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유년기 및 선수 생활 초기
오쿠데라 야스히코는 일본 아키타현 가즈노시 도와다 오유(구 가즈노군 도와다정)에서 태어났다. 그에게는 이란성 쌍둥이 여동생이 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가족과 함께 요코하마시로 이사했다.
1.1. 출생과 성장
오쿠데라는 요코하마 시립 히가시토쓰카 초등학교를 거쳐 요코하마 시립 마이오카 중학교에서 축구를 시작했다. 이후 쇼난 공과대학 부속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축구 선수로서의 기량을 다졌다.
1.2. 후루카와 전공 시절
고등학교 졸업 후 1970년, 오쿠데라는 중학교 시절 외부 코치였던 도호 티타늄 축구부의 미무라 가쓰카즈 감독의 추천과 후루카와 전공 OB이자 일본 축구 협회의 강화 책임자였던 나가누마 켄의 도움으로 일본 사커 리그의 후루카와 전공 축구부에 입단했다. 1976년에는 후루카와 전공이 브라질에 공장을 가지고 있던 인연으로 브라질 파우메이라스에 2개월간 유학하며 급성장했다.
그해 그는 무르데카컵에서 7골을 기록하며 득점왕에 올랐고, 천황배 결승전에서 얀마 디젤을 꺾고 우승하는 데 기여했다. 또한 일본 사커 리그에서도 팀 내 최다 득점인 8골을 기록하며 리그 우승에 크게 공헌했고, 개인적으로는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이로써 후루카와 전공은 1976년에 리그와 천황배에서 모두 우승하며 2관왕을 달성했다. 1977년 5월에는 JSL컵에서도 우승을 차지했다.
2. 유럽 리그 경력
오쿠데라 야스히코는 일본인 선수로서 최초로 독일 분데스리가에 진출하여 활약하며 일본 축구사에 한 획을 그었다.
2.1. 독일 이적 배경과 의의
1977년 여름, 일본 국가대표팀이 서독에서 분산 합숙 훈련을 진행할 당시, 당시 일본 대표팀의 니노미야 히로시 감독은 분데스리가의 1. FC 쾰른 감독인 헤네스 바이스바일러와 친분이 있었다. 이를 계기로 오쿠데라와 니시노 아키라, 가네다 요시토시 등이 쾰른 훈련에 참가하게 되었다. 당시 쾰른은 스피드 있는 왼쪽 윙어를 찾고 있었고, 바이스바일러 감독은 오쿠데라에게 관심을 보였다. 사실상의 입단 테스트였던 훈련이 끝난 후, 귀국 3일 전에 쾰른으로부터 영입 제안을 받았다. 오쿠데라는 독일어에 대한 불안감으로 처음에는 제안을 거절했지만, 바이스바일러 감독의 강력한 희망과 함께 후루카와 전공의 전 감독이었던 가와부치 사부로, 가마타 미쓰오 감독, 일본 축구 협회, 그리고 니노미야 대표팀 감독까지 모두가 이적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면서 독일행을 결심했다. 당시에는 유럽 내 선수들조차 다른 유럽 클럽으로 이적할 경우 국가대표팀에 차출되기 어려운 상황이었고, 경기마다 유럽과 일본을 오가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던 시대였기 때문에 유럽 이적은 사실상 국가대표팀 차출 가능성이 없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큰 결단이었다.
2.2. 1. FC 쾰른 시절
1977년 10월 서독으로 건너간 오쿠데라는 10월 7일 1. FC 쾰른과 정식 계약을 맺고 입단했다. 10월 12일에는 분데스리가 경기에서 벤치에 이름을 올렸고, 10월 22일 뒤스부르크와의 경기에서 선발 출전하며 분데스리가 데뷔전을 치렀다. 이 데뷔전에서 그는 경기 시작 30초 만에 상대에게 페널티킥을 내주며 팀이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는 혹평을 받았다. 이후에도 팀 동료들의 신뢰를 얻는 데 어려움을 겪었으나, 12월 20일 열린 독일컵 8강 슈바르츠바이스 에센과의 경기에서 데뷔골을 포함해 2골 2도움을 기록하며 맹활약한 후 팀 동료들의 신뢰를 얻기 시작했다. 1978년 4월 8일에는 1. FC 카이저슬라우테른전에서 분데스리가 데뷔골을 기록했다. 바이스바일러 감독의 지휘 아래 1977-78 시즌 리그 우승과 독일컵 우승을 동시에 달성하며 2관왕에 기여했다. 특히 장크트파울리와의 우승 확정 경기에서는 교체 투입되어 2골을 터뜨리기도 했다.
