출전하여 10골을 기록했다. 특히 1954년 FIFA 월드컵에서는 서독 대표팀의 핵심 선수로 활약하며 4골을 기록했고, 이는 서독이 사상 첫 월드컵 우승을 차지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그는 이 대회에서 형 프리츠 발터와 함께 팀의 주축을 이루었다.
3.3. 선수 시절 특징
오트마어 발터는 주로 중앙 공격수로 뛰었으나, 경기 중 측면으로 자주 움직이며 다양한 공격 기회를 창출했다. 그는 형 프리츠 발터와 마찬가지로 공을 우아하게 다루는 기술과 빠른 발을 지녔으며, 강력한 슈팅 능력 또한 그의 강점 중 하나였다. 이러한 기술적 강점과 유연한 플레이 스타일은 그를 당대 최고의 공격수 중 한 명으로 만들었다.
4. 제2차 세계 대전과 부상

오트마어 발터의 축구 경력은 제2차 세계 대전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그는 전쟁 중 전쟁해군에 징집되어 복무했으며, 이 과정에서 오른쪽 무릎에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이 부상은 그의 선수 생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여러 차례의 수술에도 불구하고 부상의 후유증은 지속되었고, 결국 그는 1956년 32세의 나이에 또는 1958년에 현역에서 은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 부상으로 인해 그의 잠재력이 완전히 발휘되지 못했다는 평가도 있다.
5. 은퇴 후 활동
5.1. 사업 및 개인적 어려움
선수 생활을 마친 후, 오트마어 발터는 1954년부터 임대하여 운영하던 주유소 경영에 집중했다. 그러나 1969년, 그는 계약서에 명시된 미세한 조항을 미처 확인하지 못해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이 조항은 계약이 해지될 경우 주유소와 그 부지 내의 모든 물품이 새로운 임차인에게 양도된다는 내용이었다. 이로 인해 재정적 어려움에 처한 발터는 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는 훗날 이 시도를 "충격 상황에서의 충동적 행동" 또는 "공황 반응"이었다고 회고했다.
5.2. 사회 활동
개인적인 어려움을 극복한 후, 오트마어 발터는 카이저슬라우테른 시의 공무원으로 취직하여 사회 활동을 이어갔다. 그는 시 공무원으로서 지역 사회에 기여하며 새로운 삶을 살았다.
6. 수상 및 명예
오트마어 발터는 독일 축구와 사회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여러 영예를 안았다. 2004년 3월 6일, 그의 80번째 생일에 그는 독일 연방 공로 훈장을 수훈했다. 같은 날, 그의 형 프리츠 발터의 이름을 딴 프리츠 발터 슈타디온의 북쪽 스탠드 입구가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공식적으로 "오트마어 발터 문"으로 개칭되었다. 이는 그의 고향 카이저슬라우테른과 독일 축구계에서 그가 차지하는 중요한 위상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명예이다.
7. 사망
오트마어 발터는 2013년 6월 16일, 향년 8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사망 소식은 독일 축구계와 전 세계 축구 팬들에게 큰 슬픔을 안겼다.
8. 영향 및 평가
오트마어 발터는 1954년 베른의 기적의 주역 중 한 명으로서 독일 축구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형 프리츠 발터와 함께 전후 독일 축구의 재건과 국가적 자부심 회복에 크게 기여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의 강인한 정신력과 끊임없는 노력, 그리고 경기장에서 보여준 뛰어난 기량은 후대 선수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또한, 선수 생활 은퇴 후 겪었던 개인적인 고난과 이를 극복하고 사회에 다시 기여한 그의 삶은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그는 단순한 축구 선수를 넘어, 독일 사회의 격동기를 함께하며 희망을 불어넣었던 상징적인 존재로 기억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