이듬해 1978-79 시즌 유러피언컵에서는 준결승에 진출했으며, 이 경기는 사실상의 결승전으로 여겨졌다. 잉글랜드의 노팅엄 포레스트를 상대로 원정 1차전에서 교체 투입된 지 불과 몇 분 만에 귀중한 동점골을 터뜨려 3대3 무승부를 이끌었다. 이는 아시아인 선수로는 유러피언컵 역사상 최초의 득점이었다. 그러나 홈에서 열린 2차전에서 0대1로 패배하며 유럽 정상 등극에는 실패했다.
1980년 바이스바일러 감독이 미국 NASL의 뉴욕 코스모스로 이적하자, 후임 감독인 카를하인츠 헤다곳의 구상에서 제외되었다. 이후 리누스 미헬스가 감독으로 부임했음에도 출전 기회가 전혀 늘지 않아, 출전 시간을 찾아 1980-81 시즌 후반기 분데스리가 2부 소속의 헤르타 BSC로 이적했다.
2.3. 헤르타 BSC 및 베르더 브레멘 시절
헤르타 BSC는 1부 리그 승격을 노렸으나 최종적으로 실패했다. 오쿠데라는 헤르타에서 풀백으로 기용되며 활약했다. 그 시즌 헤르타와 경쟁하여 1부 리그 승격을 확정한 베르더 브레멘의 오토 레하겔 감독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고, 이듬해 1981-82 시즌부터 베르더 브레멘으로 이적했다.
오쿠데라는 윙어로서 분데스리가에 진출했으나, 레하겔 감독은 그의 수비형 미드필더로서의 능력에 주목하여 주로 사이드백으로 기용했다. (때로는 공격수 포지션에서도 기용되었다.) 1982년에는 뉴욕에서 열린 FIFA 선발팀(FIFA 올스타)의 일원으로 지쿠, 파올로 로시 등과 함께 뉴욕 코스모스와 경기를 치렀다. 이러한 세계 선발팀 멤버로 선출된 일본인 선수는 가마모토 구니시게에 이어 두 번째였다.
같은 해 브레멘은 리그 5위라는 좋은 성적을 거두었고, 이듬해인 1983년에는 함부르크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1984년 5위, 1985년 다시 2위를 기록하는 등 우승은 하지 못했지만 꾸준히 좋은 성적을 유지했다. 오쿠데라는 팀 내에서 가장 꾸준한 선수로 감독의 신뢰를 받았으며 팬들로부터 사랑받았다. 1985-86 시즌, 3월 15일 프랑크푸르트전에서 기록한 골은 서독에서의 마지막 골이 되었다. 시즌 마지막 경기를 앞두고 2위인 바이에른 뮌헨과의 직접 대결에서 승리하면 우승할 수 있는 상황이었으나, 경기 중 얻은 페널티킥을 미하엘 쿠초프가 실축하며 패배했다. 그럼에도 팀은 최종전까지 2점 차 선두를 달렸지만, 최종전에서 슈투트가르트에 패하며 승점에서 바이에른과 동률을 이루었으나 골득실차로 2위에 머물러 두 번째 분데스리가 우승을 놓쳤다.
그는 분데스리가에서 총 9년간 활약했다. 63경기 연속 출장 기록을 세우는 등, 귀국 전까지 9년간 분데스리가 통산 234경기 출장, 26골을 기록했다. 이 통산 26골 기록은 2014년 9월 13일 마인츠의 오카자키 신지가 28골을 기록하기 전까지 분데스리가 일본인 선수 최다 득점 기록이었다. 또한 통산 234경기 출장 기록 역시 2017년 3월 5일 하세베 마코토가 경신하기 전까지 분데스리가 일본인 선수 최다 출장 기록이었다.
3. 일본 복귀 및 은퇴
유럽에서의 성공적인 선수 생활을 마친 오쿠데라는 일본으로 돌아와 선수 경력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3.1. 후루카와 전공 재입단
1986년 여름, 오쿠데라는 "아직 선수로서 기량이 쇠퇴하기 전에" 자신의 모든 경험을 일본 축구계에 전하고 싶다는 바람으로 베르더 브레멘의 계약 연장 제안을 고사했다. 그는 키린컵에서 브레멘 선수 자격으로 출전하여 일본 대표팀과 맞붙었으며, 파우메이라스전에서는 훗날 요코하마 FC에서 회장과 선수의 관계가 될 미우라 가즈요시와 여러 차례 격렬하게 맞섰다. 이 대회를 마지막으로 그는 친정팀인 후루카와 전공으로 복귀했다.
귀국한 오쿠데라는 기무라 가즈시와 함께 일본 최초의 스페셜 라이센스 플레이어 계약을 맺으며 주목받았다. 당시 그의 연봉은 4000 JPY에 달하는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그 해 아시아 클럽 챔피언십 결승전에서는 알힐랄을 상대로 3골을 터뜨리는 등 맹활약하며 팀의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서독에서 뛰는 동안에는 대표팀에 선발되지 못했지만, 후루카와 전공 복귀와 함께 일본 대표팀에도 복귀하여 1987년 서울 올림픽 아시아 최종 예선 진출에 공헌했다. 최종적으로 중국과의 대결에서 1차전에서는 왼쪽 풀백으로서 상대 에이스를 완벽하게 봉쇄하며 1대0 승리를 이끌었다. 그러나 홈에서 열린 2차전에서는 무승부만 거둬도 올림픽 출전권을 획득할 수 있었지만, 오쿠데라의 반대쪽 측면이 수비의 약점으로 노출되며 0대2로 패배하여 서울 올림픽 출전은 좌절되었다.
3.2. 국가대표팀 경력
오쿠데라는 1972년 7월 12일 크메르와의 경기에서 일본 국가대표팀에 데뷔했다. 그는 1976년 AFC 아시안컵 예선과 1978년 FIFA 월드컵 예선에 참가하며 1977년까지 대표팀에서 활약했다. 독일에서 선수 생활을 하는 동안인 1977년부터 1986년까지는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지 못했다. 1986년 9월, 34세의 나이로 일본에 복귀한 그는 1986년 아시안 게임 대표팀에 발탁되었다. 1987년에는 1988년 서울 올림픽 예선에도 출전했는데, 이 경기가 그의 마지막 국가대표팀 경기였다. 그는 1987년까지 일본 국가대표팀에서 32경기에 출전하여 9골을 기록했다.
3.3. 선수 생활 은퇴
오쿠데라 야스히코는 1987-88 시즌을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그의 공식 은퇴 경기는 1988년 8월 12일 나폴리와의 친선 경기로, 이 경기에서 선발 출전하여 23분간 뛰었다. 당시 그는 일본 축구계의 최대 스타였으며, 인기 TV 프로그램인 '비트 다케시의 스포츠 대장'에도 출연하는 등 대중적 인기를 누렸다.
4. 은퇴 후 활동
선수 생활 은퇴 후 오쿠데라 야스히코는 감독, 구단 경영자, 축구 행정가로서 일본 축구 발전에 지속적으로 기여했다.
4.1. 감독 및 경영자 활동
선수 은퇴 후 오쿠데라는 축구 해설가 활동과 함께 잠시 동안 오쿠데라 야스히코 축구 학교에서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지도했다.
1991년 6월 11일, J리그 출범을 앞두고 후루카와 전공이 '히가시니혼 JR 후루카와 축구 클럽'(훗날 제프 유나이티드 이치하라의 전신)으로 명칭을 변경하면서 그는 GM으로 취임했다. 1996년에는 감독으로 취임했으나, 성적 부진으로 한 시즌 만에 물러났다.
1999년에는 요코하마 플뤼겔스 서포터들이 주축이 되어 결성한 '요코하마 프리에 스포츠 클럽'(横浜フリエスポーツクラブ일본어)(요코하마 FC)의 GM으로 취임했다. 2000년부터는 대표이사 사장을 겸임했다. 오쿠데라가 구단 대표, 그의 쾰른 팀 동료였던 피에르 리트바르스키가 감독을 맡으면서 요코하마 FC는 하부 리그인 일본 풋볼 리그에서부터 승격하여 2006년 12월 J1리그로 진출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2008년 6월 20일, 그는 잉글랜드 풋볼 리그 챔피언십 소속의 플리머스 아가일의 대표이사로 임명되어 구단의 아시아 내 프로필을 강화하고 글로벌 홍보대사 역할을 수행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이후 플리머스 아가일은 강등과 심각한 재정난을 겪게 되었다. 오쿠데라는 구단의 청산을 막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팬 트러스트 리더인 크리스 웹으로 교체되었다.
2017년 10월, 나카타 히토시 감독이 해임되면서 감독 공석이 된 요코하마 FC의 임시 감독을 맡아 38라운드 FC 마치다 젤비아전에서 팀을 지휘했다. 2022년 2월 1일부터는 요코하마 FC 스포츠 클럽의 대표이사 겸 시니어 어드바이저를 맡고 있다.
4.2. 일본 축구계에 대한 공헌
오쿠데라의 일본 복귀는 수십 년간 아마추어 플레이에 머물러 있던 일본 축구의 프로화를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일본 리그에서 순수 일본인으로는 처음으로 프로 선수로 인정받은 인물이었다. (이전에는 주로 브라질인 외국인 선수들만 기업으로부터 축구만을 위해 급여를 받았다.) 그는 1986-87 시즌 일본 사커 리그의 공식 포스터 모델로 출연했는데, 당시 포스터에는 "샐러리맨 축구 시대는 끝났다"(サラリーマンサッカーの時代は終わった)라는 문구가 삽입되어 일본 축구의 프로화 전환을 상징하기도 했다.
또한, 1999년 요코하마 플뤼겔스 해체 후 서포터들의 자발적인 움직임으로 창단된 시민구단 요코하마 FC의 GM을 맡아 팀의 창단과 성장에 기여하는 등 일본 축구의 현대화 및 발전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4.3. 명예의 전당 헌액 및 표창
오쿠데라 야스히코는 일본 축구계와 아시아 축구계에서 그의 공로를 인정받아 여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고 표창을 받았다. 2012년 8월에는 일본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으며, 2014년 11월에는 AFC가 선정한 초대 아시아 축구 명예의 전당 10인 중 한 명으로 이름을 올렸다. 2021년에는 IFFHS 선정 IFFHS 아시아 남자 역대 팀에 포함되는 영예를 안았다.
5. 플레이 스타일과 영향
오쿠데라 야스히코는 다재다능한 플레이 스타일과 선구자적인 업적으로 일본 축구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5.1. 선수로서의 특징
오쿠데라는 포워드 (왼쪽 윙어, 중앙 공격수), 미드필더 (왼쪽 수비형 미드필더, 왼쪽 윙백, 오른쪽 윙백, 수비형 미드필더), 수비수 (왼쪽 수비수) 등 다양한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는 만능형 선수였다. 그는 강력한 왼발 슛과 빠른 스피드를 주무기로 삼았으며, 정확한 크로스, 뛰어난 활동량, 안정적인 패스와 슈팅, 그리고 탁월한 전술 이해도를 바탕으로 한 플레이 스타일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특성 덕분에 독일 현지 팬들로부터 '동양의 컴퓨터'('東洋のコンピューター')라는 별명을 얻으며 높은 평가를 받았다.
5.2. 선구자적 역할 및 파급 효과
오쿠데라는 1970년대 당시 해외에서 뛰는 일본인 선수가 전무했던 상황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리그로 평가받던 독일 분데스리가(1976년부터 1984년까지 UEFA 리그 랭킹 1위)에 진출하여 주전으로 9년간 활약하며 성공을 거둔 최초의 일본인 선수이다.
그는 UEFA 주최 국제 대회에 6회 출전하여 오노 신지에게 기록이 깨지기 전까지 아시아인 최다 출전 기록을 보유했다. 특히 1978-79 시즌 유러피언컵에서 아시아인 선수로는 대회 역사상 최초의 골을 기록했다. 그의 득점 이후 16년이 지난 1994-95 시즌 라시드 라히모프(Рашид Раҳимов라시드 라히모프타지크어)가 득점하기 전까지 오쿠데라 외의 아시아인 득점자는 나오지 않았다.
오쿠데라는 일반적으로 '일본인 최초의 프로 축구 선수'로 알려져 있지만, 일부 미디어에서는 1975년 홍콩의 '이스트번 AA'에서 뛰었던 사다 시게리(사다 마사시의 친동생)가 일본인 최초의 프로 축구 선수라는 이설도 제기된다. 다만 사다의 계약이 정식 프로 계약이 아니었다는 설도 있어, 이 경우 오쿠데라가 일본 최초가 된다. 이러한 논쟁 때문에 WOWOW에서는 축구 해설 시 그를 '유럽에서 뛴 일본인 프로 1호'로 소개하기도 한다.
6. 수상 및 업적
오쿠데라 야스히코는 선수 및 감독으로서 다음과 같은 주요 클럽 및 개인 수상 기록을 달성했다.
- 후루카와 전공
- 일본 사커 리그 우승: 1976
- 천황배 우승: 1976
- 일본 슈퍼컵 우승: 1977
- 아시아 클럽 챔피언십 우승: 1986-87
- 1. FC 쾰른
- 유러피언컵 준결승: 1978-79
- 분데스리가 우승: 1977-78
- DFB-포칼 우승: 1977-78; 준우승: 1979-80
- 베르더 브레멘
- 분데스리가 준우승: 1982-83, 1984-85, 1985-86
- 일본 국가대표팀
- 무르데카컵 준우승: 1976
- 개인
- 일본 사커 리그 베스트 일레븐: 1976, 1986-87
- 무르데카컵 득점왕: 1976
- JSL 올스타전 최우수 선수상(MVP): 1986
- 일본 축구 명예의 전당: 2012
- 아시아 축구 명예의 전당: 2014
- IFFHS 아시아 남자 역대 팀: 2021
7. 통계
오쿠데라 야스히코의 선수 및 감독으로서의 공식 경기 출전 및 득점 기록, 그리고 감독으로서의 팀 성적은 다음과 같다.
7.1. 클럽 기록
클럽 | 시즌 | 리그 | 내셔널컵 | 리그컵 | 대륙 대회 | 합계 | ||||||
---|---|---|---|---|---|---|---|---|---|---|---|---|
디비전 | 출전 | 득점 | 출전 | 득점 | 출전 | 득점 | 출전 | 득점 | 출전 | 득점 | ||
후루카와 전공 | 1970 | JSL 1부 | 7 | 3 | ||||||||
1971 | 9 | 5 | ||||||||||
1972 | 8 | 0 | ||||||||||
1973 | 18 | 6 | 1 | 0 | ||||||||
1974 | 18 | 5 | ||||||||||
1975 | 18 | 9 | 2 | 0 | ||||||||
1976 | 18 | 8 | 8 | 2 | 0 | |||||||
1977 | 4 | 0 | 2 | |||||||||
합계 | 100 | 36 | 100 | 36 | ||||||||
1. FC 쾰른 | 1977-78 | 분데스리가 | 20 | 4 | 4 | 2 | 24 | 6 | ||||
1978-79 | 24 | 5 | 3 | 1 | 2 | 1 | 29 | 7 | ||||
1979-80 | 30 | 6 | 8 | 1 | 38 | 7 | ||||||
1980-81 | 1 | 0 | 1 | 0 | 1 | 1 | 3 | 1 | ||||
합계 | 75 | 15 | 16 | 4 | 3 | 2 | 94 | 21 | ||||
헤르타 BSC | 1980-81 | 2. 분데스리가 | 25 | 8 | 4 | 0 | 29 | 8 | ||||
베르더 브레멘 | 1981-82 | 분데스리가 | 30 | 2 | 4 | 0 | 34 | 2 | ||||
1982-83 | 34 | 4 | 2 | 0 | 6 | 1 | 42 | 5 | ||||
1983-84 | 29 | 1 | 4 | 0 | 4 | 0 | 37 | 1 | ||||
1984-85 | 33 | 3 | 4 | 0 | 2 | 0 | 39 | 3 | ||||
1985-86 | 33 | 1 | 3 | 0 | 2 | 0 | 38 | 1 | ||||
합계 | 159 | 11 | 17 | 0 | 14 | 1 | 190 | 12 | ||||
후루카와 전공 | 1986-87 | JSL 1부 | 21 | 2 | 0 | 0 | 21 | 2 | ||||
1987-88 | 22 | 1 | 2 | 0 | 3 | 0 | 27 | 1 | ||||
합계 | 43 | 3 | 2 | 0 | 3 | 0 | 48 | 4 | ||||
커리어 총합 | 402 | 73 | 37 | 4 | 2 | 0 | 20 | 3 | 461 | 80 |
7.2. 국가대표팀 기록
국가대표팀 | 연도 | 출전 | 득점 |
---|---|---|---|
일본 | 1972 | 6 | 1 |
1973 | 0 | 0 | |
1974 | 0 | 0 | |
1975 | 5 | 0 | |
1976 | 8 | 7 | |
1977 | 4 | 0 | |
1978 | 0 | 0 | |
1979 | 0 | 0 | |
1980 | 0 | 0 | |
1981 | 0 | 0 | |
1982 | 0 | 0 | |
1983 | 0 | 0 | |
1984 | 0 | 0 | |
1985 | 0 | 0 | |
1986 | 4 | 0 | |
1987 | 5 | 1 | |
총합 | 32 | 9 |
7.3. 감독 기록
팀 | 취임 | 사임 | 기록 | ||||
---|---|---|---|---|---|---|---|
경기 | 승 | 무 | 패 | 승률 | |||
제프 유나이티드 이치하라 | 1996 | 1996 | 30 | 13 | 0 | 17 | 43.3% |
요코하마 FC | 2017 | 2017 | 1 | 0 | 1 | 0 | 0.0% |
총합 | 31 | 13 | 1 | 17 | 41.9% |
- 2017년 기록은 38라운드 한 경기만 포함. 순위는 38라운드 종료 시점 기준.
8. 여담 및 일화
- 오쿠데라가 베르더 브레멘에 재적 중이던 1980년대, 그는 프리마햄의 스포츠 어드바이저로 계약했다. 서독에서 선수 생활을 한 점을 활용하여, 아내와 함께 프리마햄 제품 '숙성 로스햄'의 텔레비전 광고에 출연하기도 했다.
- 제22회 일본 사커 리그의 공식 포스터 모델로 출연했는데, 당시 포스터에는 "샐러리맨 축구의 시대는 끝났다"(サラリーマンサッカーの時代は終わった)라는 문구가 삽입되어 일본 축구의 프로화 전환을 상징했다.
- 유명 축구 만화 『캡틴 츠바사』 37권 77페이지에 일본 대표팀 감독으로 실명 등장했다. 츠바사가 자신의 실력을 시험하기 위해 오쿠데라에게 1대1 승부를 걸었지만, 츠바사는 오쿠데라를 제칠 수 없었다. 이는 가공의 이야기이지만, 츠바사의 드리블을 막아낸 몇 안 되는 등장인물 중 하나이다.
- 2003년 12월 5일, 독일에서 열린 2006년 FIFA 월드컵 예선 조 추첨식에서 차범근과 함께 아시아 대표로 추첨 보조원으로 선정되었다. 원래는 가마모토 구니시게가 AFC의 추천을 받았으나, 개최국 독일과의 관계가 깊은 오쿠데라가 최종적으로 선정되었다.